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강민선생님이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에 정영신씨와 '분당 서울대학교병원'으로 문병 갔다.

병원 휴게실에는 달마선생 내외 분과 정승재교수, 서정란씨 등 여러 명의 문인들이 먼저 와 계셨다.

소설가 김승환선생은 먼저 다녀가셨고, 맹문제교수도 오실 것이라고 했다.






어디가 편찮은지 궁금해 “선생님 병명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더니, 상사병이라고 대답하셨다.

다들 웃기에 먼저가신 사모님이 그리워 생긴 우울증 쯤으로 가볍게 여겼는데,

선생님 몰래 전해준 서정란씨의 이야기로는 심각한 상태라고 했다.

암이 곳곳에 전이되어 병원에서 손을 쓸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





의사선생으로부터 처음 검사결과를 들었을 때는 선생님께서도 당황하셨으나, 모든 걸 내려놓았는지 여유롭게 웃으셨다.

더 가슴 아픈 것은 오래 전 입원하셨을 때, 병의 위중함을 아셨으나 병원비가 없어 치료를 받지 않고 방치해 둔 것이다.

그 끔찍한 고통을 혼자 감수하며 틈틈이 인사동에 나와 주변사람들을 걱정하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팠다.

무슨 말로 위안 드려야 할지 막막했으나, 내일이면 호스피스병원으로 옮긴다니 눈앞이 더 캄캄했다.






늦게 오실 분을 맞으려면 피곤하실 것 같아 병실 침대에 눕는 것을 보고 돌아왔는데, 이제 인사동도 끝장이란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한 번은 떠나야 할 길이지만, 불 꺼진 인사동을 생각하니 한 숨이 절로 나왔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으나, 선생처럼 온 몸으로 사랑하신 분은 없었다.

터줏대감이며 친구였던 심우성선생도 떠나시고, 이제 선생님까지 떠나신다면 누가 인사동을 지킬 것이란 말인가?






강민 선생의 시 ‘인사동 아리랑2’ 황혼 편을 다시 읽어보자.

“붐비는 인파 속에도
내가 찾는 이는 없다
오늘도 인사동 걷기는 허전하다
추억처럼 불빛이 켜지고 있다
열이 오르며 목이 마르다
잃어버린 불모의 사랑이 허공을 맴 돈다
어딘가 전화라도 걸까
눈시울만 시큰할 뿐
휴대전화를 만지는 손가락은 뻣뻣이 움직이지 않는다
종로 쪽 멀리 남산이 다가오고
차츰 어둠의 장막도 깔린다.
나 이제 또 어디론가 돌아가야 하리
그이의 아지트였던 찻집<보리수>도 없어졌다
진공의 거리
어디선가 그리운 이들 목소리 들리는 것 같다
돌아가리
돌아가리
그런데 이 끝없는 외로움은 무엇인가
풀리지 않는 눈물의 의미와 그리움은 무엇인가
기다리고 있을 밤의 공동(空洞)이 두렵다“





외로움과 그리움이 절절한 선생님의 시에 눈물이 절로 난다.





인사동으로 돌아와 약속한 공윤희씨를 만났다.
시간이 맞지 않아 함께 병문안드리지 못함을 애석해 하며,‘메밀란’으로 갔다.
그 자리는 ‘산타페’가 있던 자리인데, 돌아가신 여운 화백의 아지트가 아니던가?






그리고 맞은 편 잡초만 무성한 ‘목인박물관’은 흑백현상소 ‘꽃나라’가 있던 자리다.
‘꽃나라’를 운영하던 신작가도 여운화백도 다 떠나버린 인사동이 더욱 낯설기만하다.






다행스럽게 찻집 ‘초당’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초당보살 또한 건강이 좋지 않아 늦게 나오고 일찍 들어간다고 했다.
그렇게 한 사람 두 사람 떠나가고, 나 또한 떠나가리라.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주말 파주 유적지 촬영을 떠난다는 정영신씨의 호출이 떨어졌다.
구체적인 갈 곳은 그녀만 알아, 네비의 안내만 따를 뿐이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곳은 용암사의 용미리마애불 입상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제일 먼저 광탄면 용미리로 안내했다.






그 날은 비가 부슬부슬 나리는 분위기 좋은 날씨였다.
다르게 생각하면 운신이 불편한 궂은 날씨일수도 있다.
아마 가기 싫은 곳을 억지로 갔거나, 기분이 나빴다면 후자였을 것이다.
그때 상황이나 생각에 따라 판단도 달라진다.






용미리 마애불입상은 거대한 자연암벽을 그대로 조각하였는데,
머리 부분을 따로 만들어 얹은 것이 아쉽지만. 규모에서 압도적이다.
위압적인 규모의 형태는 좋지만, 얼굴에 비해 몸체가 너무 커 기형적인 느낌도 있다.
오른쪽의 사각형 갓을 쓴 불상은 두 손을 가슴 위로 올려 합장하고 있으나
두 마애불상의 양식적 특징에서는 거의 비슷하다.






두 번째 안내하는 곳은 법원읍의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 묘역이 있는 ‘자운서원’이었다.
자운산자락에 두 분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자운서원’에는
묘정비, 신도비, 이이선생상, 신사임당상, 능원 등이 있는데,
율곡기념관의 많은 부분이 어머니이자 예술가로 재능 있는 삶을 살았던
신사임당과 관련한 유물로 채워져 있었다.






능원에서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은 대개 내외간의 무덤이 나란히 있는데 비해
제일 위에 이이 부인 노씨의 묘가 있고 그 아래 율곡 이이의 묘가 있었다.






대학자 율곡의 위업이야 거론할 필요가 없지만, 십만군사 양병설은 다시 생각케 했다.
젊은 시절에는 십만 군사만 양성하였다면 외적의 침략을 막아 달라졌을 것이라며
이이의 주장에 동조했으나 지금은 성호 이익의 반론이 더 옳다고 생각되었다.
십만군사 양성은 당시의 인구나 경제규모를 고려하면 무리였다.
만약 실행에 옮겼다면 살기 힘든 백성의 고혈을 얼마나 빨았겠는가?






나이에 따라 가치관이 달라지니, 세상이치에 답은 없는 것 같다.
더러 내 생각과 다른 것을 탓하기도 했으나, 다 부질없는 짓으로 생각되었다.






마지막으로 청백리로 알려진 황희정승 묘역을 찾았다.
문산 반구정로에 있는 황희선생 유적지는 갈매기를 벗삼아 말년을 보낸 반구정을 비롯하여
황희선생상, 방촌기념관, 월헌사, 방촌영당, 양지대, 등이 있다.
황희선생은 24년 동안 재상 직에 몸담으며 그 중 19년을 영의정으로 봉직했다.
팔순이 넘도록 관직을 지켰는데, 아무리 정치력이 뛰어났다지만 너무 오래한 것 아닌가?
나이가 들면 판단력도 떨어지지만, 후진들의 길을 막을 수도 있다.






정치인이나 의사, 법관들의 정년을 65세로 해야 한다고 페북에 올렸던 정승재교수의 말에 백 프로 공감한다.
정치판이 개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이 세대교체가 늦기 때문이다.






그리고 황희정승은 실록에 뇌물을 받았다고 거론된 것만도 열 차례나 되고
직책의 힘으로 비리를 무마시키거나, 역적으로 죽임 당한 박포의 아내와 통정을 한
사실도 있는데, 왜 청백리라 불렀을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젊었을 때는 청백리였으나, 나이가 들어 변한 것은 아닐까?






옛날부터 3대 거짓말로 처녀가 ‘시집 안 간다’는 말과
장사꾼이 ‘밑지고 판다’는 말, 그리고 노인이 ‘늙으면 죽어야지’라는 말을 꼽는다지만,
돌아오는 길에 스스로를 자책하며 “늙으면 죽어야지”를 곱씹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1일은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나는 셋째 수요일이다.

요즘 몸이 편치 않아 꼼짝도 싫지만, 안 나갈 수 없었다.

스스로의 약속이기도 하지만, 시인 강민선생과의 약속도 있기 때문이다.



지난 달 있었던 서울문화투데이문화대상 시상식 날,

강민선생을 비롯하여 이행자, 김승환, 방동규 선생등 원로 문인들께서 축하하러 오셨더라.

창피하여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아셨는지,

그 노구를 끌고 시상식장까지 찾아 오신 것이다.


 

그러나 주관처가 마련한 수상자들의 자리가 따로 있어,

점심 한 그릇 대접하지 못한 게 영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식사 대접 하는 날을 셋째 수요일로 잡은 것이다.


    

이제 인사동에도 자주 나오기가 힘들어, 나온김에 많은 분을 만나고 싶었으나 욕심이었다.

점심과 저녁 사이의 그 빈 시간을 혼자 보낼 일도 예사 일이 아닌지라,

정영신씨 노트북까지 빌려나왔다.


 

정오 무렵, 인사동 나주곰탕으로 갔더니,

강 민, 방동규, 김승환선생께서 먼저 와 계셨다.

옆자리에는 덕원스님과 최명철씨도 있었다.

반갑기 그지없는데다, 날씨마저 받쳐 주었다.

춘분인데도 인사동에 진눈깨비가 내린 것이다.



아직 오시지 않은 분이 계셨지만, 술 없이 앉을 여유가 없었다.

곰탕 건더기를 안주로 마시기 시작했는데, 그 첫잔의 술맛이 얼마나 달콤한지...

좀 있으니, 이행자, 장봉숙선생께서 온 몸에 눈을 잔뜩 뒤집어쓰고 들어오셨다.

그런데, 왜 내 눈에는 할머니로 보이지 않고 소녀로 보였을까?

행여 이 말도 미투에 걸리는 게 아닌지도 모르겠다.


 

백기완, 황석영 씨와 함께 조선의 3대 구라로 불리는 방동규 선생께서 첫 포문을 열었다.

따님 방그레양이 중국 대학교수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런 구라라면 확성기 들고 인사동거리에서 소리칠 기분좋은 뉴스였다.

첫딸인 방그레양은 그림을 잘 그리지만, 둘째 딸 방시레는 배추선생처럼 운동을 잘 했다.

방그레, 방시레란 예쁜 이름처럼, 둘 다 예쁘기도 하지만,

일찍부터 자식들 재능까지 알아보신 것 같았다.

그림 잘 그리는 그레, 운동 잘하는 시레로 지었으니 말이다.


 

이런 저런 배추선생의 재밋는 구라에 단번에 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선생님들 앞에서 헛소리도 지껄이며, 미친 망둥이처럼 부산을 떨어댔다.

인사동 눈 오는 풍경도 그냥은 찍기 싫었다.

옆자리에서 마시던 덕원스님과 최명철씨를 밖으로 끌어내어 사정없이 박아버렸다.


 

그런데, 장봉숙선생께서 다음 셋째 수요일은 자기가 밥을 사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동안 여러 차례 얻어 먹은적도 있으나, 다른 선생님보다 형편이 나으니 고맙게 받아들였다.

다음 달 역시 셋째 수요일로 잡는 것은, 셋째 수요일은 인사동 나가는 날로 못 박기 위해서다.

약속하여 만나는 것보다, 우연히 만나는 기쁨이 더 반갑다.


 

'나주곰탕'집에서 나와서는 장봉숙선생께서 커피를 쏘셨고,

강민선생께서는 정승재씨의 개인전이 열리는 토포하우스로 안내해 주셨다.

난 개인전이 열리는 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덕분에 좋은 전시를 볼 수 있었다.


 

정승재씨는 행정법률과 교수지만, 소설가로 더 잘 알려졌다.

그런데, 그림에도 남다른 면이 있어 작년에 이어 두 번째 개인전을 가진 것이다.

이번에 선보인 작품들은 평창올림픽 개최가 확정되며 그리기 시작한

질주하는 하나된 열정이란 주제의 동계올림픽과 관련된 스포츠 그림인데,

선수나 작가의 강인한 도전정신을 읽을 수 있었다.

오는 27일까지 열리니 인사동 가는 걸음에 꼭 한 번 보시기 바란다.


 

전시장에서 나왔으나, 난 갈 곳이 없었다.

그 때까지 유목민 문이 열리지 않아, 옆집 커피숍에서 노트북으로 페북 질이나 했는데,

얼마나 지루한지 인사동을 여러 차례 돌아다녔다.



 

이날은 급히 나오느라, 페북에 알리지도 못했지만,

눈이 내린 후 날씨가 추워진다는 일기예보 때문인지, 길거리에 사람이 없었다.

술도 못 마시는 화가 이종승씨만 서둘러 돌아가고 있었다.

기다린 시간이 아깝지만, ‘유목민에서 머뭇거리다 그냥 동자동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개인주의로 빠지는 야박한 세상이지만,

인사동을 드나드는 정든 예술가마저 그러지들 맙시다.

평소에는 관광객에게 인사동을 뺏기지만,

그 날만이라도 곳곳에서 반가운 사람들 만나는 날 만듭시다.

셋째 수요일 따뜻한 봄 날, 인사동서 신명 한 번 푸입시더.“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일하다 늦잠에 빠진 지난 6, 강민 선생님으로 부터 전화가 왔다.

오랜만에 얼굴 한 번 보자는 것이었다.

마침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리는 박병문씨 사진전도 있어 서둘렀다.

연휴를 맞은 인사동 거리는 봄비가 보슬보슬 내렸으나 사람들은 분주했다.

울긋불긋한 우산 행렬이 인사동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거리를 지나치다, 페친이라는 오현경씨의 반가운 인사도 받았다.

요즘 전시장이나 거리에서 페친이라며 반기는 분들을 자주 만난다.

늙은 주제에 오현경씨 같은 미인을 친구로 두고 있으니, 늦복이 터진 것이다.


꼽꼽하게 비가 내려 술 땡기는 날씨라, 술 한 잔 같이 하고 싶어도 쑥스러워 말 못했다.

아마 술을 마셨더라면, 그녀의 소매 자락을 부여잡았을 텐데 말이다.

난 어떻게, 술 마셨을 때와 술 마시지 않았을 때가 이렇게 180도로 다른지 모르겠다.

 

혼자 쓴 웃음 지어며, 강민 선생님과의 약소장소인 인사동 사람들에 갔더니,

정승재씨도 와 있었다술집 문이 열리지 않아 커피로 시간 죽이고 계셨다.

뒤늦게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그때까지 문은 잠겨있었다.

주인장 전활철씨에게 전화해 자리에 앉았더니, 노광래씨도 왔고 이수호선생도 오셨다.

 

그런데, 강 민선생께서는 막걸리를 따뜻하게 데워 드신다.

난 따뜻한 술은 빨리 취해 좋아하진 않지만, 전시 뒤풀이에 가면 또 마실일이 있었다.

딱 두 잔만 마셨는데도, 얼큰하게 취기가 올랐다.


때 마침 스피커에서 박인수의 봄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절규하듯 부르는 노래가 마음을 슬슬 건드려 나를 슬프게 했다.

나를 울려주는 봄비가 아니라, 나를 죽여주는 봄비로 들렸다.

 

사진, / 조문호

 

  




























장기간 장터 전시를 하는 우리 내외를 위해 강민선생님께서 오찬자리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지난 11일 정오 무렵 인사동 ‘여자만’에서 강 민선생님을 비롯하여 심우성, 신경림, 신봉승 선생님, 소설가 정승재교수, 그리고 정선군청에서 평창올림픽준비로 서울로 올라와  근무하는 유성근서기관, 수원에 계신 강송림 시인과 장봉숙 선생이 함께 한 자리였습니다.

식사가 끝날 무렵 즉석에서 화선지에 신년덕담을 담아주신 신봉승, 신경림, 강민선생님의 후배를 대하시는 모습에서 훈훈한 정을 느끼게 하는 소중한 시간이었지요.

우리 부부를 위해 자리를 만들어주신 강 민선생님, 그리고 오찬비용을 부담해 주신 강송림시인과 장봉숙선생님께 감사인사 드립니다.

사진,글 / 정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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