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3·1 운동의 시발점, 태화관 미스터리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인사동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모습을 그린 기록화.

지난 1일은 제104년 삼일절이었습니다. 굳이 이 인물까지 이 코너에서 언급해야 할지 의문이 들긴 했습니다만, 학원강사 출신의 한 방송인이 1919년 3·1 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과 그 좌장인 손병희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가 물의를 빚은 적이 있습니다.

“(민족대표 33인이) 우리나라 최초의 룸살롱이었던 태화관에서 낮술을 먹었다.” “태화관 마담 주옥경하고 손병희가 사귀었고, 나중에 결혼을 한다. 그 마담이 할인을 해준다고, 안주를 더 준다고 오라 그랬는지 모르겠다.”

이 발언은 역사 인식의 총체적인 혼란을 보여 줍니다. 우선 주옥경은 1915년 손병희와 결혼하기 위해 명월관을 나왔으니 1919년에 명월관의 지점인 태화관 마담이었을 수는 없습니다.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하고 여성운동에 헌신했던 주옥경을 ‘마담’으로 칭한 것은 명백한 비하입니다. 서울의 대표적인 고급 요리점이었던 태화관을 ‘최초의 룸살롱’이라 보는 것 역시 부적절한 해석입니다. ‘민족대표들이 낮술을 마시기 위해 태화관에 모인 것’처럼 얘기한 것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손병희의 부인 주옥경. '독립운동의 숨은 공신'이자 '여성운동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하지만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것은 3·1 운동의 발발 과정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의문점을, 위의 발언이 무척 희화되고 왜곡된 형태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왜 민족대표 33인은 다른 곳도 아닌 ‘기생집’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것일까? 둘째, 이들은 일경에게 전화해서 자신들이 거기 있다고 알렸다는데, 그러면 자수한 것이 아닐까?

이러다 보니 1997년 초판이 나온 한국사 개설서들에서는 이런 악의적인 서술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민족대표 33인은 막상 3월 1일이 닥쳐오자 뒷걸음쳤다. 그들은 처음 예정대로 사람들이 만이 모이는 파고다공원에서 선언서를 낭독하지 않고, 태화관이란 음식점에 모인 후, 일본경찰에 연락하여 자수하고 말았다.>

<’민족대표’들은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 요리집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읽은 뒤 경무총감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독립선언서 서명자 일동이 명월관 지점에 연행, 구속될 것을 기다리고 있다’면서 스스로 투항해 버렸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학계에서는 이미 논란의 여지 같은 것 없이 분명하게 결론이 난 사안입니다.(박찬승 한양대 교수의 2019년 논문 ‘1919년 태화관의 독립선언식과 민족대표’) 두 가지 문제를 하나씩 짚어 보겠습니다.

 

31운동 독립 선언식이 열렸던 서울 종로 태화관 자리에 들어선 태화빌딩. 건물 정문 앞에 표지석이 있다. /이태경 기자

◇(1)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는가?

먼저 33인 중 한 명인 권동진이 경성지방법원 예심에서 진술한 내용이 있습니다. “(2월) 20일 오전 10시 경에 최린, 오세창, 이승훈이 내 집에 와서 모든 일은 정하기로 하였다. …독립의 선언은 3월 1일 오후 2시에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낭독하여 발표하기로 하고, 그날은 헤어졌다.”

당초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려고 했던 장소는 파고다공원, 현 탑골공원이었습니다. 최린은 “파고다공원은 (서울의) 중앙에 있고, (고종의) 국장 때문에 지방 사람도 다수 들어와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에 적당하고 좋을 것이라 하여 그 장소를 선택한 것”이라 진술했습니다.

그런데 거사 하루 전날인 2월 28일 손병희의 집에서 열린 민족대표의 사전 모임에서 이갑성이 “그 일을 학생들이 이미 알고 있어서 약 200명이 모이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박희도와 권동진이 “그런 경우 학생들이 소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학생들이 일본 경찰에 대항해 충돌할 것이 염려되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31절인 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제104주년 31절 기념식 및 탑골공원 성역화 범국민추진위원회 발기인대회에서 학생들이 플래시몹 공연을 하고 있다. /뉴스1

그러자 손병희가 “장소를 바꾸자”고 제안합니다. 양한묵은 경찰신문조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일 아침 (손병희) 선생을 방문하자 선생이 말하기를 ‘선언의 장소는 파고다공원으로 말했었지만, 그 장소는 다수의 인민이 모이는 곳이다. 이미 학생들이 다수 집합하기로 되었기 때문에 발표 때에는 반드시 경관의 취체를 받고, 우리들 전부는 동행하여 안치될 것임에 틀임없다. 그 때에 큰 문제를 야기하기에 이를 수 있어, 도리어 수행 상 불온한 우려가 있기 때문에 명월관 지점으로 변경하였다고…” 명월관 지점이란 바로 태화관입니다.

사실 이것은 3·1 독립선언서 발표의 주체 중 기독교 측이 학생들과 연합을 도모하고 있었던 것을 손병희·최린·권동진 등 천도교 측에서 잘 모르고 있었던 결과라고 박찬승 한양대 교수는 분석합니다.

그런데 왜 태화관이었을까. 한번 생각해 보죠. 이미 많은 학생들이 독립선언서 발표를 알고 있었다는 것은 일본 경찰 역시 이미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다는 것이 됩니다. 실제로 1일 새벽 일본 경찰들은 시내 곳곳에서 독립선언서 전단을 발견하고 수사에 들어간 상황이었습니다. 서울의 다른 강당이나 집회장으로 장소를 옮긴다? 위험이 컸습니다. 그래서 파고다공원과 가까운 인사동의 요릿집으로 발표 장소를 옮긴 것이 됩니다. 33인은 ‘요릿집 손님’으로 위장했던 것입니다.

결국 ‘파고다공원에서 발표할 경우 몰려든 학생들이 일본 경찰과 충돌할 것이 우려됐기’ 때문에 ‘서울 시내 중심부에 있으면서 많은 인원이 입장할 수 있고 비밀리에 독립선언서를 발표할 수 있는 장소’로 태화관이라는 요릿집을 택한 것입니다. 당시 서울의 웬만한 요릿집에는 기생이 있었고 고급 요릿집인 태화관도 마찬가지였지만, 여기서 ‘기생의 유무(有無)’나 ‘낮술을 마실 수 있는 조건’ 같은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선언서 발표 장소로서 ①파고다공원에서 급히 변경해야 했던 ②보안이 유지되는 ③서울 중심부의 한 지점이라는 것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구의 요릿집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발표한 ‘기미독립선언서’. /문화재청

 

◇(2)일본 경찰에 전화를 걸어 자수했는가?

3월 1일 태화관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한때 정설처럼 유행했던 ‘민족대표들이 일본 경찰에 전화를 해 자신들을 잡아가라고 투항했다’는 얘기는 사실일까요?

오후 2시 조금 못 미쳐 참석자들이 거의 모였을 때 학생들이 들어와 장소 변경에 대한 항의를 하고 돌아갔습니다. 2시 정각, 독립선언문이 배포됐습니다. 선언문 낭독은 생략하고 참석자들은 눈으로 선언문을 읽었습니다. 한용운이 일어나 “우리들은 이미 독립선언을 했으므로 목적을 달성했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고 일동은 기립해 ‘독립만세’를 삼창했습니다.

 

만해 한용운

 

이 무렵 최린 등은 인력거꾼을 시켜 종로경찰서에 선언문을 보냈습니다. 민족대표들이 어디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던 경찰은 인력거꾼에게 물어 그 선언문이 태화관으로부터 배송됐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이갑성과 이규갑의 증언에 따르면, 경찰은 실제로 태화관에 민족대표들이 있는 것인지 알아내기 위해 그곳으로 전화를 했고, 이 전화를 받은 태화관 주인(또는 종업원)이 민족대표들에게 와서 “거기 다들 모여 있느냐고 물어보는데 어떻게 대답하면 될까요”라고 물어봤다는 것입니다. 이에 민족대표들은 “당신이 본 대로 대답하시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민족대표들이 경찰에 먼저 전화를 걸어 ‘우리는 지금 태화관에 있으니 잡아기시오’라고 한 적은 없었던 것이죠. 이후 민족대표들은 경찰이 가져온 자동차를 타고 차례로 경무총감부로 연행됐습니다. 이것을 과연 자수라고 봐야 할까요. 그들은 잘못한 것이 없으니 달아나지 않았을 뿐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박찬승 교수는 말합니다. “당시 민족대표 측은 독립선언식과 선언문의 배포를 통한 독립선언, 그리고 일본 정부, 조선총독부, 미국과 파리 강화회의에의 독립청원서의 전달을 무사히 마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자신들이 서울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무사히 마치자 역할을 다 했다고 생각하고 경찰에 연행돼 갔던 것이다.” 자신들의 역할은 3·1 운동의 불씨를 지피는 일이었으니, 이제 전국의 수많은 민중들에 의해 만세운동의 불길이 타오를 것을 기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이뤄졌습니다.

 

조선일보 / 유석재기자

이곳이 정녕 도시에서 소외된 뒷방이란 말인가

 

오랜 시간 삶의 ‘흔적’이 쌓인 작은 공간조직이 인접한 그것과 섞이면서 골목과 마을이 되고, 이들이 모이고 쌓여 도시 공동체가 된다. 수려하고 과시적인 곳보다는, 삶이 꿈틀거리는 골목이 더 아름답다 믿는다. 이런 흔적이 많은 도시를 더 좋아한다. 우리 도시 곳곳에 남겨진 삶의 흔적을 찾아보려 한다. 그곳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를 기쁘게 만나보려 한다. [기자말]

 

▲ 낙원동 전경(1983) 공원을 빙 둘러 "J"형상으로 들어선 상업시설(파고다아케이드)과 종로 대로변에 선 건물이 보임. 주변 모습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아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 c 서울역사박물관

이곳에 서면 도도한 시간의 흐름이 날로 전해 온다. 허허로운 일상을 보내는 노년 세대가 점유한 공간은, 마치 뒷물에 밀려 하구에 다다른 강물처럼 보인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이 풍경 속 출연자는 분명 우리로 대체되어 있을 것이다. 시간이 만들어 낼 흐름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소비하는 도시공간이 이채롭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 한 시점에 멈춰 서버린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오래된 흑백사진처럼, 한 세대 전 모습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
 
도시에서 지대(地代) 지불 능력은 소비행태 및 구매력이 결정한다. 따라서 지대가 구획한 공간조직은 세대별 특성을 부각시키려는 경향성을 띤다. 전유 공간 형성이다. 이런 공간은 반드시 배타성을 갖게 되며, 이는 한 공간에 형성된 그 세대의 문화와 공간소비 행태로 치환되어 유기체적 흐름으로 변화한다.

 

 

▲ 송해길 북단;종로3가역 5번 출구에서 남쪽으로 바라 본 송해길. 7월 폭염에 거리가 낮잠을 자는 듯하다.ⓒ 이영천

홍대 앞이 20∼30대 공간이듯, 이곳도 시니어 공간으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탑골공원을 위시한 낙원동 일대 '송해길'이라 명명한 곳에 형성된 특이한 공간조직이다. 일종의 '환원 공간'인 셈이다.

노년이 채운 공간

 

하지만 세상은 이들을 터부시했다. 이들 사이에도 욕망이 작동하는 엄연한 하나의 '사회'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자꾸 밀쳐내려 했다. 또한 이 공간을 타자화하며 지우려 했다. 집단으로 모인 이들 행태를 곁눈으로 흘겨보며 비난하기 바빴다.

이렇듯 이곳은 소외된 도시의 '외딴방이거나 뒷방' 취급을 받아 왔다. 월드컵 개최를 빌미로 서울시는 운현궁 맞은편에 '서울노인복지센터'를 지어 이들을 수용할 의지를 내보인다. 명분은 탑골공원 성역화 사업이었다.

 

 

▲ 서울노인복지센터 운현궁 맞은 편에 21세기 초 들어선 노인복지기관. 탑골공원 노인을 수용하려는 의도였으나, 명백한 한계를 보임.ⓒ 이영천

물론 서울노인복지센터 프로그램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무척 훌륭하다. 식생활에서부터 건강, 취미, 교육은 물론 취업 알선까지 이 시대 노인들이 당면한 제 분야를 망라한다.

그러함에도 탑골공원에서 밀려난 노인들이 종묘공원으로 자리를 바꿔, 하루 2∼3천 명씩 모여들었던 현상은 왜 일어났을까? 이들을 관리와 통제대상으로 상정하고 일정 공간에 '가두어' 두려 한 서투른 행정이, 시작부터 이미 절반은 실패한 건 아니었을까?

이제 탑골공원이건 종묘공원이건 수천이 군집하던 모습을 찾기는 쉽지 않다. 코로나19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두 공원이 갈 곳 잃은 그 많던 노인들을 어디론가 다시 쫓아버린 셈이다. 그러나 두 공원 주변엔 적잖은 수의 노인들이 지금도 모여들고 있다.

설 자리가 없는 노년

노인은 누구이며, 노인이 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딱히 법이나 제도로 규정되어 있진 않으나 '반강제로 경제활동을 끝내야만 하는 연령대'로 규정하는 게 타당해 보인다. 다니던 직장을 내 뜻과 무관하게 그만두어야만 하는, 정년을 맞이하는 시점으로 간주하는 게 사회통념이다. 생물학적 노쇠는 물론 생리적, 심리적으로 급격한 퇴화가 밀려드는 시점이기도 하다. 만 65세 이상을 노인으로 보고 있다.

 

▲ 일상풍경 낙원상가 왼쪽 전면, 탑골공원 북쪽 빈터에서 일상으로 벌어지는 풍경.ⓒ 이영천

 현재 구백만 명인 노인 인구가, 2032년 천사백만 명으로 예측된다. 급격한 노령사회로의 진입이다. 대중교통 이용요금이 면제된다. 나라에서 지급하는 얄팍한 연금에 의존하는 전혀 다른 세계로 생활행태 천이가 강제된다. 노인 빈곤이다. 불과 1백여 년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나락이 펼쳐진 것이다.

노인이 핵심이던 대가족체제가 산업화 이후 급격히 해체되고, 그 자리를 핵가족화한 도시형 가구 구성이 차지했다. 이는 노인의 권위와 경륜은 물론 안락한 노후마저 보장해 주지 못했다. 노환이나 병이 찾아들면 요양원이나 병원에 갇혀 자식이 부담하는 화폐 단위에, 언제가 끝일지 모르는 여생을 저당 잡혀야 하는 처지로 내몰렸다. 잉여 존재로의 전락이다.

이 길에서 누군들 예외이겠는가? 강의 뒷물은 항상 앞 물을 밀어낸다. 지금의 물은 어제의 그 물이 아니다. 세대도 마찬가지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묻는다. 그대는 효용가치가 영원한 존재로 살아남을 것이라 자부하는가?

그래도 작동하는 공간조직

이곳 노인들은 대체로 이중의 존재 의식에 사로잡혀있다. 물리적 신체나이는 물론 사회·경제적으로 도태된 상황을 심리적으로 거부한다. 이곳에 나와 있어도, 스스로는 철저히 '관찰자'라 여긴다.

빈한한 경제 능력에 무료급식소를 이용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과거를 살아낸 시간에 의식의 끈을 묶어 두고 있다. 열정적이던 과거 자신의 모습을 현재 시공간에 끊임없이 투영시킨다. 분명 현실과 괴리된 몽상임에도, 이런 의식이 이곳을 노인 전유 공간으로 변화시킨 힘이라 여겨진다.

이곳은 변화하는 도시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 '나이 듦'은 속도와 반대개념이다. 따라서 이 공간도 사라질 위험성에 항시 노출되어 있다. 그러함에도 이곳에 작동하는 나름의 법칙이, 이 공간을 지켜줄 최후 보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구매력한계에 따른 지대 때문이다. 지대가 배타적 노인 전유 공간으로 살아남게 한 핵심 요소다.


▲ 허리우드클래식 실버 전용 영화관으로 이용료가 저렴하며, 낙원동 일대 노인 문화의 대표적 상징이다.ⓒ 이영천

음식값이 무척 저렴하다. 20세기 말에 형성된 가격대가 아직도 지켜지고 있다. 무료급식에 의존하기 싫은, 최소 지불 의사와 자존심을 지키려는 노인이 주로 이용한다. 이발소가 그렇고 목욕탕이 그러하며 아주 값싼 커피값이 또한 그렇다. 술집과 간이주점이 그렇고, 패스트푸드 주 고객마저 이들이다. 낙원상가에 있는 영화관 허리우드클래식이 '실버 전용'으로 운영되는 사례가 대표적 본보기다.


탑골공원 북측 빈터에선 바둑과 장기 대결이 일상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경운동, 봉익동, 돈의동과 피맛골 등지 골목을 소비하는 걸음도 마찬가지다. 이렇듯 공간조직은 여전히 살아 퍼덕이고 있다. 속도와 무관하게 지나간 젊음을 회상하며 느리게 변해가는 철저한 '환원 공간'으로 생존해있다.

 

▲ 공터 간이주점 탑골공원 동측 담장과 송해길 사이에 형성된 간이주점. 잔술을 팔고 있으며, 대낮임에도 이용자가 상당수다.ⓒ 이영천

외부자 시선에 포착된 몇몇 스틸컷은, 이 공간이 오히려 넘쳐나는 활기를 버겁게 껴안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아직도 숨 쉬며 살아있는 존재라는, 감출 수 없는 욕망을 품고 있다는, 다가오는 미래를 내 것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의지를 이들은 결코 숨기려 하지 않는다. 온갖 욕망을 이 공간에 그대로 투영시키고 있다. 모두 한때는 찬란한 시절을 구가하던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잉여 존재로 밀려난 '노인'들이 점유·소비하는 장소기억이다.

'송해길'이 가진 힘으로

지난 6월 방송인 '송해'씨가 타계했다. 1985년 낙원동에 자리한 '원로연예인상록회'가 사랑방 역할을 맡게 되면서, 고인은 이곳 주민들과 깊은 유대관계를 형성한다. 낙원동 일대에서 일상생활을 펼쳐나간다.

 

▲ 송해길 상징 최근 타계한 송해 씨 흉상과, 그를 추모하는 화환이 놓여 있는 종로3가역 5번출구 송해길 상징 장소.ⓒ 이영천

이곳을 활성화하려는 그의 여러 봉사와 노력이 주민들 지지를 얻게 되었고, 주민들 요청으로 명예도로명인 '송해길'이 2016년 탄생하였다. 수표로 북쪽 끝 240m 구간으로 종로2가에서 종로3가역 5번 출구까지다. 이곳이 아슬아슬한 노년의 삶을 보듬어 주며, 이들을 젊은 시절로 환류시켜주는 공간이다.

공간조직은 대체로 소탈하고 허름하며, 좁은 골목마다 점포가 상당수다. 꼭 노년만을 위한 점포들도 아니다. 젊은 세대도 얼마든지 이용할 넉넉한 품을 갖췄다. 젊은이들이 이곳을 찾아 자연스레 지혜와 경륜을 엿보고 익힌다면, 지금보다 더 너른 품의 '어른 공간'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지 않을까.

 

▲ 송해길 남측 초입 종로에서 송해길로 드는 초입. 보도에 문을 세워 명명한 길을 표현하고 있으며, 오른쪽 붉은 집이 시인 박인환이 운영했던 "마리서사" 서점 자리.ⓒ 이영천

자본과 도시 권력의 촉수는 현재 진행형으로 이곳 역시 개발 압력이 상당하다. 최후 보루라 할 수 있는 낙원상가가 한때 존폐위기에 놓이기도 했었다.

'송해길'은 지역주민들 힘으로 탄생하였다. 모두가 공존하자는 지혜가 담긴 제안이었고, 한 대중문화예술인의 삶과 헌신에 대한 보답이었다. 송해길이 무자비한 자본의 개발 압력으로부터, 이 공간조직을 든든히 지켜내는 힘이 되어주면 좋겠다.

 

오마이뉴스 / 시민기자 이영천

인사동은 젊은이 천국이지만, 길만 건너면 늙은이 낙원이다.

그래서 동네 이름도 낙원동이다.

 

그 곳은 사회와 가정에서 퇴출 당한 늙은이들 아지트다.

평생 몸 바쳐 돈만 벌며 살았으니, 놀 줄도 모른다.

 

식구들 눈치 보여 별 볼일 없이 지하철 탄다.

공짜 전철로 어디든 못 가겠나마는, 맘 편히 소일 할 수 있는 곳은 탑골공원 뿐이다.

 

탑골공원 담장에는 장기판이 줄을 섰고, 골목에는 대폿집과 국밥집이 줄지었다.

장기판에 훈수 들다 목노주점에서 시간 죽인다.

 

국밥 한 그릇에 추억을 되 세기고, 탁배기 한 사발에 왕년의 무용담이 쏟아진다.

 

그들은 우리 경제를 일으킨 주역이 아니던가?

한 때는 월남전에서 피 흘렸고, 독재정권과 싸운 사람들이다.

 

한 가지 이해되지 않는 것은, 늙은이 대부분이 꼴통 보수라는 점이다.

그토록 보수정권을 지지했으나, 늙은이 복지는 항상 찬밥 신세다.

 

'거리두기로 공원 문이 닫혀도 장기판은 돌아 간다성북동 김씨가 하소연 한다.

 

마누라한테 밥 얻어먹는 것도 눈치 보여요.

돈 없고 힘 없으니, 벌레 취급받기 싫어 나오지요,

해장국 삼천원에다 소주 삼천원, 하루 만원이면 찍 싸요.“

 

이제 친구들이 하나둘 떠나는 게 남의 일 같지 않단다.

덧없는 세월 속에 인생 무상을 체감한다.

 

허리우드에 걸린 영화 간판처럼, 모든 건 바람과 함께 사라질 뿐이다.

 

사진, / 조문호

 

 

인사동 길 건너에 자리한 낙원동은 주머니 가벼운 노인들의 안식처다.

그러나 오 갈 때 없는 노인들의 도피처에 다름 아니다.

 

이곳에서는 만 원짜리 한 장이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

이발도 할 수 있고 헌책도 살 수 있다.

따뜻한 국밥으로 허기를 메우고 커피 한 잔의 여유도 즐긴다,

그리고 대포 한 잔으로 시름도 풀 수 있는 곳이 바로 낙원동이다.

 

소뼈와 우거지로 밤 세워 끓여낸 국밥 한 그릇이 2천 원이다.

200원짜리 자판기 커피에다 이발도 염색도 5천 원이면 충분하고,

맥주 컵에 따라 주는 천원의 잔술 한 잔에 하루가 지나간다.

 

서쪽의 인사동과 북쪽의 익선동, 남쪽의 종로에 비해

낙원동은 제반 시설이 낙후된 데다 노인이 많아서 인지,

길 하나 사이에 가게 임대료조차 세배나 차이 난다.

 

낙원상가 지하에는 청국장으로 유명한 ‘일미식당’도 있고 ‘맛국수’와 ‘엄마김밥’도 있다.

탑골공원 북문 쪽으로는 ‘유진식당’ 등 싸고 맛있는 식당이 즐비하다.

 

지난6일, 인사동에서 낙원동으로 발길을 옮겼다.

계단 밑에 자리잡은 ‘다리 밑 집’에서 길만 건너면 낙원동이다.

탑골공원 북문 쪽에 노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장기를 두고 있었다

장기판 하나에 훈수꾼은 여러 명 붙어 있었다.

 

한 할아버지가 "아! 씨발, 마가 왼쪽으로 갔으면 막을 수 있었잖아!"고

투덜거리자 구경꾼들이 모두 웃었다. 다들 처음 만났지만, 이내 친해졌다.

인천에서 왔다는 서씨는 "아는 사람 없어도 그냥 와서 이야기하다보면 친해진다"고 한다.

장기 두는 사람도 훈수 두는 사람도, 마스크를 쓰고 있다는 게 전과 달라졌을 뿐이다.

이곳은 사회적 격리도 통하지 않는 노인들의 천국이다.

 

탑골공원으로 출근하는 노인들이 늘어난 것은

무료 급식도 있지만, 파격적으로 싼 식당이나 이발소가 모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운현궁 맞은편에 있는 노인복지센터와 낙원상가에 있는 실버영화관 등

노인들 시간 보낼 곳이 몰린 것도 한 몫 했을 것이다.

 

한 가지 변한 것이 있다면 노인들에게 몸 파는 '박카스 아줌마'들이 종묘 쪽으로 옮겼다.

“나랑 연애한번 할래요? 잘해 드릴게”라며 박카스를 내미는 장면은

이제 탑골공원 주변에서는 볼 수 없다.

 

우리 사회가 과거에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다면

지금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시점이 되지 않았나 싶다.

늙어감에 따라 찾아오는 죽음을 막을 수야 없지만,

노년의 가난함과 외로움, 그리고 노인의 성 문제 등 사회가 터부시하는

여러 요소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박카스 아줌마’가 아닌가 생각된다.

 

애잔하면서도 불편한 존재가 노인들이다.

어쩌다 나이 드는 것이 사회적 문제가 되었으며 고통이 되는지 모르겠다.

그보다 더 슬픈 것은 가족 부양하느라 정신없이 돈벌이에 급급하다 

미처 재미있게 사는 '놀이'조차 배우지 못한 것이다.

몰입할 놀이도 없는 남자들에게 불어난 잉여시간은 버거울 수밖에 없다.

 

노인문제가 남의 일이 아니라 누구나 거쳐야 할 인생행로다.

낙원동이 노인들의 도피처가 아니라 이름처럼 낙원으로 만들 수는 없을까?

다들 밤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지만, 공원 주변엔 길 잃은 노숙자만 남는다.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는 그들의 삶이 안타깝다.

 

사진, 글 / 조문호

 

독립선언문 낭독한 태화관 부터 승동교회, 탑골공원 등 역사적 발자취 많아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1919년 3월 1일 전국 곳곳에서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한 ‘독립운동’이 퍼져 나갔다. 학생과 시민들은 태극기를 들고 거리를 활보하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고, 줄기찬 외침은 민족 독립으로 이어졌다.

그로부터 97년이 흘렀다. 서울 도심 거리에는 이미 태극기가 펄럭이고, 3.1운동을 기억하기 위한 행사 준비도 한창이다.

특히 서울 종로구는 3.1운동의 시작 지점으로 근현대 독립운동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지난달 26일, 필자는 3.1운동의 흔적을 찾기 위해 안국역 6번 출구를 거쳐 서울 인사동 전통문화의 거리에 다녀왔다



인사동 전통 문화의 거리 상점에 태극기가 걸려있다.


민족 대표들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곳, 태화관


인사동에 들어서자 골동품 상점, 화랑, 전통공예품 상점 등이 있는 전통문화의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전통문화의 거리를 지나 필자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인사동 5길 거리에 자리 잡고 있는 ‘태화관’.

태화관은 3.1 독립운동 당시 요리점 명월관의 별관으로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축하연을 베푼 곳으로 유명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은 한 때 이완용의 별장이었다.   



태화빌딩 입구의 모습.


현재 태화관 자리에는 12층 높이의 태화빌딩이 위치해있다. 빌딩 앞에 세워진 ‘삼일독립선언유적지’ 표지석이 3.1운동 독립선언식 거행 장소임을 나타낸다. 건물 1층 로비로 들어서면 작은 카페가 있는데, 한쪽 벽면에는 ‘민족대표 삼일 독립선언도’가 걸려있다. 이곳은 현재 시민들이 커피를 마시는 휴식 공간으로 애용되고 있다.


태화 빌딩 안의 카페에 민족대표 삼일 독립선언도가 걸려있다.


학생 대표들이 3.1운동 지침과 계획을 모의한 곳, 승동교회


태화관에서 다시 탑골공원 방향으로 가다 보면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승동교회’가 위치한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130호로 지정된 승동교회는 학생대표들이 모여 3.1운동 지침과 계획을 모의한 곳이며, 교회 학생들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학생시위운동이 일어났던 장소다. 이곳은 탑골공원과 근거리에 있어 3.1운동의 본거지로 적합했다. 


승동교회 모습.


1904년 인사동 한옥을 사들여 이사를 한 후, 예배당을 새로 짓기 시작해 1912년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승동교회 골목길 입구에는 교회의 역사를 소개하는 사진과 글들이 보였고, 건물 앞에는 3.1 독립운동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3.1운동 최초 발상지, 탑골공원

승동교회를 둘러보고, ‘탑골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인사동 거리 끝에 자리 잡은 ‘남인사 안내소’ 앞의 횡단보도를 건너면 ‘탑골공원’이 눈에 들어온다. 탑골공원은 3.1운동의 발상지로 당시 학생 대표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상징적인 장소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도심 내 공원으로, 1992년 5월에 공원 명칭을 파고다 공원에서 탑골공원으로 개정했다.   


탑골공원 내의 3.1운동 기념 동상.


탑골공원 내에는 3.1운동 기념탑, 3.1운동을 기록한 부조,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동상과 한용운 시비 등이 자리 잡고 있다. 또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던 팔각정을 중심으로 보물 제3호인 원각사비, 해시계인 앙부일구 받침돌 등의 문화재도 남아있다. 이날은 탑골공원에서 휴식을 취하는 어르신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이처럼 현재 탑골공원은 시민들에게 좋은 휴식처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3.1운동의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곳, 보성사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조계사 경내에 자리 잡고 있는 보성사 터였다. 보성사는 1910년 세워진 인쇄소다. 보성사의 가장 큰 업적은 2만 장 가까이 되는 3.1운동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것이다.  


조계사 후문에 조성되어 있는 독립운동 기념비.


보성사는 3.1운동 이후 일제에 의해 전소되어, 터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현재 조계사 후문 맞은편에는 시민들의 휴식공간인 근린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독립운동을 알리는 기념비와 동상이 세워져 있다.  

독립운동 자금 마련에 큰 역할을 했던 천도교 중앙대교당

필자는 마지막으로 안국역 5번 출구 인근에 있는 천도교 중앙대교당까지 둘러보며 탐방을 마쳤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3.1 독립운동을 이끄는 거점이었다. 의암 손병희 선생의 주도 아래 독립 자금을 모으기 위해 천도교 중앙대교당 건설이 시작됐는데, 이곳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세계 최초로 어린이날을 선포한 곳이기도 하다.  


천도교 중앙대교당 모습.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완공 당시 명동성당, 조선총독부와 더불어 서울의 3대 건축물로 꼽혔다. 직접 바라본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고풍스러운 붉은 벽돌 건물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날 인사동 전통문화의 거리는 평일임에도 국내외 관광객들로 붐비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3.1운동 유적지들의 분위기는 조용하고 조금 썰렁하기도 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3.1절이다. 친구, 연인, 가족과 함께 인사동을 방문하여 대한민국 과거와 오늘을 느껴보는 것 어떨까.    

 

정책기자 이상국(프리랜서) leesang3002@gmail.com



서울의 중심인 종각에서 동대문 쪽으로 500m만 가면 사적 제354호인 탑골공원이 나옵니다. 이곳은 조선의 태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정할 때 조계종 본사로 세웠다가 세조가 중건한 원각사가 있던 자리로, 일제시대 이후에는 파고다공원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서울에 마련된 최초의 근대식 공원이며 3·1운동의 발상지로 불리는 탑골공원에는 어떤 의미 있는 나무들이 있는지 둘러보았습니다.

탑골공원의 정문인 삼일문 안으로 들어서면 왼쪽에 은행나무 한 그루가 보이고, 오른쪽으로 3·1운동 기념탑이 보입니다. 기념탑 옆으로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고 선 200년 된 낙우송과 느티나무가 있습니다.

                                                   ▲ 낙우송(왼쪽)과 느티나무(오른쪽)


3·1운동 기념탑의 왼쪽에 놓인 석상 주변으로는 참나리와 왕원추리가 불쑥 꽃대를 밀어 올렸고 그 뒤쪽으로 참느릅나무가 보입니다.


 

                                                   ▲ 참나리(앞쪽)와 왕원추리(뒤쪽)


참느릅나무는 느릅나무와 달리 잎이 작아서 비술나무나 시무나무와 비슷하지만 나무껍질이 비늘조각처럼 벗겨지는 특징이 있어서 금세 알아볼 수 있습니다. 꽃이 가을에 피는 점도 특이합니다. 우리가 잘 몰라봐서 그렇지 서울 시내의 하천 주변에 간간이 심어져 있고, 서울 시민의 휴식처인 서울숲에도 아주 많습니다.


 

                                                     ▲ 석상 뒤편의 참느릅나무


입구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손병희 선생의 동상 뒤쪽으로 소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손병희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자 민족대표 33인의 중심이 되어 독립선언을 이끈 분이고, 소나무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나무다 보니 잘 어울리는 조합으로 여겨집니다.


 

                                                    ▲ 손병희 선생 동상과 소나무



좀 더 뒤쪽으로 가면 의미 있는 소나무가 보입니다. KBS 1TV 전국노래자랑의 사회자이자 달성군 명예군민인 송해 씨가 주선해 심었다는 소나무입니다.

 

                                                   ▲ 송해 씨가 주선하여 달성군이 기증한 소나무


탑골공원에 벚나무는 멀쩡하게 서 있는 반면에 소나무 3그루가 낙뢰를 맞아 고사한 것을 안타깝게 여긴 송해씨가 달성군에 기증을 요청했고, 종로구가 수락하면서 2013년 10월 달성군에서 옮겨 심은 소나무라고 합니다.

손병희 선생 동상에서 왼쪽의 서문으로 가다 보면 사이좋게 자라는 고욤나무와 뽕나무 앞에서 발걸음이 멈춰집니다. 특히 뽕나무는 비교적 큰 편에 속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 시대에 뽕나무 심기를 권장했을 때 심어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즉, 어느 정도 유서 깊은 나무로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 뽕나무


손병희 선생 동상 뒤쪽의 오른쪽에는 보물 제3호인 대원각사비가 자리해 있습니다.
그 주변에는 가로등과 키재기를 하면서 한쪽으로 휘어져 자란 벽오동이 꽃을 떨어뜨리고 있었습니다. 수령이 그다지 오래되지 않아 보이고 벽오동이라고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나무껍질이 덜 푸른 편입니다. 이름에 ‘오동’자가 들어가니까 벽오동이 오동나무와 비슷한 나무일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 벽오동


벽오동은 벽오동과의 나무로, 현삼과의 나무인 오동나무와 비교해 잎의 모양만 좀 비슷할 뿐 꽃이나 열매는 사뭇 다른 나무입니다. 황진이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벽오동 심은 뜻은…’으로 시작되는 시조를 읊어주기에는 격이 조금 떨어져 보입니다.

그 뒤쪽에 팔각정 쪽으로 귀신처럼 산발한 머리로 드리우고 서 있는 비술나무 쪽으로 발길을 옮겨 봅니다.


 

                                                   ▲ 팔각정 오른쪽의 비술나무


팔각정 양 옆으로 비술나무가 마치 호위하듯 서 있습니다. 서쪽에 있는 커다란 비술나무는 종로구의 아름다운 나무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수령이 150이라고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독립운동이 벌어진 1919년에는 아마 청년 나무였을 겁니다. 이 비술나무는 어린 시절에 식민지 백성들이 목숨을 걸고 독립을 외치는 모습을 보며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을 것 같습니다.


 

                                                   ▲ 팔각정 왼쪽의 비술나무



두 그루의 비술나무 사이에는 팔각정이 놓여 있습니다. 3.1만세운동 주도자들이 원래 계획과 달리 인사동의 태화관으로 변경해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자 학생대표가 이곳 팔각정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고 합니다. 민족대표 33인보다 그 학생대표가 더 멋졌다고 두 그루의 비술나무가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뒤쪽으로는 국보 2호인 원각사지십층석탑이 있습니다. 조선 시대 석탑의 백미로 꼽히는 석탑으로, 탑골공원 내에 남아 있는 건축물 중 최고참입니다. 하지만 산성비와 비둘기 배설물 등으로 훼손이 가중되어 지금은 보호유리막을 설치하였습니다.


 

                                                   ▲ 원각사지십층석탑


탑골공원은 3·1운동의 발화점이라는 의미를 지닌 곳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르신들의 쉼터나 주민들의 나들이 공간으로 이용될 뿐 우리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고 배워야 할 청소년들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현장학습을 하러 많이 찾는 수목원이나 식물원과 너무나도 대조적입니다. 탑골공원에서 애국심을 고취시킬 만한 나무라고는 소나무 외에 석재유구 뒤쪽의 흰색 무궁화가 전부입니다. 아름답게 꾸미는 것도 좋지만 의미 있는 풀꽃나무가 있는 장소로 가꾸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조선비즈 : 이동혁 / 풀꽃나무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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