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아트 / 최석태의 WHY YOU

 

몇 번이나 지우고 정성 들여 고친 연필화
해방 직후 희망과 불안이 교차하던 분위기를 반영한 듯

 

이 그림에 대하여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번 언급한 고 이구열 선생님은 이중섭이 연필을 남다르게 구사한 점에 주목했다. 표현이 육중하고 사색적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기법이 놀랍고 예술적 깊이가 완벽하여 감탄을 자아낸다고 하였다.

 

▲ 이중섭, 세 사람, 종이에 연필, 18.3x26.2 센티미터,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세 사람이 그림을 꽉 채우고 있다. 그다지 크지 않은 화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맨 앞 사람이다. 그 뒤에 세운 무릎에 두 팔을 얹고 머리를 웅크리고 앉은 인물을 배치했다. 그 뒤로는 두 팔을 깔고 엎어져 누운 인물이 보인다. 배경은 땅바닥인 듯 가로줄이 그어졌다.

 

뒤에 있는 두 사람이 다소 무기력해 보이는 것과 달리, 앞의 사람은 보는 사람에게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자세를 하고 있다. 무언가를 모르는 척하는 것 같다. 왼팔을 얼굴 위에 놓고, 잔뜩 긴장한 상태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건드리기만 해도 바로 반격할 태세다. 무릎을 세워 접은 왼쪽 다리와 바닥에 기대어 접은 오른발은, 왼손과 마찬가지로 잔뜩 긴장한 상태다. 앞 사람의 왼쪽 팔과 오른쪽 발은 연필을 거듭 그어대서 매우 진한 상태다.

 

나는 맨 앞에 있는 사람을 이중섭이 얼마나 정성 들여 고쳐 그렸는가 하는 점에 주목한다. 반바지 아래로 드러난 오른쪽 종아리나 머리 위로 올린 두 팔이 이룬 각도를 다소 느슨하게 그렸다가 더 가파르게 보이도록 바짝 당겨붙여 그리고 펜선을 지운 흔적이 뚜력하다. 그는 왜 이렇게 고심한 것일까?

 


이 그림이 언제 그려졌느냐 하는 것은 그림의 내용을 파악하는데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이중섭의 조카이자 지금은 돌아가신 이영진 선생님의 주장에 따라 나도 이 그림은 1942년부터 여러 해에 걸쳐 그려진 것으로 이야기해 왔다. 그러나 그림의 내용을 면밀히 살펴본 결과, 이제 그 견해를 취소한다. 그림이 그려진 것은 1945년 8월 이후, 9월 정도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림의 앞 쪽에 있는, 모르는 척하며 팔로 눈을 가리고는 있지만 굳게 다문 입술로 “우리를 모욕하면 가만 있지 않아!”라고 말하는 듯한 인물이 1942년에 착안되어 그려지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

 

1945년 가을은 해방됐다는 벅찬 기분이 유지되던 때였으나 불안감이 컸다. 북에는 소련군이, 남에는 미국군이 군정을 선포한데 이어 38선 이남의 유일한 정부가 미군정이라고 선언한 때가 10월 초였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가 힘을 모으면 독립된 나라를 세울 수 있다는 희망이 꺼지지 않은 때였다.

 

맨 앞의 인물은 그렇게 희망과 불안이 교차하던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 당시 대중들의 문맹률은 매우 높아서 이중섭은 나라의 미래에 대하여 무기력함을 느꼈을 수 있다. 그는 뒤의 두 인물을 통해 이러한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면서도 앞의 인물을 통해 복잡하지만 단호한 심경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 아닐까.

 

 

이 그림은 1945년 10월에 처음 선보였다.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으로 새로운 국면이 열린 지 불과 몇 달 뒤 10월에 서울에서 열린 해방기념 미술전에 내보이기 위해 원산에서 가져 온 것이다.

 

하지만 이중섭은 이 그림을 해방기념 미술전에 걸지는 못했다. 그림을 가져왔을 때는 전시회가 이미 끝났기 때문이다. 그 때 중섭의 친구인 시인 오장환과 관련된 인천의 시인, 조각가 등이 광복의 기쁨을 표현하는 인천의 문화행사에 그림을 출품하라고 요청했다. 이중섭은 이 그림과, 함께 가져왔던 <소년>이라는 연필화를 출품하였다.

 

 

<세 사람>과 함께 그려진 <소년>. 징용을 당했거나 돈 벌러 일본이나 만주로 갔던 아버지를 기다리는 것일까? 아니면 정신대 불려간 누나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일까? 베어진 나무 그루터기, 바람부는 듯한 언덕 사이로 난 길 가운데 비오는 듯한 그림 전체의 분위기에 왼쪽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불안감을 더한다.

 

전시를 마친 두 점의 연필화는 이중섭이 일본에서 공부할 때 알게 된 같은 유학생이자 인천에 온 이중섭을 재워주는 등 호의를 베풀었던 노상덕에게 주었다. 이 연필화는 그 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지금은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이 되었다.



[출처] 뉴스아트 (https://www.news-art.co.kr)

생일이 다가오면 반갑기보다 술병 날 걱정이 앞선다.

솔직히 말해, 돌아가신 부모님께 죄송스럽지만, 어릴 적부터 생일을 유난히 싫어했다.

내가 싫어하는 음식인 미역국을 먹는 것에서부터 나를 위해 떠벌리는 자체가 싫었다.

집에서 나와 객지로 떠돌며 생일 챙긴지 오래되어 음력생일도 잊어버렸다.

 

그러나 정동지를 만나며 사정이 달라졌다.

주민등록증에 적힌 양력 생일만 되면 제삿날처럼 기억해 내, 그냥 넘어가는 날이 없었다.

그리고 페이스북을 가까이하며 더 이상 숨길 수도 없었다.

생일을 나팔 불어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축하 인사받느라 민망스럽기 짝이 없다.

태어난 자체가 악업인데, 축하받을 일인가?

 

그 중 주변 사람 불러 모아 생일잔치 여는 것은 딱 질색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미리부터 촬영 여행을 떠나기로 약속했.

정동지와 생일 전날 여수로 출발하여 다음 날 돌아올 계획인데,

안되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듯, 태풍 온다는 일기예보로 그마저 취소되었다.

 

마침 페이스북에 판화가 류연복씨가 인사동에 나왔다며 훌훌 털고 나오라는 댓글이 달렸다.

마침 나무화랑에 전해 주어야 할 숙제 같은 문제도 있어 겸사겸사 술 동네 나들이에 나선 것이다.

 

나무화랑에 있어야 할 류연복씨는 술집 유목민에 있었다.

이름도 모르는 미인 두 분을 앞자리와 옆자리에 모신 채, 이미 술에 젖어있었다.

그리고 연극배우 이명희와 장경호, 이기만, 김발렌티노 등 조연도 많았다.

뒤늦게 나타난 최석태, 정영신까지 어울려 술판이 한창 무르익는데,

그 자리에서 정동지가 천기누설을 하고 말았다.

 

내일이 조문호 생일이다고 나팔 분 것은 떡 본김에 제사 지내겠다는 말이다.

졸지에 술자리가 생일잔치가 되어 생일 케익을 대신한 그득한 생일 팥빙수가 올라오는 등

술자리가 갑작스레 소란스러워졌다.

홀짝홀짝 마신 술에 맛이 가 결국 돼지 멱따는 소리까지 하고 말았는데,

아무리 다짐에 다짐을 해도 술만 취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똥오줌 못 가릴 정도로 취했으면, 그냥 자빠져 잘 것이지 컴퓨터는 왜 켤까?

술 취해 떠 오른 이루어질 수 없는 꿈같은 글에다 알몸사진 한 장 올려놓고,

아는 분 포스팅에 댓글까지 달고 쓰러져 잤는데,

새벽에 일어나 생각해 보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컴퓨터를 열어 보니 다행스럽게도 검열에 걸려, 그 포스팅은 삭제되고 없었다.

그러나 볼 사람은 다 보았을 것이다. 쪽팔려 미치겠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댓글 또한 무례한 관람자 나무라는 말이 작가를 탓하는 글로 비칠 수도 있었다.

오죽하면 정동지 십팔 번이 제발 아는 채하지 마라는 말이겠는가?

 

속은 쓰려 죽겠는데, 생일이라고 일찍부터 손님이 찾아왔다.

정동지의 동생 정주영씨와 딸 소영이가 온 것이다.

아산 마인팀의 양햇살양이 보내 준 생일 케익에다 정동지가 준비한 새우 안주가 술상을 가득 채웠다.

진짜 생일 술은 해장술로 마신 것이리라.

점잖게 마셔야 하는 가축적인 분위기라 술맛은 어제보다 못했다.

 

연이은 생일 술에 치어 며칠을 낑낑거렸으나, 이번에는 추석인데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겠는가?

죽을 때 죽더라도 '먹고 죽은 귀신 화색도 좋다'치 않던가.

전라도 아낙이 끊인 경상도식 탕국을 술안주로 술이 술술 넘어간다.

보름달 뜨면, 달 파먹지 않을까 걱정이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개인사가 아니라 휴전협정 뒤 희망을 담은 그림
세련되고 비범한 조형감각을 드러낸 명작

 

최석태 / 미술평론가

 

▲ 달과 까마귀. 종이에 유채. 29*41. 5cm, 개인 소장
 

둥근 보름달이 떠 있는 푸르른 하늘. 무리를 향하여 내려오는 까마귀 한 마리, 맨 오른쪽 까마귀가 날아오며 무리를 향해 입을 벌려 무언가를 말하는 듯하다. 화면 중앙에 앉아 있는 녀석은, 몸은 무리 쪽으로 향하면서 고개는 날아오는 녀석 쪽으로 돌려 뭐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맨 왼쪽 녀석도 아래쪽을 보면서 마치 오라고 부르듯 하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까마귀들은 실제로 이런 상태를 연출했을까? 마침 이런 광경을 본 이중섭이 이를 그린 것일까? 그렇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이런 장면을 연출한 것은 화가 본인이다. 이런 장면은 많은 궁리를 거치지 않고는 만들 수 없다.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이런 연출을 했을까?

 

이 그림은 1954년 6월 대한미술협회 연례전에 출품되었고 이를 본 미국인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호평을 받았다. 함께 출품한 소를 그린 그림은 이승만 대통령이 구입해 미국을 방문하면서 들고 가 선물했다고 할 정도이다.

 

유치환은 이중섭 사후 11년 만에 이 그림을 소재로 마지막 발표작이 된 시 ‘괴변-이중섭 화(畵) 달과 까마귀’를 썼다. 우리나라 최초 미술평론가 이구열은, “세련되고 비범한 조형감각을 드러낸다”고 극찬하였다.

 

▲ 자화상. 종이에 연필, 48.5*31cm, 1955년
 

이중섭의 불행한 개인사 때문인지, 소유권 이동도 많았던 이 그림에 대하여 ‘절망과 희망이 엇갈리는(이구열)’ ‘불길한 내용의 그림이지만 매우 아름다운’(이경성) ‘우울하고 무겁과 음산한 분위기’(임영방)라면서 가족과의 이별로 인한 외로움과 불행, 불안한 심정을 드러낸다는 담론이 많다. 과연 그런가? 

 

1953년 7월 27일에 남한 정부는 불참한 상태로 휴전협정이 조인된다. 다음 달인 8월 15일에 정부는 서울로 돌아간다. 그 무렵 때마침 부산에 머물 까닭이 없어진 이중섭은, 통영의 나전칠기강습소 책임자로 부임한 유강열로부터 강사로 오시라는 제안을 받는다. 이북 사람이라 고향이 없던 이중섭은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거기서 만난 사람이 이성운이다. 이중섭은 강습소 2층 방에서 이성운과 함께 머물렀다.

 

이성운의 증언에 의하면, 이중섭은 이성운의 고향인 욕지도에도 동행하여 풍경을 그렸고, 통영에서 평화로운 소를 보았다면서 소그림 그리기에 몰두하여 여러 점의 소그림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고 이중섭은 통영에 내려온 직후 어느 기분 좋은 초저녁에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여태까지 이 그림은 대한미술협회 연례전이 열린 1954년에 그렸다고 알려져 왔다. 하지만 이성운의 증언을 토대로 보면, 이 그림은 휴정협정 직후인 1953년 늦여름에 그려진 것이 분명하다. 지루하던 휴전회담이 마감되고 평화로운 시기를 맞이할 희망에 부푼 이중섭의 마음을 반영한 그림이다. 그래서 선선해지기 시작한 늦여름이라는 알맞은 계절과 보름달이 뜬 좋은 시간에 까마귀들이 모여드는 모습을 절묘하게 그려낸 것이다. 그림의 여름 하늘빛, 까마귀 한 마리, 한 마리를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이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 이중섭은 많은 궁리를 했을 것이다.

 

지난 7월 27일은 휴전회담을 조인한 지 69년이 되는 날이었다. 내년에는 70주년이 된다. 지난 8월 13일에 이중섭의 부인 야마모토 마사코 여사가 100세를 갓 넘겨 돌아가셨다. 이중섭의 그림을 읽을 때 이런 사항을 겹쳐 읽어야 한다고 여겨지는 요즘이다.

 

▲ 까마귀떼의 싸움 30.2*25.7
 

덧붙이는 그림은 1952년 부산에서 그려졌다고 추정되는 것으로, 휴전을 앞둔 시기 한 뼘 땅을 두고 처절하게 싸웠던 북과 남의 동족 상잔을 그린 것이라고 보인다. 까마귀는 살기 힘든 환경이 되면 서로 물어 죽인다고 한다. 한국 전쟁을 겪은 어르신 여러분들로부터 들은 것을 여기 옮긴다.

 

[출처] 뉴스아트 (https://www.news-art.co.kr)

글 /  최석태 (미술평론가)

 

▲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 1940 후반, 캔버스에 유채.&nbsp;72x60cm, 개인소장.
 

1948년 11월, 이쾌대는 조선미술문화협회의 제3회 정기전에 야심적인 크기의 그림을 발표한다. 150호 크기는 높이가 170센티를 좀 넘고, 가로는 2미터가 넘는 크기다. 그림의 제목은 <조난(遭難)>이다. 이 그림이 그려지고, 발표된 때는 1945년 8월에 광복이 된 때로부터 3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이다. 잘 알다시피 남과 북에는 따로 각기의 정부가 세워진 때다.

 

그림을 본 사람들은 다투어 한마디씩 했다. 그만큼 문제작이었다. 크기도 크기지만, 담긴 내용과 화법이 남달랐다.

 

화가 박고석은 “문제작”이라 했고, 해방공간에서 이쾌대의 처신을 격렬히 비난해 오던 비평가 박문원은 “독자적인 경지를 이루고 있으며 또 벽화나 대작을 꾸미기에 우선 적당한 하나의 양식을 창조한 사람”, “인민미술에 대한 열정은 (그가 속한 조선미술문화협회 회원 중에서) 오직 이쾌대씨에게서만 느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리얼리즘이 있지 않다는 점에서는 아쉬움을 표했다.

 

화가 겸 미술문필가 김용준은 “그 기법이 현대적인 사실이 아니요, 16, 7세기적인 사실의 인상을 주는 위험성이 있었다.”고 했고, 문학평론가 김동석은 이쾌대의 <조난> 이전에 발표된 <해방고지>를 겨냥한 듯, 이쾌대의의 작품 방향에 대하여 “라파엘의 인물에다 조선옷을 입혀놓은 것 같았다.”라고 평했다.

 

이 그림은 우리 역사 중에서도 가까운 100년 동안에 이룩된 시각예술 작업 중에서 가장 문제를 품은 작품이다. 복잡하고 착잡한 정세 속에서 그려져 제출되어 커다란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친형 이여성이, 암살당한 여운형의 오른팔이었다는 점에서 이쾌대는 신분상 위협을 느껴야 했다. 그의 부인이 그림을 잘 간직했으나 그 후 오랫동안 작품의 존재조차 발설하기 힘들었다.

 

이처럼 화제가 되었다가 50여년 동안 사라졌던 이쾌대의 문제작 <조난>은 어디로 갔을까? 현재 유족이 소장하고 있는 이 그림은 과연 그 <조난>일까?

 

이쾌대가 그린 일련의 대작 그림은 총 4점으로, 모두 ‘군상’이라는 애매한 이름으로 부른다. 필자는 그중 아래 2점은 ‘해방고지’라고 생각한다. 공중을 날듯 하는 두 여인이 숨어서 무엇인가를 알리는 역할을 하는 설정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 해방고지1, 1945-8년, 천에 유채, 160x130센티미터, 유족 소장.&nbsp;2015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전시에서는 '군상 II'로 소개되었다.
▲ 해방고지 2, 1945-8, 천에 유채, 225x181센티미터, 유족 소장.. 2015년 '군상 I'로 소개되었다.
 

나머지 2점은 ‘조난’이다. 아래 그림을 보면, 양상은 다르지만 두 그림에 모두 폭발이 그려졌다. 특히 앞의 그림은 폭발이 거대하여 사람들의 움직임과 조응하면서 화면 전체를 지배하는 것이 특징이다. 후자는 전자의 상태를 발전시킨 것임이 분명하다. 그런 점은 앞의 해방고지 연작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나는 특징이다.

 

▲ 군상, 1948, 천에 유채, 160x130센티미터, 유족 소장.&nbsp; 2015년 '군상 III'으로 소개되었다.
▲ 조난, 1948년, 천에 유채, 216x177센티미터, 유족 소장.&nbsp;2015년 '군상 IV'로 소개되었다.
 

문제의 이 그림은 자세한 내용이 아직 제대로 해명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여러 논자들에 의해 1945년의 광복부터 대체로 한국전쟁이 발생한 시기를 가리키는 이른바 해방공간의 시대상을 반영한 최대의 문제작으로 꼽힌다.

 

1,000쪽에 이르는 막대한 분량의 저서『독도 1947:전후 독도문제와 한·미·일 관계』(돌베개, 2010)에서 이 그림을 거론한 한국현대사 연구자 정병준 이화대학 사학과 교수는 이 그림이 바로 그 <조난>이라고 보았다.

 

그가 이렇게 추정하는 까닭은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이 그림이 <조난>이 아니라고 보는 여러 견해도 뚜렷한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결정적인 증거가 제시되지 않는 한 이런 사정은 바뀌기 힘든 것으로 보인다. 관련 글들을 모두 검토한 결과 필자는 여러 정황상 이 그림이 1948년 조선문화예술협회 3회 정기전에 출품된 바로 그 <조난>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조난>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자.

 

그림은 폭발로 보이는 사건 혹은 사고에서 비롯된 사태임이 분명하다. 폭발의 위치를 시계에 빗대자면 12시. 한밤중에 폭발이 일어났고, 그 폭발 때문에 놀란 사람, 폭발은 모르는지 아는지 화내는 사람이 보인다.

 

▲ <조난> 오른쪽 세부.

화면의 오른쪽 사람들은 화면 안쪽 멀리서부터 보는 사람의 눈앞으로 쏟아져 나오듯 쓰러지거나 놀라거나 한다. 그 뒤로는 바위를 들어 내리찍으려는 사람과 이를 말리려는 사람이 화면 맨 안쪽에 보이고, 놀라움을 가라앉히려는 남녀를 비롯하여 놀라서 넘어지는 여자 그리고 머리를 잡거나 물어뜯는 사람으로 이런 놀라운 광경을 보고 놀라는 여자도 보인다. 맨 오른쪽에는 화면을 나누는 듯한 배경을 설정하고 아이를 거느린 여자가 무기력한 상태를 보인다.

 

▲ <조난> 왼쪽 세부.

그림 왼쪽의 인물들도 몇 개의 무리로 나눌 수 있다. 화면 맨 안쪽에 폭발에 놀란 듯한 여러 사람이 보인다. 오른쪽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상태를 피해 달아나려는 사람도 보인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은 다쳐서 정신을 잃은 듯 보이는 여자를 부축하고 안전한 곳을 찾으려는 남자들이다. 그들의 왼쪽에는 아이들 여럿이 포함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왼쪽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 사람들은 폭발로 인해 다친 사람을 옮기거나,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나는 듯하다.

 

이쾌대의 작품 <조난>이 발표된 시기는 그해 6월 미군에 의한 독도 폭격 사건이 일어난 직후이다. 그래서 당시 박고석은 이 작품을 보고 “독도사건의 약소민족의 비애를 민족적인 충동에서 관심한” 작품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쾌대는 독도사건을 소재로 르포타쥬나 현실고발을 하지 않았다. 독도 사건은 바다를 배경으로 한 것이지만 화면의 어디에도 바다나 배 같은 소도구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그림에서의 사태를 어디에선가 벌어진 일로 연출하였다. 직접 사건을 그려서 즉자적으로 알게 하면 당시의 시대 상황상, 반발을 부를 수도 있다고 여겼던 것이 아닐까?

 

이쾌대는 이 사건이 일어난 배경에 관심을 두고 암시 내지는 은유하고자 하였다.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가 어떤 상태에 놓여있으며,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쾌대가 만든 정황은 육지에서 어떤 폭발로 혼란이 일어나지만,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이 이를 해결할 것이라는 듯이 말한다. 이 그림 전체를 관통하는 이야기는 정체 모를 어떤 폭발에 죽거나 다치거나 놀란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안전한 곳으로 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현실의 고발, 르포르타주가 아니라 명백히 일종의 은유에 해당하는 그림이다. 낭만주의 시대 대표화가 제리코가 당시 일어난 사건을 소재로 <메두사호의 뗏목>을 그려 참상을 전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하는 견해는 재고되어야 한다. 들라크르와의 대표작 <자유의 여신>과 견주는 견해 또한, 화풍은 유사하나 작의는 다른 것이라는 점에서 재고해야 한다.

 

▲ 폴 고갱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nbsp;1897년, 천에 유채, 375x139센티미터, 보스턴 미술관 소장.

그보다는 오히려, 제리코나 들라크르와 보다 훨씬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렘브란트의 <야경꾼들>에 나타나는 방향성과 연관해보거나, 폴 고갱이 그의 만년작이자 전지구적이라 할 순례를 거쳐 이룬 작품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 (1897년, 천에 유채, 375x139센티미터, 보스턴 미술관 소장)에 견주는 편이 낫다.

 

이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조난>은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다고 본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

 

[출처] 뉴스아트 (http://www.news-art.co.kr)

며칠 전 정동지 따라 한국스마트협동조합에 갔다.

예술인 지원금 타는 일 도움받으러 갔는데, 최석태씨도 왔더라.

 

지원금 신청은 서인형이사장이 처리해 주었는데,

얼마나 과정이 복잡한지 성질 급한 놈은 받지도 않겠더라.

주기 위해 지원금을 만든 것이 아니라, 안 주려고 만든 것 같더라.

고맙게도, 담당자 전화까지 알아내어 묻고 물어 처리해 주었다.

이 보리흉년에 백만원이 어디냐?

 

일이 끝나고 나니 뉴스아트편집회의를 한다지만,

편집회의가 아니라 고정 필진으로 참여해 달라는 이야기였다.

서인형이사장과 이명신 편집장, 최석태, 정영신씨가 둘러앉았는데,

최석태씨가 여러 가지 자문을 해 주었다.

 

최석태씨는 '한국근대미술사를 연재해주기로 했고

정영신씨는 '정영신의 시간자르기'를 연재하기로 했다.

, '전시리뷰'를 부탁받았다.

 

이틀 뒤에는 뭔 일인지도 모른 채, 응일식당에 따라 갔더니

서인형 이사장과 장경호씨가 한 잔하고 있었다.

아마 장경호씨도 원고청탁을 받은 것 같더라.

 

그런데, 원고 마감일도 모른 채 늦장 부리다,

찍어 둔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이미 아트뉴스가 나와버렸네.

 

스마트 협동조합의 인터넷신문 '뉴스아트' (news-art.co.kr)

많은 예술가들의 애정 어린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예술 활동에 필요한 다양한 정보를 공유하며,

예술가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언론으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진, / 조문호

 

 

지난 주말은 뜻밖에 손님이 찿아 와 모처럼 인사동의 봄을 즐겼다.

마산 사는 후배 변형주씨와 인사동과 녹번동,

동자동 쪽방촌을 두루 돌아다니며 봄날의 회우를 기념했다.

 

지난 3일, 동자동에서 늦은 아침 밥을 준비하는 중에

유목민 전활철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엊저녁에 변형주씨가 왔는데, 함께 점심이나 먹자고 한다.

손님 접대에는 대마불사주가 좋을 것 같아 녹번동 가자고 했다.

 

정영신씨는 지방 촬영을 떠나버려,

인사동 '유목민'부터 들려 김치찌개 한 냄비 끓여 가지고 간 것이다.

녹번동 좁은 탁자에 술상을 차려놓고

기억에도 가물거리는 옛이야기로 추억을 더듬었다.

 

변형주씨는 40대가 어저께 같은데, 벌써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라고 한탄한다.

정말, 나이가 들수록 어찌나 세월이 빠른지, 총알 같다.

 

말년을 자연과 함께 지내려고 지리산에 집 지을 준비 한다"는 소식도 주었다.

지리산 집들이 가서 한 번 취할 꿈도 꾸어보았다.

얼마 남지 않은 술병의 바닥을 보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다들 밥 먹는 것을 잊어버렸다. 치매환자들인가?

 

전활철씨는 영천시장 장 보러 가는 틈에, 둘이서 동자동 간 것이다.

숨 막히는 좁은 공간이지만, 그곳만큼은 흡연구역이 아니던가?

얼마나 줄담배를 피웠는지, 담배 연기에 질식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한때 변형주씨를 인사동 골목대장으로 부르기도 했으나, 그는 괴물로 통한다.

그 괴물의 실체를 찍은 오래전 사진을 찾아 본 것이다.

컴퓨터에 저장된 10년 전 사진을 보여주었더니, 엄청 반가워했다.

인사동에서 찍은 변형주씨 알몸사진은 실제 크기로 뽑았으나

정선 작업실 화재 때 타버려 원본 이미지를 보여준 것이다.

 

쪽방에서 인사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유목민’에 들려 부족한 술부터 보충하고 싶었으나,

술시가 일러 인사동 돌아다니며 봄바람 맞은 것이다.

 

주말이라 그런지 나들이객들이 많았는데,

북인사마당’엔 부채춤이 봄꽃처럼 피었더라.

 

오랜만에 괴짜 고 헌씨를 거리에서 만나기도 했다.

젊은 시절엔 가로등만 찍는 사진가였으나,

이젠 사진과 작별했는지 카메라 잡은 것 본 지 오래되었다.

 

버스킹에 나선 인사동 단골 뮤지션들의 연주도 각양각색이었다.

一心을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글은 변형주씨가 샀다.

 

인사아트프라자에 들려, 제주4.3과 여순사건을 묶은 동백이 피엄수다도 보았다.

외세에 의한 동족 살상의 끔찍한 사건을 떠 올리며 치를 떨었다.

 

인사동 수도약국앞에서 변형주씨 아들 변도영군을 만났다.

본 지가 오래되어 낯설었으나, 붕어빵 같은 모습은 여전했다.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며, 다시 음악에 매진할 것이라 했다.

 

다 같이 유목민으로 갔더니, 그때사 준비가 끝났는지 문을 열어 놓았다.

부자간 대작하도록 남겨두고, 급히 다녀올 곳이 생겼다.

 

사진을 빨리 보내 달라는 복에 없는 원고청탁에 바쁜 걸음 쳐야 했다.

두 시간이나 걸려서야 돌아왔더니, ‘유목민은 이미 흥청댔다.

 

한쪽에는 장경호, 최석태, 김이하씨 일행이 술판을 벌였고

윗쪽에는 신단수, 장홍순씨 일행이 자리 잡고 있었다.

 

대전에서 돌아온 정 동지도 합류하게 되었는데,

이 자리 저 자리 끼어 앉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 날 따라 전활철씨 더러 노래 한곡 하라며 장경호씨가

만원짜리 지폐 한 장을 기타에 꽂아 주기도 했다.

 

전활철씨 노래와 기타 솜씨야 익히 알지만,

록과 부루스가 주특기인 도영이 기타연주도 들을 수 있었다.

 

처음 들어 본 도영이 연주솜씨가 보통은 아니었다.

곡은 잘 모르겠으나, 슬픔과 한이 배어있는 부루스였다

 

장음계에서 3도움과 7도움을 반음 낮춰 연주하는 블루스가

약간 늘어지는 박자이긴 하지만,

불루스 특유의 슬픔과 한이 잘 배어 났다.

잔잔한 애드립 여운이 촉촉이 적셔주는 멋진 연주였다.

 

정동지는 벌써 무더울 여름 걱정부터 하고 있었다.

올여름엔 꼭 에어컨을 살 것이라며, 나더러 말리지 말란다.

돈도 돈이지만, 그 비좁은 집에 어디다 놓을 것인지 모르겠다.

신단수와 최석태씨까지 나서서 에어컨 살것을 부추기며, 극빈자 모금까지 하겠단다.

 

끝날 시간이 되었는지 한 사람 두 사람 물러나기 시작했다.

언제 왔는지, 안 쪽에 있던 '학고재' 우찬규씨가 우리 자리 술값까지 계산해 버렸다.

더 마실 형편도 되지 않는데, 잘 모르는 화가 한 분은 골든 벨을 누르겠다고 큰 소리다.

변형주씨는 술이 취해 몸을 가누지 못했다.

도영이 부축을 받아 여관 가는 걸 보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틈만 나면 인사동 노래를 부르지만, 결국은 사람이었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야 인사동이 인사동 다워 지는 것이다.

 

사진, / 조문호

 

 

지난 주말엔 아무런 계획도 없이 무작정 인사동에 나갔다.

한산했던 인사동 거리가 주말이라 그런지 제법 많은 사람이 나왔더라.

 

술 마시기는 좀 이른 것 같아 '나무화랑'부터 올라갔다.

전시장엔 용해숙씨의 '유토피아 삼경'이 열리고 있었는데,

작가를 비롯하여 최석태, 김구, 김이하 시인등 여러명이 있었다.

 

전시는 특정 장소를 입체 거울을 통해 재구성한 사진전인데,

일곱 개의 삼각 피라미드로 구성된 입체 거울이 전시장 한 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보기로는 거울 같지만, 잘 가공된 스테인리스였다.

 

가로 3m,·세로 1m의 대형 설치물이라 전시장에 올릴 때 고생했겠더라.

전시하는 사진이 각진 거울의 반사를 통해 태어났으니, 설치물 자체가 작품의 모태인 셈이다.

 

작가는 최석태씨에게 작업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었으나,

귀가 어두워 무슨 말인지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거울에 반사된 다각도의 이미지가 장소의 고유성을 허문다는 것 같았다.

 

작가 용해숙씨를 처음 보았는데, 대단한 열정을 가진 여장부란 생각이 들었다.

그 끝이 어디로 향할지는 모르지만, 주목해 볼 작가로 생각되었다.

 

법당 단청을 거울에 반영시켜 유토피아가 존재하는 공간으로 재구성했는데,

공간을 바라보는 인간 중심적 관점을 다시 생각해보자는 이야기 같았다.

 

거울에 비친 허상으로 기록의 매개인 사진마저 무위라는 걸까?

사진이 폭 넓게 활용되며 사진 본연의 목적에서 점차 멀어 간다는 씁씁한 생각을 하며 내려왔다.

 

벽치기 골목의 ‘유목민’은 초저녁인데도 손님이 많아 앉을 자리가 없었다.

좀 쌀쌀했지만, 담배 피우기 좋은 골목에 상을 차렸다.

 

안쪽에서 마시던 김태영, 이승철 시인, 전상기 문학평론가 등

몇몇 분들이 담배 피우러 나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최석태, 김구, 김이하씨도 전시장에서 왔으나 자리가 없어 ‘사랑채’로 간다고 했다.

그런데, 김태영씨가 ‘이즈’에서 그림전시를 한다는 소식을 주었다.

시간이 늦어 볼 수는 없었으나, 전시 리프렛과 새로 펴낸 시집

‘버드나무 버드나무 흰 그림자’ 한 권을 선물 받았다.

 

그 자리에서 시집은 읽을 수 없었으나, 리프렛에 실린 그림은 볼수 있었다.

그림에 환영어린 몸짓 같은 것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흐릿한 붓질에서 인간의 불안감이나 삶에 대한 허무감 같은 것도 고개 내밀었다.

 

그 날은 ‘유목민’과 ‘사랑채’를 넘나들며 마실 수밖에 없었는데,

뒤늦게는 '사랑채'에 안원규씨와 우문명씨도 나타났다.

여기저기 옮겨가며 마셔 그런지 주량을 한참 초과해 버렸다.

 

필름이 끊겨 어떻게 돌아 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카메라에 찍힌 사진을 보며 그 날 방기식씨가 있었다는 것도 알았다.

그 와중에 선물 받은 김태영씨 시집을 흘리지 않은 게 신통했다.

 

속은 쓰렸지만, 화장실에 들어가 시집부터 읽었다.

김태영씨 그림과 시의 연관성이 궁금했는데, 공통점이 보였다.

 

 

첫장에 실린 ‘만종’이란 제목의 시는 이러했다.

 

“묻지도 않고

스포츠로 민 머리

손수 감겨주고

뽀드득,

물기를 훔친다.“

 

‘잠꼬대’란 시는 더 난해했다.

“비단길 흰 허벅살 한 입의 사과즙”

 

‘즉물성의 감각, 즉물성의 형이상학’이란 제목의 발문을 쓴 문학평론가 전상기씨는 김태영시의 불친절함을 이렇게 말했다. “김춘수의 무의미시나 전봉건의 초현실주의시, 아니면 김종삼의 음악을 들으면서 떠오르는 감흥을 시화한 방식에 견준다면 어떨까. 예의 없고 불친절하며 뜬금없기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이 시를 보노라면 김태영의 시가 어떨지 감이 올 것이라“ 했다. 그리고 ‘그의 시는 시적 화자의 시작 당시의 생각과 감성을 드러내는데 집중한다고 했다. 즉흥성과 즉물성의 감각을 이미지화하는 것, 다시 말하면 거기에 집중하는 미세하고 예리한 감각의 움직임을 포착해내는 것이 김태영의 시작 목표라고 적고 있다.

 

시어가 잠꼬대 같기도 하고, 아니면 단어를 나열시킨 무슨 암호 같았다.

김태영의 시는 세심한 독해력이 요구되었다,

 

‘고아’

 

​엄마는 어쩌자고

뻐꾸기 둥지였을까

나는 삐뚤빼뚤

도대체 천사는

언제까지나 유구할까

 

임동확 시인은 김태영의 시집에 ‘모순과 소퉁의 시학’이라는 추천사를 썼고,

홍일선 시인은 “천길 나락 ‘절벽’ 속에 피워낸 만다라 시편”이라는 글을 썼다.

요즘 작품들은 너무 난해하다.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 '갤러리 모나리자 산촌'에서 박재동 시사만평 ‘한 판 붙자’전이 열리고 있다.

 

전시된 작품은 경기신문 ‘’박재동의 손바닥 아트’에 연재한

120여점을 모아 놓았는데,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때로는 오늘의 정치형태에 분통을 터트리기도 했지만,

촌철살인적 만평에서는 입가에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전시가 열리는 ‘갤러리 산촌’은 사찰전문 음식점에서 만든 미술관이다.

엄길수 관장은 "관람객들에게 공정과 상식의 의미와 올바른 시대정신을 보여주고 싶었고,,

시사만평을 통해 대선판을 보는데 도움이 될 수 있겠다 싶어 기획했단다.

 

"한판 붙자“는 제목처럼 전투적 성격도 보였다.

지금 대선을 눈앞에 두고 촛불정신과 기득권 카르텔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지 않는가?

박화백은 ‘세상이 바로 가기 위한 길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의 장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렇다.

그 지긋지긋한 군인정치에서 어떻게 빠져 나왔는데, 다시 검찰공화국으로 가려한단 말인가?

 

민주화와 정의를 열망했던 시민이라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미워도 다시 한 번..."

 

시사만평에 자주 등장하는 사람은 문제의 윤석렬과 김건희였다.

‘정권 잡으면 가만 안 둘꺼야’라는 그림은 두렵기까지 했다.

인터넷에서 보아 온 그림도 많았으나 보고 또 보았다.

 

다른 전시장에 비해 관람객도 많았지만,

박재동화백을 비롯하여 최석태, 김이하, 노광래씨 등, 아는 분도 여럿 만났다.

 

전시는 26일까지 열린다. 작품을 구매하는 관람객에게 인물 스케치를 증정한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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