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전당' 명배우 헌정공연으로 선정된 유진규의 '내가 가면 그게 길이지'가

지난 22일에 이어 오늘 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무대에 올랐으나 전 좌석이 매진되었다.

 

 

 

이 공연은 한국 마임의 살아있는 역사 유진규 마임인생 50년을 결산하는 공연이다.

반세기 동안 독보적인 몸짓으로 울림을 준 유진규에게 바치는 경애인 동시에 한국 마임의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자리다.

 

 

 

유진규씨는 공연에 앞서 한국마임의 새로운 역사를 쓴다고 했다.

 

 

 

여지 것 국립극장이나 문예회관이 마임 공연을 거부해 왔는데, 이제야 대한민국 최고의 극장 ‘예술의 전당’에서 마임을 초청했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 마임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며 공연사에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날의 공연은 한국적 마임의 대표작이라 불리는 ‘빈손’이었다.

신칼, 한지, 향, 빈손 등 4부작으로 이루어진 ‘빈손’은 인간의 본질과 영혼을 노래한 걸작이었다.

 

 

 

숨 막힐 듯 펼쳐 진 격정의 몸짓에 본능적으로 카메라에 손이 갔으나 사진 한 장 찍지 못했다.

공연 중 어떻게 사진을 찍을 수 있겠는가? 부득이 공연이 끝난 후 휴게실에서 방영된 영상을 촬영하여 소개한다.

 

 

 

지난 토요일 정영신, 서정란, 최명철씨와 함께 공연을 보기로 약속했다.

서정란씨는 일찍 도착해 점심식사까지 같이 했지만, 딸 보라와 함께 늦게 온 최명철씨는 휴게실에서 공연 영상을 보았다고 한다.

 

 

 

공연이 끝난 후 기국서씨와 박준석씨도 만났고, 서정란, 최명철씨와 함께 기념사진도 찍었다.

 

 

 

일요일은 오후 2시와 6시 두 차례에 걸쳐 공연이 있다.

이미 전 좌석이 예매되어 입장할 수는 없으나 오후1시와 4시30분 '예술의 전당' 야외에서 공연되는 찬조공연은 볼 수 있다.

 

 

 

유진규 마임 인생을 결산한 성공적인 공연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사진, 글 / 조문호

 

 

[빈 손] 공연시간 60분

 

<신칼> 신칼과 몸이 하나되면서 드러나는 신칼도 아니고 몸도 아닌 혼령의 이미지.

<한지> 한지의 색감과 질감, 빛과 그림자와 어우러지는 몸,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이미지.

<향> 사물의 무속 음악속에 사람과 귀신을 대비시키면서 어둠속에 보여주는 혼불.

<빈손>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간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빈손일 때 비로서 자유로울 수 있다

 

• 출연 : 유진규, 변유정, 빈손프로젝트풍물패 빈손굿 (윤매고동, 이필천, 오선주, 최미선)

 



김이하 시인이 만난 사람들이 종로2가 YMCA 골목의 와인주막에 걸렸다.

실제인물이 아니라 초상을 소환한 사진전이다.

지난 5월1일 다섯시에 ‘다섯시’에서 개막한다는 페이스북 소개 글을 보고 대뜸 가겠다고 댓글을 달았다.

요즘 전시장에 안 가기로 다짐했지만, 스스로 자청한 것이다.

전시될 작품은 한 장도 소개되지 않았지만, 사진이 문제가 아니라 그의 사진에 대한 열정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를 볼 때마다 시인이며 사진가였던 박용수선생이 생각났다.




지금은 사진을 그만두고 ‘우리 말 갈래 사전’을 펴내는 등 우리말 연구에 빠져 있으나,

80년대 중반 민주화 시위현장에서 종종 만난 분이었다.

난청으로 소통은 잘 안 되었으나, 현장마다 찾아다니는 그 열정과 꾸준함을 존경해서다.

민주화 투쟁사뿐 아니라 문인들 행사기록도 빠지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박선생의 작업을 이은 분이 바로 김이하시인인 것이다.




김이하 시인을 알게 된지는 몇 년 되지 않았다.

광화문광장이나 인사동 지인들의 개막식에 어김없이 나타나 기록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는데,

만날 때 마다 별 말없이 빙그레 웃는 모습이 천하호인이었다.

난, ‘예술입네’ 하며 유별난 사진으로 폼 잡는 사진보다 지속적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더 중요시한다.

다들 별 것 아닌 것으로 터부시하지만, 그 기록들은 세월이 지난 후에는 가치를 발하기 때문이다.




사진계 행사 기록에 곽명우씨가 있다면 문단의 기록에는 김이하 시인이 지키고 있는 것이다.

요즘에는 문단의 기록 뿐 아니라 화가나 지인들 행사는 물론, 생태사진까지 찍는 등 점차 보폭을 넓히고 있으나,

그보다는 문인들 행사에 더 집중하고, 전시도 문인들 사진으로 압축했으면 돋보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기록은 꾸준하고 집약될수록 좋은 것은 두 말하면 입 아프기 때문이다. 



그동안 쪽방에서 꼼짝 안 하고 두문불출했다.

마침 쪽방상담소에서 ‘코로나19’ 위문품으로 일회용 죽을 열 개씩 배급해 주었는데, 외출할 필요가 없었다.

두 끼는 죽으로, 한 끼는 라면으로 때우면 닷새는 거뜬히 버틸 수 있는 편리한 식량이었다.

코로나 전염병 때문인지, 혼자 놀며 개기는 것에 재미를 붙여서다.



카메라가 말을 안 들어 정영신씨 카메라를 다시 빌려, 본인이 못 찍을 개막식 기록이나 해 줄 작정으로 갔는데,

제 버릇 개 못 주듯, 전시작가가 손님 맞으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아! 손님들이 너무 많았다. 이 얼마 만인가?

코로나 때문에 오랫동안 전시 개막식이나 지인들 모임도 없었거니와,

전시장에 들려도 조용할 때 갔기 때문에 간만에 많은 분을 한꺼번에 만난 것이다.

입구는 최명철씨가 지켜 앉았고, 김 구, 최석태, 김효성, 도천수, 김명지, 이명옥, 장경호,임경일,

노광래, 정영철, 조원균, 안완규, 윤일균씨를 비롯한 잘 모르는 분들이 가득 자리를 메웠고,

이정환, 권양수, 박윤호, 성유나, 이미리씨 등 사진가도 여럿 있었다.




반갑기는 했으나, 사회적 거리두기에 익숙해 덜컥 겁도 났다.

이제 한 풀 꺾이기는 했지만, 혹시 잘 못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이 남아서다.

사진가들 자리에 합석하여 소주 한 잔 얻어 마셨는데, 정영철씨는 멧돼지 쓸개주라며 한 잔 따라주었다.



그러나 정작 보아야 할 전시작을 보지 못한 것은 손님 사이로 관람하기가 편치 않아서다,

한 달 동안 전시되는 사진전이라 조용할 때 다시 볼 작정을 했는데, 신단수씨가 “작품이 어떠냐?”며 자꾸 물어왔다.

사실, 내 사진도 어디 걸렸다고 했으나, 부산한 술집 개막식에서 찾아보기란 용이하지 않았다.




뒤늦게 페북에 올라 온 배경 속의 작품을 몇점 보았는데, 김시인이 만난 분들의 초상사진 같았다.

주로 스냅으로 인물을 크로즈 업 한 사진인데, 사진 중에 제일 어려운 사진이 초상사진이다.

찍히는 사람의 개성이나 내면을 드러내기도 어렵지만, 일단은 작가가 흡족하기 전에 본인 마음에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끔 작가들의 프로필 사진을 부탁받으면 엄청 신경 쓰는 편인데, 스냅으로 포착한 초상이라 기대도 되었다.




그나저나, 액자까지 제작된 작품이라 사진이 팔려야 할 텐데, 걱정스러웠다.

여력 있는 분들이야 사겠지만, 이승철씨가 페북에 올린 명단을 보니, 돌아가셨거나 개털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 어려운 시기에 손해 보지 않는 전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할 뿐이다.




나온 김에 인사동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분이 있어, 다시 올 작정으로 먼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오는 31일까지 열리는 시인의 사진전을 다시 한 번 축하한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8일은 인사동사람들 만나 술 한 잔하는 셋째 수요일이었다.
죽기 전에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만나자고 나발 분지가 제법 되었건만,
다들 그리운 사람이 없는지, 사는 게 힘든지 잘 나오지 않는다.






그 날은 오후2시부터 인사동 나오라는 장경호씨 전화를 받았다.
일찍부터 마시면 늦게까지 버티기 힘들어 겁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만난 지 오래된 최명철씨와 함께 ‘툇마루’에 있다는데...






나오다 동자동 입구에 자리 잡은 유정희씨 일당에게 덜미 잡혔다.
“날씨도 더운데, 막걸리 한 잔 해요.”
차마 거절할 수 없어 마시다보니 30분이 후딱 지나버렸다.






바삐 갔더니, 그 때까지 장경호씨와 최명철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최명철씨는 전국구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일 없이 바쁜 양반인데, 모처럼 인사동에 나온 것이다.
툇마루 막걸리는 맛은 있으나 느즈막에 달아올라 힘들게 하는 술이지만, 찔끔 찔끔 받아 마셨다.






그런데, 인사동에서 30여 년 동안 양념 행상을 해 온 권정선씨가 ‘툇마루’ 이층에 올라 온 것이다.
알고 보니 ‘툇마루’의 된장비빔밥에 들어가는 참기름을 권씨 할매가 댄다고 했다.
‘툇마루’를 단골로 잡고 있는 권씨 할매가 갑자기 존경스러워 보였다.
뵐 때마다 옛날 같지 않은 야박한 인사동이라 사는 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비빔밥 한 그릇 먹고 ‘유목민’으로 가다 거리에서 뜻밖의 까딱이를 만난 것이다.
이 친구 역시 인사동에서 만난 지가 30년 넘었지만,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인사동 물귀신이다.
그것도 날씨가 무섭도록 춥거나 더울 때만 나타난다.
보이지 않으면 혹시 죽지나 않았는지 걱정하는데, 그 걱정을 비웃듯 나타나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이다.






이 인간 보면 사람 목숨이 참 질기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노숙자들이 몰리는 서울역 부근으로 가면 밥이라도 쉽게 얻어먹을 수 있지만,
그가 즐겨 다니는 곳은 인사동이나 미술관이 몰린 곳이라 밥은커녕 사람들의 눈총만 받는다. 



 


비록 노숙하며 살아가는 걸승이지만, 내공은 보통이 아니다.
저승 떠난 화가 강용대씨가 그를 일찍부터 알아채어 유일하게 벗이 되어주기도 했다.
그는 한 때 해인사 중이었지만, 무슨 사연인지 인사동을 헤맨 지 숱한 세월이 지났다.
인사동에서는 스님들이 그의 밥이다.
얼마 전에는 조계사 경내에서 보살 한 분이 거지 행색을 푸대접 했다가 혼쭐나는 모습을 최명철씨가 봤단다.






그는 중답게 술은 마시지 않는다.
녹차는 좋아할 정도가 아니라 그의 중독자에 가깝다.
거지 주제에 따뜻한 물 구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그 비결은 나도 모른다.
녹차 문제로 종로경찰서에 들락거린 적도 두 차례나 있는데, 그 때마다 고인이 된 ‘귀천’ 목여사가 빼 내 주었다.






아무리 꼬드겨도 그의 법명은 물론 신상에 관한 일체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무슨 의문이 그리 많은지 항상 고개를 까닥거리고 다녀 그냥 까딱이로 부른다.
탁발 또한 아무한테나 손 벌리지 않고 아는 사람에게만 강탈하듯 뺏는다. 
푼돈이지만, 만나면 항상 갈취 당했는데, 요즘은 내 사는 꼴을 짐작했는지 돈 달라는 소리를 일체하지 않는다.






너무 반가워 담배 한 대 권했더니, “주제에 담배는 무슨 담배냐”며 갑 채 빼앗아 자기만 피운다.

오히려 내가 담배를 구걸하도록 만들었다. 좌우지간 보통 내공이 아닌 의문의 걸승이다.






이 날은 오래된 인사동 꼴통들을 자주 만났다.
돌 위에 자리 잡은 사람에게 카메라를 들이댔더니, “문호형님 아입니꺼?”라는 말에 화들짝 놀랐다.

올려다보다 지산이었다. 이 인간 이야기 꺼내려면 날 샐 것 같아 그만해야겠다.






그 날은 막사발로 통하는 김용문씨를 비롯한 서울공고 동문들의 단체전이 있다기에 ‘나무화랑’에 올라갔다.
석심 미술전이라 이름 붙였는데, 돌에는 마음이 없으니 보나마나다.
김용문씨를 내세운 아마추어 동문들 전시였는데, 아는 분이라고는 김용문씨와 김진하관장 뿐이었다.






날씨도 내 마음처럼 왔다 갔다 했다.
비오다 더웠다 들랑날랑 하니 사람들도 많았다 적었다 날씨 따라 갔다.
‘유목민’에 자리 잡았으나 시간이 이른지 손님도 없었다.
오가며 만난 아는 사람이라고는 이수호선생과 김명성, 공윤희, 유진오, 전활철, 박혜영씨가 전부다.






그나저나 술이 취해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다들 늦게나오는데, 나오기도 전에 내가 취해버렸으니 어쩌랴!
다음부터는 오후 여섯시 이전에는 절대 나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장경호, 유진오씨를 남겨두고 삼십육계 줄행랑 쳤다.






아! 살아남기 힘들다.

제발 셋째 수요일을 기억해다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9일 저녁 무렵, 화가 장경호씨로 부터 전화가 왔다.
인사동 ‘유목민’에서 술 한 잔 하자는데,
피차 징그럽지만 어쩌겠는가?

요즘 관 같은 쪽방에 누워 꼼짝도 않고 지내는데,
귀찮지만 일어나야 했다.






꾸물대다 한 참을 지나서야 ‘유목민’에 도착했는데,
그 자리에는 장경호씨 외에도 영화감독 이정황씨와 최명철씨도 있었다.
엊그제 김구 전시 뒤풀이에서도 보았지만, 다들 반가웠다.

잘 챙겨먹지 않는 것을 아는지, 이 감독은 앉자 말자 밥부터 챙긴다.
옆에 앉아 계속 밥 숱 가락에 반찬을 올려 주는데,
마치 죽은 울 엄마가 살아온 것 같았다.






옛날엔 밥 먹어라는 소리가 그렇게 싫었으나, 세월이 지나니 그리웠다.
얼마나 밥 먹는 걸 귀찮아했는지,
마누라 혈압 올렸던 일도 대부분 밥 때문이다.






호강에 바쳐 요강에 똥 싸는 소린지 모르지만,
동자동에선 밥 먹으란 소리하는 사람 없어 너무 좋다.
배고프면 빵으로 간단하게 해결하니, 설거지도 필요 없다.

그런데, 그 역할을 지금 이감독이 하고 있으니, 죽을 맛이었다.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 결국 한 그릇 다 비우고 말았다.






그날의 술 안주는 요즘 뜨는 김정은이었다.
김정은이를 좋아하는 사람들만 모인 것이다.
하기야 요즘 김정은이 싫어하는 사람은 자한당 패거리 말고는 없을 것이다.


빨간색의 자한당이 빨갱이를 싫어하는 것도 그렇지만,
어쩌면 평화를 싫어하는 자한당이 빨갱이가 아니던가?






아무튼, 이번 북미정상회담에서 핵 폐기에 따른 보상을 충분히 받아야 한다.
그건 핵 포기에 따른 보상이 아니라,
미제국주의의 패권을 위해 한반도에 끼진 패악의 대가다.


제주 4,3사건을 비롯하여 죄 없는 국민들의 목숨은 얼마나 앗아 갔는가?
그 피의 대가를 김정은이가 받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날의 술잔은 회담 결과를 앞당긴 축배나 마찬가지였다.
이정황감독이 쏜 평화 기원 주에 모처럼 행복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8일에는 장경호씨 호출로 인사동에 불려나갔다.
지방 다녀와 밀린 일 좀 하려니, 그냥 두지 않았다.






저녁 한 끼 때울 겸 인사동 ‘툇마루’로 나갔더니,
최명철씨가 딸내미 보라양을 데려왔더라.
처음인데도, 인사성도 밝고 성글성글한 게 붙임성이 좋았다.






된장비빔밥에 막걸리 한잔 마시고, ‘낭만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장씨나 최씨나, 다들 술에 골았는지 비실비실했다.
쇠 덩어리도 그리 퍼마시고 나부대면 견디지 못할 것이다.






최명철씨는 집에 가자는 보라 데리고, 먼저 퇴청한지라 그만 일어나야 했다.
안주로 시켜놓은 가자미찜이 그대로지만 보영이 더러 싸 달라고 했다.
귀찮아도 가져가면, 내일 아침식사는 폼 나게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만 돌아갔으면 좋겠으나, 다시 ‘유목민’에 들어갔다.
옆 자리에는 화가 강행복씨가 앉아 있었다.






그런데, 장경호씨 몸이 말이 아니었다.
추운데서 웅크려 잤는지, 마치 풍 맞은 것처럼 허리를 펴지 못했다.
혼자 사는 사람은 몸 아픈 것보다 더 서러운 것이 없는데, 걱정이다.






뒤늦게 페북에 들여다보니 최명철씨도 이틀 동안 잠만 자다
결국 병원신세 진다는 글을 보았다.





오나가나 술뿐인 연말을 견디려면, 몸 관리 잘 해야 한다.
살아남아야 마시지...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9일은 술 마시느라 바쁜 하루였다.
전주 문화계 맹주 도예가 한봉림씨가 인사동에 온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논산 강경장에서 열리는 보부상축제에 있었으나,
서둘러 저녁시간은 맞출 수 있었다.






오후6시 무렵, 서울에 도착했는데,
김명성씨와 장경호씨의 전화가 약속이나 한 듯 연이어 걸려왔다.
장경호씨는 최명철씨와 ‘툇마루’에 술판을 벌여놓았고,
김명성씨는 한봉림씨를 맞이해 ‘여자만’에다 술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오후7시엔 ‘로마네꽁띠’에서 열리는
소설가 박인식씨의 시집 출판기념회도 있지 않던가.






먼저 들린 ‘툇마루’ 입구에는 화가 장경호씨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새김아트의 창시자 정고암씨의 모습도 보였다.
제주를 다녀 온 최명철씨는 짐 보따리를 옆에 둔 채 술을 마셨다.





급히 막걸리 두 잔만 연거푸 마시고 일어나려니,
최명철씨가 한봉림씨를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안주가 그대로였으나, 술 잔만 비운 채 옮겨야 했다.






‘여자만’에 들려 오랜만에 한봉림씨를 만났다.
몇 년 만인지 아득했으나,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의 여유 있는 너털웃음에 세상설음 다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전주로 이사 간 송상욱시인도 와 있었고,
김명성, 김상현, 김각환, 이상훈씨 등 반가운 분들이 많았다.
회와 탕 등 안주를 잔뜩 시켜놓았으나,
다들 박인식씨 출판기념회 때문인지 마음이 바빠 보였다.






한봉림씨만 ‘여자만’에 남아 장경호씨와 어울려 마셨다.
그 날 따라 가는 곳 마다 술상이 푸짐했으나, 다들 술꾼들만 있어 음식이 줄지 않았다.






담배 피우고 돌아오니, 한봉림씨는 옆 자리 분과 합석해 있었는데,
인사를 나누어 보니, BMC 대표로 있는 조민제씨 였다.
함안 조가의 제자 항렬이면 대개가 일가이기도 했으나, 폐친이라 더 반가웠다.
건너편 자리에는 김종철씨와 신학림씨의 모습도 보였고,

그날따라 눈에 익은 분들이 많았다.






그러나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난 출판기념회에 걸려 술자리가 편치 않았다.
한봉림씨가 기꺼이 자리에 남은 것도, 남은 사람이 마음에 걸려서 일거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이지만, 어쩌랴!



사진, 글 / 조문호































원로시인 민영선생의 시집출판기념회가 인사동 ‘유목민’에서 열렸다.
지난 5월 ‘창비’에서 출판된 민영시전집을 뒤늦게 축하하는 자리같았다.
이 날은 일이 겹쳐 이 곳 저곳 세 탕이나 뛰다보니, 이미 파장이었다.






오랫만에 뵌 민영선생님도 반갑기 그지없었으나, 채현국선생을 비롯하여, 김정헌, 장경호, 임태종,

정고암, 조해인, 박구경, 박 철, 오치우, 최명철, 박수영, 이명희, 정원도, 김명지, 송일봉, 정영신씨등

많은 분들이 모여 있었다. 누가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사람인지, 술집 손님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이 자리는 '열차시회' 시인들이 민영선생의 시전집출판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시집출판기념회라는 현수막은 안밖으로 두 군데나 걸렸지만, 시집은 구경 할 수 없었다.

몇 달 전에 나온 책이라 다들 보았는지 모르지만, 한 권이라도 가져와 보여 주었으면 좋았겠다.

출판기념회가 아니라 술판기념회였다.





제주에 사는 변순우씨도 올라 와 있었는데,

홀애비가 결혼했다며 낯선 여인을 소개시켜 주었다. 

반갑고 축하 할 일이나, 말도 없이 살았으니 도둑장가 간 셈이다.






저녁을 먹지 못해 배가 고팠으나, 밥은 커녕 술 한 잔 따라주는 사람 없었다.
다들 취해, 알아서 퇴주잔이라도 찾아 마셔야 했다.
제주에 사는 변순우씨가 방어회를 가져 왔다고 했으나,
눈치 보느라 남긴 한 두 점이 덩그러니 쟁반을 지킬 뿐이었다.





삼삼오오 나누어 앉은 술자리에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남은 술을 거두어 마셨는데,
빈 속에 들어가니 술은 올랐으나, 왠지 즐겁지가 않았다.

'통인가게'에서 받은 심한 모욕감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지것 가난하게 사는 것을 한 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가진자의 거지취급에 분노를 삭일 수가 없었다.






그만 일어나고 싶었으나, 정영신씨가 술자리에 남아있어 갈 수도 없었다.

뒤늦게 이인섭, 성기준, 김명성, 공윤희, 신현수, 윤승길씨 등 여러 명이 등장해

노닥거리다보니, 정영신씨마저 사라져 버렸다.





집에 간 줄 알았는데, 홍어집에 있다는 것이다.

평소 홍어를 좋아하는 것은 알지만, '한 밤중에 왠 홍어냐?'며 가보았는데, 

김명지, 정고암, 이도윤씨와 함께 있었다. 그 자리도 편치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쓸쓸하게 돌아오는 발길은 무거웠다.

하소연 할 곳이라도 있었다면 덜 무거울텐데...


17일의 인사동 밤은 잔뜩 흐렸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1일, 모처럼 인사동에 나갔다.

인사동 ‘고도’에서 열리는 박성남씨 전시에 들렸다가 ‘툇마루’로 갔다.




장경호씨를 비롯하여 김이하, 이승철 시인, 그리고 인사를 나누지 못한 최명철씨도 함께 있었다.

최명철씨는 광화문광장에서 여러 번 본 기억이 있는데, 화가 박광호씨를 너무 닮았다.
이미 술판은 파장이었고, 막걸리 한 두 잔 마시고 나와야 했다.





다들 술이 취했으니, 노래 할 수 있는 술집으로 가자했다.
‘아리랑’으로 갔으나, 이른 시간이라 문이 잠겨있었다.
그 다음 찾아 간 곳이 ‘백상사우나’ 부근에 있는 ‘갤럭시 노래방’이었다.
처음 가본 곳인데, 대뜸 최명철씨가 아가씨 네 명을 불렀다.
술 취한 사내가 여인네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마는
난, 술도 취하지 않았지만 너무 뜻밖이라 걱정 되었다.
한 두 사람도 아니고 짝 맞춘다면, 그 돈은 어쩔건가?





이미 엎질러 진 물로, 양주가 나오고 아가씨 네 명이 사내들 옆에 끼어 앉았다.
최명철씨는 노래하느라 바빴고, 아가씨들은 술 권하기 바빴다.
맨 얼굴로는 도저히 마주 볼 수 없을 것 같아 바쁘게 술을 마셔댔다.
빈속에 들어가니, 금세 본색이 더러 났다.
그 때야 옆에 앉은 여인에게 나이를 물어 보았다. 딸이나 마찬가지였다.


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뭐냐고? 다시 물었다.
한 마디로 돈이라 했다.
돈은 중요한 목적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냐고 했더니, 쾌락이라 고쳐 말했다.
너무 솔직한 대답이었다.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즐길 수 있으니까...





취기가 올라 맞은편에 앉은 여인에게 춤을 추자고 권했다.
파트너였던 김이하시인이 마침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그녀는 40대로, 그중 나이가 들어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춤은 추지 못하지만, 그녀를 안아보고 싶었다.


여인네의 살 냄새에 강한 욕정이 일었다.
몸에서 피가 끊었고 힘이 흘러 넘쳤다.
살아 있다는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금세 한 시간이 지나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다들 술이 취해 시킨 술도 마시지 못했건만, 3차로 ‘아리랑’에 갔다.
‘아리랑’엔 먼저 온 손님들이 이미 놀이판을 휘잡고 있었다.
마실 만큼 마셨으면 그만 헤어지지, 왜 방황하는지 모르겠다.





원님 덕에 나팔 불듯 잘 놀았으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자정이 가까워서야 도망쳤는데, 맡겨 둔 짐 보따리 찾느라 유목민에 들렸다 지하철을 놓쳐버렸다.

술 취한 거지를 어떻게 알았는지, 오는 택시마다 도망치네. 제기랄~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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