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급해 서둘다 방문에 걸어야 할 자물통을 주머니에 넣고 와버렸다.

그 날은 '서울역 쪽방상담소'에서 식권 타는 날로,

 김명성시인이 해 바뀌기 전에 술 한잔 하자는 시간과

한 시간 차이라 마음이 조급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서울시에서 년 말까지 한시적으로 실시한

아름다운 동행식권 사업이 주민들의 호응으로 내년에도 이어진다는 것이다.

2023년 1월분 식권을 27일 오후 2시부터 준다는 벽보가 나 붙었는데,

세시까지 가려면 늦을 것 같아 30분 일찍 나섰.

 

한 시간이 넘어서야 차례가 돌아왔는데,

지켜 보고 있던 상담소 전실장이 소장이 찾는다며 날더러 가자는 것이다.

식권 받고 가겠다는데도, 일분도 안걸릴 시간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 소장부터 만났으나,

대개 주민들과의 마찰도 이런 사소한 일에서 비롯된다.

 

상담소 소장이 나를 찾는 이유는 대충 짐작되었다.

블로그에 올린 ‘쪽방상담소는 갑질 그만하고 자세를 낮추라는 글에

상담소 소장이 올린 장문의 해명 댓글을 보았기 때문이다.

 

유소장과는 첫 대면으로, 소장이 바뀐 것도 댓글을 보고서야 알았다.

줄을 세울 수밖에 없는 사정을 구구절절 설명하며, 그 해결 방법을 물어왔다.

다소 불공평한 점은 있으나, 번호순으로 돌아가며 받도록 해야 한다.

소량 물품은 푸드마켓과 연계하여 나누어주는 등 자정의 노력이 요구된다.

 

특정인을 거명하는 것은 자제해 달라는 부탁은 수용했다.

그리고 식권사업은 사용한 식권을 매일 회수하는 일도 힘들지만,

싼 가격으로 뒷거래를 한다는 이야기가 들린단다.

 

그 문제는 매달 식권을 나누어 줄 것이 아니라 전 주민을 대상으로 전산화 해야 된다.

지금 쪽방상담소에서 주민등록증에 붙여 확인하는 바코드처럼

주민등록증 한쪽에 별도의 식권 바코드를 붙여 관리하면 될 것 아닌가?

해당 식당에 별도의 단말기를 비치하는 불편이야 따르지만..

 

식권은 모두에게 줄 수 있는 량인데, 왜 시간을 정하냐고 물었더니,

안 그러면 하루 종일 지키고 있어야 한단다.

이 말은 주민들 입장보다 업무의 편의성이 먼저라는 이야기가 아닌가?

동사무소처럼 업무시간에 언제나 받을 수 있도록, 담당자 한 명만 있으면 될것이다.

 

뒤늦게 식권을 받아 나왔으나, 이미 세시가 가까웠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문도 잠그지 않고 왔겠나?

주머니에 자물통이 있다는 것을 알아 차렸을 때는 응암역, 내릴 무렵이었다.

요즘들어 잊어버리는 일이 잦기는 하지만, 자물통을 가지고 나온 적은 처음이었다.

 

나이들어 잦아지는 치매증상이야 어쩔 수 없어나, 습관이란 게 무서웠다.

아무것도 가져갈 것 없는 쪽방 문 열어두고 온 것에 왜 그리 신경 쓰였는지 모르겠다.

 

누구처럼 이불 밑에 감추어 둔 돈이 있나, 가져 갈 것이라고는 고물 컴퓨터 뿐인데 말이다.

혹시 배고픈 사람이 책상에 놓인 식권이라도 가져간다면, 그건 적선이 아니겠는가?

여태 신발 도둑 맞았다는 소리는 들어도 방에 도둑들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약속장소인 응암동 '풍천장어'집에 갔더니, 김명성, 조해인시인과 정동지도 왔더라.

과분한 술 상 앞에 모여앉아 한 해 못다한 아쉬움을 달랬다.

꾸물대는 장어처럼 등 달아 꾸물댈까 걱정되었다.

 

그런데, 김명성씨가 귀가 번쩍 뜨이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김신용 시인이 아파트를 샀다는 것이다.

한 달 전만해도 인사동 ‘유목민’에 나와 디카 시를 쓴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 사이 홍제동 셋집에서 충주 아파트로 이사 간 것이다.

 

지난 달 인사동에서 만난 김신용시인

가난한 시인이 집을 샀다는 자체만도 뉴스가 아니겠는가?

시만 쓰는 시인이 아파트를 샀다는 거짓말같은 사실 말이다.

누구처럼 칠억짜리가 아니라, 칠천만원에 불과하지만...

 

내년에는 몸이 아픈 친구들도 찾아보기로 했다.

김명성씨가 며칠 후 이청운화백 문병 가자는 이야기를 꺼냈는데,

 '뮤아트' 김상현씨도 몸쓸 병으로 여러차례 수술받아,

그 통증을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한다.

 

오래 전의 이청운화백, 입원했을 때다

새해에는 이청운화백도 만나고, ‘뮤아트’ 에서 김상현씨의 쉰 듯 절절한 노래도 들어보자.

모두의 건강한 한 해를 위해...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달 아픈 몸을 이끌고 양평 황명걸시인 추모제에 참석한 김상현씨가 아코디온을 연주하고 있다

 

김수길의 다섯 번째 시간지우기 편린사진전이 인사동 무우수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이와 함께 조해인이 쓰고 김수길이 찍은 에세이 신화가 된 청소부출판기념회도 유목민에서 열렸다.

 

지난 주말 정동지와 김수길씨 사진전 보러 인사동에 갔더니,

전시작가와 조준영시인이 안국역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김수길의 편린사진전이 열리는 무우수갤러리로 가는 길에 봉화에서 올라 온 신동여 화백을 만나기도 했다.

 

올 일월에 개관한 무우수갤러리는 처음 갔는데,

인사동길 19-2에 신축한 와담빌딩 3-4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김수길의 편린전은 여러 장 필름이 겹쳐진 이미지로, 마치 세월의 흔적처럼 희미한 기억을 불러냈다.

 

10년이 넘도록 한가지 작업에 몰입해 온 김수길의 '시간 지우기'전은

사실적 기록성보다 내면적이고 미학적 관점에 주안점을 두었다.

 

김수길은 사진 이전에 음악, 영화,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진 작가였다.

미학적 관점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잃어버린 기억을 찾기 위해 같은 장소를 시기별로 찾아다니며, 변해가는 공간의 잔상을 기록해 왔다.

 

그의 작업은 변해가는 도시의 단면이 켜켜이 쌓여, 암울한 시대적 잔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기존의 사진 형식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접근으로 사진 표현의 무한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이번 전시에는 천에다 출력하여 깃발처럼 걸거나, 손수건으로 만들기도 했는데,

기존 천에 새겨진 무늬가, 프린트된 이미지와 어울리는 또 다른 시도를 감행했다.

장식성이나 실용성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다.

 

기억하기 위해 시간을 지운다는 김수길의 편린전은 113일부터 14일까지 '무우수갤러리'에서 열린다.

 

전시장에서 나와 신화가 된 청소부술판기념회가 열리는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겼다.

술집은 이른 시간부터 지인들이 모여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조준영 시인이 사 온 축하 떡에 촛불을 밝히기도 하고

연극배우 이명희씨의 에세이 낭독이 이어지는 등 출판기념회 면모도 갖추었다.

 

행복 에세이란 부제를 단 신화가 된 청소부장애를 안고 태어난 소녀 이야기였다.

청소라는 일상적이고도 사소한 일을 하면서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신화를 일구어내는 내용이었다.

 

작가는 사소한 일을 할 때도, 자신이 가진 100%를 아낌없이 밀어 넣으면,

그 하잖은 일은, 스스로 축복하는 에너지로 변환된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사막과 같이 메마른 우리의 내면 한가운데로

시냇물을 졸졸거리며 흘러가게 하는 동력이 된다.“며 글을 마무리했다.

 

버리커뮤니케이션에서 출판한 이 책은 136면에 1.5000원이다.

 

이날 술판기념회에 참석한 분으로는 주인공인 조해인 시인과 김수길 사진가를 비롯하여

조준영, 신동여, 이명희, 전강호, 김명성, 장경호, 송일봉, 정복수, 최석태, 김신용, 최유진

이만주, 김발렌티노, 노현덕, 안원규, 송상욱, 노광래, 이인섭씨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에서 김신용시인은 일 년만의 외출이었다.

두문불출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요즘은 사진찍어 시를 쓰는 디카 시에 집중한다고 했다.

사진 제판에 의한 제작비 부담으로 출판사에서 반기지 않는다는 고충도 털어놓았다.

비염이 있다며, 술 한잔 마시지 않고 외곽으로 떠도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작품과 명예나 돈도 좋지만, 건강이 최고다.

모든 것이 죽고 나면 아무런 쓸모없는 게 아니던가?

어떻게 하면 재미있고 즐겁게 살까?를 고민할 나이다.

작업도 일처럼 하지 말고 놀이로 즐기자.

다들 건강이나 잘 지키시길 바랍니다.

 

사진, / 조문호

 

 

 

2021.9,23

지난 23일 인사동 ‘나무아트’에서 정영신씨의 ‘어머니의 땅’사진전이 막을 올렸다.

‘노숙인, 길에서 살다’ 현수막도 ‘유목민’ 담벼락에 내 걸어, 옛말처럼 떡 본 김에 제사지낸 것이다.

현수막전은 서울역이나 동자동에서 해야하지만 책을 팔기 위한 이벤트였다.

 

연휴가 끝나자마자 시작된 전시였으나 허리 통증이 심해 병원부터 들렸는데,

환자들이 많은데다 물리치료까지 받느라 시간이 지체되어버렸다.

핸드폰을 두고 와 정영신씨와 연락을 할 수 없었는데, 끝나고 가니 떠나고 없었다.

 

부리나케 전시장으로 달려갔더니, 아산 공유공간 ‘마인’ 김선우씨와 양햇살, 김온 군이 와 있었다.

사진가 전제훈씨는 일찍부터 왔으나 문이 잠겨 한 참을 기다렸단다.

마침 사진집을 가져온 ‘눈빛출판사’ 이규상대표도 와 계셨다.

 

아산 팀의 도움을 받아 ‘유목민‘ 담벼락에 현수막부터 설치했다.

아침 식사를 못해 전제훈씨와 '툇마루'에 갔다 오니, 그때부터 손님들이 오기 시작했다.

정영신씨 전시 보러 오신 분들이 현수막 전에도 들려 ‘유목민’ 골목은 일찍부터 술판이 벌어졌다.

 

코로나로 거리두기를 해야 할 즈음이라 송구스럽기 그지없었다.

방동규선생을 비롯하여 김신용, 조해인, 김이하, 김명성, 김상현, 함창호, 조준영, 노광래

김문호, 장경호, 김수길, 김발렌티노, 최인기, 김종준, 윤 관, 이택근, 강기식, 조경석, 이두엽, 한상진,

김 구, 나종희, 노영미, 이상근, 이광군, 임경일, 최명철, 김효성, 서인형, 김성은, 김재홍,

이인섭, 김진하, 이창수, 이한복, 김영진, 곽명우씨 등 많은 분들이 찾아 주셨다.

 

난처하게도 ‘뮤아트’ 김상현, 김병수씨 일행은 악기를 가져 와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정영신씨 전시를 축하 한다지만 옆에 노숙인 사진이 걸려 있는데...

생의 기로에 선 사람들을 내세워 잔치 벌이는 꼴이 된 셈이다.

흥겨운 음악이 아니라 애잔한 슬픔이 깔린 음율이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다.

 

신경이 곤두서 그런지 술을 마셔도 취하지도 않았다.

 

아무튼 반가운 분들 만나 즐거운시간을 보냈는데, 끝난 후 나온 술 값이 한 달 생활비가 넘었다.

허구한 날 얻어먹기만 했으니 이참에 술 한 잔 대접한 것이다.

그나저나 술집 앞에서 열리는 전시라 끝나는 날까지 살아 남을지 모르겠다.

 

멀리서 와 주신 전제훈, 함창호씨를 비롯해 온 종일 일을 도와 준 아산 '마인'팀,

그리고 전시를 축하해 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사진, 글 / 조문호

 

김선우촬영

 

 

 

김신용 시인이 인사동에 뜬다는 연락을 받았다.

유목민에 출몰하는 디데이는 7일 오후 네 시로 잡혔다는데, 아마 손님 없는 낮 시간을 택한 것 같았다. 

마치 간첩 접선 하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들었다.

 

구신들 모이 챙기느라 좀 늦었는데, 한 낮의 술판은 이미 시작되었다

김신용, 김명성, 조해인, 장경호, 김원명, 노현덕, 김수길 씨가

두 테이블에 나누어 앉아 있었는데, 마치 이산가족 만나는 것처럼 반가웠다.

 

뒤늦게는 김상현씨와 안원규씨도 왔고, 딸 같이 예쁜 소녀 조은영, 박지수양 까지 합류했다.

김신용씨는 코로나가 번지기 시작하며 잠적했으니 근 이년이 가까워 온다.

 

그동안 월북한 게 아니라 시작에 몰입했다고 한다.

이사도 두차례나 했다는데, 다음 달엔 다시 홍제동으로 온다고 했다.

돈 벌려고 이사를 자주하는 복부인과는 달리 빈자의 설움이다.

한 편으론 사는 환경에 따라 시적 대상도 새로워 질 수 있겠더라.

 

이 얼마만의 인사동 유민들의 만남이며 얼마만의 술판이던가?

그동안 수행하듯 술 한 잔 마시지 않았다니, 몸은 좋아진 것 같았다.

 

그런데, 김신용씨가 몸만 온 게 아니라 새로 낳은 시집 .

너를 아는 것, 그곳에 또 하나의 생이 있었다를 챙겨왔다

 시가 전과는 달리 짧아졌는데, 시처럼 시집도 주머니에 쏙 들어갈 정도로 앙증맞았다.

 

 

김신용의 아홉 번째 시집에는 90여편의 짧은 시가 실려 있었다.

시의 대상이 자연적인 사물과의 대화에 집중되고 있었는데,

서사적 구조에 중점을 둔 종전과는 달리 함축된 미학적 탐미가 두드러졌다.

'백조출판사'에서 펴낸 시집 가격은 9,000원인데, 갖고 다니며 읽기 딱 좋았다.

 

김신용 시인은 1988년 무크지 현대시사상양동시편-뼉다귀집6편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밑바닥 인생인 지게꾼으로 살며 버려진 사람’, ‘개 같은 날들의 기록등을 발표한 대표적 노동자시인이다.

그러나 그의 삶에 변화가 생기며 시도 일대 전환점을 맞았다.

하잘 것 없는 사물과 대화를 나눈 도장골 시편등을 연이어 발표하며,

몸으로 부딪힌 시에서 감성으로 부딪힌 시로 바뀐 것이다.

 

그동안 장편 소설 달은 어디에 있나’, ‘기계 앵무새’, ‘새를 아세요’를 비롯하여

산문집 저기 둥글고 납작한 시선이 떨어져 있네등을 발표한바 있다.

문단의 주목을 받아 온 김시인은 '천상병시상', '노작문학상'도 수상했다.

 

김신용시인을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을 텐데, 더 이상 입 아픈 소리는 그만두고

시집에 실린 시 안개’나 맛보기로 소개하련다.

 

안개 자욱한 봄의 들녘에서

경운기 소리가 들려온다.

마치 안개의 심장이 뛰는 소리 같다.

이제 곧 햇살의 작은 새 떼들이

안개의 심장 속을 날아올라

아침을 깨우리라

 

박형준 시인은 추천사에서 이렇게 소개했다.

 

맑게 빛나는 사물의 영혼과 손을 맞잡은 느낌이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이런 느낌이 너무 오랜만이어서,

숨결 같기도 하고 이슬 같기도 한 이 아련한 따뜻함이 정겹다.

김신용의 시는 작고 여린 사물이 서로 맞잡은 손에 가만히 쥐어준 손수건 같다.

옹이, 풀잎, 이슬, , 수박, 목화씨 등 쓸모없고 하찮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전해준

위로의 힘 덕분으로 나는 그대와 처음 손잡고 걷던 그 길을 다시 가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길에 그때의 벤치가 남아 있다면, 사물들의 영혼이 건네준 손수건을 깔고 함께 앉아

그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그대의 살아온 숨 냄새를 맡고 싶다.“

 

다른 때 같았으면 출판을 기념하는 잔치가 떠들썩했을 텐데,

이 미친놈의 코로나가 무서워 간첩 접선하듯 만난 것이다.

시집 너를 아는 것, 그곳에 또 하나의 생이 있었다로 위안한다.

 

김상현씨와 전활철씨가 불러주는 축가에 술이 술술 넘어갔다.

조용히 살자고 명세에 명세를 하였건만, 술만 들어가면 말짱 도루묵이다.

막힌 목구멍에서 터져 나오는 건, 노래가 아니라 피 토하는 각혈환자의 절규였다.

 

술과 안주는 또 얼마나 푸짐했으면, 아무리 먹고 마셔도 계속 나왔다.

그 술값은 긴 세월 인사동 유민들을 챙겨온 김명성씨가 냈다.

그 역시 형편이 예전 같지 않을 텐데, 제 버릇 개주지 못한다.

 

헤어질 때도 하나하나 핫바지 방귀 새듯 사라졌는데,

은밀한 접선이라 은밀하게 헤어졌다.

 

지하철을 탔으나, 모두들 약속이나 한 듯 핸드폰에 미쳐 있었다.

시집을 꺼내 보고 싶어도 꼰대로 보일까바 참았다.

 

머리에 박힌 고드름시 한 편을 되뇌어 보았다.

물이 되어 흘러내리다 문득 걸어 온 길 되돌아보는,

저 서늘한 눈빛

 

사진, 글 / 조문호

 

 

 

                      


어저께 인사동 터줏대감 강민 선생의 운명이 임박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니 방에 틀어박혀 있을 수 없었다.

선생께서 자주 들리시며 친구들을 불러 모았던 인사동 '나주곰탕' 앞에서 한 참을 서성이며 선생을 생각했다.



사실, 인사동 인사동 노래를 부르며 들락거리지만, 공간의 추억보다는 사람의 추억이다.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선생은 오래전에 전설이 되었지만, 김동수, 이계익, 신봉승, 심우성선생께서 차례로 떠나가셨고,

마지막 터줏대감으로 여겼던 강민시인 조차 오늘 내일하고 있으니, 이제 인사동도 막 내려야 하는 것인가?

아직 구중서, 김승환, 민 영, 방동규. 신경림, 황명걸선생 등 인사동을 사랑하는 원로들이 계시지만,

강민선생이 계시지 않으면 뵐 수는 있을까?


 

80년대 중반 '나주곰탕'집 자리는 망각 강이라는 술집 ‘레테’가 있던 자리다.

소설가 배평모씨를 그 곳에서 처음 만나 이틀 동안 쉬지않고 마셨던 곳이기도 하다.

그 술집은 이점숙씨가 운영했는데, 펑퍼짐한 엉덩이를 가진 미색도 죽이지만,

숨이 끊어질듯 애절하게 부르는 춘향가의  ‘갈까보다’라는 소리에 숨이 턱턱 막힌다. 



"갈까보다, 갈까보다. 님 따라서 갈까보다.

천 리라도 따라가고, 만 리라도 갈까보다.

바람도 쉬여 넘고, 구름도 쉬여 넘는..." 

강민 선생님 앞에서 이 소리 한 자락 불러 드렸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사실, 배평모씨는 친구 좋아 날밤 까며 이틀 동안 술을 마셨다지만, 그 여인이 없었다면 어림없었다.

가끔 임춘원 여사가 출몰하여 불러주는 뚝뚝 떨어지는 ‘목련’도 기가 막혔다.

그 때부터 인사동 예술가들 술값 뒷바라지 한 김명성씨는 다 털어먹은 지금까지 술값 대느라 바쁘다.



'레테'가 있던 윗층에는 박중식시인이 운영한 '툇마루'가 생겼지만, 

옆 건물 옥탑방에 내가 사용한 '카메라워크'가 있어 자주 들락거릴 수 밖에 없는 골목이었다. 

강민선생을 '나주곰탕'에서 그리워하며, 망각의 강에서 '갈까보다'를 듣고 싶었다.





그외 인사동을 추억할 만한 장소는 찻집'귀천'과 실비대학으로 불리던 '실비집'이었다.

'귀천'에서 천상병시인에게 저승가는 노자돈을 바치거나, 민병산선생의 서예글씨를 만날 기회가 많았다.

운이 좋은 날에는 '한국일보' 사진기자 김종구를 만나 진토닉까지 얻어 마실 수 있었지만...




그리고 '실비집'은 가난한 인사동 예술가의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인심이 후해 술값이 싸니, 누구든 막걸리 한 병 값만 있으면 갈 수 있고, 외상까지 통한다.
안주를 시키지 않아도 김치나 콩나물을 내주지만, 버스가 끊겨 자는척하는 날에는 이튿날 해장국까지 얻어 먹을수 있었다. 
이북이 고향인 주모 아닌 실비대학 총장님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이 없다. 



또 한가지 잊을 수 없는 일은 '실비집'에서 가진 결혼식 뒤풀이였다.

대학로에서 혼례식을 끝냈으면 신혼여행이나 갈것이지, 실비집에 자리를 왜 잡았는지 모르겠다. 
그 당시 '87민주항쟁' 개인전을 말리는 이사장이 싫어, '사진협회를 그만두고 박한웅씨를 밀어넣었는데.

그 날 뒤풀이에서 사고를 치고 말았다.  삥땅 뜯는 땡초 적음을 대머리로 들이 받아 앞니를 부러트린 것이다.
뒤 이어 술 취한 내가 옷을 벗고 난리를 피웠으니, 신부를 비롯한 신부 우인들까지 질겁해 도망갔다.




잔치는 완전 개판 되었으나, 그 이튿 날이 더 문제였다.

적음의 치료비를 걱정한 화가 강용대가 부추겨, 출근하는 박한웅을 잡아가게 한 것이다.

새 직장에 나간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잘 못하면 목 잘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배평모씨와 둘이서 적음을 찾아가 고소를 취하하라고 얼마나 사정했는지, 입에서 화근내가 났다.



한참 뒤인 15년 전에 생긴 '작은 뜨락'이란 대폿집도 잊을 수 없는 공간이다.

'작은 뜨락'은 '한지추억'이란 점포로 바뀌었고, '시인통신'자리는 '古 ART'로 바뀌었더라. 

인사동 풍류객의 ‘참새 방앗간’으로 통한 이 곳은, 장사라고는 처음한 노인자씨가 운영한 곳이다.

원래 건물 옆에 버려진 골목을 차양으로 가리고, 건물 벽에 의지해 폭 1미터에 길이 5미터 남짓한 공간을 마련했다.

폭이 좁아 일반 탁자를 놓을 수가 없어 벽에 긴 나무판대기를 붙이고, 바닥에는 엉덩이를 걸칠 만한 간이의자를 놓았다.



이 집에서 먹고 마시기 위해서는 한껏 몸을 웅크린 채, 본의 아니게 면벽을 해야 한다.

그런 술집이 인사동풍류객들의 아지트가 되었는데, 술값은 자율적으로 먹은만큼 바구니에 담고 나갔다.

자리가 없으면 그 옆 건물 이층으로 이사 온 한귀남씨의 '시인통신'에서 죽치기도 했는데,

긴 세월은 아니지만, 한 동안 인사동을 풍미했던 대폿집이 틀림 없었다.

그림쟁이들을 자주 만나는 장소는 전시장보다 뒤풀이 장소인 '부산식당'과 '사동집'이었다.



그 날 만난 아는 분으로는 30여년 동안 인사동을 오가며 기름 행상한 권경선씨와 미술판의 방랑자 성기준씨 뿐이었다.

'갤러리 가이아'에서는 사보 클라라 페트라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고,

주인이 바뀌어 수리하는 점포나, 전시가 바뀌어 디스플레이 하는 전시장들이 많았다.



고서 파는 '통문관'은 셔터 내린 날이 더 많고, 그 옆에는 거대한 흉물 하나가 꿈틀대고 있었다.
옛 민정당사 터에 긴 세월동안 눈치 보며 터를 잡아 온 호텔공사가 마무리에 접어들고 있었다.

인사동 거리 쪽에 지어놓은 건물 벽에는 장사할 사람 찾는 임대광고가 붙어 있었다.



이러다 한 세기는 커녕 반세기 전의 인사동 모습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인사동의 오랜 정체성은 오간데 없고, 이름만 있는 껍데기만 남아버렸다.




10년 전 '눈빛출판사'에서 펴낸 '인사동 이야기'사진집에도 소개된바 있지만,
현재의 인사동 명칭은 일제강점기였던 1914년에 생겼다.

조선시대 한성부의 관인방(寬仁坊)과 대사동(大寺洞)의 가운데 자인 인(仁)과 사(寺)를 따서 불러졌다.

인사동 거리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삼청동 개천에서 시작해 청계천을 따라 형성되었다고 한다.

국가에 공훈이 있는 신하들에게 상을 내리고 공적을 보존하는 일을 맡아보던 조선시대 관아인 충훈부도 이곳에 있었다.

특히 도화원이 이곳에 있어 미술활동의 중심지가 되어 중인들이 주로 모여 살았다.




1910년대의 인사동은 소위 양반들이 몰려사는 북촌의 노른자위였다.

일제말기에서 해방직후까지 4-5개의 점포가 있었는데, 6,25후 혼란했던 사회가 안정돼 가자

일부 벼락부자와 정치인들 사이에서 골동품 붐이 일면서 골동품거리가 번창했다고 한다.



한국전쟁을 겪는 동안 먹고 살기위해 집안에 가보처럼 모셔두었던 것을 인사동에 내다 팔기 시작했는데,

골동품을 똥값으로 후려 쳐, 비싸게 되팔아 부자가 된 골동품상도 많았다.

더 안타까운 일은 그렇게 수집된 상당부문의 고미술이나 골동품들이 쪽바리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이다.




그 이후 1930년대부터 인사동 길 주변에는 서적이나 고미술 관련 상가가 들어서면서 골동품 거리가 점차 형성됐다.

50년대 한국전쟁 이후에는 낙원상가 아파트 자리에 낙원 시장도 생겼다.

1970년대에는 최초의 상업 화랑인 현대 화랑이 생긴 것을 계기로 화랑들이 모여들면서 미술문화의 거리로 변신했다.

그러나 인사동엔 문화적 특성을 이용한 부동산 투자로 벼락부자가 된 사람도 속출했다.

난, 80년도 초에 인사동에 입성하여 그 이전 이야기는 노인들에게 주워 듣거나 사료에서 확인한 것이다.




1987년 인사동을 문화지구로 지정한 것은 전통문화의 보존이라는 측면에서는 좋은 일이었으나.

부동산 개발이라는 돈이 개입되며 개판이 된 것이다.

문화보다는 관광객들이 몰려들게 하여 주목받는 상권은 되었지만, 우리 전통문화는 흐지부지된 것이다.




지금의 인사동 문화지구는 인사동을 비롯하여 낙원동, 관훈동, 견지동, 경운동, 공평동을 아우르는 말인데,

동쪽으로는 운현궁 앞 삼일로, 서쪽으로 조계사 앞 우정국로, 북쪽으로 종로경찰서 앞 율곡로,

남쪽으로는 남인사마당과 종로가 붙어있다.




인사동이 전통문화의 거리로 지정되어, 한국을 상징하는 공간이자 외국인이 즐겨 찾는 명소는 되었으나, 속빙 강정일 따름이다.

문중을 지키는 종갓집 며느리처럼 명맥을 잇던 골동품 가게들이 치솟는 건물임대료에 쫒겨 대부분 장안동으로 밀려났다.

대신 커피체인점이나 옷가게 등으로 바뀌었고, 남은 것도 국적 없는 잡화상으로 변해 싸구려 관광거리를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

2013년 지정된 ‘인사동문화지구 관리 변경 안’의 권장업체였던 공예품 가게는 인형이나 탈 몇 가지 진열해 둔 잡화상으로 변신한 것이다.

더욱 아쉬운 것은 수 많은 갤러리들이 인사동에 몰려 있으나, 작품 관람에는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이제 오래된 인사동 공간의 추억은 물론, 인사동의 풍류를 주도해 온 예술가들도 대부분 돌아가시거나,

살아 있어도 만나 보기 힘들어 인사동 기록을 접을 때가 된 것 같다.



10년 전 '인사동 이야기'사진집을 출판했으나, 오래전 절판되어 지금은 구할 수가 없다.

'인사동 이야기' 사진집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3년전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청량리588'사진전을 열 때 보관하고 있던 '인사동이야기' 한 권을

관객들을 위해 입구에 비치해 두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책이 사라진 것이다.




더 이상 구할 수 없는 책이라 아깝기도 했지만, 어떻게 사라졌는지가 궁금해 못견디겠더라.

전시가 끝난 후 갤러리를 관리하던 공윤희씨와 CCTV를 확인해 보았는데, 깜짝 놀랄 지인이 슬쩍 가져가는 것이 아닌가.

얼마나 그 책이 갖고 싶었으면 그랬을까 싶어, 확인한 둘다 안 본 것으로 하고 영원히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래도 한 권은 있어야 할 것 같아 청계천 중고서적상을 뒤져 책 구하느라 한 나절을 뺑뺑이 돈 적도 있다.




그러나 그 책이 남아 있더라도 보완할 내용이 더 많았다.

인사동 사람들이라고 내세운 115명의 예술가들도 덜 인사동 다운 사람이 많은데다, 꼭 들어가야 할 사람이 많이 빠졌다.

사진가 한정식선생의 발문에다 시인 강 민, 민 영, 신경림, 황명걸, 서정춘, 김신용, 소설가 배평모, 박인식, 민속학자 심우성씨등

37명의 문인들이 쓴 인사동 추억담에다 필자가 쓴 인사동 에피소드 열 토막까지 게재했으나,

대개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씨 세분 이야기거나 '귀천'이나 '실비집'에서 있었던 중복되는 내용이 많은데다,

정작 사료로 필요한 골동품 거래 이야기나 인사동의 중요한 증언들이 빠져 있었다.



1부는 흑백으로, 2부는 컬러로 나누어 편집할 계획이다.

천상병, 박재삼, 심우성, 이계익, 목순옥, 이호철, 김동수, 최영해, 강용대, 김종구, 김용태, 여 운, 김영수씨 등

그동안 돌아가신 분들의 사진과 오래된 인사동 사진만 흑백으로 게재하고,

10년동안 기록한 사람들과 인사동 거리풍경은 컬러로 바꾸어 제대로 된 인사동 자료집을 올해 중에 마무리할 작정이다.

관련있는 분들의 많은 자문과 도움을 바랍니다.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인사동은 이제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하나의 성지로 남게 되었다.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나 술 한잔하는 셋째 수요일은 캘린더에 빨간 글로 적혀 있었다.
자세히 보니 ‘대통령선거일’이라고 적혔는데, 지난 일들에 만감이 교차했다.
교도소에서 떨고 있을 적폐무리 생각하니 통쾌하긴 했으나, 한 편으론 불쌍했다.
마약 같은 돈과 권력에 눈이 먼 것이지, 한 인간으로서는 가여울 수밖에 없다.






모임 있는 날은 폭설이 내려 걱정스러웠다.

전날 밤 정영신씨 생일 술에 곯아, 온 종일 방바닥을 기었지만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모임은 송년회를 겸한 달이기도 하지만, 윤병갑씨를 만날 일도 있었다.






잔뜩 챙겨 입고 미끄러질까 조심스레 지하철로 갔는데, 삼십분이나 늦어버렸다.
눈 때문인지 사대문 방향에서 나오는 지하철은 만원인데, 들어가는 지하철은 텅텅 비었다.
많이 못나올 것으로 여겼지만, 인사동 ‘유목민’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김신용시인도 나와 있었다. 



 


그는 사는 곳이 소래부근이라 한번 나오려면 차를 몇 번이나 갈아 타야하는데다,
옛날 노가다 시절에 골병든 다리에 문제가 생겨 인사동에 안 나온 지가 일 년이나 되었다.
또 하나 고마운 것은 화가 전강호씨다. 여지 것 모임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았지만,
송추에서 목발로 눈길 헤쳐 오려면 예사 일이 아닐텐데 말이다.





조준영시인을 비롯하여 강찬모, 이명희, 공윤희, 김완기, 김수길, 강성봉, 이재민,
김재홍, 강경석, 전활철, 박혜영, 김대웅씨 내외 등 많은 사람들로 술집은 시끌벅적했다.
하기야 술꾼들이 날씨 따지겠냐? 더구나 눈 오는 날이라 술 맛 나기 딱 좋은 날 아니던가.
그런데, 윤병갑씨는 보이지 않고 전활철씨가 ‘미술기행’ 일동이라 적힌 돈 봉투를 건내주었다.






망년회 모임에 안주라도 몇 개 시켜드시라고 보냈다는데, 엄청 미안했다.
윤병갑씨도 같이 어울릴 것으로 생각하고 늑장 부렸는데, 이일을 어쩌랴!
통장이 없는 처지라 봉투 전해주려 이른 시간부터 인사동에 나왔다는데,
‘유목민’ 문이 닫혀있었다고 했다. 이 추운 날 얼마나 고생하였을까?






그런데, 입장 곤란한 일이 생겨버렸다.
'미술기행' 회원들의 고마운 마음을 총대 맨 조준영씨에게 전했는데,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일흔 넘은 노인네는 회비를 받지 않는데, 탁발한 돈도 받을 수 없다는 것 같았다.
자기네들도 내일 모래면 일흔 일 텐데, 더럽게 기분 좋더라.






일흔 넘은 사람이레야 나와 김신용씨 뿐이니, 둘 다 개털이라 봐주는 것 같았다.
사실 나이가 들면 아무래도 인사동 출입이 줄어들 수밖에 없으니,
장려차원에서 안 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회비 안 받는 것은 차지하고, 안주 사라고 보낸 성의까지 거절했는데,
한마디로 거지 돈은 치사해서 받지 않겠다는 것 아닌가?


뻔뻔스럽지만 길도 미끄러운데 택시 타고 가자며 김신용씨와 한 장씩 나누어 가졌다.
‘미술기행’ 회원들의 따뜻한 마음에 훈훈한 년 말이었다.





뒤늦게 정영신, 김명성, 김상현, 최종선, 임태종, 김각한, 이회종, 김영선, 노광래씨가

차례대로 나타나 판이 무르익어갔다. 김상현씨와 전활철씨의 노래도 크게 일조했다.
마침 그 날이 김명성씨 생일이라 공윤희씨가 생일 케익도 사 왔다.
매년 정영신씨 생일과 하루 차이라 같이 생일잔치를 치루었는데, 이번엔 그러지 못했다.






이 날은 안주도 푸짐했지만, 김완기씨가 양주를 한 병 가져왔더라.
몇 잔 마시지도 않았으나, 술 취해 똥오줌 못 가린 엊저녁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동안 이가 빠져 삼가 했던, ‘봄날은 간다’를 부르며 지랄발광을 떨었으니,
정말 가관이었을 것이다.

망할 년 보내는 날, 어찌 돌지 않으랴!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양동에서 김신용시인을 만나, 인사동에 들렸다.
추석연휴가 끝나는 날이라 거리는 번잡했다.
건들거리기 좋은 날씨까지 받혀 줘, 많은 사람들이 북적였다.
한복들을 곱게 차려입은 학생들의 행렬은 들녘에 핀 코스모스 같았다.
외국관광객들의 눈길이 내려 꽂혔다.

부처를 밟고 서서 “깨어나라”는 피켓을 든 사나이도 있었다.
사람들이 많으니 인사동에 별의 별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
그 화려한 거리풍경 속에는 가난한 이들의 안타까운 삶도 숨어있다.
빈 깡통을 줍는 노인도 있고, 막걸리 한 잔으로 끼니를 때우는 이도 있다.
더위가 물러나 잘 팔리지 않는다는, 부채 파는 노인의 한숨이 내려앉는다.

거리는 펄럭이지만, 인사동은 외롭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8일, 김신용시인과 양동에서 만나기로 했다.
서울역 주변에서 쪽방사람들을 찍는 나를 도우려, 시흥에서 나온 것이다.
양동은 그가 지게꾼으로 일하며 시를 쓰 왔던 시작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그는 매혈은 물론, 정부의 산아제한 정책으로 시행된 정관수술을 두 차례나 받았다.

끼니해결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았는데, 그러한 부랑의 시절에 양동골방

(그 때는 쪽방이 아니라 골방이라 했단다)에 엎드려 양동시편을 쓰내어,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창녀촌이자 빈민굴인 양동의 풍경이 생생하게 묘사된 시편들은 '문학적 승화'가 어떤 것인지 보여줄 만큼 아름답다.





양동시편에 나오는 김신용의 '뼉다귀집'시 한 편을 읽어보라.


뼉다귀집을 아시는지요
지금은 헐리고 없어진 양동 골목에 있었지요
구정물이 뚝뚝 듣는 주인 할머니는
새벽이면 남대문 시장바닥에서 줏어온
돼지뼈를 고아서 술국밥으로 파는 술집이었지요
뉘 입에선지 모르지만 그냥 뼉다귀집으로 불리우는
그런 술집이지만요
어쩌다 살점이라도 뜯고 싶은 사람이 들렀다가는
찌그러진 그릇과 곰팡내 나는 술청 안을
파리와 바퀴벌레들이 거미줄의 현을 고르며 유유롭고
훔친 자리를 도리어 더럽힐 것 같은
걸레 한 움큼 할머니의 꼴을 보고는 질겁을 하고
뒤돌아서는 그런 술집이지만요
첫새벽 할머니는 뼉다귀를 뿌연 뼛물이 우러나오도록
고아서 종일토록 뿌연 뼛물이 희게 맑아질 때까지
맑아진 뼛물이 다시 투명해질 때까지
밤새도록 푹 고아서 아침이 오면
어쩌다 붙은 살점까지도 국물이 되어버린
그 뼉다귀를 핥기 위해
뼈만 앙상한 사람들이 하나둘 찾아들지요
날품팔이지게꾼부랑자쪼록꾼뚜쟁이시라이꾼날라리똥치꼬지꾼
오로지 몸을 버려야 오늘을 살아남을 그런 사람들에게
몸 보하는 디는 요 궁물이 제일이랑께 하며
언제나 반겨 맞아주는 할머니를 보면요
양동이 이 땅의 조그만 종기일 때부터
곪아 난치의 환부가 되어버린 오늘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뼉다귀를 고으며 늙어온 할머니의
뼛국물을 할짝이며
우리는 얼마나 그 국물이 되고 싶었던지
뼉다귀 하나로 펄펄 끓는 국물 속에 얼마나
분신하고 싶었던지, 지금은 힐튼 호텔의 휘황한 불빛이
머큐롬처럼 쏟아져 내리고, 포크레인이 환부를 긁어내고
거기 균처럼 꿈틀거리던 사람들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러나 사라지지 않은 어둠 속, 이 땅
어디엔가 반드시 살아있을 양동의
그 뼉다귀집을 아시는지요


 




김신용시인은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며 뼈를 깍는 괴로움 속에서도 좌절않고 시를 쓴, 투지의 작가다.

그리고 그의 맑은 사랑의 정신과 예민한 감성은 눈 부시도록 아름답다.

 소외층의 삶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동질성을 바탕에 두었기에 다른 구호적인 사랑의 시편과는 다르다.

어떤이는 한국의 장 주네(프랑스 부랑아출신 작가)나, 제2의 천상병이라고도 하지만. 그만의 감성은 비교할 상대가 아니다.





시집 “버려진 사람들”, “개 같은 날들의 기억”, “몽유 속을 걷다”, “환상통”, "바자울에 기대다"를 비롯하여

소설 “고백”, “기계 앵무새”, “새를 아세요”등 많은 작품들을 발표했고, 여기 저기 문학상도 많이 받았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노동의 시인일 뿐이다.






그와 함께, 지게꾼으로 살던 30여년 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현장을 돌아 다녔다.
'힐튼호텔' 아래 벼랑길에 자리 잡은 그가 살던 3층 건물은 여지 것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마침, 그 당시 문학잡지 기자가 찍은 사진 몇 장을 챙겨왔는데, 외벽 타일까지 그대로였다.


 






-김신용시인이 가져 나온, 30여 년전 찍은 양동사진-






 

지금은 사라진 ‘뼉다귀집’ 터를 비롯해, 일 나가던 길목이나 주변 골목을 돌아보며, 회한에 빠져들었다.

지게꾼 최고의 자리인 '코스모스백화점' 전속지게꾼 자리를 자기보다 더 어려운 박인수씨에게 물려주고,

다른 일거리를 찾아 나선 일, 자신을 좋아했던 창녀의 "같이 살자"는 제안을 거절했던 일 등,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창녀가 살던 집을 돌아보고, 서울역이 내려다 보이는 구름다리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는 이야기도 했다.





김신용시인은 옛 ‘대우’그룹에서 주변 땅을 접수하기 시작하며 쫓겨났다고 했다.

폭력배까지 동원해  골방촌 사람들을 내쫒았는데, 자신은 독신이라 이주비 20만원을 받았다고 한다,

가족이 있으면 이주딱지를 주었으나, 그 딱지도 대부분 130여만원에 되팔았다고 했다.

딱지도 끝까지 버틴 사람은 훨씬 많이 받고 팔았지만, 버틴 독신자는 이주비를 30만원까지 주었단다.





양동은 '힐튼호텔'을 비롯한 거대한 빌딩들이 점령했지만, 아직도 퇴락한 골방촌의 면면을 간직한 곳이 많았다.

잘 난 사람들이 북적이는 그 빌딩 틈 사이에, 가난한 사람들이 끼어 진드기처럼 연명하는 것이다.

언제 철거될지 모르니, 집들은 낡을 대로 낡았고, 주변 환경조차 지저분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입주한 쪽방 건물이다. 4층 3호실인데, 전세없이 월세23만원














아직까지 여인숙이란 간판이 그렇게 많은 곳도 처음 보았다. 

더 놀라운 것은, 몸을 파는 양동사창가의 잔재들이 아직 남아 있다는 점이다.


쪽방촌 사람들의 고난과 마음의 상처를 다독여 줄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없는가?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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