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ks for the Heart

김명숙展 / KIMMYUNGSOOK / 金明淑 / painting

2023_0525 ▶ 2023_0627 / 월요일 휴관

김명숙_HT20_종이에 혼합재료_170×130cm_2019

김명숙 홈페이지_www.myungsookkim.net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30pm / 월요일 휴관

인디프레스_서울

INDIPRESS_SEOUL

서울 종로구 효자로 31(통의동 7-25번지)

Tel. 070.7686.1125

indipress.modoo.at

@indipress_gallery

www.facebook.com/INDIPRESS

 

2007년 무렵부터 2018년경까지 이어진 이 심장연작은 가슴의 상흔들에 관한 공부였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작업들은 나의 심우도였을지도 모를 미노타오르스 연작과 Works for Workers 연작, 그리고 자신의 심연에로의 하강에 관한 Katabasis 연작들과 동시에 진행되어 아마도 그 연작들에 내재되어 있을 상흔들이 Heart라는 도상을 빌어 재현된 것이리라. 연작들 중에는 극심한 신경증에 시달리던 환자가 고통에 못 이겨 자기도 모르게 쥐어뜯어 삼킨 머리카락들이 어지러이 뭉쳐있는 흉부 X레이 사진을 보았던 기억을 되살려, 머리카락들과 담뱃재를 자리공이라는 식물의 즙에 섞어 그린 심장이 있다. 민간에서 자리공은 살충제나 지혈제로 쓰인 약재이며 신선들에게는 불로장생의 음식이었다고 한다. 심장을 인체화한 삼면화는 정신의 구심력과 원심력,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형상화한 작업이었다. 이 삼면화에서도 상처에서 흐르는 피와 그 피를 지혈해주는 제의적 의미로 자리공의 즙이 사용되었는데, 몇 년이 지나니 탈색이 되어 마른 피 자국처럼 되어버렸다.

 

김명숙_HT16_종이에 혼합재료_170×130cm_2016

 

작업을 하면서 읽었던 '심장의 역사'에 의하면 고대 이집트에서는 심장이 뇌로 간주되었으며 그들은 심장으로 생각한다고 믿었다고 한다. 한편 수피즘에서 심장은 내부의 황제로서 감정과 욕망을 다스리고, 신성으로 통하는 문으로 인식되었으며, 인도인들에게 심장은 브라만이 거처하는 마음의 지성소였다. 니체의 심연의 아이들은 '빛나는 어둠'의 세계인 가장 깊은 정신의 심연으로 내려가 마침내 심장의 박동 소리에 맞춰 노래하고 춤출 수 있는 대지의 아이들로 다시 태어난다.

 

김명숙_영정07_종이에 먹물_95×75cm_2013

 

심장 연작이 마무리될 무렵, 작업실의 심장 그림들은 더이상 물감으로 재현(represent)되기를 거부하며 오브제로 제시(present)되기를 요구하였다. 폐차에서 떼어낸 찌그러지고 녹슬고 삭은 부품들로, 숯으로, 재로, 얼음으로, 깨진 거울들로, 누더기로, 피 묻은 거즈로, 오래된 문짝으로, 진주를 품은 조개로, 연꽃으로… 하지만 제한된 작업실 공간에서 거대한 심장 오브제들을 작업하기는 아무래도 여의치 않아 마음 속 무한의 공간에 하나씩 만들어 두기로 하였다. 비록 그날 심장들의 요구에 응하지는 못했지만, 작업실에 오래도록 놓여있던 의학 사전과 응급처치법에 관한 소책자로 Heart of Master를 재현해 보았다. 낡은 의학 사전은 도교에서 말하는 일곱 개의 구멍이 난 깨달은 자의 심장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자신이 살면서 앓는 모든 육체적, 정신적 질병을 스스로 진단하고 치료하면서 마침내 깨달은 자가 된 자의 심장에 나있다는 일곱 개의 구멍의 의미는 몇 년 뒤 우연히 어린 손녀에 의해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그 무렵 처음으로 엄마 없이 두 주일을 보내게 된 손녀가 내게 이런 문자들을 보내왔다. "가슴에 구멍이 세 개쯤 뚫린 것 같아요." "오늘은 가슴에 구멍이 열 개도 더 뚫린 것 같아요." 살면서 가슴에 수없이 많은 구멍이 뚫릴 만큼의 고통을 겪어낸 자만이 비로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의미이리라… First Aid라고 적혀있는 낡은 소책자에는 내 자신에게 응급처치가 되어 줄 만한 문장들을 발췌하여 군데군데 적어놓았다. 돌 심장 오브제들은 아파트 화단에서 우연히 하트모양의 돌을 주운 것을 시작으로, 몇 년에 걸쳐 오가며 눈에 띄어 하나씩 모아진 것으로 심장연작의 완결작으로 미루어 왔던 Bulletproof Heart, 즉 마침내 어떠한 고통도 견뎌낼 수 있게 된 방탄심장을 대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작은 돌 심장은 손녀가 작업실 구석의 방탄심장들을 보고는 며칠 뒤 길에서 손톱만한 돌맹이를 주워 "이건 상처가 다 아물고 새 살이 돋아나는 심장이야."라며 내 손바닥에 올려 준 것이다.

 

김명숙_새_종이에 혼합재료_220×320cm_2004

 

1990년대 초반에 그려진 화산 연작은 휴화산 상태의 나의 심장이 표현되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아직 그려내지 못한 채 오래도록 마음에만 품고 있는 심장들이 있다. 전사의 심장, 제단에 바쳐진 심장, 인간의 영혼에 깃든 신성이 육화된 심장, 그리고 벙어리 냉가슴… ■ 김명숙

김명숙_Harassed land_종이에 혼합재료_245×245cm_1990

 

이 심장들에는 관객을 향해 마주한 인물이 내재되어 있다. 분해되어 타들어가는 마음/정신을 환유하는 심장/뇌에는 고뇌하는 인물이 내재되어 있다. 베로니카의 손수건처럼 바탕에 상처로부터 흘러나온 체액이 베어든듯한 장기는 추락/비상이라는 작가의 주제와 연결하면 날개처럼도 보인다, 그것들은 날 수 없는 묵직한 날개, 다치고 피흘려서 비상할 수 없는 날개들이다. ■ 이선영

Vol.20230525d | 김명숙展 / KIMMYUNGSOOK / 金明淑 / painting

POP KIDS

최윤정展 / CHOIYUNJNG / 崔允禎 / painting 

2023_0418 ▶ 2023_0501

최윤정_pop kids #121_캔버스에 유채_53×53cm_2022

최윤정 홈페이지_www.choiyunjung.kr

 

초대일시 / 2023_0418_화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5:30pm

 

갤러리 H

GALLERY H

서울 종로구 인사동9길 10

Tel. +82.(0)2.735.3367

www.galleryh.onlineblog.naver.com/gallh

 

최윤정의 팝 키즈, 미디어화된 인간종에게 길을 묻다  1. '현대성은 곧 시뮬라크르'라는 들뢰즈나 보드리야르의 현실 담론은 벌써 구닥다리가 되어버렸다. 시뮬라크르는 원본성이 그나마 설정 가능했던 아날로그적 상황에서 도출된 상대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전면적 디지털 시대에 원본성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복제나 복제성 자체가 불가능하다. 모두가 원본이거나 복제본이고, 실재인 동시에 시뮬라크르다. 임의성, 상호성 없는 반복, 혼종과 변종의 무한대의 증식뿐이다. 어떤 것도 다른 어떤 것들에서 독립적이지 않다. 의미들이 뒤섞이고 갈려 나간다. 경계는 닳아 없어졌다. ● 최윤정의 세계가 그렇다. 스타벅스 커피와 맥도널드 햄버거, 마이클 잭슨과 백남준, 미키마우스와 코카콜라를 든 산타클로스 모두 상품경제가 만들어낸 판타지, 지구촌화된 팍스 아메리카나의 유산이다. 목록은 끝이 없다. 최윤정의 인간들은 유전적으로 개량된 인간종이다. 모두가 동일한 유전형질을 지닌 형제거나 자매다. '팝 키즈(pop kids)'로 명명되는 그들 모두는 성장을 멈추었거나 성장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는 아동이거나 극강의 동안(童顏)을 유지하는 어른이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실존의 고유한 지표들, 중력이 작동하는 행성에서 살아온 흔적, 예컨대 피부 착색이나 주름, 흉터, 기미 등의 완전한 부재에 있다. 국적, 인종, 나이와 관련된 정보들의 디지털적 삭제. 야무지게 오므린 입술과 인중 사이에서 이질적인 표정이 만들어진다. 사회적 경험, 대체로 스트레스와 고통을 견디는 과정의 산물인 실존 인간의 표정에선 찾아볼 수 없는 부재의 표정이다. ● 안경: 얼굴의 반 이상을 가리는 안경, 최윤정이 설계한 과도함의 게임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템'이다. 핵심적인 미학적 전략이기도 하다. 안경의 과도하게 큰 렌즈는 캔버스 안의 또 하나의 쉐입트 캔버스로 작동한다. 이 캔버스 안의 캔버스, 스크린 안의 스크린은 원래 캔버스(스크린)에는 부재하는 다른 세계를 투영해낸다. 이로 인해 최윤정의 매우 팝(pop)하게 평면적으로 처리된 회화에 연극적 긴장감이 감돈다. 팝 키즈의 결핍된 실체? 욕망하고, 집착하고, 빠져나올 수 없는 해방구의 부재, 중독? 어떻든 두 개의 서사가 굴러간다. 이것은 팝 스타 앤디 워홀이 선글라스를 착용했던 것과는 상반된 맥락이다. 워홀은 백반증으로 탈색되어 창백해 보이는 피부를 가리기 위해 선글라스를 착용했다. 진한 메이크업과 은색 가발과 같은 맥락이었다. 은폐용이었던 셈이다. 반면 최윤정의 팝 키즈의 안경은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는 스크린이다.

 

최윤정_pop kids #122_캔버스에 유채_30×30cm_2023
최윤정_pop kids #120_캔바스에 유채_200×200cm_2022
최윤정_pop kids #125_캔바스에 유채_53×53cm_2023

2. 최윤정의 팝 키즈는 전자 미디어로 세계를 경험하는 디지털 시대의 신인류다. 낯선 무표정과 컬러풀한 헤어 스타일, 그리고 피부는 뾰루지 하나 없이 비현실적이다. 팝 키즈는 인간종(human race)과는 다른 미디어화된 신 인간종(mediaized new human race)이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를 규명하는 결정적인 것은 무엇인가? 두 종 사이에 일어난 사건은 진화(evolution)인가? 미디어화된 인간종은 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경험한다. 하지만 그것은 제대로 된 세상이 아니고, 무엇보다 제대로 된 인식이 아니다. 먼저 그것은 제대로 된 세상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 세상에는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괴물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나치즘, 카지노자본주의 같은 사악한 전체주의는 존재했던 적도 없고, 의지했던 것이 거짓으로 드러나는 배신과 좌절의 기억은 '완삭'된 세계다. 언젠가 알베르 카뮈가 통렬하게 고발했던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거짓으로 치닫는 사회"는 구닥다리 고전에나 나오는 드라마로 치부된다. 그렇기에 온갖 편견과 맞서 자기 시대의 병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려 애쓰는 고독한 인간이 등장할 필요도 없는 세상이다. 이 세계에서 합법적 대의(justa causa)는 시럽을 잔뜩 뿌린 케이크 같은 삶이다. 여기서 행복하지 않은 것은 모두 적으로 간주된다. 이 세계에서 여성은 "현모양처, 여전사, 동화 속 공주여야 한다. 착하고, 약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를 모두 소유한 자"여야 한다. 최윤정은 질문한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가?' 미디어가 곧 메시지고, 기술이 도덕적 우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들만큼 도덕적인 인간은 이전에 없었다! 마셜 매클루언의 논제를 기억하자. "미디어는 단지 다양한 내용을 운반하는 중립적인 컨테이너가 아니다. 미디어는 특수한 내용을, 예컨대 새로운 지각을 만들어낸다"(한병철). 최윤정의 팝 키즈는 미디어로부터 배우고, 깨닫고, 촉구된다. 팝 키즈의 인식은 디지털 미디어 체계에서 길을 잃는다. 보는 감각, 보는 방법을 잃어버렸기에 그들이 아는 세계는 포스트자본주의의 소비재들, 패스트푸드, 디즈니랜드의 캐릭터들과 할리우드의 미디어 스타로 국한된다. 그들은 소망의 충족을 소망함으로써 자본주의 경제의 첨병이 된다. 자본주의는 소망의 경제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제대로 된 세상이 아니다. 이것은 뒤집힌 세상이다. 최윤정이 제대로 본 셈이다. 이 세상은 우리의 집착으로부터 만들어진 세상이라는 사실 말이다. "세상의 실재는 우리가 세상의 사물들 속에 옮겨놓은 자아의 실재다." 스타벅스 커피와 맥도널드 햄버거, 나이키와 페라리는 집착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 외적인 실재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끝없이 집착하는가? 어떤 것이 실재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팝 키즈가 소망하는, 시럽을 뿌린 경험에만 의존하는 한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헤겔이 탄식했던 대로 세계로부터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세계로부터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배울지라도, 결과는 배우기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고대인이건 현대인이건 당하는 일은 모두 동일하고 해결책은 없다. 집착의 역사다. 시몬 베유를 읽어야 한다. ● "어떤 것이 실재임을 알게 되면 더는 집착할 수 없게 된다. 집착이란 결국 실재감의 부족인 것이다." 하지만 자아에 선험적으로 각인된 불완전성으로 인해 우리는 무엇이 실재인지 알 수 없고, 알 수 없기에 집착하는 것이다. 집착에서 벗어나기 전에 우리는 외적인 실재를 볼 수 없다. 베유는 사태나 상황을 구성하는 조건들과는 다른, "인간 영혼의 가장 비밀스러운 부분과 연결된 다른 개념들이 거주하는 공간인, 영원하고 보편적이며 무조건적인 것의 영역의 존재에 대해 말한다. 이 영역에 대한 베유의 서술이다. "우주의 바깥에,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것의 너머에, 모든 인간에서 발견되며, 모든 인간의 마음이 일치하는 총체적인 선(善)에 대한 하나의 실재가 있다. 이 실재로부터 이 지상에서의 모든 선이 흘러나온다." 이 공간, 이 영역에서만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것이 가능하다. 우리가 잃어버린 공간이다. 존재성의 근원, 눈과 마음을 여는 지성과 풍요로운 감정….

 

최윤정_pop kids #31_캔바스에 유채_150×150cm_2010
pop kids #80(missing)_캔바스에 유채_18×26cm_2014

3. 최윤정의 팝 키즈는 몸이 부재하다. 신체적 접촉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상태다. 만지거나 포옹할 수도 없고, 걷거나 달릴 수도 없다. 안경이, 접촉이 없는 봄(seeing)이 세계를 경험하는 유일한 통로다. 하지만 이러한 접촉이 결여된 봄은 응시의 타락으로 귀결된다. 단지 소비할 뿐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닌, 실재로부터 멀어지고 소외되는 미디어 문맹의 길, 인식의 퇴화(regression)로의 치닫기다. 이 퇴화의 연대기가 더 가속화되는 중이다. ● 최윤정의 회화가 지속적으로 던져온 세상 읽기의 일환이다. 하지만 기표의 사치랄까. 아니면 반어법? 후퇴로 보이는 전진의 기술일 수도 있다. 최윤정의 회화 방식은 전략적인 뒤집어 말하기를 충분히 즐긴다. 이를테면 최윤정의 팝 키즈는 거대 기업 자본주의 아래서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힐 수 있으며, 그 희생자가 자신일 수도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인간이 부서지기 쉬운 존재며 그럼에도 물적 토대에 의해 전적으로 규정되지 않고 어떤 억압 아래서도 고결하게 남을 수 있는 자질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모르는 것처럼 군다. 이 역할극-회화에서 팝 키즈는 새로운 미디어 전장의 실감 나는 해설자(commentator)다. 이 해설자는 자아의 근원적 결함을 환기할 때 특히 놀이를 하듯 한다. 도덕적 위엄, 계몽적 분위기, 선언이나 강론의 불손함을 경계하면서 진실이 스크린 뒤에서 배음처럼 울리게 하는 방식이다. ■ 심상용

 

최윤정_pop kids #124_캔바스에 유채_53×53cm_2023
pop kids #116-달나라의 장난_캔바스에 유채_100×72.7cm_2021

최윤정 작가 문답 「현대사회의 시대적 욕망을 유쾌하게 그립니다」1) 최근에 발표하는 작품들은 주로 인물의 얼굴로 화면이 가득 차고 있다. 언제부터 이런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나? 얼굴 이전 작품들은 어떤 작품이었나? 공적 작품 발표 이후 작품의 변화를 시기별로 나눌 수 있나?

얼굴 그림은 2009년의 개인전을 통해 처음 발표했습니다. 얼굴 그림은 과거에 비해 미디어의 영향이 막대해진 현대사회를 사는 사람들의 욕망과 존재방식에 대한 생각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 전에는 제 안의 모호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욕망에 대한 생각을 화면 한 가운데 지평선이 펼쳐진 풍경으로 그리면서 구체적인 대상이 없는 근원을 향하는 마음과도 같은 상태를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당시에 저는 문득문득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욕망의 실체가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pop kids는 미디어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현대인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을 현실화하며 만들어가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저의 생각을 바탕으로 만든 시리즈였는데요, 초기의 작품은 일방적인 미디어 환경에 노출된 다소 수동적인 인간에 대한 초상이었다면, 최근의 작품들은 자신의 관심이나 생각, 주장들을 일인미디어를 통해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로, 그간에 약간의 변화가 있습니다.

 

2) 주로 그리는 인물들은 누구이며, 그것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큰 얼굴의 주인공은 구글에서 검색한 인물의 초상인데요, 좀 더 통통한 형태로 왜곡하면서 그렸습니다. 구글 검색창에서 'boy', 'girl', 'woman', 'man' 등의 단어로 검색한 결과의 이미지와 유명인의 사진, 그리고 제 자신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검색을 통해 얻은 인물의 사진은 여러 단계의 이미지 가공 과정을 거치면서 세부 정보가 사라지기도 하고, 애초에 인물 사진을 제작하는 단계에서 다양한 포토샵 효과를 사용하면서 매끄럽고, 화사한 얼굴로 만드는 점에 주목하였습니다. 가공된 이미지는 실제 얼굴보다 부드럽고 생기가 넘치는데요, 처음 제가 pop kids를 그리기 시작하던 시기에는 특히나 피부에 대한 미디어의 언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시기였습니다. 피부와 관련된 제품과 시술에 관한 광고와 정보가 인터넷에 쏟아지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2000년이 시작되던 시기에 비해서 차츰 재정비되는 도시 또한 매끄럽고 반짝이며, 화려한 색채를 갈아입는 중이라는 인상을 받고는 하였는데요, 그런 인상 때문에 저는 '현재'를 표현하고자 기획하였던 시리즈에서 붓터치를 제거하고, 화려한 색채를 사용하였으며, 광택이 있는 표면을 만들고자 노력했습니다.

 

3) 그림의 인물은 대부분 안경을 쓰고 있다. 그 안경에 그려진 이미지와 글자가 그 작품의 주제를 드러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것들은 무엇을 의미하나?

일상생활에서 제 주위를 떠도는 이미지들입니다. 그 중 더 많이 미디어를 통해 언급되면서 재생산되는 이미지들인데요, 이 시리즈를 그리던 초기에는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대상들을 많이 그렸습니다. 어느 날 대중문화의 캐릭터와 유명브랜드가 과거 사회에서 신화가 차지했던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과거의 신화는 서사를 통해서 그 시대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의 프레임에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대중 스타와 캐릭터, 브랜드의 서사는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4) 그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를 위해 어떤 기법이나 장치를 쓰고 있나?

안경이라는 장치는 프레임의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저는 '자유가 무엇인가?' '나는 자유로운가?'라는 질문을 이따금 해보는데요,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면서 했던 생각은 나는 언제나 자유롭지 않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언제나 어떤 보이지 않는 틀 안에서 생각하고 움직인다고 생각했습니다. 태어나서 공부를 하고,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하고 많은 것을 배우는데요, 경험이 많아질수록 그 프레임이 견고해진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현대사회에서 그 프레임을 형성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미디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큰 프레임으로 눈을 가린 인물을 그리면서 현대사회의 단면을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5) 작품들이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사회의 여러 상황을 담고 있거나 반영하고 있는 듯 보인다. 현재의 삶의 어떤 부분을 담아왔고, 또 앞으로 표현하려 하는가?

1990년대 후반 이후에 인터넷 환경이 보편화되고, 티비 방송의 채널 숫자도 급증했습니다. 신문, 잡지 등 인쇄 매체도 빠른 주기로 탄생하고 사라지를 반복했습니다. 우리는 이전의 사회에서 보다 매일매일 훨씬 많은 양의 정보를 받아들입니다. 다양한 분야의 이슈에 대한 다양한 주장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던 시기를 지나 스스로 매체를 생산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환경문제 등 장기간 지속적으로 관심의 깊이를 더해가는 이슈가 있는가하면, 일정 기간 많은 사람들이 초집중하였다가 빠르게 잊어버리는 이슈들도 많습니다. 하나의 이슈에 대해 반대 주장의 논리는 넘쳐나는데 우리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구별하기 쉽지 않습니다. 저 또한 혼란스러울 때가 많지만, 넘쳐나는 이슈들의 다양한 층위를 검토하고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급변하는 환경과 더불어 제 자신의 생각도 충분한 고민을 하기 전에 다른 곳을 헤매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자유의지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것이 어디까지 가능한 일일까 하는 의문을 가져보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들이 저의 어수선한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두서없이 돌아다니며 떠나지 않는 생각들입니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어디로 가는가? 라는 질문을 되새기며 나와 내가 속한 사회를 돌아보며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6) 그동안의 작품에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사회, 매스 미디어의 여러 다양한 국면을 단순한 색채와 구성으로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팝아트'라 구분할 수 있는데 동의하는가?

팝아트를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 제 작품이 팝아트의 범주 안에 있을 수도 있고 그 밖에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 사회와 매스미디어의 다양한 국면과 대중의 삶에 대한 내용을 담는 작업을 팝아트로 정의한다면 저의 작품 중 pop kids 시리즈는 팝아트의 범주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작품의 생산방식은 전통적인 방식에 가깝습니다. 저는 대량생산, 주문생산 등의 산업시스템을 적극 활용하는 작업방식 보다는 현대사회의 이야기를 작업실에서 홀로 작업합니다. 작가의 고유한 작업방식에 가치를 부여하는 근대적 방식으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 초점을 맞춰서 얘기한다면 제 자신을 '팝아티스트'라고 소개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습니다. 제 작업을 보는 사람에 따라 팝아트로 보기도하고 조금 다르게 보기도 하는데요, 저는 스스로 제 자신을 어떤 양식의 작가로 규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7) 가장 최근에는 여성주의(Feminism)적 관점, 환경문제(Ecology)에 대한 비판적 접근 등 그 주제가 다양해지는 것 같다. 작가로서의 의식에 변화가 있는가? 있다면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나?

저는 사회가 개인의 사고와 삶의 방식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늑대소년의 이야기와 다른 도시로 입양되어 매우 다른 삶의 방식을 지향하는 성인으로 자란 쌍둥이의 이야기 등에 매우 동의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여러 사회적 이슈에 관심을 가지는 편입니다. pop kids 시리즈 중에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작업들이 있는데, 아무래도 제가 여성이라서 저를 돌아보면서 생각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작품에 드러나는 주제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는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매우 제한적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도시 풍경의 변화 속도만큼 여성의 사회적 역할 또한 빠르게 확대되면서 변화하였습니다. 이 시대를 사는 많은 여성들이 전통적, 보수적인 여성상과 현대적, 진보적인 여성상의 이미지 중간 어디엔가 위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확대되면서 여성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는 자아상에 대한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 현재의 상황에 대한 작업들이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직면한 많은 문제들이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삶의 패턴으로 야기되는 문제라고 생각하는데요,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으며 동의하는 부분일 것입니다. 광우병, 미세플라스틱의 해양오염, 미세먼지로 인한 대기오염, 음식물쓰레기 처리문제, 지구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 문제와 다양한 종의 멸종문제, 멸종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 문제 등등 수많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며 즐기는 화려한 컬러와 매끈한 표면의 광택과 환경문제에 직면하여 고민하는 우리의 모습을 한 화면에 담아 현대인의 삶의 단면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우리 삶은 모순으로 가득합니다. 최근에는 삶의 모순된 양면에 대해 민감하게 생각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이런 생각이 앞으로 어떤 작업을 만들어갈지 스스로 생각하고 약간의 기대를 하면서 상상하는 시간을 즐기는 편입니다.

 

8) 그동안 비슷한 구도와 표현방식으로 인해 관람자에 강렬한 인식을 남기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편에선 표현 형식이 틀에 갇혀 다소 단조롭게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이에 대한 작가의 생각과 대응은?

처음 얼굴을 그리기 시작한 시간으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것이 사실이지만, 중간에 사고가 있어서 몇 년 동안은 거의 그림을 그리지 못했습니다. 처음 시리즈를 계획하면서 비슷비슷한 얼굴 100점 이상을 그려서 전시하는 기획이 머릿속에 있었는데, 아직 그 전시를 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도 못할 것 같습니다. 다른 새로운 전시에 대한 아이디어도 몇 가지 있었는데, 아파서 누워있는 동안 제 머릿속에서 전시가 이루어지고 끝났습니다. 기존에 제가 몰두했던 생각이 한편에 있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거나 새로운 경험을 통해 전에 하지 않았던 생각도 하는데요, 최근에 기존의 작업에서 조금 변화된 형태의 작품 제작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다음 전시에서 어떤 형태로 작품이 완성될지 저도 조금 기대하고 있습니다.

 

9) 작가에게 미술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왜 그림을 그리는가?

시각예술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저의 20대의 많은 시간을 빼앗았던 질문인데요. 자세하게 기억나지 않는데, 이런 저런 자료들과 작품들을 보면서 이것도 시각예술 저것도 시각예술, 이것도 시각예술... 여러 예술을 공통적으로 포괄할 수 있으면서 제 자신을 설득할 수 있으며, 제가 해야 하는 시각예술에 대한 목표는 '한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표현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에 뭐라도 정해야 어떤 예술을 할 것인가에 대해 방향을 정하고 제 길을 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지금도 유효한 생각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려고 노력한 점이 우선이었지만, 저 또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이 사회에 이바지 할 수 있는 일이 그림을 그리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답을 구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저 많은 시간을 들여 세상을 세심하게 들여다보고자 노력해야한다고 생각하면서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생각할 수 있는 작품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10) 세계의 미술인 중에서 누구의 무엇을 좋아하는가? 왜 거기에 관심이 가는가?

바바라 크루거, 낸 골딘, 뱅크시, 뒤마, 루시앙 프로이트, 김홍도, 신윤복 등 너무 많습니다. 시각적 충격 또는 즐거움을 주는 것과 더불어 인간에 대해, 인간 사회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을 좋아합니다. 작품을 통해 소설책에서 발견하는 기쁨과 슬픔, 희망과 좌절, 부조리, 불안, 웃음 등을 작품을 마주하는 순간에 이해하고 느끼며, 이야기 너머 미지의 세계를 상상하는 것을 즐깁니다. 신윤복이 선택한 양반을 그리는 고상하지 않은 양식을 보면서 그 사회에 대해 여러 가지 상상을 하며 친구와 수다를 떨던 시간이 매우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는데요, 그의 그림에 있는 유머가 특히 강력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Vol.20230417b | 최윤정展 / CHOIYUNJNG / 崔允禎 / painting

 

2001 28cm x45cm 천위에 유채

정기호 유작전 '하늘보다 눈부신 파랑'이 인사동 '갤러리 인덱스'에서 4월5일부터 24일까지 열린다.

 

정기호 화백은 미치도록 그림만 그리다, 정말 미쳐버린 화가다.

초반에는 탯줄 같이 뒤엉킨 잿빛의 시리즈를 그렸으나,

그 뒤는 천상의 세계를 연상케 하는 다소 몽상적이며 낙천적인 그림을 그렸다.

그만의 해학이 담긴 동화 같은 정기호의 작품세계는 명상에 의한 자기 수련의 한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밤새도록 그림에 집중하다 실명 위기까지 간 적도 있었다는데, 결국 말년에 정신병원에 들어가셨다.

화구도 물감도 없는 정신 병원에서도 스케치북에 수많은 에스키스를 그리다 5년 전 운명하셨다.

 

행복한 화가일까? 불행한 화가일까?

 

글 / 조문호

고)정기호화백 / 조문호사진

 

평평한 존재자들의 세계

최근 과학기술학 등지에서 평평한 존재론(flat ontology)’이 뜨고 있다. 평평한 존재론은 크기와 상관없이, 권력의 편중과 상관없이 세상 만물에 우열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인간이 인간중심적 사고를 바탕으로 동물, 기계, 물질과 같은 비인간(nonhuman)을 도구화하고 도외시한 점을 비판하며, 모든 존재가 실재한다는 점에서 동등하며, 서로 연결되어 영향과 효과를 주고받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논자들은 객체들의 민주주의’, ‘사물정치등의 표현을 사용하는데, 그러한 용어들보다 더 효과적으로 평평한 존재자들의 세계를 가시화하고 있는 것이 정기호의 평면이다.

 

2008 72.5cm x 60.6cm 천위에 유채

평평한 존재자 1. 여인

 

정기호의 그림에서 여인은 부드럽다. 유려한 곡선과 흐름은 모두를 끌어안기에 적절하다. 자연 또는 실내에 누워 휴식을 취할 때도 세상을 향한 염려와 보호의 시선은 쉬지 않는다.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하지만 강함을 가진 존재이다.

 

1993 72.5cm x 60.6cm 천위에 유채

평평한 존재자 2. 자연

 

세모난 해의 햇살은 다리처럼 그 어디든 달려가서 비춘다. 나무는 곧게 또는 삐딱하게, 홀로 또는 함께 자라도 어디나 어우러진다. 꽃은 해만한 크기로 존재감을 드러내거나, 때로는 화가의 얼굴이 된다. 산과 바다, 연못과 같은 자연은 아예 인간의 형상이 되기도 한다.

 

2006 91cm x 72.7cm 천위에 유채

평평한 존재자 3. 동물

 

소는 그림을 그리거나, 여인을 관조하는 화가의 분신이다. 개는 여인의 곁에서 온기를 주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생활을 영위하는 독립체이기도 하다. 나무 꼭대기에 앉은 새는 세상을 향해 지저귀는데, 그 소리는 모든 존재자들에게 닿을 만큼 울림이 있다. 아이들을 태운 용은 하늘을 날면서 미소를 보인다. 정기호의 그림에서 동물들은 인간과 다름없거나 인간과 소통하는 존재다.

 

1994 72.7cm x 60.6cm 천위에 유채

평평한 존재자 4. 사물: , 이젤, 마차, , 교회

 

화가는 붓으로 이젤 위에 놓인 캔버스에 신의 숨결을 불어 넣는다. 인간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신의 숨결처럼 놀라운 창조와 변형 능력이다. 이성과 자연의 규칙을 초월해, 여인과 집, 나무를 태우고도 무거움을 모르는 마차는 구름과 바람의 도움을 받아 달린다.

 

1993 41cm x 31.8cm 천위에 유채

정기호의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존재는 평등하다. 이들은 나무-연못---얼굴 등으로 뗄 수 없는 사슬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 존재자들은 다시 다른 존재자와 결합하여 새로운 회집체(assemblage)를 만든다.

 

1990 40cm x 23cm 천위에 유채 ​

정기호가 만들어 놓은 매끈한 평면은 이러한 연결과 교환 그리고 새로운 배치를 자유롭게 실현한다. 이 평면에는 결합의 규칙과 같은 홈이 패여 있지 않다. 평면이 매끄럽기 때문에 무한 확장이 가능한 창조의 세계이다. 이곳에서 정기호는 존재자들의 크기와 형태를 다양화하고, 결합과 해체를 자유자재로 반복한다.

 

2002 53cm x 45.5cm 천위에 유채

그러나 이 세계의 화가는 다른 존재자들의 생사를 쥐락펴락하는 신과 같은 존재가 아니다. 정기호는 이 평평한 세계 안에 자리한 또 하나의 평평한 존재자, 단지 그림을 그리는 존재자로 머무는 것을 기뻐했다.

 

2008 72.7x60.6 천위에 유채

화가로서 그는 연결된 자연, 사물들이 이끄는 대로 숨을 참고 붓과 펜을 든 팔을 움직이는 수행자 역할을 했을 뿐이다. 그의 평면 위에서 이 모든 존재자들은 움직이고 새롭게 결합해 생명력과 자유로움을 누린다. 그 존재자들에게 하나하나 숨을 불어 넣어주었던 그가 그립다. 하늘이 눈부시게 파란 날에는 더욱 그렇다.

한의정 (미학, 충북대학교 교수)

 

 
1993 53x45.5 천위에 유채
1985 26.2x19 천위에 유채
1985 26.2x19 천위에 유채

 

 

가는 길

이기정展 / LEEGIJOUNG / 李基廷 / painting 

2023_0329 ▶ 2023_0410

이기정_고적한 풍경3_유채_181.8×227.3cm_2022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5:00pm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 4층

Tel.+82.(0)2.722.7760

 

마구 달린다고 능사는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몸이 아파야 쉬는구나. 요즘 다리 다친 것이 고맙다. 다리가 통증으로 쑤셨지만 정말 침대에서 뒹글뒹글 먹고 자고 그림 안그리고도 편히 지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습관처럼 화업에 대해 마음을 내려놓고 생각해보니 역사에 남은 화가들은 작업을 했다. 그런 작가가 간간이 있으니 미술이 유지가 되었구나 생각케된다. 덤으로 미술계도 들리는 대로 들은 것을 생각해 보았다. 이론가, 미술관(화랑)들, 옥션, 아트페어, 해외활동, 미술상, 다양한 생존방식들. 한마디로 트릭이 많이 작용하여 좋은 작가들이 피해(무시)당하기도 하는 모습도 있다. 오죽하면 고호는 자살을 했을까. 그럼에도 곳곳에서 작업에 열중하는 작가들의 전시 소식을 듣기도 한다. 이 나이에 이제서야 미술계 환경에 대해 알게 되었다니 하면서 다시 걸을 힘을 다독여 본다.

 

이기정_길섶에 핀 꽃 1_유채_72.7×53cm_2022
이기정_길섶에 핀 꽃 2_유채_72.7×50cm_2022
이기정_길섶에 핀 꽃 3_유채_72.7×60.6cm_2022
이기정_도시의 꽃담장 길_유채_80.3×130.3cm_2021
이기정_분수와 아이들_유채_193.9×112.1cm_2021
이기정_비보호_유채_130×162.2cm_2012
이기정_숲을 헤치고 가다_유채_181.8×227.3cm_2022
이기정_아파트 창밖 풍경_유채_130.3×193.9cm_2022
이기정_야생의 숲_유채_162.2×130.3cm_2021
이기정_어귀에 핀 꽃 2_유채_80.3×100cm_2022
이기정_어귀에 핀 꽃 1_유채_80.3×100cm_2022

무엇이던 항상 시작이 제일 어려웠다. 그 다음은 꾸준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한결 같기도 어렵다. 그 이유는 여타의 것과 나의 것에 대한 끈임없는 자기 검증을 하기 때문이었다. 잘가고 있는지에 대한 불안 때문에 나의 근거를 찾게 되고 그 가치를 확인했다. 그리고 내 것이 가치가 있다는 확신이 서면 꾸준히 계속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전진하지 못하고 흐지부지 됐다. ■ 나무화랑

 

Vol.20230329a | 이기정展 / LEEGIJOUNG / 李基廷 / painting

 

산 넘어 남촌에는

김인규展 / KIMINGYU / 金寅圭 / painting 

2023_0301 ▶ 2023_0313

 

김인규_몽유도_캔버스에 유채_115×240cm_2021

김인규 블로그_http://www.ingyu.net

 

초대일시 / 2023_0301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5:00pm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 4층

Tel.+82.(0)2.722.7760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봄 바람이 거기서 불어오는 것일까? 그림은 무엇이길래 화가들은 그 형태도 없고 색도 보이지 않는 봄바람을 그리려 애쓰는 것일까. 더불어 산 너머 남촌에 사는 사람을 상상하며 그 이미지를 그리는 방식에 대해서 온갖 고민을 하는 것일까. ● 김인규의 이번 전시는 그런 봄바람과 같은 '그림 그리기'에 대한 자신의 생각·체질·표현 등의 고찰을 통해서, 그의 기존 그리기 방식으로부터 일탈을 시도한 작품들이다. 화가가 되기 훨씬 이전 미술을 아예 모르는 자연인으로 순수한 내면의 원초적 진술과 표현을 시도한 '미술 이전'의 그림이기도 하다. 물론 새롭게 그리더라도 결과적 이미지는 김인규만의 감성과 오랫동안 그의 몸에 축적된 그리기 솜씨, 그로부터 발생하는 형상과 분위기로 구성됨은 당연한 것 일 테다. 작업을 이끌어내는 프로세스와 그의 체질이 동반된 것이기도 할 것이고. 다만 그렇더라도 조형적 문법과 그리기 방식은, 그가 그동안 견지해왔던 작가적 스타일을 상당부분 전복하며 추구한 원형적인 것이라서 묘하게 프리미티브한 지점을 노출 한다.

 

김인규_산 너머 남촌에는_캔버스에 유채_45.5×137cm_2020~1
김인규_누가 살길래_캔버스에 유채_131.5×53cm_2020~1

일단 외적으로 두드러진 변화를 보자. 그의 전시 때마다 도드라졌던 개성적이고 도발적이었던 내용과 형상언어들이 지극히 단조롭고 소박하게 바뀌었다. 몰개성적인 느낌마저 자아낼 정도다. 일체의 현대성·작위성·회화적 기교로부터 벗어난, 그야말로 그리기의 원형이 천진난만함으로 화면에 번역되어 안착해 있다. 고명도. 부드럽고 화사한 파스텔 톤. 가슬가슬하니 습하지 않고 적당히 건조한 촉감. 고향의 봄을 연상시키는 소담한 풍경. 공기원근법이나 선원근법을 무시한 채 초가집·나무·구릉 등의 소재가 중첩된 공간구성. 거기에 명암법이 있는 듯 없는 듯, 평면적인 입체감이 몽글몽글하니 꿈인지 현실인지 그 풍광과 시제(時制)가 묘하게 비끼어 버린 화면. 언뜻 수십 년 전 시골 이발소 거울 위에 붙어 있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나, 엄마 돼지 젖을 빠는 애기 돼지들과 "家化萬事成"이란 글씨가 씌어진 그림, 또는 고추 말리는 가을의 황금색 초가집 풍경화가 떠오른다. 대중들 눈높이와 등가인 삼각지나 남영동의 소위 상화(商畵)를 연상케 하는 분위기라는 것.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이발소 그림'의 패턴화된 반복성의 조형적 저급함이나 키치적 통속성과는 다르게, 차라리 조선 민화의 담백함과 유사한 맑음이 도드라진다. 평생을 시골에서 살며 곱게 늙은 할머니가 그린 듯 '어른의 아동화'라는 형용모순이라야 비로소 비유가 가능한 듯한 청아함도 있고. 그러면서도 그 말끔하고도 단아한 화면의 배면에서 은근히 청춘의 발랄함이 풍겨나오기도 한다. ● 아무튼 이 작품들에서는 규정하기 어려운 탈 개성, 탈 작가주의의 익명적 그리기 방식이 화면을 이끌고 있는 건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이 그림들을 보는 나는 갸웃거린다. 일반적인 민화의 형식적 나이브함에 비한다면 뭔가 숙련된 화가의 여러 장치와 세련성이 묻어나와서다. 김인규=화가라는 나의 선행 정보가 작동해서 그런 것 일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김인규의 미술에 대한 태도와 기량이 야기한 결과 때문이라 여겨진다. "나는 왜 그림을 그리는가? 미술은 내게 무엇인가? 그 형식은? 그렇다면 내 그림으로 나는 누구와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등의 사유와 질문이, 오래된 훈련과 감수성을 통해 배어나오는 미적 수준 때문일 것이다. 미술제도 바깥으로의 탈주를 위해 자신의 그리기 스타일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미술에 대한 사유와 회화적 기량이 여전히 지워지지 않고 지문처럼 남아있어서 그런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번 『산 너머 남촌에는』전의 역설적인 그리기에는, 그가 벗어나고자 했던 현대미술로부터의 떠남과 돌아옴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시지프스처럼, 무거운 현대미술이란 돌덩이를 산꼭대기로 또 끌어올려야만 하는 고된 반복을 또 해야 한다는 것. 그게 화가의 운명이고, 성공이든 실패든 그 운명적인 것으로부터 탈주 시도가 바로 작업의 변주이자 실험에 해당하는 것이니까. 그것은 기존 미술제도나 형식의 층위에서 다른 층위로 일탈을 감행할 때 더 빛이 난다. 김인규의 회화적 자기 전복도 자신에게 고착된 미술개념과 형식에 대한 거역이되, 또 다른 언어와 미술로 진화하려는 실험의 장(章)이라는 점에선 마찬가지다. 낯선 몽유도원이자 친근한 기억도원(記億桃園)에서 기호화된 형상을 통해 산 너머 남촌의 봄을 꿈꾸고, 거기에서부터 불어오는 춘풍을 대면해보자. 엄마 품의 안락 같기도, 애인 품의 향기 같기도 한 "나의 살던 고향"의 봄이 당신을 맞을 테니. 이 미술 이전에 건국된 "산 너머 남촌"공화국에서 통용되는 김인규의 형상언어가 감미롭게 당신의 귀에 속삭일 테니. ■ 김진하

 

김인규_은혜 갚은 까치_캔버스에 유채_45.5×53cm_2023
김인규_산길_캔버스에 유채_72.7×53cm_2023

나는 개인 작업을 해오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개인작업을 하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었다. 오랜 세월 미술 교사로 있으면서 교육미술과 커뮤니티 미술활동을 중심에 놓고 살아왔던 터였다. 더우기 생계였던 미술교사를 하는데 있어서 개인작업은 커다란 걸림돌-미술교사에 집중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지곤 했기 때문에-이었기에 그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마음먹곤 했다. 때때로 성공하기도 했지만 번번히 실패하곤 했다. ● 결국 개인작업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급기야 학교를 떠났다. 나는 스스로 왜 그리 그림을 그리고 싶어했는지 궁금해 하곤 했다. 그 미련을 끝내 버릴 수 없었는지 궁금했다. 상당기간 그리기를 멈췄던 상황에서 '내가 무엇을 그려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봉착한 것과도 관련이 있었다. 이런 저런 생각 끝에, 혹시 '무엇을'이 아니라 '그린다'는 것 자체에 나의 욕구가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반문이 들었다. 어린시절로 까마득히 거슬러 올라갔을 때도 느꼈을 그런 욕구말이다. 의도적으로 학습하기도 전에 마음 속에 스며들어 차곡차곡 쌓여 있던 것들 말이다. 나를 그리기 앞에 불러낸 것은 그런 이루지 못한 꿈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다다르게 되었다. ● 이에 나는 처음으로 돌아가보는 심정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내가 미술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았다고 가정해보자'라고 마음먹었다. 전문적으로 배웠던 미술세계를 거둬내어 본다면 혹시, 사춘기 시절, 그보다 더 어린시절 내가 마음 속에 품었을 만한 욕구와 정서가 있고 거기에 알맞은 것이 있지는 않을까 하고 되물을 수 있었다. 때 마침 꽃 피는 봄, 산벚꽃이 만발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는데, 나의 정서가 그 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의 이런 풍경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가능한 마음속으로 떠올려 풍경을 궁그리기 시작했다. 보이는 풍경이 가지는 사실성은 가능한 배제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마음 속 깊이 고여있을 그런 풍경과 정서를 퍼올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 색과 붓질이나 대상을 다루는 기법들도 그것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배운 것들이 어디 가겠냐만은 그것은 다시 재구성되는 재료로만 사용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점차 거기에는 어떤 본연의 정서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여겨지게 되었다. 작업을 하면서 늘 음악을 듣는데, 오랫동안 서구 클래식 음악을 들어왔는데, 우연한 기회에 우리 전통음악을 듣기 시작하면서 그것이야 말로 나의 정서라는 확신이 들기 시작하였다. 서양음악을 듣다보면 공부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반면, 우리 전통음악은 그냥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는 듯한 느낌이 있는 것이었다. 그냥 몸에 들어와 착착 감기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몸의 소리였다. 그것은 이미 내 안에 있는 것과 맞 닿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이미 산수화나 민속화와 같은 전통회화를 두루 검색하고 복기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더 나의 정서와 연결되어 있어 보였다.

 

김인규_폭포와 개구리_캔버스에 유채_59.4×42cm_2022

한편으로 보면 나의 목표는 어떤 이루지 못한 나의 고유한 원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이룰 수 없는 원망이 남아있고, 이루지 못한 현실의 한계, 혹은 절망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내가 젊은 시절에도 30대가 되어서야 미술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그것은 현실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여겨졌을때였다. 한참 운동권으로 세상을 바꾸고자 했을 당시 미술활동은 그다지 나의 관심을 끌지 못하였고, 오히려 현실 운동에 직접 나섰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허망해졌을 때, 내가 부여잡았던 것은 미술작업이었다. 내가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여겨졌을 때, 그 절망의 끝트머리에서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 그리는 일이었이다. 그리고 미술교사 생활에 이끌려 작업을 밀쳐내곤 했지만, 끝내 다시 잡곤했던 것은 그게 이루지 못한, 남아있는 원망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었다. ● 가만히 보면 나의 풍경은 결국 몸이다. 몸이 풍경이 된 것이다. 생각하는 머리나 의지를 가진 팔과 다리가 다 사라지고 몸만 남아있다면, 어쩌면 그것은 땅과 같은 것일 수 있다. 남자와 여자로도 나눠지지 않고, 심지어는 사람과 동물로도, 동물과 식물로도 나누지지 않은 그런 몸까지 다가간다면, 아마도 남아있는 기관이 있다면 생식, 혹은 생리에 관련된 기관들일 것이다. 그것은 죽음의 경계에서 삶을 영위하는 몸이다. 산수화에는 산과 폭포가 있는데 그것은 그런 원초성과 관련이 깊다는 생각이 들었다. ■ 김인규

 

Vol.20230305b | 김인규展 / KIMINGYU / 金寅圭 / painting

-이달에 볼만한 전시-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 / 2023.2.28-2023.5.28 / 리움미술관

한국사진사 인사이드 아웃 1929-1982 / 2022.12.21.-2023.4.16. / 뮤지엄 한미삼청

일본 불교조각의 세계 / 2022.4.5.-2023.10.9. /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외규장각 의궤, 그 고귀함의 의미/ 2022.11.1.-2023.3.19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

이건희컬렉션전: 이중섭/ 2022.8.12.-2023.4,23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임옥상전 여기 일어서는 땅’/ 2022.10.21.-2023.3.12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 유영교 조각전 구도’ / 2023.3.3.-2023,3.26 /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최 민 컬렉션/ 2022.12.8.-2023.5.7 /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강석호전 / 2022.12.15-2023.3.19 /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미셀 오토니엘전 / 2023.3.10.-2023,4.16 / 국제갤러리

정주영전 / 2023,2.15-3.26 / 갤러리 현대

박종규전 / 2023.3.15.-2023.4.29 / 학고재

국대호전 ’gleam’ / 2023,3,16-2023,4,6 / 갤러리BK 한남

홍재연전 , , 造形‘ / 2023.3.24.-2023,5.7 / 겸재정선미술관

원계홍전 / 2023,3.16-5.21 / 성곡미술관

전준엽전 고래사냥‘/ 2023.3.8.-2023,3.28 / NAMA갤러리

한상진전 / 2023,3.2-3.21 / 갤러리 담

-인사동-

김기찬전 어게인-골목안 풍경속으로‘/ 2023,3.4-4.3 / 갤러리인덱스

헌정 오세영 화백 추모전 / 2023.3.15-2023.3.27 / 인사아트센터1

재미 사진가 김인태 선율’/ 2023,2.22-3.14 / 갤러리인사 1010

김인규전 산넘어 남촌에는’/ 2023,3,1-3.13 / 나무화랑

곽남신전 시시비비 비시시’/ 2023,3.1-3.26 / 토포하우스

이만수전 푸르고 푸른-산조’/ 2023,3.1-3.26 / 통인화랑 5

이흥복전 중첩된 시간’/ 2023,3.8-3.26 / 통인화랑

-충무로-

김동진전 나의 살던 고향’ / 2023.3.2-2023.3.12/ 갤러리브레송

 

[스크랩 : 서울아트가이드 20233월호]

 

 

크라잉넛 이상면

크라잉넛 기타리스트 이상면이 첫 단독 전시회를 개최한다.

‘말 달리자’, ‘밤이 깊었네’ 등 그동안 음악을 통해 대중들과 소통했던 크라잉넛 멤버 이상면은 2월 22일부터 27일까지 인사동 마루아트센터 4관에서 첫 개인전을 연다.

이상면은 “코로나로 공연이 줄어 그림 그리기에 전념할 수 있었고, 크라잉넛 25주년 앨범 재킷 커버에 작품을 올리면서 본격적으로 미술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또한 “음악과 미술은 사용하는 도구가 다를 뿐 자신을 표현한다는 점이 동일하고, 특히 그림을 음악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림에 흥미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크라잉넛 25주년 앨범 재킷

그는 ‘이번 전시회가 정규 1집 앨범 발매와 같이 새로운 시작을 하는 느낌’이라고 표현하면서, 개인전에 전시될 작품들에 대해 “그림 안에 다양한 이야기를 숨겨놓았으나, 작품 설명을 가급적 지양하고 보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것이 포인트”라고 소개했다.

 

경인미술대전_코스모스

이번 개인전에서는 2022 경인미술대전 입선작인 ‘멀티버스’ 및 ‘코스모스’, 2022 한류미술대전 특선작인 ‘옛날 목욕탕’이 전시된다. 이외에도 음악을 주제로 한 ‘미래의 콘서트’ 및 ‘항해’ 등을 선보일 예정이다.

 

경인미술대전_멀티버스

전시회 기간인 2월 25일(토) 오후 2시에는 크라잉넛의 어쿠스틱 미니 공연이 마련된다.

 

한류미술대전_옛날 목욕탕

이상면은 크라잉넛 활동 중에도 작가로서 그룹전*에 참여하고, 공모전(경인미술대전, 한류미술대전 등) 입상을 비롯해 홍익대 학점은행제에서 회화전공으로 수강하며 학사학위 취득을 준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 희망을 전하다 KOTE(2021), 산울림 선물(2021), 콘텐츠 브릭스 미세한 봄전(2022), 샘미술관 초대전 소풍가면(2022), 시지각적 심상전(2022) 외 다수

 

이상면 개인전 포스터

이상면은 이번 첫 개인전을 계기로 화가로서 대중들과 자주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따뜻하고 즐거운 세상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들을 꾸준히 선보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스포츠경향 / 황효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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