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리는 정영신의 ‘장에 가자’사진전이 이제 종반에 접어들었다.

개막 후 이틀 동안의 전시장 방문객 사진은 보여드렸으나,

그 이후부터 컴퓨터와 만날 시간이 없어 많은 일거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포스팅은 13일부터 16일까지 방문한 분들의 모습과 전시장 풍경이다.

전시장을 비워 뵙지 못했거나, 미처 사진을 찍지 못한 분들에게는 송구스럽다.

 

지난 13일 정오 무렵에는 곽명우씨가 다시 방문했다.

첫 날 늦게 와 사진을 찍지 못한 것 같았다.

 

김남진관장과 곽명우, 정영신씨와 ‘진수성찬’에서 오찬을 함께 했다.

‘진수성찬’은 처음 가본 정식집인데,

집에서 먹는 것처럼 반찬이 정갈하고 구수한 누룽지가 일품이었다.

 

그 다음 날 정오 무렵에는 소설가 김승환선생 께서 먼저 와 계셨다.

강민 시인께서 살아계실 적엔 가끔 인사동에서 뵐 수 있었으나,

선생께서 돌아가신 후로는 전혀 뵐 수 없던 터라 반갑기 그지없었다.

 

먼 거리를 와 주신 것만도 황송한데, 선물이라며 가죽가방 하나를 꺼내 주었다.

아마 선생님께서 애용하신 가방 같은데,

이젠 외출할 일이 별로 없어 정영신씨를 준 게 아닌가 생각되었다.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을 고맙게 받았다.

 

그 날은 휴일이라 그런지 대개의 식당이 문을 닫았더라.

문이 열린 집이라고는 순대국밥 뿐이라 썩 내키지 않았는데,

반주에다 맛있게 드시는 걸 보니 한결 마음이 편했다.

식사 후 커피라도 한 잔 대접하고 싶었으나, 기어히 사양하시며 발길을 재촉하시네.

김선생님의 쓸쓸한 뒷모습을 바라보니 마음이 짠해졌다.

그 뒷모습이 바로 내 모습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은 하룻밤을 지나면 한 달이 지난 것처럼 세월이 쏜살같다.

들려오는 주변 분들의 부음조차 남의 일 같지 않은 것이다.

 

난, 동자동에서 지내다 필요할 때만 나가니, 뵙지 못한 분도 많았다.

없는 시간에 다녀 간 분으로는 전활철, 한선영, 류엘리, 노연덕, 황성호, 권순광,

안옥철, 이정숙, 황인선, 최치권, 김준희, 권혜진, 김기덕, 서은화. 정명식, 김광안,

정남준, 안현수, 이세연, 노은향, 최재순, 남 준, 이태호, 이수만, 하춘근, 정주영,

김소연, 이성표, 심지윤, 김중호, 김명점, 이창수,씨 등 많은 분이 다녀갔더라.

 

지난 15일 오후에는 화가 나종희씨가 전시장을 찾았다.

오랜만의 만남이라 ‘전시할 계획은 없냐?’고 물었더니,

이 달 25일부터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연다더라.

 

마치 알고 물어 본 것 같았는데, 어떤 작품을 보여줄지 벌써 기다려진다.

그 날 ‘인사아트프라자’에서 열리는 김윤수선생 2주기 추모전과 겹쳤지만,

가까운 거리라 일거양득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다음 날은 끝 날 시간이 가까운 늦은 시간에 들렸는데, 사진가 하형우씨가 와 있었다.

좀 있으니 강릉의 황지웅피디와 이승구피디가 멀리서 찾아왔다.

먼 길을 와 주신 것만도 황송스러운데, 밥 값을 계산해 버렸네.

다들 운전 때문에 술 한 잔 마시지 못했으나, 반가운 소식도 전해 들었다.

 

도시 재생을 위해 철거된 화광아파트와 광부들의 애환을 담은,

황지웅PD가 만든 '광부의 기억 화광아파트'가 방송문화진흥회가 시상하는

2020 지역프로그램대상에서 금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더구나 지역방송사의 열악한 예산과 인력 탓에 휴일을 이용하여 개인적으로 취재했다고 한다.

주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인터뷰하는 긴 과정에 아들이 조수 역할을 맡았는데,

상보다 더 값진 선물은 작업 과정을 지켜 본 아들로부터 들은 ‘자랑스러운 아빠’라는 말 한마디였다.

이 보다 더 한 보상이 어디있겠는가?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더 좋은 일 많이 만들기를 바란다.

 

지난 16일 오후에는 뮤지션 김상현씨가 동자동에 찾아 와 함께 전시장에 들렸다.

사진가 김범수씨와 판화가 류연복씨, 미술평론가 황정수씨와 오란석씨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차례대로 나타났다.

김범수씨는 인도커피를 가져 와 즉석에서 뽑아 돌렸는데, 그 맛이 귀가 막혔다고 한다.

쓴맛, 단맛, 짠맛 등 갖가지 맛이 어우러진 별난 맛이라는데, 나만 사양했다.

믹스커피나 마시는 커피 맛도 모르는 촌놈이 귀한 커피를 축낼 수야 없지 않겠는가?

 

사람 좋기로 소문난 류연복씨를 만나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편해진다.

한 편으론 안스러운 생각도 든다.

혼자 사는 것이 편할지 모르겠으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외롭기 때문이다.

아니면 중의 팔자를 타고났는지도 모르겠다.

 

황정수씨는 날 잡아 류연복씨 집을 방문할 생각이라고 했다.

나 역시 인근에 있는 정복수씨나 변승훈씨 작업실은 가 보았으나,

류연복씨 작업실은 가보지 못했다.

날짜만 맞으면 이참에 따라 붙으면 어떨까 생각한다.

 

그 날 황정수씨가 보여 준 이청운씨의 오래된 작품 한 점에 깜짝 놀랐다.

그동안 보아왔던 작품과 달리 콩크리트 골조가 화면을 채운 현실 비판적 그림이었다.

 

난, 이청운화백을 감히 천재 작가라고 말한다.

하루속히 병석에서 일어나 머리 속에 담아 둔 이야기들을 화폭에 쏟아냈으면 좋겠다

지난 병문안 때의 활기찬 모습에 기대했는데, 다시 입원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다.

 

그 날 묵은지 갈비찜이 맛있는 ‘김삼보’집에서 어울려 기분좋게 술 한 잔 했다.

지하철 탄 기억도 나지 않는 걸 보니, 취하긴 취한 모양이다

요즘은 코로나에 목숨 걸고 마시는 술이라 그런지 취하는 것도 유별나다.

 

영원한 동지 정영신씨가 요즘 고생을 사서한다.

전염병으로 개막식 초대를 없애는 대신, 항시 자리를 지키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쉼 없이 이어지는 손님들로 인해 마음 편히 쉴수도 없겠더라.

몇 날 몇 일을 전시장에 틀어박혀 손님만 맞았으니 몸이 견디겠는가?

 

자! 이제 이틀 밖에 남지 않았다.

장돌뱅이는 죽어도 장에서 죽어야지...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어저께 인사동 터줏대감 강민 선생의 운명이 임박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니 방에 틀어박혀 있을 수 없었다.

선생께서 자주 들리시며 친구들을 불러 모았던 인사동 '나주곰탕' 앞에서 한 참을 서성이며 선생을 생각했다.



사실, 인사동 인사동 노래를 부르며 들락거리지만, 공간의 추억보다는 사람의 추억이다.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선생은 오래전에 전설이 되었지만, 김동수, 이계익, 신봉승, 심우성선생께서 차례로 떠나가셨고,

마지막 터줏대감으로 여겼던 강민시인 조차 오늘 내일하고 있으니, 이제 인사동도 막 내려야 하는 것인가?

아직 구중서, 김승환, 민 영, 방동규. 신경림, 황명걸선생 등 인사동을 사랑하는 원로들이 계시지만,

강민선생이 계시지 않으면 뵐 수는 있을까?


 

80년대 중반 '나주곰탕'집 자리는 망각 강이라는 술집 ‘레테’가 있던 자리다.

소설가 배평모씨를 그 곳에서 처음 만나 이틀 동안 쉬지않고 마셨던 곳이기도 하다.

그 술집은 이점숙씨가 운영했는데, 펑퍼짐한 엉덩이를 가진 미색도 죽이지만,

숨이 끊어질듯 애절하게 부르는 춘향가의  ‘갈까보다’라는 소리에 숨이 턱턱 막힌다. 



"갈까보다, 갈까보다. 님 따라서 갈까보다.

천 리라도 따라가고, 만 리라도 갈까보다.

바람도 쉬여 넘고, 구름도 쉬여 넘는..." 

강민 선생님 앞에서 이 소리 한 자락 불러 드렸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사실, 배평모씨는 친구 좋아 날밤 까며 이틀 동안 술을 마셨다지만, 그 여인이 없었다면 어림없었다.

가끔 임춘원 여사가 출몰하여 불러주는 뚝뚝 떨어지는 ‘목련’도 기가 막혔다.

그 때부터 인사동 예술가들 술값 뒷바라지 한 김명성씨는 다 털어먹은 지금까지 술값 대느라 바쁘다.



'레테'가 있던 윗층에는 박중식시인이 운영한 '툇마루'가 생겼지만, 

옆 건물 옥탑방에 내가 사용한 '카메라워크'가 있어 자주 들락거릴 수 밖에 없는 골목이었다. 

강민선생을 '나주곰탕'에서 그리워하며, 망각의 강에서 '갈까보다'를 듣고 싶었다.





그외 인사동을 추억할 만한 장소는 찻집'귀천'과 실비대학으로 불리던 '실비집'이었다.

'귀천'에서 천상병시인에게 저승가는 노자돈을 바치거나, 민병산선생의 서예글씨를 만날 기회가 많았다.

운이 좋은 날에는 '한국일보' 사진기자 김종구를 만나 진토닉까지 얻어 마실 수 있었지만...




그리고 '실비집'은 가난한 인사동 예술가의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인심이 후해 술값이 싸니, 누구든 막걸리 한 병 값만 있으면 갈 수 있고, 외상까지 통한다.
안주를 시키지 않아도 김치나 콩나물을 내주지만, 버스가 끊겨 자는척하는 날에는 이튿날 해장국까지 얻어 먹을수 있었다. 
이북이 고향인 주모 아닌 실비대학 총장님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이 없다. 



또 한가지 잊을 수 없는 일은 '실비집'에서 가진 결혼식 뒤풀이였다.

대학로에서 혼례식을 끝냈으면 신혼여행이나 갈것이지, 실비집에 자리를 왜 잡았는지 모르겠다. 
그 당시 '87민주항쟁' 개인전을 말리는 이사장이 싫어, '사진협회를 그만두고 박한웅씨를 밀어넣었는데.

그 날 뒤풀이에서 사고를 치고 말았다.  삥땅 뜯는 땡초 적음을 대머리로 들이 받아 앞니를 부러트린 것이다.
뒤 이어 술 취한 내가 옷을 벗고 난리를 피웠으니, 신부를 비롯한 신부 우인들까지 질겁해 도망갔다.




잔치는 완전 개판 되었으나, 그 이튿 날이 더 문제였다.

적음의 치료비를 걱정한 화가 강용대가 부추겨, 출근하는 박한웅을 잡아가게 한 것이다.

새 직장에 나간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잘 못하면 목 잘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배평모씨와 둘이서 적음을 찾아가 고소를 취하하라고 얼마나 사정했는지, 입에서 화근내가 났다.



한참 뒤인 15년 전에 생긴 '작은 뜨락'이란 대폿집도 잊을 수 없는 공간이다.

'작은 뜨락'은 '한지추억'이란 점포로 바뀌었고, '시인통신'자리는 '古 ART'로 바뀌었더라. 

인사동 풍류객의 ‘참새 방앗간’으로 통한 이 곳은, 장사라고는 처음한 노인자씨가 운영한 곳이다.

원래 건물 옆에 버려진 골목을 차양으로 가리고, 건물 벽에 의지해 폭 1미터에 길이 5미터 남짓한 공간을 마련했다.

폭이 좁아 일반 탁자를 놓을 수가 없어 벽에 긴 나무판대기를 붙이고, 바닥에는 엉덩이를 걸칠 만한 간이의자를 놓았다.



이 집에서 먹고 마시기 위해서는 한껏 몸을 웅크린 채, 본의 아니게 면벽을 해야 한다.

그런 술집이 인사동풍류객들의 아지트가 되었는데, 술값은 자율적으로 먹은만큼 바구니에 담고 나갔다.

자리가 없으면 그 옆 건물 이층으로 이사 온 한귀남씨의 '시인통신'에서 죽치기도 했는데,

긴 세월은 아니지만, 한 동안 인사동을 풍미했던 대폿집이 틀림 없었다.

그림쟁이들을 자주 만나는 장소는 전시장보다 뒤풀이 장소인 '부산식당'과 '사동집'이었다.



그 날 만난 아는 분으로는 30여년 동안 인사동을 오가며 기름 행상한 권경선씨와 미술판의 방랑자 성기준씨 뿐이었다.

'갤러리 가이아'에서는 사보 클라라 페트라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고,

주인이 바뀌어 수리하는 점포나, 전시가 바뀌어 디스플레이 하는 전시장들이 많았다.



고서 파는 '통문관'은 셔터 내린 날이 더 많고, 그 옆에는 거대한 흉물 하나가 꿈틀대고 있었다.
옛 민정당사 터에 긴 세월동안 눈치 보며 터를 잡아 온 호텔공사가 마무리에 접어들고 있었다.

인사동 거리 쪽에 지어놓은 건물 벽에는 장사할 사람 찾는 임대광고가 붙어 있었다.



이러다 한 세기는 커녕 반세기 전의 인사동 모습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인사동의 오랜 정체성은 오간데 없고, 이름만 있는 껍데기만 남아버렸다.




10년 전 '눈빛출판사'에서 펴낸 '인사동 이야기'사진집에도 소개된바 있지만,
현재의 인사동 명칭은 일제강점기였던 1914년에 생겼다.

조선시대 한성부의 관인방(寬仁坊)과 대사동(大寺洞)의 가운데 자인 인(仁)과 사(寺)를 따서 불러졌다.

인사동 거리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삼청동 개천에서 시작해 청계천을 따라 형성되었다고 한다.

국가에 공훈이 있는 신하들에게 상을 내리고 공적을 보존하는 일을 맡아보던 조선시대 관아인 충훈부도 이곳에 있었다.

특히 도화원이 이곳에 있어 미술활동의 중심지가 되어 중인들이 주로 모여 살았다.




1910년대의 인사동은 소위 양반들이 몰려사는 북촌의 노른자위였다.

일제말기에서 해방직후까지 4-5개의 점포가 있었는데, 6,25후 혼란했던 사회가 안정돼 가자

일부 벼락부자와 정치인들 사이에서 골동품 붐이 일면서 골동품거리가 번창했다고 한다.



한국전쟁을 겪는 동안 먹고 살기위해 집안에 가보처럼 모셔두었던 것을 인사동에 내다 팔기 시작했는데,

골동품을 똥값으로 후려 쳐, 비싸게 되팔아 부자가 된 골동품상도 많았다.

더 안타까운 일은 그렇게 수집된 상당부문의 고미술이나 골동품들이 쪽바리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이다.




그 이후 1930년대부터 인사동 길 주변에는 서적이나 고미술 관련 상가가 들어서면서 골동품 거리가 점차 형성됐다.

50년대 한국전쟁 이후에는 낙원상가 아파트 자리에 낙원 시장도 생겼다.

1970년대에는 최초의 상업 화랑인 현대 화랑이 생긴 것을 계기로 화랑들이 모여들면서 미술문화의 거리로 변신했다.

그러나 인사동엔 문화적 특성을 이용한 부동산 투자로 벼락부자가 된 사람도 속출했다.

난, 80년도 초에 인사동에 입성하여 그 이전 이야기는 노인들에게 주워 듣거나 사료에서 확인한 것이다.




1987년 인사동을 문화지구로 지정한 것은 전통문화의 보존이라는 측면에서는 좋은 일이었으나.

부동산 개발이라는 돈이 개입되며 개판이 된 것이다.

문화보다는 관광객들이 몰려들게 하여 주목받는 상권은 되었지만, 우리 전통문화는 흐지부지된 것이다.




지금의 인사동 문화지구는 인사동을 비롯하여 낙원동, 관훈동, 견지동, 경운동, 공평동을 아우르는 말인데,

동쪽으로는 운현궁 앞 삼일로, 서쪽으로 조계사 앞 우정국로, 북쪽으로 종로경찰서 앞 율곡로,

남쪽으로는 남인사마당과 종로가 붙어있다.




인사동이 전통문화의 거리로 지정되어, 한국을 상징하는 공간이자 외국인이 즐겨 찾는 명소는 되었으나, 속빙 강정일 따름이다.

문중을 지키는 종갓집 며느리처럼 명맥을 잇던 골동품 가게들이 치솟는 건물임대료에 쫒겨 대부분 장안동으로 밀려났다.

대신 커피체인점이나 옷가게 등으로 바뀌었고, 남은 것도 국적 없는 잡화상으로 변해 싸구려 관광거리를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

2013년 지정된 ‘인사동문화지구 관리 변경 안’의 권장업체였던 공예품 가게는 인형이나 탈 몇 가지 진열해 둔 잡화상으로 변신한 것이다.

더욱 아쉬운 것은 수 많은 갤러리들이 인사동에 몰려 있으나, 작품 관람에는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이제 오래된 인사동 공간의 추억은 물론, 인사동의 풍류를 주도해 온 예술가들도 대부분 돌아가시거나,

살아 있어도 만나 보기 힘들어 인사동 기록을 접을 때가 된 것 같다.



10년 전 '인사동 이야기'사진집을 출판했으나, 오래전 절판되어 지금은 구할 수가 없다.

'인사동 이야기' 사진집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3년전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청량리588'사진전을 열 때 보관하고 있던 '인사동이야기' 한 권을

관객들을 위해 입구에 비치해 두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책이 사라진 것이다.




더 이상 구할 수 없는 책이라 아깝기도 했지만, 어떻게 사라졌는지가 궁금해 못견디겠더라.

전시가 끝난 후 갤러리를 관리하던 공윤희씨와 CCTV를 확인해 보았는데, 깜짝 놀랄 지인이 슬쩍 가져가는 것이 아닌가.

얼마나 그 책이 갖고 싶었으면 그랬을까 싶어, 확인한 둘다 안 본 것으로 하고 영원히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래도 한 권은 있어야 할 것 같아 청계천 중고서적상을 뒤져 책 구하느라 한 나절을 뺑뺑이 돈 적도 있다.




그러나 그 책이 남아 있더라도 보완할 내용이 더 많았다.

인사동 사람들이라고 내세운 115명의 예술가들도 덜 인사동 다운 사람이 많은데다, 꼭 들어가야 할 사람이 많이 빠졌다.

사진가 한정식선생의 발문에다 시인 강 민, 민 영, 신경림, 황명걸, 서정춘, 김신용, 소설가 배평모, 박인식, 민속학자 심우성씨등

37명의 문인들이 쓴 인사동 추억담에다 필자가 쓴 인사동 에피소드 열 토막까지 게재했으나,

대개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씨 세분 이야기거나 '귀천'이나 '실비집'에서 있었던 중복되는 내용이 많은데다,

정작 사료로 필요한 골동품 거래 이야기나 인사동의 중요한 증언들이 빠져 있었다.



1부는 흑백으로, 2부는 컬러로 나누어 편집할 계획이다.

천상병, 박재삼, 심우성, 이계익, 목순옥, 이호철, 김동수, 최영해, 강용대, 김종구, 김용태, 여 운, 김영수씨 등

그동안 돌아가신 분들의 사진과 오래된 인사동 사진만 흑백으로 게재하고,

10년동안 기록한 사람들과 인사동 거리풍경은 컬러로 바꾸어 제대로 된 인사동 자료집을 올해 중에 마무리할 작정이다.

관련있는 분들의 많은 자문과 도움을 바랍니다.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인사동은 이제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하나의 성지로 남게 되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4일 강민선생님이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에 정영신씨와 '분당 서울대학교병원'으로 문병 갔다.

병원 휴게실에는 달마선생 내외 분과 정승재교수, 서정란씨 등 여러 명의 문인들이 먼저 와 계셨다.

소설가 김승환선생은 먼저 다녀가셨고, 맹문제교수도 오실 것이라고 했다.






어디가 편찮은지 궁금해 “선생님 병명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더니, 상사병이라고 대답하셨다.

다들 웃기에 먼저가신 사모님이 그리워 생긴 우울증 쯤으로 가볍게 여겼는데,

선생님 몰래 전해준 서정란씨의 이야기로는 심각한 상태라고 했다.

암이 곳곳에 전이되어 병원에서 손을 쓸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





의사선생으로부터 처음 검사결과를 들었을 때는 선생님께서도 당황하셨으나, 모든 걸 내려놓았는지 여유롭게 웃으셨다.

더 가슴 아픈 것은 오래 전 입원하셨을 때, 병의 위중함을 아셨으나 병원비가 없어 치료를 받지 않고 방치해 둔 것이다.

그 끔찍한 고통을 혼자 감수하며 틈틈이 인사동에 나와 주변사람들을 걱정하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팠다.

무슨 말로 위안 드려야 할지 막막했으나, 내일이면 호스피스병원으로 옮긴다니 눈앞이 더 캄캄했다.






늦게 오실 분을 맞으려면 피곤하실 것 같아 병실 침대에 눕는 것을 보고 돌아왔는데, 이제 인사동도 끝장이란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한 번은 떠나야 할 길이지만, 불 꺼진 인사동을 생각하니 한 숨이 절로 나왔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으나, 선생처럼 온 몸으로 사랑하신 분은 없었다.

터줏대감이며 친구였던 심우성선생도 떠나시고, 이제 선생님까지 떠나신다면 누가 인사동을 지킬 것이란 말인가?






강민 선생의 시 ‘인사동 아리랑2’ 황혼 편을 다시 읽어보자.

“붐비는 인파 속에도
내가 찾는 이는 없다
오늘도 인사동 걷기는 허전하다
추억처럼 불빛이 켜지고 있다
열이 오르며 목이 마르다
잃어버린 불모의 사랑이 허공을 맴 돈다
어딘가 전화라도 걸까
눈시울만 시큰할 뿐
휴대전화를 만지는 손가락은 뻣뻣이 움직이지 않는다
종로 쪽 멀리 남산이 다가오고
차츰 어둠의 장막도 깔린다.
나 이제 또 어디론가 돌아가야 하리
그이의 아지트였던 찻집<보리수>도 없어졌다
진공의 거리
어디선가 그리운 이들 목소리 들리는 것 같다
돌아가리
돌아가리
그런데 이 끝없는 외로움은 무엇인가
풀리지 않는 눈물의 의미와 그리움은 무엇인가
기다리고 있을 밤의 공동(空洞)이 두렵다“





외로움과 그리움이 절절한 선생님의 시에 눈물이 절로 난다.





인사동으로 돌아와 약속한 공윤희씨를 만났다.
시간이 맞지 않아 함께 병문안드리지 못함을 애석해 하며,‘메밀란’으로 갔다.
그 자리는 ‘산타페’가 있던 자리인데, 돌아가신 여운 화백의 아지트가 아니던가?






그리고 맞은 편 잡초만 무성한 ‘목인박물관’은 흑백현상소 ‘꽃나라’가 있던 자리다.
‘꽃나라’를 운영하던 신작가도 여운화백도 다 떠나버린 인사동이 더욱 낯설기만하다.






다행스럽게 찻집 ‘초당’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초당보살 또한 건강이 좋지 않아 늦게 나오고 일찍 들어간다고 했다.
그렇게 한 사람 두 사람 떠나가고, 나 또한 떠나가리라.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수요일은 강민선생을 비롯한 인사동 터줏대감을 모시고, 
식사 대접하자는 기별을 장봉숙선생께서 보내왔다.
페북에서야 강 민선생을 간간히 뵙지만, 뵌 지가 한 달이 넘었다.





인사동 나주곰탕으로 갔더니, 문학평론가 구중서선생과 소설가 김승환선생,

사진가 정영신씨가 입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들 강 민선생을 기다렸으나, 선생께서는 이미 와 계셨다.

제일 멀리 계시는 분이 언제나 먼저 오신다.



 


자리 잡고 앉으니, 장봉숙선생께서도 오셨다.

매번 내가 꼴지로 나왔지만, 모처럼 꼴지 신세를 면한 것이다.



  정영신사진


강민선생은 귀가 어두운데다, 내가 하는 말까지 어눌해 소통이 잘 되지 않는다.

방동규선생께서 보이지 않아 근황을 여쭈었는데, 구중서선생께서 말씀하셨다.

"연락하니, 일이 있어 못 나온다"고 했다며,배추가 없으면 재미가 없다"고 아쉬워하셨다.



 


그런데, 장봉숙선생께서 선물 하나를 내놓으셨다.

얼마 전 중국여행 때 사왔다는 이과두주였는데, 병을 보니 보통 술은 아닌 것 같았다.

강 민선생 드리려 사온 술이겠지만, 맛이라도 좀 봐야 하지 않겠나?

눈치 봐 가며 슬슬 포장을 풀었더니, 식당주인이 말했다.

오늘만 강민선생님 때문에 봐주지만, 다음엔 절대 안 됩니다.”



 


52도나 되는 독주를 낮술에 쥐약인 내가 견딜 수 있을지 걱정스러우나, 어찌 귀한 술을 마다하겠는가?

맛만 본다며 조금 받아 마셨으나, 술 맛이 슬슬 당기기 시작했다.

홀짝홀짝 마시다, 나중엔 장선생과 정영신씨가 남긴 술까지 다 마셔버렸다.



 


방동규선생이 안 계시니, 구중서선생께서 이런저런 말씀을 많이 하셨다.

김두환씨가 시라소니 앞에 무릎 꿇었던 옛 이야기를 꺼내시며,

사실은 전해지는 무용담들이 좀 부풀려진 측면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배추가 맨주먹으로 열일곱 명이나 때려 눞혔다지만,

선생께 고백하기를 자기도 당한 적이 있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두 분이 각별히 친한 사이지만, 오래 전에는 다툰 적도 있다고 했다.

백기완과 구중서가 책 보라고 부추긴 죄로, 이것도 저것도 아닌 꼴로 살게 됐다"며,

술값은 늘 구중서선생께서 내게 하셨단다.





어느 날 인사동 실내악에서 구선생의 핀잔에 방선생께서 술값을 계산하고 먼저 일어난 것이다.

가다보니 술 값을 낼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지, 술값을 돌려 달라고 하셨다는데,

실내악 주인 김희주가 누구인가? 절대 못 돌려준다며 타박만 주었다는 것이다.





방선생께서 다방으로 올라가셨는데, 그곳에 계신 신동문시인께  "구중서와 의절하겠다는 말씀을 하셨단.

그 소리를 들은 신동문선생께서 갑자기 꿇어 앉어라며 호통을 쳤다는 것이다.

천하의 주먹이 손가락만 슬쩍 밀어도 쓰러질 비쩍 마른 시인의 말에 그냥 무릎 꿇고 앉았다는 것이다.

한참 있다 이제 일어나도 되냐고 물었더니, 좀 더 있어라 했단다.

얼마나 순진무구한 모습이냐?



 


그런 저런 이야기를 듣다보니 술이 슬슬 오르기 시작했다.

구중서선생께서 자주 가신다는 관훈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어지러웠다.

술 깨려고 인사동 주변을 돌아다니는 습관이 다시 도졌다.

길에서 까딱이를 몇 달 만에 만났지만, 술 취해 빌빌거리는게 불쌍한지 손도 벌리지 않았다.





나무화랑에서 열리는 목판대학 전시 때문에 그냥 갈 수도 없었다

다른 분들은 어디로 가셨는지 보이지도 않고, 강민선생 따라 기어 오르듯 전시장에 올라갔다.

김진하 관장과 정복수씨가 있었고 뒤 늦게는 김준권씨도 왔었는데, 전시된 작품들이 너무 좋았다.

초빙작가인 김진열, 정복수, 김진하, 문승영씨 작품은 물론, 학생들 작품도 예사롭지 않았다.

특히 이현숙씨 판화에 눈이 꽂혔다.



   

    

 

전시가 124일까지라 다음에 볼 작정으로 내려와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지러워, 강민선생께 인사도 드리지 못했다.

가까운 유목민 들어가 전활철씨께 택시 하나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어렵사리 집에 왔으면, 그냥 자빠져 자지 또 컴퓨터는 왜 켰는지 모르겠다.

누구에게 보고할 일도 없는데 말이다. 

음주운전보다 더 무서운 음주 포스팅을 기어이 하고 만 것이다.



 


그런데 희한한 꼴을 보았다. 갑자기 집채가 쓰러질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너무 불안해 기둥 사이로 돌을 집어넣기도 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소까지 지붕에 올라가 난리를 피우는 것이다.

소가 기와장을 튕기며 지붕 위를 뛰어 다니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더니 날 뛰던 소가 갑자기 땅에 떨어져 즉사한 것이다.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꿈이었다.



  

  

별 이상한 꿈을 다 꾸었다며 일어났더니, 컴퓨터가 켜져 있었다.

마우스를 당겨 보니, 음주 포스팅한 글에 댓글이 줄줄이 달려 있었다.

얼굴이 달아올라 급히 내리기는 했지만, 이미 볼 사람은 다 본 것 같았다.

속은 쓰린데다 망신살까지 뻗쳤으니,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 왜 이리 낮술에 맥을 못 추는지 모르겠다.

낮술은 애비도 몰라본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술 들어간 뱃속이 낮과 밤을 구분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리고 그 꿈이 뜻 하는 건 뭘까?

집안에 우환이 생길 징조는 아닌지, 해몽가라도 한번 찾아 볼일이다.


다시는 낮술과 음주 포스팅을 않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하건만, 그 버릇 개줄까 모르겠다.

 

 

사진. / 조문호










































흐르는 세월에 인사동 혼이 다 달아난다.

두 달 전에는 인사동 터줏대감이신 심우성선생께서 이승을 떠나셨다.

민병산, 박이엽, 천상병, 신봉승선생 등 먼저 가신 인사동 터줏대감 뒤 따라 가신 것이다.



 


인사동엔 여러 층의 예술가들이 드나들었지만, 무엇보다 문인들의 텃밭이었다.

70년대 관철동에서 인사동으로 건너와 인사동 문화를 꽃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젠 민 영, 신경림, 황명걸 시인을 비롯한 몇 몇 분들이 살아계시지만,

기력이 쇠진하여 인사동에 잘 나오시지도 않는다.



 


누구보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강 민시인의 외로움만 깊어져 간다.

틈만 나면 노구를 끌고 인사동을 기웃거리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 같다.

지팡이에 의지한 모습을 보니, 이년 전의 심우성선생 모습이 연상된다,



 


더 걱정인 것은 한 가닥 인사동 정서나마, 이어받을 후배가 없다는 점이다.

그렇게 그렇게 인사동 영혼은 빠져나가고, 인사동의 낭만도 사라지는 것이다.

흐르는 세월에는 장사 없다는 말이 실감난다.



  



지난 24일에는 모처럼 강민선생님과 점심 약속을 했다.

페북에서 간간히 인사는 드리지만, 뵌 지가 오래되어, 인사동 나주곰탕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꾸물대는 습관으로 또 늦어버렸는데, 그 자리에는 강민선생을 비롯하여 소설가 김승환선생,

'답게출판사' 장소임 대표, 사진가 정영신씨가 먼저 와 식사하고 있었다.



 


강민 선생께선 눈도 침침, 귀도 가물가물하다는데,

곰탕에 든 고기를 끄집어내, 술 안주하라며 접시에 담아주었다.

김승환선생께선 벌주로 술병을 든 채, 잔 비우기만을 기다리시니, 안 마실 수가 없었다.

, 단숨에 마시는 원 샷은 한 잔에 맛이 가버려, 잘 마시지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밥상머리 화제는 강민선생과 장소임씨의 인연으로 옮겨졌다.

30년 전 강민선생께서 금성출판사상무로 재직할 무렵,

장소임씨가 강민선생의 자문을 구하러 간 적이 있다고 했다.



 


그 당시 출판사 차릴 의향을 말씀드렸는데, 강민선생께서 용기를 주었다고 한다.

그 덕에 출판사 차려 오늘에 이르렀음을 감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신 때마다 오찬을 베풀어 드리는 등, 강 민선생을 각별히 챙겨왔다.



 


장소임씨는 올 해로 답게 출판사창립이 30주년을 맞아 기념행사도 가질 것이라 했다.

출판사 이름도 사람답게로 바꿀 생각이라며,

답게 라는 여러 종류의 상호를 등록하여 다른 곳에서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등 출판사 사정을 말했다.

그리고는 볼일이 있어 먼저 일어난다며, 지갑에서 10만원을 꺼내 강 민선생께 드린 것이다.



 


물론, 가난한 시인의 용돈을 챙겨주는 일이 고마운 일이긴 하나, 이 건 도리가 아니다.

드리려면 봉투에 넣어 정중히 드리거나, 다른 사람이 모르게 드리는 게 선생에 대한 예의다.

나이가 젊은 사람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그걸 모를 분이 아니잖은가?

그걸 보니, ‘답게 출판사와의 오랜 악연이 되살아났다.



 


약 십 오년 쯤 된 일이다.

'답게 출판사'에서 천상병선생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출판하였는데,

내 사진을 사용하였지만, 원고료는 커녕 작가의 승인이나 사진 출처도 밝히지 않고 무단 전재한 것이다.





내가 찍은 천상병선생 사진은 8X10규격으로 뽑아 서명까지 하여 목여사께 드렸는데,

그 사진을 출판사 임의로 사용한 것이다.

물론 목여사는 저작권에 관한 관례를 몰라 주었겠지만, 출판사는 당연히 챙겨야 할 문제다.

더구나 사진에 서명까지 되어있는데도 무단 전재한 것은 상식을 넘어 양심 불량인 것이다.

그 당시는 '답게 출판사'나 장소임 대표를 전혀 모를 때였으나,

전해 준 천상병선생 사모님 얼굴보고 참았던 것이다.





바보같이 넘겼더니, 한참 후 또 문제를 만들었다.

일간신문에 책 광고를 내면서 내 사진을 그대로 게재한 것이다.

더 이상 모른 척 할 수 없어 출판사대표 앞으로 내용증명을 보냈다.

아니나 다를까 당사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목여사를 시켜 원고료 10만원으로 깔아 뭉갰다.

신문광고용 사진원고료가 얼마인지 모를리가 없었다.

지금 같았으면 목여사가 아니라그 누가 부탁해도 어림없는 이야기지만,

그 당시는 매사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살았으니, 어쩔 수 없었.



 


몇 년 뒤 인사동 마당발 노광래씨가 여러 사람의 글을 모아

천상병을 말한다는 책을 만든다며 글 쓰 달라는 원고 청탁을 해 왔다.

천상병선생 이야기라 흔쾌히 쓰 주었는데, 나중에 책을 받아보니 그것도 답게출판사에서 나온 것이었다.



 


노광래씨가 글 쓴 원고료라며 십 만원을 전해 주었으나, 그 책에도 출처를 밝히지 않은 사진이 두장이나 실려 있었다.

사진 원고료는 물론 한 마디 양해도 없었지만, 인사동 궂은 심부름 하는 노광래씨 안면으로 또 그냥 넘긴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니, 출판사의 사과를 받아내지 못한 것이 후회막급이었다.

스스로 저작권 침해를 방조한 셈이고, 잘못을 그냥 넘겨 대수롭지 않은 일로 생각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건 나 혼자만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다른 사진가에게도 피해를 줄 수 있는 일이었다.

요즘은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시비를 가리는 것도,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세상을 요 모양 요꼴로 만들었다는 뒤늦은 자책에서다.



 


그 이후 천상병기념사업회이사회에서 답게 출판사대표와의 첫 상면이 있었다.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해서는 사과는 커녕,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말이 저작권침해지 한마디로 도둑질인 것을 모를 리 없겠으나, 모른 채 하는 것이다.

가난한 다큐 사진가들의 유일한 수입원이지만, 돈이나 밝힌다는 소리는 듣기 싫었다.

다행히 인사동 터줏대감 강 민선생을 잘 모신다는, 고마움에 입 다물었던 것이다. 





나주곰탕에서 식사하며 천상병선생의 책은 8쇄에 이른 책도 있다고 말했다. 

그런 말을 자연스럽게 하는 것을 보니, 저작권을 침해한 잘 못도 잊은 것 같았다.

뒤늦게 나온 책에는 사진의 출처나 밝혔는지 모르겠다.

괜히 답게 출판사’ 일로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는데, 이제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나주곰탕에서 일어나 김진열씨 목판화전이 열리는 나무화랑으로 옮겼다.

군중들에 휩싸여 걷는 두 선생의 어깨가 유달리 무거워 보였다. 4층까지 오르기는 또 얼마나 힘들었을까?

뒤 따라 갔더니, 김진하관장의 해설을 들으며 작품을 감상하고 계셨고. 한 쪽엔 '문화연대' 임정희씨도 있었다.

오르느라 힘은 들어도 좋은 전시를 관람할 수 있는 기회인데,

이 좋은 전시를 공짜로 보여 주는데도 안 오는 사람은 왜 그럴까?



 


그 다음엔 커피 한 잔하는 일만 남았는데, 선생님의 단골집이 그만 문을 닫아버렸다.

벽치기 골목의 유담커피숍으로 갔으나, 그 놈의 개는 왜 그리 짖어댈까?

내가 개처럼 생겨서일까? 아니면 개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있었을까?

낮 술에 주저리주저리 떠벌였는데, 선생님들께 실수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인사동 터줏대감들이시여! 제발 세월에 휩쓸려 가지는 마십시요.

부디 건강을 지켜 오래 오래 사시길 바랍니다.

 

사진, / 조문호































 




 

지난 21일은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나는 셋째 수요일이다.

요즘 몸이 편치 않아 꼼짝도 싫지만, 안 나갈 수 없었다.

스스로의 약속이기도 하지만, 시인 강민선생과의 약속도 있기 때문이다.



지난 달 있었던 서울문화투데이문화대상 시상식 날,

강민선생을 비롯하여 이행자, 김승환, 방동규 선생등 원로 문인들께서 축하하러 오셨더라.

창피하여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아셨는지,

그 노구를 끌고 시상식장까지 찾아 오신 것이다.


 

그러나 주관처가 마련한 수상자들의 자리가 따로 있어,

점심 한 그릇 대접하지 못한 게 영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식사 대접 하는 날을 셋째 수요일로 잡은 것이다.


    

이제 인사동에도 자주 나오기가 힘들어, 나온김에 많은 분을 만나고 싶었으나 욕심이었다.

점심과 저녁 사이의 그 빈 시간을 혼자 보낼 일도 예사 일이 아닌지라,

정영신씨 노트북까지 빌려나왔다.


 

정오 무렵, 인사동 나주곰탕으로 갔더니,

강 민, 방동규, 김승환선생께서 먼저 와 계셨다.

옆자리에는 덕원스님과 최명철씨도 있었다.

반갑기 그지없는데다, 날씨마저 받쳐 주었다.

춘분인데도 인사동에 진눈깨비가 내린 것이다.



아직 오시지 않은 분이 계셨지만, 술 없이 앉을 여유가 없었다.

곰탕 건더기를 안주로 마시기 시작했는데, 그 첫잔의 술맛이 얼마나 달콤한지...

좀 있으니, 이행자, 장봉숙선생께서 온 몸에 눈을 잔뜩 뒤집어쓰고 들어오셨다.

그런데, 왜 내 눈에는 할머니로 보이지 않고 소녀로 보였을까?

행여 이 말도 미투에 걸리는 게 아닌지도 모르겠다.


 

백기완, 황석영 씨와 함께 조선의 3대 구라로 불리는 방동규 선생께서 첫 포문을 열었다.

따님 방그레양이 중국 대학교수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런 구라라면 확성기 들고 인사동거리에서 소리칠 기분좋은 뉴스였다.

첫딸인 방그레양은 그림을 잘 그리지만, 둘째 딸 방시레는 배추선생처럼 운동을 잘 했다.

방그레, 방시레란 예쁜 이름처럼, 둘 다 예쁘기도 하지만,

일찍부터 자식들 재능까지 알아보신 것 같았다.

그림 잘 그리는 그레, 운동 잘하는 시레로 지었으니 말이다.


 

이런 저런 배추선생의 재밋는 구라에 단번에 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선생님들 앞에서 헛소리도 지껄이며, 미친 망둥이처럼 부산을 떨어댔다.

인사동 눈 오는 풍경도 그냥은 찍기 싫었다.

옆자리에서 마시던 덕원스님과 최명철씨를 밖으로 끌어내어 사정없이 박아버렸다.


 

그런데, 장봉숙선생께서 다음 셋째 수요일은 자기가 밥을 사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동안 여러 차례 얻어 먹은적도 있으나, 다른 선생님보다 형편이 나으니 고맙게 받아들였다.

다음 달 역시 셋째 수요일로 잡는 것은, 셋째 수요일은 인사동 나가는 날로 못 박기 위해서다.

약속하여 만나는 것보다, 우연히 만나는 기쁨이 더 반갑다.


 

'나주곰탕'집에서 나와서는 장봉숙선생께서 커피를 쏘셨고,

강민선생께서는 정승재씨의 개인전이 열리는 토포하우스로 안내해 주셨다.

난 개인전이 열리는 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덕분에 좋은 전시를 볼 수 있었다.


 

정승재씨는 행정법률과 교수지만, 소설가로 더 잘 알려졌다.

그런데, 그림에도 남다른 면이 있어 작년에 이어 두 번째 개인전을 가진 것이다.

이번에 선보인 작품들은 평창올림픽 개최가 확정되며 그리기 시작한

질주하는 하나된 열정이란 주제의 동계올림픽과 관련된 스포츠 그림인데,

선수나 작가의 강인한 도전정신을 읽을 수 있었다.

오는 27일까지 열리니 인사동 가는 걸음에 꼭 한 번 보시기 바란다.


 

전시장에서 나왔으나, 난 갈 곳이 없었다.

그 때까지 유목민 문이 열리지 않아, 옆집 커피숍에서 노트북으로 페북 질이나 했는데,

얼마나 지루한지 인사동을 여러 차례 돌아다녔다.



 

이날은 급히 나오느라, 페북에 알리지도 못했지만,

눈이 내린 후 날씨가 추워진다는 일기예보 때문인지, 길거리에 사람이 없었다.

술도 못 마시는 화가 이종승씨만 서둘러 돌아가고 있었다.

기다린 시간이 아깝지만, ‘유목민에서 머뭇거리다 그냥 동자동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개인주의로 빠지는 야박한 세상이지만,

인사동을 드나드는 정든 예술가마저 그러지들 맙시다.

평소에는 관광객에게 인사동을 뺏기지만,

그 날만이라도 곳곳에서 반가운 사람들 만나는 날 만듭시다.

셋째 수요일 따뜻한 봄 날, 인사동서 신명 한 번 푸입시더.“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인사동 터줏대감들께서 모처럼 나오신다기에, 신년 인사드리려 인사동에 나갔다.


인사동에 대한 애정이 식어가는 요즘, 유일하게 인사동을 챙기는 분이 강민선생이시다.
용인에서 버스와 지하철을 몇 번이나 갈아타야하는 불편함을 무릅쓰고 나오시는
선생의 인사동에 대한 애착에 그져 고개가 숙여 질뿐이다.
삭막하게 변해가는 인사동을 보면 속만 답답하실 텐데 말이다.






점차 친구들도 한 분 두 분 세상을 떠나고 있다.
재작년엔 소설가 이호철선생과 극작가 신봉승선생께서 세상을 떠나셨고,
작년에는 심우성선생마저 공주 요양병원으로 떠나지 않았던가.
살아 남은 분이라도 자주 만나고 싶어하시나
다들 몸도 마음도 예전 같지 않으시니, 잘 나오지 않는단다.






년초부터 감기에 걸려 이틀 동안 누워지내다 3일에서야 간신히 추수릴 수가 있었다.

정영신씨를 대동하여 약속장소인 ‘나주곰탕’으로 갔더니, 강민선생을 비롯하여 김승환, 장봉숙선생이 와 계셨다.
너무 반가운 만남이었다. 페북에서야 가끔 인사 드리지만, 뵌 지가 몇 달은 된 것 같았다.

선생께선 낮에만 나오시고, 난 올빼미처럼 밤에 출몰하니 잘 만날 수가 없었는데,
다들 건강하신 모습을 뵈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곰탕 건더기를 안주삼아 조촐한 신년하례식을 가졌는데,
강민선생은 방동규선생께 미처 연락하지 못했음을 아쉬워하셨다.
방동규선생이 계셔야 호탕한 한 해를 시작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모처럼 식사 한 끼 대접하려 했으나 장봉숙선생께서 먼저 계산해 버렸다.

새해부터 어른들께 신세지는 일을 없애려 했으나, 첫날부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커피 마시러 ‘인사동 사람들’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 곳은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인사동을 사랑하는 옛 사람들의 발길이 줄었다는 말이다.


붙잡아도 머물어 주지 않는 세월을 원망해야 할지,
갈수록 야박해지는 세상을 원망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게 하나 둘 변하고 사라지는 게 인생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커피를 마시다 선생님들 앞에서 깜빡 잠이 들어버렸다.

감기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인지, 술이 오르니 갑자기 잠이 몰려온 것이다.

눈을 떠보니 정영신씨 혼자 남아 있었는데, 선생께서 일어나시면 깨워야 하지 않는가?

죄 없는 정영신씨만 원망하고 있으니, 전활철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강민선생께서 지하철 타러 가는 길에 유목민잠시 들렸다고 했다.

그 곳에서 강민선생은 다시 만날 수 있었지만, 김승환, 장봉숙선생은 떠나시고 없었다.

그동안 말씀이 없어 잘 몰랐는데, 강민선생께서 오래전 넘어져 다친 팔목이 아직 불편하다고 했다.

늘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계셔서 눈치채지 못했는데, 빨리 완쾌하셔야 할텐데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뜻밖에도 민화 그리는 장춘씨가 '유목민'에 나타난 것이다. 

홍두깨처럼 나타났다 증발해 버리는 그의 행적이 늘 궁금했기에, 죽은 사람 만난 듯 반가웠다.

오죽하면 북한의 지령받고 움직이는 간첩이 아닌가 생각했을까?


그러나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장춘씨와 정영신씨를 '유목민'에 남겨두고, 강민선생 따라 일어서야 했다.



 


서울역에서 노숙하는 이종민씨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세밑에 잃어버린 카메라가 문제가 아니라, 그 속에 찍힌 사진파일이 더 필요했고,

그 사진파일보다는 그와의 인간적 신의를 되돌리는 것이 더 절실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새해에는 더 이상 절망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사진, / 조문호 

 



























지난 3일 정오 무렵, 강민 선생의 생신을 축하하는 오찬회가 인사동 ‘가회’에서 열렸다.
‘도서출판 답게’ 장소임씨가 매년 이맘때면 오찬자리를 만들어 강민선생을 비롯하여 친구 분들을 모셔왔는데,

그 날은 강 민선생과 장소임씨를 비롯하여 신경림, 박정희, 추은희시인, 소설가 김승환선생, 아동문학가 정두리씨,

민속학자 심우성선생, 문학평론가 구중서선생, 시대의 협객 방동규선생 등 모두 열 분이 모이셨다.

난, 그 자리에 끼일 군번은 아니지만, 모처럼의 인사동 터줏대감 회동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덕분에 제대로 차린 밥상을 대할 수 있는 호사도 누렸지만...

마침, 강민선생 옆자리에 앉게 되어, 선생의 핸드폰을 엿볼 기회가 있었다.

핸드폰 창에 소설가 이국자선생의 생전 모습이 떠 있었다. 사모님께서 세상을 떠난 지가 8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그리워하고 계시는 것 같았다. 그토록 못 잊어 그리워하는 님을 둔 사모님이 더 부러웠다.

10여 년 전 양평에 사셨던 선생의 자택을 방문하여, 점심식사를 함께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처음 뵈었는데, 인자했던 모습은 어렴풋이 떠오르지만,

손수 끊여주신 된장국 맛과 방문 앞에 흐드러지게 핀 목련 꽃의 기억은 아직까지 생생하다.

그래서인지 목련의 우아한 아름다움과 구수한 된장국 맛이 잘 어우러진 그런 분으로 기억되고 있다.

준비한 생일 케익을 자르며, 강민 선생의 생신을 축하드리며 축배를 들었다.

그러나 나누는 대화라고는 대개 그렇고 그런 말씀이셨다.

이제 말년에 접어들어 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처지도 아니고, 그렇다고 반복되는 삶을 되 뇌일 필요도 없었을 게다.

그런데, 그 날은 조선의 주먹으로 통했던 방배추선생의 재미있는 이야기로 화기애애했다.

선생의 자선전을 읽어 대개 아는 사실이지만, 들어도 들어도 재미있는 이야기들이다.

와전된 이야기라지만, 깡패 열 일곱 명을 한 판에 때려 눞혔다는 이야기와,

친구이신 백기완선생과의 첫 만남에 빰을 얻어맞았다는 이야기 등 흥미진진했다.

백기완, 황석영선생과 함께 조선의 삼대구라라 불리지만, 그런 호칭을 들을 만 했다.

주먹이 먼저라는 말이 있듯이, 다른 이야기보다 주먹이야기가 훨씬 재미있었다.

찻집인 ‘인사동 사람들’로 옮기다 연출가 기국서씨를 만나 함께 기념사진도 찍었지만,

다들 반갑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강 민선생님의 생신을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늘 건강하시어 오래 오래 인사동을 지켜주시길...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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