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방곡곡 / 노포기행

골동품점에서 뉴욕갤러리까지

먹고살기 위해 시작한 골동품 가게
아버지에 이어 아들이 2대째 경영
이제는 우리 문화 알리는 문화메카로

 

20일 서울 종로구 통인화랑에서 김완규 대표가 1층 공예품 판매점인 '통인가게'를 소개하고 있다. 최주연 기자

서울 종로구 송현동에서 안국동을 잇는 ‘인사동 거리’가 한국 전통문화의 중심지로 자리 잡기 시작한 건 일제강점기부터다. 식민통치로 벼슬길이 끊긴 경복궁 일대 양반들이 생계를 위해 내놓은 세간살이 중 귀물이 일본인이 운영하는 골동품 상점으로 몰려들었고, 때로는 양반들이 직접 가게를 열기도 했다.

 

오늘날 인사동길에서 가장 많은 골동품을 보유하고 있는 통인화랑의 전신인 통인가구점도 1924년 통인동에서 문을 열었다. 뼈대 있는 안동 김씨 가문에서 태어나 평생 고생이라곤 모르고 살 줄 알았던 12세 소년이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시작한 골동품 가게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한 외국인의 입소문을 타면서 한국 고미술을 알리는 문화공간이 됐다. 지금의 관훈동으로 옮겨 온 이후엔 신진 작가들의 등용문이 됐다. 전문성과 가치를 인정받은 통인화랑은 2019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100년 가까운 역사 동안 예술인들의 사랑방으로 자리를 지켜 온 통인화랑을 20일 찾았다.

 

1대 김정환 대표에 이어 아들 김완규 대표가 2대째 운영..한 세기 가까운 역사

20일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통인화랑. 최주연 기자

통인화랑은 인사동길에서도 가장 많은 관광객이 오가는 중심도로에 위치하고 있다.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나오는 1층의 ‘통인가게’에선 나전칠기를 비롯해 도자기와 장신구 등 각종 공예품이 방문객을 반긴다. 지하 1층과 지상 5층은 공예품과 회화를 전시하는 갤러리로, 지상 4층은 골동품을 보관∙판매하는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엘리베이터가 있어 계단을 이용하는 손님이 많지 않지만, 붓글씨 작품 등이 벽면에 빼곡히 걸려 있어 한 층 한 층 구경하며 걸어 올라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지금이야 7층 건물이 흔하지만 건물을 새로 지어 올린 1973년만 해도 인사동 일대에서 홀로 우뚝 선 고층 빌딩이었다고 한다. 2대째 가업을 잇는 김완규 대표는 “1972년 윌리엄 로저스 국무장관이 가게를 방문했다가 급하게 화장실을 찾길래 하는 수 없이 동네 푸세식 변소를 알려줬는데 경악을 하던 상황이 두고두고 민망했다”면서 “우리나라 문화를 보러 온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공간부터 품격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건물을 새로 지었다”고 설명했다.

 

20일 서울 종로구 통인화랑 4층에 수집된 고미술품이 전시돼 있다. 최주연 기자

한국 예술에 대한 김 대표의 강한 긍지와 책임감은 통인화랑을 세운 아버지 김정환씨 영향이 컸다. 미술 공부는커녕 마땅한 관련 서적도 없던 일제강점기에 가게를 차린 소년 김정환은 물건 보는 눈을 기르기 위해 행상을 하던 노인을 따라다녔다.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사고, 유물 출토 현장을 찾아 구경했다. 그렇게 습득한 기술로 손님들에게 항시 가장 좋은 물건만 내놓았고, 직접 수리까지 했다. 그 밑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배운 김 대표가 한국 문화 애호가가 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국내외 유명인사들의 단골 가게...갤러리에선 신진 작가 발굴

 

20일 서울 종로구 통인화랑 5층 갤러리 공간에 전시 중인 작품들. 최주연 기자

정직을 모토로 삼은 통인화랑에는 사람이 몰렸다. 삼성그룹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을 비롯해 한국화학 설립자 김종희 회장, 중요무형문화재를 제도화하는 데 앞장선 언론인 예용해, 체이스 맨해튼 은행 총재를 역임한 데이비드 록펠러 등 국내외 유명 인사들이 가게의 단골손님이었다. 한국의 대표 원로화가 권옥연은 하도 자주 가게를 드나든 탓에 “통인가게에 값을 치르려면 그림을 칠해 놓고 말릴 새도 없이 팔아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했다.

 

1973년 가게를 물려받은 청년 김완규는 '잘나가는 골동품 가게'에 만족하지 않았다. 단 한 명의 소유로 그치는 골동품에 한계를 느꼈다. 많은 사람들이 우수한 공예품을 즐길 수 있어야 국가 전반의 문화예술 수준이 올라간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조악한 대량 생산품에 반기를 들고 영국에서 공예운동을 일으킨 윌리엄 모리스의 이론이 김 대표의 생각과 맞아떨어졌다.

 

1980년대 통인가게를 찾은 록펠러(오른쪽) 전 총재의 모습. 통인화랑 제공

1975년부턴 이름을 ‘통인화랑’으로 고치고 갤러리를 열었다. 초기엔 동양미술품을 주로 전시하다 유행이 서양화로 바뀌자 현대미술로 콘셉트를 바꿨다. 지금은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으로 불리는 박서보가 1976년 첫 개인전을 연 곳이 통인화랑이다. 윤광조와 허건, 피에스탁만 등 국내외 작가들의 전시를 유치하면서 공예∙회화 전문화랑으로 저변을 넓혔다. 김 대표는 “지금도 작가들의 문의가 쇄도해 한 달에 두어 번씩 전시 내용을 바꿔야 겨우 소화할 정도”라고 설명했다.

 

세계로 진출하고 사업 영역도 확장...강화도 아트단지도 추진

더 많은 외국인을 화랑에 끌어들이기 위해 김 대표가 40년간 분기에 한 번씩은 개최한 게 판소리와 오페라 공연이다. 많은 외국인과 교류하며 한국문화의 저력을 체감한 김 대표는 해외로 눈을 돌렸다. 한국 사람들에겐 인기 없는 작가라도 작품만 우수하다면 외국 시장에서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1980년대엔 홍콩에서, 2002년엔 뉴욕에서 갤러리를 열었다. 각각 15년과 8년간 운영하며 자신의 생각을 증명해 냈다. 그가 세웠던 갤러리가 이제는 ‘한국홍보대사’ 역할까지 톡톡히 하고 있다.

 

통인화랑에서 열린 판소리 공연. 통인화랑 제공

미술품을 잘 다루기 위한 김 대표의 노력은 관련 사업으로까지 연결됐다. 국내 최초로 포장이사서비스를 도입한 ‘통인익스프레스’가 대표적이다. 김 대표는 “과거엔 신문지로 물건을 싸서 배송했는데, 록펠러가 ‘가게 수준에 비해 포장 서비스가 뒤떨어진다’며 미군부대에서 버리는 종이로 포장해보라고 해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말했다. 해외화물수출입 업체인 통인인터내셔날과 국내 최대 규모 문서 보관 회사인 통인안전보관도 미술품을 안전하게 배송하고 보관하기 위한 김 대표의 생각에서 비롯됐다.

 

백발이 성성해진 김 대표지만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오히려 더 커지고 있다. 부친이 사용하던 통인화랑 7층 작은 사무실로 출근하는 그는 현재 인천 강화도에 아트단지를 조성하는 사업을 추진 중이다. 강화도에 변변찮은 문화체험 시설이 없다는 아쉬움에 10개 미술관을 새로 만드는 프로젝트에 뛰어들었다. 김 대표는 “화랑은 돈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좋은 전시를 했다는 사실에 만족할 따름”이라며 "앞으로 좋은 작가를 발굴하고 우리 예술을 알리는 데 이바지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일보 / 최다원 기자 da1@hankookilbo.com]

'통인가게’에서 세종대왕 탄신623돌을 맞아 잔치를 벌인다는 반가운 소식을 받았다.

그 날이 스승의 날이라, 달력에 동그라미까지 쳐 두었다. 세종대왕이야 말로 영원한 우리의 스승이 아니던가?

스승의 날은 일찍부터 마음이 바빴다. 스승 찾아 저승 갈 것도 아니면서, 왜 그리 서둘렀는지 모르겠다.

서울역으로 거리의 철학자 부터 만나러갔다.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는 새로운 스승이다.

그는 막걸리 한 잔에 어린애처럼 즐거워한다. 행복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란다.

몇 잔의 낮술에 천하를 얻은 듯 하다. 축축하게 비에젖은 인사동조차 술 맛 땡기게 한다.

‘통인화랑’에는 반가운 분들이 모여 있었다.
'통인' 김완규, 이계선 내외를 비롯하여 권재일, 이윤영, 오치우, 배일동, 이동환, 송재엽씨 등 많은 분들이 와 있었다.

인사 나누랴! 사진 찍으랴! 술 마시랴! 혼자 바빴다.
그런데, 관우선생이 나만 알리지 않고, 참석하는 분은 자기 먹을 안주를 챙겨오라 했던 모양이다.
인사동 거리 악사까지 불러 잔치에 풍악을 울릴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그 마음이 고마웠다. 차별한다면 거지같은 나를 친구로 여기겠는가?

전시장에는 화가 최승호씨의 ‘일지’가 전시되고 있었다.

회화와 조각의 장르를 넘나드는 작품으로, 차가운 철판에 인간 내면 심리를 서정적으로 드러냈다.

전시는 6월7일까지 열린다.

‘통인가게’ 김완규 대표를 비롯하여 권재일 한글학회장,
‘훈민정음은 없다“는 영화 제작자 오치우씨 등 여러 명이 나와 이야기도 하고 노래도 불렀다.
배일동씨의 절창은 숨 쉴 틈조차 안 주는 무서운 폭풍 그 자체였다.

그런데, 일찍부터 술이 취해 실수는 안 했는지 모르겠다. 명색이 기자란 자가 정신을 놓아 기억도 잘 안 난다.

세종대왕께서 노비의 출산 휴가를 넉넉하게 주었다며, 정치로 인문정신을 구현했다는 권회장 이야기가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리고 세종대왕, 이순신, 제갈공명, 이 세 분의 공통점을 묻는 퀴즈도 나왔는데, 답은 모두 54세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 분들에 비하면 징그럽게도 오래 산다는 생각을 하며 돌아왔다. 

지하철 타러가다 만다라 화가 전인경씨를 만났다. 스승이신 이인섭선생 만나러 ‘유목민’ 간다고 했다.

스승과 제자의 만남을 기념하는 사진을 찍으며 스승의 날을 마무리했다.

사진, 글 / 조문호







‘통인가게’ 관우선생 만나러 인사동에 갔는데, 김이하시인 사진전부터 들리느라 시간이 좀 지체되어 버렸다.




늦었지만 발길을 재촉했는데, ‘상광루’에 있어야 할 관우선생 일행이 인사동 거리에서 내 카메라에 포착된 것이다.
배일동 명창과 권재일 한글학회장, 변작가 등 여러 명이 낙원동 ‘다리밑 집’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관우선생이 발굴한 단골집 ‘다리밑 집’은 이제 낙원동 명물이 되어버렸다.
다른 집은 손님이 없어도 포차나 다름없는 그 집은 항상 손님이 넘쳐난다.
그 날도 손님이 많아 길가에 자리 잡았는데, 바람은 또 얼마나 시원한지 코로나도 도망칠 것 같았다.




관우선생이 조제한 막맥에다 감자부침, 닭발 등의 일품 안주가 나왔다.
난, 통풍 때문에 한 번도 막맥은 마셔보지 못했지만, 맛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생맥주에 막걸리를 회석하는 막맥은 냉동시켜 차게 만든 생맥주 잔도 한 몫 한다.
결국은 생맥주와 막걸리의 회석 비율이 맛을 좌우하는데, 관우선생의 칵테일 비결은 아무도 따를 자 없다.




관우선생은 ‘통인가게’를 찾는 벗들을 대부분 이곳으로 안내한다.
처음엔 돈 많은 재벌이 코 구멍만 한 가게를 찾아 의아해 하지만,
막맥과 안주를 맛보고는 다들 역시를 연발하며 단골이 되어버린다.




그 날은 얼마 전에 일어났던 웃지 못 할 헤프닝 한 토막을 들려주었다.
패션과 아트, 음악, 그림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울러 독특하고 실험적인 디자인으로 유명한
팝아티스 까스텔 바작이 통인가게를 방문하여 이 집으로 안내했단다.
그 역시 막맥의 독특한 맛과 포차 같은 술집 분위기에 반해버린 것이다.
기분이 좋았던 그는 낙원상가 계단 벽에 멋진 벽화를 그렸다고 한다.




그 장소가 아니면 어울 릴 수 없는 대단한 작품이 탄생해 다들 인사동 명물하나 생겼다고 좋아했다는데,
다음 날 가보니 깨끗하게 지워지고 없더라는 것이다.




알아보니, 건물관리인이 고생스럽게 지웠다는데,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명작이 무지한 관리인의 실수로 사라지고 만 것이다.
아무리 몰라도 그렇지, 척 보면 똥인지 된장인지는 분별해야 할 것 아닌가?




작가도 그 때 기분이 아니면 다시 그릴 수 없는 그림이라며 아쉬워했다는데,
직무에 충실했다는 건물 관리인만 탓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 소리를 들은 권재일회장은 그 벽화를 지운 이야기 자체가 예술로 더 오래 회자될 수 있을 것이라며 위안했다.



이차를 가자는 관우선생 말에 다들 일어났다.
잘 가던 ‘유진식당’ 가는 줄 알았는데, 경운동 방향으로 이끌었다.
흥선대원군 집터 골목으로 한 참 끌고 가서는 허름한 식당으로 안내했는데,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싸고 맛있는 집만 찾아다닌다.




그런데, 이차로 간 음식점에서 아쉽게도 음식 맛을 보지 못했다.
전 날 밤 컴퓨터와 노느라 날밤을 깠는데, 취기가 오르니 졸음이 쏟아졌던 것이다.




배일동 명창이 부르는 ‘사철가’ 소리에 화들짝 잠을 깬 것이다.
관우선생이 술만 한 잔 들어가면, 이산 저산 찾는 노래가 아니던가.
폭포가 쏟아지는 것 같은 우람한 소리와 애간장 녹이는 절절한 소리에 귀가 번쩍 뜨인 것이다.




언제 이런 술집에서 대명창 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까스텔 바작의 벽화는 하루라도 버텼지만, 배명창 소리는 그 자리서 날아갔다.
어차피 예술이나 인생이나 사라지는 것은 매일반이니, 어디 한 번 멋지게 놀아 보자구나.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허드라
나도 어제 청춘이러니
오날 백발 한심허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 헌들 쓸 데 있나
봄아 왔다가 가려거든
가거라 네가 가고
여름이 오면 녹음방초
승화시라 옛부터 일러있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돌아오면 한로상풍 요란해도
제 절개를 굽히지 않는
황국단풍도 어떠헌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돌아오면 낙목 한천 찬 바람에
백설만 펄펄 휘날려
은세계가 되고 보면
월백 설백 천지백하니
모두가 백발의 벗이로구나“

사진, 글 / 조문호




































몇 일 동안 여러 가지 고민에 휩싸여 죽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코로나119'로 사회적 거리두기란 캠페인에 방콕해서 그런 게 아니라

김명성씨로부터 전달받은 돈도 한 몫했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검찰이나 정치꾼들의 비인간적인 꼴에 간도 뒤집히지만,

몇 일 전에는 동자동 쪽방 촌의 유영기씨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왜 나쁜 놈들은 잘 살게 놔두고 착한 사람만 데려가는지 모르겠다. 과연 신이란 게 존재하는 것인가?.

종교라는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정화시켜 주는 역할은 하지만, ‘신천지꼴을 보니 사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벌금 내라며 김명성씨가 200만원 상당의 사진을 팔아주었는데, 죽어도 벌금을 내기 싫은 것이다.

그 사건을 담당한 검사는 말할 것도 없고, 판결 내린 판사도 똑 같은 놈이었다.

돈에 눈깔 뒤집혀 자연환경을 망가트리는 개인의 명예가 중요한가? 공익이 중요한가?

그런 개좆같은 판결에 승복하는 자신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차라리 그 돈으로 서울역을 떠도는 부랑자나 쪽방 촌 친구들을 불러 모아 마지막 만찬이라도 벌이고 싶었다.

요즘 식당도 텅텅 비었으니, 도랑치고 게 잡는 격이 아닌가?

그러나 나를 걱정해 주는 이들이 눈에 밟히기도 하지만, 죽는다는 것이 생각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몇 날을 누워 이런 저런 생각만 하다 보니, 일단 주변정리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쪽방에 갇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페친을 정리하는 일 뿐이었다.

그동안 내가 지적한 일의 반감으로 뒤통수치거나, 한 통속이 되어 반응 없는 페친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대부분 오래된 인연이라 차마 친구 끊기를 못했는데, 이참에 100여명을 골라 삭제해버렸다.

그 대신 페친이 넘쳐 받아주지 못했던 잘 모르는 분들을 모두 받아들였다.

분풀이 치고는 치졸했으나, 엉뚱한데 신경 쓰지 않고 내 일에만 전념하겠다는 각오였다.


 

지난 18일은 모처럼 외출할 준비를 했다.

정영신씨께 연락해 인사동 통인화랑에서 열리는 변승훈씨와 강경구씨 전시를 보기로 했다.

개막식은 오후 다섯시였으나 요즘 전염병 때문에 사람 많이 만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오프닝에 날아들 똥파리를 피해 일찍 나선 것이다.


 

인사동도 며칠 전과 달리 사람들이 제법 나왔더라.

달라진 풍경이라면, 때 거리로 몰려다니는 외국관광객이 사라졌다는 것과

수도약국 앞에 마스크 사려고 줄선 행렬이었다.


 

강경구씨 전시가 열리는 통인가게’ 5층부터 올라갔더니, 관우선생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따라주는 와인 한 잔들고 전시작들을 돌아보았는데, 작품이 너무 좋았다.

마치 고뇌하는 오늘의 인간상을 그린 듯한데, 어찌 보면 이글어진 내 모습 같기도 했다.

좋은 작품들을 보니 마음이 편안했다.


 

다음에 볼 전시는 지하에서 열리는 변승훈씨의 도예전 手作禪이었다.

반갑게도 작가 변승훈씨도 있었고 이계선관장도 있었다.

오래 된 작품에서 부터 최근작까지 골고루 전시되었는데, 분청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변승훈씨만의 독창적인 작업이었다.

특히 최근에 제작한 불상 형태의 작품들을 보며 신은 인간자체란 생각이 들었다.

그 작품은 불상이 아니라, 안성장터에서 몇 십년 동안 자리를 지킨 할머니들을 모델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예술의 힘은 무서웠다. 온갖 근심 걱정을 다 떠안은 불편한 마음이 눈 녹듯 녹아 내렸다.

전시들이 곳곳에서 열리지만, 별 의미 없는 불편한 전시가 더 많은 현실이라 운도 따라야 한다.




인사동에서 믿을 수 있는 갤러리로는 통인가게전시장과 나무화랑정도로 꼽는다.

통인은 대관에 의지하지 않고, 관우선생과 이관장의 안목으로 초대되는 전시라 일단 보증할 수 있고,

나무화랑역시 미술평론가 김진하씨가 운영하는 화랑이라 실망시키는 전시가 별로 없다.


 

좋은 전시들을 보아 기분이 좋으니, 반가운 연락까지 왔다.

정영신씨가 며느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는데, 아들 내외와 손녀 하랑이가 온다는 것이다.

부리나케 정영신씨 녹번동 집에 갔더니, 더디어 귀여운 공주님이 나타난 것이다.



귀신같이 생긴 내 모습에 울기도 하고, 제 모습을 담은 동영상에 깔깔거리기도 했다.

변화무쌍한 하랑이의 표정과 쉼 없이 휘젓고 다니는 모습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부근에 있는 연안식당으로 옮겨 외식까지 했는데, 밥도 엄청 잘 먹었다.


 

그래, 좋은 일에 위안 받고 살자. 사는 게 별 것 있겠나.

 

사진, / 조문호













 

 




오랜 세월 인사동을 지켜 온 ‘통인가게’ 관우선생으로 부터 연락이 왔다.
며칠 전에도 전화를 하신 모양인데, 일할 땐 전화기를 곁에 두지 않아 못 받았다.
해 바뀌었으니, 점심식사라도 한 끼하자며 날자를 잡았다.



이젠 나이 들어 몸이 신통찮으니벗들의 술 마시자는 연락도 잘 따르지 못한.

예전에는 술 마시자는 연락만 오면 쪼르르 달려갔으나, 일 끝내기 전엔 천하일색 양귀비가 꼬셔도 못 간다.


 

한 때는 일 보다 노는 것이 먼저였다

노세노세 살아 노세! 죽고 나면 못노나니“ 를 외쳤는, 힘이 따라주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지난 30, 점심시간 맞추어 통인가게상광루에 올라가니, 한겨레기자로 정념퇴임한 임종업씨가 와 있었다.

인사 나누기가 무섭게 진로포도주 한 잔 따라 주었는데, 옛날 생각나는 술로 맛도 괜찮더라.

빈속에 짜~리리리 내려가는 술기운이 아주 매혹적이었다. 역시 술과 사랑은 배부르면 갓댐이다.


 

그날은 새해 복 받아라는 뜻인지, 낙원동 복집으로 데려갔다.

복지리에 막걸리 한 잔 걸치며, 애주가인 관우선생이 말을 꺼냈다.

"요즘은 아침에 일어나 시원한 캔 맥주 하나 들이키는 게 최고의 재미야"

다들 건강 생각하느라 아무리 좋아도 몸에 해로우면 삼가지만, 관우선생은 못 말린다.

건강도 건강이지만 생전의 즐거움이 더 중요하다는데, 술도 말술이라 아무도 못 당한다.

죽고 나면 아무 소용없다며, 자기 죽으면 수의는 물론 쓸데없는 장례에 낭비하지 말라고 당부해 두었단다.

장의차도 필요 없고, 그냥 잠옷 입은 채 화장하여 강화 집터 주변에 뿌리라 했다는데, 역시 관우선생 다웠다.


 

돈 많은 사람들은 대개 돈에 중독되어 인간성을 잃는 경우가 많지만, 관우선생은 다르다.

일찍부터 부친이신 인제 김정환 옹으로 부터 통인가게를 물려받아 한 평생을 예술과 문화에 천착한 때문인지,

사람사는 근본을 중시하고, 풍류와 멋을 안다.


 

그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마당도 쓸고 가구도 닦고 배달도 했다.

열 일곱 살에 부친께서 "오늘부터 고사를 네가 지내라"고 했단다. 수시로 지내는 고사는 장사꾼에게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이화여대' 학생들이 가게에 왔단다. 본인에게는 항아리 때 닦는 일만 시키던 부친께서 학생들은 잘 가르쳐주었다는 것이다.

그 다음날 가게에 나가지 않고 "아버님 밑에서 안 배우겠습니다. 이대생들에게는 잘 가르쳐주시면서"라고 투정을 했단다.

"항아리 때를 빼거나 고가구를 닦다 보면 서랍의 크기와 위치 등 디테일을 배울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시며 크게 나무랐는데,

말보다 손으로 배우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였다.



스무 세살 되던, 어느 날 부친께서 통장과 도장을 주면서 "오늘부터 네가 통인 주인이다"라고 했단다.

그러고는 "어느 장사든 망하지 않는 장사가 없다. 네가 주인이기 때문에 망하던 흥하던 모든 건 너 하기에 달렸다"는 것이다,

"망하면 동대문시장에서 다시 리어카를 끌고 시작하라"고 했다는데, 무서운 얘기였다.

어린 자식에게 사업을 물려줬다는 소문이 퍼지자 주변에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그때 부친께서 "난 내 아들을 믿는다"고 했단다.

`아버지가 날 믿어주는데 실수하면 안 되겠다. 놀면 안 되겠다`고 다짐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고미술상에서 시작하였으나, '통인익스프레스', '통인인터내셔날','통인안전보관','파쇄컴퍼니' 등

21개 자회사를 거느린 연매출 8000억원 대의 세계적 물류회사로 키운 것이다.

골동품을 취급하다 보니 고미술품을 국내외에 안전하게 운송하는 일을 생각했고, 운송 일을 하다 보니

서류 보관 업무도 하게 됐는데, 외국계 보험회사와 신용카드사들이 다 고객이란다.

사업과 연관된 고객이 필요한 걸 생각하다 보니 사업이 확장된 것이다.

어느 정도 사업이 자리 잡자, 젊은 시절 못다 한 미술 사업에 매달렸다고 한.



 

그렇지만 그의 명함에는 대표나 회장 대신 늘 통인가게주인 직함을 고집한다.

인사동 허름한 주막에서 예술인들과 어울려 술잔 기울기를 즐기는 낭만파로 살아간다.



'통인가게'가 바라는 것은 세상의 아름다움과 바른 문화에 바탕이 되는 마음을 담고 있다.

우리 전통 문화와 미술의 가치를 높이고 보존하며, 우리 문화를 바르게 전달 정착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였던 1924년에 세워졌으니, 4년만 지나면 100주년이 되는 인사동 명물이 되었다.

인사동에서 동헌필방’, ‘통문관’, ‘이문설농탕’, ‘통인화랑등이 서울문화유산에 지정되었으나,

찻집으로 바뀐 동헌필방이나 문 닫은 날이 더 많은 통문관에 비한다면, ‘통인화랑은 인사동 꽃중에 꽃인 셈이다.

통인가게70년 부터 문화 지식인들의 사랑방 역할도 톡톡히 해왔다.


 

지하1층에 있는 '통인화랑'은 올해로 42년이 되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공예화랑이다. 당시 분청작가인 윤광조씨 전시가 첫 전시였다.

통인화랑이 공예 부문이라면, 5층에 있는 통인옥션갤러리는 모던 아트 쪽으로, 2주마다 초대전을 연.

"팔리지 않는 작가가 있다면 우리가 그 작품을 사준다. 다행히 나는 선친에게 물려받아 집세를 내지 않아 살 수 있었는데,

그렇게 사들인 작품들이 지금은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통인화랑에서 전시한 현대미술 화가로는 박서보씨가 대표적이다. 그1976`묘법` 화풍의 첫 개인전을 '통인화랑'에서 열었다.

당시에는 빛을 보지 못하다 2010년 이후 `단색화` 열풍이 불면서 지금은 호당 단가가 가장 비싼 인기 작가가 됐다.

이동엽씨도 '통인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는데, 당시 전시된 작품이 모두 팔려 전체 판을 두 번 바꾸는 색다른 경험을 했다.

안타깝게도 일찍 세상을 떠나버린 이동엽씨가  생애 최초로 큰 돈을 만져봤다고 자랑 했지만, 죽고니니 말짱 도루묵이었다.

김구림, 황성준, 강경구 등 수 많은 유명작가들이 '통인화랑'을 거쳐갔다.




그리고 '통인가게'1층은 생활도자기와 규방공예품이 전시되어 있고, 2층은 다류와 청자, 나전칠기 제품이 즐비하다.

3층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되살림 가구를 전시하는데, 되살림 가구란 옛 선조들이 사용했던 가구를 재현하는 것이다.

오래된 한옥에서 나온 고재를 사용해 새로 만든 가구를 말한다. 4층은 백자와 17세기 후반의 앤틱가구가 전시되고 있다.

 


또 한 가지 통인가게의 자랑은 외교사절을 비롯한 각 분야 내로라하는 분들을 초청하는 사교의 장으로도 활용된다.

두 달에 한 번씩 통인오페라를 열고, 일 년에 서너 번 판소리와 국악 공연도 한다.

판소리나 오페라 공연을 정기적으로 여는 것은 고객을 위한 서비스 차원이기도 한데,

주한 미대사는 테러를 당해 얼굴에 상처를 입은 후에도 오페라 공연을 찾았을 정도로 인기다.


 

나는 음악과 미술은 한 통속이라 음악이 미술을 전달해 준다고 믿는다.

문화예술 수준이 그 나라 품격이고 선진화의 기준이다. 예술인과 예술 애호가들이 많은 나라가 선진국이다.

통인 판소리와 오페라가 우리의 문화 수준을 높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관우선생은 말한.


 

그는 거상 임상옥이 말한 상인이 아니라 상도를 지키라는 말을 항상 마음에 담고 산다.

내가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널리 베풀어야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작가들의 작품을 사서 함께 공유하는 것이다.




'통인가게' 주인은 또 다른 일을 꾸미고 있다.

통인가게’ 100주년을 맞이하여 통인도자연구소가 있는 강화 고려산 자락에 1, 2200평 규모의 10개 미술관을 만드는 프로젝트다.

박물관 아래 절집’, ‘미술관 속 예배당’, 통인현대도자박물관, 청자박물관, 섬유박물관 등 국립중앙박물관 같은 거대한 박물관을 만들기보다

각각의 이야기가 있는 전시공간을 조성하는 게 목적이다.

그동안 그가 수집해온 한국 고가구, 청자, 백자, 미술품 등을 일반에게 보여줄 생각으로, 건축가 김동주씨의 설계로 추진되고 있다.


 


미술관에서 불공 드릴 수 있는 불당은 첨단 영상 등으로 꾸며 평소엔 오페라 공연도 가능한 복합문화공간이 될 것이라 한다.

2탄은 미술관 속 예배당이다. ‘박물관 아래 절집과 같은 콘셉트다. 스님과 목사도 큐레이터처럼 근무하게 된단다.


 

관우 김완규씨는 돈을 쫓는 거상이라기보다 예술가 기질을 가졌다.

고급 요정이 아니라 간판도 없는 인사동 다리밑 선술집을 즐겨 드나들며 주당자리를 꿰차고 있다.

집에선 수시로 난을치는 서화를 즐기기도 하지만화가나 글쟁이들이 모여 막걸리 한 사발 하는 풍류를 더 즐긴다.

그가 살아 있는 한, 예술가들의 참새 방앗간이나 다름없는 '통인가게'에 문화예술인들은 꾸준히 드나들 것이며,

대폿집 어디에선가는 그가 즐겨 부르는 단가 이 산 저 산이 구성지게 흘러나올 것이다.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어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 하드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날 백발한심하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 헌들 쓸데가 있나


사진, / 조문호






















해마다 과메기 철이 되면 ‘통인가게’ 상광루에서 킨포크 파티가 열린다.
‘통인가게’ 관우선생이 예술가들을 비롯한 가까운 지인들과 벌이는 잔치로,
이번에는 과메기와 함께 밍크 고래 고기 까지 등장했다.



통인가게김완규, 이계선씨 내외를 비롯하여 김정규, 문혜준, 배일동, 김기범,

김시율, 김정범, 라선영, 박영수, 송재엽, 양관모, 정호철, 주기윤, 조용희, 이성은,

오진원, 윤규석, 서용민, 이미애, 이세연씨 등 장안에 잘 생긴 미남 미녀가 다 모였다.

못 생긴 놈은 나뿐이더라.


 

이 날은 가슴 아프고 기쁜 두 가지 소식이 날아들었다.

첫째는 관우선생이 자식보다 아끼는 캔죠가 몇 일전 죽었다는 것이다.

쪽 팔리게 개 죽음에 울 수는 없지만,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는가?

오죽하면 손자가 오는 것까지 탐탁찮게 여길 정도였단다.

말로는 손자 녀석이 캔죠에게 물 릴 것이 걱정되었다지만,

내 생각에는 짓궂은 손자가 캔죠를 귀찮게 해서 그러지 싶다.


 

이제 좋아 할 곳이 마누라밖에 더 있겠는가?

그 날도 고래 고기 한 점을 마나님 입에 넣어주는, 평소 안하는 행동을 했다.

많은 사람들 보는 앞에서 알랑방귀 뀔 정도이니, 사정은 보나마나다.


 

그런데 캔죠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를 배일동 명창이 한 곡 뽑았는데,

춘향전 이별가에 나오는 갈까 보다였다.

고수 없는 소리지만, 그 소리가 얼마나 간절하고 비통한지 상광루를 울렸다.


 

갈까보다, 갈까보다, 임 따라 갈까보다. 천리라도 따라가고 만리라도 님 따라 갈까보다.“


    

두 번째 기쁜 소식은 송재엽씨 아들 송자호가 김환기 작품 우주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132억에 낙찰 받았다는 이야기다.

‘M컨템포라리 아트센터수석 큐레이터로 일하는 송자호는 이제 나이가 스물다섯이다.

한국의 대표적 추상화가 외국으로 나가는 게 옳지 않다고 판단해

지인들과 공동 응찰 했다지만, 애비가 뒷돈을 댄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작품 한 점에 132억이라는 말에 말문이 막히지만, 아무리 비싸도 마약 같은 돈 보다야 작품이 낫다.

단지 걱정되는 것은 돈에 작가들 영혼이 저당 잡힐까 두렵다.


 

두 번 째 배명창이 부른 노래는 단가 이산 저산이었다.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어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 하드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날 백발한심하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 헌들 쓸데가 있나


 

이산 저산은 관우선생이 제일 좋아하는 노래인데, 아마 늙어가는 우리네 심사를 말하는 것 같아 좋아할 거다.


 

누군가 중국 술 한 병을 선물로 가져왔는데, 이름 하여 貴州芳台酒라나.

생긴 꼴이 꼭 농약병같이 생겼으나, 술 맛은 여인네 입술처럼 감 칠 맛이더라.

그 술병을 열지 못해 몇 사람이 달라붙었는데, 알고 보니 마게를 빼는 것이 아니라 돌리는 것이었다.



갑자기 옛날 군바리 시절 노래가 왜 생각날까? 

돌리지마라 돌리지마라 내 앞에서 돌리지마라. 살살 돌리는 그 바람에 신세 조진 사나이다 

잡놈이라 잡스런 생각 밖에 못하니 널리 양지하시길...


 

포항에서 가져왔다는 과메기는 꼬들꼬들한 게 맛있게 보였으나,

동자동에서 급하게 오느라 틀니를 빼놓고 와버렸네.

씹는 것 보다 빠는 게 더 편해 술만 홀짝 홀짝 마셨더니, 알딸딸한 게 기분 죽이더라.



술 마시랴, 사진 찍으랴, 미녀 곁눈질하랴,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그만 술잔을 돌바닥에 떨어트려 버렸다.

신통하게도 술잔은 깨지지 않았으나, 막걸리가 튀어 옆에 있던 귀부인 밍크코트를 적셔버렸네. 에고~


 

서울역까지 오는 내내 귀부인께서 얼마나 욕을 하는지 귀가 간지럽더라.

"나무관세음보살~"

 

사진, / 조문호



































































 






통인 관우선생의 아지트인 ‘다리 밑’이 인사동 명물이 되어버렸다.
낙원상가 계단 밑에 자리 잡은, 이 이름도 없는 대폿집은 탁자가 두 개뿐인 구멍가게다.
고향 같이 포근한 단골집으로, 관우선생이 ‘다리 밑’이란 거시기한 이름을 붙였다.






이 대폿집은 시원하게 얼려놓은 생맥주잔에 막걸리를 섞어 마시는 ‘막맥’이 자랑이지만,
감자전과 닭똥집 같은 싸고 맛있는 안주들이 많다.






전날 밤은 건축가 김동주씨와 화가 이목을, 편완식 기자가 ‘다리 밑’에서 논다고 꼬셨지만,
영양가 없는 핑계 대며 안 나갔다. 다 막맥 마시는데, 나 혼자 소주 빨기도 그렇지만,
이미 취한 사람은 사이클이 맞지 않아 편치 않아서다.
술 마시는데도 이 것 저 것 따지는 것이 많아 술꾼 자격 상실한지 이미 오래다.






난, 옛날부터 술에 약하다.
소주 반병이면 알딸딸하게 기분 좋고, 한 병 마시면 오바 한다.
술도 도수로 취하는 것이 아니라 량으로 취한다. 그래서 양 많은 막걸리가 쥐약이다.
맛이 가면 성희롱의 경계를 위험스럽게 넘나들기도 한다.
그 이튿 날 하루 종일 빌빌대며 후회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 쯤은 그럴 일이 생긴다.






지난 5일은 통인에서 열린 배일동 명창 판소리가 끝나고, ‘상광루’에서 막걸리를 마신 후
이차로 ‘다리 밑’에 몰려갔다.
통인 관우선생 따라 황태인, 김규진, 배일동, 조상민, 민호기, 박영수, 최유정씨가 갔는데,
이미 다리 밑에는 강정호회장 일행이 자리 잡아, 밖에 앉아야 했다.





반 쯤 담긴 생맥주가 사람 수 대로 나왔는데,
제조 상궁 역활을 하는 관우선생이 막걸리를 타기 시작했다.
희석시키는 비율이 술맛을 결정한다는데, 난 통풍으로 맥주를 못 마시니
그 맛은 확인할 도리가 없다.





오로지 촌놈 술 소주만 마시는데, ‘상광루’에서 막걸리를 마셨으니, 이미 맛이 간 상태다.
엎질러 진 물이라 겁 없이 막걸리를 홀짝거린 것이다





어떻게 알았는지 테너 이동환씨가 나타나 분위기가 무르익었는데,
술이 취해 쪽팔리는 줄도 모르고, 대 명창 들 앞에서 ‘봄날은 간다’를 짤아 댄 것이다.
바람새는 이빨로 뽑아내느라 욕도 봤지만, 좌우지간 술 취하면 간이 커진다.






더 큰 문제는 술만 취하면 가만 있지를 못한다. 

술꾼들 내려 찍는다며 계단 집에 올라갔는데, 헛걸음질로 디질 뻔했다.
죽는 거야 괜찮지만, 갑자기 떨어지면 술 마시던 양반들 얼마나 놀래겠노?






몸이 비실거려 더 이상 노닥거릴 수 없었다.
비상금을 털 생각으로 택시를 잡았는데, 배일동 명창이 불러 세웠다.
무슨 할 말이나 있는 줄 알았더니,
지갑 깊숙이 감춰 둔 비상금을 꺼내 택시비를 주는 것이다. 자기는 우짤라고...
이 양반 소리만 잘 하는 줄 알았는데, 인정도 죽이네.





낙원동에서 서울역까지 오천원이면 찍 쌀 건데, 열배나 되는 신사임당을 주니 욕심이 나부렀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아제! 녹번동 가입시더” 햇붓다 아이가...
사실, 술 취해 동자동 4층까지 기어오르기 힘들어서다.






이틀 날은 천벌 받아 하루 종일 방바닥에서 빌빌거렸다.
“천지 씹신이여! 이제 그만 데려가소서”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 ‘통인가게’에서 배일동 명창의 판소리 한마당이 열렸다.
춘향가에서는 춘향의 절절한 마음에 다 함께 아파했고,
심청가에서는 심봉사 재회의 기쁨에 다들 눈물 흘렸다.
가히 이 시대 최고의 가객이 펼치는 감동의 무대였다.





쩌렁쩌렁한 배일동 명창의 소리는 바위를 두드리며 쏟아지는 폭포수 같았고,

하늘을 가르는 우렛소리 같았다.





여지 것 여러 명창의 판소리를 들었지만, 이 같은 고음의 절창은 들어보지 못했다.

온몸으로 토해내는 절절한 소리에 다들 넋을 놓은 채. 소리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일 년에 두 차례씩 열리는 통인 판소리 감상회는 지난 5일 오후5시부터 한 시간 동안 통인가게’ 5층에서 열렸다.

시대를 뛰어넘는 '통인 판소리 감상회'는 30여 년 간 이어져 온 인사동 전통문화의 마지막 지존이다.

비록 공연장이 아닌 전시장에서 열리지만, 열릴 때마다 빈자리가 없다.

육성으로 듣기 아주 적절한 공간이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지 못함이 늘 아쉬울 뿐이다



 

 


단가 이산 저산을 비롯하여 춘향가와 심청가를 부른 배일동명창의 판소리에 조상민 고수가 북채를 잡았다.

그리고 찬조 출연한 이진용씨 대금과 서영민씨 아쟁도 한 몫 했다.

흘러내리는 듯 떠는 소리와 꺾는 소리로 이어진 그 애절한 시나위가 마음이 후볐다.



 


배일동명창이 7년 동안 지리산 계곡에 초막 지어놓고 폭포수 아래서 수련 할 무렵,

막대 장단에 바위가 깨지며 득음한 소리는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소리의 경지였다.

때로는 소름이 돋는 전율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는 소리 뿐 아니라 연기력도 출중하다.

극중 사연에 빠져들어 슬픔과 기쁨을 토해내며 몸짓하니, 관객 또한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심 봉사가 눈 뜨는 마지막 대목은 감격 자체다. 그런 기쁨의 눈물을 흘려 본지가 언제던가?



 


심봉사의 애끓는 통한의 절규는 가슴을 파고들었다.


죽고 없는 내 딸 심청이가 어디라고 살아오다니, 이게 웬말이냐? 내 딸이면 어디보자. 어디 내 딸 좀 보자.

아이고 답답하여라 이놈의 눈이 있어야 내 딸을 보지, 심봉사 감은 눈을 끔적끔적 하더니 두 눈을 번쩍 떴구나,

이렇듯 천지조화로 심봉사가 눈을 뜨고 나니, 만좌 맹인이 모다 개평으로 눈을 뜨는디


이 얼마나 감격적이며 해학적인가.



 


판소리는 사설과 창, 무대행위로 이루어진 종합예술의 성격을 띤다.

서사적 구조의 사설은 문학 영역에 속하고, 창은 장단과 가락을 가지고 있어 음악 영역에 속한다.

그리고 소리꾼의 몸짓이나 고수의 추임새 등은 연극적 성격을 가지는데, 이 세 가지가 어울려 감흥을 배가시키는 것이다.



 


소리를 잘 하는 대개의 명창들이 관객을 이해시키는 이론에 약하지만, 배일동 명창은 달랐다.

외국음악에 길들어 진 현대인들에게 우리음악의 우수성을 쉽게 이해시키는 탁월한 교수법을 지니고 있었다.

막간을 이용하여 그의 강의를 들었는데, 한 박자나 두박자로 되는 일본이나 중국과는 달리

삼박자로 진행되는 우리소리의 독창성을 자신의 소리로 이해시켰다.



 


여태껏 선호도에서 국악이 서양음악에 밀리는 것은 교육의 부재였다. 뭐든지 알아야 귀에 들리고 눈에 보인다.

지금이야 판소리의 독창성이나 음악성을 높이 사지만, 아직 대중성은 한 참 멀었다.

그래서 대중을 상대로 판소리의 제 맛을 깨우치게 해 주는 배일동씨 같은 분이 절실한 것이다.



 


공연이 끝난 뒤 통인가게주인 관우선생으로 부터 이 산 저 산재청이 있었다.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허드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늘 백발 한심허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 헌들 쓸데가 있느냐?“



 


관우선생이 이 단가를 유별나게 찾는 것은 세월의 무상함을 절감한 모양이다.

 

그리고 통인화랑에서 열리고 있는 해학의 풍경전에 참여한 작가를 소개하기도 했다.

김상구, 김희진, 민경아, 박재갑, 이언정, 정승원, 홍승혜씨 등 소개한 중견작가 가운데 이력이 독특한 분이 계셨는데,

국립암센터 명예교수로 재임 중인 박재갑씨였다. 의술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판화의 수준도 뛰어났다.

안동 하회별신굿 탈놀이 중 파계승마당을 선보인 이 전시는 721일까지 이어진다.



 


통인 판소리 한마당이 끝난 후, ‘통인가게관우선생의 집무실이 있는 상광루에서 막걸리 파티가 벌어졌다.

인사모회원으로는 통인가게 주인 김완규씨, 박일환 변호사, 화가 김근중씨가 자리했고,

이계선 통인 관장을 비롯하여 배일동 명창, 조상민 고수, 박재갑, 김규진, 황태인, 민호기, 박영수, 최유정씨 등

이름도 잘 모르는 많은 분들이 자리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차는 다리 ’에서 빨았는데, 사진이 많아 내일 소개하겠다.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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