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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아트가이드 7월호 스크랩]

 

 

 



[스크랩] 서울아트가이드 4월호

 

 

 

 


책을 내게 되면 예상치 못한 경험을 할 때도 있다. 오랫만에 학회에서 만난 친구가 내 책을 읽었다는 것이다. 부동산 학과에서 일하는 그 친구에게 어떻게 읽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학생이 선물로 주었다는 것이다. 부동산 업체를 운영하며 학교를 다니는 자신의 늙은 학생이 내 책 100권을 사서 고객들에게 선물로 나누어주면서 자기도 한 권 주었다는 것이다. 그 인연으로 부동산학과 학생들과 함께 북촌을 가게 되었다.

 

 

한성부지도, 1901년경 제작
 

‘북촌(北村)’, 옛 서울의 북쪽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남쪽에 있는 마을은 남촌이 된다. 어디가 북쪽이고 어디가 남쪽인가? 조선시대 한양 도성 안에서 북쪽과 남쪽이란 말이다. 청계천과 종로가 도성 안을 반으로 나눈다. 종로 위쪽이 북촌, 청계천 아래쪽이 남촌이 된다.

인사동에서 점심을 함께 먹고 북촌 한옥마을로 향한다. 안동별궁이었던 풍문여고를 지나 감고당길로 접어들어 처음으로 멈추어 선 곳은 덕성여고 앞. ‘감고당 터’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가 살 던 곳이다.

 

덕성여고 정문 앞에 있는 감고당터 표지석
 

드라마에서 보면 장희빈에게 밀려서 초라하게 유폐된 것으로 그려지지만 창덕궁 바로 옆이다. 이야기를 중심으로 장소를 묘사하게 되면 초라한 곳으로 그릴 수 밖에 없다. 장소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면 달라진다. 창덕궁 옆 넓은 집터에 살았던 것이다.

아기자기한 작은 가게들이 몰려 있는 감고당길을 빠져나와 작은 사거리에서 만나는 곳이 정독도서관. ‘성삼문 선생 살던 곳’, ‘중등교육 발상지’, ‘화기도감 터’, ‘동아일보 창간 사옥 터’ 표지석들이 세워져 있다.

 

정독도서관 앞.

 

한양에서 제일 좋은 곳에는 누가 살겠는가? 임금이 산다. 경복궁, 창덕궁 등의 궁궐이 제일 좋은 자리다. 그 다음 좋은 곳은 누가 살겠는가? 대군이 산다. 경희궁과 덕수궁이 대군이 살던 곳이다. 그 다음 좋은 곳에 대신이 산다. 성삼문의 집터는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위치한다

 

정독도서관이 있는 곳은 조선시대 성삼문 선생이 살았던 곳이라 한다.
 

북촌과 남촌의 입지 비교를 해 보자. 좋은 집터는 해가 잘 드는 곳이다. 아파트에서도 남향을 선호한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북촌은 남향이다. 이에 비해 남산 기슭에 자리한 남촌은 북향이다. 북촌에는 노론 지배층이 살았고, 남촌에는 조선후기 벼슬하기 힘들었던 남인들이 살았다. 성삼문의 집이었던 이곳은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의 집이기도 했다.

 

정독도서관 자리에는 많은 역사가 쌓여 있다. 이곳에는 경기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사가기 전까지 있었다.

 

‘중등교육 발상지’라는 표지석이 선 것은 이곳에 경기고등학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서울에서 강남의 8학군이 유명하지만 소위 명문고라고 불렸던 고등학교들은 강북에 있었다. 서울고등학교는 경희궁 자리에 있었다. 허허벌판이었던 강남이 서울에 편입되고 새로운 시가지로 개발되는데 학교가 없으면 곤란한 일, 그래서 정부에서 명문고들을 강남으로 보내게 된 것이다.


 

정독도서관이 있는 동네는 화동(花洞)이다. 그래서 경기고 출신들은 학교가 강남으로 이사가기 전 시대를 '화동 경기고 시절'이라고 부른다.

 

 

도시 개발 과정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것은 흐름을 보는 것이다. 도시사의 이해도 중심지의 변화과정을 보는 것이다.

청계천과 종로의 북쪽, 북촌이 조선시대 중심지였다. 일제 강점기가 되면서 일본인들은 조선의 중심부 북촌이 아니라 남촌에 시가지를 조성하게 된다. 조선에서 일제강점기로 바뀌면서 시가지는 북촌에서 남촌으로 청계천을 넘어가게 된다. 1960년대, 1970년대 이후에 한강을 넘어 강북에서 강남으로 중심지가 이동하게 된다.

한옥마을을 구경하기 위해 북촌을 찾게 되는데 조선시대 한옥이 북촌에만 있었겠는가. 도성 안 전부에 한옥이 있었을 터. 종로에도 남촌에도 있었겠지만,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도시 개발 과정에 북촌이 소외된 결과가 아니겠는가. 지금이야 한옥의 가치를 이야기하지만 지금의 북촌은 보존하려고 하여 보존된 게 아닌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북촌한옥마을의 집들이 조선시대 한옥으로 생각하는 점이다. 큰 집들을 일제 강점기 무렵에 쪼개어 여러 집으로 나눠 지은 집들이다. 조선시대 집들은 지방답사 때 볼 수 있는 고택들이고 북촌과 전주의 한옥마을은 소위 집장사들이 지은 집들이다. 좁은 마당을 가진 도시형 한옥인 셈이다.

 

 코리아 목욕탕은 건물 자체의 역사적 의미는 크지 않지만 북촌의 주요 랜드마크다. 이곳 주변에서 도성 안쪽의 반을 조망할 수 있다.

 

정독도서관을 지나 골목을 지나면 내가 사랑하는 이정표 ‘코리아 목욕탕’이 나온다. 목욕탕 이름이 이 정도는 되어야지. 서울에서 목욕탕이 생기던 초창기의 목욕탕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한 때는 다이어트센터였다가 지금은 게스트하우스로 쓰인다.

코리아 목욕탕 아래쪽에서는 반드시 카메라를 꺼내시길 바란다. 한양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포인트이다. 가장 가까이 보이는 건물은 경복궁 안의 국립민속박물관이다. 북악산이 보이고 그 왼쪽으로 인왕산이 보인다. 남쪽을 보면 화신백화점 자리에 서 있는 구멍 뚫린 건물, 보신각 앞의 종로타워가 보인다. 그 뒤편으로는 남산의 서울타워가 보인다. 이 자리는 한양 도성의 절반이 보이는 장소이다. 북악산, 인왕산, 남산으로 연결되는 성곽 라인이 보이는 장소이다

 

코리아 목욕탕 주변에서 본 북악산(오른쪽산), 인왕산 전망. 사진 왼쪽 중간 기와지붕이 청와대 춘추관이다.

 

코리아 목욕탕 앞에 보이는 까만 기와집은 청와대 춘추관이다. 춘추관 뒤쪽에 보이는 낮은 능선 지점이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의 고개, 창의문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 68년 1.21 청와대 습격사건 때 순직한 최규식 경무관 동상과 청계천 발원지 표지석이 있다.

이 장소에서 배울 수 있는 점은 여러 가지다. 북악산과 인왕산 라인을 보며 도성이 분지였음을 알 수 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데로 흐른다. 백악 기슭에서 청계천이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흐른다는 점, 인왕산의 아래가 명승지임을 알 수 있다.

하나 더. 인왕산 왼쪽으로 산이 하나 더 보인다. 무악(안산)이다. 인왕산과 무악 산줄기가 이 중으로 겹쳐 있다. 그 사이가 중국 사신이 다니는 통로인 의주대로이다. 이곳은 직접 꼭 가보아야 한다.

이 정도 보았으면 코리아목욕탕에서 북쪽으로 좀 더 가서 북한산에서 나온 맥이 팔각정과 북악산으로 연결되는 맥을 좀 더 보아도 좋고 가회동 31번지 일대의 한옥을 구경해도 좋다.

가회동 일대 한옥마을은 위에서 내려다 보아도 좋고 골목을 걸어다니며 보아도 좋다. 빨간 모자를 쓴 관광안내원이 있는 곳이 관전 포인트이다.

북촌 한옥마을 골목길에서 사진을 찍는 젊은 관광객들. 요즘은 셀카봉이 대세인것 같다.
 

춥고 불편한 집이라는 평가에서 오래된 마을과 옛 집이라는 관점으로 북촌한옥마을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 주말이 아니더라도 정말 많은 사람들이 온다. 우리말과 더불어 중국어, 일본어, 영어를 한꺼번에 들을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사진찍기 좋은 장소에는 셀카봉까지 팔고 있다.

한옥을 구경하고 골목을 빠져 나오면 돈미약국이 나온다. 남쪽으로 가서 헌법재판소의 백송 아래 잠시 쉬며 북촌 답사를 마무리한다. 이제 안국역으로 가서 전철을 타고 집으로 간다.

 

[Chosun Biz 스크랩]

 

 

 

 


 

 

 

 


'감고당 길'의 달달한 행복


[에이블뉴스]
 
  서울의 북촌으로 가는 길은 여러 방향이 있다. 북 인사동 광장에서 풍문여고 골목으로 들어서면 북촌으로 가는 감고당 길이 시작된다. 감고당 길엔 달달한 맛과 멋이 조화를 이룬다.

이 길은 조선시대 명문가들이 살았던 부촌이었다. 올망조망 한옥들이 지붕을 맞댄 감고당 길에서는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여행객의 발길을 붙잡는다. '감고당 길'이라는 이름은 숙종 임금이 인현왕후 민 씨 친정인 장모를 위해서 지어준 집인 감고당에서 비롯됐다.

조선시대 감고당 길 주변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는 지리적 특징 때문에 권세가와 부유층이 많이 살았다.

당시만 해도 30칸이 넘는 널찍한 한옥들이 즐비했고, 대문은 말과 가마가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한옥 담벼락에 그려진 화려한 꽃 그림은 부촌의 상징이 돼 서민들에겐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현재 북촌의 집들은 조선시대와는 달리 처마가 서로 닿을 정도로 좁고 다닥다닥 붙어있다. 일제 강점기부터 이 곳에 살던 기득권층이 몰락하면서 한옥을 팔기 시작했다.

고래등 같은 한옥을 ‘집장사’들이 사들이면서 소규모 개량 한옥들로 탈바꿈 해 현재의 모습이 생긴 것이다.

지금은 덕성여고 정문 앞에 감고당 터가 있다는 표지석만 남아 당시 권세가들의 몰락을 작아진 한옥이 대신한다.

담벼락 아래 달고나 아저씨는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팔 년 전부터 이 곳에서 달달한 행복을 팔고 있다. 그래서 인지 감고당길 달고나는 유난히 달달하고 맛이 좋다.

별모양 하트모양대로 달고나를 뽑으면 덤으로 한 개 더 준다며 너스레를 떠는 아저씨의 웃음은 감고당 길을 훤히 밝힌다.

어린 시절 학교 앞 달고나는 어린 나에게 얼마나 감미롭고 날큰하던지, 그 앞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추억의 달고나는 지금도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조선의 역사와 근대, 현대가 공존하는 거리에서.

감고당 길의 명품 볼거리는 또 있다. 인력거는 일제 강점기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나 영화에서만 본 필름 속 박제된 물건이었다. 하지만 북촌에선 쉽게 볼 수 있다.

젊은 청년이 끄는 인력거는 북촌 여행과 잘 어울려 북촌 일대를 인력거를 타고 둘러 볼 수 있어서 외국인 여행객에게 특히나 인기가 많다.

최근 북촌에는 국내외 젊은 여행객과 연인들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작고 소박한 카페, 떡볶이집, 옷가게, 분식집이 많이 생겼고, 떡볶이나 튀김, 호떡을 사먹기 위해 골목들마다 길게 줄 서 있는 모습은 감고당길 풍경이 된 지 오래다.

예스러움과 조용한 분위기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토박이들의 우려도 있지만 감고당길이 북촌여행에서 새롭게 각광받는 길임에는 틀림없다.

감고당길 북쪽 끝 북촌로 5길과 만나는 지점에는 정독도서관도 있다. 근대 건축 등록문화재인 옛 경기고등학교 건물을 사용하는 정독도서관은 북촌여행의 또 다른 면모이다.

서쪽 소격동에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도 개관해 이 일대를 찾는 관광객의 지적 사치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고, 서울관 주변은 소규모 갤러리들이 밀집해 있어 문화 예술의 중심지로 주목 받고 있다.

감고당 길을 뒤로 하고 북촌 전망대로 발길을 이어간다. 전망대로 가는 골목은 고즈넉하다. 쉬어갈 수 있는 카페는 이 고즈넉한 골목길을 더욱 운치 있게 한다.

골목길 초입 카페 참새 방앗간은 북촌 8경 가는 길목에 꼭 들러야 하는 코스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처럼, 북촌에 왔으니 참새가 방앗간 카페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북촌 여행 중 꼭 들러야 하는 곳.

이 곳은 북촌 여행객들이 들러 쥔장이 직접 내려준 커피를 맛보며 잠시 숨을 고르는 곳이기도 하다. 재미있고 독특한 이름만큼 커피 맛도 수준급인데다 맑고 진한 커피향기는 코끝을 간질인다.

한옥을 개조해서 만든 카페는 한옥과 커피의 조화가 잘 어우러져 커피의 맛과 멋의 새로운 발견을 느낄 수 있다.

참새 방앗간의 커피를 마시면 생각나는 광고가 떠오른다.
"저기 잠깐만요, 융합이란 뭘까요?"
북촌여행에서 융합이란 바로 “참새 방앗간” 이라 답하고 싶다.

커피향기에 취해 걷다보면 어느 새 북촌 전망대가 나온다. 북촌 전망대에선 경복궁과 북악산, 인왕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도심 속에서 복잡하고 정신없던 일상이 먼 풍경과 함께 잠시나마 아름답고 평화로워진다.

광화문 광장과의 세종대왕도 점처럼 작게 보인다. 웅장하게만 느껴졌던 경복궁도 장난감 모형같이 손 안에 쏘옥 들어온다. 북악산을 뒤로 한 경복궁은 궁합이 딱 맞는 연인 같다.

전망대 아래로는 삼청동 카페 골목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으니 눈도 호강한다. 이 곳에선 눈도 쉬어가고 바람도 쉬엄쉬엄 천천히 흐른다. 전망대부터 북촌여행의 하이라이트가 시작된다.

북촌 한옥마을은 전망대에서 가회동 쪽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하지만 이 길은 경사가 가파르니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은 도움을 받아야 한다.

여행의 테마가 다양해져 골목길만 찾는 마니아층도 많다. 그런데 골목을 여행할 때 꼭 지켜야 하는 여행 예의가 있다. 골목을 여행할 때 목소리를 높이거나 큰소리로 감탄하는 것은 골목에 사는 주민들께 큰 민폐를 끼치는 행위다.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 하고 걸음도 도둑처럼 사뿐히 걸어야 한다. 남의 집 대문을 함부로 열거나 집안으로 들어가서도 안 된다. 이 정도만 지키며 골목 여행을 하면 예의 바른 여행자가 될 것이다.

북촌 한옥마을은 골목마다 재미있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갖고 있다. 가장 북촌다운 풍경을 찍을 수 있는 6경과 7경의 풍경은 저 멀리 남산 타워와 한옥이 어우러져서 과거와 현대를 잇는 이음여행의 절경이기도 한 곳이다.

북촌은 8경은 포토존도 있어 이 곳만 찾아 사진을 찍는다면 기억 속 추억을 문신처럼 선명하게 박제할 것이다.

청마의 해 설 명절과 잘 어울리는 북촌 여행으로 명절의 피곤함을 녹여보자.

 

 


북촌이 그리 먼 곳도 아닌데 언젠가는 한 번 가야겠다고 생각만 여러 번. 하필이면 겨울 강추위 소식이 있던 일요일 길을 나섰습니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 그리고 알 수 없는 온갖 외국어를 들으며 사람들로 가득한 인사동을 지나 횡단보도를 건너고 보니 풍문여고 옆 돌담길이 소나무와 잘 어울립니다. 그렇게 시작된 주말 북촌 산책길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풍문여고 옆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니 거리공연 하는 사람들이 있고 작은 장신구 파는 사람도 보입니다. 모두 주말 북촌길가의 풍경입니다.

애초부터 어디 가서 무엇을 보고자 함이 아니었으니 그냥 걷습니다. 그러다 정독도서관 옆 담벼락으로 접어들어 이 그림을 보았습니다. 시멘트 옹벽에 유관순, 윤봉길, 이봉창, 안창호, 김구 선생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마지막에 전통혼례복을 입은 가네코후미코와 박열이 있습니다. 가네코후미코는 1903년에 태어나 1926년까지 살았고 박열은 1902년에 태어나 1974년까지 살았다고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 한 그래피티 작가의 작품입니다.

부부로 묘사되어 있는 이 두 사람을 모르겠습니다. 집에 돌아와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방송에서도 다룬 적이 있고 박열의 고향인 문경에는 그의 기념관까지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두 사람에 대해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학교에서 독립운동가와 그들의 활동에 대해 실이 노가 되도록 듣고 배웠지만 알려주는 것만 외웠을 뿐 그 외의 사실에 대해서는 관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들려주는 것만 듣고 먹여주는 것만 먹는 것으로 만족한 결과입니다.

박열에 관해 알아보다가 70년대와 80년대에 학교에서 왜 단 한 번도 이 사람에 대해 가르치지 않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박열은 무정부주의자였고 한국전쟁 때 납북된 인물입니다. 지독한 반공 정책 가운데 시인 정지용과 같은 납북 문인들의 작품조차 자유롭게 가르치지 못했던 시절이니 학생들에게 납북된 무정부주의자를 가르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박열은 일본 유학 중 21살 때인 1922년 사상적 동지로 가네코후미코를 만나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이듬해 두 사람은 불령사라는 아나키즘 단체를 조직하고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 해 관동대지진이 일어나면서 두 사람은 검거되어 일왕 암살 모의라는 대역죄로 사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이 죄명에 대해서는 유일한 형량이 사형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곧 무기로 감형이 되었습니다.

서로 다른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던 두 사람은 옥중 결혼으로 부부가 되었지만 1926년 가네코후미코는 수감 생활 중 사망했습니다. 자살로 알려져 있지만 `옥중 의문사'했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 후 가네코후미코는 박열의 고향인 문경에 안장되었습니다.

박열은 22년 2개월을 복역하고 조국이 해방된 후 1945년 10월에 석방이 되었습니다. 2차세계대전 이전에 단일 사건으로는 가장 오랜 수감생활이었다고 합니다.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청년은 중년이 되어서야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석 달 뒤인 1946년 초 그는 아나키즘의 자유사상과 개방적 민족주의의 색채를 띤 신조선건설동맹을 결성하고 위원장으로 추대되었습니다. 백범의 뜻에 따라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발굴해 고국으로 송환하기도 했던 그는 백범의 임시정부를 법통으로 삼는 재일조선거류민단을 발족하고 초대 단장으로 추대되었습니다.

그 후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했던 박열은 1948년 단장직에서 물러나 대한민국 정부수립 축전에 초대되어 고국을 방문한 뒤 이듬해 영구귀국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1년 뒤인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된 그는 1974년 평양에서 사망해 그곳에 묻혔습니다. 우리 정부는 1989년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습니다.

박열은 민족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아닌 아나키스트의 입장에서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의 해방을 위해 몸을 바친 인물이었습니다. 가네코후미코는 박열을 만나 1년 쯤 그의 아내로, 사상적 동지로 함께 살았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남과 북에 따로 떨어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근대와 현대의 온갖 풍파를 짊어진 채 살았고 죽어서도 그 짐을 벗지 못하고 있는 부부입니다.

오근식 <건국대병원 홍보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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