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새벽 네 시, 알람소리에 선잠을 깼다.
5박6일 동안 경상남도의 여러 장터를 찾아 나선 것이다.
어두운 새벽길을 달리는 차창에 간간히 빗방울이 떨어지지만 별 문제될 건 없다.
카메라 젖을 우려 외에는 비 오는 날의 환경적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데다,
현장감을 중시하는 다큐멘터리사진에서는 피할 수 없는 길이기도 하다.

무주를 지나 덕유산 방향으로 달릴 무렵에야 어둠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검은 구름을 뚫고 내려 비치는 햇살이 너무나 경이로웠다.
촬영길에 나설 때 마다 만나는 일출이지만 날씨와 장소에 따라 또 다른
느낌을 주는 아름다운 산하에 매번 감탄한다.
희망의 하루를 점쳐 주는 자연의 선물이지만 고속도로에 차를 세울 수 없어
보기만 하는 그림의 떡일 뿐이다.

첫 촬영지는 합천군 묘산면에 소재한 조그만 시골 장터였다.
아침 여덟시에 당도하니, 조용한 장터로 "탱~탱~탱~" 굉음을 울리며 경운기 한 대가 들어온다.
할아버지의 경운기에 내다 팔 농산물과 더불어 할멈까지 태워 나오셨다.
촉촉하게 젖은 장바닥엔 몇 몇 사람만이 오 갈 뿐,
빈 장옥에 매달린 메주가 한가로운 시골 장터의 현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작업 현장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장터의 지형적 특성이 잘 드러나는 촬영장소를 물색하는 일이다.
대개 인근 건물 옥상으로 침투할 수 있는 루트를 알아내 아내의 촬영을 도와주고,
내가 필요한 장터 사람을 찾아 나서지만 그리 만만치만은 않은 일이다.
사람도 사람이지만 난장을 벌이는 장소도 어울려야 하고,
찍어도 인적사항을 알려주지 않으면 헛수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산청의 생초장은 장에 사람이 없는데도 장옥을 짓기 위해 기초공사를 하고 있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토목공사를 누가 말린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남해에서 진주, 하동, 산청까지 여러 장터를 거쳐 지리산 골짜기에 있는
함양 마천장을 마지막 장터로 정했으나 도착하니 벌써 장이 끝나 버렸다.
마천은 요즘 곶감 깎는 일손이 달려 오전에만 잠깐 장이 선다는데,
이처럼 김 빠지는 일도 더러 만난다.

“시간은 돈이다”란 말을 요즘처럼 절감한 적은 없다.
대개 여덟시에 개장해 오후 네시 무렵 끝나는 장터를 네 군데 정도 촬영하려면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작은 면소재지 장들은 한 시간 정도면 작업을 마칠 수 있지만, 이동하는 시간이
많아 아침식사는 건너뛰고 점심은 운전하며 군것질로 때우는게 일상처럼 되버렸다.
체력을 유지해 작업을 이어가려면 초저녁부터 쉬는게 좋은데, 그마저 맘대로 않된다.
둘째 날은 창원에서 사진가 조성제씨와의 약속이 있고,
다음 날은 마산에서 화가 이강용씨 아뜨리에 개업식에 참석해야하니 말이다.

이강용씨 개업식에 가서는 늦은 시간에 음식을 급하게 먹은게 탈인지,
그대로 식탁에 엎드려 잠든 게 탈인지, 다음 날 심한 복통을 앓았다.
아픈 배를 움켜지고 운전하며 “왜 이렇게 강행군을 하는지?” 자문해 본다.
장터가 사라지기 전에 남겨야한다는 절박함이 원인이었다.
작업하는 기록들은 후손들에게 남겨질 소중한 사료이지만, 어쩌면 스스로를 위한 일이기도하다.
다큐멘터리사진에서는 사진가의 사명감을 절대적으로 요구한다.
사명감이 없으면 힘들 때마다 그만두고 싶은 생각들이 꿈틀대기 때문이다.

돌고 도는 장돌뱅이 노릇 일주일동안 힘들었지만 얻은 것도 많았다.
찾아 간 스무 다섯 군데 장에서 열 명의 장터 사람들을 찍을 수 있었고,
아내는 경상남도 장터의 많은 자료를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번 장터 순례의 색 다른 풍경으로는 정치바람이 시골 장터까지 밀고 들어와
진종일 선거 유세 차량의 시끄러운 확성기 소리에 시달려야 했다는 것이다.
그다지 많지도 않은 시골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려 별의 별 짓을 동원하지만
시골 사람들은 무관심했다.

선거 유세차량의 확성기에서 울려 퍼지는 뽕짝 스타일의 CM송이 죽여준다.
"인물도~ 정책도~ 박근혜가 죽여요!”

 

201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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