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의 전통문화가 퇴색되고 예술가들의 풍류가 사라진 지 오래다.

인사동이 관광지로 바뀌며 점차 황폐화되어가는 현실을 말하고 싶어 ‘인사동 이야기’ 사진전을 마련한다. 

이 전시가 인사동 반세기를 정리하는 서곡이기도 하다.

 

2009. 80x50cm. 디지털프린트

인사동은 긴 세월 많은 사람에게 예술적 영감을 일깨워온 곳이다. 어찌 보면 예술을 공유하는 장터나 마찬가지다. 장에 갔다가 반가운 사람 만나 즐기듯이, 다들 뒷골목 주막에 모여앉아 정 나누어 온 장소다. 혁명을 외치고 사랑과 예술을 노래하며 꿈을 펼친 곳이다.

이제 문화 특구로 내세울 만한 예스러움이나 인사동 풍류는 오 간데없다. 더러는 인사동이 끝났다는 절망적인 이야기도 한다. 그러나 인사동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이상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전통 가게나 문화공간들이 어려워도 군데군데 버텨나갈 것이고, 예술가들도 작품을 펼쳐 놓고 어느 골목 주막에 모여앉아 담론으로 꽃 피울 거다. 그래서 인사동 노래를 부르기로 작정한 것이다.

 

2006. 65x40cm. 디지털프린트

이번 전시는 20년 이전에 촬영한 흑백사진을 제외한, 그 이후에 촬영된 컬러사진에서 골라냈다. 인사동의 변해가는 풍경을 년 대별로 보여주는 작품 30여 점을 주축으로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 입상 사진 20여 점도 함께 전시한다.

 

2010. 33x20cm. 디지털프린트

인사동 이야기에 비켜선 입상 사진을 내건 것은 인사동이야기사진집의 많은 지면을 인사동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기도 하지만, 본래 의도한 제목도 인사동 이야기가 아니라 인사동 사람들이었다. 비단 인사동만이 아니라 장소에 앞서 사람이 먼저라는 생각에는 언제나 변함이 없다. 어쩌면 그 사람들이 인사동을 지켜나갈 전사이기도 하다.

 

2016. 33x20cm. 디지털프린트

'인사동 사람들' 작업은 15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2007공화랑에서 개최한 인사동, 그 기억의 풍경사진전과 2010북스갤러리에서 개최한 인사동, 봄날은 간다사진전에 이은 세 번째 전시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예술가들을 각자가 추억하는 특정 장소에서 촬영하여 지난날을 되새기게 했다. 앞으로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촬영은 계속 이어지겠지만, 이 전시를 계기로 그동안 기록한 인사동 사진들과 사료를 정리하기로 했다.

 

2011. 65x40cm. 디지털프린트

길고 긴 인사동 이야기를 들추려니 오랜 세월을 거슬러 올라야겠다. 조선시대에는 궁중 화가들의 작업실인 도화서가 인사동에 있었다고 한다, 연암 박지원과 율곡선생도 인사동에 살았고, 400년 된 회화나무와 명성황후의 조카 민익두 대감의 옛 저택인 민가다헌’, 박영효 대감댁이었던 경인미술관한옥도 인사동 유적이다.

 

2012. 33x20cm. 디지털프린트

19세기 말 개화 바람이 불면서 인사동 일대는 교회, 요릿집, 병원 등이 들어서며 신식 동네로 변해갔다. 태화관 터, 천도교 수운회관, 숭동교회, 해정병원 등이 다 그 때 생긴 것이다. 1924년 김정환 옹의 통인가게가 생기면서 고미술 관련 상가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1934년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책방, 산기 이겸노옹이 운영한 통문관도 들어섰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고가구나 고미술품 등 골동이 인사동으로 쏟아져 들어오며, 1960년대까지 고서점, 고미술상, 필방, 표구점 거리가 되었다. '구하산방'과 수도약국도 그 때 생겨난 것이다.

 

2013. 65x40cm. 디지털프린트

일제강점기에 형성되었던 골동품 상점들은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 초까지 성시를 이루었는데,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먹고살기 힘들어 많은 골동품이 인사동으로 몰려들었다. 미군 장교 출신 막 뮐러가 골동품을 몇 트럭이나 사들여 번 돈으로 천리포수목원도 만들었고골동상들도 때 돈을 벌었다그리고 사기 사건도 성행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가짜 고서화사건, 금당 살인사건이다.

 

2014. 80x50cm. 디지털프린트

인사동이 갤러리 타운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다. 박명자씨의 현대화랑이 관훈동에 문을 연 것을 기점으로 1974'문헌화랑', 1976'경미화랑' 등 상업 화랑들이 속속 모여들어 미술문화의 거리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박주환씨가 '동산방'1976년 열었고, 1977년에는 김창실씨가 '선화랑'을 열었다. 1983년 이호재씨의 가나화랑과 공창호씨의 공창화랑’, 김완규씨의 '통인화랑', ‘관훈갤러리’, ‘학고재’, ‘경인미술관등이 개관하므로 인사동은 명실상부한 화랑가로 자리를 굳힌 것이다. 그 후에도 김진하씨가 운영한 나무화랑을 비롯하여 많은 화랑이 생겨났다. ’나무화랑그림마당 민에 이은 민중미술의 교두보로 자리 잡았다.

 

2015. 65x40cm. 디지털프린트

상업화랑이 생겨나기 이전인 1959년에는 종군사진기자 임인식선생이 관훈동에 사진전문화랑인 '신한화랑'을 차린 적도 있었다. 2000년대 이후에는 김영섭화랑과 이순심씨가 운영한 나우와 룩스가 생겼으나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최건수씨가 '룩스'를 인수하여 인덱스’로 개명한 것이 인사동의 유일한 사진화랑으로 남았다.

시인들의 아지트로는 84년 정동용 시인이 운영한 시인학교를 시작으로 이생진 시인의 단골 모임터 순풍에 돛을 달고’, 김여옥 시인이 운영한 시인 과 강고운시인의 '무다헌'이 운영되다 문을 닫았고몇 년 전 문을 연 이춘우 시인의 시가연만 남아 있다.

 

2016. 80x50cm. 디지털프린트

인사동은 예술단체들이 모여 있었다는 점도 또 하나 특징이다. 조선 전기 금속활자 1600여점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자리에는 초창기 예총회관이 있었고, 80년대 중반에는 민미협이 창립한 데 이어 88년에는 민예총이 창립되어 건국빌딩에 사무실을 차렸다. ‘민미협 창립과 함께 그림마당 민이 생겨나는 등 인사동이 민중미술의 본거지가 된 것이다. 그리고 99년에는 민사협이 북인사마당 입구에 둥지를 틀었다.

 

2017. 65x40cm. 디지털프린트

인사동에 예술가들의 풍류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로 알려지고 있다. 명동을 주 무대로 모이던 문인들이 종로 관철동 시대를 거쳐 인사동으로 옮겨오며 시작된 것이다. 거리의 철학자로 불리는 민병산 선생을 앞세워 천상병, 박이엽, 민영, 신경림, 강민, 구중서, 신동문, 박재삼, 황명걸, 방영웅씨 등 많은 문인들이 인사동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2018. 65x40cm. 디지털프린트

인사동에 예술가들이 모이는 곳은 주로 기원이나 찻집, 그리고 대폿집이었다. 천상병 시인의 부인 목순옥씨가 차린 귀천과 장문정씨의 수희재’, 최정해씨의 초당같은 찻집, 그리고 술집으로는 실비집이나 고갈비 양푼집 등 이름도 없는 대폿집이 주 무대였다. 실비대학이라 불린 '실비집'은 항상 빈털털이 예술가들이 우글거렸다.  하가'레떼', '춘원', '누님칼국수등이 연이어 생겨났고, 전시 뒤풀이 장소였던 부산식당에 많은 작가들이 어울렸다. 그 이후 생겨 난 전유성의 학교종이 땡땡땡과 사진가 김수길의 '구름에 달 가듯이', 노인자의 뜨락이나 ‘소설’, 이해림의 평화만들기’ 이미례 영화감독의 여자만’, 송점순의 사동집’, 유재만의 아리랑가든’, 박중식 시인의 툇마루같은 술집이나 밥집에 많은 예술가들이 드나들었다. 그 뒤에는 최동락씨가 운영한 풍류사랑’과 전활철씨의 유목민’, 최일순씨의 푸른별 이야기도 생겨났고, ’풍류사랑은 김용태 미망인 박영애씨가 이어받았다.

 

2018. 33x20cm. 디지털프린트

인사동 술집 곳곳에는 많은 예술가들이 북적이며 개똥철학을 풀어댔다. 그러나 술판의 끝자락은 언제나 소란했다. ‘평화 만들기에 평화가 없던 그때가 인사동의 전성기였는지 모른다.

 

2019. 65x40cm. 디지털프린트

이 전시는 1124일부터 30일까지 인사동 나무아트에서 열린다.

꺼져가는 등불처럼 가물거리는 인사동의 부흥을 위해 다 같이 힘을 모우자.

 

2016. 65x40cm. 디지털프린트

개정판으로 나온 인사동 이야기 사진집에는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 124명의 입상사진을 바탕으로

강민시인을 비롯한 43명의 작가가 쓴 48편의 인사동에 관한 글과 인사동 사진 37점이 소개되어있다

 

눈빛출판사 / 가격25,000원

 

 

 

인사동 철거건물 소유주 김문기 전 상지대 총장

5년전엔 문화사업한다며 세입자와 계약해지

이번엔 주차장 짓는다며 임차인 통해 내몰아

지난 3일 오후 철거 용역업체 직원들이 포크레인을 동원해 문화공간 코트(KOTE) 별관 건물을 철거하고 있다. 박지영 기자

서울 한복판 건물 철거 현장에서 용역업체 직원들이 세입자 얼굴 등에 고압수를 쏘며 철거를 강행하는 일이 벌어졌다. 해당 건물주는 교비 횡령 혐의 등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김문기 전 상지대 총장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곳은 2016년 김 전 총장이 문화사업을 하겠다며 기존 세입자들과 계약을 일방적으로 종료한 곳인데, 불과 5년 만에 주차장 부지로 쓰겠다며 임차인을 통해 또다시 세입자들을 내몰고 있는 셈이다.

7일 <한겨레> 취재 결과, 철거 폭력이 발생한 인사동 135-3, 135-6번지 건물주는 김문기 전 상지대 총장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곳에는 다양한 분야 예술인과 창작자 수십명에게 저렴하게 공유공간을 제공하는 복합문화공간 코트가 있다. 김 전 총장은 지난 9월17일 ㄱ건축사무소를 대리인으로 지정해 종로구청에 해당 건물 철거를 신청했다. 철거 예정일은 오는 20일이다. 그러나 지난 2일 새벽부터 갑자기 철거가 시작됐다고 한다. 안주영 코트 대표와 이곳에서 작업‧전시 공간을 운영하는 예술인들은 현장에서 숙식하며 철거 진행을 막고 있다. 코트에서 작업을 했던 예술인 ㄱ씨는 “사유지라 하더라도 11월20일이 철거 신고일인데 무작정 들이닥쳐 포크레인으로 건물을 부수는 등 매우 위험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앞서 지난 4일 종로경찰서는 코트 철거 현장에서 안 대표와 직원 등에게 고압수를 쏜 용역업체 직원 2명을 특수폭행 혐의로 입건했다. 코트 쪽이 제공한 동영상을 보면, 용역업체 직원들은 지난 3일 인근 소화전에 호스를 연결해 안 대표를 포함한 3명의 얼굴 등에 고압수를 뿌렸다. 직원들이 입건된 이후에도 업체에선 철거 작업을 계속 진행 중이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 복합문화공간 코트(KOTE) 철거 용역업체 직원 2명이 지난 4일 오전 8시30분께 세입자에게 고압수를 쏘는 모습. 직원 2명은 특수폭행 혐의로 경찰에 입건됐다. 코트 제공

지난 2일 오전 철거 용역업체 직원들이 철거 현장 입구에 '사유지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쓴 펜스를 설치해 세입자들의 접근을 막고 있다. 안주영씨 제공.

이번 분쟁은 코트 건물 임차인으로 철거를 주도하는 최아무개 ㈜씨에이에이엠씨 대표와 ‘임차관리 권한’을 부여받은 안 대표와의 갈등에서 비롯됐다. 부동산 중개·대리업을 하는 최씨 법인은 2016년 10월27일 김 전 총장과 인사동 133번지 외 15필지(인사동 1길)에 대한 장기임차계약을 맺었다. 최씨는 2019년 9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안 대표에게 인사1길(코트 등)에 대한 임차관리 권한을 넘긴다’는 확약서를 작성했고, 이후 안씨가 이 공간을 임대한 업체를 관리했다. 안씨는 최씨 법인에 일부 지분투자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법적 임차인인 최씨가 문화예술 쪽에 발이 넓은 안씨에게 권한을 넘겨 세입자를 유치한 셈이다.

하지만 최씨 쪽에서 기존 입주 업체들의 낮은 수익성을 이유로 특약서 효력을 인정하지 않고 갑작스레 기존 건물을 철거한다고 통보하면서 대치 상태에 들어서게 됐다. 최씨는 <한겨레>에 “확약서를 쓴 것은 맞지만, (안씨가 세를 놓은 가게들의) 수익이 좋지 않아 건물을 주차장으로 만들려고 한다. 이는 김문기씨와 합의된 내용”이라고 말했다.

김 전 총장은 2016년에도 자신이 소유한 인사동 일대 부지에서 문화사업을 하겠다며 음식점·노래방 등을 운영하던 세입자들과의 계약을 종료한 바 있다. 당시에도 갑작스러운 용도변경으로 일부 기존 세입자는 소송을 내기도 했으나 결국 권리금도 받지 못한 채 건물을 비워야 했다.

안씨는 “임차 권리 관계에 대한 법원 판단을 받기 전까지 철거를 중단하자고 최 대표 쪽에 요청했고, 건물주인 김 전 총장을 만나 설득해보려고 했지만 직접 만날 수도 없었고 연락이 닿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안씨는 지난 3일 오후 최씨와 용역업체 직원들을 업무방해·협박·주거침입·퇴거불응·재물손괴 등 혐의로 고소했다. <한겨레>는 김문기 전 총장에게 여러 차례 연락했으나 답변을 받지 못했다.

한겨레신문 / 박지영 기자 jyp@hani.co.kr

https://youtu.be/Kf2CMCrIHhg

 

 

인사동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술타령 세월에 몸도 마음도 늙어갔다.

 

먼저 떠난 분도 여럿 눈에 밟힌다.

 

이계익선생 아코디언 연주에 민영시인이 분위기잡네.

 

어린애처럼 퍼 먹이는 장춘이 모습도 정겹다

 

류연복이 가려는데 장경호는 왜 놀래나?

 

고헌이는 쌍팔년도 춤으로 똥 폼 잡고

 

성질 급한 황석영은 술 컵을 날리네

 

누군 뒷동산 아지랑이 부르며 넘어가고

 

누군 따라 불러 동네 시끄럽다.

 

장기도 가지가지 악기도 가지가지

 

인사동 밤무대는 걸판지다.

 

 낭만, 로마네꽁띠, 무다헌, 부산식당, 사동집,  

아리랑, 여자만, 유목민, 푸른별, 풍류사랑,

가는 곳마다 풍류가 넘쳤다.

 

세월 따라 모두가 변해간다.

 

떠도는 사진만 야속타 원망하네.

 

그 때가 그립고 그 사람이 보고 싶다.

 

사진, / 조문호

 

 

한가한 주말을 보내던 지난 25일, 인사동 마당발 노광래씨가 처들어 왔다.

냉면이나 한 그릇 하자는 전화에 나갔다가 송추 전강호씨 화실까지 실려 간 것이다.

 

가는 길에 냉면 사리와 술 안주까지 사들고 갔다.

여러 지인들도 호출한 모양인데, 다 사정이 있는 모양이다.

요즘 같은 코로나 비상시국에 많이 모여 좋을 것 없다.

 

전강호씨 송추 작업실은 천혜의 자연경관을 끼고 있어, 가는 길이 피서객 차량으로 아수라장이었다.

나들이를 제한하는 거리두기도 푹푹 찌는 무더위에는 공염불에 불과했다.

 

오랜만에 만난 전강호, 이종순 내외가 반갑게 맞았는데, 이 얼마만이던가?

코로나가 시작된 후 첫 만남이고, 송추 작업실에 들린 적은 3년이 더 되었다.

 

연못이 조성된 정원에 술자리를 마련했는데, 자연 속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덥지 않았다.

이제 연꽃이 피기 시작한 연못에는 팔뚝만한 술 안주가 우글거렸다.

 

노광래씨가 술자리를 만든 것은 오는 9월경 민병산선생 33주기를 맞아

인사동에 관한 책을 출판할 생각인데, 사진을 좀 제공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나 역시 인사동 책 낼 출판사 약속으로 코가 석자지만,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일은 개인의 일이 아니라 인사동을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많은 정보와 자료를 수집해 알찬 책을 만들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 날 술자리에서 오래된 인사동 추억담이 숱하게 쏟아져 나왔는데,

미리 녹음기를 준비하지 못한 것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다.

 

좋은 추억담도 많았지만 한 때 인사동에 사무실을 둔 모 시인의 추잡한 비행까지 나왔다.

그 자가 요즘 뜨거운 감자로 떠 오른 ‘예술원’ 회장을 하지 않았던가?

미성년자를 건드린 그 일이 다시 불거지면 사회매장은 물론 바로 구속감이다.

 

사실 예술원은 전면적인 개혁을 하거나 아니면 없애야 할 조직이었다.

철옹성 같은 벽으로 쉽게 들어갈 수도 없지만, 의식 있는 작가는 오라 해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작가가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을 지낸바 있는 이시영시인이다.

 

1954년 "반공 문예 조직의 국가적 공적에 대한 물질적 보상이자 권리 주장”이라는 설립 성격도 웃기지만,

아무것도 하는 일 없는 회원들에게 매달 180만원의 정액 수당과 각종 회의 수당을 지급하고 있다.

그런데 예술원 문학 분과 회원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회원이 대학교수 출신이라 연금을 받는데,

이중으로 국고를 낭비할 필요가 있는가?. 차라리 그 예산으로 젊은 예술가들을 지원해야 한다.

 

프랑스와 미국, 독일 예술원의 경우는 회원들에게 지급되는 정액 수당이 없으며, 미국은 오히려 회원들이 연회비를 낸다고 한다.

다들 예술원 회원 자신들보다는 젊은 예술가를 지원하는 데 사업 방향이 맞춰져 있다고 한다.

‘대한민국예술원’은 하는 일도 없지만, 국민들도 뭐 하는 곳인지 잘 모르는 분이 더 많다.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알고 있으나, 다들 마음 상할 필요 없어 입 다물고 묵인해 왔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문학, 미술, 음악분과와

연극·영화·무용을 합친 4개 분과로 구성되어있는데, 사진 분과만 빠졌다는 점이다.

사진 뿐 아니라 아동문학이나 희곡 분야 회원도 없고, 남성 회원이 압도적으로 많다.

 

오래전 일이지만, 지금은 작고하신 원로사진가 임응식선생 생활이 어려워

이명동선생을 비롯한 원로작가 몇몇 분이 나서서 선생을 입회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결국 무산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 있다.

지금 생각하면 세금이나 축내는 경노단체에 안 들어 가신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얼마나 패거리 의식이 심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며칠 전 소설가 이기호 교수가 예술원을 비판하는 단편 소설을 발표하며

'대한민국예술원'의 전면 개혁을 요구하는 국민청원을 올려 화제가 되고 있다.

이 문제는 당사자들이 스스로 탈퇴하는 것이 덜 쪽 팔릴 문제다.

 예술가들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결단을 부탁드린다.

 

사진: 전강호,조문호 / 글: 조문호

 

 

'대한민국 예술원을 폐지하라'

 

한겨레 [시론]

이순원 [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이기호 작가가 대한민국예술원을 비판하는 소설 ‘예술원에 드리는 보고’를 발표했다. 대한민국예술원은 예술의 창작·진흥에 공로가 큰 원로 예술가를 문학·미술·음악·연극 분야별로 선정해 우대하고 예술창작활동을 지원하는 기관이다. 긍정적인 역할보다 자신들의 잇속을 채우는 집단 이기주의적인 모습으로 오히려 젊은 예술가들의 창작 의욕을 꺾는 일들이나 하기에 뜻있는 사람들은 일찍이 폐지를 말해왔다.

 

문학회원의 경우 원로 문인으로 귀감이 되기는커녕 부끄럽고 추하게 자신의 ‘생사당’을 짓듯 살아서 자기 이름의 문학관을 짓는 모습들과 후배 예술인을 위한 창작 지원 활동보다는 자신들만의 특권 확보에 더 열을 올리는 모습을 보여왔다.

 

우리는 춘천에 있는 김유정문학촌이나 안동의 이육사문학관이나 문학관은 작가 사후에 후대의 사람들이 그의 작품과 문학정신을 선양하고 기리어 짓는 것으로 알아왔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어 자기 문학관을 국가 예산까지 끌어들여 짓는 모습을 보고, 또 어떤 이는 문학관을 짓는 것에 더해 지역 시민의 재산인 공적 재산 수백점을 탈취해 가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저런 자들이 예술원의 회원이 되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대한민국예술원의 한해 예산은 32억6500만원으로 예술원의 문학 분과 회원 26명이 받는 수당만도 4억6800만원이다. 여기에 비해 2021년 아르코청년예술가지원 사업으로 문학 부문 청년예술가에게 지원된 예산은 7명 선발 4000만원에 불과했다. 예술원 회원이 되면 자신들이 받는 연금 외에 월 180만원, 연간 2160만원의 수당을 받는다. 대부분 다른 고액의 연금을 받는 이들이 감액 없이 받을 수 있는 금액이다. 이런 특권적 지원이야말로 창작 지원이 절실한 청년예술가에게 돌아가면 얼마나 좋겠는가.

 

오죽하면 이기호 작가가 “나라 예산으로 명예를 세우지 마십시오. 제 또래의 부장급 과장급 작가들도 밥벌이가 따로 있으면 지원금 같은 거 신청 안 합니다”라고 말하겠는가. 누구보다 지원이 절실한 전업작가들도 남보다 조금 더 알려지면 자기보다 어려운 동료 후배 작가들을 생각해 지원 신청을 자제한다. 그러나 예술원은 이제까지 오히려 자신들의 이득과 탐욕을 키워왔다.

 

과거 2005~2006년 ‘우수예술인발굴지원’ 하던 것을 폐지하고, 2006년부터 2021년까지 자신들의 잇속을 채우기 위해 예술원 회원만의 예술활동 지원을 시행해왔다. 그나마 외부 작가에게 주는 ‘대한민국예술원상’도 올해 문학 부문은 예술원 회원의 동생에게 1억원을 주었다. 이쯤 되면 특권이 아니라 나라 세금에 대한 범죄 수준이 아닌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기호 작가가 공개한 글에 이시영 시인이 댓글로 이들이 ‘수당 180만원을 200만원으로 인상하고, 행사 시 국가 의전서열 제일 앞에 예술원 회원을 배치하고, 해외여행 시 공항 귀빈실 이용 및 1등석 등을 요구하고 있다. 후진 예술가들의 가난과 고투 등은 눈 밖이며 오로지 예술 원로로서의 자기 보신이 제일 사업이며 청와대가 예술가들을 초청해 밥을 안 먹는 것도 항의하고 있다’고 했다. 정말 어느 정도까지 추해질지 끝이 없다.

 

회원은 예술원 회원이거나 예술원이 지정한 예술단체가 후보를 추천하는데, 예술원 회원 중 출석위원의 3분의 2가 동의하면 회원이 된다. 자격도 임기제에서 종신제로 저희끼리 바꾸었다. 이러다 보니 예술원 회원이 되기 위해 누가 어떤 로비를 펼쳤는지 온갖 추문이 흘러나온다. 존경받는 회원이 왜 없겠는가마는 명단을 보면 어떻게 저런 사람이 예술원 회원이 되었나 싶은 이름이 왜 저렇게 많은지 절로 이해가 된다.

 

어떤 사람들은 개선을 말하지만, 조직 자체가 이기적이고 탐욕적으로 운영되어 개선해봐야 마찬가지다. 무보수 명예직이라 하더라도 그 허울을 차지하기 위해 다시 추한 몰골을 보일 것이 뻔하다. 문학으로 예술을 하는 우리 자신을 부끄럽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저런 단체는 해체와 폐지가 답이다. 그 전에 부끄러움을 알고 스스로들 물러나길 바라나 이제까지의 특권적 모습을 보면 이 또한 무망한 일이다. 정녕 문학을 하는 우리가 부끄럽다.

 

조감도 [사진자료 = 서울시]

국보급 유물이 대량 출토된 인사동 도시정비형 재개발 구역에 국내 최대 규모의 유적 전시관이 들어선다.

전시관이 들어설 장소는 지난 달 훈민정음 창제 당시 금속활자를 비롯한 천문시계, 물시계 등의

유물이 다량 발견된 곳으로 도시정비형 재개발구역인 공평동 제15·16지구(인사동 87번지)다.

옛 건물 터인 조선시대 배수로가 발견된 신축 건물 지하 1층 전체에 조성된다.

 

위치도 [사진자료= 문화재청]

지난 달 발굴한 금속활자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제작된 것으로, 역사와 현대가 공존하는 공간을 만든다는 계획이다.

서울시는 유적 보존으로 손실을 입은 시행자를 고려해 용적률 인센티브를 제공하여

기존 17층으로 허가된 건축을 25층으로 보상하는 대신 지하1층 전체를 전시관으로 만드는 조건이다. 

 

건축계획 [사진자료 = 서울시]

이는 문화재 전면 보존 시 공공이용적률 상향 등 인센티브를 주기로 한 '공평 룰'을 따른 것이라고 한다.

현행법상 건설 공사 도중 매장 문화재를 발견하면 국가에 귀속될 뿐만 아니라

발굴 비용은 시행자가 부담해야 해 문화재 발견은 시행자 측에 달갑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다.

 

전시관 건립지역 및 유적출토현장 [사진자료 = 문화재청]

서울시는 지난 21일 제9차 도시계획위원회를 열고 이런 내용을 담은 공평동 제15·16지구(인사동 87번지) 재개발구역 정비계획을 결정했다.

이 전시관은 총면적 4745㎡로 국내 최대 규모다. 종각역 인근 오피스인 센트로폴리스 지하 1층에 조성된 공평유적전시관의 1.25배 수준이다.

전시관 일부 공간은 지상 1~2층까지 뻗어나가 외부 통로에서도 손쉽게 관람할 수 있도록 설계한다.

 

출토된 유적/ 조선전기한글금속활자 [사진자료 = 문화재청]

인근에서 운영 중인 공평유적전시관은 외부 통로에선 전혀 볼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해 보완한 것이라고 한다.

배수로의 경우 벽 높이를 달리해 15세기 토층부터 원형 그대로 전시한다.

인사동의 또 하나 자랑으로 자리잡을 것으로 생각된다.

 

글 / 조문호

 

 

출토된 유적 / 일성정시의 [사진자료 = 문화재청]
출토된 유적 / 물시계 부속품인 주전으로 추정되는 동제품 [사진자료 = 문화재청]
출토된 유적 / 총통 [사진자료 = 문화재청]
출토된 유적 / 동종 [사진자료 = 문화재청]

인사동이 변하고 있다.

가게들이 바뀌고 낭만은 사라졌다.

지루한 거리두기로 거리가 지루하다.

 

그래도 인사동은 인사동이다.

변하는 것은 미워도 인사동은 미워할 수 없다.

 

일주일에 두 번 가던 곳이 한 번가고,

이젠 한 번도 못갈 때가 있다.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갈 곳이 없어서다.

전시 작품보다 정 나눌 사람이 없다.

 

예술가 만나기도 쉽지 않고 대폿집 풍류도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이 죽일 놈의 코로나가 부채질한다.

 

 

몸은 멀어도 마음마저 멀어질 수는 없다.

영원한 추억의 저장고기 때문이다.

 

 

미국 가신 최정자 시인이 생각난다.

얼마나 그리웠으면 ‘서울로 서울로’를 노래했다.

그 시집 나온 지가 어언 20여년이 되었다.

 

몇 년 전만해도 생활비 줄여 만든 돈으로

일 년에 한 번은 빠지지 않고 오셨으나,

힘들어 못 오신지가 사 오년 된 것 같다.

 

한번 갔다 오면 며칠 동안 앓아눕는다더니

이젠 도저히 엄두를 내지 못하신단다.

 

인사동이 그리워 틈틈이 블로그나 찾았는데,

영영 인사동과 작별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어디 최정자 시인뿐이던가?

강 민시인은 저승에서 '인사동 아리랑' 노래를 부른다.

인사동 사람들이 한 분 한분 세상을 떠나고 있다.

 

그래도 아직은 인사동을 그리는 인사동 사람들이 있다.

멀리서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에 들려 향수 달랜다.

내가 거리풍경을 찍어 올리고 인사동타령을 해대는 이유다.

 

인사동 사진집을 만들려고 출판사 계약서 받은 지가 일 년이 가깝지만,

 아직도 원고를 넘기지 못하고 있다

마침표가 될 사진집이 내 발길을 멈추게 할까 염려되어서다.

 

요즘은 세상이 뒤숭숭해 인사동도 잘 나가지 않는다.

동자동에서 녹번동 가는 길에 잠시들려 안부나 묻는 정도다.

인사동 거리를 기웃거리지만, 갈 곳도 만날 사람도 없다.

 

엊그제도 지나치는 길에 인사동에 잠깐 들렸다.

미친 코로나에다 폭염까지 겹쳐 거리는 한산했다.

 

일주일 만에 본 인사동 거리지만 계속 변하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추억 지우느라 안달하는 것 같았다.

 

전통적 상품을 거래하던 매장들이 옷가게로 바뀌고 있다.

민예품이 놓였던 진열대는 옷과 마스크가 대신했다.

 

코로나가 시작될 때부터 문 닫았던 ‘보물창고’가

더디어 새 주인을 만났는지 실내장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쌈지 건물 벽에는 임금을 기다리다 죽었다는

궁녀 설화가 담긴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마치 누굴 기다리 듯 애잔하다.

 

‘통인화랑’은 ‘미술관 속 그림과 조각전‘이 열렸고,

‘나무화랑’은 인사동활성화를 위한 신진작가 공모전이 열렸다.

 

전시장마다 작품은 걸렸지만, 반가운 사람이 없다.

인사동을 사랑했던 인사동 사람들은 다 어디 갔을까?

몽유병 환자 같은 늙은이만 거리를 떠돈다.

 

인사동의 봄은 요원한 것인가?

아! 그 때 그 사람이 그립다.

 

사진, 글 / 조문호

 

 

 

며칠 전 조준영시인으로 부터 인사동서 만나자는 전화가 걸려왔다.

 

 

 

예전에는 정기적인 인사동 모임이 있었으나, 코로나 광풍에 밀려 사라진터라 반가운 기별이 아닐 수 없었다.

 

 

 

조준영씨를 만난 지가 일 년을 훌쩍 넘겼으나 인원수 제한에 걸려  다른 분은 연락도 못했다.

아마 정선 집에 불난 소문을 듣고 무리하게 자리 만든 것 같았다.

 

 

 

정영신씨와 함께 약속보다 일찍 나가 마루아트에서 열리는 노무현 추모전 사람 사는 세상’부터 보러갔다.

 

 

 

전시장에서 박재동 화백과 유준 화백을 만나기도 했다.

 

 

 

99명의 작가들이 내놓은 작품들이 넓은 전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는데, 세삼 울컥하게 만든 작품은 노무현대통령 전속 사진가로 일한 장철영씨 사진이었다소탈한 바보 대통령의 진솔한 모습에 어찌 옛날 생각이 나지 않겠는가?

 

 

 

오랜만에 나온 인사동 거리는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문 닫았던 몇몇 가게들이 옷 가게나 악세서리 가게로 다시 문을 열었는데, 전통 노리개를 팔던 아원공방자리는 화려한 색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인사동 길가의 신축건물 일층에 더 스타갤러리가 문을 열었더라.

일 년만 숨어 지내다 오면 인사동의 모든 게 다 바뀔 것 같았다.

 

 

 

약속시간이 되어 툇마루로 갔더니, 김 발렌티노가 반갑게 맞았다.

요즘 청소부로 돈 번다며 밥 한 그릇 사겠다고 우겼으나 약속이 있어 사양했다.

 

 

 

'툇마루에서 조준영씨를 만나 된장 비빔밥에 막걸리 한 잔 했다.

요즘 술만 마시면 힘들어 아껴 마실 수 밖에 없었는데, 입은 땡기고 머리는 말리니 어느 장단에 춤 출지 모르겠더라.

 

 

 

다들 지난한 나날들 하소연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조준영씨가 화재 후원금을 건네주었다.

함께 공유할 예술창고를 만들려면, 돈보다 많은 사람들의 동참이 필요해 고맙게 받아 들였다.

 

 

 

대기손님들이 일어나기만 기다리고 있어 오래 버틸 재간이 없었다.

 

 

 

툇마루에서 나와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유목민도 손님이 많았다.

그런데, 이게 누군가? 소식 끊겨 죽은 줄만 알았던 장춘씨가 나타난 것이다.

 

 

 

정말, 안보면 보고 싶고 보면 징그러운 여인이다.

'죽어도 고.”라는 작심으로 마시기 시작했는데, 소주가 입에 짝짝 달라붙었다.

 

 

 

오랜만에 많은 이야기를 쏟아냈는데, 그녀의 언어 법은 귀신들이 나누는 말투라 다소 난해하다.

 

 

 

우린 한 쪽 귀로 듣고 한 쪽으로 흘리니 문제될 게 없으나, 옆 좌석에 던지는 실 없는 소리에 신경 쓰였다

다행스럽게 귀신 말귀를 알아챘는지, 맞장구를 쳐 주어 분위기가 무러익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홀짝 홀짝 마신 술에 취해 버렸다.

그렇지만, 이 얼마만이더냐? 마음대로 이야기하며 기분 좋게 마신 적이...

 

 

 

같은 방향이라 녹번동으로 함께 갔는데, 장춘씨가 떠난 생각이 나지않는 걸 보니, 아마 먼저 뻗은 것 같았.

벌 받아 그 다음 날은 하루 종일 누워 낑낑거렸으나 후회되지는 않았다.

 

 

 

 우리가 놀면 날마다 노나?

"사랑이 좋으냐? 친구가 좋으냐?

막걸 리가 좋으냐? 색시가 좋으냐?

사랑도 좋고 친구도 좋지만 막걸리 따라주는 색시가 좋더라.

앵헤야~ 엥헤야~ 앵헤야~ 앵헤야~“

 

사진, / 조문호

 

[스크랩 : 서울아트가이드 2021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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