흔히 ‘인사동 사람들’이라고 얘기한다. 

‘인사동 사람들’이란 누구를 말하는 걸까? 인사동에서 사는 사람들? 아니면 인사동이 삶의 터전인 
사람들? 그렇게 말하기에는 무언가 2%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인사동의 빛깔을 지닌 사람들’이 보다 가까울 것 같다. 
인사동에서 산다고, 그리고 인사동을 터전으로 삶을 살아간다고 다 인사동의 빛깔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사동에서 살고, 놀고, 일하면서 인사동만의 어떤 분위기가 체취로 우러나오는 사람들이 그들이
다.  
그들의 분위기를 빛깔로 친다면 무어라고 해야 할까? 가까이서 그들, 진짜배기 인사동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에게서 회색빛, 그중에도 연한 회색빛을 느낀다. 
연한 회색의 승복에 감추어진 도통함의 이미지라 할까? 하루 중에는 저녁 어스름의 기운을 그들에
게서 느낀다. 
그들은 새벽의 정신 번쩍 나는 차가운 분위기가 아니다. 
저녁, 많은 일상인들이 자신들의 하루를 접으려 할 때쯤, 인사동 사람들은 활기가 돌며 생생해진
다. 
인생에서도 마찬가지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일을 접을 때쯤 인사동 사람들은 그때까지 
해 왔던 자기들의 일로 더욱 신명이 나고 바빠진다. 
그래서인가, 지금까지는 특별하지 않았던 그들이 저녁 어스름에 비로소 빛나기 시작한다. 
하루의 저녁쯤에, 인생의 저녁 무렵에 그들의 진가가 드러난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흐를수록 빛나는 게 진짜배기다. 
그렇게 오래 동안 숙성해온 시간들이 비로소 빛으로 나타나는 그런 체취를 가진 사람들, 
그 사람들이 인사동 사람들이다. 그들에게서 연한 회색의 멋을 느낀 
다.                                                                         

 
이정숙(문학평론가)







세상을 사는 데는

그렇게 많은 지식이 필요 없는 법이라고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 없는 법이라고

그렇게 많은 행동이 필요 없는 법이라고



몸을 저승에 보내고도

인사동에서만 맴돈다.

출세한 친구도 인사동에서만 보고

미국 가는 친구도 인사동에 앉아 배웅했듯

그의 죽음 서러워하는 인사도

인사동에 앉아서 받는다.



세상을 떠나서도

가진 것이 없을수록 좋더라면서

움직임이 적을수록 좋더라면서





신경림(시인)


인사동은 이제 인사동이 아니게 되고 말았다.

인사동이 언제부터 이름이 나서 특히 외국 관광객들의 관광 코스에 들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인사동이 한국 또는 서울의 얼굴 노릇을 해 주는 곳이라는 생각에서일 것이다. 한국의 냄새로 해서 한국인의 체취가 느껴지고, 서울의 분위기가 남아 있는 곳, 그래서 한국을 느끼고 서울을 보려면 이 동네를 걸어봐라, 하는 뜻일 것이다.

옛날에는 그랬다. 납작한 기와지붕을 쓴 자그마한 상점들이 가지런히 늘어선 모습은 서울의 전형적인 길거리 풍경이었다. 꼬불꼬불 미로처럼 얽힌 좁은 골목들은 그대로 서울의 숨결이기도 했다.

그 인사동은 지금 너무나 바뀌어 버렸다. 그것도 좀 속되게 변해서 이제는 장삿속에 닳고 닳은, 민속의 탈을 쓴 싸구려 장터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거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납작한 기와지붕이 사라지고 시멘트 빌딩들이 한옥들을 내쫓고 들어앉으면서 인사동은 이제 이름만 남고 말았다. 인사동뿐일까. 건너편 교동이 그렇고 재동, 계동, 가회동이 다 사라지고 말았으니 인사동이 인사불성이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한 가지 신통한 것이 있다. 인사동 골목에 양식집이 보이는 것 같지가 않다, 아직은. 그러고 보면 일식집도 안 보인다. 인사동 북쪽 입구 근처에 무슨 솥밥 집이 간판부터가 일본 냄새를 풍기기는 해도 그것을 일식집이라기엔 좀 뭣하고, 대부분의 밥집이 대개는 ‘한정식’이다. 그것이 기특한 것은 내 이름을 내걸어서가 아니다. 그런 면이 그래도 인사동의 얄팍한 변명은 되어 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이다.

그러나 그보다 인사동이 아직 인사동으로 남아 있는 것은 그 인사동 뒷골목 속에 들어박힌 ‘인사동 사람들’로 해서일 것이다. 납작한 인사동 지붕 밑에서 인사동의 기억을 소주잔에 부어 마시며 인사동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은 이 골목 저 골목에 콩깍지 속 콩알처럼 박혀 있어서 인사동이 아직은 인사동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옛 시인의 한탄은 바뀌어야 할 것 같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가 아닌 것이다. 인사동에 한한 한 “인걸은 의구하되 산천은 간 데 없네.”가 되고 말았다.

하나가 더 있다. 막힐 듯 뚫리고, 숨을 듯 다시 나타나는 골목길. 외틀어지고 비틀어진 우리 소나무처럼 구불구불 휘이고 꺾인 골목길. 엇갈릴 때엔 어쩔 수 없이 어깨를 부딪고 지나야 하고 마주 오는 사람의 입김을 얼굴로 받아야 하는 좁은 골목길. 이런 골목길은 그대로 서울의 얼굴이기도 했다. 그런 골목이 인사동 사람들과 함께 아직은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역시 산천은 의구한 것인지.

그 인사동 사람들을 인사동 사진가 조 문호가 찍어 이번에 사진집으로 엮어 낸다. 이름만 대면 대개는 알 만한 문화계 인사가 중심이 된 사진집으로 알고 있다.

인사동은 그래도 아직은 우리의 문화이다. ‘인사동’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그런 것을 껴안고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인사동 사람들’이고 아직 남아 있는 인사동 문화인 것이다. 그 인사동 문화를 일단 정리해 본 것이 이 사진집이다.

사진가 조 문호의 이미지는 사실 인사동과는 거리가 조금 있어 보인다. 그의 풍모는 적막한 멕시코 뒷골목이나 담배 연기 자욱한 쿠바의 선술집에 더 잘 어울리는 그런 그림인데, 그런 그가 인사동을 떠나지 못한다. 인사동 골목 어느 구석에 그를 잡아 묶고 떠나지 못하게 하는 어떤 매력이 있어서일까.

조 문호, 그 이름과 달리 문호가 아니라 사진가이지만, 사람 좋은 조 문호 곁에는 많은 사람들이 꼬인다. 그의 어떤 전시 첫날, 천정 낮은 밥집에 모인 면면들은 사진 쪽 사람들은 물론, 미술이나 문학 쪽 사람들도 퍽 많았다. 그의 흡인력이 보였다. 동시에 바로 그들이 조 문호를 인사동에 가두어 놓은 울타리였구나, 느껴졌다.

‘인사동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의 사진집이다. 조 문호를 좋아해 조 문호 곁을 떠나지 못하고, 조 문호 역시 그 따뜻한 품을 잊지 못해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인사동을 인사동이게 하는 인사동 인사들.

그 인사동이 언제까지 남아있을지 궁금하다.

인사동이 바뀌면 인사동 사람들도 떠나고, 박 인환이 명동을 떠나듯 조문호도 떠날 것이다. 이 사진집이 홀로 남아 펼칠 때마다 사람들의 마음을 가을비처럼 축축이 적실 것이고....


한 정 식(사진가, 중앙대 명예교수)





모처럼의 인사동 나들이었습니다.

거리는 여전히 사람들로 붐볐으나 화랑엔 관객이 없다는 싸늘한 문화예술의 불가 메카지역.‘이화갤러리에서 처음 만난 재미 작가 안동국 화백은 우연한 만남이지만 너무 친근하고, 그림 전반에 흐르는 에너지가 대단했습니다.
금방이라도 큰 전시장에 황룡이 출몰할 듯, 바다 속 깊숙한 환타지의 세계로 인도했습니다.

미국 라트거스 대학교 ‘짐머리 미술관’ 수석 큐레이트 제프리 웨스트는, ‘안동국이 선보인 회화 연작은 보는이로 하여금 흥분에 빠져들게 한다. 거의 모든 회화들이 엄청난 속도와 우연성으로 표면 위를 질주하는 빠른 붓질의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문득 한국 옹기 기법인 수화문이 생각납니다. 마치 신들린 무당이 손을 들어 빠른 손동작으로 깃대를 휘돌리는 것 같았습니다.
옹기기법 지두문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바로 건너편 화랑 ‘갤러리 31’에서는 재미 뉴욕, 민화작가 이수자님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고향에 대한 갈증을 느끼며 ‘미국에서 민화를 제작하는 일은 일종의 한국문화의 확인이었다’고 말합니다. 처음엔 서예로 시작했고, 요즘 불붙은 코리아 환타지아는 민화에 대한 믿음에 빠져듭니다. 화려한 한국의 오방색과 넘치는 듯한 자유분방함에 전시장은 오랫동안 묵직했습니다.





김용문 (도예가)


인사동과 나 사이는 오래 묵은 된장입니다.
그가 내 속에 들어와, 아니 내가 그 속으로 파고들어 정 주고 받는 맛을 들인 지가 벌써 스물다섯 해를 넘겼거든요.
그동안 많은 인사동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더러 꽃시샘 바람으로 구차하고, 또 더러는 아침 우물가 감나무 가지 끝에 앉아
우짖는 까막까치의 울음처럼 꼭두서니 빛으로 반짝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이 풍류세상에서 빛나고, 또 예술세계에서 깊이 묻히거나 아주 저물다가 소식이 가물거릴 때마다 그들을 그리워하는
내 추억의 마음 한 자리에는 이야기가 되고 시가 된 사연들이 장독대에 내려앉는 함박눈처럼 차곡 차곡 쌓여갔습니다.
그 눈들을 맨손으로 ‘쓰윽’ 쓸어봅니다.
아주 잠깐 손끝이 시려올 뿐, 차가운 듯하면서도 따사한 기운이 손바닥을 부드럽게 감싸옵니다. 인사동과 내가 정분이 난 거지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사랑이 이런 건가요.
만질 수 없는 그리움까지, 눈썹 밑에 살풋 밟혀옵니다.
그 그리움과 정분에 철없이 온몸 들썩이다가 ‘인사동 블루스’라는 춤을 추기 시작했지요.







박인식 (소설가)







인사동은 고향 같은 곳이다. 사람이 살다 지치면, 외롭고 피폐해지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게 고향이다. 그곳엔 그가 태어나 자란 골목들이 있고, 머리 허옇고 허리 꾸부정 하지만 아직 살아숨쉬고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 이웃들이 남아 있게 마련이다.

인사동은 여러 사람들에게 고향같은 그리움을 안겨 주고 있는 곳이다. 따뜻함을 던져 주고 있는 곳이다. 번다한 서울 거리에서 인사동 만큼 아직도 정이 남아 있고 제대로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은 없을 것이다. 지금 많이 복잡해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아직 그곳은 비록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다고 해도 막걸리 한 사발 국밥 한 그릇쯤 흔쾌히 같이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요즘은 화랑과 술집들이 허다하지만, 이십년 삼십년쯤 전엔 그렇지가 않았다. 관훈미술관에서 주로 화가들이 전시회를 열었고, 그 뒷 편의 ‘부산식당’에서 뒷풀이를 하곤 했다. 문영태, 황주리, 이청운 등이 이 시절 자주 드나들던 ‘그림쟁이’들이었다.

오후 느지막히 출근(?)하면 먼저 천상병 선생의 부인 문순옥여사가 운영하는 그야말로 손바닥만한 찻집 ‘귀천’에 들린다. 거기엔 아는 이들이 늘 죽치고 있어 손을 번쩍 치켜들며 자리를 권하고, 커피나 모과차 한 잔으로 목을 축인 뒤 어울려 이차로 막걸리를 마시러 ‘실비집’으로 향한다.

실비집엔 또한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앉아 막걸리, 빈대떡, 돼지갈비, 등속을 앞에 놓고 무슨 이야긴지 담소를 나누는 아는 얼굴들이 늘상 있게 마련이었다.

시를 쓰는 박종수형, 그림쟁이 박광호, 사진쟁이 조문호, 김종구 등이 어울려 역시 손을 번쩍 치켜들며 아는 체를 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맨 날 보는데도 무엇이 그리 반가운지 그저 좋아 어쩔 줄 몰랐다.

그 당시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따로이 별로 약속을 하지 않았다. 귀천이나 실비집으로 가면 모두 다 거의 한꺼번에 만날 수 있었으므로, 주머니에 차비와 담배값과 막걸리값 정도를 챙겨 넣고 허위허위 무슨 바쁜 일이 급한 사람처럼 찾아들면, 그렇게 아는 얼굴들이 매일처럼 앉아 있게 마련이었다.

좋은 시절이였고, 그야말로 정이 넘치는 그런 시절이었다. 인사동 골목을 들락거렸던 수많은 화가와 시인들 중에서 실비집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으리라. 허름한 한옥을 대충 수리해서 만든, 테이블 몇 개와 방 두어 개가 있는 그 술청에서 참으로 무수한 만남과 헤어짐과 이야기들이 오고가고 스쳐 지나가고 흘러갔다.

천상병 선생은 자리에 잘 앉지 않았다. 막걸리 한 되를 시켜 놓고 주방 앞에 서서 한두 잔 마시곤 이내 나갔다 다시 들어오길 반복했다. 천선생을 비롯해 많은 주객들이 이승을 떠났고, 남아 있는 이들도 이제 모두 머리가 희끗희끗 하다.

귀천은 아직 그대로 있지만 실비집은 오래 전에 인사동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 골목을 기웃거리던 많은 사람들은 이제 뿔뿔이 흩어져 제각기 조금씩 남아 있는 이웃들과 함께 낯선 이방인인 듯 이 술집 저 찻집을 떠돌고 있을 따름이다.

인사동은 서울 속의 조그만 섬과 같은 동네다. 파고다 공원을 지나 인사동 네거리를 거쳐 안국동 입구에 이르는, 길어야 이백 미터 남짓한 길모퉁이의 이쪽저쪽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오래 된 한옥들이 인사동의 주 무대를 이루고 있다. 아기자기 하고 정겨운 동네다. 인사동을 잘 알면 쉴 데도 많다.

오래 전, 어처구니없이 죽어버린 화가 강용대. 대낮에 취해 뻗어버린 그를 업고 경인미술관 뒤쪽 마루에 눕힌 적도 있지만, 인사동 곳곳엔 이런 성지(聖地)가 남아 있어 피곤한 떠돌이들의 삶을 돌본다.

인사동-기억의 풍경.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그리움이 그 주변을 안개처럼 떠돌고 있다.







寂音 최영해(시인)




한 때, 나는 시골에서 어칠비칠 놀다가 우연한 기회에 선배 형으로부터 장 뉴네의 “도둑일기”를 얻어듣게 되었다. 그 영향으로 하여 나는 서울로 튀어 남대문 시장 마늘 가게에 간신히 자리를 잡게 된다. 마늘 가게 창고에는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야 다다미 두 장이 깔린 다락방이 있었는데 어둡고 습기에 젖은 마늘 냄새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나는 이 좁고 어두운 공간에서 다른 네 사람과 합숙을 하고 새벽 4시에 일어나 이들과 함께 마늘 100접을 엮어 리어카에 싣고 떠돌이 마늘 장사를 나선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낙원 시장과 가회동 한옥마을, 그리고 인사동 골목을 떠돌아다니며 마늘을 팔아야 했다. 그러다 두어 시간 만에 좁장한 골목 식당에서 겨우 마늘 한 접을 팔고나서 나는 인사동 4거리쯤의 길거리에 퍼질러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길 건너편에서는 아까부터 허름한 점포 쪽에서 중년으로 보이는 사내가 경상도 특유의 목청으로 꾀죄죄한 한 늙은이와 물건 값을 치르느라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런데 내 눈길이 무심코 쏠린 것은 점포 밀창문에 쓰인 “亞字房”이란 세 글자였다.

오, 아자방, 그 주인이 시인 김상옥 아니던가싶은 호기심에 마늘 한 접을 들고 아자방 밀창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주인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안사요, 안사요, 나가소, 나가소 하더니 아까 그 꾀죄죄한 늙은이까지 몰아서 내쫓는 것이었다. 그래서 늙은이는 나가고 나는 안나가고 진드기처럼 붙어서 선생님, 선생님, 초정 김상옥 선생님 했더니, 누고? 누고?, 했다가 엉뚱하게, 당신 내 물건 하나 사소, 했다.

기회다 싶어, 선생님, 저는 일찍부터 시인이 되고 싶었는데 다 떼려치우고 이렇게 떠돌이 마늘 장사 신세가 되어 유명한 시인 선생님을 뵙게 되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했고 나는 곧 바로 선생의 시 “봉선화”를 낭송했다. 그랬더니 나를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자기 시와 청자와 백자에 대하여 벼루에 대하여 민족예술과 민예품에 대하여 열변을 거듭했다. 나는 이 자리에서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만난 기쁨으로 몹시 흥분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열심히 메모를 했다. 야나기 무네요시, 고유섭, 심수관, 이참평, 그리고 조선의 산세와 민예품을 사랑한 나머지 끝내 망우리 묘지에 묻혀서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 사카와 다쿠미, 등등. 나는 메모가 된 것들을 무슨 천만금의 재산목록인양 호주머니에 챙겨 넣고 아자방을 나왔다. 그리고 초정선생이 소개해 준 “통문관”을 찿아가서 얄팍하고 푸르스름한 4X6판 책 한 권을 샀다. 고유섭 저자로 “고려청자”였는데 이 때가 1962년 초가을 오후였던가? 이후 나는 군대를 가게 됐고 제대를 한 뒤 노가다도 뛰고 절간 공부도 하다가 드디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시인이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고향의 친지 소설가 김승옥의 천거로 동화출판공사에 입사를 하게 된다. 이 회사가 1973년 한국출판사상 처음으로 초대형 원색판 “한국미술대전집” 15권을 출간하게 되고 일본으로 까지 수출을 하게 되는데 나는 그 때 인쇄와 제책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막중한 자리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 일과를 온통 현장에서 마쳐야 했다.

특히 나의 거래처가 되는 인쇄소는 인사동 건너 조계사 옆에 있는 평화당인쇄소였는데, 나로서는 안성맞춤이었다.

청, 백자나 분청을 원색으로 인쇄하자면 실물 때깔과 인쇄된 때깔이 같아야 하는데 그것을 비교하는 감식안이 갖추어지지 않고는 큰 낭패를 보게 되고 아주 버려지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앞서 말한바 1962년 마늘 장사 때 만난 아자방을 인연으로 하여 골동가게를 드나들면서 안목을 넓혀 두었던바, 이런 것들이 나에게 큰 자산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국미술대전집 3만권을 일본으로 수출하는데 일조를 하게 된 것이다.

그 뒤로 오늘날까지 나는 많은 사람들과 시간을 인사동에서 함께 보내오고 있지만 점점 인사동의 풍물과 정서는 다들 어디로 가버리고 있다.

“통문관”과 “문우사”만 남아 있지만


서정춘(시인)

정말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그리움에 묻혀 떠오른다.

한국기원, 유전다방을 중심으로 한 우리들의 60년대 후반 관철동 시대가 지나, 하나 둘씩 자연스럽게 발길이 인사동으로 옮겨졌다. 우리가 존경해 마지않는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 선생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란 신경림, 민영, 황명걸, 구중서, 강민 등을 말한다. 물론 그 주변에는 신동문, 박재삼, 이시철, 천상병, 김심온, 강홍규, 방영웅, 박이엽 등의 선배, 동료, 후배들이 있었다.

인사동 하면 생각나는 세 사람이 있다.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 그리움이 절로 솟구친다.
민병산 선생은 그 분 특유의 허름한 옷차림에 허름한 가방을 매고 황혼녘의 우리들 앞에 잘 나타나셨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그러면 그저 빙그레 웃을 뿐 별 말씀이 없으시다. 그리고 주섬주섬 그 허름한 가방 속에서 세로판지에 싼 붓글씨를 꺼내 주신다. 그 분만이 쓸 수 있는 천의무봉의 청구자(靑丘子) 민병산체의 자유분방한 서예작품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누구나 그 작품을 몇 개씩 갖게 되고, 어느덧 웬만한 찻집, 음식점에도 그 서예작품이 내걸리게 되었다. 어쩌다 원고료가 생기시면 자연스레 몰려든 후배며 학생들을 상대로 술좌석을 마련하시고 사람 살아가는 얘기며 사회 정의, 동서양의 교양, 철학에 대해 강론을 해 주셨다.
그러던 어느 날, 바쁜 직장 일 때문에 한동안 인사동 출입을 못하고 있는데, 민영 시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곧 민 선생의 회갑이 돌아오는데 우리끼리 약간의 모금을 해서 회갑연을 마련해 보자는 것이었다. 무조건 동참하기로 하고 일은 진행되었다. 평생 남에게 줄줄만 알고 철저한 무소유로 일관하고 결혼도 하지 않으신 그 분의 외로움을 조금은 위로해 드리자는 취지였다. 내일이면 ‘누님손국수집’에서 회갑연이 열리게 된 전날, 우리는 찻집에서 민병산 선생을 중심으로 모여 환담을 나누었다. 거기서도 민선생은 듣기만 할 뿐 별 말씀이 없으셨다. 그저 왜 쓸데없는 짓들을 하느냐는 듯 쓴웃음만 짓고 계셨다. 이튿날 잔치에 입을 한복을 그날 찾아드렸다고 한다.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다음날 당일, 직장에서 근무하고 있는 내게 전화가 왔다. 민병산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믿을 수 없는 부음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회갑연이 아닌 그 분의 장례식을 치렀다. 그 한복을 수의(壽衣)로 쓰고---. 어쩌면 당신 입장에서 보면 번거로운 그 행사를 피하려고 서둘러 이승을 떠나셨는지도 모른다.

천상병 시인의 환갑잔치도 ‘누님손국수집’에서 있었다.
좀 늦게 간 내가 들어서자 이미 많은 하객들이 와 있었다. 주인공인 천상병 시인을 중심으로 좌우에 부인 목순옥 여사와 신동문 시인이 앉아 있고, 낯익은 얼굴들이 줄지어 앉아 있는데, 내가 들어서자,
“아, 민이 왔구나. 민아, 민아, 민아, 어서 와, 어서 와.”
쭈그러진 얼굴에 한껏 웃음을 띠고 그 특유의 외마디 소리로 나를 맞아 주었다.
그를 흔히 ‘기인(奇人)’ 운운한다. 분명히 그런 면도 있지만, 그는 천재다. 50년대초, 그는 이미 <주간문학예술>에 평론을 쓰고 얼마 후 <문예>지에 시를 쓰고 있다. 앞으로는 매스컴도 그의 천재성을 더 부각시켜 주었으면 좋겠다.
그도 이제는 그의 시처럼 귀천(歸天)하고 우리 곁에 없다.

50~60년대의 명동에서 김관식, 이현우, 백시걸 시인 등, 그야말로 모두 기인이라면 기인인 천재들과 어울려 우리들 속물들을 비웃던(?) 그가 새삼스럽게 그리워진다.
“민아, 너 요즘 뭐 하고 지내? 번역 일 좀 안 할래?”
직장을 떠난지 오래되어 어려워진 내게 박이엽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허나, 일의 내용이 나와 무관한 미술평론이고 내 힘에 부치는 것 같았다. 내가 분명한 답변을 피하자 며칠 후 다시 연락하겠다고 그는 전화를 끊었다. 그러더니 얼마 후 집을 파주로 이사했다고 전화를 해 왔다. 전화번호와 주소를 가르쳐 주고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하란다. 그리고 우리는 이따금 인사동 그의 단골 찻집에서 만났다. 그는 늘 조용하고 말수가 적었다. 언제나 영국신사풍의 멋쟁이, 늘 남을 배려하는 인정 넘치는 사나이, 그런데 그는 늘 병약하고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채현국, 황명걸, 김하중, 김승환 등과 친한 그는 그래서 늘 외로워 보이고, 어쩐지 그늘 같은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군사정권 시절 방송작가협회의 일을 보다가 그들의 요구를 들어 주지 않아 그 자리에서 쫓겨나고, 그 후 제도권 방송사에서 일을 주지 않아 겨우 기독교방송국 일만으로 연명한 것은 다 아는 이야기다.
그런 그가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어느 날 불쑥 부음이 날아들었다. 그의 집 주소며 전화번호는 지금도 내 수첩에 남아 있는데.....

전쟁 전에는 조계사 앞에 있는 학교에 다니며 인사동 끝에 있던 ‘종로도서관’에 드나들며 일어로 된 문학서적을 남독하며 공부를 하고, 이제는 인생의 황혼에서 여전히 인사동을 떠나지 못하고 남은 벗들과 여인들과 찻집과 술청 주변을 맴돌고 있다. <민예총>, <민미협>의 김용태, 주재환, <작가회의>, 나 같이 인사동을 떠나지 못하는 문우, 화가, 사진작가, 그 밖의 젊고 나이든 그리운 얼굴들.....












강 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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