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해가 저물어 간다.

마지막 송년회라 여긴지가 한 두 번이 아니건만 어김없이 봄은 돌아왔다.

 

올 해 따라 가까운 친구가 여럿 세상을 떠나, 더욱 슬픈 한 해를 보낸다.

모든 게 없을 땐 소중함을 깨닫지만, 있을 때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다.

살아있을 때 자주 만나지 못했음이 가슴을 후벼 파지만, 때늦은 후회였다.

지금부터라도 주변 분들과 자주 소통하며 작은 것에도 감사하기로 했다.

 

유래 없는 코로나 광풍은 아직도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코로나로 인한 국가적 피해도 막대하지만, 개인의 삶 또한 만신창이가 되었다.

경제적 어려움은 차지하고, 행동이 자유롭지 않아 우울증 환자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소소한 일에 짜증을 내거나 싸울 일이 아닌데도 다투는 등, 다들 신경이 날카롭다.

 

이런 와중에도 스스로의 이권에만 전전 긍긍하는 정치인들 보면 울화가 치민다.

정당보다 정책과 인물을 보고 뽑는 그런 세상은 정말 요원한 것이던가?

이태원참사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은 49제 날,

크리스미스 트리 불을 밝히며 술잔을 치켜드는 대통령 모습에 분노를 느꼈다.

 

다들 책임 회피에 급급하며, 두 번 죽이는 망 말을 쏟아내는 정치인도 여럿 보았다.

이런 비인간적인 정치인들은 걸러내야 하지 않겠는가?

 

부자 표를 노려 부자감세를 추진하거나,

노인 표를 의식해 선심형 노인복지예산을 올리는 모순도 없어야 한다.

이것이 유권자에게 고무신 돌리던 자유당 시절이나 다를 게 무엇인가?

 

시급한 것은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노숙인과 쪽방에서 죽어가는 고독사 부터 없애야한다.

 

그리고 지금은 청년이 더 살기 어려운 시대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3포'시대를 맞은 청년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젊은이들이 살아 갈 수 있는 정책과 행정력에 집중해야 한다.

 

지난 16일 오후5시 무렵, 인사동 사람들의 송년회가 ‘유목민’에서 있었다.

두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갖지만, 참석하는 분이 그리 많지 않다.

 

조준영시인이 비용일부를 부담해가며 어렵사리 주선하지만, 매번 그 얼굴에 그 얼굴이다.

 

이번 모임은 날씨가 추워 그런지 송년회 모임치고 저조했으나,

백남이 시인은 정읍에서 상경하는 열성도 보였다.

 

그러나 평소에 앉던 ‘유목민’ 좌석이 예약되어 떨어져 앉아야하는 이산가족 신세가 되고 말았다.

바깥 좌석에는 바람막이까지 설치해 두었으나, 날씨가 추워 앉는 사람이 없었다.

 

담배 피우러 나가는 골목이 대화의 자리고, 사진 찍는 장소였다.

불화가 이인섭씨와 연극배우 이명희씨가 야외의자에 정답게 앉기에

두 분 결혼사진 찍는다고 떠벌렸더니, 화들짝 놀라면서도 좋아한다.

결혼은 겁나지만 연애는 좋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화가 정복수씨는 지역문학총서인 ‘장소시학’ 2호 한권을 선물했다.

이번호의 특집 장소는 경남 의령인데, 의령은 정복수씨 고향이 아니던가.

문인들의 글만 아니라 화가와 미술평론가 글도 실려 있었다.

정복수씨의 회향기인 ‘내 존재의 비망록과 그림', 미술평론가 황인의  ‘병막의 주인들’이 그것이다.

 

그리고 '시네갤러리'를 운영하는 인사동 마당발 노광래씨가 떴다.

‘한겨레신문’ 짬에 ‘즐겁게 놀며 배우는 인사동 대학 다시 살리고 싶다’는

인터뷰기사가 실렸는데,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까지 다 털어 놓았다.

그 자리에서 인사동 풍류학교 교장선생으로 추천한다는 허풍도 떨어댔다.

 

이 날 ‘유목민’ 특선 안주로 사골건더기와 시루떡이 나왔다.

술만 홀짝이던 예전과 달리 푸짐한 안주 덕에 술이 덜 취했다.

 

이날 참석한 분으로는 조준영시인을 비롯하여 연극연출가 최유진, 이명희, 전강호, 조해인,

정복수, 이인섭, 김발렌티노, 노현덕, 안원규, 노광래, 백남이, 정영신, 임경일,씨가 참석했고,

끝날 무렵에는 김수길, 최석태씨도 나타났다.

 

엊저녁에는 장경호, 최석태, 김수길씨가 녹번동까지 쳐들어 와 술을 마셨는데,

술병 났는지 장경호씨는 나타나지 않고, 그 패잔병 둘이 뒤늦게 온 것이다.

 

요즘은 몸이 편치 않아 그런지, 모든 일에 소극적이다.

 

문제는 사람이 좋아 사람만 찍어 왔는데, 사람이 두려워진다.

 

그래서 전시장 돌아다니며 써 온 전시리뷰는 물론, 남의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남의 작품에 잣대를 들이대는 것도 우습지만, 적 만들기 싫어서다.

 

사람을 피해가며, 사람을 찍어야 하는 이런 모순이 어디 있는가?

 

하물며 가족이나 친구까지 싫은 소리에 등 돌리는 판에 남이야 오죽할까.

심지어 내가 있는 쪽방 주민들 까지 깊이 들여다보면 다 허물이 보이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어찌 사람을 포기할 수야 있겠는가?

 

새해에는 좋은 사람 많이 만나, 살 맛 나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한 해 동안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사진, 글 / 조문호

 

 

80년대와 90년대에 인사동을 내 집마냥 드나들던, 35명의 작가가

인사동,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를 풀어 낸 책 "인사동에서 만나자"가 '덕주'출판사에서 나왔다.

소설가, 시인, 화가, 조각가, 의사, 가수, 정치인, 인사동 가게 주인 등 여러 저자들의 이야기는

자신이 지켜 본 인사동 만의 매력과 따뜻한 삶의 자락을 전해주고 있다

 

15X21cm / 275P / 20,000원 / 덕주출판사

그리고 긴 세월 동안 인사동을 기록해 온 사진가 조문호와 김수길의 사진도 볼거리를 더해준다. 

 

이 책은 인사동에서 '갤러리 씨네'를 운영하는 노광래씨가 기획했다.

책이 출판된 지난 11월 17일 오후 4시무렵 저자들을 초대하여,

김수길씨의 '시간 지우기'사진전이 열리는 '무우수갤러리'에서 조촐한 출판기념회도 가졌다.

 

아래 사진은 노광래씨를 비롯하여 김수길, 김이하, 박상희, 김진규, 이명희, 최일순,

김 구, 김종근, 이도윤, 기국서, 최정인, 안선재씨 등 그 날 참석한 분들의 모습이다.

'풍류사랑'에서 '유목민'으로 옮겨가며  술을 마셨는데,

'유목민'에서 전태수, 최유진, 안원규씨를 만나기도 했다.

 

책에 실린 필자들의 글

지친 일상에 생명을 불어넣는 온기 가득한 거리_ 신소윤 ㅣ 우리들의 인사동 시대_ 이만주 ㅣ

삼류 시인 _ 조정은 | 알렉산드리아 _ 윤후명 | 뜨겁고, 아프고, 찬란했던 _ 신영란 |

〈천상시인의 노래〉와 인사동 _ 김진규 | 내가 만난 인사동 작가들 _ 노광래 |

사는 게 뭔지 _ 윤영준 | 인사동 in 서울 _ 장두이 | ,인사동 추억 _ 이정래 |

고서점, 화랑, 그리고 ‘그림마당 민’ _ 유홍준 | 나의 인사동 전시장 소요記 _ 김진하 |

인사동 ‘그림마당 민’ 이야기 _ 곽대원 l 고상한 미술관은 아니지만 지낼 만하니? _ 김구 |

인사동, 내 청춘의 고향 _ 김종근 | 수요일의 인사동 _ 최영남 |

천지에 쓴 낙서, 정신적 떠돌이가 된 사람들에게 _ 이도윤 | 새롭게 낡아가는 인사동을 그리며 _ 황주리 |

숨 쉬는 박물관 인사동 _ 김경업 | 1964년 인사동 _ 장광팔 |

먹 향기 가득했던 어린 시절 인사동의 추억 _ 정문헌 | 시간의 노숙자들 _ 정병례 |

인사동을 추억하며 _ 서공임 | 숨어 있는 전시장을 찾는 즐거움 _ 남궁옥분 |

화선지를 홍두깨로 다듬어 쓰셨다고 _ 유필근 | 우리나라 고미술품의 위상을 높이려면 _ 홍선호 |

나를 길러준 요람, 인사동 _ 최일순 | 스무 살 청년의 세 친구-삼청동, 관훈동, 인사동 _ 박상희 |

회상 _ 유상동 | 인사동, 나의 놀이터 _ 최정인 | 인사동에서의 안선재 수사 _ 안선재 |

인사동에 가면 _ 장순향 | 인사동에는 귀천이 있다 _ 강애심 l

인사동 40년 문화 공간 ‘시가연(詩歌演)’을 지키며 _ 김영희 | 흐린세상건너기 _ 한세미 |

 

 

정상과 비정상이 권력자의 눈높이에 따라 바뀌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군인들이 판친 정치를 사기꾼도 모자라 검사까지 설쳐대니, 나라꼴이 말이 아니다.

 

누가 집권하던 집권자의 입맛에 따라 정상과 비정상이 뒤집혀버리는 것은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정상적으로 사는 사람만 바보가 되는 격이다.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보니 좋아 지기는 커녕, 날이 갈수록 도를 넘고 있다.

인간들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지난 월요일 정오 무렵, 서울 사는 고향 친구들의 인사동 오찬모임이 있었다.

인사동 골목에 둥지 튼 여자만에 구정희, 이수만, 김이만, 윤성관,

하금순, 김순남씨 등 일곱 명이 모여 즐거운 시간을 가진 것이다.

 

한 달 전, 고향친구들이 상경하여 인사동 호텔에 여장을 풀고

청와대와 롯데월드를 둘러 한강유람섬까지 타는 일박이일 일정의 서울 관광을 다녔는데,

그때 찍은 사진을 모아 이수만씨가 사진집으로 엮어 왔다.

 

이수만, 신규식씨가 만들었다는 사진집에는 340여장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사진 뿐 아니라 인사동사람들블로그에 올린

서울 구경 온 고향친구들, 인생졸업사진 찍다는 수필까지 올려

무려 175페이지에 달하는 사진집이 된 것이다.

 

중복된 사진이 많은데다 무작위적인 편집이 눈에 거슬렸으나,

찍힌 친구들에게 사진 보내 줄 일을 들게 되어 고맙기 그지없었다.

 

6년 전, 정동지의 장날전시 때, 장흥의 마동욱 사진가

전시 개막식사진을 찍어 사진집으로 만들어 준적도 있었다.

소량으로 만들면 큰 돈 들이지 않고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그 때 알았는데,

왜 진즉 활용하여 정동지의 오래된 빚을 갚지 못했을까?

고향친구들 사진집을 보니, 그 일이 떠올라 마음이 다급해졌다.

 

오래전부터 정영신의 사진집을 먼들기 위해 틈틈이 기록해 왔다.

그러나 사진의 량도 만만치 않지만, 여러가지 비용이 마음에 걸렸는데,

두 권만 만든다면 큰돈 들이지 않고도 만들 수 있다기에 일을 벌이기로 했다.

사진을 년도 별로 구분하여 당시의 추억을 끌어내는 글까지 곁들인다면,

당사자에게는 최고의 선물이 될 것 아니겠는가?

 

정동지는 생일이나 명절만 되면 선물타령을 해대지만, 그동안 못들은 척 해왔다.

알라도 아이고 선물은 무슨 선물이고?“라며,

한쪽 귀로 듣고 한 쪽 귀로 흘린 수십 년의 세월이 늘 마음에 걸렸는데,

결혼 20주년을 기념해 처음이고 마지막이 될 선물 하나 만들어 주고 싶었다.

 

만약에 초상권 침해라며 압수해 간 정동지의 알몸 사진을 표지로 감는다면, 흥행도 가능할 것으로 여겨진다.

그 사진은 십 육년 전 장대비가 쏟아지는 만지산에서 찍은 그녀의 모습이다.

 

흙탕물이 튕겨 오르는 폭우 속에 검붉은 맨드라미까지 더해, 을씨년스런 풍경을

연출하는 그 때 장면은 처연하다 못해 처절한 느낌이 드는 걸작이었다,

그러나 정영신 개인 파일에 들어간 후로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사진이 되고 말았다.

설마 사진가가 자기 사진집 만든다는데도 내놓지 않을까?

 

그런데, 마동욱씨가 만들어 준 장터개막식 사진집도 줄 때만 좋았지, 두 번 다시 볼 기회는 생기지 않았다.

마침 고향친구들의 서울관광 사진집과 비교해 보기 위해 어렵사리 그 책을 찾아 낸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추억을 되새기는 이외의 감동은 없었다.

 

결국 비슷한 사진들의 나열 보다 좋은 사진을 선정하는 안목과

편집 능력에 따라 책이 달라진다는 것을 새삼 절감한 것이다.

 

어렵게 구입한 책도 세월에 밀려 버려지는 것이 어디 한 두 권이던가?

인쇄물 홍수시대에 자칫 쓰레기를 양산하는 일은 만들지 않아야 할 것 아닌가?

특히 두고두고 보아야 할 가족 앨범이라면 좀 더 세심한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오자 하나 글씨 체 하나에 책의 품위와 격이 달라진다.

 

그리고 무조건 사진이 많다거나 책 면수가 두터워야 좋은 것도 아니다.

어떤 사진을 어떻게 배열하고, 어떤 캡션을 어떻게 붙이냐에 따라

책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을 염두에 두어 제대로 한 번 만들어 볼 작정이다.

 

찍은 사진을 년대별로 분류하여 당시의 추억을 들추어내거나

삶의 의미까지 더해 준다면 책장에서 잠이나 자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런 사진집은 안 될 것으로 여겨진다.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어쩌면 만들려는 정영신 사진집도 책이 아니라 e북으로 만들어야 할지 모른다.

책장보다 컴퓨터 앞이 더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젠 량과 부피가 아니고, 질이며 가치다.

 

이날 여자만에서 가진 오찬비용은 구정회씨가 부담했다.

그런데, 이미례씨가 '여자만 경영에 손을 땠을까? 음식도 달라졌고 종업원들이 불친절하기 짝이 없었다.

밑반찬도 다시 요구할 수 없는데다, 가져 온 밥도 바짝 말라 있었다.

밥을 바꾸어 달라고 하니 손님 먹는 밥을 손가락으로 꾹꾹 찔러보는 무례도 서슴지 않았다.

 

처음부터 툇마루에서 오찬모임을 갖기로 했으나,

 괜찮은 집으로 가자는 구정회씨 이야기에 여자만으로 정했는데, 후회막급이었다.

주인 없이 장사 잘되는 집 없고, 불친절에 다시 가고 싶은 집 없다.

 

구정회씨는 어릴 때 이외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고향에서 떠나오며 기억에서 멀어졌는데, 듣기로는 긴 세월을 군인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의 절제된 삶과 빈틈없는 생활습관에서 군인정신을 가늠할 수 있었지만,

그 역시 내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동안 고향친구도 잊고, 다들 엄청 바쁘게 살았던 것 같다.

 

나야 민방위 출신이라 군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게 없지만,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했다.

'군대생활은 어디서 했고 전역 계급은 뭐냐?"고 물었더니, 입 무거운 구정회씨가 말문을 열었다.

 

귀가 어두운데다 말도 조근조근 하는 바람에 정확히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두 차례에 걸쳐 군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한번은 소위로 임관하여 월남전에 참전했을 때이고

한번은 12.12사태를 일으킨 전두환 졸개들 총에 죽을 뻔 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전두환의 12,12사태에 저항한 정병주 특전사령관 참모로 일했으나,

반란군들의 쿠테다가 성공하는 바람에 소령으로 강제 전역되었다고 한다.

명령을 생명으로 여기는 군인이 상관에게 총질을 해대는 더러운 판에 무슨 미련이 있겠냐마는,

간신처럼 달라붙어 승승장구하는 동료들을 보며 어찌 간이 뒤집히지 않겠는가?

 

전두환의 쿠테타 암호명인 생일집잔치의 최대 희생양은 정병주, 장태완, 김진기 장군이었다.

그들이 받은 수모는 말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만약 정병주사령관 수하 였던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같은 간신배처럼 상관을 배신했더라면

그런 처참한 수모는 당하지 않을 것 아닌가?

 

하기야! 만약 전두환을 직속상관으로 두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명령에 죽고 사는 군인이 상관의 명령을 어찌 거부할 수 있겠는가?

이게 군인이 짊어져야 할 숙명인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정당하지 않은 명령까지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다.

 

나쁜 일은 상관이 아니라 부모의 말도 듣지 않는 것이 사나이가 갈 길이 아니겠는가?

그 때 쿠테타 군부에 고개 조아려 충성서약이라도 했다면,

처자식은 편하게 살았을지 모르지만, 실패한 인생이나 다름없다.

 

그는 소령으로 전역해야 할 타고 난 운명이며 팔자였다. 

장한 사람을 만들어 주었으니, 팔자가 나쁘지는 않다.

우리가 정치군인들의 비참한 말로를 똑똑히 보지 않았던가?

어떤 이는 죽어서도 반역자의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 살지만, 자네는 용기 있는 군인으로 길이 남는다.

 

여자만에서 일어나 찻집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여자만맞은편에 있는 귀천에는 손님이 많아 앉을 자리가 없었다.

이수만씨의 안내에 따라 찻집 인사동으로 갔다.

그곳은 젊은이들이 찾는 찻집이지만, 안쪽에 작은 정원이 있어 사진 찍기 좋은 장소다.

인사동에는 자판기 커피가 없어 달콤한 팥죽을 시켰는데, 찻값은 하금순씨가 냈다.

 

그 자리에서 서울모임 회장으로 이수만씨가 추천되어, 두 달에 한 번씩 정기적인 모임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얼굴보고 밥 먹는 모임이 아니라 의미 있는 시간을 창출해 내야 할 것이다.

하다못해 가물가물한 어릴 때 기억의 퍼즐이라도 맞춰, 잘못 알고있는 고향의 역사는 없는지 살펴보자.

 

그 곳에서 늙은 군인의 초상사진이라도 한 장 남기고 싶었다.

안쪽 작은 정원으로 구정희씨를 불러내어 사진을 찍었으나, 썩 마음에 드는 배경이 없었다.

사진 값이라도 하라는 듯 십만원을 꺼내 주기에, 고맙다는 말도 못하고 받아 챙겼다.

서울역에는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이 많아서다.

 

날씨는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떨어질 것처럼 잔뜩 지푸려 있었다.

인사동 길을 걸어 나오며 자랑스러운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니,

김민기가 만든 늙은 군인의 노래‘가 떠 올랐.

 

 

나 태어난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
꽃 피고 눈 내리기 어언 삼십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흙 속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 청춘

 

아들아 내 딸들아 서러워 마라
너희들은 자랑스런 군인의 자식이다
좋은 옷 입고프냐 맛난 것 먹고프냐
아서라 말아라 군인 아들 너로다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 청춘"

 

사진,  / 조문호

 

 

 

연초대비 2배 늘어, 외국인들 증가 추세…


 
서울 인사동 거리. 2022.11. 5 / 조문호사진

 

"외국인 손님들이 올해 초에 비해 요즘 확실히 늘어난 걸 체감합니다. 요즘 저녁에 오는 손님들 중 20~30%는 외국인이에요" (인사동의 한 삼겹살집 사장)

 

 "8월 초부터 확실하게 외국인들이 많아졌고 요즘 들어 더 많아졌습니다. 이제 국내 입국자에 대해 코로나19 유전자 증폭(PCR)검사 의무가 해제된 만큼 더 많은 외국인들이 왔으면 좋겠어요" (명동의 한 화장품가게 종업원)

 최근 국내 입국자에 대한 PCR검사가 폐지되고 원화 가치 하락으로 여행경비가 저렴해지면서 한국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이 늘어나고 있다. 큰손이었던 중국인 관광객들은 중국의 엄격한 방역정책으로 아직 한국 방문은 눈에 띄지 않지만 그 자리를 일본, 유럽 등지의 관광객들이 메우고 있다.

 

서울 인사동 거리에서 외국인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딸을 보기 위해 한국을 찾은 미국인 질 백베이(58·여)는 "최근 입국시 PCR 검사 폐지 소식을 들었는데 이제 안해도 돼 너무 좋다"며 "골동품 같은 것을 좋아해 인사동에 왔는데 환율까지 좋아서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서울 경복궁역 인근 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 인근에서 만난 싱가포르 국적의 크리스틴(30·여)도 "마침 어제 입국했는데 PCR검사를 안해서 시간도 절약돼 좋았다"며 "경복궁에서 한복 체험도 하고, 주변에 예쁜 카페도 방문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30분동안 100여명 이상 외국인 보여…살아나는 도심 관광지

2일 오전 서울 '명동거리' 중앙에서는 외국인 관광객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이날 오전 10시30분부터 11시까지 30분간 거리에서 확인한 외국인은 100여명이 넘었다. 여행 가방을 끌며 숙소로 이동하는 젊은 커플(짝)들부터 10여명이 함께 화장품 가게로 들어가는 모습까지 오전부터 명동거리에는 활기가 넘쳤다.

러시아에서 여자친구와 함께 이틀 전 한국에 도착했다는 세르게이(26)는 "우리는 단 하루 차이로 PCR검사를 했지만 이제 없어지는 만큼 더 많은 친구들이 쉽게 한국을 방문할 수 있어서 좋을 거 같다"며 "한국에는 2주 정도 머물면서 부산도 가고 지역 맛집도 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명동 거리에서 만난 한 관광통역안내원은 "올해 5월 이후부터 외국인 관광객들이 늘어나는 추세고 요즘 방역완화 기조가 더해져 지금처럼 이른 시간부터 외국인들이 많이 이곳을 찾는다"며 "특히 요즘은 중남미와 유럽 등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이 오는데 일본인들도 몇 달 전부터 한국에 무비자 입국이 되면서 크게 늘고 있다"고 밝혔다.

서울 인사동 거리. 2022.11. 5 / 조문호사진


◇상인들 "방역조치 완화된 만큼 더 많은 관광객 한국 왔으면"


외국인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서울 주요 도심 관광지의 상인들도 덩달아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이날 오전 인사동 거리에서 플리마켓을 운영하는 정대철 자투리컴퍼니 대표이사도 "PCR검사 폐지 등 입국 완화조치를 하면 더 많은 외국인들이 들어올 거 같다"고 밝혔다.

인사동에서 삼겹살을 파는 모 식당 사장도 "최근에 외국인 손님이 늘었는데 저녁 시간의 경우 10명이 온다고 하면 2~3명은 외국인인 거 같다"며 "친구나 커플 단위로 많이 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서울 명동의 한 화장품가게 종업원은 "요즘은 홍콩, 필리핀, 미국, 영국 등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올해 초에 비해 진짜 많이 오고 있고, 오늘도 이른 시간부터 바쁘다"며 "체감상으로는 올 초에 비해 지금이 2배 정도 외국인 손님이 많아진 거 같다"고 설명했다.

베트남 단체 관광객(10명)을 인솔한 가이드도 "현재 베트남에서도 한국으로 많은 사람들이 관광을 오려고 한다"며 "방역 조치가 더 완화된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화장품 가게뿐만 아니라 식당도 방문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뉴스1) 김동규 기자, 유민주 기자 

dkim@news1.kr

지난 주말은 지옥 같은 하루를 보냈다.

이태원 참사 소식으로 온 종일 일손을 놓고 가슴 태웠다.

 

젊은이들이 무슨 죄가 있어, 날벼락에 깔렸는지 모르겠다.

지긋지긋한 공부에 얽매어 살다, 모처럼 축제 한 번 즐기러 나갔다가 목숨 잃은 것이다.

대비는 물론 늦은 대처로 더 많은 인명을 잃게 한 정부의 무능에 할 말을 잃었다.

 

더 이상 슬픔에만 빠져 있을 수 없어, 다음 날 집을 나섰다.

인사동 북인사마당에 마련되었다는 합동 분향소를 찾아 간 것이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추모객은 많지 않았으나, 덕원스님 모습이 보였다.

비명에 숨져 간 청춘들에게 고개 숙여 명복을 빌었다.

 

인사동 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와 다름없었다.

 

가게에 걸린 상품은 안타까운 희생을 애도하는 조화처럼 보였고,

목 없는 한복 마네킹은 희생자의 넋인 냥 비통함을 더했다.

 

이재민씨의 이것은 돌이다전시 보러 나무화랑'에 갔다.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작가가 반갑게 맞아주었는데,

전시작은 여러 가지 형태의 돌이 그림과 병치되어 있었다.

 

불안감을 조성하는 허공에 뜬 돌은,  무의식의 세계를 현실 공간에 끌어들인 것 일까?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작가 마그리트가 연상되는 작품이었다.

실물인 돌을 그림과 연결시켜 이야기를 전개한 것이다.

 

꿈과 실제의 구분을 허문 작품들은 돌 덩이에 의한 중량감으로

화면에 팽팽한 긴장감을 불러 일으켰다.

작가의 철학적 사유를 감지할 수 있었다.

 

작품에 등장한 돌의 형태 또한 기묘했다.

때로는 섬이 되거나 산이 되어 서사적 의미를 더했다.

 

그날따라 이재민씨의 돌이 무겁게만 느껴졌던 것은

비명에 떠난 청춘들의 안타까운 죽음이 한 몫 했으리라.

 

이 전시는 오는 118일까지 열리니, 추모기간 동안 많은 관람을 바란다.

나무화랑은 인사동 합동 분향소와 백 미터 지점에 있다.

 

다 같이 이태원 참사 희생자를 추모합시다.

 

사진, / 조문호

 

 

경복궁·창덕궁·인사동 등 6개 코스…11월4일부터

 

경복궁 도보해설관광코스

서울시와 서울관광재단은 자녀 동반 이용객 대상으로 '서울 도보 해설 관광 가족 코스' 6개를 11월4일부터 운영한다고 30일 밝혔다.

'서울 도보 해설 관광'은 경복궁, 북촌, 서촌 등 서울의 주요 관광명소를 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걸으며 명소에 담긴 역사, 문화, 자연 등을 감상하는 무료 해설 프로그램이다.

이번 6개 가족코스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낙산성곽, 인사동이다.

성인 중심의 어려운 이야기에서 벗어나 어린이도 쉽게 이해하고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역사적 일화를 옛 이야기처럼 소개해 재미있게 진행될 수 있도록 해설 설명서를 재구성했다.

경복궁 코스는 세종대왕의 생애와 업적을 배울 수 있다. 세종대왕은 경복궁에서 즉위하고 승하한 최초의 국왕이다.

덕수궁은 근대화를 위한 대한제국의 노력, 창덕궁은 한국의 세계 문화 유산, 창경궁은 이산 정조대왕의 일대기를 살펴볼 수 있다.

낙산성곽은 600년 서울의 역사 이야기를 듣고, 인사동은 3·1운동의 역사적 현장을 찾아가 보는 코스다.

소요시간도 어린이의 체력과 집중력을 고려해 기존 2~3시간 코스에서 1시간30분으로 단축했다.

가족 코스 전담 해설사가 배정돼 해설을 진행하고 주중 1일 2회(오전 10시, 오후 2시) 주말 3회(오전 10시, 오후 2시, 오후 3시) 운영된다. 그룹당 최대 10명까지 이용 가능하며 관광일 기준 3일 전까지 예약 가능하다.

김현주 서울시 관광산업과장은 "문화관광해설사의 재미있고 유익한 설명과 함께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더욱 친근하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고 말했다.

오늘은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한 잔 하는 날이다.

평일인데도 거리에 사람이 많은걸 보니, 코로나 퇴조에 힘입어 경기가 살아나는 것 같았다.

 

가로수 사이에 걸린 ‘아리랑 미술제’ 현수막이 그나마 문화의 거리임을 말하지만,

화랑이나 표구점 등 인사동의 대표적 상점들은 파리만 날렸다.

 

거리에는 버스킹 나선 젊은 음악가의 바이올린 곡이 애잔하게 울려 퍼진다.

크라이슬러의 '사랑의 기쁨'을 연주했으나 아무도 관심주지 않았다.

거리에서 공윤희, 임태종, 조준영, 김재홍씨 등 아는 분도 여럿 만났다.

 

인사동의 멋과 분위기를 맛보려면 구불구불 미로처럼 이어지는 골목으로 들어가야한다.

숨 가쁜 세월 속에서도 기와를 걷어내지 않은 천장 낮은 한옥 주막이 군데군데 둥지 틀고 있다.

 

흙 뭍은 토기나 무명화가의 그림까지 너그러이 품을 수 있는 그런 공간이다.

거친 흙벽과 창호 문살 사이로 번지는 불빛조차 포근하다.

 

아직은 고즈넉한 분위기의 술집이나 찻집들이 남아있어, 인사동 고유의 명맥을 유지하는 것이다.

주막에는 지난 시절의 낭만과 향수를 한 자락씩 깔고 앉은 예술가들이 모여 인생과 예술을 노래한다.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정적 이미지가 아니라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동적 이미지를 연출한다.

 

안국역 6번 출구의 개구멍 같은 샛길, 벽치기 골목은 언제나 취객들로 북적댄다.

담배 피울 수 있는 장소를 찾다보니, 골목자체가 술집이 된것이다.

 

이날 모이기로 한 장소도 담배 연기 자욱한 벽치기 골목의 ‘유목민’이었다.

 모이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열명 정도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 모임을 주도하는 조준영시인을 비롯하여 전강호, 공윤희, 조해인, 김명성, 

임태종, 이명희, 김수길, 정복수씨 등이 모여앉아 술잔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조준영시인이 부지런히 연락했으나, 여러 사람이 부도냈다고 한다.

그 날 새벽녘 까지 술을 마셨다는 장경호, 김구, 임경일씨 등 몇몇은 아예 집에 드러누웠단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창예헌’ 조직도 이제 한 물 갔다.

‘창예헌’의 뿌리는 2000년 가을, 정선 만지산에서 개최한 ‘동강주민들을 위한 굿마당’이 발단이었다.

 

김명성씨가 서울에서 버스 두 대에 인사동 예술가 70여명을 태워 왔는데,

행사장인 귤암분교에는 동강 지역 주민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붐볐다.

귤암리 가는 길은 차가 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그때 그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한국사진굿당’이란 조직을 만들어

가을이 되면 ‘만지산 서낭당 축제’를 열었으나,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제반 경비문제도 있었지만, 거리가 먼 지역적 한계는 어쩔 수 없었다.

 

그 이후 한 동안 흐지부지하다 2013년 가을 무렵에야 새로운 조직인

‘창예헌’ 발기총회를 인사동 ‘아리랑’에서 개최한 것이다.

 

구중서, 민 영선생 등 원로작가 열여덟 분을 고문으로 모시고

150여명의 조직을 재정비한 인사동 사람들의 모태가 발족한 것이다.

 

단양 사인암과 전북 완주에서 가을축제를 열기도 했고,

인사동에서 천상병시인을 추억하는 ‘인사동 백년을 걷자’ 축제도 열었다.

 

그러나 이사장을 맡은 김명성씨 사비에 의지해 모든 것이 이루어지다보니, 조직 결집력은 떨어졌다.

결국 김명성씨가 운영하는 ‘아라아트’가 중국자본에 넘어가자 ‘창예헌’ 조직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 이후부터 정기적인 인사동 모임이 없어, 조준영시인이 발벗고 나선 것이다.

모든 술값을 김명성씨가 부담하던 것에서 벗어나, 참여한 분에게 만원씩 거두기로 한 것이다.

 

그 돈으로 술값 내기란 턱없이 부족하지만, 참여의식을 높이기 위한 조준영씨의 고육지책이었다.

긴 세월 김명성씨가 부담해온 탓에 다들 공짜에 길들었을까?

 

이 날도 십여명에게 받은 돈으로 43만원을 계산하는 일이 벌어졌지만, 조준영씨가 떠 안았다.

술 자리가 파할 즈음에야 이인섭선생도 나타났고, 지방 촬영 갔던 정영신씨도 나타났다.

'인디프레스' 개막식에 가서 술이 그나하게 취한 서인형씨와 최석태씨도 나타났고,

노광래씨 까지 등장했으나 모자라는 술값 정산에는 도움되지 않았다.

 

인사동 모임에 활력이 생기려면 젊은 피가 수혈되어야 하는데, 다들 너무 늙어 버렸다.

연락하는 조준영씨도 환갑을 지난지가 한참 지났고,

여자라고는 씻고 벗고 하나 뿐이라는 연극배우 이명희도 벌써 할머니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도 노래 부른 대폿집 주모역은 결국 하지 못할 팔자인 것 같다.

 

대폿집  마담이 아니라 대폿집 할멈이면 어떤가?

인사동 술꾼들 바가지 씌우려면 아무래도 할멈이 제격이지 않겠는가?

나 역시 힘이 딸려 벽치기 골목에서 벽치기도 못 칠것 같다.

어즈버 가는 세월 누가 잡을 수 있겠나?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의 원로 시인 황명걸(87)선생께서 지난 9 13일 새벽무렵 지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한 달 전에 위독하다는 소식을 받았으나, 병 병문도 못한 채 운명하시어 더 가슴 아픕니다.

 

황명걸선생을 인사동 대표 시인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창예헌)’고문이기에 앞서,

인사동에 대한 사랑이 남 달랐기 때문입니다. 인사동에 일만 있으면 노구를 이끌고 먼 길을

달려오시던 선생의 따뜻한 마음도 이제 그리움으로 묻을 수밖에 없습니다.

 

황명걸시인의 강력한 현실비판시는 60~70년대 한국시단을 풍미한바 있습니다.

서울대불문과를 중퇴한 후 여상’, ‘주부생활’, 여성동아기자로 일했으며,

1962자유문학봄의 미아가 당선되며 등단하셨지요.

그동안 ‘한국의 아이’(1976)를 비롯하여 마음의 솔밭’(1996),‘ 저고리 검정 치마’(2004),

저희를 사랑하기에 내가’(2017)등의 시집을 펴낸바 있습니다

 

1975년 자유언론 운동으로 '동아일보'에서 해직되어 펴낸 첫 시집 `한국의 아이'가 나오며 세상의 주목을 받았지요.

생계를 위해 일했던 LG에서 퇴직한 뒤는 북한강변에서 갤러리 카페 `무너미'를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은백양 또는 자작나무처럼 가을 들판에서 허연 흉터를 스스로 드러내며

저녁노을을 향해 서 있는 그의 시들은 서러울 만큼 아름답다.

칠순이 되어서야 시의 참맛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은 아닐까!”

신경림 시인이 황명걸시인의 네 번째 시집을 읽고 상찬한 말입니다.

아래는 판금 조치라는 수난을 겪기도 한, 선생의 대표 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한국의 아이’'

 

배가 고파 우는 아이야
울다 지쳐 잠든 아이야
장난감이 없어 보채는 아이야
네 어미는 젖이 모자랐단다
네 아비는 벌이가 시원치 않았단다
네가 철나기 전 두 분은 가시면서
어미는 눈물과 한숨을
아비는 매질과 술주정을
벼 몇 섬의 빛과 함께 남겼단다.
뼈골이 부서지게 일은 했으나
워낙 못 사는 나라 백성이라서
허지만 그럴수록 아이야
사채기만 가리지 않으면
성별을 알 수 없는 아이야
누더기 옷의 아이야
계집아이는 어미를 닮지 말고
사내 아이는 아비를 닮지 말고
못 사는 나라에 태어난 죄만으로
보다 더 뼈골이 부숴지게 일을 해서
멀지 않아 네가 어른이 될 때는
잘 사는 나라를 이룩하도록 하여라
멀지 않아 네가 어른이 될 때는
잘 사는 나라를 이룩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명심할 것은 아이야
너무 외롭다고 해서
숙부라는 사람 믿지 말고
외숙이라는 사람을 믿지 말고
그 누구도 믿지 마라
가지고 노는 돌멩이로
미운 놈의 이마빡을 깔 줄 알고
정교한 조각을 쪼을 줄 알고
하나의 성을 쌓아 올리도록 하여라
맑은 눈빛의 아이야
빛나는 눈빛의 아이야
불타는 눈빛의 아이야

 

도시 소시민의 무기력한 생활을 반성하며 삶의 의미를 되새긴 시였지요.

인사동을 못 잊어, 시와 그림으로 여생을 달랜 선생의 지난 자취가 너무 가슴 아립니다.

 

부디 극락왕생하시길 빕니다. 

 

장례식장 : 순천향병원 장례식장 6호

발인 : 2022년 9월 15일 오전6시30분

장지 : 마석 모란공원, 예술인묘역

 

상주 : 황요한 유성희, 황서정 김경덕

배우자 서상실

손자 : 황일우, 손녀 : 황지은, 황지혜

외손녀 : 김나영, 김경민

손서 : 변문균, 손부 : 서가이

 

그동안 찍은 선생님의 사진들을 모았습니다.

지난 날을 돌아보며 선생의 명복을 빌어주시기 바랍니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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