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 정영신의 장터순례(2) 경북 경주 건천장 (2013.1.15)
-짐보따리 늘때마다 이야기보따리도 술술~
슬레이트 지붕·함석 미닫이문…
전통시장의 맛과 멋 고스란히
닷새마다 한번씩 침묵을
깨우는
할머니들의 생기가 넘치는 곳

“아지매, 무슨 소리 합니꺼. 오늘 새벽에 바로 가져온 거라예. 마, 사기 싫으면 사지 마소.”
채소 파는 박씨 아저씨가 흥분을 한다.
“아, 그기 아이고, 함 물어 보는 거 아입니꺼. 물어 보지도 못하는기요.”
물건을 사려는 손씨 아주머니도 지지 않고 대꾸한다. 한푼이라도 싸게 사려고 물건에 트집을 잡아 보려다 들킨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기어들어간다.
“좀 깎아 주이소. 아이마 좀 더 넣어 주든가.”
박씨 아저씨는 덤과 함께 마음까지 봉지 속에 담는다. 장터에선 물건을 사는 사람들은 값을 깎거나 더 달라고 조르고, 파는 사람은 남는 게
없다며 입씨름을 하는 풍경을 종종 보게 된다. 그러다가 정이 들면 서로 단골이 되어 장날마다 만난다는 게 경북 경주 건천장 채소 장수 박씨
아저씨 이야기다.
닷새마다 경북 경주시 건천읍 건천리 신경주농협 사거리 50m 안쪽에 장이 펼쳐진다. 1914년에 개설된 건천장이다. 이 장터는 옛날
장옥을 지금껏 유지하고 있어 전통의 멋과 맛이 그대로 묻어난다. 장옥을 덮고 있는 슬레이트 지붕과 함석으로 된 미닫이문은 시간을 뒤로 거슬러
가는, 일부러 만들어 놓은 풍경처럼 보인다.
하지만 닷새마다 찾아오는 장날이면 지금도 함석문 여는 소리가 회색으로 번지며 잠들어 있던
들녘의 침묵을 깨우고, 장터는 이윽고 사람들 사는 이야기로 생기가 돈다.
누군가가 꾹꾹 눌러 뒀던 콩이며 깨를 들고 나와 장터 한쪽 양지바른 곳에 펼쳐 놓았다. 주인은 온데간데없고 물건이 손님을 맞이하고 있는
것 같다. 그새 나타난 김씨 할머니(78)가 “이 할마이보다 이놈들이 더 잘나 보이제” 하며 빙긋이 웃는다. 할머니는 드넓은 밭에 콩을 심어
놓았는데, 어느 고랑에서 순이 가장 먼저 돋아나고 어느 콩대에 마지막으로 해가 스며드는지 훤히 안다고 한다. 장날이면 그 햇살도 김씨 할머니
보따리에 숨어 따라 나온다.
날도 추운데 집에서 쉬지 장에는 왜 나오셨냐는 물음에, 할머니는 “지구가 꽁꽁 얼어붙어도 장에는 나온다”고
답한다. 짐 보따리와 함께한 세월이 많이도 흘렀다는 할머니는 “장에 나오는 것이 낙”이라고 한다. 할머니 옆에서 시골의 흙과 나무에서 흘러나왔을
법한 푸르디푸른 이야기를 쪼그리고 앉아 들었다.
집에 혼자 있기 싫어 농사지은 것 몇가지 들고 나온다는 시골 할머니들. 그들이
소일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장터다. 할머니들은 “시대가 바뀌어도 변해서는 안 되는 것이 사람 사이의 끈끈한 정”이라면서, 빙 둘러앉아 점심을
먹는다. 그러면서 고단한 인생사를 털어놓기도 한다.
시골 장터에 있으면 고향에 온 것 같다. 고향을 지켜 온 사람들, 그들이 만들어낸 시간이 오롯이 살아 있어서다. 옷가지와 버선을 파는
한씨 할머니(80)는 장터 함석문을 여닫은 지 벌써 53년이다. 53년째 단골로 오다 정이 들어 장날마다 놀러오는 친구도 여럿이다. 오늘은 콩
두어대를 갖고 나온 단골 할머니 손님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동년배 할머니들 취향에 딱 맞는 물건을 갖추어서인지,
한씨 할머니 가게는 이 동네 할머니들의 사랑방이 되기도 한다. 이곳에 앉아 있다 보면 요즘 참깨 한되가 얼만지 콩 한되가 얼만지는 대번에 알 수
있다. 할머니들 입에서 많은 이야기꽃이 피었다 사라지고, 몇몇 이야기는 바람 따라 건넛마을까지 전해지기도 한다.
여자들의 외출이
자유롭지 못하던 옛날, 우리네 어머니들은 방물장수라 불리던 여자 행상에게 물건을 사면서 바깥세상 돌아가는 소식이며 이웃 동네의 잡다한
사건·사고를 접했다. 건천장에서 만난 싹싹한 총각 이효준씨(28)는 그 옛날 방물장수처럼 온갖 화장품을 짊어지고 농촌 마을과 시골 장터를
찾아다닌 지 올해로 2년이란다. 효준씨는 생선 파는 이씨 아주머니 입술에 빨간 립스틱을 칠해 주면서 서비스라고 했다. “장터 아주머니들과
친해지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며 말끝을 흐리는 효준씨. 그의 미소가 건강해 보인다.
파장 무렵이 되자 어물전에서는 여인네들이 모여
소주 한잔씩을 주고받는다.
“몸과 속이 퍼졌을 때 이만한 기 없데이.”
장을 지키는 사람들이나 장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장날은
여전히 축제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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