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 정영신의 장터순례(1) 경남 거창장 (2013.1.5)
"저 호랑이 담요 속에는 뭐가 있을까?"
지리산·덕유산 자락에 위치
옷걸이엔 꽃처럼 걸린 곶감
길
위엔 무말랭이·깻잎절임…
언몸 녹이며 ‘따뜻한 정’
팔아

동이 트기 시작한 장터 바닥에 경운기가 들어서더니 길바닥 위로 빨간 담요가 눕는다. 담요 위에는 노부부가 기른 배추가 장보러 나와 다소곳이 앉아 있다.
배추가 얼까봐 호랑이가 그려진 담요를 덮어 주는 이씨 할머니(73)는 전문 장사꾼이 아닌 지역 주민이다. 장날이면 영감님 경운기를 타고 농산물을 갖고 나오는 것이다. 장터는 이렇게 땅과 더불어 살아가는 농민이 주인이다. 새벽 장을 준비하는 모습에서 그 지방 정서가 묻어나는 진짜 삶을 엿보게 된다.
1968년 거창공설시장이 들어서면서 상설시장과 오일장이 함께 열리는 거창장(경남 거창군 거창읍 중앙리)이 영호강 둔치를 따라 펼쳐진다. 난장에는 장돌뱅이보다 지역 주민의 농산물이 더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겨울날 장터는 추위와 싸우는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쓰다 버린 양철 냄비 등에 갈탄 몇개 담아 놓고 불을 껴안고 있는 게 전부다. 이곳 난장에서 장사하는 할머니들도 양철통 밑에 촛불 두어개 켜 놓고 앉아서 물건이 팔릴 때까지 견딘다. 다른 이들은 장에 나와 있으면서도 물건을 섣불리 풀려고도 하지 않아 보따리가 수직으로 서 있다. 보통 때는 해도 뜨기 전에 할머니들이 나와 자리다툼으로 언성을 높이곤 하는데, 추운 날에는 할머니들이 많이 나오지 않아 서로 난로를 빌려 주기도 하고 촛불 의자에 번갈아 앉아 있기도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지리산과 덕유산 자락에 위치한 거창장은 다른 장과 다르게 계절별로 장 색깔이 뚜렷하다. 그러나 겨울철에는 아껴 두었던 농산물을 조금씩 갖고 나올 뿐이다. 겨울에는 ‘장터의 꽃’으로 곶감이 많이 나온다. 시골 농가에서 말린 곶감들은 꽃봉오리처럼 옷걸이에 걸려 있다.
거창읍 양평리에서 사과 농장을 하는 성씨 아주머니(59)는 사과와 밭에서 기른 채소를 갖고 나왔다. 감이며 우거지 말린 것과 무말랭이를 펼쳐 놓고 모닥불이 있는 곳만 찾아다닌다. 주인이 없어도 난전에 펼쳐져 있는 물건에 손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장사가 목숨줄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소일거리 삼아 나오는 사람도 있다. 우두커니 혼자 집에 있자니 사람이 그리워 장터로 나온다.
대구에서 온 부부 장돌뱅이는 새벽부터 나와 손님들을 맞는다. 부부는 옷가지 등을 5000원에서 8000원에 파는데, 보따리를 풀기도 전에 사람들이 몰려든다. 잘만 고르면 횡재할 수 있어 장날이면 일찍부터 나와서 기다린다는 젊은 친구도 있다.
시골 장터를 찾는 재미는 뭐니 뭐니 해도 그 지역의 농산물을 저렴한 가격으로 살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한다. 또한 그 지역의 역사와 전통이 그대로 살아 숨 쉬고 있기도 하다.
장날이면 자연도 할머니 보따리에 숨어 나와 사람들을 만난다. 내가 어렸을 적 장날은 마을의 축제였다. 동구 밖을 나서는 동네 어르신들 뒤로 아이들도 하나둘 따라가곤 했다. 엿장수 가위질 소리에 맞추어 동요도 부르고, 약장수 옆에 쪼그리고 앉아 신기한 동물들을 구경하다가 엄마를 놓칠 때도 있었다. 이렇듯 옛날 장터는 시골 농가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물건들과 많은 사람들을 접할 수 있는 복합적인 문화공간이었다.
지금 우리는 집에 앉아서 인터넷으로 물건을 사고파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어느 동네나 마트나 편의점들이 있어 필요한 물건은 언제든 살 수 있다. 그러나 시골 장터에 가면 사람과 사람이 나누는 끈끈한 정이 살아 있다. 아흔을 넘긴 할머니가 간장에 절인 깻잎 한 통 갖고 나와 사람들을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거창장이 열리는 1, 6일이면, 자연의 소리가 사람들이 살아가는 소리로 바뀌어 장터 속으로 스며든다.
●정영신:1958년
전남 함평 출생으로, 1987년부터 전국의 시골 장터를 기록해 온 사진가이며 소설가이다. 개인전 <정영신의 시골 장터>(2008,
정선아리랑제 설치전), <정영신의 장터>(2012, 덕원갤러리) 및 다수의 단체전을 열었다. 지은 책으로는 <시골 장터
이야기>(2002, 진선출판사), <한국의 장터>(2012, 눈빛)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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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생각" 1월호(24일 목요일)에 게재된 정영신의 글입니다.
"시금치 할머니"
눈이 내린 겨울장터는 장작불의 훈훈한 공기가 바람 길을 따라 장터 안으로 들어간다. 예산역전장을 찾았을 때도 눈발이 듬성듬성 내리는 영하의 날씨였다. 농번기철이 아닌 겨울에는 사람들이 장터로 모여들기 때문에 활기가 넘친다. 새벽부터 장터입구에 장작불을 지펴놓고 전을 피면서 몸을 녹이는 모습은 겨울에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길이 미끄러워 아들의 리어카를 타고 나온 이씨(83세)할머니는 마당에 가득 쌓인 시금치를 팔기위해 장터에 왔다. 수레에 방석을 깔아놓아 편안하게 장에 나올 수 있었다며 아들자랑이 대단하다. 장세 몇 백 원이면 해 질 때까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장날이면 새벽부터 집안이 부산하다며 소녀 같은 미소를 띤다.
이씨 할머니는 비나 눈이 오는 날에는 아들이 장에 데려다 주지 않아, 장터풍경을 떠올리며 오늘은 장에 누가 나왔을까 궁금해 한다고 했다. 유모차 같은 손수레를 의지한 채 친구가 장터에 나오면 두 손을 붙들고 이야기하는 모습이 마치 햇빛이 마중 나오는것만 같다. 아는 사람을 만나면 비닐봉지에 시금치를 꾹꾹 눌러 담아주는 정성이 보는 사람의 마음을 훈훈하게 한다.
장에 나오는 할머니들은 장터골목을 끼고 난장에서 장사를 한다. 겨울이면 촛불 두세 개로 난로를 만들어 추위를 이기는 실정이다. 허나 이씨 할머니는 아들이 땅바닥에 이불을 깔고 연탄화덕까지 준비해 줘 따뜻하게 장사한다. 아들이 수레에서 시금치를 가져와 할머니 앞에 펼쳐 놓으면 상점이 만들어진다. 할머니는 연신 아들을 화덕 앞으로 불러 세우지만 할머니 뒤에서 서 있을 뿐이다.
이천 원이면 시금치를 봉지가득 담아 갈 수 있는데도 할머니가 장사하니까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 많다. 장이 끝나갈 때까지 팔리지 않은 시금치는 주위에 있는 장꾼들에게 나누어 준다. 추위 속에서 장사하는 엄마를 위해 따뜻한 물을 건네는 아들의 손등을 어루만지는 할머니모습, 그 아름다운 풍경을 사진이 아닌 마음속에 담아본다. 번듯한 자리는 아니지만 엄마와 아들이 펼치는 노점이 한겨울 장터의 이름 없는 들꽃처럼 아름답다.
파장 무렵이면 아들은 수레에 이불을 깔고 엄마를 번쩍 안아 태운다. 장사가 잘되는 날이면 엄마와 아들이 외식을 한다. 국밥집에서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엄마와 아들을 사진 속에서 훔쳐보고 싶다.
정영신(사진가,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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