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탑은 탑 속에서 발견된 탑지에 의하여 확실한 건탑 연대를 알 수 있어 다른 석탑의 건립연대를 추정하는 데 하나의 기준이 되는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
또한 석탑과 석등 모두 온전한 형태로 남아 귀중한 복원자료가 되고 있다.
보림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도피안사철조비로자나불상과 더불어 통일신라 말기의 대표적인 불상이다.
지금은 광배와 대좌를 모두 잃어버리고 불신만 남았는데, 이 불상 왼쪽 어깨 부분에 여덟 줄의 불상 조성기가 음각되어 있다.
머리 부분이 몸집에 비하여 크게 보인다. 머리와 불신의 비율이 대구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비슷한데. 육계가 비교적 큼직하며 얼굴은 달걀형이다. 편편한 콧잔등과 가늘고 긴 눈, 사다리꼴의 두드러진 인중, 작은 입 등으로 보아 상당히 추상화된 경향을 보인다. 당당한 자세와 가슴, 팽창된 체구 등 건장한 불신을 드러내면서도 한편으로 상체가 약간 움츠러든 위축된 느낌이라 긴장감과 탄력성이 다소 줄어들었다. 이처럼 당당하게 보이면서도 해이해 보이는 선의 특징은 도식적이고 기하학적인 묘사와 더불어 9세기 후기 불상 양식의 선구적인 면을 보여준다. 이러한 양식이 발전하여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나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같은 9세기 후기 조각 양식으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보림사 보조선사탑비는 통일신라시대의 고승 보조선사 지선의 탑비로서, 그가 입적한 뒤 4년 만인 884년에 사리탑과 함께 조성되었다.
이 비는 비신과 귀부,·이수를 모두 갖춘 완전한 형태로 남은 유적인데, 이수 중앙에 “가지산보조선사비명”이라는 글이 적혀 있다.
비를 받치고 있는 귀부는 얼굴이 용머리처럼 변하였으며, 조각의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사납게 보인다.
등 뒤에는 육각의 귀갑문이 등 전체를 덮고 있으며, 등 가운데 구름문과 연꽃을 돌린 비좌를 두어 비신을 받치게 했다.
이수 아래는 구름문을 조각하고 비제의 좌우에 대칭적으로 승천하지 않은 용을 조각하였는데, 조각수법이 훌륭하다.
이 비는 9세기 말경의 석비양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당시 조형수준을 대표하는 뛰어난 작품이란다.
그리고 40미터 위쪽에는 보조선사탑이 자리잡고 있었다.
부도는 높은 8각 지대석에 가장자리를 따라 낮은 모난 받침을 마련하여 세웠는데, 기단부는 상대석,·중대석,·하대석으로 구성되었다.
하대석은 상하단 모두 8각인 것이 확실하나 파손이 심하여 그 윤곽이 분명하지 않으나,
하단은 각 면에 안상이 있고 상단에는 사자상을 조각한 흔적이 남아 있다.
옥개석의 추녀는 길게 뽑지 않고 탑신에 비해 단출한 느낌이 들도록 폭을 좁게 하여 전체적으로 이 부도가 늘씬하고 세련되어 보인다.
탑신석은 유난히 넓고 크며, 8각의 각 면에는 모서리기둥이나 대접받침 등이 모각되어 목조가구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탑신 여덟 면에는 문비형을 모각하고 그 좌우에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는데 갑주가 화려하다.
사천왕상은 각기 광배와 대좌를 갖추고 있으며 몸 좌우로는 천의가 휘날리고 있다.
창과 탑을 든 북방 다문천상을 제외하면 모두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다.
이 부도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탑신에 새겨진 사천왕상이다.
염거화상탑에서 사천왕이 처음 등장한 이후 고려 초까지 대부분의 탑신에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사천왕은 부처님을 호위하는 신중으로, 선사의 묘탑인 부도에 사천왕이 등장한 것은 선사를 부처와 같이 동등하게 생각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부도의 조성연대는 880년경으로 추정된다.
이 때는 왕실의 후원을 입어 선승들의 부도와 탑비가 활발하게 만들어지며 예술적으로 뛰어난 부도가 만들어지던 시기였다.
보조선사탑은 이 시기 조형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전의상암지 석불입상은 제암산 중턱의 의상암으로 전해지는 폐사지에 있던 것을
1975년 인근 장흥교도소 정문 앞에 옮겼다가, 1994년 보림사 경내로 모셔온 불상이다.
석불입상은 광배와 불신을 한 돌에 새겼는데, 광배는 상당 부분 파손된 상태이다.
민머리에 커다랗고 둥근 육계가 솟았으며, 얼굴은 원래 둥글고 온화한 모습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보수된 지금의 이목구비는 여성적이다. 체구가 아담하고, 각부의 균형과 비례감이 좋고 조각기법도 우수한 편이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 대어 엄지와 둘째손가락을 둥글게 맞대었으며, 왼손은 손목 아랫부분이 깨어져 원형을 알 수 없는 상태다.
그 외 유적으로는 장흥읍 건산리에 청동기시대의 주거지가 있는데, 곳곳에서 석기 등이 출토되고 있다.
천관산과 억불산 주변에는 고인돌이 수백 기나 되며, 특히 관산읍 방촌리에는 한곳에 100여기가 무리 지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