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니, 인사동을 제집처럼 떠돌던 서양화가 이청운이 그립다.

그가 뇌경색으로 병원에 실려간지 벌써 두 달이 지나버렸다.

 

수술받기 직전, 얼굴은 보았으나 ‘장에 가자’와 ‘청량리588’의

두 전시 때문에 한 달 반을 허덕이다보니, 그를 잠시 잊고 있었다.

 

지난 13일 KBS에 인터뷰하러 가는 아내와 여의도에 갔다 오며,

이청운씨가 입원한 ‘강북삼성병원’에 잠시 들렸다.

 

피골이 상접한 그의 모습을 처음 본 순간,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굳어가는 몸을 주무르며 연신 눈물을 훔쳐대는 아내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반가워 웃고 있는 모습이 마치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 표정이었다.

 

재활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아야 하나, 폐렴으로 보류되어 있는 상태란다.

목으로는 물 한 방울 넘길 수 없어, 호스를 통해 음식물을 넣어 주다보니,

기력이 회복되지 않는 것이다.

 

“너무 지겨워, 병원에서 도망치고 싶어!”

어눌한 그의 목소리가 자유롭게 살아 온 한 화가의 안타까움을 말하고 있었다.

작년에 청산포 바닷가에 핀 홍매화가 눈에 아롱거려, 기억에도 아물거리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리고 싶다는 말에서, 이화백의 식지 않은 열정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병원비도 병원비지만, 가까운 벗들의 격려가 더 필요하다.

결국 병이란 자신감에 따른 스스로의 의지에 좌우되기 마련인데,

여지껏 인사동 사람으로는 시인 조준영씨와 서양화가 문영태씨가 다녀갔을 뿐이란다.

 

우리 모두 바쁜 일상에서 허덕이고 살지만,

잠깐이라도 짬을 내어 그에게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용기를 심어주자!

 

[강북삼성병원 신관 11층]

 

 

사진,글 / 조문호

 

 

 


 


 


30년간 숨어있던 서양화가 김종숙씨의 '속초다'전 개막식이 지난 28일 오후5시, 인사동 아라아트 전시장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전시장에는 김종숙씨를 비롯하여 기획자 박인식씨, '아라아트'대표 김명성씨, 출판인 정광호, 이규상씨, 만화가 박재동씨. 도예가 황예숙, 김희갑씨, 사진가 임채욱씨, 시인 송상욱씨, 김정남, 이상철씨등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김종숙씨는 강원대미대를 졸업한 후 20대 중반부터 홀로 아들을 키우느라 갖가지 ‘막일’을 해왔단다. 황태덕장 등에서 생선을 다듬고 갈무리하는 일부터 식당의 서빙까지 닥치는 대로 했단다. 고등어, 꼴뚜기, 가자미, 대구, 말린 도루묵, 명태, 열갱이 등등 화폭 속에서 비린내가 느껴질 정도로 살아 펄덕이는 갖가지 생선들은 화가의 남다른 체험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전시를 기획한 박인식씨는 '나는 꾸덜꾸덜함과 쿰쿰함에 이미 중독되었다”고 표현해 놓았다.

 

 

 

 

 

 

 

 

 

 

 

 

 

 

 

 

 

 

 




 

(왼쪽부터) 화가 김종숙 씨, 기획자 박인식 씨. 사진 김경애 기자

[짬] 첫 초청개인전 ‘속초다’ 여는 화가 김종숙 씨, 기획자 박인식 씨

낯선 이름의 화가로부터 전시회 초대장이 왔다. ‘속초다’라는 전시회 제목과 작품 사진에서 드러나듯, 강원도 속초에 사는 김종숙(50)씨가 속초의 사람과 자연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초대인이 따로 있다. 그것도 무려 4명, 문화계에서 알아주는 이름들이다. 소설가이자 미술평론가 박인식씨, 아라아트센터 김명성 대표, 도서출판 낮은산 정광호 대표, 사진작가 임재욱씨다. 더구나 작가의 첫 개인전이자 아라아트센터의 기획 초대전이다.

“작품을 처음 보는 순간 ‘바로 내가 찾던 그림’이었고, 지금은 사라져버린 ‘정통 화가’를 발견했다는 직감이 왔어요. 보는 사람마다 ‘여자 고흐다’, ‘고흐+고갱이다’ 감탄들 합니다.”

초대전의 기획자이기도 한 박씨는 작품 못지않게 흥미로운 화가의 이력과 전시회 사연을 들려줬다.

미대 나와 속초서 혼자 작업해온 김씨
여고동창생들이 몰래 그림들고 상경
무작정 인사동 돌며 ‘전문가’ 수소문

작품 본 순간 감탄한 평론가 박씨
화랑 대표 등과 함께 ‘초대전 삼고초려’
“드문 정통 화가·회화 정신에 중독”

‘지난해 여름 화가의 속초여고 동창생 2명은 ‘물고기 그림’ 2점을 몰래 싸들고 무작정 상경했다. 친구의 작품이 골방에 숨겨두기엔 너무나 아까웠기 때문이다. 인사동의 화랑과 공방들을 돌아다니면서 그림을 가장 잘 보는 전문가를 수소문했다. 마침 한 공방에서 친분이 있던 박씨를 연결해줬다. 그림을 본 순간 감탄한 박씨는 곧장 아라아트 쪽에 초대전 기획을 제안하고, 속초로 달려가 화가를 만났다. 그런데 정작 화가는 동창생들에게 화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 박씨와 주위 사람들의 설득에 못 이겨 동의를 했던 화가는 인사동 아라아트센터 5층 전시공간을 보더니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너무 넘치는 공간”이라는 이유였다. 이번에는 화가가 삽화를 그린 동화책 <그 꿈들>(글 박기범)의 출판사 대표인 정씨와 전시회 도록의 사진을 찍은 임씨도 가세해 초대인을 자원했다.’

그렇게 반년에 걸친 삼고초려 끝에 ‘은둔 화가’가 50년 만에 세상 속으로 나온 것이다.

전시회 개막 전날인 24일 전시장에서 만난 김씨는 여전히 주저하고 있었다. 1965년 속초에서 태어나 강원대 미대를 나와 ‘글과 그림’ 동인으로 활동하며 꾸준히 그림을 그려온 경력을 보면 첫 개인전이라는 게 의아스러울 지경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일까?

“이제야 겨우 그림을 어떻게 그리면 되는지 알 것 같은데 대뜸 세상에 내놓기가 겁이 나요.”

그렇다고 다른 생업이 있거나 그림을 팔지 않고도 될 만큼 경제적 여력이 있거나 든든한 후원자가 있는 것도 전혀 아니였다. 오히려 20대 중반부터 홀로 아들을 키우느라 갖가지 ‘막일’을 해왔단다. 동해안 대표 항구도시인 만큼 황태덕장 등에서 생선을 다듬고 갈무리하는 일부터 식당의 서빙까지 닥치는 대로 했단다. 고등어, 꼴뚜기, 가자미, 대구, 말린 도루묵, 명태, 열갱이 등등 화폭 속에서 비린내가 느껴질 정도로 살아 펄덕이는 갖가지 생선들은 화가의 남다른 체험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마치 붓이 아니라 손가락이나 손바닥의 힘으로 물감을 통째로 찍어 놓은 듯한 그의 작품에 대해 박씨는 “나는 그 꾸덜꾸덜함과 쿰쿰함에 이미 중독되었다”고 표현해놓았다. “순수 회화에서 느낄 수 있었던 손맛이랄까 사람 냄새랄까, 80년대 이후 화단에서 보기 힘들어진 질감이 잘 드러나 있어요. 그것도 아주 기운차게.” 아라아트의 김 대표도 “회화의 원형과 정신이 살아 있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화가가 지금껏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지켜올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김씨는 인생의 멘토들 덕분이라고 소개했다. 여고 시절 은사인 김경희 교사와 그의 남편인 고 황시백 선생이었다. 전교조 창립회원으로 강원지역 지부장을 지냈던 황 선생은 교단에서뿐만 아니라 지역 문화계에서 존경받는 어른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리는 게 좋았고 그래서 미대에 입학도 했지만, 누구나 그랬듯이 80년대 중반의 대학에서 공부에만 몰두하기는 어려웠죠. ‘반문명’이랄까 일종의 치기도 있었고요. 그래서 그저 혼자 그렸어요. 재미도 있었고,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그리는 것뿐이었으니까요.”

이번 전시에서 함께 소개하는 동화 <그 꿈들>의 원화들에서는 사람에 대한 화가의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작가 박기범씨가 ‘인간방패’ 체험을 바탕으로 이라크 소년들의 꿈을 담은 이야기인 이 작품의 삽화들로, 2014년 전국 순회전을 하기도 했다.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민중미술 이후 길을 잃은 회화의 원형을 찾아갈 겁니다. 때로는 막히고 절벽을 만날지도 모르지만, 한눈팔지 않고 뚜벅뚜벅 가고 싶습니다.”

김씨의 목소리는 낮고 어눌했지만 그 속에 담긴 강한 예술혼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작품은 새달 17일까지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센터 5층에서 볼 수 있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세계일보’ 창간26주년을 기념하는 서양화가 김가범씨의 “Dream" 전이 지난 11일부터 오는 15일까지

서울시립경희궁미술관에서 열린다.

지난 11일, 오후4시에 열린 개막식에는 작가 김가범씨를 비롯하여 세계일보 조한규사장, 서울미술협회 이인섭이사장,

국립현대미술관 유남순관장, 미술평론가 신항섭씨, 김태식, 류석우씨 등 많은 분들이 참석해 전시를 축하했다.

몇 일 전 인사동 마당발 편완식기자로 부터 전시를 기획, 추진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는데, 작품들이 너무 좋았다.

무거운 질량의 색채이미지에서 신비한 힘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작가가 궁금해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그의 이력도 특이했다.

미스코리아 출신으로, 40대에 미국 미술대학에 들어가 50대 초반에 전업 작가로 나섰단다.
60대에 화단의 조명을 받게 되어 한국단색화를 처음으로 미국과 유럽에 알렸고, 우면산이 작가의 그림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요즘은 밀라노와 베이징의 해외 초대전 준비로 하루 열 시간 씩이나 붓질하는 맹렬작가로 소개되어 있었다.

미술평론가 신항섭씨는 ‘단조로운 단색조의 색채이미지가 대다수를 차지하는데도 그 미묘한 색채이미지가 만들어 내는 환영은 회화의 마술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깨닫게 해 준다’고 말했다.

그 신비의 요소를 끄집어내는 힘은 무엇이고, 그 강렬한 색채이미지가 주는 언어는 무엇일까?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 있었는데, 설치음악가 옐로우잼의 색스폰 연주를 들으며 무릎을 쳤다.
“맞아! 찬란한 슬픔이야”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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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최민화

지은이_김진하, 백지숙

 

 

지은이_김진하, 백지숙 || 판형_270×295cm || 페이지_180쪽, 양장본

발행일_2014년 12월 30일 || 분류_예술(회화) || 디자인_나무아트

 ISBN_978-89-966435-7-9 || 가격_50,000원 || 출판사_도서출판 나무아트

 

 

출판기념회 / 2015_0128_수요일_05:00pm_나무화랑

구입문의나무화랑서울 종로구 관훈동 105번지 4층02.722.7760, 010.2272.7760

 

도서출판 나무아트서울 종로구 관훈동 105번지 4층Tel. +82.2.722.7760

 

분홍 – 청춘과 혁명 사이 ● 박탈, 상실, 거역, 소외, 음주, 풋사랑, 실연, 추억, 좌절, 결핍, 공터, 꽁초, 교복, 역사, 기합, 로큰롤, 분노, 자전거, 빵집, 부랑, 낭만, 가난, 슬픔, 회한, 데모, 통기타, 교련복, 유행가, 극장… ● 나열된 어휘들은 무작위다. 공통점이 없다. 그래도 이 단어들을 관통하는 게 있다. 청춘에 대한 추억. 몸과 마음에 무의식적으로 각인된 우울했던 젊음의 지문, 페이소스. 거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형의 갈망과 에너지. 반추의 시점인 지금 그것은 우리 뇌리에 투사되어 지나간 것들을 현재화한다. 시제를 거슬러가며 과거로부터 여기에 이르는 레이어들을 자동으로 오버랩하는 기능이 작동되는 것이다. 기억의 끈이 꿸 수 있는 이미저리는 그렇게 광범위하게 시공간을 가리지 않고 작용한다. 한편으로 회고하는 사람이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지나온 순간들을 편집하고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재구성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땐 건조하고 무료한 일상에 지나지 않았던 것들이 지금은 분위기 있는 그리움으로 변주되었을 수도 있고. ● 그러나 실제적인 에피소드를 따라 심층적으로 연상해본다면, "마음 내키는 곳에 드러눕는 개"(체스 노테봄, '의식')처럼 여기저기 출몰하는 기억을 불완전하게 재구성하는 오차는 줄어든다. 또, 흘러간 시간은 결코 돌아오지 않기에 중요한 사건과 편린들은 그것을 떠올리려는 주체의 의지로 인해 더 선명해진다. 그런 의도를 가진 채 청춘으로의 여행에 몰입하면 지나간 그 시절은 어떤 것이었으며, 또 얼마나 아프거나 아름다웠는지, 내 인생에서 어떤 의미였는지를 돌이켜보게 된다. 그때의 나, 가족들, 학창시절과 친구들, 청년기 세상살이, 그 삶의 배경이자 조건인 정치 사회적 시대상도 함께 떠오른다. 기억이란 그런 거다. 하나를 캐면 고구마 줄기처럼 엮여서 더 큰 삶의 질량과 부피가 저절로 줄줄이 뽑혀져 나온다는 것. 그리곤 미래의 과거일 오늘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단서이자, 과거의 가치를 능동적으로 배치하고 앞으로를 향한 상상을 현재로 전환하는 실질적 힘을 갖게 하는 행위라는 것. ● 기억의 이런 능동성에도 불구하고 화가 최민화는 이런 단계를 넘어 좀 더 적극적으로 접근할 것을 스스로에게 요구한다. "모든 회상은 불륜이다. 망각은 학살만큼 본질적이므로"라는 아포리즘으로. 객관적으로 개념화 되어 기록되지 않고 기억에서만 잔존하는 역사적 사실은, 결국 학살과 마찬가지의 본능인 망각을 반드시 동반한다는 것에 대한 경고다. 6월 항쟁을 그릴 때 광주항쟁을 떠올리며 쓴 작업노트인 듯하다. 권력의 자동적 폭력성은, 대중들의 기억과 망각이라는 자율을 빙자한 수동적 메커니즘으로 인해 더 큰 폭력을 불러온다는 예리한 지적이다. 망각의 '본능'에 비하면 기억이란 '의지'는 얼마나 연약한 것인가. 이 말은 지나간 청춘기를 작품의 소재로 삼은 작가가 말랑말랑한 향수에만 함몰되지 않아야 할 것을 자기 작업에 경고한 아포리즘이다. 이 첨예한 인식으로부터 최민화의 회화는 시작된다. ● 최민화의 분홍 그림들에는 지나간 청춘기와 현재가 겹치면서 그리움과 애잔함, 아쉬움과 분노가 진득하게 묻어나는 개인적/역사적 서사가 공존한다. 자아로부터 타자들로, 과거로부터 현재가, 개인사와 가족사로부터 현대사가, 미시적인 에피소드로부터 대하(大河)와 같은 파노라마로 확대되는 서사가 있다. '구체적 특수성'의 영역에 있던 작가 개인의 감정과 경험이 한 시대를 표상하는 '추상적 보편'으로서 작가와 같은 세대를 아우르는 역사적 전형성의 공간으로 넓어진다. ● 단순한 단색조로 배경의 원근을 생략한 채 등장하는 인물이 대부분임에도 불구하고, 그 화면은 많은 것들을 함유하고 있다. 또한, 뻔한 내용의 서술이 아닌 조형성으로 인해 그가 제시한 그 간단한 화면은 역설적으로 풍부한 해석의 단초가 된다. 최민화의 분홍회화가 압축적인 이미지로 구성되었음에도 관객들의 감성적 접근을 폭넓게 유도하고 또 정치적 화두를 띌 수 있는 이유다. ● 최민화 그림의 종적인 축은 그의 원형적 입장으로부터 기억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연속되며 확대되어지는 서사구조다. 원형적 정서는 최민화의 태생과 가족사가 한국현대사와 얽혀서 교집합·합집합 되는 현상에 의해 발생해서 그에게 그대로 집적된 거다. 참고로 그의 첫 개인전 '들풀 1985'전의 후기를 옮겨보자.

 

최민화_지옥에서 보낸 한 철 A time in the Hell_캔버스에 유채_71.7×91.9cm_1990
 

"내가 태어난 1954년 7월 24일, 막 전쟁의 화염이 가라앉고 메케한 연기와 숱한 화약의 냄새가 어디론가 꺼져버린 때, 한반도의 심장에서 10년, 또 10년, 그리고 또 10년. - 내가 본 것은 아름다운 전원도, 황폐한 농촌도, 물새 우는 바다도 아니다. 내가 본 것은 가난한 변두리와 타락해 가는 도시, 인왕산의 문둥이와 꽃 전차, 치마바위 뒤의 남녀와 현미경이 있는 산부인과, 4월 혁명과 아스팔트에 고인 봄비, 그리고 개나리꽃을 본뜬 명찰과 재건체조 - 야구를 하던 인천의 호박밭 공터와 입시지옥, 한일협정 반대데모와 미도극장에 나온 창녀들, 정릉의 셋집, 몰래 피우던 담배와 유신독재정권 - 변산의 별과 인상파 화집, 미술대학의 초췌한 모습과 긴급조치, 졸업, 방종, 제대, 취직, 실연, 도미, 방황, 방황 그리고 또 방황, 그리고 충격 - 그 거친 들판에서 내가 본 것은 비농비도(非農非都)이며, 아수라(阿修羅), 살려는 자와 죽으려는 자, 싸우는 자와 싸우자는 자, 삶과 죽음, 그 극단의 갈라짐, 찢어져 너풀대는 것들의 틈바구니였다. 전쟁으로 인해 남편과 아내를 잃은 두 남녀가 만나 이룬 새 가정이 나의 부모님이시다. 나의 탄생을 이룬 외피로서의 가정과 어머님 아버님의 뼈아픈 내력은 나의 요람이다. 나는 태어나기 전부터 분열과 단절된 모든 현상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와 거부의 의식을 지닌 것이다. 그것은 결코 나의 전유물도 또한 자랑도 못난 점도 아니라는 사실(史實)에서 자신 있게 명백히 밝혀두고자 한다. 내가 본 것은 서로 모순되고 배반하는 양 극단의 것들이지만 그러나 눈과 눈의 사이가 있듯이, 그것들은 분단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온전히 볼 수 있는 자의 것이다. 흙탕 속의 꽃이요, 그려질 수 있는 그림의 떡이며, 동시에 떡의 그림으로 되살아 나는 정신의 양식이다. 내가 본 것이요 나의 넋에 다름 아니다." ● 한국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부모님의 재혼, 자신의 출생, 통제 문화가 일상화된 학교로부터의 일탈, 낭만적 미술학도가 겪은 거세된 자유와 속박으로부터의 반항과 떠돎 등. 마침내는 유신과 긴급조치를 겪으면서 형성된 정치적 부조리에 대한 비판성은 80년 광주항쟁을 통해 행동하는 미술로 결정화된다. 그리고 이는 최민화가 80년대 내내 다양한 장르(판화, 만화, 일러스트 등)와 매체의 확산으로 군부정권에 저항하는 미술론을 표방하게 한다. ● 이산을 겪은 가족의 구성원인 젊은 작가가 분단에 대해 자신의 실존과 함께 역사적 각성을 하게 되는 이 과정이, 삶에 대한 태도의 뿌리가 되어 그의 세계관에 중요하게 작용했을 터였다. 전쟁으로 인해 비로소 자신이 존재할 수 있었다는 생각은 그에게 자신의 태생에 대한 복합적인 그늘을 드리웠을 거다. 또 그런 의식/무의식적 심리로부터 한국현대사를 조망하는 시점과 판단의 방향도 성립되었을 것이다. 이 역사와의 부대낌에 의해 의식 깊은 곳에 착종된 원형은 최민화의 타고난 반항아적 기질과 함께, 60년대 청춘기와 70년대 청년기의 숨 막히는 공기와 마찰하며 고양된 비판의식으로 그의 삶과 미술을 일체화하려는 작업관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으리라 여겨진다. 이는 최민화 개인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직후 출생한 세대 상당수가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경험이기도 하다. 최민화의 회화가 관객들과의 공감의 폭을 쉽게 넓게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세대의 일반적인 일상을 관통하는 삶을 살아온 작가가 전하는 생생한 논픽션의 울림 때문이었을 게다. ● 횡적인 축은 그런 내러티브를 엮어내는 회화형식이다. 따라서 이후에 전개되는 작업들이 그의 삶의 이력과 같은 내용과 모습으로 진행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작가 개인적인 내밀함이 동시대의 사회적인 문제로 확장되고, 이것이 다시 정치적으로 맥락화 되는 것 말이다. 제유(提喩). 개별적 삶의 궤적이 사회화되면서 보편성을 띄고, 이게 다시 거대서사로 확장되는 환유(換喩)의 한 갈래. 개인사를 진술하는 최민화의 어법에 당대 사회사가 반영되며, 그로 인해 비판적 주제가 저절로 추출되는 것이라 하겠다. 작가의 독백이 보는 이들에겐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시대성으로 확대 해석되는 메카니즘을 갖는다는 것. 이는 제유뿐만 아니라, 화가로서 최민화가 포착한 시대적 특성을 간단없이 그려내는 그리기방식의 유니크함에서도 기인한다. 당대 청춘들 삶에 대해서 말과 글로 표출하는 것은 그 세대 사람들 상당수가 가능하겠지만, 회화라는 비지시적이고도 비언술적 감성장치를 통해서는 쉽지 않은 일이니까. 분단의 직접적인 장면을 다루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심리와 가족사로 분단과 그 이후의 정치·사회적 속성을 회화로 증명한 경우는 최민화가 거의 유일하다. 시대에 감응하는 독자적인 내용전개와 그리기를 수용하는 그의 회화적 체질과 태도가 그런 결합을 견인한 것이라 하겠다.

 

최민화_기러기 Wild goose_종이에 유채_87×184cm_1990
 

최민화 그림의 형상성, 그 맛과 냄새는 자연스럽다. 작가가 계획적으로 배치하고 직조한 화면은 오히려 어떤 인위도 없는 듯 천연덕스럽기까지 하다. 장황한 드라마나 미사여구보다는 절제된 그의 형상적 언술로 인해 발생하는 담백함이 갖는 미덕이다. 최민화는 그림에 있어서 연출이나 꾸밈없이 - 사실은 소재의 몽타쥬기법에 의한 반복적인 위치 이동과 시공을 넘나드는, 그러면서도 소재의 반복적 구사를 통한 이미지전개로 화면 연출을 하고 있다. 그만큼 그림을 구상하는 데 많은 시도와 에스키스를 하고 있다 - 자신의 체험을 솔직하게 진술한다. 그러나 초현실주의자들이나 여타의 구상작가들이 습관적으로 구사하는 과도한 충격효과를 위한 떼페이즈망이나, 두드러진 주대종소등의 눈에 보이는 자극을 위한 화면배치 등은 배제하고 최대한 간결하게 그 화면을 압축한다. 내용도 사건 묘사나 설명이 아니라 조형요소들인 형태, 색, 붓질, 물질성 등이 축조한 추상화된 상징으로 화면 분위기를 이끌면서 드러낸다. 이런 경우 회화는 지시언어가 아닌 모호한 상징성으로 인해 그 전달과정에서 조형적 맥락이 더 강력하게 증폭하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장면을 제시할 때 해설에 의해서가 아니라 관객의 감성에서 시각적인 미감으로 작용되게끔 한다면, 그 소통효과는 단순한 정보전달을 위한 기호나 심볼보다 훨씬 강력하고, 깊고, 크게, 해석학적으로 작용한다는 뜻이다. ● 그래서 최민화의 회화는 극적인 드라마적 장치나, 과도한 심리적 그로데스크, 엄격하게 계산된 화면이 아니라 일상에서 말하듯이 스스로를 화면에 스윽하고 올려놓는 듯 졸(拙)한 담담함을 띈다. 그것은 연출에 의해서는 불가능하다. 기침을 하거나 침을 뱉듯이 시를 쓰려던 김수영처럼, 작가의 진술은 의식에 붙어있는 주제가 저절로 몸으로 작동하며 발화되는 이미지에 다름 아니다. 당연히 거기엔 그림을 다듬거나, 리터치를 통해서 만들어가는 장인적 속성처럼 화면을 갈고, 닦고, 꾸미며 화장하는 과정은 별로 없다. 즉발적이고 순간적인 직관에 의한 붓의 속도와 몸의 흔적이 캔버스에 이주되어 있을 뿐이다. 조선 민화의 사회성과 서민적 계급정서를 주시하며 만화, 걸개그림, 민화풍의 현대회화 등을 끊임없이 실험하고 작품으로 옮긴 최민화지만, 한편으론 정작 자신의 본류인 회화에 이르면 사대부들의 문인화적인 속성과 유사한 내면적·미적 태도를 취한다. 물론 그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나 소재들이 사대부들의 관념과는 다른 현실에 개입하는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 이런 특성들을 배후에 두고 최민화가 회화를 통해서 찾고자 하는 이미지의 핵심으로 가보자. 최민화가 원하는 회화의 종횡을 아우르는 가장 중요한 기제는 바로 '분홍'이다. 분홍은 최민화에게 있어서 단순히 색채의 영역이 아니라 그 자체로 최민화가 천착하는 서정의 세계이자 동시에 서사적 주제를 갈음하는 미적 지향점이다. 아름다움/슬픔, 부드러움/저항, 일상성/낯섦, 경박함/품위, 개별/전체 등 상호 대립적 속성들이 분홍에 의해 동시에 용융된다. 이는 변혁기 작가개인에게 보장된 미적 발언과 정치적 혁명을 담보할 수 있는 서민계급의 아름답고 질긴 생명력의 전형성을 최민화가 순수회화를 통해 확보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그 매력적인 분홍엔 최민화 고유의 심미적인 진술과 보편적 주제가 결합되었고, 또한 그것은 예술지상주의자이자 참여주의자인 그가 지금까지 탐닉하는 미감이자 그의 꾸밈없는 민낯으로 열어젖힌 통일된 의식의 세계이기도 하다.

 

최민화_분홍-기타 Pink-A Guitar_캔버스에 유채_91×116.8cm_1990
 

"우리는 흰색과 붉은색만을 생각한 것에 불과하다. 나는 분홍의 그 방대한 범주를 제시하고자 한다."- 작가노트 ● 이 작가노트처럼 최민화의 분홍은 다채로웠던 삶의 원형과 사회적 이력을 통과시키는 프리즘이자 그림을 구축하는 토대로써의 질료이기도 하다. 기억과 현실을 교직할 때 발생하는 쾌감과 고통을 그림에다가 미적으로 정착시키려는 작가적 욕망의 도구이기도 하고. 특히 1980년대와 90년대 중반까지의 시대정신인 반군부독재 민주화 운동과 궤를 같이 하면서도, 민주화항쟁의 대오에서 대학생과 같은 지식인층이 아니어서 주목받지 못하던 이웃인 부랑아·양아치·기타 청춘들을 통해 민주화운동의 탈엘리트성을 탈계급적 미감으로 확보하려던 최민화의 의도와 태도가 결정화된 색이기도 했다. 또 거기에서의 분홍은 세상의 미세한 맛을 감지하는 후각이고, 피부로 마찰하면서 느끼는 촉각이기도 했다. 생래적인 그의 미적 감수성과 결합한 세계관은 분홍이라는 색의 기존 개념을, 중층적인 느낌과 해석이 가능한 영역으로 이전시켰다. 분홍의 '전치(轉置)적 화용론(話用論)'이라고 할까. 작가의 의도와 그리는 과정에 따라서 분홍은 그것을 보는 이들에겐 결 고운 연분홍치마가 되기도, 변두리 술 취한 양아치의 신명과 애환이 되기도, 폭거에 분노하고 싸우는 청년의 뜨거움이 되기도 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분홍은 최민화의 회화적 페르소나인 셈이다. ● 다층적인 내용의 전개와 더불어 실제로 최민화가 물리적으로 구사하는 분홍색의 스펙트럼도 넓다. 핑크로부터 버밀리언, 옐로, 옐로오커, 마젠타, 화이트, 번트엄버까지를 두루 넘나든다. 분홍색모노톤(엄밀하게는 모노톤이 아니다)의 다채로운 구사는 지나간 시간을 감성적으로 아련하게 자극하고 그 상황을 환기한다. 그렇지만 부드러우나 야성적인 분홍의 '결'과 '톤'은 결코 허전하고 아름다운 추억의 영역에 머무르지만은 않는다. 한국현대사가 소급된 바탕위에서 분홍 에피소드들은 온당치 못한 독재 권력이 청춘과 청년들에게 가한 정신적 린치와 통증들로 환원되고, 다시 반항적 낭만과 냉철한 혁명에의 갈망으로 확산된다. ● 팔레트의 안료가 캔버스의 색과 구조로 진화하며 발화하는 페인팅의 통로가 여러 겹일 때, 우리는 그 붓의 운행과 흔적을 통해서 역전의 다양한 미적 쾌감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건조하게 보자면 화포 위에 접착된 물감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분홍은 그의 무의식 깊숙한 곳에 층층이 저장되어 있었던 도저한 경험들이 그 겹을 벗으면서 화면 위에 하나의 장면, 이미지, 발언으로 압축되어 정착된 음소(音素)이자 발성이었다. 그만큼 90년대 이후 최민화의 회화는 분홍과 불가분의 관계를 구축한다. 그러면 대략 1989~1999, 약 10여 년에 걸쳐서 진행된 분홍의 유형과, 그 이후 2000년대 회색으로 그려낸 청춘을 살펴보자. 그것은 대략 몇 가지로 나뉜다. - 성장기 개인사와 가족사를 중심으로 작가의 고유한 정서를 그려낸 '기러기', '분홍-기타'와 '붉은 갈대'와 같은 소회형 서정 시리즈. - 가투에 참가한 부랑아, 양아치 등을 통해 저항의 당위성과 민중성을 청춘의 신명으로 확인하는 '양아치', '공터', '개 같은 내 인생'과 같은 작품들. - 기성세대가 된 자신을 분홍이란 프리즘을 통해서 바라보며, 그 고유한 개인적/사회적 성찰을 담은 '지옥에서 보낸 한 철', '진흙 속 연꽃', '두 개의 무덤과 스무 개의 나', '하얀 유원지' 같은 일련의 그림들. - 작가자신과 타자들과의 관계항을 포착한 '부랑공간'과 같은 공동체적 입장. - 80년대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거역하는 역사적 현장을 그린 '분홍 아스팔트', '신세계 전투' 같은 투쟁 풍경. - 2000년대 이후, 휴지기가 된 미완의 혁명과 함께 기성세대가 된 자신이 후기산업사회의 젊음들을 애틋한 시선으로 담아낸 '회색청춘' 연작들.

 

최민화_하얀 기타 The white guitar_캔버스에 유채_112.1×145.5cm_1994
 

분홍은 최민화 본인의 과거로부터, 내면에의 성찰, 90년대 당시의 비민주적 상황, 민주화를 위한 사회운동, 데모에 참여한 소외된 젊은 세대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이르기까지 그 간극이 넓다. 기록이자 일기고, 회한이자 바램이고, 저항이자 성찰이다. 자아와 타자가 통일되는 교감이자, 시대현실에 대한 공감을 이루어내는 실천적 스탠스이기도 하다. 그 정치적인 미술행위는 타인의 영혼을 움직이는 것으로, 미술이 할 수 있는 일종의 문화적 '혁명'이다. 이때 최민화에게 있어서 미술은 작업의 소재이자 주제인 청춘과 혁명 사이의 간극을 "두 눈 사이 거리"만큼 좁히며 자신 내면의 분단을 극복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두 눈 사이가 아무리 밀접해도 그 거리만큼 사물은 미세하게 달리 보이듯, 혁명에 이르는 역사성도 결코 단순한 것만은 아니었다. 작지 않은 괴리와 아픔이 여전히 그 과정에서 작가의 무의식을 통해서 묻어나고 있다. 비록 미완이었지만 전두환 정권의 폭압을 꺾은 87년 6월 혁명 이후의 체제를 통해서 확보한 작은 민주화가 진행되던 시절에, 그때를 회상하며 그린 '지옥에서 보낸 한 철'(1990)과 같은 작품을 통해서 '부랑'(1976)시절의 트라우마를 극복한 듯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쑥스럽게 웃고 있는 살아남은 자의 모습은, 다소간의 여유를 띄지만, 여전히 청춘기 억압에 대한 슬픔과 두려움을 안고 있다. 어색하고 겸연쩍은 표정은 상흔이 지워지지 않는 아픈 회환의 잔영임을 역설적으로(그리고 복합적으로)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 그래서일까, 혁명은 기억의 두려움으로부터 시작하는 것 같다. 부조리한 과거와 현재가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도 지금처럼 경화된다는 건 위험한 일이다. 그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인간은 고착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탈출하며 자유를 추구한다. 설렘과 기대가 거기에 있다. 마찬가지로 강력한 현실적 제약에 의한 좌절과 불안도 동시에 있다. 최민화에게 있어서 분홍은 그런 제약으로부터 극복을 향한 의지와 힘을 송두리째 표상하는 살아있음의 아름다움, 아름다워서 슬픈 삶을 승리로 전환시키는 미적 토대인 셈이다.

 

 

최민화_분홍아스팔트 Pink asphalt_캔버스에 유채_136.2×500cm_1992
 

"분홍은 색채의 승리를 의미한다." -작가노트 ● 맞다. 적어도 최민화에게 있어서 분홍은 회화의 타 요소들에 대한 어떤 것보다 우선했다. 청춘과 혁명을 서술하는 서정적 미디어로도, 투쟁심을 길어 올리는 야성적 도구로도, 마침내 작가가 이르고자 하는 세계에 대한 이미지를 기술하는 방식 가운데서도 가장 두드러진 인식적 기의이자 기표였던 셈이다. ● 사실 최민화의 작품들은 그 내용과 형식의 너비가 넓고 간단치 않다. 최민화는 자신을 작업 대상으로 삼기 위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총체적으로 인식하는 지점에서 자신의 미술론을 출발시켰다. 20세기라는 시간대를 아우르는 세계사적인 접근으로 국가 간 힘의 역학과, 냉전, 한반도의 상황과 자신의 심리에 이르기까지의 모순된 관계를 종합적으로 통찰하는 입장에서였다. 최민화는 20세기를 제 1세계의 제3세계에 대한 물적·이념적 침탈의 제국주의 이념과, 거기에 대하여 민중들이 항거하는 역사로 보았다. 그러니까 그가 태어나고 자란 한반도의 1950년대 이후는 그 이전과 함께 그런 제국주의의 대리권력이 지배하는 역사였고, 그런 영향은 자신의 태생과 성장, 일상, 작가로서의 개인사까지에도 영향을 미치는 구조라는 것이다. 20세기 전반을 아우르는 이 통시적이고 총체적인 시점(時點)과 시점(視點)에서 자기 내면과의 불가분의 관계에 대한 반성적 통찰로부터 작업을 시작한 것이었고, 그것은 지금까지 계속되어왔다. ● 앞에서 거론한 바, 최민화의 이러한 고찰과 사유들에서 나온 작업들은 때로는 현장투쟁수단의 미디어로 구사되었고, 또 어떤 경우에는 섬세한 기분을 토로하는 회화로 드러났다. 80년대 미술운동에서 최민화의 이름이 여러 주요한 지점마다 거론되는 근거다. 그것들을 일별해보자면, 지금 논하고 있는 분홍연작 이외에도 현대미술의 거장이라 불리는 작가들의 어법과 발성법을 패러디하고 그 신화를 비틀면서 자신의 20세기적 비판성을 길어 올리는 '20세기 회화의 추억' 연작. 전지구적 세계사를 비판적으로 조망하는 관점에서 제국주의와 제3계의 폭력적 역학관계를 보도사진들의 차용과 드로잉을 통한 비극미로 풀어낸 '20세기' 연작. 광고 브로마이드사진 위에 가하는 즉흥적 드로잉으로 자본주의적 시각권력을 해체시키는 '분홍-브로마이드' 연작. 역사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우리의 고대 상고사를 고찰한 '상고사' 연작. 80년대 시위현장에서 직접적인 선전선동을 하던 '그대 뜬 눈으로'를 위시한 여타의 걸개 및 현장작업들. 87년 6월 항쟁기의 저항을 서사적으로 집약해서 형상화한 '6월' 연작. 전통적인 민화형식을 재해석하며 새로운 형식의 역사화를 시도한 '검악'과 같은 회화적 실험. 기타 만화작업… 등, 다채롭다. 그러니까 최민화가 자주 갈파하던, 서구 열강들의 '20세기 전 지구적 질서'인 자본과 전쟁의 대리 실험장인 한반도에서 미술이 할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인 저항을 다양한 장르와 매체를 통해서 실험했던 거라고 하겠다.

 

최민화_두개의 무덤과 스무개의 나 Two graves & Twenty i_캔버스에 유채_142×360cm_1999
 

분홍 연작은 그 와중에서 최민화의 내면서사가 섬세하고 민감하게 캔버스로 집중된 감성적인 회화다. 그는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가장 상징적이고도 핵심적 요소인 분홍으로 증명해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한 폭의 그림은 독재와 제국주의라는 적 단 한 명에게조차도 치명상은커녕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는 무기질의 캔버스와 안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한 폭의 그림이 대중들과의 공유를 통해 동시대적 발언으로 확산되면, 그것은 투쟁 전체의 흐름을 일거에 고양시킬 수 있는 감동이라는 정서적 무기가 된다. 그런 공감을 이루는 무기를 창출하는 건 압제받는 나라의 화가가 꾸는 꿈이다. 최민화는 분홍이란 색채를 통해서 그런 혁명을 꿈꾸었다. 꿈을 꾸는 존재가 작가 아니던가. 또 그 꿈을 그림으로 실행하는 이가 화가이고. 물리적으로는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는 무용의 그림이 정치적 당위성을 얻는 건 꿈이라는 일류젼을 넘어서며 소통과정에서 불현듯 발현하는 역동성 때문이다. 구호와 투쟁의 이면에 작가 자신만의 고유한 체험과 세계에 대한 통찰이 바탕을 구성하고 있을 때라야 가능한 대중과의 진심어린 소통효과 말이다. 이는 작가의 혈관으로부터 나오는 주체적 표현성이 객관적인 현실과의 접점에서 총체성을 확보할 때 강력한 시각적 능기가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최민화의 분홍회화가 한국현대형상회화를 거론할 때 주요하게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관객들의 가슴에서 동시대 현실과 개별적 서정이 혼연일체를 이루며 열린 감성·의식·인식으로 소통되는 삶의 무기인 미술로써 말이다. ● 올해 회갑을 맞았던 최민화는 여전히 꿈을 꾼다. 40년 가까운 작가활동 내내 자신을 긴장시키며 단 한 번도 작업주제와 작업관에서 벗어나지 않는 태도로 꿈을 시각화 했다. 그에겐 그림이 꿈이자 현실이다. 꿈을 현실로 대체하려 그림에서 모진 현실을 꿈으로 전환한다. 근래엔 분홍의 추억이 지나간 냉랭한 자리에, 낭만이 소거된 오늘의 젊음을 바라보며 그리고 있다. 이른바 '회색청춘' 연작이다. 무채색조지만 아련한 연민을 담은 회색은 분홍의 연장선상에 있고, 최민화도 새로운 방식의 또 다른 회화 언어를 찾기 위해 머무르지 않고 치뜬 눈으로 그 회색의 도시공간을 헤매고 있다. 여전히 그는 '청춘'과 '혁명' 사이, 그 역동적 심층공간에서 머물지 못한 채 '부랑'하며 색으로 노래하고 행동하는 전사이자 작가다. 또 그에게 있어 분홍은 작가적 삶의 이력을 통해 승리한 회화임에 분명하다. 거기에서 아련하게 노래가 들린다. 로망과 리얼을 넘나드는 포크락 스타일로 편곡된 통키타 노랫소리가. ■ 김진하

 

 

Vol.20141230a | 분홍-최민화 / 지은이_김진하, 백지숙 / 도서출판 나무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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