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정신 전태일 만나다' 전시가 열린 지난 9월30일은 곳 곳의 인사동 술집에서 반가운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뒤풀이가 있었던 '부산식당'에서 부터 '여자만', '유목민'에 이르기까지 예술가들이 술에 젖은 현장을 찾아 보았다.


'부산식당'에선 근 30년만에 황재형씨를 만났다.

옛날 태백 전시 때 만난 후, 정선 갈 때마다 한 번 가야지 가야지 하며 못 갔는데, 뜻밖에도 인사동에서 만난 것이다.

그리고 인사동 술집에서 끝까지 사수하신 분은  오척단구의 거한 채현국 선생님이셨다. 

기분이 좋아 십팔 번인 러시아민요 '볼가강의 뱃노래'까지 열창하시고, 자정이 지나도록 남아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택시비를 나누어주셨다. 

 

그외 만난 분으로는 강 민, 김승환, 이행자, 이수호, 이은영, 배평모, 강찬모, 박영현, 김정대, 김명성, 임진택, 정지영,

조성우, 조준영, 전활철, 이희종, 이상훈, 손연칠, 공윤희씨 등이다.


사진, 글 / 조문호


















































 

한 때 인사동 낭인들의 활빈당주였던 철학자,

채현국선생의 팔순 잔치가 지난 5월4일 '낭만'에서 열렸다.

 

채현국선생은 작년 초 '한겨레신문'의 인터뷰로 뜬 분이다.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어라. 모든 건 이기면 썪는다.
아비들도 처음부터 썪진 않았지. 노인 세대를 절대 봐 주지마라."

 

"예외는 없다. 돈이나 권력은 마술 같아서,

아무리 작은 거라도 자기가 휘두르기 시작하면 썪는다."

 

"재산은 세상 것이다. 이 세상 것을 내가 잠시 맡아서 한 것뿐이다.

그건 세상에 나눠야 해. 자식한테 물려줄 게 아니다."

 

"세상에 '정답'이란 없다. 한 가지 문제에는 무수한 해답이 있을 뿐,

평생 그 해답을 찾기도 힘든데, 나만 옳고 나머지는 다 틀린 '정답'이라니..."

이와 같이 선생께서 남긴 수많은 어록들은 지금도 인터넷에 회자되어

7만 여명이 페이스북과 트위트로 공유하며 선생의 어록을 인용했다.
그 때문에 전국 곳곳에 강연 다니고, 수많은 사람 만나느라 바쁘시단다.

 

2014년 환경재단의 '세상을 밝게 만든 사람들'에 선정된 것을 비롯해
여러 매체에서 '올 해의 인물'로 뽑혀 유명세를 더해가신다.
아쉬운 건 채현국선생을 인사동에서 자주 뵐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  존경스러운 오척단구의 거한 채현국선생께서 팔순을 맞아 

모처럼 인사동에 흥겨운 잔치판을 벌였다.

 

정오에는 강 민, 심우성, 이계익, 김승환, 우병철, 서립규, 김자동, 김이준, 이부영씨 등
많은 친구분들이 모여 축하오찬회를 가졌다고 한다.

오후6시경 있었던 만찬모임에는 채현국, 윤병희 내외분을 비롯하여 원로언론인 임재경선생,

국회의원 윤영석, 이인영씨, 연출가 임진택씨, 최혁배 변호사, 이희종, 박현수 교수,

서양화가 박불똥, 장경호씨, 김명성시인, 장순향 민예총부이사장, 전 경기도문화재단

전종덕 사무총장, 영화평론가 정준성씨, 무용평론가 이만주씨, '작은책' 유이분 대표와

안건모 발행인, 조경연, 공윤희, 노광래, 강선화, 이세기, 박혜숙, 박연화, 이요상, 김일호,

김영복씨등 50여명이 자리하여 선생의 생신을 축하했다.

그 날 축하연에서 임진택씨의 소리 한 마당이 잔치 분위기를 잔득 돋구었고,

채선생께서 부른 러시아민요 '볼가강의 뱃노래'가 절정을 이루었다.


사진,글/ 조문호

 

 

 

 

 

 

 

 

 

 

 

 

 

 

 

 

 

 

 

 

 

 

 

 

 

 

 

 

 

 

 

 

 

 

 

 

 

 

 

 

 

 

 

 

 

 

 

 

 

 

 

 

 

 

 





 

1987년 13대 대선을 앞두고 ‘양김 동시 출마’로 야권이 분열되자 민중문화운동 진영은 후보 단일화를 압박하는 방안의 하나로 ‘민중 대통령 후보 백기완’을 추대하는 운동에 앞장섰고 고 김용태 선생은 백 후보의 비서실장으로 정치권과 인연을 맺었다. 사진은 87년 12월12일 서울 대학로에서 열린 민중 대통령 후보 사퇴 발표를 앞둔 연단에 설치된 백기완·장준하·김구 선생의 대형 걸개그림. 사진 류연복씨 제공


[길을 찾아서]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 ⑧

1987년은 폭압적인 군사정권의 집권 연장책인 대통령 간선제와 유신잔재 헌법에 맞서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전국민적 저항이 활화산처럼 분출된, 이른바 ‘6월항쟁’을 일구어낸 해였다. 위기를 느낀 전두환은 군사반란 동업자 노태우로 하여금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는 선언을 발표하게 함으로써 끓어오르던 국민의 독재타도 열망을 일단 무마하였으니 ‘6·29선언’이 그것이다. 승리에 도취한 일단의 사람들이 이를 두고 아예 ‘6·29 항복선언’이라 규정하기도 했는데, 바로 여기에 함정이 숨어 있었다. 생각해보라. 그들이 누구인가? 광주의 학생과 시민을 폭도로 몰아 학살하고 권력을 찬탈한 자들 아닌가? 그들 독재자들이 행한 통치방식은 ‘정치’라기보다는 줄곧 국민을 상대로 한 ‘군사작전’이거나 ‘정보공작’ 아니었던가? 대통령 직선제 전격 수용이 위기탈출용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항복이 아니라 항복을 가장한 기만적인 깜짝쇼였음을, 그만 간과하고 만 것이다.


그해 7·8·9월, 이른바 노동자대투쟁이 전개되면서 한국 사회 진보논쟁이 용광로처럼 들끓었으나, 12월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정국은 ‘대선 블랙홀’로 빠져들었다. 무엇보다 그동안 반독재 민주화 전선에서 대담한 투쟁과 협력을 함께 해온 야권 지도자 김대중·김영삼, ‘양김’이 각기 독자 출마를 선언함으로써 대선 정국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돈에 빠져들었다. 그 와중에서 더욱 치명적인 것은 그동안 그토록 헌신적으로 합심하여 싸워왔던 재야 운동권이 ‘양김 동시 출마’라는 뜻밖의 사태 앞에서 균열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쪽은 ‘디제이’가 경륜이 높고 좀더 진보적이므로 그를 ‘비판적으로 지지’(비지)하여 힘을 몰아주어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다른 한쪽은 ‘와이에스’가 당선 가능성이 더 높으며 정권교체의 반작용이 덜할 수 있으므로 그가 후보가 되는 것이 낫다는 주장이었다. 디제이를 지지하는 쪽은 이른바 ‘4자필승론’(노태우·김종필·김대중·김영삼 4자가 출마하면 호남과 민주진영의 합세로 디제이가 필승한다는 선거공학적 분석)에 근거하여 적극적으로 독자출마 주장을 편 것에 비해, 와이에스를 선호하는 쪽은 독자출마를 내세우기보다는 두 분이 어떻게든 합의해 단일후보를 내는 것이 좋다는 ‘단일화’ 명분에 합류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비지’ 그룹의 시각에서 보면 단일화론은 디제이보다는 와이에스를 선호하는 것으로 오해되기 십상이었다. 나는 호남 출신이었고 만약 두 분 중 누구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진보적 시각에서 당연히 선택지점이 있었지만, 당시 상황에서 양김이 따로 출마하면 반드시 패할 것으로 예측했기에, 누가 되든 반드시 단일화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신문에서 당시 재야 민주운동권의 총결집체라 할 수 있던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공식 결의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 기사에는 내가 속해 있는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도 민통련의 일원으로 ‘비판적 지지’에 찬성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나는 의아했다. 왜냐하면 민문협 실행위원회에서는 대선 방침에 관한 논의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랴부랴 ‘용태 형’에게 연락해서 사실 확인을 했더니, 형 역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에서 그런 논의를 한 적이 없었다며 의아해하는 것이었다. ‘국본’은 그해 5월 재야운동권의 민통련과 당시 ‘양김’이 속해 있던 통일민주당이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기 위해 결합한 범국민운동기구로서, 용태 형이 자신의 역량과 인맥을 만들어가게 된 장이기도 했다.


나는 평소 ‘형’이라 부르던 민문협 김종철 상임대표에게 정중하게 연락을 해 언론에 보도된 연유를 여쭙고 ‘절차상의 하자’를 이유로 민문협 실행위원회 긴급소집을 요구했다. 당시 민통련 대변인도 겸하고 있던 종철 형은, 민통련의 ‘비판적 지지’ 결의에 민문협이 찬성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믿고 있었다. 나는 실행위원회의 표결 결과가 내 생각과 다르게 나온다면 어쩔 수 없이 따르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실행위원회에서 ‘비판적 지지’ 결의안은 부결되었다. 예기치 않은 파문이 일어난 것이다. 우리는 일처리를 신중히 해야만 했다. 민문협의 의결 결과를 민통련 본부로 보내어 ‘비판적 지지’ 방침에 대한 철회를 전달하되, 이것이 재야 운동권 내부의 분열로 비치지 않도록 조심할 것! 종철 형은 자신의 곤란한 입지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정말 조심스럽게 다 감당하고 어김없이 처리해 주었다.


‘양김’의 독자 출마 선언에
정국은 대선 블랙홀로 빠졌고
민문협서 ‘비판적 지지’안이 부결되자
용태형은 ‘특급지령’을 내렸다


문익환·백기완…독자후보 준비하라
한겨레신문 창간 발기인대회서
백 선생은 후보 수락 연설을 했다
박용일·이애주·김용태·최열…
선대본 핵심에 정치인은 없었다

대학로 유세는 선거축제의 절정
수만명의 열망이 출렁거렸다
6월항쟁 ‘민중승리’로 완결짓고자 한
한국정치사 첫 정치문화운동이었다


■ 용태형의 특급지령과 민중후보 공작
용태 형과 나는 민문협의 문건이 민통련의 기존 결정에 어떤 영향을 주기를 은근히 바랐지만, 그러한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용태 형은 이 과정을 지켜보면서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정치행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선을 두어달 앞둔 그해 가을 어느 날, 용태 형은 나를 불러 ‘특급지령’(?)을 내렸다. “양김이 단일화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으니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겠다.” “재야 운동권에서 독자 후보를 내세워 단일화를 압박하는 방법밖에 없으니 준비를 해라.” 독자 후보라고? 파천황(破天荒)적인 발상이었다. 독자 후보로는 “문익환 목사와 백기완 선생을 생각하고 있는데, 문 목사님은 ‘비판적 지지’에 앞장선 분이라 교섭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일단 알았다고는 했으나, 우리 힘으로 대통령 후보를 독자 추대한다는 게 가능할지 사실 좀 막연했다.


그러던 10월31일, 서울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강당에서 열린 ‘한겨레신문 창간 발기인대회’ 장내에 뜻밖의 정치선동 전단이 뿌려졌다. 읽어보니 “난관에 부딪친 대선 국면을 보수 후보들에게만 맡기지 말고 백기완 선생을 민중의 독자 후보로 추대하여 돌파하자”는 내용이었다. 재야 인사가 거의 다 모여 있는 자리에서 돌연 행사와 무관한 민중후보 추대 전단이 뿌려졌으니 아연 술렁거렸다. 마침 백 선생이 새 신문 창간을 독려하는 축사를 할 차례였는데, 연단에 오른 백 선생은 천하의 굿쟁이(광대)답게 판을 대번에 휘어잡았다. “여러분, 지금 여기 살포된 전단은 분명 누군가의 공작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보기관의 간교한 공작이 아니라 궁지에 내몰린 민중이 스스로 일어나 요구하는 민중의 공작입니다.” 백 선생은 결과적으로 그 자리에서 민중 대통령 후보를 수락하는 연설을 한 셈이었다. 나중에야 그 전단을 뿌린 이는 민청학련 사건 관련 후배 송운학이었고,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합(인민노련)인가 하는 단체가 연관되어 있다고 들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민중 대통령 후보 백기완 선거대책본부’(백본)가 전격 발족했다. 선대본부장에 변호사 박용일, 명예선대본부장에 춤꾼 이애주, 비서실장에 화가 김용태, 사무총장에 환경운동가 최열, 특별보좌관에 판소리꾼 임진택, 대변인에 문학평론가 김도연…. 선대본 핵심 간부에 정치인은 한 명도 끼지 않았고, 거의 다 민주인사와 문화예술인들로 꾸며졌다. 나는 영광스럽게 특별보좌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요즘 대선판처럼 도나캐나 수백명씩 명함 찍어 돌리는 흔한 특보가 아니라 백 후보의 단 한명뿐인 특보였다. 게다가 나는 후보 전용 승용차 운전기사도 겸했다. 백본 진영에서 유일하게 차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지나 김정헌 형이 딱한 사정을 알고 자신의 중고차를 내주어 겨우 두 대가 되었지만, 후보를 직접 수행하는 임무는 여전히 내 몫이었다.


■ 한판 문화축제였던 민중후보 선거운동


나는 1987년의 민중 대통령 후보 선거운동은 정치행위라기보다 일종의 문화운동이었다고 생각한다. 우선은 핵심들의 면모가 춤꾼·소리꾼·글쟁이·그림쟁이는 물론이요 변호사·환경운동가 등 넓은 의미의 문화예술인들로 구성된 것 자체가 그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대통령 후보 자신부터 비나리꾼(시인)이면서 민족문화에 달통한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아닌가. 이들 가운데 직업정치인으로 변신한 이는 다행히 아직까지 한 명도 없다.


특히 대학로 유세는 민중(시민)에 의한 선거축제의 절정이었다. 커다란 걸개그림에는 백범 김구와 장준하 선생, 그리고 백기완 후보의 얼굴 모습이 ‘시간적 원근법’에 바탕해 형상화되었다. 분열을 극복해서 기필코 대선을 승리로 이끌어 독재타도를 완결짓고자 하는 염원 하나로 수만명 청중이 운집하여 출렁거렸다. 재정에서 기획까지, 무대 설비에서 집객까지 모든 준비는 비서실장 용태 형과 사무총장 최열의 몫이었고, 현장 진행사회는 특별보좌관인 내 몫이었다. “여러분, 민중 대통령 후보가 돌연 등장하니까 유신잔재 군사독재세력이 잔뜩 겁을 먹고 ‘좌경’으로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여러분, 난폭한 버스기사가 갑자기 핸들을 우측으로 확 틀면 승객들이 어떻게 됩니까? 승객들은 모두 좌경하게 되지요. 여러분, 우리는 똑바로 서 있고 싶습니다. 우측으로 고개가 돌아간 저 난폭한 운전사를 이제 반드시 갈아치워야 합니다.” 수만 청중들이 함성과 환호로 응답하더니 이어 모두 함께 구호를 외쳤다. “가자, 백기완과 함께, 민중의 시대로!”


물론 백본의 누구도 민중후보의 당선을 믿고 뛰어든 이는 없었다. 다만 민중의 피와 땀으로 쟁취한 6월항쟁의 승리가 정치인들에 의해 독점되고 결국 대선 실패로 귀결되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몸부림이었다. 후보 단일화를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이 주체가 되어 힘으로 민주진영 대선 후보를 단일화해서 6월항쟁의 승리를 국민의 승리, 민중의 승리로 완결짓고자 한 정치문화운동이었다.


백 후보는 ‘양김’의 단일화가 끝내 불가능해지자 대선 이틀 전 눈물을 머금고 사퇴를 했다. 그럼에도 대선은 참담한 패배로 끝났다. 이 ‘합법적’ 결과로 인해 군사독재정권의 수명 연장뿐 아니라 수구세력이 끈질기게 존속할 수 있는 토양이 보장되고 말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양김 분열로 인한 영호남의 지역 갈등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깊은 상처를 입었다.


87년의 민중 대통령 후보 운동! 이 어려운 일을 결단하고 추진해 낸 주역을 꼽는다면, 용태 형과 최열이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는 훗날 그들이 해낸 일을 보면 안다. 용태 형은 대선의 좌절을 딛고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을 결성해냈고, 최열은 환경운동연합과 환경재단을 꾸려 새로운 시민운동을 주도했다.


무엇보다 2000년 총선 때 부패하고 고질적인 선거판에 큰 충격을 준 낙천·낙선운동은 바로 참여연대의 박원순과 환경연합의 최열, 민예총의 김용태, 문화연대의 김정헌이 함께 기획하고 추진한 정치문화 혁신운동, 다시 말해 정치판의 문화운동이었다. 그에 앞서 87년 문화예술인들이 주도했던 민중후보 운동은 우리 정치사에서 최초의 정치문화 혁신운동, 정치판의 문화운동이었다.


임진택 마당극 연출가·판소리 명창

 

[스크랩/한겨레신문]

[길을 찾아서]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 ⑦

1987년 7월9일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은 민중의 승리를 확인하는 6월항쟁의 절정이자 걸개그림으로 상징되는

민중문화예술의 대향연이었다. 사진은 연세대 교정에서 출발한 운구 행렬을 호위중인 최민화 작 ‘이한열 부활

도-그대 뜬 눈으로’로, 결국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 과정에서 작품은 부서지고 말았다. 그해 3월부터 연세대 동

아리 ‘만화사랑’의 지도강사를 맡아 이한열과 인연이 있던 최민화는 전날 저녁에야 장례위원회의 허락을 받아

동아리 학생들과 함께 밤샘 작업 끝에 작품을 완성해냈다.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 70년대초 문화운동 논쟁의 추억


‘용태 형’과 만나 함께 일했던 시기를 떠올리다 보니 새삼 ‘문화운동’의 개념을 되새기게 된다. 1970년대 초 ‘문화운동’에 관한 약간의 논쟁이 있었다. 그 논쟁은 당시 전국 각 대학에 들불처럼 번졌던 탈춤부흥 민속문화운동과, 역시 젊은이들 사이에 대유행을 한 통기타와 청바지로 표상되는 청년문화 현상과의 차이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당시 그 젊은이들 사이에 어떤 적대감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오히려 그 둘은 천박한 독재권력의 폭압적인 정치상황과 폐쇄적인 문화 질곡으로부터 탈출을 기도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상호 우호적일 수도 있었다. 그런 사실은 당시 병영국가로 치닫던 유신정권이 반독재 민주화운동이나 현실참여 문학예술뿐 아니라 사소한 이유로 유행가 가사까지 문제 삼아 금지시키고 심지어는 미니스커트와 장발까지 유치하게 단속했던 이유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거의 탈정치적인 수준의 외래 수입 청년문화 현상을 두고 일부 식자들 사이에서 당대의 바람직한 청년문화운동으로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생겨나자, 탈춤부흥 민속문화운동 쪽에서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반론을 제기했던 것이다.


여기서 먼저 짚고 갈 점은 문화운동은 결코 탈정치적인 운동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문화운동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은 70년대 이후이지만, 그 이전에도 문화운동적 성격을 지닌 정치·사회적 움직임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나는 우리 근대사에서 최초의 대규모 문화운동을 동학사상의 포태와 이에 바탕을 둔 동학농민운동의 전개로 본다. 동학의 핵심 사상인 ‘사람이 한울이다’라는 개념에는 가히 ‘문명의 전환’(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일컬음직한 엄청난 세계관이 들어 있을 뿐 아니라 그 안에는 사회변혁을 위한 최고의 정치원리와 사람 삶의 관계를 담아낸 근원적인 문화윤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동학운동 이후 일제강점기에 민족자주의 시각에서 애국계몽사상을 보급하려 한 활동들, 무엇보다도 우리말과 글을 지키고 고유의 전통문화를 지켜온 선각들의 활동 역시 본래적 의미에서 일종의 문화운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나 그러한 ‘문화적’ 활동들이 -설혹 탈정치를 표방했다 하더라도- 끝내는 ‘정치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그러므로 동학의 자주평등사상이 결국 반봉건 농민혁명과 반외세 농민전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필연적이었으리라.


문화운동은 문화적 기제와 방식을 통해 세계와 인간, 국가와 사회에 대한 관점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내는(혹은 지켜내는) 운동이다. 사람의 사고방식과 고정관념을 먼저 바꾸어서(혹은 지켜서), 일상의 관습과 생활태도를 바꾸고(혹은 지키고), 그리하여 올바른 방향으로 국가와 사회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것이 문화운동의 진정한 의미이고 목적이다. 이처럼 문화운동이 본래 세상을 바꾸려는 정치성을 지니고 있는바, 난폭한 독재권력의 시선에서 보면 민중문화운동이란 것은 문화를 빙자한 불온한 정치운동으로 비칠 수밖에 없고, 완고한 보수 문화예술진영한테서 ‘민족예술운동’ 따위는 예술의 품격을 저해하는 불순한 반예술행동으로 공격받기도 한다. 어떻든, 80년대 이후 용태 형과 나는 그러한 민중문화운동과 민족예술운동의 거친 광야를 함께 헤쳐나간 동지였다.


민중문화운동 표방 첫 단체 ‘민문협’
84년 만들면서 만난 그는 대번 형노릇


민문협이 남긴 의미 있는 유산은
기관지 ‘민중문화’와 비합법 테이프
책자는 민주화운동의 씨알이 되고
신경림·신동엽 등 민족시 낭송과
내가 작창한 ‘똥바다’ 녹음한 테이프
몰래 복사해 비공식 판매됐다


온몸 내던져 독재 맞서던 처절함이
6월항쟁서 거대한 에너지로 빛났다
마당극으로 걸개그림으로 춤으로


 

■ 민중문화운동의 첫 결집체 ‘민문협’


‘민중문화운동’을 공식적으로 표방한 최초의 재야 운동권 단체는 84년 결성된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다. 이 모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인물들을 보면 작가 황석영을 비롯해서 동아투위 김종철, 춤꾼 이애주, 화가 김용태, 불교계 여익구, 기독교계 최민화, 출판계의 김학민, 문학평론가 채광석, 탈춤원조 채희완, 영화감독 장선우 그리고 마당극판의 광대 필자 등이 선배 그룹을 이루고 있었고, 문학평론가 김도연, 문화정책가 박인배, 화가 김봉준, 문화기획자 김영철, 연극기획자 유인택, 문화이론가 정희섭 등이 후배 그룹을 이루어 실행위원회와 사무처를 담당했다. 참여한 인물들의 면면에서 보듯 이 단체는 문학을 비롯해서 미술·연극·탈춤·무용·영화 등 예술 분야는 물론이고, 언론·출판·종교 그리고 문화정책까지를 망라하는, 문자 그대로 문화계 전반을 포괄하는 구성이었다.


그런데 사실 나는 이 민문협이 결성되는 과정에서야 ‘김용태’라는 인물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이지, 그 전에는 그를 본 적도 없고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때가 언제였던가…. 민문협을 결성하기 위해서는 초기 각 장르의 대표 인물들과 접촉해 참가를 독려해야 하는데, 그 당시 내가 접할 수 있는 화가는 두렁패의 김봉준과 현실과 발언 그룹의 ‘오윤’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윤 형은 그런 조직운동에 나선다거나 하는 성격이 전혀 아니어서 다른 인물을 물색해야 했는데, 그런 과정에서 김용태라는 인물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가 근무한다는 인사동 어느 사무실로 찾아가 처음 인사를 나눈 것이다. 거기가 미술 관련 잡지사였는지, 진학 관련 잡지사였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만나보니 그는 이미 민문협 추진에 관한 소문을 들어 알고 있는 눈치였고, 나는 그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나를 탐색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당시 몇해 전 <창작과 비평>에 ‘새로운 연극을 위하여’라는 마당극론을 제창한 적이 있고, ‘이야기와 판소리’ ‘살아있는 판소리’ 등의 창작판소리 이론을 제시하기도 했었으므로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제법 알려져 있는 편이었다. 용태 형은 아마도 오윤 형을 통해서 내 얘기를 들어 좀 더 알고 있는 것 같았고, 현발 창립 멤버로서 미술계를 대표해 민문협 참여를 암묵적으로 수락한 셈이었다. 그 뒤 두번째 만남부터 용태 형이 대번에 말을 놓으며 형 노릇을 하려고 했음은 앞서 필자들의 경험과 똑같다.


1987년 7월9일 최병수 작 걸개그림 ‘한열이를 살려내라’가 내걸린 연세대 학생회관 앞에서 이한열 열사 장례식이 열리고 있다.

최병수는 앞서 6월11일 신문에 실린 최루탄 피격 현장 사진을 보고 학생회관에서 연세대 만화사랑 동아리 학생들과 밤새워

그림을 그려 다음날부터 건물 외벽에 걸었고, 이는 6월항쟁의 상징이 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 폭압정치가 낳은 문화운동의 절정기


민문협은 그 포악스럽던 전두환 정권 시절, 김근태 등이 앞장서 출범시킨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동아·조선 해직기자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협)와 더불어 독재정권 타도의 깃발을 가장 높이 치켜든 단체 중 하나다. 그처럼 무자비하게 철권통치를 휘두르던 5공화국도 말기가 가까워진 85년 이후에는 일종의 문화통치로 전략을 교묘히 수정한 까닭에, 문화운동의 깃발을 든 민문협의 임무는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그 무렵 민문협의 상임대표는 동아투위의 김종철이었다. 초기 민문협 내에서 용태 형의 위상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는 현발 기획전시회나 민족미술협의회 창립 같은 데 더 신경을 써야 했으므로 민문협에서는 단지 장르별 실행위원 중 한 명일 뿐이었다. 한편 민문협을 창설하는 데 앞장서 바람을 잡았던 황석영은 김종철에게 안살림을 맡기고 벌써 바깥에서 또다른 일을 개척하고 있었다. 85년 봄, 나는 ‘석영 형’과 함께 독일 베를린의 ‘제3세계문화회의’에 초청받아 참가한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윤이상 선생과 송두율 교수 등과도 만났다. 행사가 끝난 뒤 나는 바로 귀국했지만 석영 형은 남았는데, 그 머무름은 3년 뒤 형이 방북을 결행하는 단초가 되었다.


이 시절 민문협이 해낸 사업으로 크게 두 가지 유산이 남아 있다. 하나는 기관지 <민중문화>다. 비록 부정기적으로 나온 얇은 책자였지만 민청련이 발행한 <민주화의 길>과 더불어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씨알 같은 기록이 되었다. 이 책의 기획 책임은 기자 출신 상임대표 ‘종철 형’의 몫이었지만, 편집 디자인은 본업이 화가이고 각종 편집디자인의 달인이었던 용태 형의 몫이었다. 그의 손이 간 책들은 아무리 허름해도 검박한 아름다움이 배어 있었다.


또 하나 민문협이 남긴 유산은 이른바 ‘비합법’ 카세트테이프들이다. 비합법? 우리는 불법이라고 생각지 않지만 저들이 합법으로 허용해주지 않으니 부득이 찾아낸 신조어가 비합법이었다. 대한민국 비합법 카세트 1호는 성내운 교수가 낭독한 ‘분단시대의 민족혼과 민족시 낭송’이다. 그는 전업적인 시 낭송가가 아님에도 재야 인사들이 모인 작은 모임에서 우리 시대의 아픔을 담아낸 민족시들을 스스로 선정해 낭송하곤 했는데, 시의 내용과 낭송의 감정이 너무나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듣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곤 했다. 이 테이프에는 성 교수의 음성으로 김구의 ‘삼천만 동포에게 눈물로 고함’, 신동엽의 ‘진달래 산천’, 신경림의 ‘4·19날 고향에 와서’, 문익환의 ‘꿈을 비는 마음’, 장준하의 ‘민족주의자의 길’, 백기완의 ‘전지 요양의 길목에서’, 고은의 ‘화살’,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등이 실려 있다. 그리고 비합법 카세트 2호는 김지하 원작 담시를 원재료로 해서 내가 작창한 판소리 <똥바다>다.

 
당시 민문협 후배들은 운영 재정을 만들기 위해 이 비합법 카세트를 몰래 복사해서 비공식으로 판매했는데, 한번에 3개씩밖에는 복사가 안 되는 구형 복사기인지라 돌아가며 밤새워 작업하는 날이 많았다. 정식 음반이 아니었으므로 조야한 재킷이나마 스스로 만들어야 했는데, 다들 어렵게 생각하는 그런 일들이 용태 형 손에 닿기만 하면 마술처럼 금방 쉽게 풀리곤 했다. 민문협은 비록 가난했지만 각 갈래가 모여 있어 분업과 협업이 언제든 가능한 체제였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포악의 극치였던 전두환 시기가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민중문화운동의 절정기였다. 역설적이게도, 가장 화려해서가 아니라 가장 처절했기 때문에 절정기였다. 왜 이제는 돌아갈 수가 없다고 하는가? 첫째는 문화 전반의 각 분야가 그만한 크기와 결속력으로 다시 모이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민중의,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문화가 어떤 형체였는지 점차 잊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는 온몸을 내던져 상황을 타개하려는 처절함이 우리 마음속에서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 문화예술의 신명과 민중의 함성 일치


마침내 87년 6월! 그간 십수년 동안 축적된 민중문화운동, 민중예술운동의 에너지가 엄청나게 분출하는 대사건이 일어난다.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으로부터 시작해 연세대생 이한열 사망 사건에 이르기까지 팽창해온 국민적 분노가 이른바 ‘6월항쟁’으로 폭발하던 시기, 탈춤·마당극·풍물굿 등 공연예술 장르와 더불어 민중예술운동의 커다란 축으로 부각된 갈래가 바로 민중미술이었다. 전시장 액자 그림이 아닌 걸개와 벽화를 시도하던 민중미술의 방향이 얼마나 절실한 바람이었는지를 분명히 확인하던 날, ‘미술’은 눈부시게 빛났다.


이한열의 장례식이 치러지던 그날, 87년 7월9일 연세대 교정에는 거대한 걸개그림과 수백개의 만장들이 세워졌다. 최민화의 ‘이한열 부활도’와 더불어 최병수의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압권이었다. 특히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이한열을 부축한 친구의 모습을 그린 최병수의 그림은 그 자체로 거대한 깃발이었다. 깃발로 흔들어 불러일으키는 항쟁의 절정이었다. 그림이 말을 하고, 그림이 외치고, 그림이 절규하고, 그림이 통곡하고, 그림이 분노하고, 그림이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 이한열의 주검을 실은 거대한 상여를 풍물패와 상여꾼이 운구하는데, 뜻밖에 소복한 어떤 여인 하나 튀어나와 몸부림으로 춤을 추며 베를 갈라 죽은 이의 넋을 걷어내니, 춤꾼 이애주였다. 백기완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썽풀이춤’이다. 그날 우리는 민중문화와 민중예술의 어떤 신명이 거대한 시민항쟁의 분노 함성과 일치하면서 최고의 정치적 경지에 이르는 순간을 분명히 목격했다. 87년 6월! 용태 형과 민족미술 진영, 그리고 우리네 민중문화운동 진영이 길러낸 문화역량이 한 시대를 움직이는 거대한 에너지로 전환되는 순간이었고, 민중문화운동 진영은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도 문화와 정치가 일치하는 황홀함을 맛보았다.


그리고 6월항쟁은 일단 시민들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그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12월의 대선을 앞두고 민주진영이 균열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용태 형과 나는 무언가 급박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또다른 문화운동이었다. (계속)


필자 임진택 마당극 연출가·판소리 명창

[한겨레신문]

김용태 민족예술인장(장례위원장: 김정헌, 이애주)추모식 “민중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가 지난 5월7일 오후8시, 신촌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 특2호실에서 많은 조문객들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임진택씨의 사회로 진행된 추모식에는 김정헌, 이애주씨(장례위원장)의 조사와 유홍준씨(집행위원)의 고인 소개, 이승철, 김명성씨(장례위원)의 조시, 백기완, 이부영, 조영신씨의 추모사, 유족 김승부씨의 인사말, 윤선애, 정태춘, 장사익씨의 추모노래, 김남수, 이애주씨의 씻김굿 순으로 숙연하게 진행되었다.

김용태 선생 민족예술인장 장례위원회
장례위원장 : 김정헌, 이애주
집행위원장 : 박진화, 이종률
집행위원 : 김상철, 김윤기, 남요원, 문국주, 박인배, 유홍준, 전승보, 조성우, 홍선웅
고 문 ; 김윤수, 백기완, 손장섭, 신경림, 원 경, 이부영, 주재환, 함세웅외 다수
호 상 : 김태서, 임진택
유 족 : 박영애(처), 김보영(딸), 김용순, 김승부, 김용선, 김용출, 김용숙(이상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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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가 부른 비극에 대한 '풍자와 치유의 추임새'

[한국일보 / 장병욱 선임기자 ]


임진택씨의 북 장단과 추임새에 딸 예슬씨의 성금련류 가야금 산조가 따라 오고, 아내 이애경씨의 검무가 펼쳐졌다.

배경은 고향 김제 집 큰방에 있던 열 폭 짜리 병풍. 손용석기자 stones@hk.co.kr

● 10년 만에 연극 복귀
긴급조치 1호와 4호 사이
'울릉도 간첩 사건' 실체 밝히는
힐링 연극 '상처꽃' 준비 한창

● 창작 판소리 열두 마당은 필생의 목표
'백범 김구' '남한산성' 완성하고
5·18과 동학 120주년 기념
'오월 광주' '녹두장군'도 무대에

● 국악무대 뺨치는 즉흥 협연
남편은 판소리·마당극 넘나들고
부인은 대학서 한국 무용 강의
음악교사인 딸은 미래의 명인


현장 예술로서 판소리의 진수는 아니리(즉흥 사설)나 발림(묘사적 동작)에 있는지도 모른다. 승용차를 몰며 임진택씨가 펼쳐 보인 입심은 가공할 만한 분량이었다. 문화판의 거두들이 안주 삼아 펼쳐 놓던 입담, 배꼽 잡게 하는 재담 등을 포장하는 기술에 넋을 뺏겼다. 느닷없이 펼쳐진 그 이야기는 즉흥 사설이었고, 진보 진영의 풍속사였다. 구절양장 같던 이야기를 그대로 옮기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한국적 시대 상황이 낳은 위대한 삼인(三人) 고은, 김지하, 황석영에게 동시에 노벨 문학상을 줘야 한다"는 기상(奇想)마저 그럴싸해 보였다. 과연 천하의 소리꾼이다. 홍안에다 살짝 퍼머까지 한 그는 전보다 분명 더 젊었다. 본격 취재로는 4년 만에 만나는 그는 문자 그대로 괄목상대해야 할 지경이었다.

고향집에서 가져 온 병풍 앞에 임진택(64), 아내 이애경(62), 딸 예슬(26) 씨가 한복을 차려 입고 즉흥 협연을 하니 웬만한 국악무대는 뺨친다.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예능보유자 이애주씨의 동생인 아내는 왕성한 현역이다. 대여섯 살부터 김보남, 김천흥 등 한국 무용의 거장들로부터 춤을 익힌 그는 동덕여대 무용과에서 30년 동안 한국 무용을 강의 중이다. 승무, 살풀이, 국선도, 단무(丹舞)가 특기다.

지금은 무릎을 다쳐 단전호흡에 집중하고 있다. 자기 속의 기운으로 남을 살리는 "힐링"의 전통무예가이기도 한 그가 목검을 휘두르며 펼치는 춤사위에는 살기(殺氣)가 없다. "인간 사랑과 지구 사랑을 실천하는 거죠. 춤 이외에 사물, 승무 반주 북, 설장고도 연주해요."

타악은 이수영, 김병섭, 임광식, 김타업 등 옛 명인들로부터 전수 받았다, 때마침 일년에 한 번 갖는 단무도인의 잔치'단무도 페스티벌' 준비로 분주했다. 지금 학교 음악교사인 딸은 12현 가야금은 물론 29현, 37현도 연주하는 미래의 명인이다.

겉으로는 장중하되 내면적으로는 격한 단무도를 하니 이씨의 몸이 호소해 왔다. 5년여 전부터 무릎 굴신이 힘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찾아낸 해법이 수벽치기, 국선도, 단무도 등 복합 무예 단련이다. 그 중에는 인사동의 걸인을 수소문 해 스승을 삼고 다듬은 풍류도도 있다. 사형선고까지 받은 관련인들의 잇단 무죄 판결로 새삼 세인의 시선을 끌고 있는 1974년의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의 여파까지 그 독특한 춤사위가 아우르는 듯 하다.

"나는 중범이 아니어서 4개월 만에 기소유예 받고 나왔다." 단순 시위 준비였는데 인혁당 재건이라며 조작하면서 덧씌웠다는 임씨의 말이다. 그런데 사형이나 무기 받은 사람이 자신보다 일을 많이 한 게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구치소에 넉 달 있으면서 사형 선고 받은 사람들과 통방했던 것이다.

갇혀 있었으되 그는 영어의 몸이 아니었다. "그러던 하루, 구치소 감방 안에서 '빵장'의 제의로 '소리 내력'을 초연했다." 김지하의 담시(譚詩)를 달달 외우고 있던 그는 잡범 열댓 명 앞에서 오락시간 때 가락을 붙인 것. "서울 장안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와 / 그 소리만 들으면 사지에 힘이 풀리고…" 김지하 원작의 '오적(五戝)'과 함께 최근 CD로도 출반된'임진택의 창작 판소리' 중'소리 내력'을 들으니 어떤 기(氣)가 솟구쳐 오는 것 같다. 10년 만에 연극 무대 복귀를 코 앞에 둔 그가 사연을 풀어냈다.

"지하의 희곡 중 최초의 마당극인'진오귀'를 보고 충격 받아 연극을 시작했다." 긴 공백 이후 남양주 야외 공연축제 때의 야외극'해랑과 달집'공연을 거쳐 대학로 무대로 갔고, 1997년'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는 그의 새 출발을 알렸다. 대표 양정순, 연출 임진택이라는 체제의 극단 길라잡이는 1995년 탄생했다. 마당극과 판소리라는 임진택 예술의 한 축이 그렇게 살아났다.

"마당극의 미학과 영속성, 영구성을 완성하지 못하고 세월을 허송했다." 창작 판소리 열 두 마당 중 '백범 김구''남한산성'은 완성했으나 연극 쪽으로는 심혈을 기울이지 못한 데 대한 임씨의 자탄. 여기서 그의 마당 개념을 보다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대학 시절 그는 허규가 이끌던 극단 민예의 작품 보고 아주 큰 흥미를 느꼈다. "그러나 나의 마당은 민예나 미추의 마당이 아니다." 그들의 목표가 전통 연희의 무대 양식화라면 자신의 것은 '연극의 현장화' 즉 현장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1972년 서강대 언덕 구릉에서 공연했던 '금관의 예수'가 최초였다. 김지하 작에 그와 이상우 등이 출연했던 작품은 전국의 도시를 돌며 새 양식의 도래(到來)를 게릴라처럼 알렸다. 이어 1973년 12월 가난한 개척교회에서 펼쳤던 김지하 원작의 '진오귀'는 "최초의 마당극"이라고 작가가 일컬었던 작품이다. 당시 임씨는 연출과 출연을 함께 맡았다. 공안 당국이 가만 있을 리 없었다. 동숭동 서울대에서의 공연 시도가 계속 무산되자 1977년 수 천 관객이 운집한 가운데 이화여대 운동장에서 공연이 펼쳐졌다. 정문 앞에는 전경이 쫙 깔렸다.

그는 1985년 김지하의 에세이 <밥>을 토대로 한 마당극 '밥'으로 한국 연극사에 방점을 하나 찍었다. 대학 시절 연극반 선배 김지하가 자신의 무대를 보고 퍼붓던 "연출 부재"라는 철퇴는 아직도 그를 닦달한다. 실은 팍팍한 현실에 쫓겨 마당극 미학을 정립하지 못 했다는 후회가 막심하다. "술만 안 마시면 10년 전보다 더 작업 할 수 있다. 두주불사 하는 양반들이 주위에 어찌나 숱했던지…." 앞으로 1년에 판소리 하나, 마당극 하나를 할 것이라는 다짐이 변명처럼 나온다.

필생의 목표인 창작 판소리 열두 마당 중 '백범 김구''남한산성' 등 두 편은 완성했다. '백범 김구'는 3시간 넘는 3부작이다. 그와 명창 왕 기철, 기석 형제가 백범기념관 및 정동극장에서 각각 1시간씩 선보였는데 좋은 반응이었다. "두 사람이 당대 제일의 명창이라면 나는 광대다. 소리 그 자체의 미학보다는 역사인식의 현실감이 살아 있다는 평이었다."서울대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 한 덕일까, 풍자에는 그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

그의 판은 아기자기한 애드립의 재미로 정평 나 있다. 정통파인 정권진의 제자이면서도 즉흥과 입심으로 무대를 장악하는 명창 박동진의 맥을 잇는 것으로 평가될 정도다. 오는 5월18일에 맞춰서는 80분짜리 판소리 '오월 광주'를 무대에 올릴 계획이다. 특히 올해는 동학 120 주년을 기념해 판소리 버전 전봉준 일대기인'녹두장군'을 꼭 내놓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재정 지원이 없어도 해야죠."

일복이 터졌나 보다. 당장 새 연극'상처꽃' 준비로 눈코 뜰 새 없다. 1974년 개헌 청원 운동하던 장준하 백기완 등을 겨냥한 긴급조치 1호(1월 8일), 인혁당 사건을 겨냥한 긴급조치 4호(4월 3일)의 사이인 3월 15일 또 하나의 허구가 반도 남쪽을 얼어 붙게 했다. 두 차례 걸친 재판서 전원 무죄로 판결 난 이른바 '울릉도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은 극도의 공포감을 조성하는 데 성공했다.

"나는 직접 관련되지 않았지만 거기에 연루된 사람들과 서대문 구치소서 같이 수감돼 있었다. 민청학련 40주년을 앞두고 이제는 알려야겠다고 결심했다." 월북 가족, 납북 어부, 재일동포 유학생이 등장하는 남편의 회심작을 두고 아내는 "치유이자 인권 연극"이라 풀이했다.

임씨가 잊혀진 그 사건의 실체를 본 것은 지난해 6월 서울 정릉에 있는 '김근태 기념치유센터' 개관식에서였다. 치유센터 이사인 최창남 목사를 통해 다큐멘터리'울릉도 1974'와 만난 것이다. 민청학련 사건의 충격파 속에 묻혀졌고, 결국 무죄가 선고됐으나 한번 간첩으로 몰렸던 그들의 삶은 거덜났다. 간첩으로 몰리는 바람에 아예 구명 운동 자체가 불가능했다. 역사마저 그들을 망각하고 있었다.

임씨 역시 이념의 후폭풍을 되게 맞았다. "아버지는 8형제였는데 아버지 등 4명은 우익, 나머지는 빨치산 좌익이었다."연좌제는 부친을 괴롭혔다. 그 덕(?)에 그는 군 면제. "내 전공이 정치외교인데, 사라진 중립화 통일론이 부각될 필요 있다. 곧 역동적 중도다."

그는 김지하의 역동적 중도론이 우선 시인으로서 언어에 대한 탁월한 감각에 힘입은 개념인 동시에, 전례 없는 탁월한 발상이라 평했다. "정치판의 중도론 때문에 중도의 개념이 손상돼 기회주의로 오독되고 있다. 좌우라는 개념은 방향이지 실체가 아니다. 실체는 극단을 뺀 중도다. 중도는 절충이 아니다. 변화를 피하는 것은 기회주의다." 그의 지론. 그렇다면 현 정세 하의 중도란? "생명론의 관점에서 인식의 상대성에 입각한 역동적 중도다."

다음은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하는 말일까."민주화 세력 10년 집권 후 보수 반동이 온 데 대해서는 반성을 정말 많이 해야 한다. 민주와 정의를 외쳐놓고 막상 그 세상이 오자 또 다른 권력이 돼버린 과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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