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월 초 후배기자인 문창석(조선투위 출신으로, 해직 뒤 기업에 투신하여 <두산그릅>의 광고회사사장직 역임)이 그의 아들 주례 부탁 건으로 인사동에 왔다. 만난 장소는 낙원상가 옆 <커피 빈>이란 체인 찻집.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문창석은 자신이 낙원동에서 태어나 교동초등학교와 경기중고교를 다녔다며 지금과는 사뭇 달라진 4-50년 전의 이 동네 풍경을 떠올리는 동안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순간 나는 어머니가 1935년 쯤 언젠가 처음 찾아간 병원이 인사동의 <신필호 산부인과>였다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으니 이 동네와는 뱃속부터 인연을 갖고 있던 거군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세간에 오르내리는 통상의 ‘인사동’은 서울시 종로구의 행정 구역과는 사뭇 다르다. 고유의 인사동을 포함하여 종로2가, 공평동, 경운동, 관훈동, 낙원동, 안국동 등이 통칭 ‘인사동’에 속하는데 여기에 자주 드나드는 사람들도 조차 종로 토박이가 아니면 어디가 공평동이가 경운동인지를 잘 알지 못 한다. “옛날 화신 뒤”, “낙원 상가에서 천도교 예식장 올라가는 쪽”, “<지하철 안국역>에서 내려오다 우측으로 두 번 째 골목”, 혹은 “조계사 건너 편 골목” 하는 식으로 위치를 지시한다. 이를 테면 런던의 ‘소호(Soho)', 파리의 ‘몽빠르나스(Montparnasse)’ 혹은 뉴욕의 ‘그린위치 빌리지(Greenwich Village’가 그런 것이나 마찬가지다. 원래 편지 봉투에 쓰는 동네 이름-번지수는 생활기억과 생판 다른 법이니까.

1947년 가을 당시의 38선 이북 강원도 김화에서 서울에 온 우리 가족은 용산고등학교 뒤 해방촌 판자 집에 자리를 잡은 이래 6.25까지 두어 번 이사를 다녔으나 모두 용산 일대를 벗어나지 못하였던 까닭에 종로는 20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발을 디딘 것이나 다름없다. 1954년 여름 대학 입시를 앞둔 해의 여름방학 동안 조계사 건너 편 쯤에 있던 프랑스어 강습소(작고한 이휘영 교수가 창설한 <CEF>)를 다닌 것이 선후로 하면 최초의 인상동 출입에 해당하지만 그 때의 기억으로 남는 것이 전혀 없다. 동무의 집이나 빵집, 책방 같은 곳을 빼놓고 불량기 없는 10대 소년이 도시 풍경을 추억으로 재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20대 초의 나는 문학에 심취한, 다분히 아류 실존주의 방황아 였다. 이런 부류의 젊은이들이 모이는 곳이 지금 같으면 강북의 대학로나 신촌, 그리고 강남의 신사동 혹은 압구정동 일대로 여러 곳인데 그 때는 명동이 거의 유일한 모임 터였다. 서양 고전 음악 레고드 판을 틀어주는 <돌체>라는 다방과 그 주변의 술집으로 한정되었던 꼴이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인사동 사람들>로 이어지는 <돌체> 출신은 신경림, 채현국, 황명걸 등 대 여섯이 전부인데 거기서 천상병과 박은국(필명 박이엽)은 이미 고인이다. 뒤에 말하겠지만 <돌체> 패거리는 거피, 음악 감상, 술, 거기다가 바둑이 사람들 사이의 정(情)을 엮는 매개물이었다. 프랑스 대 혁명전 계몽주의 지식인들이 거리의 의협이나 건달들과 어울려 놀던 곳이 파리 센 강 우안(右岸)의 <팔레 로아얄>(Palais-Royal)인데 거기가 체스 놀이의 중심부였다는 사실은 위의 네 가지를 다 좋아하는 나에게 솔직하게 매우 끌리는 대목이다.

절대왕정에 충성하는 관헌들의 탄압을 견뎌가며 20년에 걸친 긴 세월동안 <백과 전서>를 완성한 계몽주의 철인 디드로(Diderot)가 틈만 나면 팔레 로아얄 근방을 어슬렁거리며 체스 꾼들의 노름판을 어께너머로 내려다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던 모양이다. 거기에 자주 출입하는 날라리 재사(才士) <라모의 조카>(Le neveu de Rameau)와 만나 디드로는 당세의 부패, 허위, 자기기만을 가차 없이 논박하는 상상(想像)의 대화록을 사후에 남겼다. 디드로에 견주는 것은 조금 지나치다 하더라도 암울한 분단시대의 본질을 꿰뚫어 보던 명철한 분을 인사동 사람들 가운데서 꼽아보라면 청구자 민병산(靑丘子 閔丙山, 1928-88)과 노촌 이구영(老村 李九榮, 1921-2006년)을 나는 주저하지 않고 들겠다.

본격적으로 출입한 초기(1960년대)의 인사동은 그 한가운데가 아니라 그 주변부인 낙원상가 건립 이전의 판자 집촌 험한 곳이었다. 술값이 쌀뿐 아니라 통금이 엄한 시절에 밤새 퍼 마실 수 있고 시중드는 여인들을 쉽게 조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일보> 선배기자인 남재희(국회의원으로 여당 중앙위원장을 역임), 손세일(국회의원으로 야당 원내 총무 역임)과 셋이 밤새 것 마시다 주량이 기중 약한 손세일이 먼저 고라 떨어지자 둘은 그의 귀두에 불침을 놓는 장난을 서슴치 않았다. 거기서 동쪽으로 1백미터 쯤 가면 세칭 <종삼>(당시 서울의 대표적 사창가)으로 이어 지는 점이 낙원동의 매력이라면 매력인데 이 험한 동네는 낙원상가 부면의 개천이 복개되면서 사창가는 지금의 피카딜리 극장 북쪽으로 축소되자 매력도 반감되었다고 보면 어떨지 모르겠다.

<창비> 발간을 전후하여 나와 특별히 가까워진 백낙청은 60년대 후반 신혼 살림을 운니동 <운당여관> 근처의 조그마한 한옥 집에 차렸다. 그에 집을 방문하기위해 인사동을 지나갈 때가 여러 차례 있었으나 인사동 근방에서 술 추념을 한 적은 거의 없었다. 나이가 30을 넘은 탓도 있으려니와 박정희의 3선 개헌 직전부터 지식인 탄압이 노골화하자 주변 친구들이 몹시 위축된 것이 음주 행각에 제동이 걸렸던 것이나 아니지 모르겠다. 그런 가운데 백낙청은 박사학위취득을 위해 미국에 갔고 나는 나대로 1971년 프랑스 정부초청으로 1년간 파리에 간 것이 인사동에 한동안 발을 드려놓지 못한 시기다. 그러다 1972년 유신쿠데타, 1974년 민주회복 국민선언, 1975년의 <조선일보 자유언론 투쟁위원회, 약칭 조선투위>와 <동아일보 자유언론 투쟁위원회, 약칭 동아투위>출범을 비롯한 이른바 반체제 지식인 운동이 시작되면서 낙원동 험한 동네를 어울려 출입하던 기자시절의 술친구들과는 각기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내가 1974년 <한국일보>의 논설위원으로 일자리를 옮길 지음 미국에서 돌아온 백낙청은 <창작과 비평사> 사무실을 수송동(지금 <연합통신사> 입구)에 차리자 이른바 반체제 지식인들은 인사동의 한참 서쪽인 광화문 교보빌딩 뒷켠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종로 1가, 청진동, 무교동, 다동 일대인데 <동아투위> 사무실, 소설가 천승세가 경영하는 바둑 집, 그리고 나 개인으로 말하면 오랜 친구 채현국-박윤배의 회사 사무실이 거기에 있었던 터였다.

이 지음 술판에는 문인과 해직언론인 만이 아니라 인권 변호사 강신옥, 홍성우, 조준희등이 어울릴 때가 있었다. 시인 김지하, 언론인 리영희, 경제학자 박현채 등의 옥바라지(석방 탄원서 만들어 도리기, <비둘기 날리기>라는 이름의 옥중 서신 내보내기, 病棟 옮기기, 방청인 모으기...)가 몰고 온 변화였다. 술자리의 외연확대라 해도 좋을 것인데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김정남(문민정부의 대통령 교육문화 담당 수석 비서관) 이다. 투옥되는 사람들에 변호인을 부치는 문제는 말할 나위 없고 옥바라지와 연루자들의 은신처와 도피자금을 마련하는 일까지, 반체제 운동의 전위(前衛)라는 말이 허용된다면, 김정남이야 말로 생색나지 않는 그 後衛의 어려운 일들을 도맡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또 한 사람은 건축가 조건영이다. 그는 미술가, 문인, 해직언론인, 반체제 지식인 운동가들을 두루 연결시켜주었을 뿐 아니라 헤어질 때는 의례 술값을 내는 처지였다. 내가 <합동통신> 기자 김태홍(1980년 <한국기자협회>회장을 지내고 현재 국회 보건복지위원장)을 알게 된 것은 조건영의 소개였다. 어찌되었건 간에 전두환 쿠데타 직후 김태홍이 피신을 도운 그는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악명 높은 이근안으로부터 김태홍의 소재를 대라는 참혹한 고문을 당했다. 본인들이 달가워하던 아니던 간에 ‘인사동 사람들’이 표현이 좋은 뜻으로 쓰인다면 그 범주에 나는 김정남과 조건영 두 사람을 꼭 넣고 싶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형편대로 펜대를 굴린다면 당연히 서대문-마포시대로 가야한다. <창작과 비평사>, <실천문학사>와 같은 반체제 출판사들의 대부분, 그리고 <자유 실천 문인 협의회>, <민주언론운동연합>의 사무실이 그 쪽에(서대문-마포) 있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이 글의 주제인 ‘인사동 사람들’에 충실하기 위해서 부득이 마포시대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서둘러 인사동으로 되돌아와야겠다. 70년대 후반 밥벌이를 하던 중학동의 <한국일보사>에서 인사동 까지는 걸어서 5분 정도의 가까운 거리여서 회사 동료들이 인사동을 자주 출입하였지만 나는 그들과 어울려 시시덕거리는 것을 의도적으로 삼갔다. 고백하거니와 그들과 나는 다른 종류의 인간이라는 자부심, 아니 교만한 감정에 차 있었다던 것이다. 술자리에서 어울리는 친구들이라면 채현국-박윤배 등의 오래된 동무들, 백낙청과 <창비> 주변 지식인들, <조선투위>, <동아투위>의 해직 기자들, <한국일보>의 박정삼등 노조운동가들이 전부였는데 거기다 한 그릅을 더 보탠다면 관철동의 <한국기원>에서 자주 만나던 문인(민병산, 민영, 신경림, 구중서, 황명걸, 방영웅 등)들이다.

회사동료들과 섞기기 싫어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긴 했어도 인사동에 가서 밥을 먹은 일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무렵 우연하게 어떤 이가 부실한 나의 뇌력(腦力)을 보태주었는데 또렷이 떠오르는 것은 속칭 인사동 네거리에 있었던 <천향각>(天香閣)이란 이름의 중국 음식점이다. 거기 간 것은 당시 <한국일보> 여기자 안정숙(1980년 해직 후 <한겨레>기자를 거쳐 <한국영화위원회>위원장)의 남편(그 때는 결혼전 교제중이였는지 확실치 않다)인 학생 운동가 원혜영(부천시장 역임후, 열린우리당 사무총장)이 예고 없이 회사로 나를 찾아왔을 때였다. <한국일보사> 사원에 외상이 통하는 제법 번듯한 음식점중의 하나가 <천향각>이 였는데 ‘좋은 후배 셋’을 달고 온 원혜영 일당에게 막소주와 김치찌개를 먹여 보내서는 안 되겠다는 나름의 배려가 거길 찾게 했던 것 같다. 고급 청요리을 시킨 것은 아니고 탕수육 하나에 잡채 하나, 백알 두세 병, 그리고 짜장 면이 다였을 성싶다. 원혜영과 같이 왔던 ‘좋은 후배’ 중의 하나가 권형택(민주화 기념 전당 건립준비위원장)이며 그의 안사람 황인숙은 진짜 ‘인사동 사람들’이라면 누구 하나 빼놓지 않고 잘 알 다섯 평짜리 카페 <하가>를 지금 경영한다. 원혜영 일당에 내가 저녁을 샀던 것, 그 자리에 동석했던 ‘좋은 후배’의 하나가 자신임을 일깨워준 사람이 바로 권형택 이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그가 <천향각>이란 이름의 중국집이 30년전에 인사동에 있었다는 을 생판 모르는 거였다. 한 세대의 차이가 공간 개념에서, 구체적으로는 인사동 풍경의 기억에서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세월의 덧없음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1978년 인사동에 자주 갈 일이 생겼다. <조선투위>의 원원장 정태기기(현재 <한겨레신문> 사장)가 <두레> 출판사 겸 투위 사무실을 지금의 <민예총> 사무실 옆 ‘건국대 주자창’의 옛 건물에 차린 결과였다. 출판 일을 돕는다는 것은 구실이고 거기에 해직기자, 제적생(운동권 젊은이)만이 아니라 젊은 문인과 미술가들이 이따금 들리는 판이라 이들과 어울리는 것이 유신 말기의 낙이라면 낙이었다. 더구나 의협의 사나이로 불리는 나의 오랜 동무 박윤배가 탄광회사 사무실을 경운동에 차렸던 것도 인사동 근방으로 발길이 잦아지는 동기였다. 신문사에서 틈만 나면 정태기와 박윤배의 사무실에 놀러가는 것이 일과처럼 되었는데 그 어간에 박정희가 김재규에 피격당해 사망한 10.26이 일어났다. 그 때부터 전두환의 쿠데타까지의 반년동안은 인사동 사람들과 빈번하게 조우하지 못했던 것만은 확실하나 5.18 광주항쟁의 유혈 사태로 이어진 직후 나는 논설위원 가운데서 제일 믿을만한 선배 이열모에게 양해를 구하고 달포가량 집과 회사를 비우는 이른바 ‘잠수함타기’(피신 생활)를 하다가 목이 잘렸다. 그 어간에 잊혀지지 않는 것은 조건영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광주의 참혹한 살육극의 실상을 전하면서 현장을 찍은 기자의 사진을 구할 수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 세계 여론에 호소하겠는 거였다. 사진에 대한 사례는 요구하는 대로 내겠노라고 하였다. 한두 군데 수소문을 해보았으나 겁에 질린 기자들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고개를 가로저을 뿐 그런 사진은 없다는 거였다. 살육 현장 사진을 외국에 내보내려던 계획이 불발로 그친 것은 내가 조건영에게 진 마음의 빗으로 남아있다.

전두환 후기의 인사동은 독일군 점령하의 파리 몽빠르나스가 그랬듯이 생기와는 거리가 먼 뜬금없이 북적대기만 하던 곳. 전두환이 만든 정당(민정당)의 거대한 당사가 인사동에 있었던 것이 그런 느낌을 한층 짙게 했다. 박정희에 반대하던 민주당 당사가 인사동 입구에 있었던 터라 그를 의식한 나머지 “정당은 전두환 ‘익찬 정당’(翼贊 政黨) 밖에 없다”는 것을 시민들에게 과시하려했던 것은 아닐까. 좁은 인사동 길에 검은 색깔의 고급 세단이 뻔질나게 드나드는 것은 정말 기분을 잡쳤다. 하지만 세상은 변하는 것이고 특히 국민을 폭압으로 내리누르는 세상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그 이후의 인사동 변모가 말해준다.

6월 항쟁의 맏딸로서 독립된 신문을 표방하는 <한겨레>가 창간 준비위원회사무실을 안국동 풍문여고 옆 안국빌딍 4층에 마련한 것은 1987년 9월의 일이다. 창간 준비위원회회 진용은 사무국장 정태기, 사무차장 홍수원, 대변인 이원섭이었는데 사무실을 여기다 얻은 것은 정태기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집권정당의 당사로부터 직선거리 1백미터 안, 종로 한가운데에 “민족에게 통일을! 겨레에게 자유를!”이라는 현수막을 내다 부친 효과는 컸다. 전두환에게 길들여진 신문과 방송에 대한 거부감이 중요한 원인이었겠지만 짧은 기간에 50억원 이상의 신문 창간기금을 거두었던 것이다. 권근술, 김명걸송건호, 성유보, 성한표, 신홍범, 윤활식, 이병주 등과 함께 창간준비위원회의 한 멤버였던 나는 반년 가까이 인사동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는 몸이 되었던 것은 종생 잊지 못할 인연이다. 인사동의 터가 좋아 창간 기금이 수월하게 걷혔다고 하면 망발이겠으나 천시(天時)와 함께 지리(地利)의 덕을 단단히 보았다고 해도 풍수론자의 고리타분한 이야기는 아닐 줄 안다. 창간준비워원회의 멤버들은 일정기간이나마 넓은 뜻의 인사동 사람이 된 셈인데 나는 이 때 미술가 패(창작가, 비평가, 활동가)들 여럿과 사귀었다. 김용태, 김정헌, 민정기, 성완경, 여운, 유청장, 임옥상, 주재환 등은 80년대 초에 <현실과 발언>(약칭, 현발)이란 모임을 만들어 세상 돌아가는 꼬리지에 아랑곳 하지 않고 따스한 풍경과 추상화에 몰두하던 주류 미술계에 칼을 꽂았던 것이다. <현발>의 김인순, 노원희등의 여류 화가들 몇과는 가벼운 농을 주고 받는 사이다. 김용태는 모금활동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고, 유홍준(영남대 교수로 문화재청 청장)은 조선조에 나온 고 활자체(古 活字體)를 깡그리 뒤지다 시피 하여 <한겨레 신문>의 다섯 글자를 집조하여 제호를 만들어 주는 공을 들였다. 젊은 독자층이 고풍스런 옛 활자체에 정나미가 떨어진다고 하여 창간 몇해 뒤에 지금의 디자인 체의 <한겨레> 제호를 만든 모양인데 나는 오히려 그것에 호감이 안 간다.

창간준비 시절의 인사동의 뭉클한 기억은 역시 사람들의 모습이다. 2-30명의 수습 사원을 모집한다는 광고에 수천의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신청서 접수 마감 날에는 안국빌딩에서 풍문여고를 지나 덕성여고 까지 줄을 이었던 글자그대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그 때 수습기자 1기로 들어 온 기자로서 지금 중견 언론인으로 활약중인 사람이 곽노필, 곽정수, 여현호, 이주명, 최00 등이다. 돈 벌이라고는 전혀 하지 못하는 창간준비위원들이 점심은 인사동의 <누님국수>에서 차는 <수희재>에서 드는 일이 흔했다. 월급 많이 주는 <동아일보>의 환경부차장 직을 내동댕이치고 <한겨레신문>에 참여한 여기자 지영선이 인사동 어느 한식집에서 우리가 고생한다고 저녁을 한 턱 냈다. 갸륵한 마음씨의 주인공 지영선은 <한겨레신문>을 졸업하고 2006년 초 외교부의 보스턴 총영사로 특임되었다.

<한겨레신문>의 창간을 준비하던 때 인사동 사람 틈에 슬며시 끼어 든 나 역시 신문사 현업을 마감한 다음, 1995년 1월 백낙청의 도움을 받아 이 동네에 조그마한 공간(낙원동 58번지 종로오피스텔)을 마련했다. 왜 하필 인사동인가를 누가 따진다면 “거기가 좋아서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지만 공간의 위치가 이곳으로 된 데는 바둑이 단단히 한 몫 했다. 1994년 쯤 공평동의 어떤 바둑 집에 일주일에 한 번씩 민주화 운동 패거리들이 모여 바둑을 두었는데 김용태, 김정헌, 나병식, 유인태, 이현배, 최민화 등이 자주 나오는 편이었다. <한겨레신문> 창간 초 사옥이 영동포 양평동에 있을 시절부터 성유보와 나는 단 둘이 만날 때 틈만 나면 바둑을 두던 버릇이 신문사를 떠난 다음 공평동 바둑 집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문인과 기자들이 자주 가는 카페 <평화만들기>의 주인 이해림에게 부탁하여 바둑 판을 준비하도록 하고 아예 대낮부터 거기서 바둑을 두는 거였다. 어떤 날은 저녁 손님이 오건 말건 우리 둘은 왁자지껄하는 술집 한 구석에서 바둑에 열을 올릴 정도였으니 확실히 도를 지나쳤던 짓거리다. 보다 못한 이해림은 조그마한 오피스 텔을 알아보겠노라 해서 정한 것이 지금의 내 인사동 공간이다. 바둑 이야기가 나온 김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인사동 사람 김용태다. 그의 친화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지임을 인정한다면 그 친화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물론 허튼 소리지만 김용태 친화력 요소에서 소주와 바둑은 중요 항목이다. 조금 과장하여 낙원동의 내 오피스텔과 그의 민예총 사무실은 큰 소리로 부르면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다. 옛날 동무가 한 둘씩 이승을 하직하는 노년의 저널리스트는 열이면 아흡 외로워지는 법인데 나는 인사동의 지리와 인화(人和) 덕분에 외로움을 덜 타는 행운을 누린다.

세상이 바뀌는 것처럼 인사동의 사람 얼굴들이 바뀌는 것은 정한 이치다. 1998년부터 2-3년간은 지금 정계와 관계에서 활약하는 김도현, 유인태, 유홍준, 이강철, 이철을 인사동의 바둑집이나 술집에서 만나기가 쉬웠지만 그들은 지금 매우 바빠졌다. 하지만 나는 10년 여일이다. 민예총의 회장 김용태는 말할 나위 없고 거기서 일하는 간사들을 아들 딸 이상으로 부려먹는다. 민주화운동이나 문화계 인사들의 전화번호를 알려고 할 때는 민예총 팀장 김철에게, 컴퓨터가 말을 안들을 때는 임현석에게, 혼자 점심을 먹는 것이 참기 어려울 만큼 못 견딜 때는 민사협의 김영수 회장과 정인숙 사무국장에 전화를 건다. 또 바둑을 두고 싶으면 <환경운동연합> 윤준하와 작가 배평모에게 그쪽의 사정을 뭇지도 않고 만나자고 한다. 이런 부탁들이 성사되는 경우에는 무척 기쁘다. 사진 작가 조문호가 인사동에 관한 글을 써달라고 하는데 왜 거절하겠는가.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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