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과 여름 사이

김준권展 / KIMJOONKWON / 金俊權 / printing 

 

2021_0616 ▶ 2021_0629

 

김준권_꽃비-봄날_채묵목판_25×50cm_2015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 4층

Tel.+82.(0)2.722.7760

 

 

우리 산하에 대한 정서를 문인화적 맑음으로 시각화하는 김준권의 수묵水墨목판화는 철저하게 나무판면이라는 평면성을 수용하는 감성적 기호의 세계다. 판면에 칼을 터치하면서 나오는 판각版刻과정의 칼맛보다는, 인출印出과정에서의 담묵과 농묵, 투명과 불투명, 형태와 묘사 등을 아우르는 환원적 이미지로 국토의 가장 인상 깊었던 기억을 고요한 마음의 기호로 전형화한다.

 

김준권_꽃비-203_유성목판_33×50cm_2020
김준권_지리산-2_채묵목판_35×55cm_2020
김준권_산에서...20-01_채묵목판_40×30cm_2020
김준권_靑山-1_채묵목판_50.3×33cm_2020
김준권_靑山-3_채묵목판_50.3×33cm_2020
김준권_산의노래_채묵목판_84.5×158.5cm_2021

 

그동안의 대작을 통한 서사를 담았던 김준권의 장엄한 백두대간 풍경에서 잠시 벗어나, 이번 전시는 『봄과 여름사이』라는 명제로 핑크색 봄 벚꽃(유성목판)과 코발트블루가 시원한 여름 산(채묵목판)의 소품으로 구성했다. 고향과 향리에서의 순수한 서정, 그리고 추억. 잠시 풍경자체의 아름다움과 즐거운 조형에 탐닉하는 기회를 즐기시길 바란다. ■ 나무화랑

 

 

Vol.20210616d | 김준권展 / KIMJOONKWON / 金俊權 / printing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신비로운 블럭버스터 판화의 세계 ~ 나무, 그림이 되다’ 전시가 열리고 있다.

전시 소식은 진즉 들었으나 차일피일하다 늦어버렸다.

 

 

 

개인적으로 편치 않은 일도 있었지만, 강남이라는 장소성이 내키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지난 토요일엔 아산의 김선우씨가 화재 피해보상에 따른 자료 구하러 녹번동에 찾아와 정영신씨 집에서 함께 밤을 지냈다.

 

 

 

그 이틀 날 아산 내려가는 김선우씨 차편으로  예술의 전당까지 전시 보러 간 것이다. 사전에 자료들을 보아 전시내용이나 규모는 짐작했으나 기대를 훨씬 뛰어넘었다.  ‘그림이 된 나무’들이 회화와 조각의 장르를 아우르고 있었다. 

 

 

 

입구에는 판화체험 코너도 마련되어 있었다. 우선 작품의 양적인 면에서 서예박물관 2-3층의 넓은 전시공간조차 대작들을 소화하기 버거워 보였고, 전시된 작품의 아우라가 만만치 않았다. 나무판각이 이토록 섬세하고 에너지가 넘칠 줄 몰랐다.

 

 

 

한국 현대 목판화 대표 작가 18인의 작품 700여점을 한자리에 모아 놓았는데, 전달하는 메시지나 제작기법의 다양함이 판화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여 주는 기획전이었다.

 

 

 

알찬 기획과 웅장한 스케일도 놀랍지만 작가마다의 개성과 작품을 돋보이게 한 디스프레이에 이르기까지, 전시감독을 맡은 '나무아트' 김진하씨의 역량을 재확인 할 수 있는 전시였다.

 

 

 

전시는 국토, 사람, 생명으로 섹션을 나누었는데, 1부 ‘국토’에선 우리 삶의 터전을 담아낸 산수들로 시작해 2부 ‘사람’에서는 다양한 인물상의 서사들을 엮어내고, 마지막 3부 ‘생명’에선 자연과 사람 사이 다양한 사유를 형상화한 작품들을 보여 주었다.

 

 

 

1부 ‘국토’에서는 우리의 산하를 다양한 양식과 어법으로 담아낸 김준권, 김 억, 류연복, 손기환, 정비파, 홍선웅씨 작품을 선보였다.

 

 

 

전시장 외부 벽면에는 이태호의 ‘기차놀이’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어린이 뒤로 폭력을 상징하는 탱크가 버티고 있어, 이번 전시의 다양한 메시지를 감지하게 만들었다.

 

 

 

전시장 입구에는 2018년 남북정상회담 때 두 정상이 서명한 장소에 걸려 화제가 된바 있는, 백두대간을 형상화한 김준권씨의 ‘산운’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산 저 산’은 겹겹이 늘어선 능선이 파도처럼 너울지게 만들어 놓았다. 농도를 달리한 음영들이 영락없는 수묵화였다.

 

 

 

국토 작가인 김억의 ‘남도풍색’은 해남에서 보길도까지의 남도 풍광을 9.6m에 이르는 화폭에 담아냈다. 고기 잡고 농사짓는 사람들을 담아낸 세부 그림도 돋보였다. 한반도 허리 아래와 북쪽 요동까지 답사하며 풍경과 민중의 역사성을 국토 문예학적 입장에서 담아낸 김억의 작품은 구한말 고산자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를 방불케 했다.

 

 

 

류연복의 작업은 강인한 민중적 생명력을 전유했다. 그 바탕에 서정적이고도 아련한 서민의 한의 정서가 깔려 있었다. 질기고도 강인함, 유연하고도 고즈넉한 정서가 어울어져 류연복만의 서정성과 서사성을 풀어내고 있었다.

 

 

 

정비파의 6m짜리 대작 ‘백두대간’은 칼칼한 선으로 첩첩한 산줄기를 담아냈다. 이 땅의 초상으로 실사풍경과 관념산수의 조형법을 한 화면에 버무린 국토풍경이었다. 정비파의 대작목판화는 우리 역사를 장엄한 풍경으로 환유한 작품이다.

 

 

 

손기환은 풍경의 개념보다 전통 관념적 미의식의 산수를 차용하였다. 서구적 풍경화에 대한 역설로 강박산수라는 심리적 개념성의 작업이었다. 분단 상황을 은유한 수동적 풍경의 액티브한 칼 맛이 동감을 드러냈다.

 

 

 

홍선웅의 작업은 역사적 사건과 현장을 현실적 삶과 기억에 보태어 사람과 현장풍경이 혼연일체가 되었다. 가시적인 풍경에 인식적으로 접근하여 전통적 목판화의 간단명료한 기법의 칼질과 형태감을 수용한 것이다.

 

 

 

2부 ‘사람’에서는 다양한 인물상의 역사적 서사와 현실적인 생태를 다룬 강경구, 유근택, 이동환, 이윤엽, 이태호, 정원철씨 작품이 전시되었다.

 

 

 

부조로 판각한 목판의 거친 육질감을 드러낸 강경구의 대형 초상 판각이 압권이었다. 자화상을 비롯하여 공재 윤두서, 표암 강세황, ·소정 변관식 초상을 담은 대형 판각은 찍어낸 판화가 아니라 조각도로 칼질 한 나무판이었다. 인물의 정신성을 부각시켜 회화적 표현성을 확장했는데, 동양화 전신사조의 초상미학을 목판에 적용시킨 성공적인 실험이었다.

 

 

 

유근택은 한겨레신문 연재소설 “우리 사이에 강이 있어”에 삽화 255점을 판각하여 연재한 적도 있었는데, 이번에 내 놓은 인물목판화 63점은 처음 공개한 실험작이었다. 다양한 표현적 시도의 미적 긴장도가 팽팽했다.

 

 

 

이동환은 독립운동가인 장준하와 이회영 일대기를 이야기체 판각으로 형상화한 출판미술을 선보였다. 작가 특유의 물리적 힘에 기반한 칼의 거칠고도 깊은 구사와 대하 서사적 서술성으로 선각자들의 일제강점기 항일투쟁 정신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주었다.

 

 

 

이윤엽 이웃을 등장시킨 소탈한 목판화를 시위현장의 투쟁적 무기로 활용했다. 각종 재개발현장, 용산참사현장, 구럼비 저항현장, 밀양송전탑 반대운동현장, 김진숙의 고공농성현장 등 박해받고 소외받는 투쟁현장을 찾아 다니며 목판화작업으로 함께 싸웠다. 목판화를 통한 동지애와 전투성은 우리이웃에 대한 보편적 존엄성을 구현하는 예술적 실천에 다름 아니다.

 

 

 

정원철은 일본군 성노예 위안부 할머니들의 초상화를 정교한 칼 맛의 리놀륨판화로 구현했다. 그리고 이를 대형 설치작업과 여타의 질료로 번안하며 할머니들에 대한 위로와 함께 일본 제국주의의 반인권성을 비판적으로 부각시켰다. 우리 근대사에 대한 반성과 보편적 인권에 대한 성찰을 되새기게 한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이태호는 선명한 이미지의 목판화 기법으로 김수영, 전태일 등을 찍어 길거리에 붙여 온 스트리트 아트다. 이태호의 독자적인 거리미술 행위는 목판화의 영역을 확대하는 실천적 작업이었다.

 

 

 

이 전시의 핵심은 '사람'에서 나온다. 사람이 소재여서라기 보다 평범한 우리의 모습을 세밀하게  새겨 낸 작가의 깊은 마음에 있다. 노인의 굴곡진 주름이나 심오한 표정을 새긴 붓질 아닌 칼질에는 오랜 기간 세기고 다듬은 작가의 마음이 녹아 있었다.

 

 

 

3부 ‘생명’에서는 자연과 사람 사이에서 발현하는 기운과 생명성을 관조적으로 형상화한 강행복, 김상구, 배남경, 안정민, 유대수, 윤여걸의 작품을 내 걸었다.

 

 

 

강행복의 대형 설치작품은 반복된 패턴이지만 같은 이미지는 하나도 없었다. 리듬감 있는 선의 조형을 드러낸 한지 목판화 약 600여장을 평면과 입체로 연결해 영성적 분위기로 이끌었다. 어떤 서사적 소재나 서술도 없이 오로지 조형적이고 추상적인 이미지 반복으로 깨달음에 대한 화두를 화엄의 그릇에 담은 것이다.

 

 

 

김상구의 소탈한 판화 문법도 충만한 비움의 세계로 안내한다. 경건한 생명성과 담백한 조형성으로 통일시킨 나무는 대상으로서의 나무가 아니라 자연의 기호였다. 리듬, 운동, 생성의 기표이기도 했다. 꾸미지 않는 자연미학에 가까운 담백한 결과물이다.

 

 

 

사실적 묘사가 매력적인 배남경의 ‘도시산책’이나 ‘기도하는 사람들“도 눈길을 끈다. ”새, 옷, 춤, 빛”이라는 문자도 형식의 간결한 한글은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을 보여주었다. 

 

 

 

안정민은 목판에 실리콘 캐스팅을 해 판화의 표현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현상학적이고도 근원적인 자기 확인이자 실리콘이라는 새로운 재료와 판화문법을 통한 자기 수행법이기도 하다. 

 

 

 

유대수의 생명은 자연과 자아와의 관계성을 수행적 태도로 형상화한 심상풍경이다. 일종의 선적인 요소가 가미된 생명에의 경건한 희구와 깨달음의 과정을 목판화 작업과정으로 상징화했다.

 

 

 

윤여걸사람과 여타 원시적 생명체들이 자연과 뒤엉키며 공존한다. 현실적인 억압이나 제약에 투쟁 할 때 더 빛날 수밖에 없는 원초적 존재, 즉 살아남은 생명의 의지에 대한 오마쥬다. 사람, 동물, 여타의 식물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평화로운 어울림에 대한 희구이기도 했다.

 

 

 

‘나무, 그림이 되다’전은 목판화에 대한 통념을 뒤집은 전시였다. 평소 만나기 어려운 대형판화들이 즐비하고 제작기법이 다양할 뿐 아니라 목판화의 성격과 기능도 모두 살렸다. 

 

 

 

한국 판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민중미술 계열에서 부터 자연과 생명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를 보여주는 작품에 이르기까지 ‘동시대’ 판화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전시였다. 주최 측에서 ‘신비로운 블록버스터 판화의 세계’라는 부제를 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우리나라 목판은 신라시대 불경으로 기원을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유서 깊은 역사를 가졌는데, 변방에 밀려나 있는 이유를 모르겠다. 이런 좋은 전시를 왜 국립현대미술관이나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유치할 생각을 못하는지 답답할 뿐이다.

 

 

 

마침 ‘예술의 전당’에서 유진규 마임 인생 50년을 결산하는 헌정공연이 열려 함께 일정을 잡았는데, 생각 외로 볼 것이 많아 예정했던 한 시간으로는 부족했다. 김선우, 정영신씨와 마임을 보기로 한 서정란씨를 만나 점심식사부터 했다.

 

 

 

‘나무, 그림이 되다’전은 목판화의 한국적 장르개념과 미감을 확보한 리얼한 민중사였다.

전시는 5월 30일까지다. 안보면 후회한다.

 

 

사진, 글 / 조문호

 

 

 



류연복씨의 ‘온 몸이 길이다’ 판화전이 지난 11일 오후2시 ‘진천군립생거판화미술관’에서 개막되었다.




기다리던 전시라 만사를 제쳐두고 갔다.
다시는 전시장 돌아다니며 일 만들지 않겠다는 다짐한지가 오래지 않건만,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북한산을 거닐다2, 2013, 1,38X165cm,소멸다색목판

류연복씨의 작품을 띄엄띄엄 보았지만, 36년 동안의 전 작업을 한꺼번에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풍악산 일만이천봉,2009, 1,23X180cm다판다색목판


그의 작품을 처음 만난 것은 80년대 민주화투쟁을 형상화한 끝내 이루리라 이루어 내리라’였다.
민중적이고 투쟁적인 판화에 매료되어 그의 이름은 각인 되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뭇 선동적인 작품이었다.



끝내 이루리라 이루어 내리라1,1989,37X37cm,채색목판


그 이후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90년대 후반 동강 댐 건설을 막으려는 환경단체의 목소리가 높을 때, 다시 류연복이란 이름을 찾아냈다.
초창기 보았던 투쟁적인 작품과는 달랐다.
국토에 대한 애정과 자연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묻어있었다.


동강전도, 1999, 180X110cm, 다판다색목판


그 당시는 동강을 찍기 위해 정선 귤암리에서 일할 때다.
백운산에 올라가 동강 물줄기를 부감으로 찍기도 했는데, 그 장면을 사진처럼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동강(고성산성에서)1999, 57X107cm, 단색목판


바세와 연포마을을 굽이굽이 휘감는 강줄기 사이로 박혀있는 집들은
동강사람들의 삶처럼 아름답기도 하고 애절하기도 하고 역동적이기도 했다.



바로, 현장 답사에 의한 실경산수였다.
“아! 민중미술가 류연복씨 작품이 실경산수로 바뀌었구나. 역시 대단한 작가다!”며 다시 흠모했다.
주제만 바뀌었지 민중정서를 반영하는 태도는 똑 같았다.


외암골 전도, 2002, 120X84cm, 다판다색


풍경을 이루는 산과 강의 흐름은 강력하고 마을의 경계는 선명했다.
넓고 탁 트인 시선에서 부터 작고 가까운 곳을 바라보는 섬세함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명료했다.
국토에 대한 형상성은 두드러지고, 부분적인 독자성은 분명했다.


서운산-겨울, 2003, 65X123cm, 다판다색목판


그러고는 또 잊고 있었는데, 6년 전 인사동 ‘부산식당’에서 그를 처음 만난 것이다.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었는데, 첫 인상이 소탈하고 겸손했다.
그 이후 광화문광장‘의 ’광화문미술행동‘팀에 함께하며 유심히 지켜볼 수 있었는데, 사람이 진국이었다.


꽃 한송이 2018, 97X72cm, 소멸다색목판


허허실실 웃으며 바람처럼 살지만, 늘 말보다 행동이 앞서고 잔머리 굴리지 않았다.


나는 온몸이 길이다-봄, 2012, 91X91cm, 다판다색목판.


류연복씨는 사람과 작품이 똑 같았다.
대개 작품을 먼저 알고 나중에 작가를 만나는 경우가 많은데, 실망스러운 경우를 종종 접한다.
작품은 좋으나 인간성이 형편없는 작가는 사람이 아니라 작품 만드는 기계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사람 나고 작품도 있는 것이다.




작가와의 만남이 있는 지난11일 오후3시 무렵, 정영신씨와 함께 전시장을 찾았다.
‘진천군립생거판화미술관’은 처음 가보았는데, 시골에 이렇게 좋은 전시장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개성없는 비슷비슷한 전시장이야 가는 곳마다 늘려있지만, 판화만 보여주는 전문미술관을 어찌 시골에서 볼 수 있겠는가?
아마 진천에 사는 판화가 김준권씨의 노력에 의한 산물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그 멀리까지 많은 사람들이 왔더라.
류연복씨의 작품성이나 인간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대목이다.
아는 분으로는 평창에서 온 화가 권용택씨 내외를 비롯하여 미술평론가 김진하, 이태호씨,
화가 변정섭, 박불똥, 박진화, 김 억, 송용민, 김 구, 임정희, 김건희, 김가영씨가 참석했다.

판화가 이윤엽씨는 아들 땅을 데리고 왔는데, 뒤늦게는 김준권씨도 나타났다.




개막식은 끝나고 작가와의 만남이 시작되고 있었는데,
류연복씨는 마치 장터 약장사처럼 너스레를 떨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예요”라며 흩어진 관객들을 불러 모았다.




류연복씨의 목판화에는 힘이 흘러넘쳤다.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문제를 토해냈다.
저항적이고 비판적으로 칼을 휘두르기도 하고 때로는 서정적으로 다독였다.
국토를 온 몸으로 누비며 체득한 산하지만, 풍경 에너지와 사람의 삶을 응결시키려는 속내가 엿보였다.


도피안사 전도,2003,110x80cm,다판다색

류연복씨의 근작은 국토풍경을 담은 목판화다.
분단풍경인 DMZ에서 부터 독도,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 무등산, 북한산 등
방방곡곡을 누비며 국토의 아름다움 속에 민중의 비애를 버무렸다.
여러 번의 칼질이 아니라 단칼의 칼질이 빚은 선명한 골격이 돋보였다.
풍경조차 서민적이고 민중적이라 풍경의 수려함 속에 비극적 슬픔이 깔려 있었다.


갈라치며 나아가자,1989,28X49cm, 채색판화


미술평론가 김진하씨는 서문에 이렇게 썼다.
“류연복의 목판화는 일도양단의 칼질로 그 이미지가 선명하다.
구사된 칼은 주저하거나 돌아가거나 에둘러 여운을 남기지 않는다.
전통적인 목판화의 원초적인 칼 맛의 연장선상에서 대상의 특징을 포착해내면서
그 내용의 핵심을 도드라지게 만든다. 명료하다. 강하다. 그래서 류연복스럽다”


가난한 사랑 노래,1998, 37X27cm, 채색목판


이 전시는 12월 31일까지 열리니 진천을 지나치는 걸음에 꼭 한 번 보시기 바란다.

두번째 작가와의 대화가 열리는 11월22일(금) 오후3시에 가면 금상첨화다.
작가의 말처럼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다.

사진, 글 / 조문호


모자,1992, 27X18cm, 소멸다색


붓을 들어 육천만 가슴에, 1989,30X30cm,채색목판.


백골단과 전사,1991,37X25cm, 다색목판

빈들 생명-딛고 선 땅, 2004, 45X124cm, 소멸다색목판

해방춤1,1986, 45,5X53cm,채색판화

숲2, 2017, 92X92cm, 소멸다색목판.

전각판화(책표지),2016-2018, 16X16cm X54

달밤-금강산외 열두폭 평풍, 2007, 61 X30,5cm X12



[전시 개막식날 작가와의 대화에서 찍은 사진이다]

































































‘한국민예총’ 드디어 서광이 비친다.


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한국민예총)의 창립이 어언 30주년을 맞았다.

한국민예총은 예술인들의 공동실천으로 사회 민주화와 민족통일에 기여하고,

민족문화 창달에 헌신할 목적으로 19881223일 창립한 예술단체다.

현재는 지역별로 분권화한 형태지만, 가닥을 잡아 갈 본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한국민예총30년 동안 민주화와 문예부흥을 위해 크게 기여해 왔으나,

열악한 재정에 허덕이다, 지금은 빚더미에 앉은 어려운 처지에 있다.

오랜 부채를 해결하여 다시 일어서기 위해 역대 이사장단을 비롯하여

신학철, 이철수, 유순웅씨 등 많은 예술가들이 사재를 털어  재기하려 노력해왔으나,

밑 빠진 독에 물 붙는 격이었다.



   



창립 때부터 인간적인 관계를 더 중요시 했는지 모르지만,

많은 회원을 대표하는 단체 운영에 그런 사심이 통용되어서는 안 된다.

문제는 사무총장 뜻에 따라 이사장이 추대되는 모순이 오래전부터 암암리에 이루어져 왔다는데 있다,

그러니 자신을 내 세워 준 실세더러 누가 감히 메스를 들이댈 수 있겠는가?





더 이상 사무총장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올 2월부터 화가 박불똥씨가 이사장을 맡으며, 일대 개혁을 단행했다.

사무총장을 해임하여 새 집행부를 구성했으나 당사자가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일부 장부까지 움켜 지고 배 째라 식으로 버티는데,

더 웃기는 것은 일부 지역 민예총을 조종하여 내분을 조장한다는 것이다.



 


이제 제발 그만하라.

회원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힘을 뭉칠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법적 조치도 불사해야 한다.

단체를 끌어 가는대는 절대 인간적인 사심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한 선례를 들어 보겠다.

오래전 민예총산하단체인 민족사진가회’(민사협) 창립에 사진가 김영수씨를 도운 적이 있다.

그 단체가 주저앉게 된 원인이, 바로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독재에 의한 것이라는데 있다.

초대 이사장으로 작고하신 홍순태선생을 로봇 이사장으로 앉혔으나,

이사회나 회계절차도 형식일 뿐, 모든 게 한 개인의 뜻대로 움직여졌다.



 


창립시 내가 사무국장 직책을 맡았으나 그것도 이름 뿐이었다.

인사동에 사무실을 내려는데, 보증금이 없어 잘 아는 지인에게 부탁해

홍순태 이사장 명의의 차용서를 써 주고 빌려와 입주한 적도 있다.

그러나 결국 나만 바보가 되었다.

뒤늦게 민예총본부 사무실로 이전했으면 보증금은 돌려줘야 할 것 아닌가?

 


 


가까운 친구라고 덮어주고 변명해 주다보니, 결국 단체 자체가 문을 닫도록 만든 것이다.

박정희보다 더 지독한 독재로 좌지우지 했으니, 어느 회원이 남아 있으려 하겠는가?

유령 회원을 이끌고 가내수공업 식으로 끌어가다, 본인이 죽고 나니 결국 문을 닫더라.



 


문제는 박불똥이사장이 정영신씨를 조직국장으로 내 세워 조직을 다시 복원시키려 했으나,

그 불신의 골이 깊어 대개의 사진가들이 머리를 흔든다는데 있다.

이제 민족이란 자도 단체명으로 사용해서는 안 될 지경이 되고 만 것이다.



 


더 이상 조직에 사심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이제 모두 화합하여 잘 못된 것을 과감히 개혁하여 우리나라 문화의 주체가 되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

, 개혁에 나선 박불똥 이사장을 믿는다.

원칙주의자인 그만이 해 낼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민사협에 진저리를 내어 오래 동안 방관하고 살았기에, 민예총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조차 몰랐다,

마침 사무국장을 맡은 서인형씨와 정영신씨가 쥐꼬리만큼의 보수로 일한다기에 유심히 살펴보게 된 것이다.




 

유순웅 부이사장 도움으로 사무실을 얻어 어렵사리 꾸려가지만 살얼음 판 같았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것이 어렵기야 하지만, 그러나 희망이 보이더라.

이제 단합하여 협력하는 일만 남았다.



 


일반인들에게 받는 CMS도 계속 들어오고 있고, 기금 마련전에도 많은 작가들이 발 벗고 나섰다.

기금마련전도 여지 것 해 왔던 것처럼 무조건 작품을 내 놓는 것이 아니었다.

사무국과 작가와의 계약서에 의해 이루어진다.

출품작가의 뜻에 따라 판매대금 분배와, 끝난 후의 작품반환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출품 작이 어떻게 처리되는지도 몰랐던, 그 전의 주먹구구식 기금마련전이 아니라

작가와 단체가 상생할 수 있는 좋은 기획전이었다.



 


미술평론가 최석태씨가 기획한 민족예술, 다시 날아오르다기금마련전에는

신학철, 황재형, 임옥상, 김정헌, 민정기, 김진열씨 등 내 노라 하는 작가 40여명이 참가하였는데,

이미 작품이 팔려 나간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려왔다.



 


지난 19일 오후5시 인사동 관훈갤러리전관에서 개막된 민족예술, 다시 날아오르다

기금 마련전에는 200여명의 예술가들이 참여하는 대 성황을 이루었다.



    


개막 행사는 유순웅 부이사장의 사회로 이성호 경기민예총이사장의 비나리 공연에서

장순향 한국민족춤협회이사장의 북춤으로 신명을 일으켰다.

박불똥 이사장의 인사와 백기완선생의 축사, 그리고 유홍준씨의 격려사로 이어졌다.



 


이어 마임이스트 유진규씨의 무언극은 마치 민예총의 아픔을 대변하듯 절절했다.

손병휘 서울민예총이사장의 노래에 이어

임진택 명창의 김구선생 탈출기를 담은 창작 판소리가 좌중을 웃기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가수 정태춘씨가 나왔는데, 흐르는 세월은 어쩔 수 없었다.

늙어가는 모습을 오랜만에 만났는데, 목소리는 더 깊어진 것 같았다.



 


그런데, ‘관훈갤러리가 생겨난 이후 최고의 관객이 몰렸다.

3층 공연장에 다 들어 올 수 없어, 입구에서 지켜보는 분들도 많았다.

공연이 끝난 후에는 2층에 마련된 조촐한 다과로 환담을 나누었고,

낭만에 마련된 뒤풀이에서 밤늦도록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판화가 김준권씨 100만원, 박종관 한국문예진흥위원장 100만원, 화가 김정헌씨 50만원 등,

독지가들이 줄을 이어 민예총이 다시 기지개를 켜는 모습에 마음이 흐뭇했다.



 


다음해 16일까지 열리는 민예총기금마련전은 꼭 볼만한 전시다.

유명작가들이 대거 참여한 이번 전시에서 민중미술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신학철씨가 88년에 제작한 목판화 한국현대사-유월항쟁도도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시대를 증언하는 작품으로 민중미술을 이끌어가는 기라성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작품은 구입하지 못하더라도 작은 금액의 CMS 한 구좌라도 적어주길 바란다.

작은 물방울이 내를 이루듯, 작은 힘이 모여 민예총을 다시 일으킬 수 있다.



 

참여 작가는 다음과 같다.

 

작고작가) 박생광 김영수 문영태 김구한

 

강연균 강요배 김영진 김재홍 김정헌 김진열 김천일 김현철 나규환 노원희 두시영 민정기

모노리 박불똥 박재동 박흥순 변승훈 손장섭 송 창 성낙중 신학철 심정수 안경진 안창홍

양형규 여태명 이영선 이명복 이원석 이종구 이종희 이철수 이태호 임옥상 장경호 정비파

조문호 주재환 최병수 황재형

 

사진, / 조문호





































































 





지난 수요일은 강민선생을 비롯한 인사동 터줏대감을 모시고, 
식사 대접하자는 기별을 장봉숙선생께서 보내왔다.
페북에서야 강 민선생을 간간히 뵙지만, 뵌 지가 한 달이 넘었다.





인사동 나주곰탕으로 갔더니, 문학평론가 구중서선생과 소설가 김승환선생,

사진가 정영신씨가 입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들 강 민선생을 기다렸으나, 선생께서는 이미 와 계셨다.

제일 멀리 계시는 분이 언제나 먼저 오신다.



 


자리 잡고 앉으니, 장봉숙선생께서도 오셨다.

매번 내가 꼴지로 나왔지만, 모처럼 꼴지 신세를 면한 것이다.



  정영신사진


강민선생은 귀가 어두운데다, 내가 하는 말까지 어눌해 소통이 잘 되지 않는다.

방동규선생께서 보이지 않아 근황을 여쭈었는데, 구중서선생께서 말씀하셨다.

"연락하니, 일이 있어 못 나온다"고 했다며,배추가 없으면 재미가 없다"고 아쉬워하셨다.



 


그런데, 장봉숙선생께서 선물 하나를 내놓으셨다.

얼마 전 중국여행 때 사왔다는 이과두주였는데, 병을 보니 보통 술은 아닌 것 같았다.

강 민선생 드리려 사온 술이겠지만, 맛이라도 좀 봐야 하지 않겠나?

눈치 봐 가며 슬슬 포장을 풀었더니, 식당주인이 말했다.

오늘만 강민선생님 때문에 봐주지만, 다음엔 절대 안 됩니다.”



 


52도나 되는 독주를 낮술에 쥐약인 내가 견딜 수 있을지 걱정스러우나, 어찌 귀한 술을 마다하겠는가?

맛만 본다며 조금 받아 마셨으나, 술 맛이 슬슬 당기기 시작했다.

홀짝홀짝 마시다, 나중엔 장선생과 정영신씨가 남긴 술까지 다 마셔버렸다.



 


방동규선생이 안 계시니, 구중서선생께서 이런저런 말씀을 많이 하셨다.

김두환씨가 시라소니 앞에 무릎 꿇었던 옛 이야기를 꺼내시며,

사실은 전해지는 무용담들이 좀 부풀려진 측면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배추가 맨주먹으로 열일곱 명이나 때려 눞혔다지만,

선생께 고백하기를 자기도 당한 적이 있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두 분이 각별히 친한 사이지만, 오래 전에는 다툰 적도 있다고 했다.

백기완과 구중서가 책 보라고 부추긴 죄로, 이것도 저것도 아닌 꼴로 살게 됐다"며,

술값은 늘 구중서선생께서 내게 하셨단다.





어느 날 인사동 실내악에서 구선생의 핀잔에 방선생께서 술값을 계산하고 먼저 일어난 것이다.

가다보니 술 값을 낼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지, 술값을 돌려 달라고 하셨다는데,

실내악 주인 김희주가 누구인가? 절대 못 돌려준다며 타박만 주었다는 것이다.





방선생께서 다방으로 올라가셨는데, 그곳에 계신 신동문시인께  "구중서와 의절하겠다는 말씀을 하셨단.

그 소리를 들은 신동문선생께서 갑자기 꿇어 앉어라며 호통을 쳤다는 것이다.

천하의 주먹이 손가락만 슬쩍 밀어도 쓰러질 비쩍 마른 시인의 말에 그냥 무릎 꿇고 앉았다는 것이다.

한참 있다 이제 일어나도 되냐고 물었더니, 좀 더 있어라 했단다.

얼마나 순진무구한 모습이냐?



 


그런 저런 이야기를 듣다보니 술이 슬슬 오르기 시작했다.

구중서선생께서 자주 가신다는 관훈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어지러웠다.

술 깨려고 인사동 주변을 돌아다니는 습관이 다시 도졌다.

길에서 까딱이를 몇 달 만에 만났지만, 술 취해 빌빌거리는게 불쌍한지 손도 벌리지 않았다.





나무화랑에서 열리는 목판대학 전시 때문에 그냥 갈 수도 없었다

다른 분들은 어디로 가셨는지 보이지도 않고, 강민선생 따라 기어 오르듯 전시장에 올라갔다.

김진하 관장과 정복수씨가 있었고 뒤 늦게는 김준권씨도 왔었는데, 전시된 작품들이 너무 좋았다.

초빙작가인 김진열, 정복수, 김진하, 문승영씨 작품은 물론, 학생들 작품도 예사롭지 않았다.

특히 이현숙씨 판화에 눈이 꽂혔다.



   

    

 

전시가 124일까지라 다음에 볼 작정으로 내려와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지러워, 강민선생께 인사도 드리지 못했다.

가까운 유목민 들어가 전활철씨께 택시 하나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어렵사리 집에 왔으면, 그냥 자빠져 자지 또 컴퓨터는 왜 켰는지 모르겠다.

누구에게 보고할 일도 없는데 말이다. 

음주운전보다 더 무서운 음주 포스팅을 기어이 하고 만 것이다.



 


그런데 희한한 꼴을 보았다. 갑자기 집채가 쓰러질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너무 불안해 기둥 사이로 돌을 집어넣기도 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소까지 지붕에 올라가 난리를 피우는 것이다.

소가 기와장을 튕기며 지붕 위를 뛰어 다니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더니 날 뛰던 소가 갑자기 땅에 떨어져 즉사한 것이다.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꿈이었다.



  

  

별 이상한 꿈을 다 꾸었다며 일어났더니, 컴퓨터가 켜져 있었다.

마우스를 당겨 보니, 음주 포스팅한 글에 댓글이 줄줄이 달려 있었다.

얼굴이 달아올라 급히 내리기는 했지만, 이미 볼 사람은 다 본 것 같았다.

속은 쓰린데다 망신살까지 뻗쳤으니,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 왜 이리 낮술에 맥을 못 추는지 모르겠다.

낮술은 애비도 몰라본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술 들어간 뱃속이 낮과 밤을 구분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리고 그 꿈이 뜻 하는 건 뭘까?

집안에 우환이 생길 징조는 아닌지, 해몽가라도 한번 찾아 볼일이다.


다시는 낮술과 음주 포스팅을 않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하건만, 그 버릇 개줄까 모르겠다.

 

 

사진. / 조문호







































          

롯데백화점 청량리점 롯데갤러리, 28일까지

[서울문화투데이] 2018년 10월 10일 (수) 23:28:22정영신 기자/사진가 press@sctoday.co.kr

자신만의 색채로 유성과 수성판화를 넘나들며 우리나라 미술사에 독보적인 판화화가로 불리는 판화가 김준권의 ‘산운山韻'전이 지난 3일 청량리 롯데갤러리에서 열렸다.

그가 한반도를 잇는 백두대간을 켜켜이 쌓아 형상화한 ‘산운山韻'은 5개월이라는 시간동안 48개의 목판에 먹물을 묻혀 찍어낸 수묵목판화로 지난 4월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때,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서명할 때, 뒤쪽에 내걸린 그림이다.


▲ 자작나무 아래-가을 101×187cm 유성목판(사진제공:나무기획)


그는 “남북은 단절됐지만 산은 그대로 있고, 산이 갖고 있는 우리 삶의 역사가 본모습인 한반도의 산하와, 강 건너 북한 혜산인근 ‘두만강가’ 풍경을 화폭에 담으며, 중국 땅에서만 볼 수 있는 우리나라를 경계 짓는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를 그리면서 마음속에 이미 남북한을 연결하고 있다”고 말했다



▲ ‘산운山韻'의 김준권 판화가 Ⓒ정영신


대동세상(大同世上)을 염원하며 35년째 나무에 새긴 목판화로, 그는 조국의 산하와 민중의 정서를 보통 사람들이 보는 것과 다르게 평화롭게 풀어낸다. 그의 작품 ‘청죽’은 대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찬 것으로 보이지만, 바람에 살랑거리는 미세한 떨림은 감상자로 하여금 고향산천을 떠올리게 한다.



▲ 山韻-0901 400x160cm 수묵목판 2009 (사진제공:나무기획)


그의 작품 ‘청죽’을 한참동안 들여다보면 시간의 문이 열리면서 어렸을 적 경험과 해후하게 된다. 어렸을 적, 맑은 햇빛이 조각난 채 내려오는 날이면 대나무 안에 소리가 들어있다며 할머니가 대나무밭으로 내 몰았었다. 음악이 귀했던 시절이라 대나무밭에 들어가 귀를 기울이면 안에 고여 있던 온갖 소리는 바람의 세기에 따라 속삭이다가, 때로는 합창을 하듯 맑디맑은 소리가 청록색으로 흘러 내려, 대나무 숲에서 부는 바람이 내 마음에 닿는 듯한 울림은 고향산천에 두고 온 기억으로 남아있다


▲ 청죽 167x90cmx3ea (사진제공:나무기획)


목판화는 죽은 나무를 살려내 작업하기 때문에 “나무의 맛을 읽어내는 것이 본질‘이라며, 옛 판화를 보면서 새로운 방식의 그림으로 창조할 줄 알아야 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옛것에 토대를 두면서, 당 시대를 읽어내 변화시킬 줄 알아야 목판화의 근본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대중미술문화를 창조하려는 의지로 사회정치적 이념을 풍자한 비판적인 리얼리즘을 모색했고, 기존미술에서 소홀히 다루던 현실문제등과 민족, 민중미술이라는 목적의식으로 미술운동을 펼쳤다. 80년대 후반기부터 2000년 초반까지 그의 작품은 저항적인 그림으로 우리사회에 메시지를 전달하고, 풍경을 통해 우리국토와 이웃의 상처를 형상화함으로써 자신만의 감성을 수묵목판화로 드러낸 것이다.


▲ 60X89cm 독도-서도 (사진제공:나무기획)


그는 한국현대사 속의 민중미술이 우리사회와 정치, 경제적 상황 속에서 자생적으로 파급되고 확산된 새로운 아방가르드 미술운동이었다고 회고했다. 갤러리를 벗어나 대학가, 노동현장, 노상집회, 정치운동의 현장과 대중생활을 파고드는 새로운 형식과 매체를 개발해 자신만의 목판화의 색체를 연구한 것이다.




▲ 이 산~ 저 산~채묵목판- 2017 합 285cmx188cm (사진제공:나무기획)


또한 전국의 절간을 돌아다니면서 대장경판을 살펴보고 탱화를 모사하기도 했다. 전국의 풍경을 스케치하며 재현하기 위해 치열하게 전통목판화 작업에 정교한 기법까지 연구하면서 자신의 작품과 연결시킬 수 있도록 다양한 실험을 시도한 것이다. 판으로 찍어 낸 그림인 판화는 종래의 복제기능으로서의 한계를 벗어나 유화 또는 수채화 작품과 마찬가지로 자기만의 조형언어를 담기 위해 우리나라의 산과 땅, 들과 물을 수묵목판화로 표현했다.



▲ 두만강가-무산 부근 109×187cm 유성목판 (사진제공:나무기획)


미술평론가 황정수씨는 “그가 작업한 태백마을을 형상화한 판화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감정의 내면이 잘 표현된 대표작으로 현실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고 있는 작품이다. 자신의 작품과 연결시키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시도한 일본의 전통목판화인 '우끼요에(浮世繪)'의 정교한 기법을 연구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루신(魯迅)미술학원에서 중국의 전통 목판화인 '수인(水印)판화'를 집중 연구하기도 했다. 이는 한국과 일본, 중국의 목판화를 비교연구하면서 새로운 목판화의 길을 찾으려는 그의 열정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리고 그가 산을 그리고 새긴다는 것은 한국인의 마음을 그리고 새기는 일로 한국인의 원형질인 정신이다” 고 평했다.


▲ 산에서...1303 160X84cm (사진제공:나무기획)


1000년이라는 긴 역사를 갖고 있는 판화의 맥이 끊어진 우리 고유의 판화기법을 되살리기 위해 그의 작업실 인근에 목판대학을 만들어 문화예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잇는 플렛폼을 만들었다. 그가 지향하는 전시장미술에서 현장미술의 기능을 수행하고자 하는 것이다. 특히 지난 2016년 12월부터 탄핵정국이 되는 2017년3월까지 ‘광화문미술행동’을 결성해 미술인들과 광화문텐트촌에서 현장미술을 온몸으로 실천해 일반대중과 문화예술로 소통했다.



▲ 40X70cm 꽃비 - 첫사랑 2015 (사진제공:나무화랑)


미술평론가 김진하씨는 “판화가 김준권은 국토를 순례하면서 삶과 어우러지는 풍광과 이웃들의 정서를 사실적으로 포착한다. 전통과 현대를 넘나들며 목판화에 대한 수행자처럼 장인적 정신으로 대상에 대한 감성과 사유가 함께 녹아서 어우러져 있다.

또한 자기실존의 결과물을 반영하는 것이 그의 작품이기 때문에 벽에 부딪치면서 새로운 변주를 끊임없이 시도하는 고행의 길을 걷고 있다. 쉬지 않고 목판화의 새 방식을 모색하는 그에게 작업은 그의 살아있음의 ‘과정’을 증거 하는 행위다. 그가 앞으로 더 깊어진 사유로 회귀할지, 아니면 기계적 프로세스를 타파하고, 더 놀라운 기술을 수용하며 목판화의 표현방법과 개념을 극한까지 넓힐지 좀 더 지켜봐야 알 수 있을 듯하다” 고 평했다.


▲ 산에서..240x140cm 수묵목판 2009 (사진제공:나무기획)


판화가 김준권의 이번 전시는 2007년 이후 10여 년간 그린 작품과 남북정당회담 작품인 ‘산운’을 직접 감상 할 수 있고, 사실적 풍경을 담은 유성목판화도 선보인다.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8시30분까지 관람할 수 있으며, 판화체험이벤트를 진행하고 ‘산운’작품 포스터는 500장 한정으로 증정해준다. 아울러 전시기간 중에 관람객 누구나 ‘산운’앞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죤을 준비했다.

판화가 김준권의 ‘산운山韻'전은 롯데백화점 청량지점 롯데갤러리에서 이달 28일까지 열린다.





광화문미술행동-100일간의 기록
100Days Document for Kwanghwamun Art Activity展
2017_0501 ▶ 2017_0516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30pm



나무화랑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 4층

Tel. +82.(0)2.722.7760



광장의 미술, 미술의 광장 - 보고 혹은 설명 ● 박근혜에 대해서 하야와 탄핵을 외치며 100일간 진행된 '광화문미술행동'의 프로젝트는 "OVER THE WALL"이란 붙박이 타이틀 아래 크게 세 개의 마당과, 15개의 작은 소주제로 14주 100여 일간 진행되었다. 「퇴진행동」본부와 「예술인 텐트촌」의 전체행보에 컨셉을 맞춤과 동시에, 미술행동이 자체적으로 지향한 방향성으로「차벽공략→차벽 넘어 광장으로→촛불광장」이란 진행과 정적 슬로건을 설정하고, 거기에 당시 긴급한 시국현안에 조응하는 시의적절한 실행 타이틀로 '바람찬 전시장'의 기획을 진행하며 촛불시민들과 소통했다. 그 15개의 슬로건을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차벽공략 Project  

- 2016. 12. 24: "촛불은 꺼지지 않는다."  

- 2016. 12. 31: "촛불이 국민의 명령이다-君舟民水"  

- 2017. 01. 07: "우리 모두가 블랙리스트 예술가다"  

- 2017. 01. 14: "응답하라! 1987, 한 걸음 더 2017!"   


2. 차벽 넘어 광장으로 Project  

- 2017. 01. 21: "동녘이 밝아온다"  

- 2017. 01. 28: "촛불시민 만복래"-캠핑촌예술위와 설날 한마당  

- 2017. 02. 01: "광장목판화전"(궁핍현대미술광장)  

- 2017. 02. 04: "새로운 나라로! - 彈劾大吉 建陽多慶"  

- 2017. 02. 11: "대선? 탄핵이 먼저다!'   

- 2017. 02. 18: "黑雲萬天 天不見"   


3. 촛불광장 Project  

- 2017. 02. 25: "임을 위한 행진곡"  

- 2017. 03. 01: "민주주의 촛불공화국 만세!"  

- 2017. 03. 04: "역사, 광장민주주의"  

- 2017. 03. 11: "촛불시민 여러분 사랑 합니다"  

- 2017. 03. 14: "촛불 역사전"(궁핍현대미술광장)


이런 정규적인 메인프로젝트 사이로 국회의사당, 검찰, 세종시 문화부 등에서의 현장 작업과,

여타 궁핍미술광장 목판화전 등의 다양한 부정기적 프로젝트 참여 등이 있었다.




12월 24일에 시작해서 네 번 진행했던 『차벽공략 Project』를 1월 중순에 『차벽넘어 광장으로 Project』란 슬로건으로 바꾸면서, 광장 한쪽 끝인 미대사관 앞 차벽으로부터 광장 중앙으로 진입했다. 그동안 미술행동의 『차벽공략 Project』 작업이 촛불시민들에게 호응을 받고 있다는 판단이 들어서였다(특히 1월 14일의 박종철 열사 30주기를 기념하며 기획한 "응답하라! 1987, 한걸음 더 2017!" 은 현장미술의 새로운 이정표가 될 기획이란 판단이 들 정도로 시민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2월 말쯤 헌법재판소에서 박근혜의 탄핵이 인용될 거라는 예측하에 광장 가운데서 시민들과의 '조우'와 '합류'가 우리들의 희망사항이라서 그렇기도 했다. 새로운 나라를 향한 중심 무대, 그 열린 광장에서 우리들의 미술행위도 촛불시민들과 함께 하기를 바래서이기도 했고. ● 우리는 미술행동의 작품을 설치하는 주 무대를 경찰차벽에서 세종대왕 동상 바로 뒤편의 8개의 조형물 기둥 사이에 'Open Air Gallery'란 이름으로 터 잡았다. 4회의 현장작업 진행하고 마침내 미술행동은 차벽을 넘어 광장에 이른 것이었다. 얼마 뒤 백기완 선생은 영어가 아닌 순우리말로 '바람찬 전시장'이란 이름을 붙여 주셨다. 시민들은 우리들을 더 환영했고, 또 시민들 스스로 미술행동의 현장프로젝트에 더 많이 참가했다. 또 그 결과물들을 더 가까이서 더 기꺼이 감상하고 향유했다. ● 그러나 2월로 예상되었던 탄핵인용은 다시 미뤄졌다. 광화문집회도 얼마나 진행될지 알 수가 없었다. 총 10개의 프로젝트를 소화한 뒤, 3월을 목전에 둔 2월 마지막 주부터 이제는 미술행동이 곧 촛불시민이고 또 광장의 한 주체라는 자부심에서 『촛불광장 Project』이라고 명명했다. 미술행동이 촛불시민들 한가운데에서 가족이 되었음을 알려도 될 만큼 상호 간 소통과 믿음을 공유하고 있다는 확신이 서서였다.





광장의 주체는 시민이다. 미술행동은 시민들이 제공한 무대에서 미술이란 특수한 분야를 실행한 또 다른 소수의 시민이었다. 민주주의란 보편성과 미술이란 특수성이 결합하고 융합하면서 불의한 권력과 공권력에 감성적인 '이미지투쟁'·합리적인 '상징투쟁'·그리고 역사적인 '기억투쟁'('상징투쟁,'과 '기억투쟁'이란 용어는 미술평론가 김준기선생의 글에서 차용)을 실행하면서, 동시에 촛불시민들과의 동지적 배려를 통해서 진심을 소통하는 겸손한 운동방향을 세웠고, 이는 미술행동의 기본적 태도이기도 했다. '진심과 전략'을 모토로 실행한 미술행동의 프로젝트는 참여작가 대부분이 쉰을 넘긴 나이였으나, 그럼에도 이 광장에서의 속도감 있는 프로젝트는 대부분에게 또 새로운 경험이었다. 상당수 작가들은 젊은 시절 민중미술운동의 주역들이라 능동적으로 자기작업의 포지셔닝을 이해했지만, 시민운동으로 그 틀이 바뀐 지금의 방법은 과거의 그것과는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명적인 프로젝트 진행의 이런 기획/진행 방식은, 1980년대 시위 현장에서의 물리적 충돌을 염두에 둔 전투성과는 또 다르게 작용하는 현장 소통의 메카니즘으로 원작자-기획자-시민들 사이에서 이해의 폭이 넓게 기능했다. 특히 기획자의 의도대로 작가들의 원작이 아닌 디지털 출력물들을 이미지 소스(Source)로 활용함으로, 원작의 아우라(Aura)나 '팍투라'를 거세한 '팍토그라프'적 정보 중심의 대중적 소통방식이 유발하는 현장성은 파괴력이 있었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정교하게 결과를 예측하고 준비를 하는 전시장 중심의 전시에 비한다면 상당 부분은 그 밀도감이 생경할 수밖에 없었지만, 예술로서의 작품 감상이 아닌 현장에서의 실제적 소통효과를 내야만 하는 목적에서 보면 기민하고 유격적인 작품제작/설치/향유의 방식으로선 좋은 전략이었다.





지난 100여 년간 근·현대 한국의 미술은 시민들과 겉돌았다. 현대미술이나 미학이 작가중심적인 것이고, 또 대부분의 미술이 미술관이나 갤러리 내부에서 벌어지는 제도적인 감상/거래의 대상이라서 그렇기도 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시민들과의 일상공간에서 만날 수 있는 대중적 소통문법과 교감의 독법을 실행할 수 있는 기획의 실험과 시도가 별로 없어서 그렇기도 했다. 특정한 장소를 반영구적인 고체로 모뉴멘트化 하는 공공조형물들의 하드웨어적 속성과는 달리, 이렇듯 공공적 집회와 시위에서 기민한 순발력의 퍼포먼스로 진행되는, 게릴라식 즉흥·즉발적 미술행위의 유연한 개입과 탈주의 현장성은, 한마디로 미술과 대중의 살아있는 호흡을 이루기에는 적합한 것이었다 ● 작업실에서처럼 작업의 고립된 주체로서의 '작가'가 아니라, 열린 광장에서의 상호 의견과 작업프로세스와 정서를 나누는 한사람의 '시민'일 때도 여전히 미술은 그 표현과 전달력이 강력하다. 미적으로 발달된 기능을 가진 '작가시민'이 마음만 있는 '일반시민'을 미술이란 공감의 과정으로 불러들일 때, 바로 그때 그 조우에 의해서 전혀 예상치 못한 신선함이 발생한다. 그 '발생'의 과정과 결과물이 특정한 공적 현장성과 정치적 이념성을 담보할 때, 우리는 살아있는 미술의 작용을 감동스럽게 나누고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 기실, 미술의 존재방식은 여러 가지다. 특정한 틀이 있을 수 없다. 작가의 생각·입장·태도도, 작업의 내용·형식·이념도, 관객의 관람과 수용하기에도 어떠한 룰이나 제도도 개입할 수 없다. 작업실에서 내밀한 자신의 세계를 소요하는 작가나 공공현장에서 사회적 가치를 부르짖는 작가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미술의 개념이나 소통의 작동방식에도 당연히 틀이 없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 현대미술은 제한된 제도의 틀 속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거기에 집단적 논리가 자리 잡았고, 자본과 기득권이 생겨났고, 그 결과 미술은 부와 명예의 코스프레를 위한 장식품이자 기호품의 이미지로 박제화되었다. 유통제도권 내에서 그림값이란 숫자로 대체된 미술은 2016, 7년의 겨울 광장에선 없었다. 시민들의 선택이 빛나게 한 민주주의를, 미술이 또 향유하는 역동적인 운동장이었다. 미술은 그곳에서 작가명 없는 익명으로, 자본가가 아닌 시민들을 만나고·호흡하고·울고·웃으면서 미술의 근원적 기능을 누렸다.




광장은 용광로였다. 모든 이질적인 것들을 용해해서 공동체적 발언을 주조해 낸다. 지난 100일간 광장에선 미술도 그런 용광로의 역할을 했다. 작가와 기획자, 작가와 작가, 작가와 시민, 시민과 시민들이 담장을 헐고,용융하고, 융합했다. 미술도 미적 조건 없이 시민들과 수평적으로 만나고 행동했다. 작가들의 그림에 시민들은 낙서를 했고, 거기에 작가들은 또 그림으로 응답했다. 작가/시민, 주/객, 예술/낙서, 토로/독백, 함성/속삭임, 그림/글, 이미지/리터러티들이 그 경계를 넘어서 함께 어울리며 광장을 거대한 표현과 발언의 현장으로 만들었다. ● 자유로웠던 것이다. 미술행동과 시민 사이에서 즉발적으로 발생하는 작용과 교감과 행동에 의해, 공동작업의 결과가 전혀 새롭게 생성되는 예측하지 못한 결과적 이미지의 우연한 발생은, 기존의 미술 관습과는 전혀 다른 현상이기도 했다. 굳이 미술이란 범주의 안팎 어느 지점에 있어도 상관없을 그런 열린 소통과 교호작용이었다. (다만 오랜 기간 고답적인 미술계와 그 구조 안에서 살아온 필자 같은 경우엔, 이 현상의 교감 내지는 정보전달작용의 싱싱함에 다소 낯선 느낌이 있기는 했지만) ● 아직은 논리적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체험이지만, 광장에선 미술의 어느 한 부분이 훨씬 건강하게 넓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감지된다. 일찍이 미술에서 시민이 미술가들과, 또 미술가들이 대중들과 이렇게 수평적으로 만난 적이 있었던가. 대부분의 관객 참여형 해프닝·이벤트·퍼포먼스도 기획자의 로드맵이나, 작가의 아우라에 의해서 진행된다. 그런데 수백, 수천, 수만, 수십만의 시민들이, 작가들과 함께, 작품행위의 객체가 아닌 주체가 될 수 있었던 현상은 2016~7년의 여기 광화문 광장에서만 있었다. 기존 미술계 시스템의 바탕에서 자본, 인맥, 학맥, 기타 제도화된 미술의 한계에서 일탈하는 거대한 열림의, 또 다른 미술의 개념과 프로세스와 장르적가능성을 보았다면 내가 지나친 걸까. ●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는 여전히 흥분해 있다. 기존의 제도와 양식과 개념의 틀로부터 일탈·이탈·돌파를 시도하는 미술은 얼마나 짜릿한 것인가, 라는 생각에 말이다. 지난겨울부터 봄까지 그 광장에 빠지지 않고 내가(그리고 우리가)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에, 거기서 능동적으로 시민들과 미술로 함께 했다는 사실에 난 얼마나 뿌듯해하는가. 감동이었다. 촛불시민이자 미술인으로서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추신-에피소드 1 ● 황당한 일이었다. 분명 정부종합청사를 가로막은 경찰차벽 앞에서 '광화문미술행동'이 시민들과 작업을 하고 그 결과물을 붙이기로 했는데, 그날따라 경찰버스가 나오지 않은 것. 미술행동의 첫 번째 '차벽공략' 프로젝트인데 그 대상인 경찰차벽이 없다니 닥친 현장에서의 그 난감함이란. 그 자리에 있던 미술행동 대장인 김준권 형과 부대장인 류연복 형, 총무 김남선씨와 나, 그리고 몇 명의 멤버들 모두 허탈했다. 리어카에 가득 실어온 각종 그리기 도구들이 무색했고, 그 리어카 한쪽 귀퉁이에서 하릴없이 혼자서 펄럭이는 '광화문미술행동' 깃발이 야속했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의 적당한 한기와 바람이 우리들의 눈에서 초점을 흐리게 했다. 준권 형이 나를 돌아보며 묻는다. "어떡하지?" 묻는 것보다는 차라리 탄식이다. "다른 자리를 찾죠, 뭐. 여기만 의미 있는 장소는 아닐 테니."라고 대답하는데, 연복 형이 끊고 들어온다. "아무 차벽이나 골라서 하자고. 다 광화문인데. 괜찮아." 모두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오후 1시의 광장엔 아직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모두의 눈이 동시에 모아진 곳은 미대사관 앞에 장기적으로 정박(?) 중인 굳건한 경찰차벽이었다. 바로 앞 세종대왕 동상 뒤편의 광장도 넓게 비어있다. '퇴진행동'의 메인 무대로 치자면 맨 뒤쪽이니, 행사가 시작되어도 다른 곳에 비해선 인구밀도가 다소 낮은 곳이라 작업조건도 좋은 편이란 생각이 들었다. "저기 미 대사관 앞으로 갑시다. 저기 경찰차는 행사가 끝날 때까지 뿌릴 내리고 있을 터이니"라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준권 형과 연복 형은 김총무에게 리어카를 끌게 하곤 벌써 세종대왕 동상 쪽으로 가고 있다. ● 불과 이삼일 전에 급하게 이 프로젝트를 시작해서 우리들은 아직 어떤 계획도 없었다. 준비고 뭐고 게릴라 특유의 현장 임기응변으로 첫날 작업을 하기로 했다. 준권형과 김총무는 부랴부랴 청계천과 여기저기에서 사다리·실사출력천·물감·크레용·기타 물품들을 준비했고, 웹자보를 이은걸씨가 디자인했다. 난 2주쯤 뒤 프로젝트를 기획하기로 한 터라 지금은 그저 현장에서 몸으로 할 일밖엔 없었으니, 나뿐 아니라 모두가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세종대왕 동상 뒤편에 이르자 바로 출력 롤지를 대략 15m씩 너덧 개를 바닥에 테이프로 고정하며 낙서를 시작했다. 제발 많은 시민들이 동참해서 거기에 쓰고, 낙서하고, 그리고, 밟고 지나가기를 바라면서. ● 이 즉흥적인 첫 번째 해프닝은 성공적이었다. 우리들과 작가 몇 명이 바닥에 엎드려서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면서, 호기심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구경하는 시민 관객들에게 동참을 호소하자 곧바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깔깔거리면서 낙서를 한다. 그리고 바로 옆에서는 서예가 여태명 선생의 온몸을 사용하는 큰 붓질로 서예퍼포먼스(김준권 형이 미리 기획한 프로그램)가 동시에 진행되었다. 시민들이 점점 모여들어서 그 현장을 둘러싸서 구경하고, 사진을 찍고, 또 낙서에 동참한다. "박근혜는 하야하라!", "민주주의 만세!" 등과 같은 낙서가 대세였다. ●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광화문미술행동의 첫 번째 '차벽공략 프로젝트'는. 마침 화가 송용민씨가 붙박이로 붙어서 현장관리를 한다. 자발적이고 자동적이고 유기적으로 돌아가는 멤버들의 참여 시스템은 그렇게 자연스레 파르티잔의 게릴라 전술처럼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구축되어 가고 있었다. 12월 31일도 마찬가지였다. 다이나믹한 이미지들이 수십 미터의 대형 천위로 집적되었다. 촛불시민들의 박근혜정권에 대한 심판과 민주주의에 대한 갈증은 컸다. 그것을 차벽에 붙일 때(경찰들과 실랑이가 있었고, 또 12월 31일의 작업 중 가장 큰 차벽작업은 분실되기도 했다) 뿌듯한 마음이 일었다. 미술행동의 '차벽공략'이 시작된 순간이었으니까.




추신-에피소드 2 ● 해가 바뀐 2017년 1월 7일. 새해 첫 프로젝트로 "우리 모두가 블랙리스트 예술가다-衆志動天"이란 타이틀을 실행했다. 새해 초부터 준권형과 전화로 컨셉, 타이틀, 방법 등에 관한 많은 협의를 했으나 당장에 어떤 작가도 1~2주 만에 신작을 준비할 수는 없는 일이라, 80년대 오윤·이철수·홍선웅·이상호의 목판화와 류연복의 근작·정찬민의 근작·이윤엽의 백남기 농민 등의 목판화를 대형 실사출력한 사이로 이윤엽의 파편화시킨 이미지들을 배치하고, 거기에다가 시민들이 참여하고 낙서할 빈 여백을 만들었다. 시민들과 작가들의 경계가 없어지는 작업이다. ● 이날도 또 재미있는 사건이 연속으로 일어났다. 지난주까지 차벽에 작업을 부착할 때 우리를 바라만 보던 경찰이 이날은 부착을 막는 것이었다. 그래서 경찰과 실갱이를 하던 우리는 긴 그림은 들고 서서 전시를 하고, 3m높이의 그림은 차벽 앞 도로바닥에 작품을 설치했다. 벽화가 바닥화로 바뀐 것. 차벽에 그림걸기라는 일종의 데몬스트레이션에, 또 즉흥적인 바닥화로서의 데몬스트레이션을 추가한 행위였다. 많은 시민들이 동참해서 그림을 함께 들어주기도 했고, 또 정찬민의 '세월호 미귀환자 초상'에는 촛불을 설치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밤 7~8시경 경찰들이 다른 곳으로 위치 이동한 틈을 타서 우리는 급하게 이 그림들을 차벽에 부착했다. 많은 시민들이 박수를 치고 격려의 함성을 우리에게 보내며 부착을 도와줬다. 그러다가 한 10분쯤 뒤에 보니 그림 한 점이 위치가 바뀌어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난 위치를 바로잡으려 까치발로 그림을 떼서 손에 든 채로 돌아서는데 누군가 갑자기 내 멱살을 잡는 것 아닌가. 시민들 대여섯 명이 우루루 몰려와서 나를 빙 둘러싸고는 포박하듯 내 양팔을 붙잡고 "당신, 누구야? 왜 그림을 떼는 거요?, 당신 경찰이야? 아니면 박사모야?"라며 소리쳤다. ● 이런 황당한 일이... 바로 옆에서 울리는 메인 무대의 거대한 마이크 소리 때문에 "내가 이 프로젝트의 기획자입니다"라고 나를 밝히는 내 목소리는 그들에게 들리지 않아서, 1분 정도를 난 멱살이 잡힌 채로 그들에게 '박사모'로 오인되어 혼쭐(?)이 났다. 청와대로 행진하던 시민들이 차벽의 그림을 내가 폐기하는 줄 오해하고 그런 것이었다. 그림을 떼지 않겠다는 내 몸짓이 그들에게 입수된 다음에 비로소 내 멱살은 풀렸다. 봉변(?)을 당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다행히 민주시민들이라 폭력은 당연히 없었던 터, 시민들은 이 그림을 자신들의 마음과 동일한 것으로 여겼기에 나를 제어한 것이었으니까. 언제 미술이 대중들에게 이런 관심과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있었던가?, 라는 흐뭇함과 함께 그간의 시민들과 유리된 채로 오로지 자본적 가치로만 존재해 온 미술에 대해서 약간의 자괴감도 동반되긴 했다. ● 확실히 광장에서는 작가가 아니라 시민과 대중이 주체다. 생각해보니 광화문미술행동을 운영한 건 작가들이지만, 일을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준 건 촛불시민들이었다. 자본을 가진 재벌이 아니라, 촛불시민들이 '메쎄나'였다. 십시일반 모금함에 작은 돈을 넣어주고, 작은 판화전에서 작품을 사주고, 일회성 경매에서 판화나 글씨를 응찰해주고, 또 어떤 분들은 따로 봉투를 전해 주고... 바로 그런 시민들이 마련한 운동장에서 우리는 함께 뒹굴고 놀았던 것이었다. 재미있게 놀아서 이런 사랑도 받았다. 불의하고 불법적이고 무능한 정치권력 앞에서 시민들은 자동적으로 운명공동체가 되었다. 한 사회에서 참여하는 시민들의 윤리적·정치적·사회적 의식의 성숙도가 이리도 높을 수 있는지를 1980년의 광주에서 전해들은 이후 처음으로 느꼈다. 바로 그 역사적 현장에 내가 있었다. 광화문미술행동도 있었다. 시민이자, 작가이자, 기획자로 바로 거기에 우리들이 있었다. 그리고 승리했다. 정치적 승리이자 미술의 승리이기도 하다. 이런 숭고함과 넉넉한 기쁨과 영광이 어디 있으랴. 이런 미술행동의 동기를 제공해 주신 촛불시민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촛불시민 여러분, 고맙습니다". ■ 김진하


『광화문미술행동-100일간의 기록』책 출간  

김준권, 김진하 엮음  

ISBN: 978-89-966435-9-3  

나무아트 刊 / 100페이지 / 24*19cm / 800부 한정판 / 값 15.000원


Vol.20170504d | 광화문미술행동-100일간의 기록展



‘‘바람찬 전시장’을 주 무대로 석달 동안 열 네 차례에 걸쳐 다양한 현장미술을 펼쳐 촛불시민들과 함께했다,

자유롭게 벌인 미술 놀이판은 시민들과 쉽게 가까워 질 수 있었고,

이러한 미술과 대중의 소통으로 미술본연의 일상성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은 게 성과라면 성과다.

마지막 전시였던 ‘촛불역사’전 역시 지난날의 모습을 돌아 볼 수 있는 현장사진들이라 시민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이제 박근혜 파면과 함께 ‘광화문미술행동‘의 모든 작가들이 제 자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사진가들과 화가 ,시인, 시민들의 사진으로 마련된 ’촛불역사‘전이 ’광화문미술행동‘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된 것이다.

전시가 끝나는 날은 박근혜가 검찰 조사받는 날이라 곧바로 구속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했다.

그러나 검찰은 미적거리는 것 같았고, 다들 대선에만 꽂혀 개혁이나 적폐청산은 뒤로 밀려나고 있다.

그렇지만 국민이 지켜보고 있는 이상 물길을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다.

지난 21일 정오 무렵 전시를 철수하기 위해 미술행동 팀들이 ‘궁핍현대미술광장’ 전시장으로 모여들었다.

김준권대장을 비롯하여 류연복, 김남선, 김영배, 이광군, 김명지, 정덕수, 김가영씨,

그리고 참여사진가로는 이정환, 양시영, 곽명우, 홍윤하, 하형우, 정영신씨가 나왔다.

기념사진을 찍고 곧바로 전시를 철수했는데, 한마디로 시원섭섭했다.

다들 점심식사를 해야 하는데, 김준권씨가 광화문 음식에 질렸는지 인사동으로 가자고 했다.

‘툇마루’에 가서 된장비빔밥을 먹기로 했으나, 자리가 없어 한 참을 기다렸다.

그 자리에 사진가 이정환씨가 집에서 담근 매실주를 한 병을 갖고 나오셨다.

불편한 몸으로 무거운 술을 챙겨온 성의가 고마워 쪼록 쪼록 마시다보니, 그만 낯 술에 취해버린 것이다.

그동안 수고하셨다는 인사조차 드리지 못한 채, 횡설수설하며 이곳저곳 전시장을 돌아다녔는데,

낯 술에 취하면 지애비도 못 알아본다는 옛말이 맞긴 맞았다.

아무튼 주책 떨어 죄송하고요, 그동안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그 고생이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사진, 글/ 조문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