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첫째 주 토요일인 지난 7일은 영하권으로 떨어진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검찰 개혁을 요구하는 시민들이 국회의사당 앞 여의대로를 가득 메웠다..



‘검찰개혁 사법적폐청산 범국민시민연대’가 마련한 ‘14차 여의도 촛불문화제’는

오후 2시부터 사전 집회가 열렸다고 한다.

지하철 입구에는 시민들의 바램을 포스트 잇에 담아 붙이고 있었다.



최근 청와대 하명 수사 의혹과 유재수 전 부시장 감찰 무마 의혹 등으로 인해

청와대와 검찰 간의 갈등이 격화된 시점이라 많은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좀 늦게 여의도에 도착했는데, 이미 어둠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현장에서 사진을 찍으려면 어차피 흩어지기 마련인데, 왜 정영신씨와 짝 맞추어 가려 집회 시간을 넘겼을까?



어두워지면, 사진 찍는 것도 용이하지 않아 아예 자리 잡아 앉아버렸다.

집회 참가자들은 여의도공원 앞 교차로에서 여의대로 5∼7개 차로를 대부분 매웠다.

검찰 개혁을 향한 열기는 뜨거웠으나, 움추린 어린이 모습이 안쓰럽기 짝이 없었다.



두꺼운 점퍼와 목도리로 꽁꽁 싸맨 시민들은 공수처 설치와 수사권 조정 법안을 신속히 통과시킬 것을 촉구했다.

대부분의 집회 참가자들은 노란 풍선과 ‘공수처를 설치하라!’고 적힌 피켓을 들었다.

“공수처 설치하라”, “자한당 해체하라”, “검찰개혁 이뤄내자” 등의 구호를 외쳤는데,

“계엄령문건 특검을 실시하라!“는 새로운 피켓도 등장했다.



집회 중 단상에 오른 독립영화감독 박두혁씨는 “정치 검사에게 불법으로 감금당해 2년간 옥살이를 했다”며

“검사의 불법 행위를 수차례 고발했지만, 어느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사실을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영화 ‘법피아’를 제작했다며, “법피아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김민석 전 국회의원은 “검찰은 충심에서 저런다는데 무슨 충심이 정권만 겨냥하냐”며

“이것은 충심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반역이고 역심이기에 반드시 진압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조국 전 장관이 그린 그림을 열배, 백배로 이뤄낼 수 있도록 추미애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지지하자”는 말도 했다.



‘자유한국당’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빠질 수 없었다.

안진걸 민생경제연구소장은 “나경원, 황교안 고발 서명 동참자가 십만 명을 넘었다며 고발장을 제출해 처벌받게 할 것이라 했다.

“끝까지 함께 투쟁하여 그들을 국회에서 영원히 몰아내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은 청와대를 상대로 한 검찰 수사가 노골적인 정치수사라고 비판했다.

김남국 변호사는 “청와대까지 압수수색 한다는 게 말이 되냐?”고 되물었다.

“검찰이 브레이크 없는 폭주기관차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검찰이 묵혀뒀던 사건을

아무 이유도 없이 총선 전에 꺼내 수사하는 것이 어찌 정치 개입이 아니냐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날의 집회는 축제 분위기도 감돌았다.

최근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된 추미애 후보자에 대한 믿음도 작용했겠지만,

공수처 설치는 돌이킬 수 없는 물줄기라 통과될 수밖에 없다는 확신이 선 것 같았다.



여러 가지 공연이 이어지는 가운데, 가수 플라워가 ‘걸음이 느린 아이’등 자신의 인기곡을 불러 분위기를 띄웠다.



집회가 끝난 참석자들은 마포 대교 남단에서 자유한국당 당사 앞까지 행진하며,

“공수처가 설치 될 때 까지 촛불은 꺼지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 날은 집회가 열리는 동안 아는 분을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광화문미술행동’ 팀은 어디 있는지, 사진 찍는 동지들은 어디 갔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헤어진 정영신씨만 어렵사리 만났는데, 지나치다 하형우씨를 보았다며 연락을 했다.



사진가 하형우씨 뿐 아니라 도예가 박응향씨와 정현주, 정휴씨도 함께 왔다.

정현주씨는 촛불집회에 노란풍선을 제공하는 ‘풍선공장 공장장’이고, 정휴씨는 제자라고 소개했다.



집회 때마다 다른 디자인으로 인쇄한 노란풍선을 나누어 주는 일이 보통 일은 아닐 것이다.

아마 박응향씨도 정현주씨의 열정을 돕고자 나온 듯 했다.

하형우씨가 안동찜닭까지 시켰는데, 다들 운전 때문에 술을 사양해 혼자 마셔야 했다.



지하철 막차시간이 임박하도록 마신 것 까지는 좋았는데. 건물 밖으로 담배 피우러 나왔다가 나온 길을 잃어버렸다.

이리 저리 헤메다 어렵사리 만났으나, 이번에는 정영신씨가 늦장을 부렸다. 



휘왕찬란한 조형물에 마음 뺏겨, 낯선 길을 헤매다 결국 지하철을 놓치고 말았다.

지하철은 놓쳤지만, 공수처법은 꼭 통과될 것이다.


사진, 글 / 조문호




































류연복씨의 ‘온 몸이 길이다’ 판화전이 지난 11일 오후2시 ‘진천군립생거판화미술관’에서 개막되었다.




기다리던 전시라 만사를 제쳐두고 갔다.
다시는 전시장 돌아다니며 일 만들지 않겠다는 다짐한지가 오래지 않건만,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북한산을 거닐다2, 2013, 1,38X165cm,소멸다색목판

류연복씨의 작품을 띄엄띄엄 보았지만, 36년 동안의 전 작업을 한꺼번에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풍악산 일만이천봉,2009, 1,23X180cm다판다색목판


그의 작품을 처음 만난 것은 80년대 민주화투쟁을 형상화한 끝내 이루리라 이루어 내리라’였다.
민중적이고 투쟁적인 판화에 매료되어 그의 이름은 각인 되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뭇 선동적인 작품이었다.



끝내 이루리라 이루어 내리라1,1989,37X37cm,채색목판


그 이후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90년대 후반 동강 댐 건설을 막으려는 환경단체의 목소리가 높을 때, 다시 류연복이란 이름을 찾아냈다.
초창기 보았던 투쟁적인 작품과는 달랐다.
국토에 대한 애정과 자연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묻어있었다.


동강전도, 1999, 180X110cm, 다판다색목판


그 당시는 동강을 찍기 위해 정선 귤암리에서 일할 때다.
백운산에 올라가 동강 물줄기를 부감으로 찍기도 했는데, 그 장면을 사진처럼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동강(고성산성에서)1999, 57X107cm, 단색목판


바세와 연포마을을 굽이굽이 휘감는 강줄기 사이로 박혀있는 집들은
동강사람들의 삶처럼 아름답기도 하고 애절하기도 하고 역동적이기도 했다.



바로, 현장 답사에 의한 실경산수였다.
“아! 민중미술가 류연복씨 작품이 실경산수로 바뀌었구나. 역시 대단한 작가다!”며 다시 흠모했다.
주제만 바뀌었지 민중정서를 반영하는 태도는 똑 같았다.


외암골 전도, 2002, 120X84cm, 다판다색


풍경을 이루는 산과 강의 흐름은 강력하고 마을의 경계는 선명했다.
넓고 탁 트인 시선에서 부터 작고 가까운 곳을 바라보는 섬세함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명료했다.
국토에 대한 형상성은 두드러지고, 부분적인 독자성은 분명했다.


서운산-겨울, 2003, 65X123cm, 다판다색목판


그러고는 또 잊고 있었는데, 6년 전 인사동 ‘부산식당’에서 그를 처음 만난 것이다.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었는데, 첫 인상이 소탈하고 겸손했다.
그 이후 광화문광장‘의 ’광화문미술행동‘팀에 함께하며 유심히 지켜볼 수 있었는데, 사람이 진국이었다.


꽃 한송이 2018, 97X72cm, 소멸다색목판


허허실실 웃으며 바람처럼 살지만, 늘 말보다 행동이 앞서고 잔머리 굴리지 않았다.


나는 온몸이 길이다-봄, 2012, 91X91cm, 다판다색목판.


류연복씨는 사람과 작품이 똑 같았다.
대개 작품을 먼저 알고 나중에 작가를 만나는 경우가 많은데, 실망스러운 경우를 종종 접한다.
작품은 좋으나 인간성이 형편없는 작가는 사람이 아니라 작품 만드는 기계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사람 나고 작품도 있는 것이다.




작가와의 만남이 있는 지난11일 오후3시 무렵, 정영신씨와 함께 전시장을 찾았다.
‘진천군립생거판화미술관’은 처음 가보았는데, 시골에 이렇게 좋은 전시장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개성없는 비슷비슷한 전시장이야 가는 곳마다 늘려있지만, 판화만 보여주는 전문미술관을 어찌 시골에서 볼 수 있겠는가?
아마 진천에 사는 판화가 김준권씨의 노력에 의한 산물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그 멀리까지 많은 사람들이 왔더라.
류연복씨의 작품성이나 인간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대목이다.
아는 분으로는 평창에서 온 화가 권용택씨 내외를 비롯하여 미술평론가 김진하, 이태호씨,
화가 변정섭, 박불똥, 박진화, 김 억, 송용민, 김 구, 임정희, 김건희, 김가영씨가 참석했다.

판화가 이윤엽씨는 아들 땅을 데리고 왔는데, 뒤늦게는 김준권씨도 나타났다.




개막식은 끝나고 작가와의 만남이 시작되고 있었는데,
류연복씨는 마치 장터 약장사처럼 너스레를 떨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예요”라며 흩어진 관객들을 불러 모았다.




류연복씨의 목판화에는 힘이 흘러넘쳤다.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문제를 토해냈다.
저항적이고 비판적으로 칼을 휘두르기도 하고 때로는 서정적으로 다독였다.
국토를 온 몸으로 누비며 체득한 산하지만, 풍경 에너지와 사람의 삶을 응결시키려는 속내가 엿보였다.


도피안사 전도,2003,110x80cm,다판다색

류연복씨의 근작은 국토풍경을 담은 목판화다.
분단풍경인 DMZ에서 부터 독도,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 무등산, 북한산 등
방방곡곡을 누비며 국토의 아름다움 속에 민중의 비애를 버무렸다.
여러 번의 칼질이 아니라 단칼의 칼질이 빚은 선명한 골격이 돋보였다.
풍경조차 서민적이고 민중적이라 풍경의 수려함 속에 비극적 슬픔이 깔려 있었다.


갈라치며 나아가자,1989,28X49cm, 채색판화


미술평론가 김진하씨는 서문에 이렇게 썼다.
“류연복의 목판화는 일도양단의 칼질로 그 이미지가 선명하다.
구사된 칼은 주저하거나 돌아가거나 에둘러 여운을 남기지 않는다.
전통적인 목판화의 원초적인 칼 맛의 연장선상에서 대상의 특징을 포착해내면서
그 내용의 핵심을 도드라지게 만든다. 명료하다. 강하다. 그래서 류연복스럽다”


가난한 사랑 노래,1998, 37X27cm, 채색목판


이 전시는 12월 31일까지 열리니 진천을 지나치는 걸음에 꼭 한 번 보시기 바란다.

두번째 작가와의 대화가 열리는 11월22일(금) 오후3시에 가면 금상첨화다.
작가의 말처럼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다.

사진, 글 / 조문호


모자,1992, 27X18cm, 소멸다색


붓을 들어 육천만 가슴에, 1989,30X30cm,채색목판.


백골단과 전사,1991,37X25cm, 다색목판

빈들 생명-딛고 선 땅, 2004, 45X124cm, 소멸다색목판

해방춤1,1986, 45,5X53cm,채색판화

숲2, 2017, 92X92cm, 소멸다색목판.

전각판화(책표지),2016-2018, 16X16cm X54

달밤-금강산외 열두폭 평풍, 2007, 61 X30,5cm X12



[전시 개막식날 작가와의 대화에서 찍은 사진이다]
































































검찰개혁과 조국수호를 외치는 국민들의 함성이 서초동을 뒤덮건만,
느닷없이 조국장관이 사퇴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검찰개혁의 희생양으로 물러났으니, 그가 마련한 검찰개혁 안은 이루어 질 수밖에 없다.
어려운 결단을 한 당신의 모습이 더 돋보인다. 




 당신이 마련한 개혁안은 후임자의 몫이기 전에 이제 국민들의 몫이다.
기필코 이루어낼 것을 확신한다,




회를 거듭할수록 검찰개혁을 부르짖는 촛불시민은 늘지만
촛불집회도 제9차 최후통첩 집회를 끝으로 잠정중단하게 되었다.



지난 12일 서초동 검찰청 사거리에서 열린 9차 검찰개혁 촛불집회에서는

검찰개혁, 언론개혁, 조선일보 폐간, 친일청산 등의 내용을 담은 최후통첩문을 발표했다.


이 날 검찰개혁 촛불문화제 주제는 ‘검찰을 개혁하라, 최후통첩’이었다.




방송인 노정렬씨의 진행 아래 ‘검찰개혁’, ‘언론개혁’, ‘조국수호’ 등을 외쳤다.
시민들의 손에는 ‘검찰개혁 적폐청산’, 태극문양 같은 팻말이 있었다.




지방에서 온 분들이나 학생, 그리고 시민들이 차례로 발언하며 검찰개혁을 외치기도 했다.
4.16연대 회원들은 행사장 주변에서 세월호 참사 관련 재수사를 요구하는 서명운동도 펼쳤다.




무대에 오른 자유언론실천재단 이부영 이사장은
“강기훈에 유서대필을 했다고 뒤집어씌워 조작한 사건이 있었다,
그 때 법무부 장관이 김기춘이고, 김기춘이 직접 조작을 지시했다.
그리고 지금 자유한국당 의원인 곽상도 검사가 수사 검사였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그런 사람들이 대통령 비서실장이 됐고, 국회의원이 되어 있다”며
“지금 우리 검찰은 일제시대 친일 검찰, 박정희·전두환 독재 체제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며
검찰개혁을 강력하게 촉구했다.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총장 출신인 최민희씨는 검찰개혁 못지않게 언론개혁의 필요성을 밝혔다.
본 발언에 앞서 “언론에서 다루지 않은 기쁜 소식을 나누도록 하겠다”며
“세계경제포럼에서 대한민국 국가 경쟁력 순위를 발표했는데, 13위라며,
2014년 박근혜 때 40위권이었다, 거시경제 안정성은 세계1위”라고 말했다.




우희종 교수는 “저희는 검찰개혁에 머문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언론개혁, 교육개혁, 경제개혁과 종교개혁까지 생각한다”며
“요즘 광화문에 모인 가짜종교인들, 그 숫자의 대부분은 동원된 특정종교 신자들”이라고 지적했다.




양희삼 카타콤 교회 목사는 “빤스목사라고 하는 분이 목사라고 설쳐대는 꼴을 보게 해 드려 진심으로 죄송하다”며
“교회가 사회 적폐가 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어 죄송하다”고 말했다.
이어 “검사와 목사는 일란성 쌍둥이처럼 하는 짓도 비슷하다”며 “성범죄를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고,

나쁜 짓을 저질러도 아무 일 없는 무소불위의 권력”이라고 말했다.




이날 촛불집회의 핵심은 아래 적힌 ‘최후통첩문’ 낭독이었다


첫째, 검찰은 개혁조치에 순수하게 응하고, 조국 장관 가족에 대한 수사를 중단하라.
둘째, 집권여당 민주당은 페스트랙 법안을 신속하게 처리하라.
셋째, 거대 1야당인 자유한국당은 패륜을 중단하고 정상적인 정치로 복귀하라.
넷째, 제4의 권력 언론은 아니면 말고 식의 무책임한 보도 작태를 중단하고
       기자들은 결연한 자세로 정론직필에 나설 것
다섯째, 조선일보는 가짜뉴스와 매국행위를 중단하고 폐간할 것을 요구했다.




주최 측인 ‘사법적폐청산 범국민 시민연대’는 이와 같은 요구사항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다시 촛불로 세상을 밝혀야 한다며 “더 밝고, 더 크고, 더 웅대하고, 더 도도하게

촛불을 높이 치켜세울 것을 만천하에 공표한다”고 밝혔다.




대형 스크린에서는 검찰개혁 관련 영상들이 선보였고, ‘광화문미술행동’은 시민들에게 판화를 찍어주거나,
예술가들과 시민들이 어울려 붓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등 그들만의 집회문화로 시민들의 목소리를 높혔다.
대형 붓글씨 퍼포먼스로 새겨진 최후통첩, 검찰개혁에 이은 ‘조국수호’란 글자에서는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프다.




촛불시민들은 당신의 뜻을 기어이 이루고 말 것이다
이제 더 이상의 후퇴는 없다.

사진, 글 / 조문호



















































촛불이 광장을 뒤덮을 때마다 앞장서서 축제의 마당으로 이끄는 예술가들이 있다.

바로 민중미술가들이 주축이 된 ‘광화문미술행동’이다.



‘시민나팔부대’가 나팔과 풍물로 신명을 끌어 낸다면,
‘광화문미술행동’은 예술 행위로 집회의 격을 높이며 시민 행동에 자긍심을 심어준다.



시민들에게 찍어 주는 판화는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넘어 역사적 사료로 자리 할 것이고,

예술가들의 다양한 퍼포먼스는 시민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며 용기와 힘을 불어넣는다.




3년 전 광화문광장 촛불집회에서 시작된 ‘광화문미술행동’은 참가 작가가 정해진 것도 아니다.

정치적 논쟁만 터지면 자발적으로 형성되었다 사태가 마무리되면 흩어진다.

회비도 회칙도 없는 자생조직이다.



핵심적인 일은 판화가 김준권씨와 미술평론가 김진하씨가 맡지만.
80년대 민주항쟁 시절부터 온 몸으로 싸워 온 민중미술가들이 주축이 되었다.




1980년대 미술을 통해 현실에 저항해 온 노력은 우리나라 민주화와 괘를 같이한다.
형식에 구애되지 않는 민중미술은 역동적이라 온 몸에 피가 솟구친다.
삶의 현실과 직결된 그들의 작품들은 기존의 심미적 작품과는 격이 다르다.




지난 12일 열린 제9차 ‘검찰개혁’ 촛불집회는 평소보다 빨리 나갔다.
광화문과는 달리 장소가 협소하여 군중 속에 파묻히면 찿기 힘들기 때문이다.




오전1시 무렵 서초역에 도착하여 2번 출구로 나가는데, 뜻 밖에 반가운 분을 만났다.
우리들의 영원한 우상 방동규선생께서 사모님과 계셨는데, 첫 일진이 좋았다.

며칠 전 과도한 중량의 역도를 하다 근육이 파열되었다는 걱정스러운 말씀도 하셨다.


정영신 사진


방동규선생은 팔순을 넘긴 연세에도 아직까지 일하러 다니며 근육운동까지 하는 강골이시다.

백기환, 황석영씨와 함께 우리나라 삼대구라로 꼽히는 협객이다.
존경하는 선생을 촛불현장에서 만났는데, 어찌 인증 샷이 없을소냐.




서초 사거리 중앙에는 ‘광화문미술행동’ 팀에서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붓글 퍼포먼스를 벌일 대형 현수막 외에도 많은 깃발과 그림 현수막까지 준비해 두었다.

김준권, 김진하, 김 구, 김 억, 이광군, 송용민, 김영배씨가 이른 시간 부터 나와 있었고,

뒤이어 정복수, 김진열, 이흥덕, 김건희씨 등 많은 분들이 나타났다.



여지것 한 번도 빠진 적 없는 류연복씨는 진천에서 열린 개인전 때문에 나오지 못했지만,

장경호씨가 보이지 않았다. 혼자 살기에 다들 아파 누웠을까 걱정하더라.



참여 작가들 뿐 아니라 시민들까지 합세하여 검찰개혁을 향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최후통첩’, ‘악질검사 대청소’, ‘다음은 없다’ 등 다양한 글귀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독수리들이 처절하게 싸우는 경주 정비파씨의 판화를 바탕으로

김 구, 김진하, 송용민씨가 덧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가림막 뒤편에는 윤석열 검찰총장이 아니라 김진열 대학총장이 판화를 찍어주었다.

그 판화 작품들은 역사적 무게까지 더하니, 어찌 소중하지 않겠는가?

판화를 얻으려는 시민들의 행렬이 꼬리를 물었다.



이 날 사진가들도 여럿 참여하였다.

정영신, 하형우, 양시영, 박윤호, 권 홍, 성유나, 임헌수, 김대희씨가 차례대로 나왔고,

뒤늦게는 전민조, 박옥수, 김문호씨도 나왔다. 다들 서초대첩의 종군기자들이다.



몇 시간을 돌아다니다 보니 허기가 몰려왔다.

‘광화문미술행동’에서 준비한 김밥 한 줄 얻어 먹고,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 구씨 따라 갔더니, 다들 생맥주 집으로 들어갔다.

통풍에는 맥주가 쥐약이라 콜라나 마셨는데, 마침 김문호씨 연락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진가 김문호, 박윤호, 정영신, 하형우씨와 어울려 지난 주 식사했던 식당으로 들어갔다.

간만에 막걸리를 마시며 한가한 시간을 보냈는데, 밥 값을 하형우씨가 계산해 버렸다.



덕분에 다른 분이 사는 커피까지 얻어 마시고 나니, 촛불광장은 상황이 바뀌어 버렸다.

불과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몰려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다들 현장으로 뿔뿔이 흩어졌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총알이 떨어져버렸다.

보조 건전지가 깡통이라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무기 없는 병사는 시체나 마찬가지다.

다음에는 기관총을 가져 올 각오였지만, 이 날이 최후통첩 보내는 마지막 집회가 아니던가?



대전에서 온 이석필씨를 만나기도 했으나, 함께한 동지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눈도 어두운데다 귀 까지 어두워 핸드폰도 무용지물이었다.

인파를 헤집고 다니며 얼마나 헤맸는지, 진이 빠져 버렸다.

자리잡고 앉아 검찰개혁이나 외쳤으면 좋으련만, 돌아다니는 찍사의 팔자 아닌 습관을 어쩌랴!



최후통첩 날린 검찰개혁은 이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최후통첩도 종료가 아니라 잠정중단으로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다.

납득할 만큼의 검찰개혁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검찰이 저항하면 다시 일어난다.

그리고 언론개혁과 정치개혁에 이르기 까지 적폐청산의 길은 아직 멀다.


정의롭고 평등한 세상이 올 때까지 ‘광화문미술행동’은 함께 한다.


사진, 글 / 조문호















































































































자리에 누워 뒤척인 긴 시간의 피로를 걷어내려 촛불 아닌 카메라를 잡았다.
검찰개혁 촛불 문화제’가 열린 지난 5일 오후3시 무렵, 지하철 서초역에 도착했다.




혼잡할 것 같아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나왔으나, 주변은 사람들로 꽉 찼다,
한마디로 인산인해였다.

또 하나 반가운 것은 태극기부대가 남용해 혐오감을 느껴 온 태극기를 되찾아 왔다는 것이다.




로터리를 중앙으로 사방에 설치된 대형스크린에서 전체 장면 장면을 볼 수 있어
어디든 자리만 잡으면 되지만, 한 자리에 머물 수는 없었다.
사진도 찍어야하지만 협력할 ‘광화문미술행동’ 팀도 찿아야 하고, 만나야 할 사람도 있었다,
사람에 밀려다니느라 자리 옮기기가 싶지 않았다.




한 시간 정도를 헤매다 간신히 판화를 찍고 있는 김구씨를 찾았다.
판화 찍어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느라 정신없었다.
한 쪽에 보이는 ‘광화문미술행동’ 깃발따라 들어가니, 서예 퍼포먼스는 이미 끝난 후였다.

강병인, 정고암선생께서 글을 쓴 모양인데, 주위에선 풍물패가 신명을 지피고 있었다.




그런데, 글 써놓은 현수막에 드러누워 악을 써는 여자가 있었다.
진행요원들이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았는데, 의도적으로 손대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아마 지난번 광화문 태극기 집회의 여기자 성추행 비판을 염두에 둔 해프닝인 것 같았다.
경찰도 손댈 수 없어 결국 여경들을 불러와 끌어냈다.




그 곳에서 반가운 분들을 줄줄이 만났다.
김진하씨를 비롯하여, 김진열. 류연복, 박윤호, 정영신, 이재민, 장경호씨를 현장에서 만났고,
또 다른 곳을 지나다 김재홍씨와 손기환씨를 만났다. 뒤늦게는 대전에서 온 이석필씨도 만났다.
페북에서 만나자고 한 기국서씨와 신윤택씨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는데,
사실 그 곳에서 사람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마침 사진가 하형우씨를 만나 김문호씨와 합류하게 되었는데,
이수철, 정영신, 박윤호씨 등 사진가 여럿명과 늦은 점심 겸 이른 저녁을 먹었다.
반주까지 한 잔 곁들여...



나오다보니 편의점 앞 탁자에 반가운 분이 앉아 있었다.
강원도 양양에서 온 정덕수시인이 예쁜 아가씨를 데리고 있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류연복, 김이하, 김진열씨도 찾아왔다.



시골에서 온 정덕수씨가 편의점에서 막걸리를 사오기에
“오늘 집회서 받은 일당 받은 것 다 쓰는 것 아니냐?”고 물었더니, 씩 웃는다.
일당은 커녕, 일 제쳐두고 찿아 오느라 손해가 이만저만 아니다.
오로지 개검들 조지고 싶은 충정 하나로 돈 써가며 몰려 온 사람들이니까...




검찰개혁을 외치는 함성이 서초동 일대를 뒤 덮었다.
그 함성에 막힌 가슴이 뻥 뚫리며, 기가 살아나는 것 같았다.
작은 기라도 보태려 나왔으나, 오히려 기를 받아 힘이 흘러 넘쳤다.
같은 생각을 하는 이들의 세가 하늘을 찌르니, 어찌 힘이 솟지 않겠는가?




사실, 검찰 개혁의 필요성은 대부분 공감하지만, 조국장관 수호에는 이견도 있다.
그분들의 말도 일리는 있지만,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칸 태울 수는 없지 않은가?
거리에 나온 많은 사람들은 정치검찰로 목숨을 잃은 노무현 대통령을 상기시켰다.

조국장관에 대한 검찰의 수사를 지켜보며, 그 때를 떠 올린 것이다. 
군중들의 손에 잡힌 피켓이나 외치는 구호가 잘 말해주었다.


‘이제는 울지 말자. 이번엔 지켜내자. 우리의 사명이다’



대표적인 구호가 ‘검찰 개혁 조국 수호’, ‘조국 수호 검찰 개혁’로 두 사안은 붙어 다녔다.
무대에는 소설가 이외수씨를 비롯하여 많은 시민들이 차례대로 나와 검찰개혁의 당위성을 말했다.

신나는 공연도 이어졌는데, 그 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지만 탈 없이 잘 어울렸다.
늦은 시간까지 불편을 감수하고 질서정연하게 자리를 지켜 준 대단한 국민이었다.




지난 10월3일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태국기 집회와, 5일 서초동에서 열린 촛불 집회는 다른 점이 너무 많았다.
참여 인원수도 서초동이 더 많았지만, 그런 숫자놀음은 중요하지 않다.




일단 자유한국당에서 동원한 집회와 자발적인 집회라는 차이점이 분명하고,
정당이 표면에 나선 것과 시민들이 주체가 된 것이 달랐다.
그리고 한 쪽에서는 폭력에 의한 분노가 일었고, 한 쪽은 평화로운 놀이마당이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내 세우는 논리나 어휘의 차원이 달랐다.
태극기부대에서 내세운 구호이긴 하지만 “문재인을 단두대로, 박근혜를 청와대로”란 현수막도 있었다.
이런 저질의 구호는 자유한국당 얼굴과 바로 연결된다. 그래서 태극기부대와는 거리를 두지만...
허구한 날 빨갱이 타령으로 덕 보더니, 저들 하는 짓이 빨갱이와 다를 게 뭐 있는가?
괜히 맛 불 놓는다고 돈만 쏟아 붙지만 헛짓 그만해라. “국 쏟고 뭐 디이는 격이다“




이제 보수정당과 연대한 정치검찰과 부패언론의 더러운 권력구조에 종지부를 찍어야한다.

긴 세월 일제에 빌붙어 권력을 휘두르다, 그 이후는 양놈에 달라붙어 죄 없는 국민을 빨갱이로 몰아 얼마나 많이 죽였는가?
제발 후손을 위해서라도 각성하라. 꼴통보수 정치인이건, 부패 검찰이건 새로운 각오로 임해야 할 것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9일은 정영신씨와 강원도 양양으로 떠났다.
장터 찍으러 갔지만, 마침 양양 연어축제가 열려, 연어 잡는 티켓도 구해 두었다.
그러나 방정맞게 그날 따라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로 행사가 취소되어버린 것이다.
비가와도 장은 열려 가야했는데, 한 시간 쯤 지나니 날씨가 서서히 개었다. 
이미 취소된 행사라 되돌릴 수 없어, 연어 먹을 기회는 놓치고 말았다.





그런데, 난 지랄 같은 습관을 가지고 있다.
장거리 운전을 하게 되는 날은 반드시 전 날 잠이 오지 않는 것이다.
마치 소풍가는 어린이들이 잠을 설치듯이, 밤새도록 뒤척이는 것이다.
운이 좋아야 한 두 시간 잘 수 있는데, 그 버릇을 잘 아는 정영신씨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
한두 번 다니는 것도 아닌지라, 이젠 목숨을 하늘에 맡기고 다닌다.






양양장에 도착하니, 오전 아홉시 가량 되었다.
장터 찍느라 여기 저기 돌아다녔는데, 양양 송이가 많이 나왔더라.
올 해는 송이 풍년이라지만, 서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이다.






정영신씨와 흩어져 다니지만, 가끔 장터에서 부딪히기도 한다.
그런데, 저쪽에서 어떤 남자와 걸어오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한계령’으로 잘 알려진 정덕수 시인이었다.






양양에 산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막상 만나보니 너무 반가웠다.
아마 정영신씨와 양양장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듯 했다.






정덕수씨를 보니 박근혜퇴진을 위해 촛불 들고 싸웠던 광화문광장이 생각났다.
양양에서 올라와 광화문광장에 텐트 치고 살았는데, 그 때 처음 알게 되었다.
그 추운 겨울 내내 텐트 속에서 지내는 게, 안스럽기 그지없었다.






당시 광화문광장에서 치루어지는 굳은 일은 그가 도맡았다.
나중엔 양양에서 공구까지 싣고 와, 현장의 가설 토목 공사에 봉사했다.
매주 진행되는 '광화문미술행동'의 설치작업도 그의 도움이 컸다.





박근혜가 퇴진하여 정권이 바뀌었지만, 그의 삶이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온 몸을 던졌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세월 따라 그의 이름마저 잊혀져갔다.
지금은 산나물을 채취하여 어렵게 살지만, 틈틈이 시작으로 위안하는 것이다.






또 인정은 얼마나 많은지, 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동자동 쪽방까지 찾아 온 적도 있다.

그 당시 정덕수씨가 준 상황버섯으로 술을 담았는데, 위스키는 저리가라 였다.
아끼고 아껴 아직까지 약처럼 마시고 있으니, 어찌 그를 잊을 수가 있겠는가?






오랜만에 만났으나, 운전 때문에 술 한 잔 거하게 마실 수 없으니, 미칠 지경이었다.
막걸리를 상황 버섯주처럼 찔끔 찔끔 마셨으니, 그와의 인연은 찔끔 찔끔 인연인가 보다.






그의 안내로 낙산사에도 들렸다.
90년대 초반 불교유적 촬영할 때 가보고 처음이니, 이 얼마만인가?
2005년 산불로 화염에 휩싸였던 낙산사를 뉴스에서 보았는데, 옛 모습은 자취를 감추었다.
다시 지어 진 절집들은 마치 영화 세트장처럼 말끔하다.

불길에 녹아버린 범종의 잔해가 당시의 참혹함을 대변했다.






양양에서 떠나 오는 길에 정덕수 시인이 비닐봉지 하나를 손에 쥐어 주었다.
장터 이모가 만든 묵이라는데, 그의 따뜻한 정이 하루의 피로를 말끔히 녹였다.


"서울 올라오면 꼭 연락해요, 달라 빚을 내서라도, 코가 비틀어지게 술 한 잔 대접하리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0일은 노무현대통령서거 8주기 시민문화제가 광화문광장에서 열렸다.
'노무현재단'에서 주최한 이 시민문화제에는 ‘광화문미술행동’에서도 참여하는 행사라 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정영신씨가 기록한 ‘촛불광장 기록전’에도 관심이 많았다.

이날은 이재명 성남시장과 안희정 충남지사의 토크쇼도 있고, 조관우를 비롯한 가수들의 공연과

명계남의 글씨전 등 다양한 행사가 열렸지만, ‘광화문미술행동’에서 펼치는 행사도 많았다.
‘시민과 함께하는 예술난장’으로 정영신의 ‘촛불광장 기록전’을 비롯하여 목판화찍기,

여태명, 정고암, 김성장씨의 서화 퍼포먼스, 호남좌도필봉농악의 흥겨운 풍물놀이 등으로

오후8시까지 시민들과 신명난 예술난장을 펼치기로 되어 있었다.





오후1시 무렵 도착하여 지하철 경복궁역에서 광화문광장으로 들어왔다.
새 정부가 탄생하고 처음 찾은 광장이라 감회가 새로웠다.

지난겨울 촛불시민과 함께했던 예술행동의 노력에 힘입어, 그 꿈이 현실로 성큼 다가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광장 곳곳에 걸린 노무현대통령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이 기쁨을 함께 나누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무대에는 공연준비로 바빴지만, 시간이 일러 시민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짙은 녹색 잔디 위로 오가는 여인네들의 파라솔 든 모습에 그리운 향수가 묻어났다.






지난겨울 ‘바람 찬 갤러리’로 활용되었던 세종대왕상 뒤편에는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지난 3월4일 나를 비롯한 사진가 열 한명이 참여했던,

‘역사, 그리고 광장민주주의’전이 다시 걸려 있었는데, 당혹스러웠다.

사전에 이야기를 듣지 못해 해당 작가들에게 연락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진행동’ 실무를 맡았던 정영신씨에게 연락했으나, 그도 모르고 있었다.

아무리 현수막전이라도 다시 전시하려면 작가들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모든 걸 협의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처리하는 김준권씨가 원망스러웠다.

작가들에게 연락하여 양해라도 구하려 '촛불광장기록전'이 열리는 전시장으로 갔다.





그런데 그 전시장 한 쪽 벽에는 지난 3월 전시한 ‘촛불역사전’ 사진이 또 붙어 있었다.

당시 전시 끝날 때 참석한 사진가들은 자신의 작품들을 챙겨갔으나,

나머지는 모아 자료로 보관하라며 주었는데, 그 걸 다시 내 걸었던 것이다.

‘광화문미술행동’의 기록은 내 사진이 대부분이지만, 일부 작가들에게는 양해를 구해야 했다.

뒤늦게 알았지만, 이 달 초 ‘나무화랑’에서 열렸던 ‘100일간의 기록’ 출판기념전에도 내 걸었다.

마무리 전이라 모르는 채 넘어가려다, 후배사진가의 항의전화 둘러대느라 체면 구겨야 했다.






더 황당무계 한 것은 ‘촛불광장 기록전’에 출품한 사진가의 이름이 없었다. 

주인공인 정영신씨 이름은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사진가는 필요없고, 행사의 자료로 활용하겠다는 심보였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다. 이 건 작가를 무시하는 것 보다 사진 자체를 우습게 보는 처사였다.

김준권씨를 만나 고함을 지르기도 했으나, 분을 못 삭여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실수로 누락되었다지만, 말이 되지 않았다.


현수막 만들면 제일 먼저 들어가는 것이 전시제목과 작가이름 아니던가?

제목만 생각나고, 작가 이름은 ‘광화문미술행동’인줄 알았던 모양이지.

“이런, 개 씨나락 까먹는 소리하고 자빠졌네”






그들 부탁대로 정영신씨는 전시작을 백점이나 정리하여 파트별로 편집해 주었으나, 30점만 걸어 놓았다.

그럴려면 사진을 만들어 줘야 하는데, 원본 파일을 보내달라는 자체가 의심스러웠다.

처음 이 전시를 추진할 때, 이인전을 원했지만, 다른 사진가가 없는 둘 만의 전시가 마땅찮아 난 빠졌다.

사실상 정영신씨는 촛불집회 기록에 전념했지만, 난 ‘광화문예술행동’에 초점을 맞추었으니 정영신씨가 하는 것이 맞았다.

전시장 바닥에 퍼져 앉아 장경호씨 막걸리를 축냈는데, 괜히 장경호씨에게 신경질 부리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노무현문화재단’의 추모행사를 방해할 수 없어 끝나는 시간까지 기다려야 했다.

현수막과 사진을 모두 끌어 모아 불태우는 화형 퍼포먼스로 마무리 하리라 마음먹었다.

화난 상태에서 급하게 마셔대니, 술이 금세 취했다.


그런데, 이재민씨 등 여러 명이 촛불역사전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난 사진을 가져가는 줄 알고, 못 가져간다며 사진을 찢기 시작했는데, 바람 때문에 다시 설치한다는 것이다.

미안한 마음으로 다시 앉았지만, 현수막을 보니 ‘광화문미술행동’이 ‘광장예술 네트워크’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엿쟁이 마음대로 하는 짓을 누가 말리겠는가?  

다 끝났는데 작업실로 돌아가지 않고, 지금 정치하겠다는 이야긴가? 에라이~






난, 혼자서 장난치는 꼴은 죽은 ‘민사협’의 김영수 하나만도 지겨웠다.

이사회나 규정은 형식적으로 두고 혼자서 갖고 놀다 결국 다 말아 쳐 먹고,

죽으면서도 자식들 앞세워, 마누라처럼 보살피던 제자 가슴에 대못 꽂지 않았던가?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도, 사진계 혜택은 혼자 다 처 먹었지만, 결국 돈이 그를 망쳤다.

내가 죽은 사람을 욕 해대는 것은 친구인 개인을 떠나 ‘민사협’ 아니, 사진계를 말아 먹었기 때문이다.

말은 민주, 민주 하면서 하는 짓은 북한보다 더 했다. 결국 지금 그 짓 하자는 것 아닌가?


이것이 청산되어야 할 대표적인 적폐다. 바로 독제 말이다.

그리고 이런 공적인 일에는 사욕이 끼이면 절대 안된다. 지금 생각하니, 처음 깃발 들 때부터 계산된 것 같다.

이용 당하기만 한, 부대표 류연복씨가 끌어 갔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도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필봉농악의 풍물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분 전환 할 좋은 기회다 싶어 놀이마당으로 갔다.

신나게 춤도 추고 미친 듯 사진도 찍으며 현장에 몰입했다. 바닥에 누워 낮게 보니 꼬맹이도 예쁘게 보이고,

올려 보니 광대의 콧털 까지 보이더라. 한 삼 십분 동안 예쁜 놈만 무차별 사격하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경찰이 잡아가지 않는 것 보니 세상이 참 좋아졌더라. 대통령이 바뀌어 그런가?

전시장으로 나오니 많은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강민 시인과 소설가 김승환선생, 김낙영시인,
화가 임옥상씨를 만났고, 참여 사진가인 박영환, 김문호, 하형우씨를 만나 하소연하기도 했다.


판화가 류연복씨를 따라 갔더니, 정고암, 이광군, 최석태씨 등 여러 명이 ‘종로빈대떡’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일을 마무리하려면 더 마실 수가 없었다. 빠져 나가 사우나탕에서 두 시간 가량 잤다.





그러나 술이 깨고 나니, 생각을 달리해야 했다.

'광화문광장'에서는 소각 할 수 없을뿐더러, 함께했던 많은 분들께 걱정 끼치기 싫었다.

집에는 보관 할 장소가 없으니, 차를 가져와 소각할 장소를 찾아야 했다.

오후 여덟시가 넘어서야 광화문에 다시 나왔는데, 그 때까지 끝나지 않고 있었다.
차안에서 기다렸는데, 뜻밖에도 ‘서울문화투데이’ 발행인 이은영씨가 차 문을 두드렸다.

눈도 밝지, 어두운데 어떻게 보았을까?

다음 달에 신문사 주최로 ‘87민주항쟁’ 사진전을 하고 싶다는 의견을 주었다.

‘눈빛출판사’에서 사진집을 만든다니, 한 번 협의해 보기로 했다.






좀 있으니 류연복씨가 짐을 챙겨와 차에 실어 주었다.

사진과 현수막은 챙겨 왔으나, 아직 처리해야 할 것들이 남았다.

‘87민주항쟁’ 현수막을 비롯하여 사진이 삽입된 현수막은 모두 폐기 처분하고,

컴퓨터에 보관 된 작가들의 사진 파일을 전부 파기해 주기 바란다.

만약 이후에 다른 인쇄물이나 어디에서라도 사진이 발각되면,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난 이미 끝난 인생이지만, 더 이상 사진인들의 권익이 훼손되어서는 안된다.

잘 못 된 것은 바로 잡아야 하니, 다들 오해 없기 바란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1일 오후 4시경, 모처럼 인사동에 나갔다.
나무화랑에서 열리는 광화문미술행동, 100일간의 기록을 보기 위해서다.
이 전시는 이달 초하루에 막을 올렸으나, 내일 내일 미루다 여지 것 보지 못했다.
전시되는 사진이나 설치물은 함께 한 일이라 알고 있으나, 눈도장은 찍어야 했다.

얼마 전, 동자동 일에 너무 소홀해 일체의 오프닝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나발 분 것이 족쇄가 되어, 꼭 가야할 전시회마저 갈 수 없었던 것이다.
어디에는 가고 어디에는 안 간다면 욕먹기 십상이라, 얼굴에 철판 깔고 버틴 것이다.

사실 열림식 있는 날에는 사람 만나기는 좋아도 작품 보는 데는 별로다,
꼭 보아야 할 전시는 평소 시간 날 때 들리기로 했는데,

이날은 판화가 류연복씨가 전시장 지킴이라기에 찾아 나섰다.

 

전시장에는 류연복씨 외에도 김준권, 변정대섭, 김이하, 육인순씨 등 반가운 분들이 여럿 있었다.

좀 있으니 죽은 용태형 딸래미 김보영과 그의 친구 김진영씨도 나타났다.

숨겨 둔 막걸리를 얻어 마시며, 오랜만의 회포를 풀었던 것이다.





이 전시는 출판기념회를 겸해 열렸으나, 사실 광장이나 야외에서 전시되어야 했다.

그 많은 설치물과 국민들의 염원이 담긴 현수막들을 어떻게 조그만 전시장에 다 펼칠 수 있겠는가.

광화문광장에 모두 펼쳐놓고, 그 날의 감회를 맛 볼 날이 올 것으로 기대한다.

전시된 사진과 현수막들을 돌아보니, 지난겨울의 하루하루가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끓어오르는 분노의 열정으로 추운 줄도 몰랐고, 역사의 순간순간들을 기록하느라 배고픈 줄도 몰랐다.

그 타오르는 촛불의 물결을 바라보며, 사실상 짜릿한 희열도 맛보았던 것이다.

올바른 세상을 향한 국민들의 외침으로 철옹성 같은 벽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드디어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다.

이제 적폐들이 하나하나 청산되고, 갑과 을이 없는 평등한 세상을 조용히 기다릴 것이다.






시간이 되어 전시장 문을 걸어 잠그고, 다들 풍류사랑으로 몰려갔다.
그런데 어디를 가나 류연복씨는 인기 짱이다.

그토록 여성 팬이 많은 그가 홀 애비로 사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좋아하는 것과 사는 것은 다른 것일까? 아니면 무슨 비밀이라도 있는지...
이 날도 풍류사랑에 가자마자 보영이 엄마로부터 뽀뽀세레를 받았다.
"주여! 왜 이리 세상이 불공평하나이까?"

돌아오는 길에 습관적으로 유목민에 들렸다.
뜻밖에도 정영신씨가 유목민술자리에 있었다.

나도 반가워  뽀뽀세례를 받고 싶었으나, 최혁배, 장경호, 공윤희, 배성일, 임경일씨 등

사내들 속에 끼어 있어 들어 갈 수가 없었다.


좀 있으니 옛날 유행가 가사가 생각나더라.
헤어지면 그리웁고 만나보면 시들하던, 모를 건 이내심사~






이 전시는 16일까지 이어지고,

오는 20()은 오후1시부터 8시까지는 광화문광장에서 노무현대통령 8주기 추모문화재 사전행사도 열린다.

노무현재단에서 주최하고 광화문미술행동에서 주관하는 시민과 함께하는 추모예술난장에 많은 분들의 참석을 바란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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