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6일 정오무렵, 한정식선생님을 모시고 사진가 전민조, 정영신, 눈빛출판사 이규상씨와 어울려 인천의 사진공간 "배다리"를 찿았다.
그 곳에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김보섭씨의 "양키시장"이 전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천이 고향인 작가는 오랫동안 인천지역을 중심으로 한 사진기록에만 전념해 올 정도로 인천에 대한 애정이 지극하였다.

점차 변모해 가는 주변환경에 안타까워하며 그동안 "인천 차이나 타운", "양키시장"등을 기록한 여덟번의 개인전을 가지기도 했다.
다큐멘터리 사진 자체가 재미없고 돈 않 된되는 힘든 작업이지만, 누군가는 하지않으면 않될 중요한 일이기에...

인천 금곡동(배다리시장, 헌책방길 옆)에 있는 사진공간 배다리 포토갤러리(010-5400-0897)에서 오는 4월 3일까지 전시되는

김보섭씨의 "양키시장"은 어려웠던 시절의 아련한 추억을 떠 올리게 하는 사물들과 그 곳에서 평생을 살아왔던 보통사람들의 꾸밈없는 모

습들을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전시작품들을 감상한 후 머지않아 전설이 되고 말 "양키시장"도 한 번 돌아보았다.

내 사춘기 시절의 양키시장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 당시 양키시장에는 우리가 접할 수 없었던 양주와 양담배, 군복과 청바지, 외국잡지를 비롯하여

없는 것이 없었다. 인천항에서, PX에서 흘러 나오는 군용물품들이 양키시장을 채웠는데, 없는 것도 구해 달라면 무엇이던 구해주던 그런 곳이었다.
한 평 남짓한 쇠락한 점포에는 스킨이나 통조림, 종합비타민 등 을 팔거나, 옷수선 등을 하면서 마치 박물관에 전시된 붙박이처럼 앉아 시장의 명맥을
지켜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현장을 보는 순간, 김보섭씨가 보여 준 전시작품들이 얼마나 중요하고 의미있는 작업인지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되었다.

더 늦기 전에 쓸쓸한 양키시장 골목을 거닐며 아련한 추억을 되살리는 시간여행에 나섬이 어떠할지?
시장 옆에 있는 전시장에서 작품들도 보시고, 김보섭 "양키시장"사진집도 구입하세요.
전시기간 중에는 20,000원짜리 사진집을 10,000원에 판매하니까요.

 

2013.3.31

 

 

 

 

 

 

 

 

 

 

 

 

 

 

 

 

 

 

 

 

 

 

 

 

 

 

 

 

 

 

 

 

 

 

 

 

 

 

 

 

 

 

 

 

원로 사진가 홍순태씨의 사진전 "오늘도 서울을 걷는다"가 지난 3월9일 오후5시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오프닝 행사에는 홍순태씨의 인사말과 한정식씨의 축사가 있었고, 한미사진미술관장 송영숙씨는 홍순태씨에게 특별제작한

사진집(한정본)을 증정하기도 했다. 참석 인사로는 홍순태씨 내외를 비롯하여 송영숙관장, 김한용, 강운구, 주명덕, 한정식,

황규태, 박영숙, 이완교, 구본창, 권태균, 이갑철, 최봉림, 김광수, 김녕만, 홍미선, 정영신, 윤세영씨등 많은 사진인들이

참석하였고, 전시는 5월19일까지 이어진다.

 

2013.3.10

광주은행 사보인 "향기있는 나눔" 3월호에 게재된 정영신의 글과 사진입니다.

- "예술로 만나는 남도" 오일장 기행 -은 12월까지 연재됩니다.

 

 

 

 

 

 

사진가 정영신의 장터순례(5)경기 안성장 (2013.3.1)

그 많던 보부상·놋그릇 자취 감췄지만…

대이어 정직 지키는 채소장수, 오백원짜리 무 한개에도 숨은 이야깃거리 한보따리
민초들 소통하는 Y자형 장터, 전국 3대장 명성 옛말이라 해도 토박이 발길은 오늘도 여전

 

 

어린 시절, 명절이 다가오면 마당 한쪽에 멍석을 깔아놓고 앉아 짚에 기왓가루를 묻혀 놋그릇(유기)을 닦는 아낙네들의 입은 쉴 사이가 없었다. 여인네들이 나누던 이야기가 장터에선 웃음보따리가 되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았다. 동산댁 딸내미 궁합 본 이야기, 우무치댁 영감이 윗마을 아무개를 짝사랑했었다는 케케묵은 이야기….

 아낙들이 질펀한 소문을 묻혀 가며 빛나게 닦던 놋그릇들은 이곳 안성장에서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안성장은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대구장·전주장과 함께 3대장으로 불릴 만큼 규모가 컸다. 조선 후기 박지원이 쓴 소설 <허생전>에도 남산골 서생 허생이 과일을 매점매석해 안성장에서 큰돈을 벌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구한말까지도 전국에서 보부상들이 몰려오던 곳이 안성장이다. 그러고도 오랫동안 전국 최대의 놋그릇 거래시장으로 이름 높았다. 그러나 요즘 안성장에서는 놋그릇을 사고파는 풍경을 볼 수 없다. 장터를 주름잡던 보부상들의 역할을 지금은 장돌뱅이 150여명이 대신한다.

 세월 따라 장터의 모습도 바뀌고 규모도 줄었지만, 여전히 이 지역 농촌 사람들은 장날이면 안성장으로 모여든다.

 안성장은 2일과 7일이 드는 날, 경기 안성시 서인동 안성중앙시장 주변에 ‘Y’자 형태로 들어선다. 평상시에는 자동차가 다니는 길이지만 장날만큼은 장꾼들에게 개방된다.

 얼마 전 정월대보름을 앞두고 안성장에 갔다. 장터에는 호두와 땅콩 같은 각종 부럼들이 좌판 가득 펼쳐져 있었다. 정월대보름은 예부터 마을이 함께 치르는 명절이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묵나물과 오곡밥을 나누어 먹었다. 대보름 하면 둥근달이요, 이 달은 우리네 농경 문화와 떼려야 뗄 수가 없다.

 “달과 땅은 여자와 같다”는 정예숙 할머니(82)는 올해로 32년째 안성장에서 채소를 팔고 있다. 정씨 할머니는 “어쩌다 장에서 커서 장에서 이렇게 늙어가는 것을 보면 사람의 일이란 뜻대로 안 되나 보다” 하며 웃는다. 태어나고 죽는 것도 내 의지가 아니요, 처음부터 끝까지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은 없다는 것을 장터 바닥에서 배웠다는 것이다.

 집에 돈 떨어지면 간간이 엄마를 찾아와 도와주던 것이 지금은 살아가는 일이 되어 버렸다는 할머니는 아직까지도 낭자머리에 비녀를 꽂았다. 할머니의 친정어머니는 “장사는 정직해야 오래간다”는 말씀을 자주 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장터지만 일부러 먼 길을 걸어 찾는 단골이 다 따로 있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장터에서 만나는 한사람 한사람에게는 모두 저마다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어떤 비밀이 있기에 입을 꽁꽁 다물어 버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쉴 틈 없이 말해 속내까지 훤하게 보여 주는 사람도 있다. 이런 저런 사람들이 오래도록 얼굴 맞대고 어울려 가꾸어온 장터이기에, 이곳에 있으면 돈의 흐름보다 더 귀한 것이 사람 사이의 소통임을 알게 된다. 장에서는 오백원 하는 무 하나를 사고팔 때도 얼굴과 얼굴을 마주봐야 한다. 그러면서 서로의 정이 오간다.

 장터에서는 언제나 우리네 어머니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자식들 배를 곯지 않게 하기 위해 어둑한 새벽부터 수십리 황토길을 걸어 장터에 나와 보따리를 펼쳤던 어머니들, 그들의 순수한 원형을 지금도 만날 수 있다.

 자리도 없이 도로변에 쪼그리고 앉아 메주와 보름나물을 펼쳐 놓고 파는 할머니들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임씨 할머니(87)는 직접 쒔다는 메주 세개에, 손수 농사지은 무 몇 개와 말린 가지나물 보따리를 펼쳐 놓고 있었다.

 임씨 할머니가 파는 말린 가지나물 속에는 지난 여름과 가을, 겨울이 오롯이 들어 있다. 할머니는 “봄 되면 꼭 한번 더 와” 한다. 봄나물 뜯을 때를 기다린다는 할머니의 이마 주름 위로 겨울 끝자락 햇살이 살금살금 퍼진다.

 터미널에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보따리 가득 장터 이야기를 담아 집으로 가는 사람들이다. 집 앞까지 마중 나온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보따리에 눈독을 들이고, 이윽고 안방에서는 보따리 풀자 쏟아져 나오는 온갖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울 장면이 눈에 선하다.

원로 사진가 이명동선생을 모시는 사진가들의 오찬회가 지난 25일 12시30분경 인사동 "안동국수"에서 있었다.

이번 모임에는 이명동선생을 비롯하여 한정식, 육명심, 황규태, 김녕만, 차용부, 이완교, 최재영, 유병용,

이기명씨 등 11명이 참석하여 덕담들을 나누었는데, 올 해로 95세인 이명동선생님은 아직도 짱짱한 청춘이셨다.

가끔씩은 전에 들었던 이야기들을 재방할 때도 있지만 말씀이 재미있어 다시들어도 지루하지 않았다.

"선생님 부디 건강을 지키시어 즐거운 여생을 보내십시요."

 

돌아오는 길에 "노마드"에 잠시 들렸으나, 윤옥씨의 심기가 편치않은 것 같아 일찍 자리를 떴다.

 

 

2013.2.25

 

 

 

 

 

 

 

 

 

 

 

 

 

 

 

 

 

 

 

 

 

사진가 정영신의 장터순례(4) 충남 예산장 (2013.2.15)

“많이 줄게, 들여 가유” 봉지마다 푸성귀가 가득

소고기국밥 한그릇 놓고
막걸리잔을 부딪히는 할아버지
연탄화덕에 얹힌 찌개와 냄비밥을
나누어 먹는 아낙네들
추억을 찾아
밥 한술의 행복을 찾아
오일마다 장터는 북적북적

 “쉬는 날유? 비 오는 날은 쉬지유.”
예산장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김성근씨(63)는 3대째 국수를 만들고 있다. 햇살과 바람에 몸을 내맡긴 뽀얀 국수 가락의 하늘거리는 춤사위가 발길을 붙잡는다. 국수를 만드는 사람에게서도, 국수를 만드는 기계에서도 어쩔 수 없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난다.

 1926년 이래로 매달 5일과 10일, 충남 예산군 예산읍 예산리에서는 예산장이 선다. 장터는 쌍송백이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한눈에 보인다. 평소에는 주차장으로 쓰이다가 장날이면 장꾼들이 펼쳐 놓은 파라솔이 설치미술이 되어 사람들을 끌어모은다. 상인들은 저마다 자리를 차지하고 전을 벌이는데, 별다른 장옥 없이 난장으로 펼쳐져 장터다운 맛이 한층 살아 있다.

 보따리만 풀면 그 자리가 좌판이 되고 할머니들의 자리가 된다. 가을에 수확한 콩과 말린 나물, 우거지 같은 것들이 할머니들이 보자기를 풀자 쏟아져 나온다. 계절 따라 파라솔의 모습도 달라진다. 겨울에는 비스듬히 누워 할머니들 등이 시리지 않게 바람막이가 되어 주고, 여름에는 수직으로 서서 햇살을 따라가며 그늘을 만들어 준다. 보잘것없는 것들, 여린 것들, 귀한 것들, 별의별 것들이 장날에는 귀천 없이 어울린다. 이런 친근감 덕분에 장터는 한겨울이지만 훈훈하다.

 사람들이 모이듯이 물건도 흐르고 흘러 모이는 곳이 장터다. 할머니들이 펼쳐 놓은 봉지 봉지마다 구수한 흙 냄새가 짱짱한 햇빛에 농익어 물씬 풍겨 온다.
“이 물건 안 사 가면 후회해유. 많이 줄게, 들여 가유.”
무청을 펼쳐 놓은 허씨 할머니(78)는 추억을 팔러 나온 사람인 양 지나가는 사람 구경에 더 열을 올리고 있다. 어디서 왔느냐고 여쭈니 “넓고 깊은 데서 왔지유” 하며 넌지시 웃는 표정이 마치 고향 마을 느티나무를 보는 듯 정겹다.

 예산장은 소고기국밥집으로도 유명하다. 장날과 그 전날에만 문을 연다. 장날이면 친구들 만나러 장에 온다는 읍내의 박기동 할아버지(74)와 이희덕 할아버지(70)가 국밥집에서 막걸리 잔을 부딪히며 어렸을 적 추억에 푹 빠져 있다. 이희덕 할아버지는 큰 마트가 생긴 뒤로 이렇게 자연스레 만나는 친구들이 줄어들어 안타깝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긴 세월의 이야기들이 남아 있는 장터에 사람들이 많이 와야 할 텐데….”
말끝을 흐린 두 노인의 얼굴에는 발그스레하게 취기가 올랐다.

 장을 한바퀴 휘휘 도는 중에 외진 구석에 전을 편 할머니를 만났다. 손님이 오건 말건, 할머니는 말 안 듣는 손주 다루듯 말라빠진 무청을 다듬느라 정신이 없고, 그 옆에선 콩과 무말랭이가 햇빛에 졸고 있다.

 한쪽에서는 연탄 화덕에 얹힌 김치찌개와 냄비에 담긴 밥을 그대로 나누어 먹는 아낙네들의 모습이 들어온다. 밥 한술에 이토록 찬란한 행복이 숨어 있다는 것은 장꾼만이 아는 비밀이다. “밥이 인생”이라는 것이 생선 장수 박씨 아주머니의 말이다.

 장터에 가면 곡물을 담은 깡통들이 나란히 줄지어 서 있는 풍경을 종종 보게 된다. 요즘에는 호루라기 소리가 “뻥이요!”를 대신하지만, 엄마가 아이의 귀를 막아 주고 어떤 아주머니는 손가락을 귀에 찌른 채 찡그리고 선 모습들이 재미있다. 이 풍경 앞에서 오랜 추억에 젖어들며 사람 사는 맛을 진하게 느낀다.

 예산장의 터줏대감인 삽교읍의 이희천 할아버지(76)는 62년 동안 시계를 고치고 있다. 뻥튀기 장수 앞에 가판대를 차려 놓고 열네살 때부터 지금까지 고장 난 시계를 수리한다. 할아버지는 “62년 단골도 있다”며 자랑이 대단하다. 수십년 같이한 손때 묻은 공구들이 항상 옆에 있어야 마음이 든든하고 잠자리도 편하다고 한다.

 예산 땅의 장이 어디 이뿐일까. 2·7일에는 사과가 유명한 삽교장이, 3·8일에는 고덕장과 역전장과 광시장이, 4·9일에는 마늘과 생강으로 이름 높은 덕산장이 열린다. 이들 장터 어딜 가나 예산의 푸근한 인심과 질 좋은 특산물을 만날 수 있다.

 

 

최민석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전갈을 받고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부산 남포동에서 '한마당'이란 대폿집 할 때 처음 만났으니, 그 인연도 30년이 넘었다.

단골이었던 최민식선생께서 내민 ‘휴먼’ 사진집이 아니었다면 내 신세가 이렇게 고달프지는 않았을 것이란 원망도 했지만,

돈은 없지만 사진으로 마음 부자를 만들어준데 대한 고마움이 더 앞선다.

한 때는 부산에서 사진학원 차리자는 선생님의 제안에 혹해, 민태영씨가 운영하던 파고다 공원 옆의

“서울사진학원” 수강생이 되어 사진공부보다 학원 운영을 염탐하던 시절도 있었다.

“어차피 죽으면 아무 것도 없어요. 사진이라도 많이 남기라”던 선생님의 말씀이나,

때로는 덜 논리적인 예술과 철학을 논하시던 그 때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여지껏 선생님이 추구하는 인간애를 바탕에 둔 사회기록이라는 사진의 기본은 잘 따라왔으나

선생님처럼 그렇게 치열하게 찍지는 못했다. 여자 좋아하고, 친구 좋아하고, 노는 것 좋아하다 보니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정영신씨를 만나 장터사람들에 푹 빠져 살지만...

 

 

어제 밤에 뜻밖의 꿈을 꾸었다.

환갑이 훌쩍 넘은 내가 신문사 사진부에 신입으로 들어간 것이다.

지금은 퇴직한 구자호씨가 부장으로 있었고 그 외는 잘 모르는 젊은 친구들뿐이었다.

위에서는 회장댁 사모님이 돌아가셨으니 사진찍으러 가라하고, 구부장은 사건현장에 가라고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망설이든 차에 갑자기 최민식선생께서 오래전 하셨던 말씀이 떠 올랐다.

"죽은 사람 껍데기 찍지말고 산 사람 찍어라"던 생각이 떠올라 구부장의 말을 따랐다.

 

그 이틑 날, '눈빛'의 이규상사장으로 부터 "최민식선생께서 소천하셨다"는 문자메시지가 왔다.

그 꿈이 신통하기도 했지만 시사하는 바가 컸다.

치열한 작가정신에 대한 충고였고, 마지막 가르침이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편히 가십시오.

죽기 전에 얼마나 더 많은 것을 기록할진 모르지만 더욱 더 치열한 작가정신으로 일하겠습니다.“

 

 

2013.2.14

 

 

 

 

 

 

 

 

 

 

 

20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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