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문영태화백 미망인 장재순씨가 운영하는 민예사랑’ [김포시 월곶면 문수산로434]

북한의 개풍군을 코앞에 둔 서해안 최북단에 자리 잡고 있다.

 

살림집에 들어앉은 '민예사랑'의 전시는 꽃 피는 오월 한 차례만 열린다.

그곳은 정원이 아름다운데다 고가구들이 적절히 배치된 공간의 아늑함이

보는 이로 하여금 행복감에 빠져들게 한다.

 

넓은 정원에는 돌확과 장대석, 동자석 등 몇백 년은 됨직한 갖가지 골동들이 나무들과 어울려 있고,

전시된 작품이나 생활용품 모두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주변과 조화를 이룬다.

 

그런 전시 분위기가 작품의 격조를 높이기도 하지만,

그 자리에 놓인 작품 역시 격조가 높아야 차지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지난 20 정동지 연락을 받아 달려갔는데, 

전시도 궁금했지만 오월의 민예사랑정원이 더 그리웠다.

전시장에 초청작가는 보이지 않고 몇몇 컬렉터만 돌아보며 탄성을 지르고 있었다.

 

초대된 일본 판화가 노다 테츠야는 도쿄예술대학 교수를 역임했고,

도예가 이시야마 토시키는 후나기 켄지에게 사사 받아 염유석탄가마를 축조하는 등

독보적인 작업을 펼쳐 온 작가다.

그리고 이영재는 카셀 미술대학 도예과 연구교수를 역임한 후

현재 독일에서 도자 공방을 운영하는 등 모두 일가를 이룬 명장들이다.

 

있는 듯 없는 듯한 부드러운 톤의 판화가 벽에 걸려 있었다.

품격있는 조선 가구가 배치된 적절한 공간을 마치 자기 자리 찾은 듯한 도자기가 얄밉도록 앙증맞았다.

숨결이 느껴지는 질감과 우아한 자태의 작품들은 마치 아름다운 삼중주를 듣는 듯 빠져들게 만든다.

 

노다 테츠야의 판화 작품은 너무 오래되어 곰팡이가 번진 듯한 부드러운 계조로 표현되었는데,

세월을 한 참 거슬러 간 오래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작가의 시대적 사유가 내포된 심상미가 예사롭지 않았다.

 

조선 도자의 전통 기법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도예가 이시야마 토시키의 작품은 개성이 뚜렷했다.

흙 색깔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기법을 여러 작품에 접목해 독창성을 부각시켰다.

다완의 은은한 빛깔이나 개성적인 형태가 낯설지만 친숙하게 느껴졌다.

 

나는 한국 문화가 참 좋다. 멀찌감치서 보기도 하고, 푹 파묻혀도 보는 그것이 마음을 향기롭게 한다

작가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전통 형식에서는 벗어났지만, 우리 고유의 멋을 풍기고 있었다.

 

한국적 선의 아름다움을 재현하는 도예가 이영재의 사발과 호리병은

우리 전통 도자의 멋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모양세는 단순하고 간결하지만 보면 볼수록 심미감을 더해주는 깊은 맛이 있었다.

 

판화가 노다 테츠야의 섬세한 터치와 일본 북해도의 자연을 닮은 이시야마 토시키 도자기,

그리고 한국적 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이영재의 도자기가 어울린

민예사랑초대전은 오는 27일까지 열린다 (전시문의 / 010-5357-5256 )

 

사진, 글 / 조문호

 

 

 

 




고)문영태 화백의 ‘心象石’전이 지난 17일부터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열리고 있다.






2019년 ‘나무아트’의 '80년대 미술 되돌아보기 프로젝트-4'에 초대된 이 전시는

김포 '민예사랑'에서 열린 문영태 유작전을 보지 못한 분들에게는 더 없이 좋은 기회다. 


 



문영태의 ‘심상석’에는 기층 민중의 질긴 생명력과 한의 정서가 듬뿍 배어있다.
돌에 마음의 상을 새겨 넣은 ‘심상석’시리즈는 80년 광주 민중의 상흔을 담은 역작이다.
상처받고 소외된 민중의 아픔을 형상화 한 작품을 통해 민중미술의 진중한 힘을 느껴보기 바란다.






문영태는 80년대 민중미술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한 지사이며 작가로서 미술, 문학, 사진, 기획 등

문화 전역을 넘나드는 팔방미인이었다. 민주화와 통일을 향한 작가의 의지와 순발력 그리고 친화력이

80년대 우리나라 미술운동의 중심 역할을 하게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문영태씨 이름 앞에는 지사, 선비, 작가 등 따라 붙는 수식어가 많지만,

그를 가장 우러러 보이게 하는 것은 자기를 숨기고 낮추는 겸손이었다.

그런 훌륭한 작가를 우리는 너무 일찍 잃었다.






지난 17일은 인사동에서 반가운 사람 만나는 셋째 수요일이기도 하지만, 이 전시는 빠트릴 수 없었다.

다시는 전시장에 드나들며 사진 찍어 올리지 않겠다는 글을 올린지가 잉크도 채 마르지 않았지만,

평소 너무 좋아하는 작가인데다, 미망인으로부터 많은 신세를 져 어쩔 수 없었다.






지난 김포 전시에서 작품을 보았으나 전시기획자의 작품 배치에 따라 느낌이 다르기도 하지만,

다시 한 번 보고 싶어 은근히 기다린 전시이기도 하다.





전시장에는 문영태 화백의 미망인 장재순여사와 딸 문지민씨, 그리고 딸의 품에는 외손자까지 안겨 있었다.

화가 김재홍씨와 성기준씨를 만났고, 김진하관장은 관람객에게 작품을 설명하는 조용한 분위기였다.

뒤늦게는 화가 송 창, 나종희, 미술평론가 곽대원씨도 나타났다.






전시된 작품들을 돌아보니 마치 문영태 화백의 유령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부드러우면서도 강단 있는 그의 미소가 작품마다 넘나드는 것 같았다.

상처 난 두상의 작품에서는 작가의 강한 저항이 느껴졌다.





화강암 같은 형상들의 질감을 위해 표면이 거친 속칭 '코끼리 똥지'를 사용했단다.
습기에 약한 누리끼리한 똥지에 그려진 그림들은 자연스럽게 얼룩덜룩한 무늬를 남겨
세월 풍화에 의한 고색창연한 분위기를 더해 주었다.





이 전시는 5월7일까지 열리니 놓치지 마시기 바란다.

사진, 글 / 조문호






미술평론가 김진하씨가 쓴 문영태 화백에 관한 글이니 참고하기 바란다.
http://blog.daum.net/mun6144/5148





















문영태 3주기를 맞아 열린 유작전이 지난 2일 성황리에 막을 내리며,

유작전을 추진한 추모위 쫑파티가 열렸다.

지난 12일 오후6시 인사동 ‘자희향’에서 열린 추모위 만찬에는
문영태화백 미망인 장재순씨를 비롯하여 이인철, 김진하, 장경호,
박 건, 양정애씨 등 일곱 명이 모여 뒷이야기를 나누었다.
박불똥씨와 홍선웅씨는 사정에 의해 못 나왔다.






이번에 열린 추모전 외에도 두 권의 추모집 “심상석-문영태”와
“누가 몰가부를 내놓겠는가”가 출판되었는데,
그동안 묻혀 있던 문영태 작업과 업적을 되돌아 볼 수 있게 되었다.




 


추모집을 제작한 김진하씨는 처음엔 자료가 부족하여 난감했으나,
뒤늦게 ‘시대정신’에 대한 좌담회 자료와 ‘분단풍경’을 기록한
슬라이드 필름을 찾게 되어 진척을 보이게 되었다고 한다.

이번에 출판된 문영태 추모집 출판은 한국미술사의 소중한 자료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찾아 낸 자료를 바탕으로 문영태의 작품세계는 물론 민중미술에 끼친
영향력을 일목요연하게 편집한 김진하씨의 저력도 돋보였다.





문영태 화백의 ‘심상석’ 연작은 종이에 연필로 그린 작품으로,
마음의 형상이 새겨진 돌이나, 돌에 새겨진 마음이다.
민중들의 질긴 생명력과 한(恨)의 정서가 베인 문영태 최고의 역작이다.
문영태의 작업이 그 이후로 중단된 것도 
더 이상 좋은 작품을 그릴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이 날 추모회 만찬에서 나온 이야기로는 김포 ‘민예사랑’ 전시에 이어
서울전시도 한 번 가질 것이라고 했다.
볼 사람이야 보았겠지만, 전시장이 너무 멀어 일반인들의 접근에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시일정이나 구체적인 내용은 결정되지 않았지만,
김진하씨의 새로운 기획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인사동에 있는 ‘자희향’은 처음 가 본 집이지만, 음식이 맛있었다.
함평에서 나오는 '자희향 탁주'를 내놓는데, 도수는 일반 막걸리보다 높으나
약간 단맛이 있어 입에 착 달라붙었다.
난 소주파라 맛만 보았지만, 괜찮은 술이었다.
그리고 게장이나 가자미찜, 돼지수육 등 모든 음식들이 정갈하고 맛있었다.





벽에걸린 조선중기 여류시인 이매창의 '증취객'이란 시도 눈에 들어왔다


"술 취한 손님이 옷자락을 잡아당겨
비단저고리 찢어 놓았지
비단저고리야 아까울 것 없지만
님이 주신 정마저 찢어질까 두려워요"



 
다들 거나하게 취했으나, 헤어지기 아쉬운 것 같았다.
이인철씨가 발동이 걸렸는지 노래방에 가자고 충동질했다.
다들 가까히 있는 ‘국악’이란 노래방으로 옮겼지만, 혼자 도망쳐야 했다.
이제 술이 취하면 숨이 가빠, 2차는 꿈도 못 꾼다.
봄날은 이미 가버렸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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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형태형을 처음 만난 건, 80년대 후반 인사동의 부산식당에서다.

인사동 '그림마당 민'의 관장으로 있을 때, 화가 박광호씨의 소개로 알게 되었으나, 그리 가깝게 지내지는 않았다.

데면데면, 마음의 후원자로 술친구로 한 30년 같이 지낸 것이다.

 

친밀감을 가진 이유 중 하나는 인사동을 처갓집처럼 오가던 화가 이청운, 최울가, 이존수, 박광호씨와 더불어

부산서 올라 온 떨거지라는 공감대였다.

서로 의기투합해 만나지는 않았지만, 인사동 술집을 들락거리다 수시로 만났다.

작업에 대한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눈 적은 분단풍경이란 사진 작업을 시작하며 딱 한 번 있었다.

기획안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에 존경감이 일었는데, 사진에 대한 생각들이 남보다 앞서고 있었다.

한 개인을 24시간 기록하고 싶다고도 했다.


나이는 나보다 세 살 아래지만, 늘 부드러우면서도 강단 있는 미소가 매력적인 친구다.

선비 같이 어질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꺾지 않는 성품을 가졌는데, 사진판의 김문호씨와 비견할 수 있는 그런 분이었다.


1980년대에는 민중, 민족미술운동 기획자로 '통일전', '여성과 현실전', '탄압사례전', '반고문전', '정치와 미술전' 등을

기획해 미술운동을 사회운동으로 확장시키는데도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 이후 90년도에는 이지누, 박불똥, 류연복, 박 건, 조경숙씨 등 열일곱 명이 모여 경의선모임이라는

작업공동체를 만들어 '분단풍경'이라는 사진집을 펴내기도 했다.

한 때는 진보잡지에 우리 문화에 대한 독보적인 비평을 쓰기도 했는데, 글이 너무 좋았다.

 

팔방미인처럼 다 방면에 존재감을 드러냈으나, 그림은 한 점도 보여주지 않았으니, 그가 화가라는 사실조차 잊고 산 것이다.

그의 작품으로 기억나는 건, '시대정신' 표지사진에 실렸던 심상석心像石이란 제목의 세밀하게 그린 연필화가 유일했다.

두상에 상처 난 형상의 돌을 그린 건데, 강력한 저항이 느껴지는 아주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세월이 흘러 나는 강원도 정선으로 흘러들었고, 그는 서해안 최북단인 김포에 자리 잡았으니,

쉽게 만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는데, 가끔 지인들 전시뒤풀이에서 만나는 것이 전부였다.

그는 김포에서 민예사랑이란 공간을 운영하며 지역문화에도 헌신적인 활동을 했다.

매사에 사심이 없었고, 스스로의 이름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항상 미소 지며 조용한 스타일이지만 한 고집하는 사람이다.

언변이 자분자분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말의 핵심은 강건하고 논리적이다.

 

뒤늦게 그의 대표 작업인 심상석이 궁금하고 보고 싶어졌다. 특히 주변 친구들의 작품 칭찬에 몸이 달기까지 했다.

 

그러던 중, 20155월경 그로부터 뜻밖의 전화가 걸려왔다.

자기가 살고 있는 김포 민예사랑에서 열리는 전시회에 오라는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연락이기도 하지만, 전시를 하루 남기고 있어 난감하기도 했다.

덕분에 아내 장재순여사와 함께 사는 민예사랑을 구경할 수 있었는데, 북한을 눈앞에 둔 기막힌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위치도 위치지만, 고관대작의 저택인지 미술관인지 분간이 안 되었다.

 

그런데, 전시장에 '걸린 그림이 문형의 신작이냐?'고 물었더니, 최선호씨 작품이라는 것이다.

문영태 전시로 알고 일정까지 바꾸어가며 달려왔는데, 허 탕 친 것이다.

화가 최선호씨와 도예가 변승훈씨의 2인전을, 문영태 전시로 착각한 것이다.

 

함께 동행한 정영신씨에게 문형 작품이 좋은데, 보여주질 않는다며 불만을 털어 놓았더니

작품도 보지 않았으면서 무슨 말이야. 전시 한 번 해볼까.”라는 묘한 여운을 남기기도 했다.

그 날 문영태씨 작품을 보지 못한 아쉬움은 있었지만, 여럿 어울려 음악회를 즐기는 등 모처럼의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두 달 후 청천벽력 같은 비보가 날아들었다. 갑자기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 날 찍은 기념사진이 영정사진이 되고, 그 때의 만남이 마지막이라니, 이게 사람 사는 건가?“ 인생의 허무함이 밀려왔다.

그의 초청 전화도 우연이아니라 미리 계산된 듯한 의심마저 들었다.

언젠가는 가야 할 길을 앞설 뿐이지만, 기어이 그는 작품을 보여주지 않고 떠나버린 것이다.

그토록 널 내세우기 싫었던가? 이 고집불통 같은 친구야!”

 

그런데, 뜻밖에도 그의 전 작품은 물론 생각의 면면까지 엿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그의 3주기를 기념하는 대규모 유작전과 도록제작을 위한, 작품촬영을 부탁받은 것이다.

심상석에서부터 청년 시절의 스케치까지 다 볼 수 있었다.

작업노트는 물론 일기장까지 샅샅이 훔쳐 볼 수 있었는데,

얼마나 꼼꼼한 성격이었는지 어린 시절의 일기장에서부터 그림대회 상장까지 차곡차곡 모아두었다.

 

일기장에는 유난히 새에 대한 글이 많았다. 서재에서 보이는 북녘을 바라보며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가고 싶었을까?

때로는 깊은 생각에 미처 잠들지 못했는지, 이런 글도 적혀있었다.

이 깊은 밤에 개는 왜 끊임없이 짖고 있는가? 무슨 일로 짖는가?”

 

일구구오년 유월 초하루라는 제목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인철과 유은종이 들리다.

같이 마을을 돌며 구경하다

인철이 녹슨 칼 하나를 주워 나에게 주다.

칼을 받다,

이 칼은 무엇인가.

이 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칼이다.

 

우연히 마주친 사물에 대한 작가의 예리한 문제의식과 통찰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글은 상흔을 형상화 하는 작가로서의 사물에 대한 관심과 반가움이 서려 있다.

 

무엇보다 마음을 사로잡은 작품은 80년 광주의 상흔을 상징화시킨 심상석시리즈였다.

작업노트에 그려진 형상성의 스케치나 메모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작업했는지 고스란히 들어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꼼꼼한 친구로서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일이 하나 있었다. 작품보관이 엉망인 것이다.

쌓인 먼지는 차지하고라도 작품 곳곳에 곰팡이 자욱이 무성했다.

난 직감적으로 의도적인 방치라 생각되었다.

심상석의 세월의 풍화를 보여주고 싶었거나, 아니면 작품을 돈으로 여기는 현실을 비웃었는지도 모른다.

 

역시 민중문화운동가다웠다.

그만의 뚝심과 순발력, 그리고 친화력이 80년대 우리나라 미술운동의 중심 역할을 하게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내가 모르는 부분을 알기 위해 미망인 장재순여사에게 이 것 저 것 물어보았다.

문영태씨와 맺어진 연은 녹번동 화실에 그림 배우러 다닌 것이 인연이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인사동에서 그림마당 민에서 일하며 호구지책으로 차린 게 민예사랑의 시작이었는데, 문영태씨의

우리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과 연구는 곧 바로 아내에게 직결되어 민예사랑이 인사동의 명가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업가적 역량으로 가게를 일으켜 세운 아내에게 고마움도 컸겠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불편한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돈이란 것이 사람을 병들게 하는 요물이란 것을 잘 아는 그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지 아내가 가게에 나간 후에는 혼자 술 마시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가끔 있었던 두 내외간의 언쟁도 모두 술 때문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우리민중문화에 대한 사랑과 고민을 온 몸으로 감싸 안았던, 그가 그립고 보고 싶어진다.

물질만능주의와 개인주의로 치닫는 오늘의 현실이 고집스러운 민중문화운동가 문영태를 더 그립게 하는 것이다.

 

저승에 따라 가면 문화백을 만나 꼭 물어보고 싶은 것도 하나 있다.

창작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우리문화에 대한 비평을 왜 중단했냐고? 왜 절필했냐고..”

 

/ 조문호


#'나무아트'에서 출간한 "心象石 문영태"에 게재한 글입니다.

 

 

 

 

 

 

 

 

 

 

 



장재순 (민예사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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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북단마을 김포시 월곶면 ‘민예사랑’에서 다음달 2일까지 열려...

[서울문화투데이]2018년 05월 22일 (화) 13:34:56 정영신 기자 press@sctoday.co.kr

 

‘문영태추모위원회’에서 기획한 문영태 유작전이 지난 19일 오후4시, 북한을 눈앞에 둔 최북단마을 김포 월곶면에 자리한 갤러리 ‘민예사랑’에서 개막되었다. 이 유작전은 인사동에서 ‘민예사랑’을 운영하는 미망인 장재순씨가 미술관을 새롭게 개관하며 마련하였다.

민중문화운동가이기도 했던 문영태화백의 유작전에는 80년대 작업한 연필화 ‘심상석’(心象石) 연작에서 부터 사진작업 ‘분단 풍경’까지 고인의 대표작을 한자리에 모아 보여준다.



▲ 심상석-상황, 종이에 연필, 53X53cmX4


3주기에 맞춰 마련한 문영태 유작전 개막식에는 많은 선후배 화가와 학교동문, 문화예술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가 박진하씨의 사회로 진행했다. 축사에 나선 민중미술가 신학철선생은 “선비 같은 모습으로 세상을 바라본 문영태의 작품하나하나에 그의 인격이 들어 있다.

다른 사람은 그의 그림을 어떻게 볼지 모르지만 내 눈에는 분단의 문제로 보인다. 그의 ‘심상석’(心象石) 연작은 어떤 표현도 가능하기에 아직까지 유효하다고 본다. 모더니스트임에도 불구하고 통일과 민주화에 열정을 쏟은 그의 모습이 보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 자화상,종이에 연필, 31X49cm, 2002


이재권 동문은 ”대학 다닐 때의 문영태는 함석헌선생의 장자관을 손에서 놓지 않을 정도로 심취해있었다. 그의 그림 속에도 도를 보는 관점, 칼라를 보는 관점이 장자처럼 ‘천하를 너그럽게 놓아두기’에 있다고도 했다.


린다노클린은 "예술의 목표는 그 시대의 모습을 분석하고 묘사하는 것이며, 예술은 구체적인 모습을 갖는 그 시대의 세계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이상이나 상징보다는 사회적 제 조건과 보다 간접적이고 실질적인 관계가 있다"고 밝힌바 있다.


▲ 장재순'민예사랑'대표 Ⓒ정영신


민중문화운동가였던 문영태는 홍익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한 뒤 1980년대 ‘서울미술공동체’를 시작으로 ‘시대정신’, ‘삶의 미술전’, ‘해방40년 역사전’을 추진하였고, 민족미술협회를 창립하고 ‘그림마당 민’을 운영하면서 출판과 전시기획, 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활동을 펼치며 동시대의 삶을 성찰해왔다.


▲ 천지인 115X77X20cm 상석에 조각 1995


화가 박건씨는 1980년 문영태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의기투합해 <시대정신>창간호를 발간하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미술운동가들이 함께 만든 최초의 민중문화운동 담론지로서 나중에 ‘민미협’과 ‘민예총’으로 가는 다리역할을 했다고도 한다. 또한 문영태는 “공공성과 민중문화에 대한 존중감이 높은 선배였다”고 기억했다.



▲ 나무화랑 대표이자 평론가 김진하씨 Ⓒ정영신


‘나무화랑’을 운영하는 미술평론가 김진하씨는 "‘문영태의 심상석 연작은 1977녀부터 1983년까지 종이에 연필로 그린 작품으로 ‘심상석’은 마음의 형상이 새겨진 돌, 혹은 돌에 새겨진 마음이다. 어떤 것이든 무형의 마음이 구체적사물인 돌로 치환하는 마음과 돌이 인과 혹은 등가의 의미를 띄는 단어이다.


▲ 심상석-결합, 종이판화, 44


타제 마제석기를 연상시키는 ‘심상석’작품은 대체적으로 무겁고 심각하다며, 마음이나 정서에 상처 입은 사람들의 한, 혹은 물리적인 폭력에 의해 몸과 두개골 등에 상흔이 새겨진 사람들, 일상적인 삶의 무게와 민중적 생명력에 관한 작가의 시선이 복합적으로 얽혀져 있다.

단단한 돌에 풍화작용처럼 마음의 흔적이 심상(心象)으로 새겨진다는 것은 뭇 생명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생존에의 의지가 긴 세월 인고의 세월을 부침하며 견딘 결과라며, 문영태의 심상석에서 기층 민중들의 질긴 생명력과 한(恨)의 정서가 동시에 묻어난다고 작가론에 적었다.



▲ 심상석 78-3, 종이에 연필, 168X122cm, 1978


특히 문영태는 1990년 경의선모임이란 공동작업체를 만들어 사진 작업도 했다. 문영태가 주축이 되어 사진가 이지누, 화가 박불똥, 유연복, 최민화, 김기호, 김태희, 남궁산, 백창흠, 박 건, 송진헌, 유은종, 이정희, 조경숙, 공예가 김원갑, 이송열, 미술평론가 라원식씨 등 열일곱명이 참여하였는데, 그 결과물로 ‘눈빛출판사’에서 ‘분단풍경’사진집을 펴냈다.

▲ 국도 7번 도로변- '분단풍경'사진집에서


‘분단풍경’ 사진작업 이후로는 김포 월곶리 자택에 칩거하며 평소 관심가진 전통적인 민중성과 민속적인 글쓰기를 통해 기층 민중들의 생활사에 기반 한 민속민예문화를 연구하면서 상처받은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을 위무할 수 있는 문화를 꿈꾸었고, 그런 민초들의 생명력에서 서로를 보듬는 미술의 민중성을 지향해 왔다.


▲ 시대정신 창간호,1983-1987


새롭게 자리잡은 ‘민예사랑’개관과 문영태 3주기 유작전을 축하하는 자리에는 ‘민예총’이사장 박불똥씨, 화가 신학철, 장경호, 이인철씨, 사진가 조문호, 판화가 홍선웅, 미술평론가 김진하, 동영상을 제작한 양정애씨등 ‘문영태추모위원회’를 비롯한 친지와 많은 지인들이 찾아 와 고인을 추모하며 유작전을 관람했다.



▲ 김포 월곶리 '민예사랑' 전시된 작품 Ⓒ정영신


이날 추모전시에서는 ‘나무아트’대표 김진하씨가 만든 자료집 <심상석·문영태>와 문집 <누가 몰가부를 내놓겠는가―한국의 문화, 한국인의 성>(몰가부-자루 빠진 도끼)라는 책이 출간되기도 했다.

책에는 1990년대 ‘분단풍경 : 열일곱 사람의 경의선 사진작업’ 그룹을 결성하고 분단된 국토의 현장을 직접 답사하며 찍어둔 필름들, 시인 김정환과 공동으로 펴낸 <이 시대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두 사람>, 1996~98 월간 <사회평론 길>에 연재한 ‘문영태의 한국의 문화, 한국인의 성(性)’, 2001년 사진가 이지누와 공동으로 발간한 계간 <디새집>에 연재한 ‘궁시렁 궁시렁 문영태의 집 이야기’ 등 문영태선생의 후반기 글쓰기 작업까지 한데 모아서 엮었다.



▲ 좌)'심상석-문영태'도록표지, 우)'누가 몰가부를 내놓겠는가' 책표지


문영태선생의 유작전은 김포시 월곶면 보구곶리 ‘민예사랑’에서 다음달 2일까지 이어진다.

전시문의 (010-5357-5256 민예사랑)




 


작고 1주일 전인 2015년 7월초 김포 자택 문수산방에서 자신의 대표작인 ‘심상석’과 함께 선 문영태 작가의 마지막 사진이다.

‘시대정신’ ‘경의선모임’ 동인 박건 작가가 찍었다.


 
민중미술운동가 문영태(사진) 작가의 3주기를 맞아 첫 유작전이 19~6월2일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고인의 자택 문수산방에서 새로 문을 연 ‘갤러리 민예사랑’(대표 장재순)에서 열린다

문영태는 홍대 미대에서 회화를 전공한 뒤 1970~90년대 화가·전시기획·출판기획·현장문화운동·저술가로 다양하고 폭넓은 활동을 펼쳤다. 1980년대 초반 ‘서울미술공동체’를 시작으로 시대정신, 삶의 미술전, 해방40년 역사전, 민족미술협회 창립, 그림마당 민 운영, 출판기획과 전시기획, 민주화운동까지 민중미술 현장을 지켰던 그는 90년대 김포 문수산방에 정착한 이후에도 민속학적 문화론에 바탕을 둔 저술 활동, 91년 ‘경의선' 모임을 통한 분단 현장과 비무장지대(DMZ) 탐사 사진을 통한 ‘다큐' 혹은 '르포르타주' 작업을 이어갔다.

문영태추모위원회(신학철·조문호·홍선웅·장경호·인철·박불똥·박건·김진하·양정애)에서 기획한 이번 유작전에서는 연필화 ‘심상석’(心象石) 연작부터 사진작업 ‘분단 풍경’까지 고인의 대표작들을 소개한다. 1970년대 후반 타제·마제석기를 연상시키는 돌의 형태로 샤먼이나 토템적 민중신앙을 표현했던 심상석이 ‘80년 광주’를 겪으며 물리적인 폭력에 의한 상처와 정신적 상흔을 떠올리게 하는 몸과 두개골의 형상으로 변해가고, 이후 전두환 정권의 탄압에 맞선 현장 미술운동의 최전선에 서게 되면서 작업이 중단된 과정을 통해 작가의 예술정신의 흐름과 삶의 열정을 보여준다.



문영태 첫 추모전과 추모집 출간기념회 포스터
 


19일 오후 4시 개막식과 함께 화집 겸 활동 자료집 <심상석·문영태>와 문집 <누가 몰가부를 내놓겠는가―한국의 문화, 한국인의 성>(몰가부-자루 빠진 도끼) 출간 기념회도 열린다. 자료집과 문집에는 1990년대 ‘분단풍경 : 열일곱 사람의 경의선 사진작업’ 그룹을 결성하고 분단된 국토의 현장을 직접 답사하며 찍어둔 필름들, 시인 김정환과 공동으로 펴낸 글사진집 <이 시대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두 사람>, 1996~98 월간 <사회평론 길>에 연재한 ‘문영태의 한국의 문화, 한국인의 성(性)’, 2001년 사진가 이지누와 공동으로 발간한 계간 <디새집>에 연재한 ‘궁시렁궁시렁 문영태의 집 이야기’ 등 문영태의 후반기 글쓰기 작업을 한데 모아 엮었다. (010)5357-5256.


[스크랩] 한겨레신문 /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고인이 된 문영태 화백의 장녀 지민이가 시집갔다.
지난 3일 오후6시, 장재순여사의 장녀 문지민양과
기노준, 이연화씨의 장남 기선호군의 결혼식이 충무로 ‘한국의 집’ 마당에서 열렸다.

좀 늦어 식전공연은 보지 못했지만, 전통혼례의 멋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볼 수 있었다.
기럭아비로부터 기러기를 전달 받은 신랑이 신부 방 앞에다 두고 큰절을 하니 장재순여사가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 때서야 팔을 올려 얼굴을 가린 신부가 조심스럽게 걸어 나왔는데, 수모가 부축은 하지만 행여 넘어질까 불안했다.

요즘이야 결혼 전에 만나는 것은 물론 잠자리까지 하는 커플들도 많겠지만,

백년해로할 상대를 두고 벌어지는 팽팽한 긴장감이 꽤 괜찮은 것 같았다.






정갈한 혼례를 위해 신랑 신부가 손을 씻은 후, 상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마주보고 앉았는데,

상 밑으로 마주보는 두 사람의 은근한 눈길이 사랑으로 가득했다. 건네주는 술잔에도 정념이 넘쳤다.

마치 속으로 “넌 오늘 죽었어”하는 것 같았다.

‘한국의 집’ 전통혼례는 옛 격식 그대로 진행되는데다, 고풍스러운 한옥 마당에서 치러 져

일반예식장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맛볼 수 있다.

이날도 많은 하객들이 참석했지만, 오랜만에 우리문화의 정수를 느끼는 좋은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아는 분으로는 장재순여사 가족을 비롯하여 화가 이인철 내외와 홍선웅, 정영신씨 등 몇 명밖에 보이지 않았다.






결혼은 예식장에서 치루는 것 보다, 우리의 멋을 제대로 느끼는 전통혼례가 바람직하다.

특히 외국인 신랑신부를 맞는 혼주들이 선호하는 현상이지만,

한국인으로 태어나 우리 전통혼례를 한 번 치러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나 역시 전통혼례를 치루지 않았으나, 세월이 지나고 나니 후회스러운 생각도 들었다.

하나의 형식에 불과하겠지만, 우리선조들의 결혼관과 정신을 이어받았다면,

요즘처럼 이혼을 밥 먹듯 하지는 않을 것이란 나름의 판단 때문이다.

그런데, 예전에는 이웃이 가까워 신랑신부를 잘 알아 소개할 필요가 없었겠지만,

요즘은 다들 바쁘게 사니 새로 맞이하는 신랑이나 신부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혼례가 끝난 후 하객들에게 인사드리며 서로를 소개하는 시간도 만들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남았다.



 


지민이 결혼으로 온 가족은 물론 친지들이 다 모인 자리에 문영태화백이 살았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고 코 끝이 찡했다.

그나저나 아들 지함에 이어 딸 지민이 까지 시집보내는 장재순 여사의 외로움은 또 어찌할고?

예전의 대가족제처럼 한 집에서 사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민아 서로 의지하며 잘 살아라.
네 아버지가 저승에서 지켜보며, 싱글벙글 좋아하실 것이다.
부디 백년해로하길 바란다.



사진, 글 / 조문호




















































































아래는 ‘한국의 집’ 전통혼례에 소요되는 비용이다.
필요하신 분들은 참고 하시길...

전통혼레 비용은 기본비용이 1.200,000원이고, 선택사항으로 미용과 사진촬영 등 부대비용을 백 만원 이상 잡아야 한다. 그리고 신랑신부 혼례복 대여비가 50만원, 수모 인건비가 20만원, 폐백비용도 50만 원정도 소요된다. 식전공연으로는 부채춤이 50만원, 사물놀이는 40만원, 판소리는 10만원으로 선택사항이다. 피로연 비용은 일인당 4만원부터 6만원까지 세 종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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