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9일 오후6시 무렵, 인사동 센터마크호텔 지하 ‘경복궁’으로
60여명의 인사동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인사동에서 칠백평이 넘는 전관을 갤러리로 운영하다 망한,
‘아라아트’ 김명성씨가 재기의 깃발을 들고 입성한 것이다.





부도가 나 ‘아라아트’가 중국기업에 넘어갈 때, 가슴을 친 사람은
당사자 뿐 만 아니라, 인사동의 가난한 예술가들도 많았다.






몇 년 동안 무료대관으로 전시를 연 작가도 부지기 수지만,
‘창예헌’이란 인사동 사람들의 모임을 김명성씨가 후원했기 때문이다.
인사동에서 그를 만나게 되면 빈 털털이도 마음껏 취할 수 있었다.






그의 몰락과 함께 모임도 흐지부지해 인사동의 구심점을 잃어 갔는데,
느닷없이 옛 벗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은 것이다.






그 명목은 청백리 이 성 구로구청장의 삼선을 축하하고,
현충일 추념식에서 ‘늙은 군인의 노래’를 불러 건재함을 과시했던,
가수 최백호씨가 내세우는 孝사상의 효교 모임을 만든다는
쌍권총을 들고 입성한 것이다.






이 날 참석한 분으로는 인사동을 노래하는 강민시인을 비롯하여,
방배추로 통하는 조선의 구라 방동규선생, 원로 만화가 박기정선생,
원로 언론인 임재경선생, 이수호, 박재동, 조경석, 정기범, 강찬모, 신상철,
이미례, 진옥섭, 이 성, 최백호, 김신용, 조해인, 이만주, 김상현, 조준영, 이청조,
임채욱, 정영신, 허미자, 임태종, 공윤희, 송일봉, 김혜련, 최유진, 서길헌, 최 윤,
고중록, 이상훈, 김용국, 전인미씨 등 오랜만에 반가운 분들이 어울려,
완전 잔치 집 분위기였다.






그런데, 전주로 간 음유시인 송상욱씨와 도예가 한봉림씨도 나타났고,
울산에서 황금기와로 유명세를 떨친 기와장 오세필씨가 김위경씨를
데려 오는 등 지방에서까지 올라오는 열성을 보였다.
그리고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못오게 된 가수 장사익씨는
그 날 만찬비용을 부담하겠다는 등, 다들 김명성씨의 재기를 축하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빠진 분이 너무 많았다.
사정이 있어 못 나왔으면 모르겠으나, 미처 연락을 못 했다면 욕먹을 소지가 있었다.
예전에는 ‘창예헌’ 총무가 일괄적으로 통보해 별 탈이 없었지만
김명성씨가 직접 연락했다면, 구설수에 오를 수도 있다.






아무튼. 별다른 행사 없이 술 마시며 회포 푸는 자리로는 너무 과분했다.
덕분에 맛있는 음식에다 코가 비틀어지도록 마시고,
‘유목민’으로 옮겨 밤늦도록 흥청댔지만, 뭔가 아쉬웠다.






술이 취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남은 음식을 바리바리 싸들고 쪽방으로 향하는 내 모습이 한심스러웠다.
거지 행색이 아니라, 바로 거지였다.



 



그래도 인사동이 맺어 준 인연은 아름다웠다.

사진,글 / 조문호



































































정월 초하루, 제사상 물리기가 무섭게 호출이 왔다.
독거노인 대표주자 장경호화백이 연출한 번개팅이란다.
감기 걸려 빌빌하지만, 독거 서러움 다독이려 찾아 나섰다.

설 날, 이른 시간이라 ‘유목민’ 문이 열릴까 싶었는데,
전활철씨 안사람이 친정가, 그 역시 독거라 가능하단다.

닫힌 대문을 살짝 밀어보니, 불 꺼진 술집에 노광래, 장경호, 전활철씨만 있었다.
이미 빈 술병들이 더러 보였고, 난 몸이 정상이 아니라 대번 기별이 왔다.
느닷없이 백발의 여인이 나타났다 사라지더니, 공윤희씨와 채현국선생께서 나타났다,

그리고 임재경선생이 오셨다 가시더니, 뒤늦게는 신학철선생까지 등장하셨다.
무슨 연극무대 배우 들락거리듯, 출연진들이 속속 뒤 따랐다.


술이 취하기 시작하니 목소리도 커지기 시작했다.
정치나 비평 같은 씨잘데 없는 소리는 나오지 않지만,
괜한 딴지가 딴지를 걸고, 울분이 분노를 토해낸다.
이미 고개 숙인 전사자도 속출하기 시작했다.
그 때쯤이면 어김없이 전활철씨의 기타반주와 노래가 시작된다.

“언젠가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달 밝은 밤이면 창가에 흐르는
내 젊은 연가가 구슬퍼“


"가고 없는 날들을 잡으려 잡으려
빈 손짓에 슬퍼지면
차라리 보내야지 돌아서야지
그렇게 세월은 가는거야"


‘살울림’의 ‘청춘’에 왠지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이미 세상을 떠나간 적음, 강용대, 김종구 이야기 끝자락이라,
그리움인지, 회한의 추억인지,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인사동 ‘실비집’에서 시작된, 우리들의 낭만은 아린 사연이 많다.
30여년의 세월을 방황하다, 이제 끝자락에 머문 것이다.
모두들 인사동의 마지막 해방구라 아쉬워 하지만,

진 꽃잎 따라 지듯, 또 다시 누군가는 피우겠지...

사진, 글 / 조문호

 

 

 

 

 


 


 

 

 

 

 

 

 


 

 

 

 

 

 

 

 

 





원로 언론인 임재경 선생의 팔순을 기념하는 “펜으로 길을 찾다” 회고록 출판기념회가

지난 2일 오후6시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많은 축하객들이 참가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다.
그 자리에는 백기완, 백낙청, 신경림, 채현국, 황명걸씨 등, 장 안에 내 노라 하는 문객들이 다 모였다.

임재경선생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책벌레’라며 신경림시인과 백낙청선생이 입을 모았다.

함세웅 신부는 가족들의 말을 빌려 고집불통이라고도 하셨다. 절대 불의에 양보하지 않는다 했고,

이부영 전 의원은 "임 선배는 어느 자리에 가도 자기가 있다는 것을 내보이지 않는다"며

"많은 일들의 아교 같은 노릇을 한다"라고 말했다. 다양한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그리고 박재동화백은 선생의 선물로 초상화를 그려왔는데,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 혼쭐났다며,

왜 그리 개성 없이 못 생겼냐며 농담까지 하셨다.

많은 분들이 나와 축하의 말씀을 주셨지만, 중요한 것은 아직도 선생은 청춘의 피가 끓고 있다는 것이다.

단상에 올라 짱짱한 목소리로 “이 목 타는 세상, 회갑잔치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면서

지금의 남북 상태를 끝장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셨다.

사진,글 / 조문호




-창비-






















임재경 전 <한겨레> 부사장, 회고록 <펜으로 길을 찾다> 출판 기념회


 임재경 전 <한겨레> 부사장의 회고록 <펜으로 길을 찾다> 출간기념회.
ⓒ 한정희



언론인이자 작가인 고종석씨는 자신의 책 <말들의 풍경>(2007년)에서 "초년기자 시절을 들뜨게 한 역할 모델"이었던 임재경(80) 전 <한겨레> 부사장을 '마지막 지식인 기자'라고 불렀다.

"그런데 기자는 지식인일까? 드레퓌스 사건 때 군부와 국가주의자들에 맞서 드레퓌스를 옹호한 사람-우익분자들이 경멸의 의미를 담아 '지식인'이라고 불렀던 사람들-가운데 신문기자가 여럿 있었다. 나중에 총리가 된 조르주 클레망소가 대표적 예다. 그런데 외국에서고 한국에서고, 이런 의미의 지식인-자신과 이해관계가 없는 일에 참견하는 사람-은 기자사회에서 거의 사라진 듯하다. 한국의 경우, 임재경 아래 세대로서 그런 의미의 지식인 노릇을 하는 기자는 곧바로 떠올리기 어렵다. 그렇다면 임재경을, 그 세대의 몇몇 다른 기자들과 함께, 마지막 지식인 기자라 불러도 되겠다."(230쪽)

사실 임 전 부사장은 송건호(<한겨레> 초대 사장)나 리영희(한양대 교수)처럼 '스타 언론인'은 아니었다. 고종석씨는 그 이유를 그의 관심 분야가 '경제'와 '국제문제'였다는 사실에서 찾았다. 그런데 그가 '마지막 지식인 기자'로 불렸던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프랑스어와 독일어에 능통한 '공부하는 기자'였을 뿐만 아니라 자유언론운동와 민주화운동에 깊이 참여한 그의 삶이 있어서다.  

"보편적 커뮤니케이터의 길을 택했다"

올해 팔순을 맞은 임 전 부사장은 1936년 5월 지금은 북한땅인 강원도 김화에서 3형제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초등학생이었던 10살에 해방을 맞이했고,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가족과 함께 서울로 내려왔다. 그는 군산고등학교 시절부터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공부했다. 그는 최근 펴낸 회고록 <펜으로 길을 찾다>(창비)에서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아무튼 그 시기 군산에서 프랑스어를 배운 것은 내 일생 최대의 허영심이라 하면 어떨지 모르겠다. 먹물들은 이런 경우를 대개 '지적 호기심'이라고 표현하지만 그게 그거다. 불가(佛家(불가)에서는 안 통할 말이겠으나 인간의 허영심을 반드시 나쁘다고 말할 수만은 없지 않을까."(192쪽)

임 전 부사장은 원래 소설을 쓰는 작가를 꿈꾸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반대로 그 꿈을 접어야 했다. 어머니는 소설에 심취한 그에게 "너는 글재주가 없으니 소설가 같은 건 꿈도 꾸지 마라"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정은 그가 서울대 불문학과가 아닌 영문학과에 입학해야 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임 전 부사장은 대학을 졸업하고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1961년 <조선일보>에 입사하면서 언론인의 길을 시작했다. 입사한 지 1년 만에 사회부에서 경제부로 옮긴 그는 취재기자 경력의 대부분을 경제담당으로 채웠다. 1980년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연루돼 <한국일보>에서 물러날 때도 그의 직책은 경제담당 논설위원이었다. 고종석씨는 이러한 그의 경력을 상당히 흥미롭게 분석했다.

"경제저널리스트로서 젊은 독자들에게 폭발적 반응을 불러일으킨 이는 근년에 타계한 정운영이 있지만, 그것은 정운영 특유의 화사하고 곡선적이며 사적인 문체에 힘입은 것이었다. 임재경에게는 그런 화사하고 곡선적이며 사적인 문체는 없었다. 아주 드물게 성찰적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아이러니나 유머를 끼워 넣기도 하지만, 임재경의 문체는 대체로 털털하고 정통적이다.

임재경이 제기하는 문제의 진지함에는 그런 정통적 문체가 더 어울리기도 했을 것이다. 그는 그런 밋밋한 정통적 문체로 삶의 현장과 텍스트의 이 구석 저 모퉁이를 짚어나가며, 그리고 철저하게 객관적 수치에 바탕을 두고, 한국의 경제정의의 문제를 따졌다. 그의 글이 선동이 아니라 설명과 설득이 된 것은 그런 표준 문체 덕분이기도 했다. 임재경은 스타일리스트가 되기를 마다하고 보편적 커뮤니케이터가 되는 길을 택했다."(<말들의 풍경>, 228쪽)

임 전 부사장은 경제부 기자 시절에도 책방이나 도서관에 들러 폴 사무엘슨(Paul Samuelson)과 케인즈(J.M. Keynes)와 슘페터(J.A. Shumpeter)의 저서를 원서나 일본어 번역본으로 읽고, 모리스 도브(Mauice Dobb)와 폴 바란(Paul M. Baran), 폴 스위지(Paul Sweezy) 등 좌파경제이론가나 경제사가들의 저서들을 탐독했다.

임 전 부사장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60년대 초중반에는 경제를 대상으로 하는 보도.해설.논평은 표피에서 겉돌 뿐 아니라 현상을 파면화하여 단발로 처리하고 있었다"라며 "이런 풍조에서나마 기자들의 분석 능력을 더 함양하면 한꺼풀 뒤에 숨은 알맹이에 다가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열심히 책을 읽었다"고 회고했다.  


 회고록 <펜으로 길을 찾다>를 펴낸 임재경 전 <한겨레> 부사장.
ⓒ 구영식



그의 자유언론운동은 민주화운동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1969년) 이후 권력의 언론 간섭은 더욱 심해졌다. 리영희는 중앙정보부(중정)의 압력으로 외신부장 자리에서 물러났다가 아예 <조선일보>를 떠났고, 남재희(전 노동부 장관)도 정치부장에서 논설위원으로 밀려났다.

잡지 <청맥>의 편집인을 지낸 김상기는 중정에 끌려갔다가 결국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런 상황에서 임 전 부사장도 프랑스로 떠났다. 파리1대학에서 알베르 소불(Albert Marius Soboul) 교수의 프랑스혁명사 강의를 들었고, <르 몽드>에서 한 달간 일했다.

임 전 부사장이 프랑스에서 돌아온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은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유신체제'(제4공화국)를 수립했다. 그는 1년 뒤인 1973년 <대한일보>로 옮겼지만, 두 달 만에 폐간됐다. 이후 1974년부터 <한국일보>에 들어가 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1970년대 중반 어느날 <민족경제론>의 저자인 박현채(전 조선대 교수)가 "임형은 재주가 메주인갑네... 다 목이 잘리는데도 잘도 견디니 말이여"라는 뼈있는 농담을 던졌다. '재주가 메주다'는 재주라고 할 만한 게 없거나 재주가 형편없다는 뜻이다.

결국 임 전 부사장은 유신헌법을 비판한 '민주회복국민선언'에 참여했고(1974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자유언론투쟁('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을 적극 지지.지원했다(1974년과 1975년). <조선일보>에서 기자들을 대량으로 해고하고 있을 때 정치부 차장인 이종구에게 전화를 걸어 "너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라고 항의하기도 했다. 1980년에는 전두환 등 신군부를 비판하는 '지식인 134명 시국선언'에 참여했고, 결국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연루돼 <한국일보>에서 해고된 뒤 투옥됐다.

미국 하버드대학 부설 국제문제연구센터에서 공부하다 귀국해 민주언론운동협의회(현 민주언론시민연합의 전신)의 결성에 참여했고(1984년),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의 공동대표를 지냈다(1987년). 특히 1988년에는 <한겨레> 창간에 참여해 초대 편집인 겸 논설주간, 초대 부사장, 논설고문 등을 지냈다. 그는 <한겨레> 창간을 두고 "내 삶의 절정이었다"라고 회고했다. 그가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 등에서 벌인 자유언론운동은 '언론민주화운동'이자 '사회민주화운동'이었다.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장을 지낸 신홍범은 임 전 부사장 회고록의 발문('참언론을 향해 걸어간 머나먼 발길')에서 "내가 임재경 선배로부터 가장 깊은 감명을 받은 대목은 바로 끊임없는 참여(앙가주망)정신이다"라며 "발언하고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이다"라고 썼다.

임 전 부사장은 1983년 <상황과 비판정신>(창비)을 펴냈다. 그의 관심분야가 '경제'와 '국제문제'였음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이 책에서 아랍(중동문제)의 현실을 분석한 것은 상당히 선구적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리영희가 중국이나 베트남에 관심을 보인 것과 묘하게 대비되는 지점이다.


 정영무 <한겨레> 대표 등 <한겨레> 임직원들과 기념사진을 찍는 임재경 전 부사장.
ⓒ 구영식



"손에서 책을 안 놓는 친구다"

지난 2일 열린 임 전 부사장의 회고록 <펜에서 길을 찾다> 출간 기념회에서는 그가 어떤 언론인인지를 보여주는 다양한 회고담이 쏟아졌다. 그의 술친구인 신경림 시인은 "언론인, 민주화운동가보다는 공부하는 사람으로 머릿속에 박혀 있다"라고 했고, 창비 편집인을 지낸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라고 회고했다. 이부영 전 의원은 "임 선배는 어느 자리에 가도 자기가 있다는 것을 내보이지 않는다"라며 "많은 일들이 있으면 아교 같은 노릇을 한다"라고 평했다.

"임재경 선생은 언론인이며 민주화운동가인데 저한테는 그런 것보다는 공부하는 사람으로 머릿속에 박혀 있다. 20대 초반에 처음 만나 약 60년간 함께 살아왔는데, 언제나 공부하는 모습을 봐왔다. 7~8년 전 새벽, 길에서 만났는데 중국어 공부하러 간다고 하더라. 내가 '지금 나이에 무슨 중국어 공부냐?'고 했더니 '그래도 공부해야 한다'고 했다.

저는 공부를 싫어해서 술을 많이 먹는데 어느 날 술 먹고 집에 못 들어가 해장한 뒤 카페에 들어갔더니 임 선생이 독일어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걸 보고 '언론인이 되려면 아침부터 (외국)신문을 읽어야 하는구나, 나는 언론인이 안 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웃음). 저에게는 그렇게 항상 공부하는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신경림 시인)

"이제는 같이 늙어가는 친구인데 임 선생은 나이에 비해 엄청 젊다. 옛날에는 나이에 비해 굉장히 늙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지점에서 조금도 안 변하고 유지하는 비법이 뭔지 모르겠다(웃음).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20대 때 일이다. 저희 형님이 12살 위이신데 어느 날 우리 집에 담배를 들고 들어오다가 임 선생을 보고 담배를 감추었다. 그런 화려한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안 늙어서 그런 대우도 못받는다(웃음).

신경님 시인이 얘기했듯이 임 선생은 책을 손에서 안 놓는 친구다. 독일신문도 보고, 특히 문학책을 많이 본다. 영문과를 나와서 영어책도 보고, 프랑스 문학 지망생이어서 두꺼운 프랑스 책도 있고. 항상 공부하고 다양하게 활동한다. 그에 비해서 책 낸 것이 많지 않다. 이게 항상 불만이었다. 책을 쓰지 않고 읽기만 하는 것도 게으름이 아닐까(웃음). 그런 생각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이번에 두툼한 책을 하나 새로 써냈다. 정말 기쁘다."(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선생님은 영문학도인데 경제부 기자가 됐다. 경제 책을 공부하려고 읽어봤는데 어렵더라. 그런데 선생님은 그것을 독파하면서 경제쪽 전문가가 된 측면이 있다. 피눈물 나는 노력의 결실이다. 그저께 사모님께 전화드렸다. '임 선생 자랑할 얘기가 뭐냐?'고 했더니 웃으시면서 '다 아시잖아요'라며 말씀을 안 하셨다. (행사에 참석하기) 직전에 아드님과 따님에게 아버님의 특성을 여쭤 보니 두 분이 모두 '아주 고집이 센 분이다, 고집불통이다, 양보하지 않는 분이다'고 했다. 이것이 장점일 수도 있고, 단점일 수도 있는데, 내적인 힘이 아닐까 싶다."(함세웅 민주주의국민행동 상임대표)

"아마 70년 중반 이후 80년대를 거쳐서 수많은 해직 언론인들이 나와서 고생하고, 술도 마시고, 바둑도 둔 일들을 생각해서 해직 언론인을 대신해 한마디 하라고 부른 것 같다. 리영희, 송건호, 임재경 등의 선배들이 계셔서 우리들이 이런 일 저런 일을 겪으면서도 고생한 줄 모르고 살았다. 떴다 하면 밀고 당기던 맞수 성유보가 이 자리에 있었으면 저 대신 많은 것을 얘기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임 선배는 어느 자리에 가도 자기가 있다는 것을 내보이지 않는다. 후배들하고 만날 때도 그랬다. 얘기하더라도 맨 마지막에 한다. 많은 일들이 있으면 아교 같은 노릇을 한다. 후배들이 일하는 데 편하게 밀어준다. 그래도 빠트린 얘기가 있으면 마지막에라도 꼭 한다. 그것이 우리의 피와 살이 된 세월이었다."(이부영 동북아평화연대 명예이사장)


 신경림 시인,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유초하 충북대 명예교수 등과 기념사진을 찍는 임재경 전 <한겨레> 부사장
ⓒ 구영식



"목이 탄다... 잔치로 끝날 게 아니다"

이날 출간기념회 행사에서는 특별한 시간이 마련됐다. <한겨레> 만평을 그렸던 박재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그린 임 전 부사장 초상화를 증정한 것이다. 박 교수는 초상화를 증정하기 전 "임 선생님은 그려지지가 않아 포기할까 생각했는데 겨우 선생님하고 비슷하게 만들었다"라고 말해 큰 웃음이 터졌다. 

"신문(<한겨레>)에서 처음 그림 그릴 때부터 저를 다독여주셨다. 원래 사람은 자기한테 잘 해주는 것만 기억한다. 선생님 감사합니다(웃음). 제가 사람 얼굴 그리기를 좋아해서 굉장히 많은 사람들을 그려줬다. 그래서 숙달됐다. 어지간한 사람은 딱 보면 특징을 잡아낼 수 있을 정도다. 그래서 빨리 그렸고, 많이 그려줬다. 저 나름대로 수준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임 선생님을 그리게 됐는데 너무 이상한 거다. 이게 그려지지 않아(웃음). 내 솜씨가 보통은 넘는데 그려 놓고 보니 아니고, 또 그려놓고 보니 아니고. 스케치북 한 권을 다 쓰고 나니 미워졌다. 왜 못생겨 가지고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나?(웃음) 나중에 포기할까 생각했다. 그래도 겨우 선생님과 비슷하게 만들었다. 정말 애썼다(웃음과 박수).

이런 적이 없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의문이 풀렸다. 선생님이 무지하게 많이 공부하고, 영어, 불어, 독일어까지 하시는데 개구장이 같은 게 있다. 영혼이 굉장히 복잡하시구나(웃음). 굉장히 다면적이고. 그래서 (내가) 외계인을 지금 대하고 있구나. 외계인으로 생각하고 있다(웃음). 잡히지 않는 면을 가지고 있다. 그래도 끝까지 그려서 다행스럽게 기쁘게 생각한다."(박재동 한국예술종학교 교수)


 박재동 화백이 그린 임재경 전 <한겨레> 부사장의 초상화.
ⓒ 구영식



이어 인사말을 하러 나선 임 전 부사장은 '참여파 언론인'답게 "이렇게 뵙고 반가운 옛날 기억을 더듬는 것은 기분이 좋다"라면서도 "하지만 80이라고 해서 회갑연 차려서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를 때가 아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세상(때문)에 아직도 목이 탄다. 정말 뾰족한 수도 없고. 나이 먹은 사람들은 사석에서 울분을 토로하지만 좋은 생각 내는 것을 못 봤다. 저도 (좋은 생각을) 내지 못하고. 이렇게 잘 차려 먹고 있을 수는 없다. 제가 방법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잔치로 끝나는 게 아니다. 한번 가다듬어서 우리 한번 해보자."

임 전 부사장은 "내가 이것을 앞장서서 하겠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내년에는 움직여 보겠다"라며 "다 힘을 합쳐서 좋은 사회를 만들고, 하루속히 이런 남북상태를 끝장내야겠다고 생각한다, 자주 만나서 의견을 나누자"고 호소했다.


오마이뉴스 / 구영식 / 편집/ 손병관 기자


지난 17일 우리시장 기살리는 '장에 가자' 전람회가 한 달간의 일정을 마무리하였습니다.

 

그동안 많은 관람객들이 본 프로젝트에 동참하였고, 1,216명의 초상사진을 촬영해 드렸습니다.
전시 첫 날에는 개막행사로 인해 참석하신 많은 분들을 촬영해드리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KBS다큐 촬영에 의해 정선으로 떠난  2일에는 사진가 곽명우씨가 수고해 주셨고,
전시 마지막 날에는 누님 장례 치루느라 약속을 못 지켜 죄송합니다.

 

그러나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4월부터 전국 장터를 순회하며 힘을 결집할 생각입니다.
캠페인에 함께 해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리며, 지속적인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도예가 김용문씨

 

철학자 채현국선생

 

원로 언론인 임재경선생

 

가정주부 장봉숙씨

 

사업가 이대훈씨

 

아프리카 봉사활동가 노인자씨

 

장봉숙, 심우성, 강송림시인

 

포항MBC 편성국장 최부식씨 부자

 

미래촌 김만수 동장

 

클라라, 사업가 김영재씨

 

2018평창동계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유승근 인력물자부장

 

서양화가 서길원씨

 

회사원 김기훈씨

 

사업가 권영진씨

 

시인 강송림씨

 

소설가 김정례씨

 

도예가 황예숙씨

 

문화기획가 홍명도, 이상철부부

 

사업가 김욱수씨

 

영화배우 양희경씨

 

사진가 이기명씨

 

회사원 심지윤씨

 

회사원 김중호씨

 

경기도미술관장 최효준씨

 

사업가 김택호씨

 

가정주부 조근숙씨

 

 

 

 

 

 

 

 

 

 

 

 

 

 

 

 

 

 

 

 

 

 

 

 


안승일씨의 ‘불멸 또는 황홀’ 백두산사진전 개막식이 지난 24일 오후6시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열렸다.

전시장은 작품 감상하러 온 축하객들과 내빈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박인식씨의 사회로 진행된 개막식은 대부분의 시간을 내빈들의 인사와 축사에 할애해야 했다.
시인 민 영선생을 비롯하여 송 현 시인, 산악연맹 이인정회장, 원로언론인 임재경선생, 김종규이사장,

행위예술가 무세중씨, 서양화가 김용태씨,‘아라아트’ 김명성대표, 방송인 전유성씨, 김영환의원,

박원순시장의 축사가 이어진 후 안승일씨의 인사말이 있었다.

 

"남들은 다들 고생했다고들 하지만 자신은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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