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장흥에 있는 ‘복담 갤러리’를 찾아갔다.

 

갤러리 주인은 한붕붕이란 이름의 페친으로 서로 왕래는 없었는데,

'정영신의 '어머니의 땅' 전시장을 찾아주셔서 만난 것이다.

그런데 실제 성함은 한정아인데, 예쁜 이름을 두고 왜 붕붕거렸는지 모르겠다.

 

가보니, 일반 갤러리와 달리 오래된 전통 공예품을 보여주는 상설전시장으로

보이차 전문 카페였다.

전시 공간이 마치 신을 모시는 신전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분을 인사동 전시장에 이어 두 번째 만났는데, 어디서 많이 뵌 분 같았다.

요즘 들어 부쩍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물어볼 수도 없었다.

 

 

전시장엔 오랫동안 수집한 도자기와 항아리, 나비장을 비롯한 섬세한 공예품과 고미술품

그리고 해금같은 다양한 국악기 등의 전통공예품이 질서 정연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아름답게 조성된 정원 곳곳에도 볼거리가 많았다.

 

비슷하거나 같은 전통공예품도 많았는데,

좋은 골동품을 만나면 구하기만 하고 아까워 팔지를 못한다고 했다.

 

손님 접대하느라 오래되고 귀한 보이차까지 내놓았으나

차라고는 달달한 자판기 커피밖에 모르는 촌놈이라 맛도 모르고 마셨다.

듣기로는 중국 최고의 보이차를 제공하는 장흥의 명소라고 한다.

 

일단 관장님이 골초라 담배 피우기는 좋았다.

하루에 서너 갑을 피워대니 비행기 타는 일은 질색이란다.

 

이층 전시장도 있었으나 이야기 듣느라 올라가보지도 못했는데,

기회가 되면 다시 들려 취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장흥 가는 길이 있으면 꼭 한 번 들려볼 만한 곳이다.

 

문이 닫혔을 땐, 정원에 전시된 작품 구경하며 잠깐 쉬어가는 것도 복 짓는 일일 것이다.

주소는 양주시 장흥면 일영로 738번지다.

 

사진, 글 / 조문호

 

 

 

 

 

장흥은 많은 문인과 학자를 배출한 지역이다.

기행가사의 효시로 통하는 ‘관서별곡’을 지은 기봉 백광홍이 장흥에 살았고,

임금이 중심을 잡고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만언봉사'를 상소한 존재 위백규도 장흥사람이다.

소설가 이청준, 한승원, 송기숙도 장흥사람이라 장흥을 '문향'이라 부른다.

 

지닌 토요일 정동지와 ‘정남진 토요시장’이 열리는 장흥에 갔다,

도착하니 점심 때라 장마당이 식당 같았다.

할머니들이 장에 소풍 나온 것 같은 정겨운 풍정이었다.

 

정동지는 밥 먹으라는 인사에 기다린 듯 달라붙어 쌈을 싸 먹었다.

장돌뱅이 수 십 년에 장꾼들에게 꼽사리 끼이는 게 몸에 베어버렸다.

더러 아는 장꾼을 만나면 죽은 사람 만난 것 처럼 반가워한다.

“아이구! 어찌까이~ 이리 와보랑께~ 뽀짝 와바야~ 한나도 안 늙었네”

가까이 얼굴을 확인하고서야 신세타령을 풀어놓는다.

 

장터에는 할머니들이 옹기종기 모여 몇 되지 않는 손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매실이나 양파 등 집에서 키운 야채를 가져와 펼쳐놓았지만, 파리만 날렸다.

 

그 중 어물전에 손님이 많았다. “영감 밥상에 자반이라도 한 손 놓아야제!”

사람이 줄어들어 변해가는 오일장이지만, 아직은 노인들의 유일한 탈출구다.

한 노인는 반주로 마신 술이 과했는지, 쉼터 바닥에 누워버렸다.

 

장흥의 마동욱씨 전화를 받고서야 장터에서 벗어났다.

가는 길에 교촌리 장흥천도교당부터 들리기 위해서다.

장흥천도교당은 목조전통한옥인데, 왠지 왜색 분위기가 풍겼다.

 

정면 5칸, 측면2칸의 팔작 기와지붕으로, 개축할 때 정면 입구에 포치형을 덧단 형태로 만든데 다

거무스름한 나무색갈이 주는 이질감인 것 같았다.

 

대청의 중앙후면에는 제단을 두었고, 전면에는 유리창으로 된 네쪽 합문과 쪽마루를 두었는데,

‘성화회실’, ‘사무실’, ‘응접실’이라 쓴 글씨체가 둔탁했다.

 

장흥천도교당은 교당 건물로서 몇 개 남지 않은 건축물이라는 점과

독립운동을 한 인물들과 연계된 공간구조라 중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구조양식의 변형은 전통한옥이 개화기 여러 문화와 변용되면서

만들어진 근대화 과정의 대표적 표상이라고도 한다.

 

이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옥당리 효자송을 찾아갔다.

밭을 가로지르는 농로 옆에 자리 잡았는데, 나무 높이가 12m로 가슴높이에서 세 갈래로 갈라져 넓게 퍼져있었다.

나무 나이는 150년이란다.

 

옛날 효성이 지극한 위씨가 어머니를 위해 심은 나무라고 한다.

뙤약볕에 앉아 아들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어머니가 안 스러워

그 곳에 곰솔을 심어 어머니가 쉴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옥당리 효자송 맞은편을 바라보니 궁전 같은 이상한 요새가 버티고 있었다.

가보니, 2012년 SBS 드라마 '신의' 세트장으로 사용한 ‘전관대’라고 적혀 있었다.

인적 끊긴 천관대는 잡초만 무성했다.

 

한 때 ‘사상의학 체험랜드’로 바뀌어 한방의학이 필요하거나 농촌 숙박체험을 원하는 이들에게 시설을 제공해 주기도 했다는데,

찾는 이가 없어 점차 폐허화 되어가고 있었다.

 

건물은 마치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 음산한 분위기였는데,

풀숲에서 기어 나오는 뱀을 보고서야 발길을 돌렸다.

사람이 살지 않아 자연은 살아있었다,

 

다음에는 장동면 만수리 천관산 자락에 자리 잡은 `해동사`를 찾아갔다.

해동사는 국내 유일의 안중근의사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매년 음력 3월이면 제향을 지낸다.

 

장흥 죽산안씨가 안중근 의사 후손이 없어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1955년 만수사 부지에 안중근의사 사당을 건립했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해동명월(海東明月)이라는 휘호를 받아 해동사로 이름하게 되었단다.

장흥의 죽산 안씨들이 장흥과 아무 연고도 없는 순흥 안 씨의 안중근 의사 사당을 세운 것은

민족과 대의를 생각하는 장흥사람들의 높은 정신을 볼 수있는 대목이다.

 

사당 내부에는 안중근 의사 영정 2점과 친필유묵 복사본이 보관되어 있었다.

안중근 의사 의거 숭모와 추모 열기가 뜨거워지면서 해동사를 찾는 발길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장흥군은 안 의사 숭모 열기를 감안해 2021년까지 70억 원을 투입해 해동사 주변을 역사교육 현장으로 만드는

역사관광 자원화 사업을 추진하느라 주변일대가 한창 공사 중이었다.

 

장흥에 가면 꼭 가보아야 할 사찰은 보물이 숲을 이룬다는 ‘보림사’다.

신라 선문구산 중에서 제일 먼저 개산한 가지산파의 중심 사찰로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 말사다.

 

신라 헌안왕의 권유로 이 산에 들어온 체징이 터를 잡아 860년에 창건하여 가지산파의 중심사찰로 발전시켰는데,

한국전쟁으로 소실되기 전까지는 20여 동의 전각을 갖춘 대찰이었다고 한다.

공비들이 이 절을 소굴로 사용하다 도주하기 전에 불을 놓아 대웅전을 비롯한 대부분의 전각이 불타고, 천왕문과 사천왕·외호문만 남았다고 한다.

 

16세기 초에 제작된 이 사천왕상은 천왕문에 안치된 목조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세밀한 기법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높이 사고 있다.

전체적인 균형감과 활달한 율동감이 탁월한데, 사천왕상이 일반적으로 긴 칼을 들고 있는 것과 달리 양손에 짧은 칼을 잡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오른쪽에는 호화롭게 장식된 보관을 쓴 동방 지국천왕이 성난 표정으로 있다,

갑옷과 천의를 입은 건장한 체구에 오른손으로 칼자루를 잡고 왼손은 칼끝을 받쳐 들고 있다.

북방 다문천왕은 높직한 보관을 쓰고 미소를 띤 인자한 모습이다.

비파를 들고 있는 선비형의 눈썹과 긴 턱수염이 부드러운 인상을 풍기는데,

발아래에는 힘에 겨운 듯 고통스러워 하는 악귀가 왼쪽다리를 받쳐 들고 있다.

왼쪽에는 남방 증장천왕과 서방 광목천왕이 자리 잡고 있었다.

 

보림사 사천왕 4위의 신체 구조는 팔꿈치에서 손가락까지만 변화가 있을 뿐 거의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것은 목조사천왕상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특징 중의 하나다.

팔뚝처럼 신체의 강건함을 강조하려는 듯 다리 자세에서도 두툼한 질량감을 드러낸다.

 

그 외의 중요문화재로는 국보인 보림사 삼층석탑 및 석등과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 있고,

보물로는 동부도와 서부도, 보조선사창성탑, 보조선사창성탑비 등이 있다.

 

남·북 삼층석탑 및 석등은 870년 경문왕이 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건립한 원탑이다.

석탑의 구조는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세우고 그 위에 상륜을 얹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이다.

이 석탑은 전체적으로 상층기단이 큰 데 비해 하층기단은 좁게 구성되었다.

탑신부의 폭에 비하여 우주의 폭이 가늘고 옥개석 낙수면도 얇아 가냘픈 느낌을 준다.

 

상륜부는 노반,·복발,·앙화,·보륜,·보개,·보주 순으로 각 부의 부재를 모두 갖추고 있는데,

앙화석까지는 양쪽 탑이 같은 수법을 보이고 있으나 남 탑의 보륜은 삼륜, 북 탑은 오륜이 장식되어 있다.

이처럼 상륜이 완전하게 남아 있는 것은 퍽 드문 예라고 한다.

 

석등 역시 전형적인 신라석등이다.

지면에는 네모난 지복석과 지대석이 차례로 놓여 있고, 지대석 위에는 3단의 8각 하대석 받침이 마련되었다.

하대석은 높은 받침과 복련석으로 구성되었는데, 받침 측면에는 안상이 조각되었고 복련석에는 연판이 조각되었다.

 

이 탑은 탑 속에서 발견된 탑지에 의하여 확실한 건탑 연대를 알 수 있어 다른 석탑의 건립연대를 추정하는 데 하나의 기준이 되는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

또한 석탑과 석등 모두 온전한 형태로 남아 귀중한 복원자료가 되고 있다.

 

보림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도피안사철조비로자나불상과 더불어 통일신라 말기의 대표적인 불상이다.

지금은 광배와 대좌를 모두 잃어버리고 불신만 남았는데, 이 불상 왼쪽 어깨 부분에 여덟 줄의 불상 조성기가 음각되어 있다. 

머리 부분이 몸집에 비하여 크게 보인다. 머리와 불신의 비율이 대구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비슷한데. 육계가 비교적 큼직하며 얼굴은 달걀형이다. 편편한 콧잔등과 가늘고 긴 눈, 사다리꼴의 두드러진 인중, 작은 입 등으로 보아 상당히 추상화된 경향을 보인다. 당당한 자세와 가슴, 팽창된 체구 등 건장한 불신을 드러내면서도 한편으로 상체가 약간 움츠러든 위축된 느낌이라 긴장감과 탄력성이 다소 줄어들었다. 이처럼 당당하게 보이면서도 해이해 보이는 선의 특징은 도식적이고 기하학적인 묘사와 더불어 9세기 후기 불상 양식의 선구적인 면을 보여준다. 이러한 양식이 발전하여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나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같은 9세기 후기 조각 양식으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보림사 보조선사탑비통일신라시대의 고승 보조선사 지선의 탑비로서, 그가 입적한 뒤 4년 만인 884년에 사리탑과 함께 조성되었다.

이 비는 비신과 귀부,·이수를 모두 갖춘 완전한 형태로 남은 유적인데, 이수 중앙에 “가지산보조선사비명”이라는 글이 적혀 있다.

비를 받치고 있는 귀부는 얼굴이 용머리처럼 변하였으며, 조각의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사납게 보인다.

등 뒤에는 육각의 귀갑문이 등 전체를 덮고 있으며, 등 가운데 구름문과 연꽃을 돌린 비좌를 두어 비신을 받치게 했다.

이수 아래는 구름문을 조각하고 비제의 좌우에 대칭적으로 승천하지 않은 용을 조각하였는데, 조각수법이 훌륭하다.

이 비는 9세기 말경의 석비양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당시 조형수준을 대표하는 뛰어난 작품이란다.

 

그리고 40미터 위쪽에는 보조선사탑이 자리잡고 있었다.

부도는 높은 8각 지대석에 가장자리를 따라 낮은 모난 받침을 마련하여 세웠는데, 기단부는 상대석,·중대석,·하대석으로 구성되었다.

하대석은 상하단 모두 8각인 것이 확실하나 파손이 심하여 그 윤곽이 분명하지 않으나,

하단은 각 면에 안상이 있고 상단에는 사자상을 조각한 흔적이 남아 있다.

옥개석의 추녀는 길게 뽑지 않고 탑신에 비해 단출한 느낌이 들도록 폭을 좁게 하여 전체적으로 이 부도가 늘씬하고 세련되어 보인다.

탑신석은 유난히 넓고 크며, 8각의 각 면에는 모서리기둥이나 대접받침 등이 모각되어 목조가구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탑신 여덟 면에는 문비형을 모각하고 그 좌우에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는데 갑주가 화려하다.

사천왕상은 각기 광배와 대좌를 갖추고 있으며 몸 좌우로는 천의가 휘날리고 있다.

창과 탑을 든 북방 다문천상을 제외하면 모두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다.

 

이 부도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탑신에 새겨진 사천왕상이다.

염거화상탑에서 사천왕이 처음 등장한 이후 고려 초까지 대부분의 탑신에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사천왕은 부처님을 호위하는 신중으로, 선사의 묘탑인 부도에 사천왕이 등장한 것은 선사를 부처와 같이 동등하게 생각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부도의 조성연대는 880년경으로 추정된다.

이 때는 왕실의 후원을 입어 선승들의 부도와 탑비가 활발하게 만들어지며 예술적으로 뛰어난 부도가 만들어지던 시기였다.

보조선사탑은 이 시기 조형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전의상암지 석불입상은 제암산 중턱의 의상암으로 전해지는 폐사지에 있던 것을

1975년 인근 장흥교도소 정문 앞에 옮겼다가, 1994년 보림사 경내로 모셔온 불상이다.

석불입상은 광배와 불신을 한 돌에 새겼는데, 광배는 상당 부분 파손된 상태이다.

민머리에 커다랗고 둥근 육계가 솟았으며, 얼굴은 원래 둥글고 온화한 모습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보수된 지금의 이목구비는 여성적이다. 체구가 아담하고, 각부의 균형과 비례감이 좋고 조각기법도 우수한 편이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 대어 엄지와 둘째손가락을 둥글게 맞대었으며, 왼손은 손목 아랫부분이 깨어져 원형을 알 수 없는 상태다.

 

그 외 유적으로는 장흥읍 건산리에 청동기시대의 주거지가 있는데, 곳곳에서 석기 등이 출토되고 있다.

천관산과 억불산 주변에는 고인돌이 수백 기나 되며, 특히 관산읍 방촌리에는 한곳에 100여기가 무리 지어 있다.

산성으로는 장흥읍 건산리의 중녕산고성, 용산면 계산리와 안량면 수양리에 걸쳐 있는 학성,

관산읍의 성산리에 석남산성, 방촌리와 외동리에 회주산성과 천관산성 등이 있다.

 

사진, 글 / 조문호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한 사진집표지]


사진가 마동욱씨의 하늘에서 본 영암사진전이 지난 21일 오후 5, 남대문 벤로갤러리에서 개막되었다.

그는 1996년부터 고향 장흥을 꾸준히 기록해온 향토사진가다.

고향에 대한 지극한 애착은 탐진강의 속살’ ‘고향의 사계’, ‘하늘에서 본 장흥등 여러 권의 사진집을 출판하며 장흥을 기록해 왔다.

그러나 이젠 고향인 장흥을 넘어 영암의 전 마을을 기록하여 전시와 사진집을 출판하게 된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미 강진군 작업도 끝낸 상태인데다 계속 다른 곳으로 작업 반경을 확대해 가고 있다.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만이 아니라 드론을 띄워 곳곳의 도면 같은 부감사진을 찍어 신판 대동여지도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발품 팔아 전국을 누벼 만든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화가 김 억씨의 목판화 작품을 비견할 수 있으나,

드론으로 기록한 마동욱씨의 사진은 정확도에서 이에 비할 수 가 없는 것이다.


 

일관된 대상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집념이 다큐멘터리사진의 소중한 덕목이 아니던가?

그는 곁눈질 하지 않는 사람이며, 예술사진 한다며 폼 잡지도 않는다.

잘 살지도 못하는 형편에 숱한 돈을 작업에 쏟아 부으며 전전긍긍하는데, 사실 이런 공익적인 기록은 정부에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던가?

그 뿐 아니다. 지인들의 전시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 축하해 주고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다.

서울 사는 나도 그처럼 찾아다니지 못하는데, 사람이 너무 좋아 탈인 것이다.

잔재주 좀 부린다고 온갖 똥 폼 다 잡으며, 인간성이라고는 전당포에 맡긴 덜 떨어진 사진가들이 얼마나 많은가?

예술에 앞서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어느 원로 예술인의 말에 무릎을 칠 그런 사진가다.


 

그동안 얼마나 남을 도와주었으면, 얼마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단다.

어느 사진가의 전시회 뒤풀이에서 한 후배가 모자를 벗어 술값을 거두었다고 한다.

막상 거두고보니 실제 술값에 미치지 못하는 적은 액수였단다.

그렇다면 거둔 돈을 전시 작가에게 전해주어 계산하게 해야 하는데, 거둔 돈을 마동욱씨에게 주어 나머지를 계산하게 했다는 것이다.

사람이 너무 좋으니, 그를 무슨 호구로 보는 것이다.

왜 이 이야기를 새삼 꺼내느냐 하면 그렇게 도움 받았던 많은 사진가들이 정작 그의 전시 개막식에는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사진판에 싸가지 없는 사진가들이 너무 많다.

인사 받으려고 전시장에서 사진 찍어 블로그에 올리고, 전시리뷰 만들어 신문사에 투고한 것은 아니지만,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행여 잘못이라도 지적하면 두고두고 씹어 돌린다.

그 욕이 돌고 돌아 내 귀에까지 전달되는데, 그런 인간을 위해 일한 게 후회막급일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물론 신문사에서 월급 받는 정식기자거나 원고료 받기 위해 일 한다면 인사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은 가난한 신문사를 돕는 뜻도 있지만, 오직 전시 작가에 대한 배려였다.

그것도 괜찮은 전시라면 간단한 일이겠지만, 안면 때문에 전시 가치도 없는 글을 쓸 때는 얼마나 머리 아픈지 모른다.

남에 대한 배려라고는 파리 뭐 만큼도 없는 사진인들이 도처에 늘려있다.


 

얼마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일본서 활동하는 양승우씨의 초대전이 인디프레스에서 열린 날이다.

양승우 전시리뷰를 작성하기 위해 전시장을 찾았는데, 그날따라 보조 건전지가 없어 카메라가 작동되지 않았다.

마침 그의 전시에 사진 찍어주고 전시리뷰까지 써준 후배사진가가 옆에 있어 작가 프로필사진을 한 장 찍어 달라고 부탁하며

사진 보낼 이메일을 건네주었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감감소식이었다.

사진을 전해주기 싫었다면 처음부터 거절했으면 다른 분에게 부탁할 수도 있었는데, 정말 난감했다.

대관절 무슨 이유일까? 감히 예술사진가에게 신문에 게재할 프로필 사진이나 부탁해서 일까

아니면 원고료가 없어서일까? 그렇다면 입은 두었다가 어디에 쓸까?


 

이런 저런 일로 사진하는 사람들에게 실망을 많이 해 이젠 특별한 관계가 아니면 사진전엔 잘 들리지도 않는다.

그랬더니 나보다 더 바쁜 정영신씨가 그 일을 대신해 주고 있다.

정영신씨도 마동욱씨 처럼 사람이 좋으니, 아는 분들의 전시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 같은데,

아무튼 마음의 상처라도 입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진판의 문제를 거론하다보니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는데, 다시 마동욱씨가 전시하는 하늘에서 본 영암으로 돌아간다.

이번에 펴낸 사진집을 살펴보면 영암읍 뿐 아니라 삼호읍, 덕진면, 금정면 등 11개 읍면 소재지 마을을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사진에는 시골 논두렁, 밭두렁에서 집으로 연결되는 아기자기한 길들이 사방으로 뻗어 있는데,

주민들이나 그곳이 고향인 분들의 입장에서는 더 없이 소중한 사진으로 얼마나 많은 추억이 담긴 장면 장면이겠는가?

수십 년을 살았어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고향산천을 훨훨 나는 새의 눈으로 구석 구석 볼 수 있게 해주었으니 말이다.


 

눈빛출판사에서 펴낸 하늘에서 본 영암600여 개의 영암 마을 모두를 드론으로 촬영한 컬러사진 600여 장을 수록하고 있다.

자연경관이 수려한 국립공원 월출산과 영산강하굿둑을 중심으로 펼쳐진 영암군의 전형적인 취락구조와

자연생태를 보여주는 상공지리지인 것이다.

     


 75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에는 영암군의 4계를 담은 컬러 사진 50여 점이

영암 특산품이 담기는 여러 가지 농산물 박스위에도 펼쳐져, 고향에 대한 정취를 더욱 더 일깨워 주고 있.


 

마동욱이 기록한 고향마을 사진은 이 땅의 모습과 생태가 어떠한 변모 과정을 거쳐 왔고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도 암시해 준다.

고향이 그리운 분은 고향 앨범처럼 펼쳐놓은 마동욱씨의 영암 사진전을 꼭 한번 관람하기 바란다


 

사진전 개막식에는 작가 마동욱씨의 내빈 소개에 이어 전남도의원 우승희씨와 무영스님,

눈빛출판사 이규상대표, 사진가 엄상빈씨가 차례대로 축사를 하였으며,

사진가로는 전민조, 김보섭, 김문호, 정영신, 남 준, 박찬호, 곽명우씨가 참석하여 전시를 축하했다.

 

사진, / 조문호



























































 

 




 

지난 11, 지방에 촬영간 정영신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여기 장흥인데, 촬영에 문제가 생겼어!

짐이 많아 움직일 수도 없으니 좀 와 줄 수 없냐?”는 것이었다.

일주일 정도 체류할 것이라며 짐을 잔뜩 싸가지고 갔는데, 뭔 일인지 모르겠다.

하던 일이 있었지만, 감히 지존이신 동지의 말을 어찌 거역할 수 있으리오.


 

대충 마무리하고 나서니, 오후5시가 되어버렸다.

내일 전시장 들릴 곳이 있어 밤늦게라도 돌아 올 작정으로 출발했는데,

서울을 빠져나가려니 차가 밀리기 시작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해야 하는 변속으로 다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는데,

마동욱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어디쯤 오셨냐?“기에 도착하면 한 밤중일 것 같다니까,

우리 집 옆 대나무 숲 민박집을 잡아놓을 테니, 천천히 오라는 것이다.

힘들어도 숙박비 줄이려 당일치기를 생각했으나,

난데없는 지원군 덕에 하루 밤을 장흥에서 묵게 된 것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가려 밥도 먹지 않고 밟았는데, 도착하니 밤11시가 가까웠다.

네비게이션이 없어 전화로 물어물어 찾아갔는데, 민박집이 아니라 마동욱씨 집이었다.

정영신, 마동욱씨와 함께 그의 아내 김영숙씨도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늦은 시간까지 자지 못하게 해 송구스럽기 그지없으나

이미 벌어진 일을 어쩌겠느냐?


 

김영숙씨는 저녁 못 먹은 걸 눈치 채고 저녁상을 차려 주었는데,

얼굴에 철판 깔아 눈 지긋이 감고 허급지급 먹어 치웠다.

바지락 국에다 갑오징어, 열무김치 등 반찬 수는 적으나, 그 맛이 예사롭지 않았다.

시장기도 한 몫 했겠지만, 여지 것 그토록 맛있는 음식을 먹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영숙씨는 제 작년 쯤 인사동의 마동욱씨 전시 오프닝에서 한 번 뵌 적이 있지만,

음식 솜씨가 이렇게 좋은 줄은 미처 몰랐다.

음식 솜씨도 보통이 아니지만, 두 내외가 찰떡궁합이었다.

여지 것 아침상 한 번 거른 적 없이 남편을 지극정성으로 챙긴다는데,

마동욱씨는 마누라 복을 타고 난 사람이었다.


 

난 지방촬영가면 아는 분들에게 좀처럼 연락하지 않는다.

빠듯한 촬영 스케줄에 장애가 되기도 하지만, 상대에게 민폐 끼치기 싫어서다.

지난 번 강진촬영 때도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더니,

페북을 본 마동욱씨가 어떻게 지척까지 와서, 그냥 갈 수 있냐며 나무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영신씨가 연락한 것 같았다.


 

마음 마씨라 본래 마음이 좋은지 모르지만, 마동욱씨는 사람 좋기로 유명하다.

그에게 신세지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주변을 잘 챙긴다.

벌어 놓은 돈도 없으면서, 욕심 없이 사는 그의 모습에 존경감이 일었다.

덕분에 그가 얻어놓은 대나무 숲 속의 민박집에서 편안한 하루를 보냈다.



아침 일찍 가야 한다며, 내일 못 본다고 헤어졌으나, 그만 늦잠이 들어 버렸다.

오전 아홉시 무렵, 민박집을 지나치던 마동욱씨가 차를 보고 다시 연락해 온 것이다.

본인은 이미 식사를 했었고, 우리는 평소에 아침을 먹지 않는다고 했으나,

기어이 밥 먹으러 가자는 성화에 따라나서야 했다.


 

친구가 운영하는 듯한 우리식당이란 밥집으로 데려갔는데

이곳 역시 진수성찬으로 차린 반찬이 모두 맛있었다.

전라도에서도 음식 잘하는 장흥 여인네들 음식솜씨를 제대로 맛 본 것이다.


 

마동욱씨와 헤어져 서울로 차를 몰았는데,

정영신씨는 이왕 온 김에 하루 더 지체하여 시골장터 좀 돌아보자고 했으나,

박은태씨 전시 보려면, 오후 다섯 시까지 도착해야 한다며 우겼다.

시간이 좀 남을 것 같아, 가는 길에 장흥 용산장과 강진 성전장만 들리기로 했다.


 

먼저 장흥에서 지척에 있는 용산장 부터 들렸다.

용산장 역시 사라져 가는 장터의 한숨이나 파는

장꾼 몇 사람이 나와 장을 지키고 있었다.

먼저 용산장 입구에 있는 장터식당부터 들렸다.


 

이 식당 주인 백외자씨는 정영신씨와 동갑내기인데,

작년에 정영신씨와 친구하기로 약속하고 전화번호까지 주고받은 사이다.

음식 맛있다는 칭찬에 갓김치를 바리바리 싸주는 고마움에 감읍해 친해졌는데,

마치, 친정 엄마처럼 뭘 먹이지 못해 안달 하더니, 또 몇 가지의 김치를 싸 주었다.

다양한 김치를 이렇게 맛깔나게 담는 사람도 보지 못했지만,

작년에는 장터 사진집으로 답했으나, 이번엔 뭣으로 답해야할지 고민되었다.


 

이어 강진 성전장으로 옮겼는데, 공교롭게도 찾아 간 곳이

오늘 서울 가서 봐야 할 전시의 주인공인 화가 박은태씨의 고향이었다.

그 전에는 비스듬히 버틴 장옥 한 채가 장터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 때의 장옥은 사라져버리고, 어울리지 않는 천막 식 장옥에

동네 사람 몇몇이 웅크리고 있었다.


 

그러나 주변의 헐벗은 옛집들이 아련한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오래된 장옥이라도 보존하고 있었다면, 향수나 추억이라도 팔 텐데,

이젠 살 사람도 팔 물건도 아무 것도 없었다.

어디, 여기만의 아쉬움이겠는가? 면소재지에 위치한 대개 오일장의 현실이다.


 

이제 서울로 올라가는 일만 남았다.

지루한 운전이라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사실상, 얼마 전 강진 갈 때도 정영신씨가 목적을 말하지 않았지만,

일주일의 여정으로 혼자 떠난 이번 촬영 역시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다.



더구나 촬영에 차질이 생겨 사흘 만에 돌아와야 했으니,

이젠 보따리를 풀어 놓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일이 진척되면 말하려 했다며, 말문을 열었다.


 

평생을 장돌뱅이로 살아 온 현역 장꾼 몇 명을 밀착 취재하여

그 사람의 생활 전모를 기록하겠다는 것이다.

지난 번 영랑시인 기념관에 도슨트로 일하는 이재광씨를 만난 것도

취재 대상에 걸 맞는 장꾼을 추천 받기 위해서란다.


 

그런데, 추천한 여인이 흔쾌히 허락하여 촬영에 들어갔는데,

하루 찍고, 이틀 날 새벽에 못하겠다는 전화가 왔다고 한다.

깊이 파헤치면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모르지만,

동네 이장이 큰일 난다며 못하게 말렸다는 것이다.


 

닷 세 동안 그 여인이 사는 콘테이너 박스에서 기거 할 약속에,

그 여인도 좋아했다는데, 갑자기 이변이 생겨버린 것이다.

그래서 마음을 바꿀 때까지 일단 철수해야 할 것 같았다고 했다.

다른 사람도 있으나, 그 장꾼에게 이야기 거리가 너무 많아

꼭 취재하고 말 것이라는 각오도 덧 붙였다.


    

나 몰래 추진하니 이런 일이 생긴다며 어깃장을 놓았지만,

마음은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첫날엔 이재광씨도 만났다고 한다.

그 분의 차로 장흥 펜션으로 안내하여 숲 해설가 김동호씨도 소개해 주었고,

해남의 설화다원까지 찾아가 마승미씨를 비롯한 소리꾼들과 어울려

판소리까지 들으며 찡하게 놀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재광씨는 지난번에도 이곳 저 곳 안내해 주며 사람도 소개해 주었는데,

이번에도 신세를 많이 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



         

장흥은 음식도 맛있지만, 인심까지 좋으니,

사돈 볼 사람은 기어이 장흥사람 찾으라고, 동네방네 소문내야겠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 조문호


















 






지난12일 아침, 컴퓨터에 달라붙어 이 것 저것 검색하는데, 마동욱씨로 부터 전화가 왔다.

지하철 서울역에 도착했다기에, 11번 출구로 나오라 했다.

아마 시위에 참여하러 온 김에, 들린 것 같았다.

사진가 마동욱씨는 엄청 바쁘게 사는 분인데, 그가 방에 앉으니 쪽방이 가득했다.
반가운 만남이지만, 대접할 건 커피밖에 없었다.

그동안의 이야기를 나누던 중, 지난 번 전시로 2천 만원이나 빚졌다고 했다.
열심히 벌면 된다지만,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라 걱정스러웠다.

어제는 '교육방송'에서 고향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프로를 방송했다는데,

몇 일 동안 고생시킨 출연료가, 달랑 20만원이란다.


마동욱씨는 참  낙천적인 삶을 산다. 살기가 힘들어도 어렵다는 얘기를 하지 않는다.
잘 될 거라며 자기 걱정은 않고, 남 걱정부터 하는 것이다.









밥 먹긴 이른 시간이라, 동자동 공원으로 나갔다.
마침, 토요일이라 빵 얻으러 온 사람들이 줄지어 있었다.

토요일마다 공원에서 빵을 나누어 주지만, 여기선 사진 찍기가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동자동 사람들보다 외지에 사는 사람이 더 많기 때문이다.


동네 사람들은 일찍이 자기 짐을 바닥에 놓아 대기 순서를 만들어 놓았더라.

강완우, 김진석씨는 빵 받을 생각은 않고, 공원에다 술상을 차려 놓았고...





밥 한 끼 사겠다는 마동욱씨 따라 나섰으나, 마땅한 식당이 없었다.
단골 집보다 나은 곳을 찾느라 서울역까지 따라 갔는데, 정식 일인분에 13,000원이나 했다.
‘식도락’에선 열 세 번 먹을 수 있는 돈이고, 쪽방 1층 식당에선 세 끼를 먹어도 남는 돈이었다.

덕분에 거룩한 식사는 하였으나, 맘이 편치 않았다.







블랙리스트 예술인 캠핑촌이 있는 광화문 광장으로 함께 나갔다.
캠핑 촌에서 반가운 분들을 여럿 만날 수 있었는데, 모두들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땅값 비싼 서울 요지에 숙소를 만들어 놓은 이인철, 류연복, 양혜경, 이상영, 노순택씨는 피켓을 만들거나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고, 최석태, 김영중, 송경동, 박미루씨의 모습도 보였다. 다들 한 판 치룰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기 저기 사진 찍느라 마동욱씨를 놓쳤는데, 난 동자동 주민들을 만나기로 한 남영역에 갈 시간이되어 통화만 했다.

이 날은 서울시내가 인산인해라 더 이상 만나지 못했는데, 페이스북에 고향 소식이 올라 온 것 보니, 잘 간 것 같다.








































장흥에 사는 마동욱씨를 알게 된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참 인정이 많은 후배다.
지난 번 정영신씨 사진전 개막식에서 찍은 사진으로 책을 만들어 보내왔다.

제작비용도 만만찮겠지만, 그 공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 보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늘 마음의 짐이 되고있다.



사진, 글 / 조문호


마동욱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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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의 사진가 마동욱씨의 인사동 출입이 요즘 잦다.

닥아 오는 615일부터 열릴 인사동 토포하우스의 개인전 준비와 사진집 제작 때문이란다.

 

눈빛출판사에 들릴 일이 있다던 지난8, 오후6시쯤 인사동서 만나기로 했으나,

갑작스런 일거리가 생겨 두 시간이나 늦춘 것이다.

그동안 하지권, 최광호씨 사진전에도 들리고, 인사동거리를 지나는 연등행렬도 찍었다지만,

미안한 마음은 감출 수가 없었다.

 

무슨 일로 두 시간이나 기다릴까 궁금했었는데, 느닷없이 돈 봉투를 내민 것이다.

지난 번 김보섭씨 전시장에서도 촬영비 선금이라며 십 만원을 주었는데, 이번에는 이십만원이었다.

사진하는 이들의 어려운 형편을 빤히 아는 터라 받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말은 부탁한 일 값이라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은 그의 마음을 모를 리 없다.

 

년 초에 살기 힘들어 유료 포스팅 문화알림방을 한다는 글을 올릴 때부터 제일 먼저 신청하더니,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선금까지 줘가며 마음 써 주는, 그 따뜻한 인정에 한 마디로 감동 먹은 것이다.

자기도 선배처럼 어려운 시절이 있었지만, 적극적인 방법으로 이겨냈다며 자신감도 심어주었다.

아무튼 그 고마운 뜻에 보답하는 길은 이번 전시를 성공적으로 이끌도록 돕는 일 밖에 없었다.

 

야간열차 타려 서울역으로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처다 보며 혼자 생각했다.

아직은 괜찮은 세상이구나. 저런 분이 있으니, 세상에 희망을 가져도 되겠구나!”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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