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 정영신의 장터순례(4) 충남 예산장 (2013.2.15)

“많이 줄게, 들여 가유” 봉지마다 푸성귀가 가득

소고기국밥 한그릇 놓고
막걸리잔을 부딪히는 할아버지
연탄화덕에 얹힌 찌개와 냄비밥을
나누어 먹는 아낙네들
추억을 찾아
밥 한술의 행복을 찾아
오일마다 장터는 북적북적

 “쉬는 날유? 비 오는 날은 쉬지유.”
예산장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김성근씨(63)는 3대째 국수를 만들고 있다. 햇살과 바람에 몸을 내맡긴 뽀얀 국수 가락의 하늘거리는 춤사위가 발길을 붙잡는다. 국수를 만드는 사람에게서도, 국수를 만드는 기계에서도 어쩔 수 없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난다.

 1926년 이래로 매달 5일과 10일, 충남 예산군 예산읍 예산리에서는 예산장이 선다. 장터는 쌍송백이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한눈에 보인다. 평소에는 주차장으로 쓰이다가 장날이면 장꾼들이 펼쳐 놓은 파라솔이 설치미술이 되어 사람들을 끌어모은다. 상인들은 저마다 자리를 차지하고 전을 벌이는데, 별다른 장옥 없이 난장으로 펼쳐져 장터다운 맛이 한층 살아 있다.

 보따리만 풀면 그 자리가 좌판이 되고 할머니들의 자리가 된다. 가을에 수확한 콩과 말린 나물, 우거지 같은 것들이 할머니들이 보자기를 풀자 쏟아져 나온다. 계절 따라 파라솔의 모습도 달라진다. 겨울에는 비스듬히 누워 할머니들 등이 시리지 않게 바람막이가 되어 주고, 여름에는 수직으로 서서 햇살을 따라가며 그늘을 만들어 준다. 보잘것없는 것들, 여린 것들, 귀한 것들, 별의별 것들이 장날에는 귀천 없이 어울린다. 이런 친근감 덕분에 장터는 한겨울이지만 훈훈하다.

 사람들이 모이듯이 물건도 흐르고 흘러 모이는 곳이 장터다. 할머니들이 펼쳐 놓은 봉지 봉지마다 구수한 흙 냄새가 짱짱한 햇빛에 농익어 물씬 풍겨 온다.
“이 물건 안 사 가면 후회해유. 많이 줄게, 들여 가유.”
무청을 펼쳐 놓은 허씨 할머니(78)는 추억을 팔러 나온 사람인 양 지나가는 사람 구경에 더 열을 올리고 있다. 어디서 왔느냐고 여쭈니 “넓고 깊은 데서 왔지유” 하며 넌지시 웃는 표정이 마치 고향 마을 느티나무를 보는 듯 정겹다.

 예산장은 소고기국밥집으로도 유명하다. 장날과 그 전날에만 문을 연다. 장날이면 친구들 만나러 장에 온다는 읍내의 박기동 할아버지(74)와 이희덕 할아버지(70)가 국밥집에서 막걸리 잔을 부딪히며 어렸을 적 추억에 푹 빠져 있다. 이희덕 할아버지는 큰 마트가 생긴 뒤로 이렇게 자연스레 만나는 친구들이 줄어들어 안타깝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긴 세월의 이야기들이 남아 있는 장터에 사람들이 많이 와야 할 텐데….”
말끝을 흐린 두 노인의 얼굴에는 발그스레하게 취기가 올랐다.

 장을 한바퀴 휘휘 도는 중에 외진 구석에 전을 편 할머니를 만났다. 손님이 오건 말건, 할머니는 말 안 듣는 손주 다루듯 말라빠진 무청을 다듬느라 정신이 없고, 그 옆에선 콩과 무말랭이가 햇빛에 졸고 있다.

 한쪽에서는 연탄 화덕에 얹힌 김치찌개와 냄비에 담긴 밥을 그대로 나누어 먹는 아낙네들의 모습이 들어온다. 밥 한술에 이토록 찬란한 행복이 숨어 있다는 것은 장꾼만이 아는 비밀이다. “밥이 인생”이라는 것이 생선 장수 박씨 아주머니의 말이다.

 장터에 가면 곡물을 담은 깡통들이 나란히 줄지어 서 있는 풍경을 종종 보게 된다. 요즘에는 호루라기 소리가 “뻥이요!”를 대신하지만, 엄마가 아이의 귀를 막아 주고 어떤 아주머니는 손가락을 귀에 찌른 채 찡그리고 선 모습들이 재미있다. 이 풍경 앞에서 오랜 추억에 젖어들며 사람 사는 맛을 진하게 느낀다.

 예산장의 터줏대감인 삽교읍의 이희천 할아버지(76)는 62년 동안 시계를 고치고 있다. 뻥튀기 장수 앞에 가판대를 차려 놓고 열네살 때부터 지금까지 고장 난 시계를 수리한다. 할아버지는 “62년 단골도 있다”며 자랑이 대단하다. 수십년 같이한 손때 묻은 공구들이 항상 옆에 있어야 마음이 든든하고 잠자리도 편하다고 한다.

 예산 땅의 장이 어디 이뿐일까. 2·7일에는 사과가 유명한 삽교장이, 3·8일에는 고덕장과 역전장과 광시장이, 4·9일에는 마늘과 생강으로 이름 높은 덕산장이 열린다. 이들 장터 어딜 가나 예산의 푸근한 인심과 질 좋은 특산물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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