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골목 맛세상] 인사동의 작은 맛집들

인사동 네거리에서 안국동으로 가는 도로변 골목에 위치한 '작은뜨락'에서 뒷골목 맛세상의 작가 송기원씨와 '인사동의 눈 밝은 풍류객' 일행이 막걸리건배를 하고 있다.사진에 보이는 장면이 폭 1m에 길이 5m에 불과한 이 초미니 음식점의 전부이다
 
인사동은 흔히 ‘거리의 박물관’이라고 불린다. 화랑에서부터 공예품이며 골동품을 파는 가게에 이르기까지 고급스러운 문화의 향취가 풍겨난다. 더군다나 얼마 전부터 관광특구로 지정돼 거리 미화작업이 진행되고, 기다렸다는 듯이 문화자본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인사동은 더욱 세련되고, 멋들어졌다.


●음식점 상호엔 멋들어진 우리말
화가나 도예가, 공예인, 문인 같은 예술인들이 터전을 삼아 노니는 곳에 어찌 멋이 뒤따르지 않겠는가. 그들의 발자취가 두루 머무는 곳에 멋이 빠진다면 그야말로 속빈 강정에 다름 아닐 터이다. 멋스러운 거리에 자리를 잡은 먹고 마시는 맛집들 또한 어찌 멋들어지지 않겠는가.
인사동의 맛집들은 우선 상호에서부터 맛이 다르다.
‘오늘같이 좋은 날,千강에 비친 달, 바람 부는 섬, 소금인형, 황금비늘, 두레멍석, 오 자네 왔는가, 툇마루, 놀부가 기가 막혀, 흥부가 기가 막혀, 북치구 장구치구, 사람과 나무, 우리 그리운 날은, 평화만들기, 달고둥, 보릿고개추억, 조각하늘, 좋은 씨앗, 달새는 달만을 생각한다, 뜰 앞에 잣나무, 아빠가 어렸을 적에, 낮에 나온 반달, 완자무늬, 머시 꺽정인가, 모깃불에 달 끄슬릴라, 풍경소리….’
얼핏 둘러봐도 가히 그 멋들어짐은 시인의 상상력을 넘어선다. 멋들어진 것이 어디 상호뿐이랴. 다양한 먹을거리 또한 멋들어져서, 은정이나 선천, 사천, 이모집 같은 전통 한정식에서부터 재첩 요리만을 전문으로 하는 섬진강, 다슬기 요리만을 전문으로 하는 풍류사랑, 홍어만을 전문으로 하는 홍어가 막걸리를 만났을 때, 홍어천하, 사찰음식 전문의 산촌, 녹차대나무쌈밥이며 녹차너비아니 등 밥이며 요리에 녹차를 이용한 차이야기, 야채 커리나 마살라 같은 인도 요리의 작은 인디아, 된장비빔밥의 툇마루에 이르기까지 불쑥 어느 집에 들어가도 멋들어지지 않은 요리가 없다.
어쩌면, 인사동에 한 가지 흠이 있다면 바로 그 멋들어짐이 너무 지나치다는 데에 있는지도 모른다. 멋이 멋으로만 머물지 않고 멋 자체가 상품화되어 거리에 넘쳐난다면 그런 멋은 이미 멋이 아니다. 멋들어짐이 지나치면 곧바로 건들거리는 법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건들건들, 건들거리면 자칫 사람 냄새를 잃고 만다. 만약 인사동 거리가 죄다 사람 냄새를 잃고 건들거리고 있다면?


●인사동 풍류객들의 ‘참새 방앗간’
인사동에 언제부터인가 40대 언저리의 중년여인이 있는 듯 없는 듯 모습을 드러냈다. 그이는 인사동 네거리에서 안국동 방향으로 10미터쯤 오르는 왼편 골목에 역시 있는 듯 없는 듯 조그만 맛집을 냈다.

작은 뜨락(02-739-2218)이라는 상호인데, 원래 건물 옆에 버려진 골목이었던 것을 위는 차양으로 가리고, 건물 벽에 의지해 폭 1미터에 길이 5미터 남짓한 공간을 마련했다. 폭이 너무 좁아 일반 탁자를 놓을 수가 없어서 벽에 긴 나무판대기를 붙이고, 바닥에는 겨우 엉덩이를 걸칠 만한 간이의자를 놓았다. 이 집에서 먹고 마시기 위해서는 한껏 몸을 웅숭그린 채 본의 아니게 면벽을 해야 한다.
한 마디로 멋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맛집에다가 주인 되는 노인자씨도 멋하고는 아예 담을 쌓은 이였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한 주먹 움켜잡아 뒤통수에 질끈 동여맨 꽁지머리, 아무렇게나 차려입은 차림새. 한 술 더 떠, 먹고 마시는 소위 물장사가 난생 처음이어서 음식을 마련하고 상을 차리고 셈을 헤아리는 일도 서툴다.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손님이 “여기 얼마요.”하면 “몰라요. 먹은 만큼 알아서 주세요.”가 대답이고, 대구와 동태라는 생선을 구별하지 못해 대구를 동태로 파는가 하면 손님이 계산을 않고 나가도 숫제 알아내지를 못했다. 멋대가리라고는 없는 작은 뜨락의 진가를 인사동의 눈 밝은 이들이 못 알아볼리 없었다.

툇마루의 바깥주인이자 ‘집도 절도 주민등록증도 없이’ 떠도는 시인 박중식, 동숭동에서 작가폐업이라는 카페를 운영하는 예사롭지 않은 작가 배평모, 누구나 알아주는 시대의 낭만주의자인 시인 김사인, 한국판 비용으로 통하는 시인 김신용, 인사동 화단의 마당발 화가 장경호,588여인들의 사진전으로 이름을 날린 사진작가 조문호, 십수 년에 걸쳐 인도를 헤맨 끝에 ‘우리는 지금 인도로 간다’는 인도 안내서를 내고 아울러 ‘인도로 가는 길’이라는 여행사를 운영하고 있는 인도전문가 정무진 등 소위 인사동의 풍류객으로 통하는 이들이 마치 고양이가 생선냄새를 맡고 찾아오듯 차례로 작은 뜨락에 모여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노인자씨는 물장사만 난생 처음인 것이 아니라 돈을 버는 일 또한 처음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난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돈이라고는 벌어본 적이 없는 노인자씨는 돈을 쓰는 일에는 누구보다도 화려한 이력이 붙은 이였다. 일찍이 불교계의 내로라하는 큰스님 아래서 포교사 비슷하게 아시아 각국이며 유럽을 거쳐 아프리카까지 돌아다녔는데, 세 번이나 말라리아에 걸려가며 아프리카를 종단하여 굶주린 현지인들을 위해 아낌없이 돈을 썼다.
이를테면 몸과 마음 전체를 바쳐 30년 가까이 중생구제라는 보살행을 해온 셈이었다. 그런 그이가 어느 날 획하고 머리가 돌아 그만 맛집을 차려 돈을 버는 일을 하고 말았다.
인사동의 눈 밝은 풍류객들이 맨 먼저 알아본 것은 다름 아닌 주인 되는 이의 사람냄새였을 터이다. 그런 그이들로서는 적어도 작은 뜨락이 그대로 망하는 꼴은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이들은 주인을 대신하여 나름대로 작은 뜨락을 살리는 일에 나섰다. 이를테면 셈이 어두운 주인을 대신해 모자를 돌려 자신들이 먹고 마신 만큼 돈을 거두어 스스로 셈을 헤아리고, 한 접시에 5000원을 넘지 않는 한도에서 입맛에 맞는 안주를 개발해내고, 무엇보다도 작은 뜨락을 연락처 삼아 주인이 있든 없든 하루에 한 두 번은 꼭꼭 들렀다. 그리고 그이들은 마침내 작은 뜨락만의 규칙을 만들었다. 술과 안주는 한 사람이 1만원을 넘지 않는 선에서 1차를 마감한다. 만일 차수를 변경하여 2차로 넘어가면 다시 모자를 돌려 1만원을 추가하는데, 절대로 외상은 없다.
작은 뜨락은 4000원짜리 우거지 해장국이 있어서 식사도 할 수 있다. 술안주는 서산에서 이틀에 한번 꼴로 택배로 부쳐오는 어리굴젓과 자연산 생굴이 있는데, 배춧속에다가 생굴을 쌈 싸먹는 맛이 신선하다. 그밖에 조기며 자반고등어 같은 생선구이며 생선찌개도 있다.
작은 뜨락에 처음 가는 이라면 마땅히 조심해야 할 것은 자칫 요술 같은 시간의 흐름에 휘말리는 일이다. 우연히 합석하게 된 풍류객들과 잠시잠깐 웃었는데, 낮술 한 잔이 어느 새 2차,3차를 넘어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진다.

정갈하면서도 깊은 맛을 자랑하는 '고샅길'의 명물 산사들깨탕(오른쪽)과 동태찌개. 고샅길이란 마을의 좁은 골목이나 좁은 골짜기 사이란 뜻의 우리 말이다.

인사동 네거리에서 종로 2가 쪽으로 몇 걸음 걷지 않으면 덕원 갤러리 옆 골목 깊숙이 고샅길(02-734-3371)이라는 한식 전문집이 역시 있는 듯 없는 듯 멋 부리지 않고 있다. 한옥의 사랑채를 개량한 듯 주방까지 합쳐 10평 남짓한 실내에 대여섯 개의 식탁이 있는 작은 집이다. 출입문 쪽의 벽을 터서 통유리창을 달고 거기에 진열해놓은 종발 같이 앙증맞은 도기들이 무슨 꽃들이라도 재잘거리며 피어나듯이 아름답다. 뿐만 아니라 좁은 공간에 매달아놓은 화분들이며 실내장식들은 어디에서나 주인의 깔끔하고도 섬세한 손길이 그대로 묻어나와 은은한 향기를 풍긴다. 고샅길 주인 되는 이는 박진숙·경숙 두 자매인데, 이중에서 언니 되는 박진숙씨가 도예가여서 이들 종발이며 요리에 쓰이는 접시와 그릇들을 모두 포천에 있는 작업실에서 직접 구워낸 것이다. 동생인 경숙씨는 식품영양학과 출신으로 원래부터 음식 솜씨가 뛰어났는데, 솜씨를 아낀 언니의 권유로 인사동까지 나서게 되었다.
고샅길의 특징은 요리에서 밑반찬에 이르기까지 어느것 하나 정갈하면서도 깊은 맛이 우러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고샅길된장찌개(5000원)와 산사들깨탕(1만원)이 일품이다. 메주를 쓰지 않고 알콩 자체를 띄워 만드는 절에서만 전해오는 비법으로 담근 된장을 원료로 한 된장찌개는 한 입 넣는 순간, 어떻게 이런 맛이 날 수 있을까 싶게 그 정갈하면서도 깊은 맛에 대뜸 매료된다. 스님들의 보양식에서 비롯되었다는 산사들깨탕 또한 예사로운 맛이 아니다. 곱게 간 들깨에 배추, 호박, 버섯, 두부, 거두절미한 콩나물을 넣고 약간 되직하게 끓인 산사들깨탕은 육식을 좋아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특히 별미일 터이다.

얼핏 보면 지극히 평범하지만 먹을수록 감탄사가 나오는 이 두 가지 요리는 실제로 쌍계사에 있던 무산스님으로부터 전수받았다는데 무산스님은 출가하기 전에는 한의사 출신으로 평소에도 사찰음식에는 깊은 조예가 있는 이였다. 이밖에도 5000원짜리 동태찌개와 야채비빔밥이 있고, 술안주로는 버섯전골(2만원)이며 닭매운탕(2만원)이 있는데, 서너 명이서 너끈히 즐길 수 있는 양이다.


■ 인정으로 우려내는 전통찻집

인사동 네거리에서 안국동 방향으로 한참을 올라와 쌈지박 어름에서 왼편 길로 접어들면 산타페 입구 옆에 초당(02-738-4154)이라는 전통찻집이 또한 있는 듯 없는 듯 멋 부리지 않고 있다. 탁자 세 개가 전부인 작은 공간의 한 쪽에 주인 되는 최정해씨가 평생을 바로 그 자리에 있었던 듯 그림 같은 자세로 신비한 미소 지으며 앉아 있다. 결코 적지 않은 나이와는 상관없이 곱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자태다. 무언가 알 수 없는 향기와 빛깔이 은근하게 배어나오는 듯한 자태는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마치 오랜 세월을 잊혀졌다가 어느 날 불쑥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고려청자나 이조백자처럼 정지된 시간 속에서 깊어진 향기며 빛깔이다. 삶의 무엇이 한 여인을 저렇듯 깊게 만들었을까. 참으로 막막한 무슨 기다림 같은 것은 아닐까.

손님이야 하루에 한 명이 들든 두 명이 들든 별로 개의치 않는다. 중요한 것은 바로 최정해씨가 지키고 있는 자리이다. 벌써 20년 가까이 그 자리에서 어쩌다 든 손님들에게 깊은 손길로 차를 만들고 차를 따른다. 아주 잊혀진 듯 참으로 오랜만에 오는 손님이면 연꽃 모양의 작은 촛불을 물이 담긴 자기 잔에 켜서 차와 함께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촛불에 어둑한 실내가 일순 은은하게 밝아지면서, 그것을 지켜보는 손님의 어둑한 마음 또한 어쩔 수 없이 밝아지기 마련이다. 그렇듯 밝아진 마음으로 차를 들어 한 모금 입안에 넣으면 저 안으로 깊이 흘러들어가는 것은 비단 차만은 아니다.
홍삼말차라는 초당만의 특이한 차가 있다. 녹차 가루에 홍삼가루를 섞어서 약간 되직하게 물을 넣은 흡사 맑은 죽 같은 느낌의 차인데, 이것을 사발에 넉넉하게 마시고, 다음에 바위에서 나는 대나무의 어린 순으로 만든 연둣빛 석죽차와 석류빛 오미자차를 마시고, 이어 솔바람차며 매실차까지 마신다.
차를 바꾸는 틈틈이 편강, 쥐눈이콩강정, 오미자 양갱으로 입가심을 해가며 대여섯 가지의 차를 마시고 나면, 삶의 무엇이 우리를 그다지 애면글면 안타까워하게 하랴. 이런 식으로 차를 순례하고 초당을 나설 때 잠자코 1만원짜리 한 장을 식탁에 놓아두는 것을 잊지 말 일이다.

2004년 12월 10일자 서울신문에 게재된 송기원씨의 글입니다.

이제 "뜨락"은 없어지고 골동가게로 바뀌었지만 다시 한 번 그 시절로 돌아가 봅니다.


인사동이야기 사진집 표지


도서명 : 인사동 이야기
부제 : 빛깔있는 사람들
작가 : 조문호
출판 : 눈빛출판사
발행일 : 2010, 4,28


 


2007년 1월 초 후배기자인 문창석(조선투위 출신으로, 해직 뒤 기업에 투신하여 <두산그릅>의 광고회사사장직 역임)이 그의 아들 주례 부탁 건으로 인사동에 왔다. 만난 장소는 낙원상가 옆 <커피 빈>이란 체인 찻집.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문창석은 자신이 낙원동에서 태어나 교동초등학교와 경기중고교를 다녔다며 지금과는 사뭇 달라진 4-50년 전의 이 동네 풍경을 떠올리는 동안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순간 나는 어머니가 1935년 쯤 언젠가 처음 찾아간 병원이 인사동의 <신필호 산부인과>였다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으니 이 동네와는 뱃속부터 인연을 갖고 있던 거군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세간에 오르내리는 통상의 ‘인사동’은 서울시 종로구의 행정 구역과는 사뭇 다르다. 고유의 인사동을 포함하여 종로2가, 공평동, 경운동, 관훈동, 낙원동, 안국동 등이 통칭 ‘인사동’에 속하는데 여기에 자주 드나드는 사람들도 조차 종로 토박이가 아니면 어디가 공평동이가 경운동인지를 잘 알지 못 한다. “옛날 화신 뒤”, “낙원 상가에서 천도교 예식장 올라가는 쪽”, “<지하철 안국역>에서 내려오다 우측으로 두 번 째 골목”, 혹은 “조계사 건너 편 골목” 하는 식으로 위치를 지시한다. 이를 테면 런던의 ‘소호(Soho)', 파리의 ‘몽빠르나스(Montparnasse)’ 혹은 뉴욕의 ‘그린위치 빌리지(Greenwich Village’가 그런 것이나 마찬가지다. 원래 편지 봉투에 쓰는 동네 이름-번지수는 생활기억과 생판 다른 법이니까.

1947년 가을 당시의 38선 이북 강원도 김화에서 서울에 온 우리 가족은 용산고등학교 뒤 해방촌 판자 집에 자리를 잡은 이래 6.25까지 두어 번 이사를 다녔으나 모두 용산 일대를 벗어나지 못하였던 까닭에 종로는 20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발을 디딘 것이나 다름없다. 1954년 여름 대학 입시를 앞둔 해의 여름방학 동안 조계사 건너 편 쯤에 있던 프랑스어 강습소(작고한 이휘영 교수가 창설한 <CEF>)를 다닌 것이 선후로 하면 최초의 인상동 출입에 해당하지만 그 때의 기억으로 남는 것이 전혀 없다. 동무의 집이나 빵집, 책방 같은 곳을 빼놓고 불량기 없는 10대 소년이 도시 풍경을 추억으로 재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20대 초의 나는 문학에 심취한, 다분히 아류 실존주의 방황아 였다. 이런 부류의 젊은이들이 모이는 곳이 지금 같으면 강북의 대학로나 신촌, 그리고 강남의 신사동 혹은 압구정동 일대로 여러 곳인데 그 때는 명동이 거의 유일한 모임 터였다. 서양 고전 음악 레고드 판을 틀어주는 <돌체>라는 다방과 그 주변의 술집으로 한정되었던 꼴이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인사동 사람들>로 이어지는 <돌체> 출신은 신경림, 채현국, 황명걸 등 대 여섯이 전부인데 거기서 천상병과 박은국(필명 박이엽)은 이미 고인이다. 뒤에 말하겠지만 <돌체> 패거리는 거피, 음악 감상, 술, 거기다가 바둑이 사람들 사이의 정(情)을 엮는 매개물이었다. 프랑스 대 혁명전 계몽주의 지식인들이 거리의 의협이나 건달들과 어울려 놀던 곳이 파리 센 강 우안(右岸)의 <팔레 로아얄>(Palais-Royal)인데 거기가 체스 놀이의 중심부였다는 사실은 위의 네 가지를 다 좋아하는 나에게 솔직하게 매우 끌리는 대목이다.

절대왕정에 충성하는 관헌들의 탄압을 견뎌가며 20년에 걸친 긴 세월동안 <백과 전서>를 완성한 계몽주의 철인 디드로(Diderot)가 틈만 나면 팔레 로아얄 근방을 어슬렁거리며 체스 꾼들의 노름판을 어께너머로 내려다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던 모양이다. 거기에 자주 출입하는 날라리 재사(才士) <라모의 조카>(Le neveu de Rameau)와 만나 디드로는 당세의 부패, 허위, 자기기만을 가차 없이 논박하는 상상(想像)의 대화록을 사후에 남겼다. 디드로에 견주는 것은 조금 지나치다 하더라도 암울한 분단시대의 본질을 꿰뚫어 보던 명철한 분을 인사동 사람들 가운데서 꼽아보라면 청구자 민병산(靑丘子 閔丙山, 1928-88)과 노촌 이구영(老村 李九榮, 1921-2006년)을 나는 주저하지 않고 들겠다.

본격적으로 출입한 초기(1960년대)의 인사동은 그 한가운데가 아니라 그 주변부인 낙원상가 건립 이전의 판자 집촌 험한 곳이었다. 술값이 쌀뿐 아니라 통금이 엄한 시절에 밤새 퍼 마실 수 있고 시중드는 여인들을 쉽게 조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일보> 선배기자인 남재희(국회의원으로 여당 중앙위원장을 역임), 손세일(국회의원으로 야당 원내 총무 역임)과 셋이 밤새 것 마시다 주량이 기중 약한 손세일이 먼저 고라 떨어지자 둘은 그의 귀두에 불침을 놓는 장난을 서슴치 않았다. 거기서 동쪽으로 1백미터 쯤 가면 세칭 <종삼>(당시 서울의 대표적 사창가)으로 이어 지는 점이 낙원동의 매력이라면 매력인데 이 험한 동네는 낙원상가 부면의 개천이 복개되면서 사창가는 지금의 피카딜리 극장 북쪽으로 축소되자 매력도 반감되었다고 보면 어떨지 모르겠다.

<창비> 발간을 전후하여 나와 특별히 가까워진 백낙청은 60년대 후반 신혼 살림을 운니동 <운당여관> 근처의 조그마한 한옥 집에 차렸다. 그에 집을 방문하기위해 인사동을 지나갈 때가 여러 차례 있었으나 인사동 근방에서 술 추념을 한 적은 거의 없었다. 나이가 30을 넘은 탓도 있으려니와 박정희의 3선 개헌 직전부터 지식인 탄압이 노골화하자 주변 친구들이 몹시 위축된 것이 음주 행각에 제동이 걸렸던 것이나 아니지 모르겠다. 그런 가운데 백낙청은 박사학위취득을 위해 미국에 갔고 나는 나대로 1971년 프랑스 정부초청으로 1년간 파리에 간 것이 인사동에 한동안 발을 드려놓지 못한 시기다. 그러다 1972년 유신쿠데타, 1974년 민주회복 국민선언, 1975년의 <조선일보 자유언론 투쟁위원회, 약칭 조선투위>와 <동아일보 자유언론 투쟁위원회, 약칭 동아투위>출범을 비롯한 이른바 반체제 지식인 운동이 시작되면서 낙원동 험한 동네를 어울려 출입하던 기자시절의 술친구들과는 각기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내가 1974년 <한국일보>의 논설위원으로 일자리를 옮길 지음 미국에서 돌아온 백낙청은 <창작과 비평사> 사무실을 수송동(지금 <연합통신사> 입구)에 차리자 이른바 반체제 지식인들은 인사동의 한참 서쪽인 광화문 교보빌딩 뒷켠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종로 1가, 청진동, 무교동, 다동 일대인데 <동아투위> 사무실, 소설가 천승세가 경영하는 바둑 집, 그리고 나 개인으로 말하면 오랜 친구 채현국-박윤배의 회사 사무실이 거기에 있었던 터였다.

이 지음 술판에는 문인과 해직언론인 만이 아니라 인권 변호사 강신옥, 홍성우, 조준희등이 어울릴 때가 있었다. 시인 김지하, 언론인 리영희, 경제학자 박현채 등의 옥바라지(석방 탄원서 만들어 도리기, <비둘기 날리기>라는 이름의 옥중 서신 내보내기, 病棟 옮기기, 방청인 모으기...)가 몰고 온 변화였다. 술자리의 외연확대라 해도 좋을 것인데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김정남(문민정부의 대통령 교육문화 담당 수석 비서관) 이다. 투옥되는 사람들에 변호인을 부치는 문제는 말할 나위 없고 옥바라지와 연루자들의 은신처와 도피자금을 마련하는 일까지, 반체제 운동의 전위(前衛)라는 말이 허용된다면, 김정남이야 말로 생색나지 않는 그 後衛의 어려운 일들을 도맡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또 한 사람은 건축가 조건영이다. 그는 미술가, 문인, 해직언론인, 반체제 지식인 운동가들을 두루 연결시켜주었을 뿐 아니라 헤어질 때는 의례 술값을 내는 처지였다. 내가 <합동통신> 기자 김태홍(1980년 <한국기자협회>회장을 지내고 현재 국회 보건복지위원장)을 알게 된 것은 조건영의 소개였다. 어찌되었건 간에 전두환 쿠데타 직후 김태홍이 피신을 도운 그는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악명 높은 이근안으로부터 김태홍의 소재를 대라는 참혹한 고문을 당했다. 본인들이 달가워하던 아니던 간에 ‘인사동 사람들’이 표현이 좋은 뜻으로 쓰인다면 그 범주에 나는 김정남과 조건영 두 사람을 꼭 넣고 싶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형편대로 펜대를 굴린다면 당연히 서대문-마포시대로 가야한다. <창작과 비평사>, <실천문학사>와 같은 반체제 출판사들의 대부분, 그리고 <자유 실천 문인 협의회>, <민주언론운동연합>의 사무실이 그 쪽에(서대문-마포) 있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이 글의 주제인 ‘인사동 사람들’에 충실하기 위해서 부득이 마포시대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서둘러 인사동으로 되돌아와야겠다. 70년대 후반 밥벌이를 하던 중학동의 <한국일보사>에서 인사동 까지는 걸어서 5분 정도의 가까운 거리여서 회사 동료들이 인사동을 자주 출입하였지만 나는 그들과 어울려 시시덕거리는 것을 의도적으로 삼갔다. 고백하거니와 그들과 나는 다른 종류의 인간이라는 자부심, 아니 교만한 감정에 차 있었다던 것이다. 술자리에서 어울리는 친구들이라면 채현국-박윤배 등의 오래된 동무들, 백낙청과 <창비> 주변 지식인들, <조선투위>, <동아투위>의 해직 기자들, <한국일보>의 박정삼등 노조운동가들이 전부였는데 거기다 한 그릅을 더 보탠다면 관철동의 <한국기원>에서 자주 만나던 문인(민병산, 민영, 신경림, 구중서, 황명걸, 방영웅 등)들이다.

회사동료들과 섞기기 싫어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긴 했어도 인사동에 가서 밥을 먹은 일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무렵 우연하게 어떤 이가 부실한 나의 뇌력(腦力)을 보태주었는데 또렷이 떠오르는 것은 속칭 인사동 네거리에 있었던 <천향각>(天香閣)이란 이름의 중국 음식점이다. 거기 간 것은 당시 <한국일보> 여기자 안정숙(1980년 해직 후 <한겨레>기자를 거쳐 <한국영화위원회>위원장)의 남편(그 때는 결혼전 교제중이였는지 확실치 않다)인 학생 운동가 원혜영(부천시장 역임후, 열린우리당 사무총장)이 예고 없이 회사로 나를 찾아왔을 때였다. <한국일보사> 사원에 외상이 통하는 제법 번듯한 음식점중의 하나가 <천향각>이 였는데 ‘좋은 후배 셋’을 달고 온 원혜영 일당에게 막소주와 김치찌개를 먹여 보내서는 안 되겠다는 나름의 배려가 거길 찾게 했던 것 같다. 고급 청요리을 시킨 것은 아니고 탕수육 하나에 잡채 하나, 백알 두세 병, 그리고 짜장 면이 다였을 성싶다. 원혜영과 같이 왔던 ‘좋은 후배’ 중의 하나가 권형택(민주화 기념 전당 건립준비위원장)이며 그의 안사람 황인숙은 진짜 ‘인사동 사람들’이라면 누구 하나 빼놓지 않고 잘 알 다섯 평짜리 카페 <하가>를 지금 경영한다. 원혜영 일당에 내가 저녁을 샀던 것, 그 자리에 동석했던 ‘좋은 후배’의 하나가 자신임을 일깨워준 사람이 바로 권형택 이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그가 <천향각>이란 이름의 중국집이 30년전에 인사동에 있었다는 을 생판 모르는 거였다. 한 세대의 차이가 공간 개념에서, 구체적으로는 인사동 풍경의 기억에서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세월의 덧없음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1978년 인사동에 자주 갈 일이 생겼다. <조선투위>의 원원장 정태기기(현재 <한겨레신문> 사장)가 <두레> 출판사 겸 투위 사무실을 지금의 <민예총> 사무실 옆 ‘건국대 주자창’의 옛 건물에 차린 결과였다. 출판 일을 돕는다는 것은 구실이고 거기에 해직기자, 제적생(운동권 젊은이)만이 아니라 젊은 문인과 미술가들이 이따금 들리는 판이라 이들과 어울리는 것이 유신 말기의 낙이라면 낙이었다. 더구나 의협의 사나이로 불리는 나의 오랜 동무 박윤배가 탄광회사 사무실을 경운동에 차렸던 것도 인사동 근방으로 발길이 잦아지는 동기였다. 신문사에서 틈만 나면 정태기와 박윤배의 사무실에 놀러가는 것이 일과처럼 되었는데 그 어간에 박정희가 김재규에 피격당해 사망한 10.26이 일어났다. 그 때부터 전두환의 쿠데타까지의 반년동안은 인사동 사람들과 빈번하게 조우하지 못했던 것만은 확실하나 5.18 광주항쟁의 유혈 사태로 이어진 직후 나는 논설위원 가운데서 제일 믿을만한 선배 이열모에게 양해를 구하고 달포가량 집과 회사를 비우는 이른바 ‘잠수함타기’(피신 생활)를 하다가 목이 잘렸다. 그 어간에 잊혀지지 않는 것은 조건영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광주의 참혹한 살육극의 실상을 전하면서 현장을 찍은 기자의 사진을 구할 수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 세계 여론에 호소하겠는 거였다. 사진에 대한 사례는 요구하는 대로 내겠노라고 하였다. 한두 군데 수소문을 해보았으나 겁에 질린 기자들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고개를 가로저을 뿐 그런 사진은 없다는 거였다. 살육 현장 사진을 외국에 내보내려던 계획이 불발로 그친 것은 내가 조건영에게 진 마음의 빗으로 남아있다.

전두환 후기의 인사동은 독일군 점령하의 파리 몽빠르나스가 그랬듯이 생기와는 거리가 먼 뜬금없이 북적대기만 하던 곳. 전두환이 만든 정당(민정당)의 거대한 당사가 인사동에 있었던 것이 그런 느낌을 한층 짙게 했다. 박정희에 반대하던 민주당 당사가 인사동 입구에 있었던 터라 그를 의식한 나머지 “정당은 전두환 ‘익찬 정당’(翼贊 政黨) 밖에 없다”는 것을 시민들에게 과시하려했던 것은 아닐까. 좁은 인사동 길에 검은 색깔의 고급 세단이 뻔질나게 드나드는 것은 정말 기분을 잡쳤다. 하지만 세상은 변하는 것이고 특히 국민을 폭압으로 내리누르는 세상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그 이후의 인사동 변모가 말해준다.

6월 항쟁의 맏딸로서 독립된 신문을 표방하는 <한겨레>가 창간 준비위원회사무실을 안국동 풍문여고 옆 안국빌딍 4층에 마련한 것은 1987년 9월의 일이다. 창간 준비위원회회 진용은 사무국장 정태기, 사무차장 홍수원, 대변인 이원섭이었는데 사무실을 여기다 얻은 것은 정태기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집권정당의 당사로부터 직선거리 1백미터 안, 종로 한가운데에 “민족에게 통일을! 겨레에게 자유를!”이라는 현수막을 내다 부친 효과는 컸다. 전두환에게 길들여진 신문과 방송에 대한 거부감이 중요한 원인이었겠지만 짧은 기간에 50억원 이상의 신문 창간기금을 거두었던 것이다. 권근술, 김명걸송건호, 성유보, 성한표, 신홍범, 윤활식, 이병주 등과 함께 창간준비위원회의 한 멤버였던 나는 반년 가까이 인사동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는 몸이 되었던 것은 종생 잊지 못할 인연이다. 인사동의 터가 좋아 창간 기금이 수월하게 걷혔다고 하면 망발이겠으나 천시(天時)와 함께 지리(地利)의 덕을 단단히 보았다고 해도 풍수론자의 고리타분한 이야기는 아닐 줄 안다. 창간준비워원회의 멤버들은 일정기간이나마 넓은 뜻의 인사동 사람이 된 셈인데 나는 이 때 미술가 패(창작가, 비평가, 활동가)들 여럿과 사귀었다. 김용태, 김정헌, 민정기, 성완경, 여운, 유청장, 임옥상, 주재환 등은 80년대 초에 <현실과 발언>(약칭, 현발)이란 모임을 만들어 세상 돌아가는 꼬리지에 아랑곳 하지 않고 따스한 풍경과 추상화에 몰두하던 주류 미술계에 칼을 꽂았던 것이다. <현발>의 김인순, 노원희등의 여류 화가들 몇과는 가벼운 농을 주고 받는 사이다. 김용태는 모금활동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고, 유홍준(영남대 교수로 문화재청 청장)은 조선조에 나온 고 활자체(古 活字體)를 깡그리 뒤지다 시피 하여 <한겨레 신문>의 다섯 글자를 집조하여 제호를 만들어 주는 공을 들였다. 젊은 독자층이 고풍스런 옛 활자체에 정나미가 떨어진다고 하여 창간 몇해 뒤에 지금의 디자인 체의 <한겨레> 제호를 만든 모양인데 나는 오히려 그것에 호감이 안 간다.

창간준비 시절의 인사동의 뭉클한 기억은 역시 사람들의 모습이다. 2-30명의 수습 사원을 모집한다는 광고에 수천의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신청서 접수 마감 날에는 안국빌딩에서 풍문여고를 지나 덕성여고 까지 줄을 이었던 글자그대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그 때 수습기자 1기로 들어 온 기자로서 지금 중견 언론인으로 활약중인 사람이 곽노필, 곽정수, 여현호, 이주명, 최00 등이다. 돈 벌이라고는 전혀 하지 못하는 창간준비위원들이 점심은 인사동의 <누님국수>에서 차는 <수희재>에서 드는 일이 흔했다. 월급 많이 주는 <동아일보>의 환경부차장 직을 내동댕이치고 <한겨레신문>에 참여한 여기자 지영선이 인사동 어느 한식집에서 우리가 고생한다고 저녁을 한 턱 냈다. 갸륵한 마음씨의 주인공 지영선은 <한겨레신문>을 졸업하고 2006년 초 외교부의 보스턴 총영사로 특임되었다.

<한겨레신문>의 창간을 준비하던 때 인사동 사람 틈에 슬며시 끼어 든 나 역시 신문사 현업을 마감한 다음, 1995년 1월 백낙청의 도움을 받아 이 동네에 조그마한 공간(낙원동 58번지 종로오피스텔)을 마련했다. 왜 하필 인사동인가를 누가 따진다면 “거기가 좋아서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지만 공간의 위치가 이곳으로 된 데는 바둑이 단단히 한 몫 했다. 1994년 쯤 공평동의 어떤 바둑 집에 일주일에 한 번씩 민주화 운동 패거리들이 모여 바둑을 두었는데 김용태, 김정헌, 나병식, 유인태, 이현배, 최민화 등이 자주 나오는 편이었다. <한겨레신문> 창간 초 사옥이 영동포 양평동에 있을 시절부터 성유보와 나는 단 둘이 만날 때 틈만 나면 바둑을 두던 버릇이 신문사를 떠난 다음 공평동 바둑 집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문인과 기자들이 자주 가는 카페 <평화만들기>의 주인 이해림에게 부탁하여 바둑 판을 준비하도록 하고 아예 대낮부터 거기서 바둑을 두는 거였다. 어떤 날은 저녁 손님이 오건 말건 우리 둘은 왁자지껄하는 술집 한 구석에서 바둑에 열을 올릴 정도였으니 확실히 도를 지나쳤던 짓거리다. 보다 못한 이해림은 조그마한 오피스 텔을 알아보겠노라 해서 정한 것이 지금의 내 인사동 공간이다. 바둑 이야기가 나온 김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인사동 사람 김용태다. 그의 친화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지임을 인정한다면 그 친화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물론 허튼 소리지만 김용태 친화력 요소에서 소주와 바둑은 중요 항목이다. 조금 과장하여 낙원동의 내 오피스텔과 그의 민예총 사무실은 큰 소리로 부르면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다. 옛날 동무가 한 둘씩 이승을 하직하는 노년의 저널리스트는 열이면 아흡 외로워지는 법인데 나는 인사동의 지리와 인화(人和) 덕분에 외로움을 덜 타는 행운을 누린다.

세상이 바뀌는 것처럼 인사동의 사람 얼굴들이 바뀌는 것은 정한 이치다. 1998년부터 2-3년간은 지금 정계와 관계에서 활약하는 김도현, 유인태, 유홍준, 이강철, 이철을 인사동의 바둑집이나 술집에서 만나기가 쉬웠지만 그들은 지금 매우 바빠졌다. 하지만 나는 10년 여일이다. 민예총의 회장 김용태는 말할 나위 없고 거기서 일하는 간사들을 아들 딸 이상으로 부려먹는다. 민주화운동이나 문화계 인사들의 전화번호를 알려고 할 때는 민예총 팀장 김철에게, 컴퓨터가 말을 안들을 때는 임현석에게, 혼자 점심을 먹는 것이 참기 어려울 만큼 못 견딜 때는 민사협의 김영수 회장과 정인숙 사무국장에 전화를 건다. 또 바둑을 두고 싶으면 <환경운동연합> 윤준하와 작가 배평모에게 그쪽의 사정을 뭇지도 않고 만나자고 한다. 이런 부탁들이 성사되는 경우에는 무척 기쁘다. 사진 작가 조문호가 인사동에 관한 글을 써달라고 하는데 왜 거절하겠는가.



임재경(언론인)


‘인사동을 사랑하는 모임’으로 자칭하거나 따로 이름을 하지 않더라도 ‘인사모’라 할 수 있는 흔
히 만나고 모이는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고 지금도 많다.
사대문 안의 서울 중심 표지석을 인사동194번지에 (1986년-하나로빌딩 로비에 현재 비치) 세웠었
고, 종로의 옛 이름인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 들었데서 이름한 ‘운정가’의 옆길 인사동 길은 사
람의 발길이 닿기 쉬운 서울의 중심거리였다. 젊은이들과 상업지구로 번성한 대학가 앞 동네, 사
대문 밖 도처의 고층아파트를 따라 사람 왕래가 많은 거리들이 각각 생겨서 이제 서울중심 인사동이
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오랫동안 여러 사람들의 인상과 추억이 쌓여져 있기에 인사동을 특별히 떠
올리게 된다.

거리의 가게와 풍경이 바뀌고 사람들도 바뀌지만, 이 중심지역은 여전히 한국의 전통문화와 문화
예술계의 분위기와 자주 왕래하는 유명 무명의 사람들로 인사동의 내력과 인상을 갖는다. 일제시
대에는 여러 개의 병원이 집중해 있었고, 이율곡의 절골(인사동의 옛 이름)집터와 지금도 있는 민
익두가, 세도가 김좌근의 집터, 민영환, 박영효가가 있었고, 큰 책방과 가구점들이 자리하고 있었
다. 집필묵 가게와 표구.액자 골동가게, 화랑들은 오래전부터 있었던 인사동 거리의 모습이다. 또
차와 술과 음식의 먹거리들은 오래전부터 있어 왔던 곳과 함께 인사동의 맛과 분위기를 따로 하고
있다.

자기류의 특이한 서예글씨를 인사동가게 여기저기에 남긴 민병산 선생, 귀천의 시인 천상병, 작가
박이엽선생 등 세분을 기리는 책자가 나오기도 했지만, 통문관의 이겸로 주인, 민화를 한국의 주
요 전통문화로 처음 드러내신 조자용 선생, 백자와 전통문화를 품위 있게 누리신 ‘아자방’의 시인
김상옥선생이 인사동 사람들이었기에 요즘 사람들은 이를 잘 알지 못하더라도 인사동의 아이덴티
티로 배어나오게 된다.

민주당, 공화당 당사가 여기에 있던 때도 있었고, MBC방송국이 인사동 네거리에 처음 자리를 했
고, 관훈(기자)클럽이 이곳의 모임에서 비롯한 그리 오래지 않은 일반적으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유서도 있다. 그러나 박영효가가 이사 가서 없어지고 안국동 쪽 인사동 입구에 있던 돌장승도 왔
다 갔다 하는 요즘에는 옷가게와 먹거리 가게가 늘어나고 있다.

인사동을 이야기하는 몇 책이 있지만 잘 언급되지 않는 인사동에서 가장 오래된 볼거리 하나, ‘이
율곡 집터‘(관훈동197번지)표지석이 있는 곳의 하회나무 고목은 인사동의 살아있는 역사의 증인
격이 된다.


김호근(문화기획가)



인사동의 역사를 보면 갑오개혁 때만해도 서울의 행정구역은 동서남북 중 5개부(部)와 47개 방
(坊), 775개 동(洞)으로 되어있었다. 그 중 중부 관인방에 속해있던 큰절이 있던 마을을 대사동(大
寺洞)또는 큰 절골이라 불렀는데, 행정구역에서 방(坊)을 없애면서 관인방의 인(仁)과 대사동의 사
(寺)를 합쳐 인사동의 동명을 만든 것이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대사동, 이문동, 향정동, 수전동, 승동, 원동 등의 각 일부가 통합
되어 인사동이 되었다. 그해 9월 출장소 제도 신설로 경성부 북부 출장소 인사동이 되었다가
1915년 6월 경성부 인사동이 되었다. 1936년 4월에는 동명이 일본식 지명으로 변경됨에 따라 인
사정이 되었고, 1943년 4월 구제 실리로 종로구 인사정이 되었다가 다시 1946년 일제가 물러나면
서 인사동이 된 것이라고 한다.

인사동거리는 근대 한국 세도정치의 핵심거리이기도 했다. 지금도 경운동 16번지에 이 세도가들
의 옛집들이 더러 남아 있는데, 순조부터 3대에 걸쳐 위세를 떨쳤던 안동김씨 세도의 김좌근, 김
병국, 김병학의 교사동 대감댁 고대광실의 잔해들이다. 관훈동 197번지는 율곡 이이가 남의 집 신
세를 지다 돌아가신 대사동 우거터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중국인들이 살았던 지역이었고, 조
선 초기 이래 미술활동의 중심지로서 조선의 모든 화가들의 중심이 되었다고 한다. 1924년 처음
으로 통인가게가 생기면서 주변에 서적 및 고미술 관련 상가가 들어서기 시작해 골동품거리가 조
성되었는데, 그 통인가게는 지금도 2대째 운영되고 있다.
6.25 전쟁이후에는 지금의 낙원상가 아파트 자리에 낙원시장이 생기면서 평양떡집이 생겼고,
그 이후로 지금의 떡집 골목도 형성되었다.

인사동이 갤러리 타운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다. 현대적인 상업화랑인 현대화랑(대
표; 박명자)이 관훈동 7번지에 문을 연 것을 기점으로 1974년 문헌화랑, 1976년 경미화랑이 들어
서면서 상설 전시 판매장 형식의 화랑들이 모여들어 미술문화의 거리가 새로이 형성되어갔다. 그
리고 한국화 작가들을 발굴해 전시해 온 박주환씨가 1976년 동산방을 열었으며, 1977년에는 김창
실씨가 선화랑을 열었고, 1983년 이호재씨의 가나화랑, 그리고 경인미술관 개관으로 인사동이 명
실상부한 화랑가로 그 면모를 다졌다.

1980년부터 다시 골동품, 고미술, 화랑, 고가구점, 표구점, 민속공예품등의 점포들이 생겨나면서
전통문화예술 활동의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1987년부터는 이러한 전통문화를 지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인사전통문화축제가 열리기 시작했
다.
많은 예술인들이 찾는 이 지역은 골동품은 기본이고 이름도 낙관도 없는 그림에서 민화, 수공예품
들이 가게마다 널려있다. 특히 표구사나 액자집도 3분의 1이 이곳에 모일 정도로 문화적인 벨트
가 엮여 있다. 그 외에도 부채나 붓 벼루, 한지 같은 전례 생활용품과 민예품, 장신구들이 관광객
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인사동 총 면적은 53,255평, 이 속에 문화예술 업종이 462개, 식당 및 일반 업종이 523개나 되어
전체 면적에 도로 면적이 가장 적은 곳이고, 세계 어느 나라 도시보다 골목길이 가장 많은 곳이기
도 하다. 특히 인사동 화랑가는 보통 일주일 기준으로 전시회가 바뀌어 여기를 찾는 인파가 1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또한 매주 수요일의 전람회 오픈 때에는 한국의 예술가들은 물론 대표적인
원로 작가들을 한 번에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도 인사동만이 맛볼 수 있는 풍경이다. 그리고
전시 뒤풀이에서 사람들이 인사불성이 되는 곳도 인사동이라고 도예가 한봉림이 말한바 있으나
본인 역시 인사불성이 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혼탁한 도시에 맑은 산소를 공급하는 그린벨트 처럼, 인사동은 우리의 마음과 정서를 풍요롭게하
는 문화벨트이다.그러나 인사동의 문화공간들이 점차 소격동이나 사간동 쪽으로 떠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스타벅스 커피집이나 스파게티, 화장품을 비롯한 대형 매장들이 미술관들을 밀어내고
있어 인사동을 아끼는 많은 예술인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최대식 (서양화가)


문화를 사랑하는 한국문화 네티즌들이시여!
새로운 은하의 우주세계로 가는 열차로 갈아탑시다.
절차탁마(切嗟琢磨) 돌과 옥처럼
아니, 크낙새처럼 단단한 나무의 깊은
속줄기의 내부를 쫍시다.
그리하여 절처봉생(絶處漨生)
그 극도로 궁핍한 고갈 끝에
문화는 소생하는 법
너른 당신의 문화 생각은
깊은 도량으로부터 셈 쳐지는 것,
심량(心量)의 매우 높고 먼 문화 천외(天外)를 점하는 것
거기에 정연(井然)한 세계가 있습니다.
종심소욕(從心所欲) 마음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바라는 곳에
문화의 중심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김용문(도예가)




"인사동 사람들은 하나같이 술을 즐겨 마신다.

이 집 저 집에서 술과 더불어 맛있는 안주들을 찾는다.
배가 출출하면 '월평'의 한정식이나 '툇마루'의 된장비빔밥을 먹고, 막걸리와 가자미 식혜를 시킨다.
낙원상가 '일미집'의 청국장,'사동면옥'의 만두전골도 맛있다.
소주 한 잔 하려면 '부산식당'의 생선찌게, '이모집'의 불고기와 간장게장, ‘종로찌게’의 내장탕도 괜찮다.
전형적 대폿집 분위기까지 찾는다면 '여자만'의 꼬막과 병어무침, '푸른별 이야기'의 산초 두부,
'시인'의 생선구이, '피맛골'의 양푼막걸리와 고갈비는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색다른 먹거리다.
해장국으로는 풍류사랑'에서 맛보는 올갱이국이 별미고,
술집마담의 눈웃음이 그리우면 '인사동사람들'이나 '소담'에서 맥주를 마시면 된다.
비주류를 위한 찻집도 여럿 있다. 작설차하면 ‘수희제’와 ‘초당’이고, 모과차하면 ‘귀천’이다.

인사동에서 만나면 인사말은 접고, 맛있는 집에 가서 대포나 한 잔 합시다!


조문호(사진가)








삼십 여 년의 세월동안 뻔질나게 인사동을 드나들었다. 이곳이 나에게 생업의 공간은 아니었지만,
약속의 거리였고 만남의 자리였고 어울림의 터전 이었다. 가까이 있으면 즐거워지고 행복해지는
사람들과 만나 많이 떠들고 웃어댔다. 그 세월동안 나에게 모든 길은 인사동으로 통하였다.

골동품이니 예술품이니 하는 것들에는 별로 관심두지 않았다. 오로지 아름다운 사람들에게 마음
쏠렸다. 삶의 기쁨을 주는 어울림을 찾아 자꾸만 인사동으로 갔다. 때때로 취해서 꼴갑 떨어 빈축
을 사기도 했다. 대책 없이 껄덕대기도 많이 했다. 그러다 바람맞아 쓸쓸해지기도 했다.

거리의 여기 저기 아늑한 공간을 마련해 두고 술과 차와 먹거리를 준비해서 우리를 기다리는 상냥
한 여인네들이 사랑스러웠다. 그 오붓한 잔치마당에서 이야기가 난무하고 웃음이 어울어지고
정보가 소통하고 설왕설래가 이루어졌다.

그리운 사람들 정겨운 사람들의 기억이 오롯이 담겨있는 인사동에 지금도 나는 소속되어 있다.






구중관(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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