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운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린 지난 3월 27일 남도의 장터를 찾아 떠났다.

4일간의 일정으로 진도장에서 부터 강진 병영장, 신안 지도장, 영암 구림장,
독천장, 시종장, 신복장, 강진 병영장, 영광 염산장, 함평 해보장, 화순 이양장,
장성 황룡장, 나주 세지장, 광주 송정장을 돌아 왔다.
진도 바닷가엔 동백꽃이 만발하였고, 들녘에는 작은 풀꽃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진도장은 전형적인 시골장의 정취가 묻어나는 장터였지만, 새 장옥을 준비하고 있어
서둘러 온 것이 퍽 다행스러웠다. 그 외는 대부분이 면소재지의 조그만 장들이라 일찍
끝나기도 하지만 장꾼도 손님도 없는 황량한 분위기였다. 마치 유령이라도 나올 것
같은 을씨년스러운 장옥들이 앞날이 보이지 않는 시골장의 오늘을 말해주고 있었다.

오래 전 사진인들이 즐겨 찾았던 송정리장은 이제 옛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새벽열차에서 내려 보따리를 이고 메고 나오는 노인들의 모습도 사라졌지만,
장터 형성도 수도권의 재래장과 마찬가지였다. 손님들도 많아졌지만 이용하는 층이
훨씬 젊어져 날로 번창 장터로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이제 대부분의 오일장들은 인구가 많은 도회지 근교나 읍소재지 장들만 살아남고,
노인들만 사는 면소재지의 장들은 막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몇몇 사람들만 오가는 쓸쓸한 장터 풍경도, 사진에서나 보게 될 날이 머지않아 씁쓸하다.

 

2013.4.2

 

 

 

 

 

 

 

 

 

 

 

 

 

 

 

 

 

 

 

 

 

 

 

 

 

 

 

 

 

 

 

 

 

 

 

지난 16일 새벽4시에 출발해 정읍 산외장에서 부터 남원 운봉장, 장수 번안장, 무주장을 다녀왔다

산외장과 번안장은 장돌뱅이도 손님도, 찾는 사람이 없는 사라지기 직전의 장터였다.

대로변에 가게를 둔 산외장과 번안장의 기존 매장 몇 곳이 간간이 문을 열었지만 손님은 없었다.

운봉장도 산외나 번안보다는 나았지만 읍소재지 장치고는 한산한 장터였다.

반딧불 장이란 이름으로 근사한 장옥을 지은 무주장만 그런대로 장터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디를 가나 만나는 사람이라고는 연로한 노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지팡이에 의지한 채, 간신히 한 발짝 한 발짝을 딛는 불편한 몸이지만 장터에 나오셨다.

자신이 나가지 않으면 그나마의 장꾼마저 오지 않을까하는 불안감도 있을테고,

이웃마을 소식이나 반가운 사람을 만나지나 않을까하는 기대도 섞였을 것이다.

혹시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리운 추억들을 찾아 나선 것인지도 모르겠다.

 

 

2013.4.17

 

 

 

지난 16일, 이틀간에 걸쳐 거창장, 하동 악양장, 사천 완사장, 고성장을 거쳐 마산 어시장을

마지막으로 울산과 부산지역, 그리고 경남의 오일장 92곳 촬영을 마무리했다.

마산 어시장은 상설시장이지만 경남 지역을 대표할만한 큰 시장이기에 포함시켰다.

 

약3개월에 걸쳐 경남지역의 장들을 답사한 결과 12개 지역의 면소재지 장들이 사라졌고,

한두 명의 장꾼으로 간신히 명맥을 지키는 장도 여럿 있었다.

머지않아 읍 소재지의 장만 살아남고 면 소재지 장들은 대부분 사라질 것으로 판단된다.

시골에 사람들이 없으니 장돌뱅이들이 모여들지 않고, 왠만한 농가에는 자동차가 있어

좀 멀어도 물건이 많은 큰 장들을 찾다보니, 돈 없고 힘없는 노인들의 외로움만 커져가고 있다.

 

고성장을 촬영하고 마산으로 이동하는 도중 이강용씨로 부터 전화가 왔다.

이강용씨의 아뜨리에에서 차 한 잔 나누는데, 이종호씨로부터 빨리 오라는 전갈이 빗발 같았다.

자신이 운영하는 레스트랑 ‘알베토’에서 경남지역 촬영 완료를 축하하는 파티를 준비해 두었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는 이종호씨를 비롯하여 성형외과를 운영하는 김보현씨와 와인 소믈리에 배정한씨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식탁에는 와인 잔들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와인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어가며 여러 가지 와인의 향과 맛을 즐기는

최고의 만찬 시간을 가졌다.

 

축배를 들면서도 마음은 무거웠다. 이제 시작에 불과한데...

친구와 아우들의 후원에 힘입어 경남지역은 잘 마무리할 수 있었지만,

새해부터 시작하게 될 경북지역을 비롯한 나머지 장터들이 문제였다.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말을 꺼냈다. “서울 집 팔아 장 찍는데 씁시다.”

미쳐도 단단히 미쳐간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결코 쉽지 않은 아내의 용기가 대견스러웠다.

새해부터 “농민신문”에 연재하게 될 장터기행 원고료도 확보되었으니,

다른 신문이나 잡지에도 제안해 보자는 말로 넘겼지만 확실한 대안은 될 수 없었고,

코딱지 만한 연립주택이지만 아내에게는 마지막 남은 재산이기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기야 오래전부터 정선에서 여생을 보낼 작정을 했었고, 장터작업의 가치에 비한다면

서울 집도 부질없는 욕심에 불과하지만 서울생활을 정리하기가 아직 일렀다.

장모님의 건강 문제도 그렇지만, 무슨 애인같이 매달렸던 인사동이 마음에 걸려서다.

정선 산다고 인사동을 잊을리야 있겠냐마는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지 않을까? 걱정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부부는 손발이 너무 잘 맞아 탈이다.

대개 한 사람이 미치면 한 사람은 말려야 하는데, 도무지 그게 되지 않는다.

그동안 아내는 남자도 감당하기 힘든 강행군을 말없이 따라 주었고,

강추위로 연약한 얼굴이 망가져도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다.

이젠 장터를 찍어야 한다는 소명의식에 더해 일 자체의 재미까지 느끼는 듯하다.

대개 시골 장들을 돌다보면 장 서는 날짜들이 엇갈려 갔던 길을 반복해서 다니는 경우가 많은데,

국토의 지리를 익혀가는 재미와 오밀 조밀한 시골 마을들의 아름다운 풍경에 매료되어 가는 것이다.

이제 겨우 한 고비를 넘었을 뿐이지만 '시작이 반"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대상을 보는 눈이나 접근하는 방법은 물론, 일의 추진력까지 높아져

머지않아 좋은 결실을 볼 것 같은 자신감도 생긴다.

 

2012. 12. 30

 

 

 

 

 

 

 

 

 

                                          경남지역 작업을 위해 후원해 주신 이종호, 정남규, 조성제씨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경남 지역 모든 장터의 역사와 정보를 담은 '보리문디들의 장터'출간을 위해 지난 주 닷세동안

언양장에서 부터 신평장까지 18개 지역을 촬영하였고, 년말까지 현장 취재를 마무리할 계획입니다.

마지막 상경 길에, 나의 고향이었던 영산장을 다시 찾아 봤습니다.

50여년 전의 기억을 드듬어 봤으나, 산천은 유구하지만 인걸은 간데 없더군요.

옛날 약장수가 놀던 자리는 현대식 건물이 들어섰고, 음식들을 팔던 골목 좌판은 그대로였어요.

그리고 밀양상회란 그릇집도 남아있었는데, 본래 주인이었던 김흥수씨는 돌아 가시고,

며느리가 대신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영산장의 기점은 종대(사이렌이 울리는 탑이지만 종대로 불림)인근에 밀집했던 미곡전이었는데,

아직도 녹슨 종대가 힘들게 장터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추억에 끌려다니며 장터 현장을 찾아보는 재미도 괜찮더군요.

 

 

('보리 문디'는 경상도 사람들을 지칭하는 방언으로, 보리 문둥이의 경상도 발음입니다)

 

 

2012.10.26

 

 

 

 

 

 

 

 

 

 

서울 은평구 역촌역 부근에 있는 대조시장은 오래전부터 인근의 대형활인마트에 밀려난 시장이다.

                                                       몇일전 아내와 제사상에 올릴 음식재료를 구입하러 갔더니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시장을 찾는 손님들이 늘어나 장에 활기가 돌았다.

정부에서 재래시장 활성화를 위하여 시장옆 길에 무료주차를 허용한 것이 그 원인이란다.

장터 형성은 가로수를 감싸 안은 장옥이 길따라 길게 이어졌는데, 장옥안으로 돌출된

가로수 둥치가 시장사람들의 가구로 활용되어 액자, 시계, 선풍기 등이 걸려 있었다.

좁은 시장 통로를 밝힌 붉은 백열등 빛이 한층 무더운 분위기를 조장하지만

시원한 대형마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가는 정이 있어 좋았다.

그 것만이 전통시장이 갖는 유일한 경쟁력이기도 하다.

 

2012.8.3

장에가면 아내와 흩어져 각자의 일에 몰입하지만 좁은 장바닥을 돌다보면 여러차례 만나기도
하고, 때로는 순간적으로 내 카메라 화인드에 등장할 때도 있다.

지난 정월 보름 대목장 촬영을 위해 떠났던 경북지역과 충청남도의 여러 장에서 찍힌 사진들을
모아보았는데, 할머니들이나 장꾼들을 인터뷰하는 모습도 있고, 사진을 찍는 장면이나 물건을
사는 모습들도 잡혔다.

이 또한 그에게는 좋은 기록이기에, 팔불출 소리를 듣더라도 마누라 자랑 한 번 해 본다.

20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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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바쁜 여자

 

세상에 이 여자 보다 더 바쁜 여자있으면 나와봐라 그래요.
좌우지간 장터에만 내려 놓으면 찾아보기 힘들답니다.
장꾼들 인터뷰하고 사진 찍는 것만도 바쁜데,
동영상에다 기력 없는 할매들 까지 보살피니 말입니다.

장에만 가면 나는 안중에도 없는 그 여자가 야속하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답니다.ㅎㅎㅎ

 

(2012.3,16 청양 정산장에서...)

 

 

 

 

 

 

                                                                                             

                                                                                               

 


"남지장에서 빰 맞고 영산장에서 화 푼다"는 말이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거나 "거름지고 장에 간다"는 등 장과 관련된 속어들이 많다. 그 만큼 가까운 지역끼리 돌아가는 오일장은 우리네 삶에 중요한 생활터전이었으므로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장과 연결되었고, 지역 토박이 장돌뱅이들에게는 장의 성쇠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기도 했다.

지난 보름 대목장 촬영지인 청도에서 만난 어느 장돌뱅이가 "영천장에서 울고 청도장에서 웃는다"는 말을 했다. 영천장에서는 장사가 되지 않았고 청도 새벽시장에서 재미를 보았다는 이야기인데, 장터를 찍는 우리도 같은 심정이기에 맞장구를 쳐준 적이 있다. 장사도 사람이 많다고 다 잘되는 것이 아니지만 사진도 마찬가지다. 날씨는 물론 주변상황에 따라 성과가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영천 금호장과 신녕장은 조그만 지역에 거대한 장옥을 짓고 있었다. 요즘은 비를 피할 수 있는 장옥을 짓는 것이 아니라 가급적 많은 투자를 하여 고급스런 장옥들을 짓고 있다. 근사하게 지어 손님도 많고 장사만 잘된다면 좋으련만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
청송교도소가 있는 진보장은 객주와 아라리 난장을 쓴 소설가 김주영씨의 고향이라 진보전통시장 현대화사업을 시작하였으나 예산이 부족해 지붕도 못 올린 채 방치되어 있었다. 신축 장옥도 "객주"의 배경지답게 옛 모습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식 건물이라 관광 상품으로서의 가치도 잃어 버렸다. 그리고 서천 장황장은 외곽지역에 거대한 장옥을 지었으나 손님들이 없어 울상이다. 사람들이 장옥 주변의 난장에만 몰리고 장옥 안으로 들어오지 않아, 입주 상인들은 장옥 입구에 비자루나 생활용품들을 널어놓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반면 청도장은 오래된 장옥이지만 컴컴한 새벽4시부터 서는 번개시장이 인기다. 농산물을 갖고 나오는 노인들과 상인들의 흥정으로 장터 입구는 새벽부터 북새통을 이룬다. 인근지역인 부산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는데, 어떤 귀부인은 밴츠를 타고 와 할머니들이 갖고 나온 농산물들을 싹쓸이하기도 했고, 어떤 장돌뱅이는 자기가 갖고 온 중국산 도라지에 할머니의 국산도라지를 사서 뒤섞기도 하는 등 거래가 활발하지만 말 그대로 난장판이었다. 농민들은 새벽시장에서 농산물을 처분하고 일찍 돌아가는데 비해 장꾼들은 오후 늦게까지 장사를 하므로 다른 장에 비해 사람도 많고 거래도 많은 오일장이었다.

경산 하양장도 장옥 신축으로 하천변에 임시장터가 마련되었는데, 장꾼들도 많고 찾는 손님도 많았으나, 새 장옥으로 옮겨지면 어떨지 지켜 볼 일이다. 포항 송라장이나 죽장장은 사람들이 적어 머지않아 사라질 장터이지만 옛 장옥들이 그대로 남아있는데다 날씨까지 받쳐주어 좋은 사진들을 몇 장 찍을 수 있었다. 그리고 경주 양남장은 바닷가에 서는 몇 안 되는 장인데, 어물장수들이 생선찌꺼기를 바닷가에 버리자 갈매기가 떼거리로 몰려 와 장관을 이루었다.

이번 보름 대목장 순례는 지난 16일부터 23일까지 이어진 긴 여행이었다. 별 어려움 없이 일정대로 마친 건 좋으나 돌아오는 길에 자동차가 주저앉아 당황했다. 그 것도 일을 끝낼 때까지 잘 버텨주다 서울톨게이트를 들어와서야 멈춰 섰다. 오랜 세월 너무 혹사시켜 미안한 생각도 들었지만, 자동차로 태어나 전국을 골고루 많이 달려보는 것이 자동차로서의 임무를 다하는 행복이리라 위안도 해본다. 구급차에 실려 간 병원에서 모두들 폐차시키라는 의견들이 분분하지만 새로이 구입할 형편도 못되지만, 오랫동안 정이 들어 전국 장터 순례를 끝내는 올 연말까지만 버텨 달라고 빌어본다. 아직도 전국 600여 지역의 오일 장터 중 130여 곳이 남았지만, 예정대로만 진행되면 2013년 12월에 장터프로젝트의 전체 윤곽을 짤 수 있게 된다. 그 때 함께 고생한 자동차도 정선 만지산 자락에 영구히 보관할 계획이다.

2013.3.2

 

 

 

 

 

 

 

 

 

 

 

 

 

 

 

 

 

 

 

 

 

 

 

 

 

 

 


 

지난 3일부터 대목장 촬영으로 전라도 해안지방에 6일간 다녀왔다.

여지껏 숱한 지방 나들이를 했지만 이번 촬영처럼 힘들고 성과 없는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폭설로 앞당겨 출발한 것도 문제지만, 작업에 임할 때마다 지켜왔던 공과 사의 분명한 구분과,

오직 일에만 몰입해야하는 무술적인 스스로의 약속을 저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다.

떠나기 전에 촬영지 관공서에 문의할 일을 비롯해 준비할게 많은데,

갑자기 방문한 손님으로 일 순서가 헷갈리기 시작했고, 폭설까지 내려 너무 서둘렀던 것도 탈이다.

인사동에 들려 저녁이나 먹고 출발하라는 손님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던 것도 또 하나의 실수였다.

인사동에서 오후 아홉시에 출발하여 목적지인 해남장에 익일 오전7시에 도착하였으니 무려 열 시간을 눈길에서 헤메야 했고,

눈 내리는 장터 풍경을 연상하며 위안했던 기대도 산산히 깨졌다. 그 쪽 지역은 날씨가 포근해 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시간의 변속 운전으로 오른쪽 어깨에 심한 근육통이 시작되었고, 아내는 눈병과 생리통에 시달리면서도 돌아가자는

이야기가 나올까봐 서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첫 도착지인 해남 우수영장에서 닭 잡아 파는 난전을 보며 죽고 사는 문제는 하나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숱한 닭 집 풍경들을 만나왔지만 그 날따라 웅크린 닭들이 주는 메시지가 달랐다.

한 곳에 몰입하다보면, 죽음에 질려 웅크린 닭처럼 불안에 떨 겨를도 없을 것이란 말이다.

이판사판 후회도 후퇴도 없다는 각오가 일었다.

 

 

 

 

강진장은 장옥 안에 경품으로 내건 자동차가 진열되어 있었다. 변해가는 신판 장터 풍경이었다.

보성 회령과 복내를 거쳐 마지막에 도착한 곳이 광양 옥곡장이다.

옥곡장은 일년전에 촬영했던 곳이지만, 아내가 광주은행 사보에 연재하게 될 첫 지역이라 주변 정보수집을 위한 행보였다.

옥곡장에 도착하니 이미 파장이라 한산하였고, 상인회장을 만나러 간 아내는 장꾼 몇 명과 어울려

숯불에 구운 조기를 안주로 소주를 들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시장기가 돌아 시커멓게 탄 조기지만 한 마리 잡았는데, 어느 여인이 나를 찾아 왔다.

장에 돌아다니는 모습이 심상찮아 사주를 봐 주기 위해 찾았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이끌려 간 곳은 시장 변두리의 초라한 대폿집이었다.

점쟁이의 이름은 이영애(56세)씨 였고, 이십여 년 동안 그 곳에서 식당을 한다는 것이다.

나를 앉히고는 큰 숨을 내쉬며 손금을 보기 시작하더니 대뜸 내 뱉는 말이 "짜집기 인생이군" 했다.

“사람 좋아 사는 건 힘들지만 이름 석 자는 남기겠고, 올해부터 슬슬 풀린다”는 것이다.

점쟁이의 입에 발린 소리라 치부하면서도 풀린다는 이야기에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복채로 막걸리 한 병만 사라지만, 찾아 나선 아내에게 불려 나와야 했다.

동네 사람들 이야기로는 "정신이 살짝 나간 팔자 센 무당이라"지만 막걸리 한 병 값 내놓지 못한게 영 게름직했다.

 

보성 예당장에서 시작하여 장흥 대덕, 영암, 완도장까지의 촬영은 순조롭게 마쳤으나 셋째 날 부터 고행이 시작되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하루 종일 찍은 곳이라고는 장이 들어서던 진도 의신장과 마지막 파장 무렵 찍은 고흥 동강장이 전부였다.

완도 고군장은 사라졌고, 군의장은 장날이 바뀌어 헛걸음 쳤다. 이동거리가 큰, 그 먼 거리를 헛 탕 친 것도 억울하지만

네비게이션마져 헷갈려 반나절을 뺑뺑 돌다 결국은 도선료 물고 배에 실려 고흥으로 나와야 했다.

"하다보면 이런 날도 있을 수 있다"는 아내의 위로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진도 의신장, 이세재(62세)

 

다음날 첫 촬영지인 고흥 봉래면으로 차를 돌렸다.

봉래면은 우주위성발사 기지가 있는 지역으로 나로호의 성공발사를 축하한다는 현수막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TV도 신문도 보지 않는 우리로서는 그 현수막을 보며 위성발사가 성공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봉래면에 있는 조그만 병원에서 진통제 주사 한 대 맞고 식당에 들렸더니, 봉래장은 새벽 5-6시에 장이 선다고 했다.

컴컴한 시간에 장이 열린다는 것을 반신반의하면서도 일찍 나와보았더니 칠흑같이 어둡고 추운 곳에서

꼼지락 꼼지락 짐을 챙기는 장꾼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일찍 와야 좋은 자리 잡제”라는 장꾼의 말에 정말 돈이 무섭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섯째 날 첫 촬영지인 해남의 땅끝마을 송지장에서 목 빠지게 기다리던 눈을 처음으로 만났다.

그것도 운이 없었던지 마음에 드는 사진이라곤 딱 한 장 얻은 게 전부였다.

보성장은 새 장옥이 거의 완공되어 입주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고, 옥곡장은 설이 지나면 장터를 변두리로 옮기고

그 자리에 새 장옥을 세운다고 했다. 그런 장옥 짓는다는 소리를 들을 때 마다 서둘러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꾼들이 외면하는 장옥짖기에 열을 올리는 지자체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마지막 날, 장흥장에서는 여지껏 만난 장꾼중 나이가 제일 어린 백재훈(19세)군을 만났다.

일찍부터 아버지 일을 배운다는 백군의 착한 모습에서 사라져가는 장터의 마지막 희망과 새롭게 변해갈

내일의 장터를 그려본다.

 

 

2013.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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