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 정영신의 장터순례(5)경기 안성장 (2013.3.1)

그 많던 보부상·놋그릇 자취 감췄지만…

대이어 정직 지키는 채소장수, 오백원짜리 무 한개에도 숨은 이야깃거리 한보따리
민초들 소통하는 Y자형 장터, 전국 3대장 명성 옛말이라 해도 토박이 발길은 오늘도 여전

 

 

어린 시절, 명절이 다가오면 마당 한쪽에 멍석을 깔아놓고 앉아 짚에 기왓가루를 묻혀 놋그릇(유기)을 닦는 아낙네들의 입은 쉴 사이가 없었다. 여인네들이 나누던 이야기가 장터에선 웃음보따리가 되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았다. 동산댁 딸내미 궁합 본 이야기, 우무치댁 영감이 윗마을 아무개를 짝사랑했었다는 케케묵은 이야기….

 아낙들이 질펀한 소문을 묻혀 가며 빛나게 닦던 놋그릇들은 이곳 안성장에서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안성장은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대구장·전주장과 함께 3대장으로 불릴 만큼 규모가 컸다. 조선 후기 박지원이 쓴 소설 <허생전>에도 남산골 서생 허생이 과일을 매점매석해 안성장에서 큰돈을 벌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구한말까지도 전국에서 보부상들이 몰려오던 곳이 안성장이다. 그러고도 오랫동안 전국 최대의 놋그릇 거래시장으로 이름 높았다. 그러나 요즘 안성장에서는 놋그릇을 사고파는 풍경을 볼 수 없다. 장터를 주름잡던 보부상들의 역할을 지금은 장돌뱅이 150여명이 대신한다.

 세월 따라 장터의 모습도 바뀌고 규모도 줄었지만, 여전히 이 지역 농촌 사람들은 장날이면 안성장으로 모여든다.

 안성장은 2일과 7일이 드는 날, 경기 안성시 서인동 안성중앙시장 주변에 ‘Y’자 형태로 들어선다. 평상시에는 자동차가 다니는 길이지만 장날만큼은 장꾼들에게 개방된다.

 얼마 전 정월대보름을 앞두고 안성장에 갔다. 장터에는 호두와 땅콩 같은 각종 부럼들이 좌판 가득 펼쳐져 있었다. 정월대보름은 예부터 마을이 함께 치르는 명절이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묵나물과 오곡밥을 나누어 먹었다. 대보름 하면 둥근달이요, 이 달은 우리네 농경 문화와 떼려야 뗄 수가 없다.

 “달과 땅은 여자와 같다”는 정예숙 할머니(82)는 올해로 32년째 안성장에서 채소를 팔고 있다. 정씨 할머니는 “어쩌다 장에서 커서 장에서 이렇게 늙어가는 것을 보면 사람의 일이란 뜻대로 안 되나 보다” 하며 웃는다. 태어나고 죽는 것도 내 의지가 아니요, 처음부터 끝까지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은 없다는 것을 장터 바닥에서 배웠다는 것이다.

 집에 돈 떨어지면 간간이 엄마를 찾아와 도와주던 것이 지금은 살아가는 일이 되어 버렸다는 할머니는 아직까지도 낭자머리에 비녀를 꽂았다. 할머니의 친정어머니는 “장사는 정직해야 오래간다”는 말씀을 자주 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장터지만 일부러 먼 길을 걸어 찾는 단골이 다 따로 있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장터에서 만나는 한사람 한사람에게는 모두 저마다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어떤 비밀이 있기에 입을 꽁꽁 다물어 버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쉴 틈 없이 말해 속내까지 훤하게 보여 주는 사람도 있다. 이런 저런 사람들이 오래도록 얼굴 맞대고 어울려 가꾸어온 장터이기에, 이곳에 있으면 돈의 흐름보다 더 귀한 것이 사람 사이의 소통임을 알게 된다. 장에서는 오백원 하는 무 하나를 사고팔 때도 얼굴과 얼굴을 마주봐야 한다. 그러면서 서로의 정이 오간다.

 장터에서는 언제나 우리네 어머니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자식들 배를 곯지 않게 하기 위해 어둑한 새벽부터 수십리 황토길을 걸어 장터에 나와 보따리를 펼쳤던 어머니들, 그들의 순수한 원형을 지금도 만날 수 있다.

 자리도 없이 도로변에 쪼그리고 앉아 메주와 보름나물을 펼쳐 놓고 파는 할머니들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임씨 할머니(87)는 직접 쒔다는 메주 세개에, 손수 농사지은 무 몇 개와 말린 가지나물 보따리를 펼쳐 놓고 있었다.

 임씨 할머니가 파는 말린 가지나물 속에는 지난 여름과 가을, 겨울이 오롯이 들어 있다. 할머니는 “봄 되면 꼭 한번 더 와” 한다. 봄나물 뜯을 때를 기다린다는 할머니의 이마 주름 위로 겨울 끝자락 햇살이 살금살금 퍼진다.

 터미널에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보따리 가득 장터 이야기를 담아 집으로 가는 사람들이다. 집 앞까지 마중 나온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보따리에 눈독을 들이고, 이윽고 안방에서는 보따리 풀자 쏟아져 나오는 온갖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울 장면이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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