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6일은 정선 만지산에 계신 어머니를 하늘문납골당에 모시는 이장 날이다.

하루 전 정영신과 함께 정선 귤암리로 갔으나, 쉼 없이 내리는 비 때문에 걱정이 태산 같았다.

13년 전 어머니 장례 때도 장대 같은 비가 내려 난장판이 된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쏟아지는 비에 가려 지척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 딸이 타고 오던 승용차가 개울에 빠져 병원에 입원 하는 등 한 바탕 난리를 쳤다.

쏟아지는 소나기를 뚫고 산 위까지 시신을 옮겨야 하는 상여꾼들의 고생은 말할 것도 없고, 흙 또한 흙이 아니라 찰떡이었다.

찰흙이 장화에 달라붙어 발이 떨어지지 않아 걸음조차 제대로 옮길 수 없었다.

어떻게 장례를 치뤘는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고향 선산을 두고 정선 만지산에 안장할 것을 제안한 나는 가족 볼 면목도 없었다.

어머니께서 생전에 내 죽으마 절대 너거 아부지 옆에 묻지 마라입버릇처럼 하신 말씀을 믿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미워 한 말을 곧이곧대로 옮겼으니 하늘이 난리법석을 친 것 같았다.

어머니 말씀을 거스를 수도 없었지만 가까이 모시고 싶은 욕심도 한 몫했다.

 

오래된 이야기를 새삼 꺼내는 것은 그때처럼 비가 내려 걱정이 되어서다.

날씨 때문인지 오기로 한 가족들도 당일 새벽에 오거나 원주 화장터로 바로 오겠다며 일정을 바꾸어 버렸다.

아무튼, 일할 분들이 오기로 한 아침에라도 비가 그쳐주길 바랄 뿐이었다.

 

만지산에 오후 세시 쯤 도착했으나, 불 난 집은 보기도 싫어 곧바로 창수네 집부터 들렸다.

이선녀씨는 비 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란 노랫말처럼 일터에 가지 않고 술판을 벌여 놓았다.

집안 버팀목이었던 창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창수마저 오락가락하고 있으니 일하기 싫은 모양이다.

그 많은 자기 땅을 놀려두고 다른 집에서 일해주며 사는 것도 사람이 그리워서다.

술 한잔하며 하는 하소연에는 반가운 소식도 있었다.

새처럼 중국까지 날아간 꿈을 꾸었는데, 중국 군중들로부터 큰 환대를 받았단다. 꿈마저 그녀 이름처럼 동화적이다.

그 꿈을 꾼지 얼마 후, 창수 아버지가 농어촌공사에 남기고 간 빚 2억을 갚을 수 있었다고 한다.

방치한 역전 땅이 공원 부지로 바뀌며 정선군에서 보상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금방 찐 옥수수를 안주 삼아 막걸리를 권했으나, 차 때문에 술을 마실 수가 없었다.

늦기 전에 머물 방을 부탁해 놓은 최영규씨 댁으로 옮겨가야 했다.

아랫만지로 내려가니 지척이 보이지 않았는데, 그때까지 읍내 나간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민박집에 가기위해 후진을 하다, 오래전 딸이 빠진 개울 가림막에 부딪혀 뒤 범프가 찌그러졌다.

 비에 대한 징크스 액땜이라며 스스로 위안했다.

 

몇 년 만에 들어가 본 최연규씨 민박집은 놀부 대궐집처럼 지어 놓았다.

방이 네 개인데다 마루 한가운데 노래방 기계와 술상까지 있으니, 모여 놀기 딱 좋은 공간이었다.

일찍부터 잠잘 준비를 하는데, 차 소리가 나며 최영규씨 내외가 들어왔다.

정선에서 오는 길에 술과 안주까지 사 온 것이다. 술잔에 만지산 비화를 담아 낄낄거렸다.

 

난, 최영규씨를 대궐 같은 놀부집에서 흥부같이 사는 사람'이라 말한다.

동년배기도 하지만 만지산 사는 분 중에 유일한 친구다.

오래전 어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시어 전화로 묏자리 좀 빌려 달라 했더니, 두말없이 마련해 주었다.

상여꾼 모으는 일에서 부터 그 초상집 난장판 정리를 다 해준 사람이다.

내가 해줄 수 있었던 것은 사진 작품 한 점 선물한 것뿐이다.

그날도 민박 사용료를 주었더니, 가족이 오지 않아 받을 수 없다며 돌려주었다.

 

새벽 일찍 일어나보니 다행스럽게도 비가 그치고, 앞산에 걸린 구름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반겼다.

좀 있으니 동생 창호가 도착했고, 뒤이어 이장을 맡은 업체에서도 도착했다.

 

 

산신제와 어머니께 간단한 예를 올린 후 땅을 팠으나, 비에 젖어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만약 육탈이 되지 않았다면 원주 화장장까지 가야 하는데, 화장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마침 한순식씨가 일하러 가지 않아 굴삭기를 불러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었다.

굴삭기 사용료를 주었으나, 기어이 받지않겠다고 우겨 식사라도 하라며 운전석에 묻어두었다.

 

관을 열어보니 다행스럽게도 육탈이 완전하게 되어 유골만 남아 있었다.

일하는 분이 정성스럽게 유골을 수습하여 현장에서 간이화장을 할 수 있었다.

 

급히 가족들에게 원주 화장장으로 오지 말고 일산 납골당으로 오라는 연락을 했다.

시간이 줄어들어 서둘 필요도 없이 천천히 고양시 하늘문납골당으로 갈 수 있었다.

가는 길에 '횡성한우직매장'에 들려 아침 겸 점심을 동생이 샀는데,

부드러운 육질의 쇠고기가 입에 착 달라붙었다. 횡성한우가 왜 비싼지 이해되었다.

 

납골당 하늘문을 찾아가는 긴 시간은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그 동안 한 달에 두 번씩 갈 때마다 어머니를 보살피기는 했으나 아무도 찾지 않는 외딴곳에서 얼마나 외로웠겠는가?

가족들도 일 년에 한 차례는 어머니 뵈러 왔는데, 생전에 지극히 좋아한 막네 손녀 은겸이의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남달랐다.

가족들도 처음에야 강변길 따라가는 정선 풍경이 좋았겠지만, 서너 시간의 운전 길이 결코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다들 운전 하느라 정동지가 유골함을 안고 가는 것도 편치 않았다.

 

납골당 하늘문에 도착해 보니 많은 가족이 나와 있었는데, 이 얼마 만의 반가움인가?

누님 조영희, 형님 조정호, 동생 조진옥을 비롯하여 형수 김순화, 매부 김종성, 조카 조향, 조웅래, 조은겸,

박홍전, 박유정 등 일이 있어 못 온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두 와 있었다.

예쁜 녀석들이 아줌마가 되어버린 조카들 모습에서 세월의 빠름을 절감했다.

 

진주청국장‘하던 누님이 장사를 접었다는 소식도 전해 주었다.

진주에서 여의도로 여의도에서 강남으로 옮겨 온 수십 년의 사업이지만 건물 개축으로 밀려났다고 한다.

코로나 시국인지라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않고 당분간 폐업에 들어갔단다.

식당 일이 진저리가 날 만도 한데, 누님은 일이 없으니 몸이 편치 않다며 불만이다.

 

매년 기일마다 납골당에서 모이기로 약속하는 걸 보니, 가까이 모신다고 해서 자주 뵙는 것도 아니었다.

, 납골당 마저 가족들이 추억하기 위한 공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자연과 융화된 육신 따라 유골도 자연으로 돌려주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그토록 혼줄이 났는데도 불구하고, 왜 이리 삐딱한 생각만 하는지 모르겠다.

 

어머니를 안치하며 차례대로 영원한 안식을 기원했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아! 너무 허무하다.” 모든 게 한 순간이구나.

 

어제 오전 7시 무렵, 녹번동 정영신씨로 부터 전화를 받았다.

정선 만지산 집에 불이 나 모든 게 타 버렸다는 비보였다.

 

그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설마, 누군가 빨리 오라는 장난 전화를 했겠지”라고 위안했으나

부리나케 정동지를 만나 정선으로 떠난 것이다.

 

연락에 의하면 밤1시 40분 경 옆집에서 불이 나

우리 집으로 옮겨 붙었는데, 원인은 누전이란다.

옆집 한씨가 전기기술자인데, 누전으로 불났다는 건 이해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 집은 동강 변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옛집이 아니던가?

동강 댐이 무산되어 주민들에게 주택건설비를 지원할 때

동강 변에 있던 집들은 모두 헐려나가며 국적불명의 주택이 들어섰다.

 

집만 아니라 그 안에는 동강 사람들의 삶의 변천사가 담긴 자료는 물론,

긴 세월 수집해둔 소중한 사진자료들이 차곡차곡 보관되어 있었다.

한 달에 두 번씩 정선 갈 때마다 새로 생긴 자료들을 챙겨가

정선 집은 자료 창고나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부엌 헛간을 개조해 암실과 작은방까지 만들어 두었으나

방은 물론 암실 기자재 위에도 숱한 짐이 쌓여 창고가 되어버린 것이다.

 

가장 큰 걱정거리는 그 곳에 남겨 둔 필름 박스였다.

필름 박스 두 개 중 한 개는 스캔받기 위해 녹번동으로 옮겼지만,

한 개는 만지산 집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자동에 들어 간 이후 몇 년 동안 필름박스를 손도 대지 못했다.

그 일만 끝냈다면 나머지 것과 바꾸어 필름 이미지는 건졌을 것이다.

 

그 집에는 동강자료 뿐만 아니라 나는 물론 정영신씨가 전시한

수 많은 사진 작품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스캔된 이미지야 다시 만들면 되겠지만 사라진 이미지는 어쩌냐?

 

그리고 둘 만의 작품만 아니라 다른 작가들의 그림이나 도자도 있었다.

강용대 그림에서부터 초창기의 강찬모 그림과

수안스님, 최울가, 이존수, 신동여, 이청운작가 등 십여 점이 보관되어 있었고

나를 그려 준 박재동선생 그림을 비롯한 초상화도 여러 점 있었다.

그리고 통도사에 계신 수안스님께서 방문하여 ‘몽암’이라는 현판까지 달아주셨다.

꿈의 암자라고 이름 지었는데, 결국 꿈으로 끝나고 말았다.

 

정선 만지산에 도착하니, 옆 집 두 채와 우리 집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포크레인만 불탄 현장을 지킬 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화재 규명은 물론 불탄 필름 흔적이나 피해 자료를 찾아야 하는데,

왜 포크레인이 현장에 들어 와 헤집어 놓았을까?

한 쪽에선 불씨가 남았는지 연기가 피어오르고, 굶주려 지친 개들만 여기 저기 퍼져 있었다.

 

불탄 잔해를 살펴보니 그동안 아무리 찾아도 없었던

90년도 만든 ‘전농동588번지’ 전시 팜프렛 잔해도 보였다.

그렇지만 건져낼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윗만지 창수네 집으로 올라갔다.

고사리 꺾던 이선녀씨는 하던 일을 제쳐두고 술상부터 차렸다.

마음을 위안해 줄 게 술 밖에 더 있겠는가?

 

막걸리가 몇 잔 들어가니 한결 마음이 편하더라.

들려준 바에 의하면 동네사람들이 밤잠을 설쳤고, 소방차가 일곱 대나 동원되었단다.

다들 산으로 번지지 않도록 막았을 뿐, 속수무책이었다고 한다.

 

누전이란 것은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더니, 아니란다.

어제 손님 네 분이 윤인숙씨 집에 와 묵었는데, 늦도록 고기 구워 술을 마셨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은 불씨가 살아나 옮겨 붙은 것으로 추정한단다.

 

불난 집 이야기에서 웃기는 이야기로 불이 옮겨 붙었다.

살러 온 색시마다 도망쳤다는 뱃사공 유춘식씨 이야기에서부터

한 밤중 일 치던 내외가 석유병을 들기름으로 착각해

거시기에 불이 붙은 비화 등 배꼽 잡을 옛날 이야기들이 나왔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이선녀씨가 따 놓은 두릅을 두 보따리나 챙겨주었다.

두릅 값으로 신사임당 한 장을 꺼내주었더니, 감동적인 말을 했다.

“인정을 돈으로 계산하지 말자”는 거다.

 

마을 이장 처럼 항상 보살펴주는 최연규씨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다들 불난 집에 와 있단다.

 

 

내려 가보니, 동내 사람들이 술 한 잔 마시며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이야기했다.

나야 보험이라고는 자동차 보험 밖에 없지만, 옆집도 화재보험에 가입하지 않았다고 한다.

요즘 집 공사 중이라 현금을 칠백만원이나 두었는데, 그 것까지 홀랑 태웠다는 것이다.

보상 받기 위해 잿더미를 뒤적거려 이백만 원 정도의 흔적은 찾았다고 한다.

 

자칫했으면 생사람 잡을 뻔 했더라.

숨이 막혀 일어나니 연기가 차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돈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팬티 바람으로 튀 쳐 나갈 수밖에 없었단다.

천만다행인 것은 그날 밤 바람이 한 점도 없었다는 점이다.

불이 산으로 옮겨 붙었다면 대형 산불로 번질 가능성이 많았다.

동원된 소방관들도 불이 윗쪽으로 번질 것을 대비해 포진했지만,

일방통행인 만지산 길에 물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진화가 더 더뎠다고 한다.

 

늦게 불붙은 우리 집은 소방관들이 조금만 빨리 출동했어도 옮겨 붙지 않았을 거고,

물 공급만 원활했어도 자료의 반이라도 건져낼 수 있었다고 한다.

산불이나 마찬가진데, 소방헬기는 왜 동원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동강 댐으로 시끄러울 때 왔으니, 어언 이십 오년의 세월이 훌쩍 넘었다.

환경 사진가들이 만지산에 둥지 틀고 물고기나 곤충, 들꽃 등 각자 전문분야를 기록했는데,

난, 동강 변에서 살아 온 사람들의 삶을 기록한 것이다.

지금 불탄 집이 그 당시 캠프로 사용했던 집이다.

 

2000년, 동강 사람들의 눈물겨운 이야기를 담은 ‘동강 백성들’ 사진 산문집과

조해인시인의 ‘어라연 뱃사공 이해수씨’라는 동강 시집이 나올 무렵에는

‘동강주민을 위한 굿마당’을 옛 귤암분교에서 열기도 했다.

 

김명성씨가 주동이 된 ‘창예헌’ 예술가들이 버스 몇 대에 나누어 타고 찾아 와

밤늦도록 주민들과 어울렸는데, 이원창 사또 나리께서 늦게 나타나는 바람에

좁은 도로가 마비되는 등 조용했던 동네에 한바탕 소동을 일으켰다.

 

그 무렵은 다들 동강 댐 찬성하는 주민들을 나쁜 놈으로 몰아세웠다.

댐을 만들라는 목소리를 낼 수 밖에 없는 속 사정은 일언반구도 없이

여론몰이 하는 형태는 지금의 기레기나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다.

‘환경운동연합’과도 반대의견을 낸 것은 사람이 살아야 동강도 살수 있다는 말이다.

 

빚에 쪼들려 물에 투신하거나 농약먹고 자살하는 등

동강 사람들이 여럿 죽어나가자 주민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갔다.

명동성당 앞에 진을 쳤는데, 날씨마저 얼마나 추웠는지 모른다.

그 당시 충무로에 있던 ‘현대사진가회’ 강의실을 비워 귤암리 노인들을 모셔놓고

밤 세워 전단지 만들고 보도자료 보내느라, 사진단체 사무실이 동강사람들 전진기지가 되었다.

이틀 날 ‘문화일보’ 사회면에 동강주민 살리라는 사회면 특집기사가 실린 것이다.

 

주민대표 이영석씨를 비롯한 몇 명이 김대중 대통령 호출로 청와대에 불려갔다.

피해주민에게 주택자금 지원과 부대시설을 지원하기로 약속받는 등 난제를 해결했다.

그 때 출판한 ‘동강환경사진집’과 ‘동강 백성들’ 산문집으로 환경단체 프로젝트는 끝났지만, 

두메산골사람들’과 '산'을 주제로 사람과 자연 환경을 찍으며 혼자 눌러 앉았다.

 

그 곳은 자연 환경도 아름답지만, 절처럼 마음이 편안해 떠나기 싫었다. 

몇 년 지난 후 프로젝트에 같이 참여한 사우가 그 집을 자기가 사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울며 겨자 먹기로 빚내어 사게 된 것이다.

그 많은 짐을 옮길 곳도 없었지만, 하던 작업이 끝나지 않아서다.

오죽했으면 역마살이 끼어 한군데 오래 정착하지 못하는 버릇을 알아

돌아가신 어머니까지 만지산에 묻었겠는가?

 

20년 전 평당 팔만원에 400평을 샀다.

당시의 시세가 평당 만원정도 했으니, 바가지도 그런 바가지가 없었다.

 집도 밭에다 지은 무허가 농가였다.

문제는 한 집이었던 옆집을 다른 사람에게 잘라 팔며 절집 같이 고요한 만지산의 낙원도 끝나버렸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거나 지나치는 사람들로 정동지가 정선 집에 가기 싫어했다.

욕실도 없고 화장실도 멀리 떨어져 있어 밖에서 목욕을 하거나 소변을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예 우리 집 마당을 주차장으로 사용하며 들락거리니, 나 역시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옆 집은 한 때 대학로에서 카페를 운영 했다는 박진기씨가 살았으나

땅 살 형편이 못 되자 미국 사는 친구를 끌어들여 사도록 부추긴 것이다.

옛 말을 믿을 수는 없으나, 그 집에 우환이 생긴 원인은 집 구렁이 때문이 아닌가도 추정된다.

 

2002년 여름, 우리 집 모퉁이에 팔뚝 굵기의 능구렁이가 똬리 틀고 있었다.

최종대씨가 얼른 잡아 옆집 부엌의 빈 장독 속에 넣어둔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옆집은 최종대씨 장인인 이관옥씨가 오가면 사용한 집인데,

이튿 날 뱀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고 한다.

집 구렁이를 잡아서 안 된다는 옛말이 생각나 늘 마음이 꺼림직 했다.

 

이번에 불난 발화지점이나 사람 죽은 방도 그 부근이었다.

비록 그 일 때문은 아니겠지만, 우환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 집을 산 성수씨가 어느 날 술이 취해 부얶 방에 들어가다 깨진 방문 유리에

동맥이 찔려 죽는 변을 당하는가하면, 처음 잠깐 살았던 박진기씨도 아내와의 불화로

집에서 석유를 몸에 붓고 불을 붙여 자살한 것이다.

 

성수씨가 갑작스런 변을 당하자 아내가 무서워 못살겠다며,

이사 가려고 급히 집을 내놓았는데, 그 집을 산사람이 이번에 불 난 윤인숙씨다.

세상을 하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구렁이를 잡은 최종대씨도 나이에 비해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어지는 우환이 우연치고는 심상치 않다는 것이다.

 

우리 집은 일찍부터 ‘사진 굿당’이란 이름을 내걸고 여러 가지 일을 벌였다.

산삼 심는 ‘농심마니’ 팀들을 초대하여 만지산에 산삼을 심었고,

사진굿당 앞 서낭당에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때로는 굿당 축제에 무세중씨나 정선 무당을 모셔 와

밤 세도록 징소리 울리며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굿판을 벌이기도 했다.

 

일 년에 한 번씩 축제를 연 것도 동강사람들 자료관으로 자리잡기 위해서였다. 

타지의 예술인들을 불러 모아 수시로 놀이판을 만들어 문화적 역량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동강과 사람들에 대한 숱한 자료들을 모아 왔으나, 그 꿈은 순식간 화마에 휩쓸려가고 말았다.

 

우연치고는 근래에 생긴 일들도 예사롭지 않았다.

여지 것 그 집을 전혀 손대지 않았던 것은 돈도 없지만,

집 자체를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불편함을 토로하는 정동지의 불만을 깔아뭉갠 것이 미안할 뿐이다.

 

그런데, 보름 전 느닷없이 옆집에서 우리 집에 신식차양을 달아주겠다는 제안을 한 것이다.

호의를 거절할 수도 없었지만, 좋아하는 정동지를 보며 어찌 반대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다음 주에 정선군청에 들어갈 작정으로 구체적인 기획안까지 만들어 두었다.

그 집에 보관된 동강자료는 물론 집 자체를 정선군에 넘겨주기 위해

실무자를 만나 손 털 계산을 한 것이다.

 

또 하나는 인사동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기 위해 몇 년 동안 손대지 않고

쳐 박아 둔 녹번동 필름박스를 정리하기로 작정했다는 점이다.

그 필름을 스캔 받은 후 정선 필름과 바꾸어왔다면 이미지는 살아남지 않았겠는가?.

한꺼번에 일어난 이 일련의 갑작스런 변수들이 화재와 연관은 없었을까?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 지 걱정이 태산 같다.

아무래도 윗만지산의 마지막 우환은 내 차례가 될 것 같다.

이년 쯤 후에는 동자동 쪽방 일도 마무리 될 것으로 여겨진다.

재건축이 끝나 다들 한 곳에 머물게 되면 더 이상 할 일은 없다.

그 때쯤 집터에 오두막 지어 살다 만지산에 뼛가루를 뿌리게 할 예정인데, 뜻대로 될지 모르겠다.

 

동네 주민들이 위로 차 여럿이 모여 술잔을 돌렸으나

예전부터 살던 주민은 최연규 내외와 김순배씨 뿐이었다.

 

다들 낯설거나 안면 정도 있었는데, 술 마시는 분위기가 무거워 노래 한 곡 불렀다.

그런데, 웃기려 불렀던 성냥공장 노래마저 노동가처럼 비장감이 뚝뚝 흘렀다.

 

“만지산 성냥공장

성냥 만드는 아저씨

하루에 한 갑 두 갑

낱 갑이 열두 갑

바지 밑에 감추고서

정문을 나오다

바지 밑에 불이 붙어

자지털이 다 탔네

만지산 성냥공장

아저씨는 백자지 백자지“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십 년 전에 심은 만지산 집 살구나무,

살구 좋아하신 장모님 나무다.

열리라는 살구는 열리지 않고

꽃만 흐드러지게 피는 살구나무

꽃 무게에 넘어질까 지팡이도 짚었다.

지천에 온갖 꽃이 다 피어도

살구꽃처럼 예쁜 꽃은 없다.

살구 맛도 못 보고 가신 우리 장모님

꽃이라도 보실지 모르겠다.

늙은 이내 가슴 다 녹는다.

 

지난 주말 정선 만지산에 파종하러 갔다.

모처럼 정영신씨와 나선 걸음이라 자동차도 신 났다.

 

만지산엔 온갖 꽃이 만발했다.

살구꽃을 비롯하여 진달래, 철쭉이 반겼고,

옆 마당의 벚꽃은 하늘을 뒤덮었다.

 

지난 번 봉우리 맺혔던 목련은 처참하게 떨어졌다.

그렇지만, 꽃구경할 겨를이 없다.

당일 떠나려면 일을 서둘러야 하기 때문이다.

 

정동지는 야채모종 심느라 바빴고,

나는 땅 고르고 씨 뿌리기 바빴다.

 

옆집의 한순식씨는 집수리부터 하란다.

천막 떨어져 나간 자리에 공사판에서 챙겨 온 아크릴 차양을 달란다.

 

주는 것도 고마운데, 두 내외가 더 설쳤다.

발가락 부러진 윤인숙씨는 깁스까지 했으나

비닐봉지로 감싼 채 물청소를 하고,

한순식씨는 차양 다느라 애썼다.

 

이젠 우리 집도 신식 차양을 달았다

한 때 동강 댐 보상 턱으로 집 지어줄 때,

동강변 일대의 헌집은 모두 헐려 나갔다.

 

우리 집이 동네에서 유일한 헌집인데,

아직 석면 스레트 지붕을 달고 산다.

읍사무소에서 무상으로 교체해 주었으나

우리 집만 잔재를 그대로 남겼다.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미련하게 보이겠나?

돈이 없어 새집을 짓지 못했지만,

어찌 보면 동강 변의 유일한 옛집이라

주택 변천의 자료적 가치는 있을거다.

 

새집이야 돈만 있으면 언제나 지을 수 있지만,

헌 집은 허물면 다시 볼 수 없지 않겠는가?

 

살기가 불편해 정동지 마저 정선가길 싫어한다.

나야 어디서나 지내는 야생의 습성을 지녔지만.

따뜻한 물은커녕 씻을 곳조차 마땅찮은 시골집에

어느 여인네가 가고 싶겠는가?

 

돈 생기면 조립식 주택이라도 옮겨주겠다고

둘러 댄지가 10여 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그런 처지에 비 피할 수 있는 차양이라도 올렸으니

공사 중의 공사고 경사 중의 경사가 아닐 수 없다.

 

달아 준 것만도 황송하기 그지없는데,

부침개까지 부쳐 술상까지 차려 주었다.

상낭식이 아니라 차양식이 된 셈이다.

아랫집 김익수씨와 윗동네 두 내외도 합류했다.

 

그나저나 보답을 해야 하는데, 돈이 십 만원 밖에 없었다.

윤인숙씨께 수고비로 털어 드리고,

사진 작품 하나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마음에 드는 사진을 물었더니, 만지산 사진을 택했다.

 

운전 때문에 술 한 잔 못 마셨지만, 기분은 째지더라.

차양을 달아서보다 정동지가 좋아하니까...

 

어두워지기 전에 마무리 할 일만 남았다.

서두러느라 대마씨는 제대로 뿌려졌는지 모르겠다.

힘들지만 이게 산골 사는 재미가 아니겠는가?

올 여름엔 지인들 불러 잔치 한 번 벌일까보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주말은 정선 만지산에 일하러 갔다.
한 달에 한 번 가지만, 가는 날이 기다려지기도 두렵기도 하다.
자연 속에 파묻히는 것은 좋지만, 일에 쫒길 생각하면 두려운 것이다.
한 달 동안 쌓인 일을 이틀에 끝내려면, 오줌 누며 좆 볼 틈도 없다.

옆집에선 밥 먹으러 오라지만, 한가하게 밥 먹을 여유조차 없다.
빵과 우유로 해결하는 게, 시간도 벌지만 부담이 없다.
한 달 동안 자란 잡초를 뽑는 일은 빠지지 않는 일이지만, 이번엔 고추 지지대를 박아야 했다.
더 큰 일은 잡목에 가려 밭에 햇볕이 들지 않아 잡목들을 베어내야 했다,
기계톱만 있다면 간단하겠지만, 작은 톱으로 씨름하려니 간이 빠진다.






한 낯에는 더워서 일을 못하니, 더 쫓긴다 ,
오후 네 시쯤 다시 시작하여 한 두시간 밖에 못했는데, 옆집에서 두 차례나 데리러왔다.
아무래도 욕 먹을 것 같아 일손을 놓아야했다.

가보니 서울과 홍천에서 온 손님이 여섯 명이나 있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무슨 손님이 그리 많이 오는지 모르겠다.
노부부는 손자 재롱에 흠뻑 빠져있고, 다들 백숙을 안주로 한 잔하고 있었다.






술잔을 권하던 한순식씨가 이야기를 꺼냈다.
“작가님 집을 탐내는 사람이 엄청 많아요"
팔게되면 연락해 달라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닌데, 팔 생각이 없냐는 것이다.
매번 올 때마다 비어 없으니,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20년 전 삼천만원에 구입했는데, 지금은 많이 올랐다는 말도 덧 붙였다.





한 때는 집터가 명당이라며 절터로 팔라는 스님도 있었지만,
‘몽암’이란 현판을 보라며, 이 집이 절이라고 농담한 적도 있었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팔고 싶은 유혹도 따랐으나,
돈은 사라져도 땅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믿음으로 버텨왔다.
어쩌면 소유한다는 자체가 욕심일 수 있겠으나, 정신적 고향만은 지키고 싶었다.





아무튼, 죽어도 팔지 않는다며 딱 잘라 거절했더니, 돌아가시면 자식들이 팔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래서 유익하게 활용할 수 있는 기획안을 만들어 공익단체에 기부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답했다.

밤이 되니 날씨가 제법 쌀쌀해 졌다.
한순식씨가 매운탕 끓인다며 강가에 고기 잡으러 가는 사이 슬쩍 빠져 나왔다.
비워둔 집이라 군불도 지피고 청소도 해야 하는데, 술이 너무 취해버렸다.
군불만 지펴놓고 방에 쓰러져 잤는데, 또 데리러 온 것이다.
자칫했으면 불 단속도 않고 잠들 뻔 했는데, 다시 정신을 차렸다.





그 이튿날은 시원할 때 일을 끝내려고 새벽4시부터 서둘렀다.
정영신씨 줄 상추와 야채부터 거두고, 언덕을 수놓은 딸기도 땄다.
어지럽게 잘라놓은 잡목을 정리하다 보니, 벌써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했다.
옥수수 밭에 난 잡초 뽑기를 서두러니 하늘에서 천둥이 치기 시작한다.
농작물에 물 줄 일도 남은 일의 하나인데, 큰일을 덜게 된 것이다. 





다음 달은 울 엄마 제사가 있어 좀 여유 있게 지낼 작정이다.
가족이 어울려 산소에서 술 한잔하는 일도 사는 즐거움의 하나다.
잘 갔다 오라는 인사마냥, 비는 오지 않고 천둥만 울어댔다.
“우루루 쾅쾅”

하늘이 무너져도 똥차는 간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3일간의 연휴에는 정선으로 야채 심으러 갔다.
사진 찍어 올리며 사는 것도 그렇지만, 정선에서 농사짓는 것도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오가며 길에 뿌리는 돈도 만만찮지만, 모종 살 돈으로 사 먹는 것이 훨씬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밥 팔아 똥 사먹는 일이라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땅을 놀리면 안 된다는 말은 구실에 불과하지만, 농사를 짓지 않으면 정선가기도 어렵고, 산소도 못 간다.
또 하나 못 말리는 것은 무공해 농산물을 좋아하는 정영신씨 때문이다.






오전 아홉시 무렵 평창에 도착하여 야채모종 부터 샀다.
고추 두 판, 상추 한 판, 옥수수 한 판, 도마도, 오이, 가지, 호박 등을 몇 포기씩 사다보니

모종 값이 육 만원을 넘어버렸다. 나머지는 씨앗으로 대체했다.





정선에 도착하여 짐을 내리니, 늘 반갑게 눈 맞추던 종이 사라지고 없었다.
일하러 밭에 나가면 밥 먹으러 오라 부를 때 치는 종인데,
치는 사람은 없지만, 늘 사람을 기다리는 종이었다.

요즘은 산골짜기 인심도 예전 같지 않다.
남의 땅에 있는 두릅이나 고사리도 먼저 본 사람이 임자다.
한 때는 두릅 철이 되면 서울로 가져와 나누어먹기도 했는데, 맛 본 지가 오래되었다.

산골 사는 원주민들이야 남의 것을 탐내지 않겠으나,
요즘은 외지에서 이사 온 사람들이 많아 누구의 소행인지 알 수가 없다.

공기 좋은 곳에 살러 왔으면 마음을 곱게 써야지...
사람들이 CCTV를 달라지만, 그러고는 쉽지 않았다.






밭에 난 잡초를 뽑고 땅을 고르며 비닐을 씌우는 등

오줌 누며 뭐 볼 틈도 없이 열심히 일하는 중에

갑자기 하늘이 깨질 것 같은 천둥소리를 내며 소나기가 쏟아졌다.
가문 날씨라 모종이 잘 살 것 같아, 비를 피하지 않고 부지런히 심었다.


한 시간 가량 쏟아지다 그쳤으나, 온 몸이 비에 흠뻑 젖어버렸다.
떨리는 한기는 견디겠으나 장화에 묻은 진흙이 무거워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물가로 내려가다 미끄러져 돌계단에 허리를 찧었으나 어디 하소연 할 때도 없었다.
그 것으로 그 날의 일은 끝이었다.






준비해 둔 빵조각과 우유로 저녁 끼니를 때운 후
군불 땔 힘도 없어 전기장판 위에 드러누워 끙끙대다 잠든 것이다.
한 밤에 진땀이 흐르기도 했으나, 자고나니 견딜만했다.






다음 날은 땅바닥에 퍼져 않아, 시름시름 옥수수를 심었다.

작년에는 멧돼지가 들쑤셔 한 톨도 건지지 못했지만, 또 한 번 투기를 한 셈이다.
곳곳에 철쭉과 조팝꽃, 복사꽃이 너울대니, 새들도 좋아라 지저긴다.
무슨 놈의 새 소리도 요상하다. “찌찌 찌~ 찌찌 찌~‘ 엿 먹이는 소린가?
그래, 마음먹기 따라 지옥이 되기도 하고, 천국도 될 수 있구나.






그 이튿날은 다시 마음이 바빠졌다.
모종이 모자라 정선 나갔더니, 연휴에 몰린 자동차로 도로가 몸살을 앓았다.
좋아하는 짜장면이라도 한 그릇 사먹어려던 생각은 포기해야 했다.
차댈 곳도 없지만, 한가하게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내일 약속이 있어, 모든 일을 끝내야하기 때문이다.


어머니 산소부터 들리고는 일을 서둘고 있는데, 옆집의 한순식씨가 빨리 오란다.
연휴기간 내내 옆집은 손님들로 북적였는데, 여러차례 술자리에 불렀지만 사양했다.
그 날은 아랫집의 김익수씨가 왔다기에 얼굴이라도 볼 겸 잠시 내려간 것이다.






낮부터 백숙을 안주로 소주를 까고 있었으나, 난 밥을 먹었다.
소화제라며 딱 두 잔 받아마셨는데, 술이 달았다.


사라진 종 이야기를 꺼냈더니, 또 CCTV를 달란다.
안 달면 도둑을 키우기도 하지만, 엉뚱한 사람 의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 너덜거리는 창호지를 뜯어내고 도배를 하는데,
술 취해 몸을 못 가누는 김익수씨를 한순식씨가 부축해 가고 있었다.
공기가 좋아 아무리 마셔도 자고나면 멀쩡하다고 자랑하더니, 너무 많이 마신 듯 했다.
나이도 나이지만, 술에 장사 없다.






무너진 돌계단도 손봐야 하지만, 다음으로 미루고 떠날 채비를 했다.
연휴가 끝나는 날이라 차 밀릴 것이 걱정되어서다.





아니나 다를까 양평 가까이 도착하니 차가 밀리기 시작했다.
수동 변속이라 다리에 쥐 날 지경이나, 무사히 돌아 옴을 자축했다.

뭐 사는게 별거냐?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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