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떠나 보내는 지난 28일 저녁 무렵,

시대가 낳은 의인 방동규선생을 모시는 자리가 인사동 '선천집'에서 마련되었다.

송년회와 방동규선생 미수연을 겸한 자리였는데,

늦장 부리다 송년 인사하려다 새해 인사가 되어버렸다.

 

얼마 전 푸른사상맹문재 주간이 방동규선생님을 모시고 저녁 식사나 같이하자고 했다.

장소만 결정되면 한번 뵙고 싶어 했는데, 친구 송년회 선약과 겹쳐버렸다.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할 수 밖에 없었는데, 선천집에는 방동규선생께서 먼저 와 계셨다.

이승철 시인도 보였고, 한 분은 방동규선생의 미수를 축하한다는 글을 붙이고 있었다.

 

송년회가 미수연으로 바뀐 셈인데, 지난 4월 은성식당에서 가진 방동규 선생 미수연이 떠올랐다.

그날 참석하지 못한 분들이 모신 자리기는 하지만, 방동규선생께서 그런 자리를 반기지 않는 것 같았다.

"년 말이라 저녁 식사나 하자기에 나왔는데, 이럴 줄 알았다면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 말씀하셨다.

자신을 내세우는 자리 자체를 싫어하시지만, 일제의 잔재라며 미수란 글자도 못 마땅해 했다.

 

맹문재씨가 나타나서야 송년회 아닌 미수연이 시작되었다.

방동규선생을 비롯하여 맹문재주간과 이승철시인 외는 모르는 분이었다.

맹주간이 강태승씨를 비롯하여 권순자, 고은진주, 유국환, 장우원, 조미희 시인과

고서적 수집가 김병호씨, 그리고 뉴스페이퍼이민우씨를 차례대로 소개했다.

 

맹문재씨는 오래전 선생께서 펴낸 자서전 배추가 돌아왔다1,2권을 챙겨 와 방동규선생을 소개했다.

방배추를 모르면 간첩이다는 말도 한 물간 옛말이었다.

 

방배추란 별명은 어떻게 생겼냐는 첫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하드라마에 버금가는 방배추선생의 이야기보따리가 풀렸다.

시대적 울분을 날린 낭만 주먹 이야기는 막힘이 없었다.

방동규선생은 돌아가신 백기완선생, 소설가 황석영씨와 더불어

조선의 삼대 구라로 불리는 분이 아니던가?

 

방배추의 주먹도 좋고 구라도 좋지만, 무엇보다 의인이라는 것이다.

구순을 눈앞에 둔 지금까지 일손을 놓지 않는데,

꾸준한 근육운동으로 몸 관리까지 하고 계신다.

 

그리고 이 추운 날, 윤석열 정권 규탄하는 토요 집회에도 빠지지 않으신다.

다들 눈치나 살피는 어른들이라, 못 볼 것을 보아도 꿀 먹은 벙어리다.

진정한 어른이 없는 시대라 방동규선생이 더 돋보이는 것이다.

 

고은시인이 만인보에 쓴 방동규선생에 대한 시를 한 번 들어보자.

되지 못한 세상에서는 / 꼭 엉뚱하기는 / 천장에 매달린 / 대들보 같은 사람이 있어야 했다

힘깨나 쓰지만 힘자랑보다 / 입심 좋아 / 그 입심에 술자리 눈과 귀 집중하다가 /

술자리 입들 짝 벌어져 / / 와 웃음 터진다.”

 

새해에는 다들 웃고 삽시다.

그리고 선생님처럼 건강하고 의롭게 삽시다.

방동규 선생님의 만수무강을 빕니다.

 

사진, / 조문호

 

 

시대가 낳은 의인 방동규선생의 미수연이

지난23일 정오 무렵, 조계사 옆 '은성한정식'에서 열렸다.

 

지난해 통일뉴스창간 21주년을 맞은 시상식에서

유튜브 채널의 첫발을 떼게 한 방배추 유튜브팀이 특별공로상을 수상함에 따라, 

'통일뉴스'에서 방동규선생 미수연을 마련한 것 같았다.

 

올해로 88세를 맞이한 방동규선생 미수연에는 사모님 이신자여사,

딸 방그레와 방시레 등 가족을 비롯하여 이계환, 구중서, 염무웅, 김승환, 백낙청,

정지창, 유인태, 주재환, 신학철, 김정헌, 민정기, 명진스님, 김명성, 최원일, 임진택,

장순향, 장봉숙, 정영신, 김지영, 채원희, 경복궁 재직동료 등 친구와 후배 

30여명이 참석하여 선생의 생신을 축하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소리꾼 임진택씨가 농부가와 사철가를 부르자

춤꾼 장순향씨가 나서서 너울 춤을 추는 등, 잔치가 흥겨웠다.

 

방동규 선생께서는 어린이들이 부르는 동요를 불러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으나,

사모님 이신자여사의 노래솜씨는 보통이 아니었다.

 

아마 젊은 시절 성악가로 활동하셨는지,

아직까지 프로 못지않은 훌륭한 솜씨를 보여주었다.

 

명진스님은 스님답지 않게 정태춘의 '떠나가는 배'를 부르기도 했다.

 

미수연에 참석한 분들이 차례대로 축하말씀이나 선생의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어찌나 기구한 사연이 많은지, 이야기 듣느라 음식을 먹지 못할 지경이었다.

 

재야운동가 고 백기완선생, 소설가 황석영씨와 더불어 조선의 삼대 구라로 불리는

방동규선생은 입심뿐 아니라 주먹도 보통주먹이 아니다.

 

되지 못한 세상에서는 / 꼭 엉뚱하기는 / 천장에 매달린 / 대들보 같은 사람이 있어야 했다 /

힘깨나 쓰지만 힘자랑보다 / 입심 좋아 / 그 입심에 술자리 눈과 귀 집중하다가 /

술자리 입들 짝 벌어져 / / 와 웃음 터진다.”

 

20여년 전에 고은 시인의 '만인보'에서 방동규선생을 묘사한 시다.

땅에 뿌리 박고 천장을 받치고 있어야 할 대들보가 천장에 매달린 형국이라니,

방선생의 인생이 그만큼 기묘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방선생은 1935년 황해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48년 월남하여 서울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며 시라소니 이후 최고의 주먹으로 불렸고,

튼실한 체력을 바탕으로 체육특기생으로 홍익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백기완, 이부영, 김태홍, 구중서선생 등 수많은

재야세력과 교분을 쌓아 지난한 민주화 현장을 지켜본 목격자다.

 

광화문 촛불집회도 빠지지 않았지만, 아직도 투쟁 현장에서 선생을 종종 뵐 수 있다.

그러한 몸사리지 않는 투쟁정신에 어찌 고난이 따르지 않을소냐?

 

재야인사들과 접촉한다는 이유로 간첩 혐의로 복역하기도 했고,

86년에는 지 사건에 휘말린 김태홍 전 의원을 숨겨줘, 고문기술자에게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그리고 일에는 귀천이 없다는 듯 이일 저일 가리지 않는다.

서른이 되던 해에는 파독 광부생활을 했고, 4년여 파리에서 유랑생활도 했다.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고급양장점 살롱드방을 운영했고

73년에는 강원도 철원의 노느메기밭에서 공동체생활의 꿈을 이뤘다.

 

79년부터 2년 동안 중동 아랍에미리트에서 근무한 적도 있었다.

 91년에는 서해화성 CEO로 취임했고, 94년에는 중국공장 대표이사로 활동했다.

2001년에는 헬스클럽 강사로 변신했고, 경복궁 관람안내 지도위원으로도 일했다.

 

최고의 자리에서 밑바닥에 이르기까지 안 해본 일이없다.

얼마 전에는 서울시장배 보디빌딩 대회에 최고령자로 참가해 상을 받았는데,

구순을 눈앞에 둔 지금까지 꾸준한 근육운동으로 몸 관리를 하신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은 16년 전 선생께서 펴 내신

'배추가 돌아왔다"[전2권]에 실렸는데, 이름보다 방배추가 더 잘알려진 이유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직까지 일손을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몇 푼되지 않는 돈을 벌기위해 가내수공업 잔업까지 하신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을 자격도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진정한 어른이 없는 시대가 아니던가?

정도를 보여주는 어른이 귀한 세상이라

젊은이들이 나쁜 짓을 해도 다들 못 본척 몸을 사리는데,

선생께서는 절대 그냥 두고 보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 지병으로 운신을 못하거나 치매에 걸려 정신없는 현실도 서글프지만,

그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정정한 노인들의 추함이다.

 

나이가 들수록 심해지는 아집과 독선, 물질과 허명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집착 등은 차라리 치매가 나을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늙어감을 추잡하게 만든다.

 

그런 것으로 부터 훌쩍 벗어난 분이 바로 방동규선생인 것이다.

연세와 상관없이 소년처럼 무구하고 신선처럼 가벼워 보이기 까지 한다.

탐욕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어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던가?

 

겸손하기 이를데 없는 선생의 답사도 재미있었다.

"난,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니다. 어영 부영 열심히 살았다:"

 

팔팔하신 방동규 선생님의 미수연을 축하하며 만수무강을 빕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이 사진은 누가 찍은 사진인지 모르지만, 장순향씨 페북에 있는 사진을 옮겨 트리밍했다.

이날 방동규선생 미수연은 아들 선거사무실 개소식과 겹쳐

인사만 드리고 갈 작정이었으나, 이야기를 듣다보니 금새 두시간이 지나버렸다.

잔치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떠 마지막 기념사진을 찍지 못했는데,

마침 다른 분이 찍은 사진이 있었다. 양해를 구하지 못해 죄송하다. 

꽃비 내리는 지난 주말 방동규선생을 모시고, 돌아가신 백기완선생 이야기를 듣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푸른 사상’ 여름호에 게재될 특집 대담을 위해 맹문재교수가 진행했다.

 

'한국출판콘텐츠센터'에 있는 ‘푸른사상사’ 사무실에서 오랜만에 방동규선생을

만나뵙고 이야기 들은 좋은 시간이었는데, 방배추 선생의 입심은 여전하셨다.

 

오후2시부터 시작된 대담이 어둑할 때까지 이어졌으니, 장장 다섯 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쉬는 시간도 없이 이야기에 빠져들게 하는 흡인력이 대단했다.

긴 시간 대담이 이어졌으나 여쭈어보지 못한 게 많아 한 번 더 자리를 마련해야 한단다.

 

또 하나 예사롭지 않은 것은 선생의 또렷한 기억력이다.

나 역시 오래된 일은 물론, 엊그제 일도 잘 생각나지 않을 때가 많은데,

팔순 후반인 선생의 기억력은 아직까지 생생하셨다.

 

하기야! 방동규선생은 백기완, 황석영선생과 더불어 조선의 삼대구라로 꼽히는 위인이 아니던가?

방선생의 입심보다 살아오신 내력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한 때는 조선 최고의 주먹인 방배추란 별명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전국적인 유명세를 떨쳤다.

그 것도 정치깡패나 돈에 팔린 주먹이 아니라 의협의 주먹이었다.

 

잘 못된 것을 그냥 못 보는 선생의 기질은 어릴 때부터 타고 난 것 같았다.

못된 놈은 상급자를 가리지 않고 손을 보았으니, 다섯 번이나 퇴학 당하여 학교를 옮겼다고 한다.

 

그런 전력을 가진 방선생께서 백기완 선생으로부터 뺨 석대 맞고

시작된 인연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일 것이다.

그 센 주먹을 나라를 위해 쓰라는 뜻을 누가 모르겠는가?

 

백기완선생은 노동자의 세상을 설파하셨지만, 방동규선생은 노동을 일상화하는 분이다.

탄광에서 부터 농사까지 안 해본 일이 없는데, 그 연세에 아직까지 일거리를 찾아 나선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마라'는 신념의 소유자다.

 

두 분에 대한 이력이야 여러 권의 자서전에서 어느정도 알고 있었으나, 처음 듣는 이야기도 있었다.

정식 교육을 받은 것이라고는 일제강점기 때 국민학교 5년 다닌 게 전부인 백기완 선생께서

장관 집이나 부자 집 자식들 영어 과외 공부를 도맡았다고 한다.

더 이해가 되지않는 것은 백기완선생은 외국말을 지독히 싫어하는데다,

미국을 원수처럼 여기는 분이 아니던가?

 

그 이유는 적과 싸우려면 적을 모르고는 싸울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독학의 피나는 노력도 따랐겠지만, 영어사전을 통째로 외울 정도의 천재성에 기인한 것 같았다.

 

그리고 정보부 고문실에 끌려가 죽도록 얻어맞고 나오다 백기완선생을 만났으면

다친대는 없냐고 걱정해 줘야 마땅한데, 기죽지 말라고 소리 질렀다고 한다.

 

또 하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역사가 모든 것을 기록 한다”는 말씀이셨다. 

“친구인 너도 기록될 수 밖에 없으니, 매사에 조심하라”는 언질이었다.

한 평생 육체적 고통에 더해 마음의 자물쇠마저 차고 계셨으니,

어디 마음 편한 날이 하루라도 있었겠는가?

 

불쌈꾼’이고 민중사상가인 백기완 선생의 삶은 격동의 현대사 자체다.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세우기 위해 온몸을 던지셨다.

 

진행자인 맹문재씨가 대담 말미에 백기완선생과의 관계를 내게도 물었는데,

오래된 인연이긴 하나 뚜렷한 기억이 떠 오르지 않았다. 

 

80년대 중반 선생의 존함만 알았던 어느 날,

기자로 일하던 후배로 부터 백기완선생 사진 좀 찍어 달라는 부탁을 받아

함께 자택을 찾아 간 것이 선생과의 첫 대면이었다.

첫 인상은 온화하게 느껴졌으나, 빈틈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범상한 모습에 기가 죽었다.

노동운동에 대한 이야기도 정치에 대한 이야기도 모두 날이 서 있었다.

낙천주의자인 나로서는 선생 앞에 쫄 수밖에 없는 상황인지라, 고개도 못 고 말씀만 들었던 기억이다.

 

그 뒤 1987년 대선에 출마하셨을 때는 87 민주항쟁’ 기록 자체를 선생의 행보에 맞추었다.

대통령 후보로 나선 대학로 유세에서는 젊은이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쇳소리 같은 선생의 외침에 정신이 번쩍 들었는데, 타고 난 선동가였다.

 

함께 잘 사는 세상을 이룰 것 같은 신념으로 희망찼으나, 양김 단일화를 위해 뜻을 접어셨다.

백기완 선생은 “그때 내 말만 들었으면 군사독재가 진즉 청산됐을 것”이라며

이루지 못한 뜻을 못내 아쉬워 하셨다.

 

그 뒤 90년대 중반 무렵, 양평의 어느 행사에 참석하신 적이 있었다.

사진하는 김영수 작업실에 들려 오랜시간 함께 했는데, 처음으로 자상한 모습을 보았다.

김영수의 소변 색이 이상하다는 말에 확인해 보고는

당장 술을 끊으라고 나무라던 큰형 같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난, 어릴 때부터 성격이 암되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왔다.

평소에는 죄인처럼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지만, 술만 한 잔 들어가면 백 팔십도로 바뀐다. 

그렇지만, 선생 앞에서는 감히 술 한 잔 마실 여유조차 없었다.

 

그 이후엔 전시 개막식에나 광화문광장 등에서 자주 뵐 수 있었지만, 항상 거리를 두었다.

많은 사람들이 선생을 반가워하며 기념사진 찍기 바쁘니, 나 까지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었다.

나서기 싫어하는 소인배 임을 감지하셨는지, 떨어져서 올리는 목례에 늘 빙그레 웃으셨다.

그래서 선생님을 만나면 카메라로 인사드리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반가운 사람만 만나면 카메라부터 들이대는 못된 버르장머리는 그 때부터 생겨 난 것이다.

 

그토록 염원하던 남북통일을 보지 못한 채, 선생께선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자본주의를 뛰어 넘어 모두 잘 사는 '노나메기’ 세상도 보지 못하고 가셨다.

 

한 평생 자신의 안위는 내팽개치고 힘겹게 사신 선생의 지난한 생애가 너무 가슴 아프다.

찬바람 부는 '광화문광장'에서 버티던 선생의 모습은 보는 자체가 고문이었다.

역사란 족쇄에 갇혀 재미있게 한 번 놀아보기라도 하셨겠나?

 

백기완 선생은 이 시대 마지막 투사였다.

민중과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던 위대한 업적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산 자여 따르라"는 선생의 노랫 말이 귓가에 아롱거린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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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방동규선생을 뵐 기회가 생겼다.

강민시인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나니, 인사동 어르신들을 뵐 기회가 없어졌다.

진즉부터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하고 싶었는데, 모처럼 연락을 주셨다.

안부 전화였으나, 내일 인사동 ‘나주곰탕’에서 뵙자고 말씀드리고,

늘 뵙고 싶어 했던 정영신씨 한데도 전화했다.

 

약속한 날, 서둘러 인사동에 나갔다.

가까운 곳에 살다 보니 매번 늦게 나가 민망했는데, 너무 일찍 와 버렸다.

한참을 ‘나주곰탕’ 앞에서 서성였는데, 시간이 가까워오니 정영신씨와 나타났다.

길에서 만난 모양인데, 여전히 건강한 모습이셨다.

 

날씨가 더워 뜨거운 곰탕그릇 대하기가 두려웠는데,

아니나 다를까 방선생께서도 시원한 막국수 먹으러 가자신다.

마침 ‘나주곰탕’ 초입에 방선생님 성을 빌린 ‘방태막국수’가 있었는데,

손님이 너무 많아 간신히 자리 잡았다.

 

방 선생님은 술을 끊었다지만, 내 걱정에 한 잔만 하시겠단다.

막걸리 한 병을 마셨는데, 선생님 생각한다는 게 피차 입만 버렸다.

 

‘방동규’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겠으나, 혹시 간첩이라도 있을까 싶어 소개부터 한다.

방동규(85세)선생은 이름보다 방배추라는 별명으로 더 잘 통한다.

젊은 시절 웬만한 사내는 한 주먹에 때려눕힐 정도로 싸움을 잘해

‘시라소니 이후 최고의 주먹’으로 명성을 떨쳤다.

한 번에 깡패 17명과 맞싸운 일도 있고,

희대의 주먹 이정재도 방선생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안달했단다.

 

그는 백기완(현 통일문제연구소장), 황석영(소설가)씨와 더불어

‘조선의 3대 구라’로 불릴 만큼 입심도 최고라, 구비문학계의 전설로 남은 위인이다.

법을 잘 아는 법대출신이라 낭만주먹이라고도 불렀다는데,

사상범으로 몰려 모진 고문을 받아 해외 유랑도 했었다

한 때 농촌운동에도 나선 파란과 굴곡의 인생이었다.

 

2005년 유홍준 문화재청장과의 인연으로 경복궁과 연을 맺은 적도 있다.

경복궁 관람안내 지도위원으로 특채되었는데,

‘몸짱 할아버지’로 관람객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기도 했다.

77세에 왕궁 지킴이가 된 그는 아직까지 육체미 대회에 도전하겠다”는

야심찬 꿈을 키우며 체력단련에 혼신을 다한다.

 

2006년에는 "배추가 돌아왔다"란 두 권의 자서전을 펴내 주목을 받기도 했다.

내가 존경하는 부분의 으뜸은 구순을 바라보는 연세지만,

한 번도 일손을 놓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도 단순노동이지만 일하러 다니시는데,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주장이시다.

 

그런데, 선생님 슬하에 딸이 둘 있는데, 부전여전이었다.

나이 쉰이 가깝도록 미혼인데, 방그래양은 중국 대련대학 조소과 교수로,

시래양은 중국에서 운동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두 딸이 아버지처럼 운동도 잘 하지만, 생각이 깨어 있었다.

 

그 날 막국수를 드시며 하시는 말씀이 그래양이 얼마 전 귀국했는데,

휠체어를 타고 왔더란다. 운동을 너무 열심히 하다 근육이 파열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스타일인데, 예능은 말할 것도 없다.

조각으로 국제대회에서 수상도 여러 차례 했다는데,

그 날 방선생께서 핸드폰으로 보여 준 작품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국내 전시라도 한번 주선해 보고 싶어졌다.

 

그날 들은 이야기 중 그래양이 가장 돋보였던 점은 자본주의의 부정이었다.

조각가로서의 예술세계도 중요하지만, 정신이 앞서야 하기 때문이다.

‘돈이 사람을 망치고 세상을 망친다’고 했다는데, 아버지를 빼 닮았다.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아무래도 선생께서 술이 부족한 것 같았다.

선생님을 생각해서 권하지 않았는데,

정영신씨 이야기로는 자꾸 빈 술잔에 손이 가더라는 것이다.

아직 재난카드가 살아남아 ‘유목민’에 갔으나, 문이 걸려있었다.

인사동에 낮술 마실만한 곳이 없어, 아쉽지만 보내 드려야 했다.

 

내가 비실비실하니, 앞으로 인사동에서 선생님 뵐 일이 몇 번이나 더 있겠는가?

더구나 인사동을 사랑하는 김명성씨 조차 두문불출하니, 더 만나 뵐 수 없다.

죽으면 썩어 문드러질 몸, 인사동에서 포장마차라도 한 번 할까보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9일 병원에서 퇴원하여, 정선 떠날 채비로 인사동에 나갔다.

꼭 봐야 할 전시도 있었지만, 전시 DP에 필요한 자재를 알아보기 위해서다.
일을 마치고, ‘유목민’ 골목으로 들어서니 반가운 분이 손을 흔든다.
낭만주먹 방동규 선생님을 비롯하여 김명성, 김연갑씨가 있었다.





무슨 이야기 끝에 나왔는지 모르나, 방선생께서 가까이 있는 사람을 항상 조심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자신의 이해득실에 따라 적으로 돌변하여 뒤통수치는 것을 심심찮게 보아왔던 터라,

김명성씨에게는 꼭 필요한 충고였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불신할 일만은 아니라, 말처럼 쉽지는 않다.






담배연기 자욱한 골목으로 화가 장경호씨와 서길헌씨가 차례대로 나타났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둘 모여들었다.
김명성씨와 장경호씨는 살이 끼었는지 술 취한 막판에는 꼭 언쟁이 붙어 좀 불안하기도 했다.

다행스럽게 장경호씨가 조용히 드릴 말이 있다며, 방선생님을 모셔갔다.






좀 있으니, ‘평화만들기’에 있다는 전화가 와 다들 그 쪽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장경호씨가 슬그머니 술값을 계산하고 일어나 버렸다.
방선생님도 사모님의 호출을 받아, 다시 ‘유목민’으로 돌아와야 했다.






우리가 마시던 술자리에는 비전향 장기수 장의균씨가 와 있었다.
전두환 정권 당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보안사령부에 끌려가 강제로 옥살이를 한,

그의 근황을 들어보았는데. 다들 힘들게 살고 있었다.





다시 핸드폰이 울려 펼쳐보니, 장경호씨 전화였다,
그런데, 시끄러운 음악소리만 들리고, 아무런 말이 없다.
무슨 할 말이 있는지? 나만 오라는 뜻인지 모르겠으나, 마치 숨바꼭질하는 것 같았다.
그 놈의 자존심이 도대체 무엇인지, 어지간히도 피곤하게 한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7일 원로시인 강 민선생과의 오찬 약속으로 인사동 '여자만'에 나갔다.
강 민선생과 이행자시인이 먼저 와 계셨는데, 뒤 따라 공윤희씨가 왔고

좀 있으니 백기완, 황석영씨와 더불어 조선의 3대 구라로 불리는 방동규선생도 오셨다.

오랜만에 방동규선생의 걸쭉한 구라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는데,
마르크스와 공산주의에 관한 쉼 없는 구라도 그의 꾸준한 독서습관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았다.
그 날도 모임에 오기 전에 교보문교에 들려, 책 몇 권을 사오셨다.

사모님께 탄 용돈의 대부분이 책값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꾸준하게 운동하는 방법이 담긴 책을 사와 강 민선생께 드리는 등 자상한 모습도 보여 주셨다.
그리고 오랫동안 일해 온 경북궁 지킴이는 해를 넘길 수 없는 처지라며, 시원섭섭해 하셨다.

술자리에서 일어날 즈음 소설가 김승환선생이 오셔서 '푸른별 이야기'로 옮겨 한 잔 더하고,

술 취해 돌아오는 길에서는 권양진, 김명성, 정해광씨를 만났다.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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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황석영씨는 백기완, 방동규씨와 함께 조선의 3대 구라로 불린다.
그의 저력을 잘 대변하는 구라가 “누구나 오늘을 사는 거야!”다.

지난 24일 ‘낭만’에서 있었던 ‘용태형과 문화운동시대’ 책거리서도
유홍준씨 표현처럼, 황석영씨의 구비문학이 술자리를 점령했다.

일사천리로 구라를 풀어가는데, 시끄럽게 초 치는 자가 나타났다.
목소리 큰 조성우씨였는데, 실수로 황선생의 염장을 지른 것이다. 

“이 새끼”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벌떡 일어나 술잔을 날린 것이다.
좀 과격하긴 했지만, 그 퍼포먼스로 조성우씨의 입을 막을 수 있었다.

인사동 술자리선 흔한 일이기도 하지만, 가끔 긴장감도 있어야 술이 덜 취한다.
상대를 제압하고 다시 시작한 황구라, 역시 조선 최고의 구라였다.

사진,글 / 조문호



 

 

 

방동규(78세)씨는 ‘방배추’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하신 분이다. 젊은 시절 웬만한 사내들을 한주먹에 때려눕힐 정도로 싸움을 잘해 ‘시라소니 이후 최고의 주먹’으로 명성을 떨쳤다. 한 번에 17명과 맞싸운 전설이 있고, 이정재도, 스페인 조폭 두목도 손잡자 했다고 한다. 그는 백기완(현 통일문제연구소장), 황석영(소설가)씨와 더불어 저잣거리에서 ‘조선의 3대 구라’로 불릴 만큼 입심도 최고였다. 사상범으로 몰려 모진 고문을 받고 해외 유랑과 사업, 농촌운동에 나섰던 유달리 파란과 굴곡이 많은 인생이었다.

그를 칭하는 별칭들도 많다. "조선의 3대구라"라는 말 외에도 법을 잘 아는 법대출신으로 "낭만주먹" 또는 "제2의 시라소니"로 불렸으며, 몸 체형이 배추모양이라 "방배추"로 불리는 등 한국 구비문학계의 전설로 남은 위인이다. 2006년도에는 "배추가 돌아왔다"란 제목의 두권으로 된 자서전을 "다산책방"에서 출간하기도 했다.

한 때의 ‘주먹’이 경복궁과 연을 맺은 것은 2005년. 유홍준 당시 문화재청장의 도움으로 경복궁 관람안내 지도위원으로 특채됐다. ‘몸짱 할아버지’로 관람객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기도 했으나 이명박 정부 출범 후 스스로 경복궁을 떠났던 그는 지난해 초 야간경비 일을 맡아 돌아왔다. 77세에 왕궁 지킴이가 된 그는 “80세에 보디빌딩 대회에 도전하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다고 한다.

 

그 분을 만나게 된 것은 지난 10일 정오 무렵 인사동 "여자만"에서 였다.

원로 시인이며 우리 카페의 최연장자이신 강 민선생님과의 오찬약속으로 '여자만'에 갔드니, 그 자리에 서양화가 주재환선생님, 시인 이행자씨와 함께 자리하고 계셨다. 방선생님은 평소 지나치며 뵙거나 여러 선생님들의 주연에서 잠깐씩 뵙기는 했으나 직접 그 분의 구라를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경북궁지킴이로서 야간 순찰중에 있었던 많은 에피소드들도 들었다.

한 번은 늦은 시간 궁내를 순찰하다 잔디밭에서 젊은 남녀의 정사장면을 목격했다는데, 그들을 불러 왜 여관에 가지않고 들어올 수 없는 궁에 침입하여 이 짓을 하냐고 물었드니 "궁에서 정사를 하면 훌륭한 자식을 낳을 것 같다"란 기가막힌 말을 하더라는 것이다. 오찬 식탁에는 강민선생님이 즐기시는 복분자와 병어찜이 올라왔는데, 병어가 얼마나 큰지 여섯명이 먹고도 남았다. 그 만만찮은 오찬비용을 이행자씨가 계산해 너무 송구스러웠지만, "인사동 사람들"에서 커피 한 잔 대접하는 것으로 아쉽지만 헤어졌다.

 

2012.12.10

 

 

 

 

 

 

 

 

 

 

 

 

 

 

 

 

                                                           돌아오는 길에 '아라아트'에 잠시 들려 전인경, 김명성, 공윤희씨를 만났다.

내일로 끝나게 되는 전인경씨의 작품 철거를 앞두고, 판매된 작품들의 액자제작을 업자와 협의하고 있었다.

이 어려운 불경기에 제법 많은 작품들을 판매하였다는데, 정말 축하할 만한 반가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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