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말도 않고

양정욱展 / YANGJUNGUK / 梁廷旭 / sculpture.drawing

 

2022_0924 ▶ 2022_1021 / 월,화요일 휴관

 

양정욱_서서 일하는 사람들 #22_부분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01:00pm~06:00pm / 월,화요일 휴관

갤러리 소소

GALLERY SOSO

서울 중구 청계천로 172-1

더 소소 The SoSo 4층

Tel. +82.(0)31.949.8154

www.gallerysoso.com

말없이, 정성껏 ● 서서 일하는 사람. 이 사람은 앉을 수 없다. 앉을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는 성실하게 주위를 돌아보고 끊임없이 좌우를 확인하며 규칙적으로 종을 울린다. 높다란 망루의 빛은 바쁜 마음처럼 꺼지지 않고, 어깨 아래에 사방으로 뻗은 팔들은 접혔다 펴졌다 하며 시종일관 움직인다. 몸통에는 열심히 돌아가는 태엽과 끈들과 곳곳에 놓인 기물들이 엮이며 서로를 독려한다. 말이 없는 이 사람은 이렇게 착실하게 주변을 살피고 있다.

 

양정욱_서서 일하는 사람들 #22_부분
양정욱_서서 일하는 사람들 #22_부분

삶의 구석구석을 바라보며 상상을 이어가고 이를 작품으로 풀어내는 작가 양정욱은 이야기꾼이다. 그는 자신의 머리 속에서 끝없이 나오는 이야기들을 빠르게 그린 드로잉으로, 움직이는 조각들로, 자신의 음성으로, 글로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다. 수필의 한 구절 같은 제목을 가진 그의 전시들은 작품들 사이를 떠도는 작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부지런히 움직이는 저 조각처럼 말없이 정성껏 작업한 작품들을 들고 나왔다. 아무 말 하지 않는 그의 이번 전시를 채우는 것은 무엇일까?

 

양정욱_아무런 말도 않고展_갤러리 소소_더 소소_2022

아무런 말도 않는 이번 전시에서 침묵의 행간을 채우는 것은 작가의 새로운 드로잉들이다. 움직이는 조각, 「서서 일하는 사람들」의 아늑한 빛을 받으며 벽에 걸린 「기억하려는 사람의 그림」연작은 조용히 침잠하고 있다. 그가 평소 빠르게 그려내던 다양한 형태들은 합판을 덮은 건물용 외벽재에 시간을 들여 새겨졌다. 외벽재 특유의 거친 표면을 철솔과 목탄 등으로 여러 번 긁고 손으로 문질러 완성한 드로잉들은 다음 이야기를 향해 빠르게 달려나가는 듯했던 이전의 드로잉과는 다르게 작품 하나하나의 속을 깊이 보여준다. 긁어낸 힘과 횟수, 도구의 종류를 달리하며 미세하게 음양이 표현된 드로잉들은 작가가 작업한 시간만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시간을 들여 천천히 보게 만든다.

 

양정욱_기억하려는 사람의 그림 #5_나무, 건물 외벽재에 스크래치, 목탄_125×125cm_2022
양정욱_기억하려는 사람의 그림 #10_나무, 건물 외벽재에 스크래치, 목탄_125×125cm_2022

이처럼 드로잉들이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을 잡고 있을 때, 작가는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저 저 멀리 바쁘게 움직이는 조각이 사방을 부지런히 밝히고, 아슬아슬한 좌대 위에서 두 팔로 균형을 잡고 있는 작은 덩어리 조각들이 공간을 채울 뿐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들 사이에는 그들의 관계가 만드는 어떤 이야기가 공기처럼 흐른다. 시간을 들여 정성껏 채워진 하나하나의 작품들은 서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그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의 이야기도 흘러나온다. 그렇게 말이 없는 작품의 시간은 천천히 흐르며 아무도 하지 않는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양정욱- 우리는 그 대각선에 대해 설명했다 #s2_합성수지, 목재_47×17.5×18cm_2022

양정욱 작가는 언제나 그런 이야기를 해왔다. 사람들의 이야기. 한 사람이 어느 순간을 살아가는 이야기. 그 순간에 일어나는 모든 사소한 일과 그 사람이 느끼는 모든 감정과 각각의 사람들이 만나 펼쳐지는 그런 이야기. 그가 들려줬던 이야기는 나름의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였고 그는 항상 정성을 다해 그것을 보여줬다. 그러다 문득 말이 없어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삶의 이야기들이 아늑한 빛처럼 가슴에 잔잔히 스며드는 작품을 만들었다. 때로 그 어떤 말보다 힘이 되는 것이 있다. 따뜻한 눈빛, 작은 행동, 함께 하는 짧은 시간. 이번에 양정욱 작가가 '아무런 말도 않고' 바쁘게 움직이며 준비한 이번 전시에는 조용히 곁을 지키는 다정한 마음이 흐르고 있다. ■ 전희정

 

양정욱_아무런 말도 않고展_갤러리 소소_더 소소_2022

Silently and Caringly ● Standing Worker. This person cannot sit here. He can't afford to sit down because of his busy mind. He looks around sincerely, checks left and right constantly, and rings the bell regularly. The light of the high watchtower does not go out like what the busy mind would hope for, and the arms extending in all directions under the shoulders are folded and stretched, moving all the time. The body is woven with hard-working mainspring, straps, and objects placed everywhere to encourage each other. This silent person is looking around steadily like this. ● Artist Yang, Jung Uk continuously imagining by looking at every corner of people's lives and coming up with artworks is a genuine storyteller. He has told people in quick drawing, moving sculptures, his own voice, and writing stories that endlessly came out of his head. His exhibitions, which have the same title as a passage from an essay, have made the audience listen to his stories wandering among the works. This time, he came out with works he created with care like the diligently moving sculpture. What is it that fills his silent exhibition?

 

양정욱_서서 일하는 사람들 #22_나무, 모터, 전구, 실, 복합재료_250×180×180cm_2022

In this silent exhibition, it is his's new drawings that fill in the lines of silence. Doodles of someone who recorded their memories series hung on the wall in the cozy light of Standing Workers, a moving sculpture is quietly silent. Various forms that he usually draws quickly were engraved on the exterior wall material for buildings that covered plywood. The drawings, which have been completed by scratching the rough surface unique to the exterior wall several times with iron brushes and charcoal, show the inside of each work in depth, unlike his previous drawings, which seemed to run fast toward the next story. Drawings, which vary in strength of scratching, number of scratching times, and type of tools and where light and shade are finely expressed, provoke the audience to take the time to gaze at them taking as much as the artist worked on them. ● As such, when the drawings are holding the flying time, he does not talk about anything. It's just that the busy moving pieces in the distance diligently light up all over the place, and the small lumps balancing their arms on the narrow pedestal fill up the space. Nevertheless, there is a certain story that their relationship creates between these works like air. Each piece of work that has been carefully filled over time tells each other their own story, and my story flows out while listening to their story. As such, the time of the silent works slowly flows and creates a story that nobody has told. ● Artist Yang, Jung Uk has always told such stories about people, how a person lives through a certain moment, all the banalities and emotions felt in that moment, and the stories that unfold as people of different emotions get together. The stories he has told were the those of people who lived their best and he always showed it with all his heart. Then suddenly, even if there was no word, and even if he did not say anything, he created artworks that the stories of their lives permeate into people's heart like a cozy light. Sometimes there are more empowering drivers than any other words – caring eyes, small acts of love, and quality time spent together albeit short. In this exhibition with works of Yang, Jung Uk, he moves busily "without saying anything" flows a friendly heart that quietly stands by him ■ Chun Heejung

Vol.20220924b | 양정욱展 / YANGJUNGUK / 梁廷旭 / sculpture.drawing

 

 

사랑의 윤리학: 몸, 에로스, 그리고 타자

The Ethics of Love: Body, Eros, & Other

 

김상표展 / KIMSANGPYO / 金相杓 / painting 

2022_0822 ▶ 2022_0901

 

김상표_Eros-Two Dancers1-4_캔버스에 유채_193.9×130.3cm_2022

 

초대일시 / 2022_0827_토요일_11:00am

관람시간 / 10:00am~06:00pm

 

주관 / 월전미술문화재단주최 / 사단법인민족통일이천시협의회

 

 

한벽원미술관

HANBYEOKWON ART MUSEUM

서울 종로구 삼청로 83(팔판동 35-1번지)

Tel. +82.(0)2.732.3777

www.iwoljeon.org

 

사랑은 "최소한의 코뮤니즘"이다. ●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 나는 남이 되어야 한다. 내게서 떠나와 남들 사이에서 나를 찾아야 한다. 남들이란 결국 내가 존재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 그 남들이 나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없다. 항상 우리다. 삶은 항상 다른 것, 항상 거기 있는 것, 멀리 있는 것. 우리의 삶을 앗아가고 우리를 타인으로 남겨 놓은 삶 우리에게 얼굴을 만들어 주고 그 얼굴을 마모시키는 삶."(옥타비아 빠스, 태양의 돌, 류시화 재인용)

 

김상표_사랑예찬-우리_캔버스에 유채_162.2×390.9cm_2021

우리의 생명은 새로움을 무한히 생성할 수 있는 잠재적 힘을 내장하고 있다. 이 잠재적 힘이 억압되지 않고 새로운 삶의 차이를 생성하는 흐름을 형성해갈 때 우리는 기쁨과 행복을 느낀다(피어슨, 싹트는 생명, 2005).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자본주의적 교환관계 체계 속에서 계산가능성과 예측가능성을 목표로 하는 합리성이 우리의 몸과 마음 모두를 전면적으로 도구화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모든 것을 대상화하고자 욕망하는 동일자의 시선이 우리 시대의 풍속화를 구성한지 오래다. 인간의 생명에너지가 가장 자연스럽게 분출되어야 할 에로스적 사랑의 공간마저도 이러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시대적 현상에 대해 예술은 어떠한 질문을 던져야 할까? 그것은 나와 타자 그 사이, 즉 관계의 문제로 귀착된다. 이 시대의 철학도 예술도 심지어는 경영도 '타자와 관계'의 문제를 피해갈 수 없다. ● 공동체를 형성하는 인간이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결국 '관계' 속에서 구원되는 길 이외에 다른 구도의 길은 없다. 그렇다면 타자를 도구화하면서 나의 비대칭적 우위 속에 동일성의 폭력을 휘두르는 세태에서 우리는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이성 자체가 동일화를 보편적 원리로 삼아 작동하는 것이라면 이제까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론적 가정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그 길은 봉쇄되어 있다. 나와 너의 관계 속에서 구원의 길은 정녕 불가능하다는 것인가? 레비나스는 역발상으로 타자를 나보다 우위에 놓는 비대칭적 관계 설정이라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그런데 우리가 탐색해 들어가는 에로스적 사랑의 경우에도 이러한 관계 설정이 유효할까? 이것이 가능하려면 나에게서 출발하는 지향적 구조를 갖고 있는 타자에 대한 능동성으로서 주체성에 대한 인식이 그와는 정반대로 타자에 대한 수동성으로서 주체성에 대한 인식으로 전화되어야 한다. 에로스의 현상학에 대한 레비나스의 주장을 직접 들어보자. "사랑함이 사랑받는 이가 내게 품은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사랑함은 또한 사랑 속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여 자기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사랑은 양의성 없이 초월하지 않는다. 사랑은 함께 하는 만족이다. 사랑은 쾌락이고 둘의 에고이즘이다. 그러나 이 만족 속에서 사랑은 꼭 그만큼 자기에게서 멀어진다. 사랑은 어떤 의미작용도 명확히 밝히지 못하는 타자성의 심오함 – 노출되고 세속화된 심오함 – 위에서 현기증을 겪는다(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 404쪽)." 레비나스의 이 언급에서 보듯이, 사랑이 양의적이고 둘의 에고이즘이라는 특성을 갖고 있더라도 에로스적 주체를 근본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사랑받고 있다'는 수동적 상황이며, 주체(사랑하는 이)의 사랑은 타자(사랑받는 이)의 사랑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향유된다. 이때 사랑의 주체는 자기동일성을 사랑받고 있다는 수동성으로부터 이끌어내고 있는 것이다(우치다 타츠루,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278쪽). 주체의 수동성을 초래하는 타자의 속성에 대해 좀더 알아보자. 어떤 의미작용도 명확히 밝히지 못한다는 점에서 나라는 동일자로는 결코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 타자성의 심오함, 그것이 사랑받는 이가 갖고 있는 절대적 타자성이다. 그저 있음의 익명적 웅웅거림 한편의 에로틱함 속에서 세속화된 채 아토포스로서 사랑받는 이가 등장한다. 아토포스적 연인의 타자성이 나의 확실성을 흔들며 주체를 현기증나는 불확실성 속으로 몰아간다. 무한을 담은 외재성으로의 타자, 그 아토포스적 타자의 사랑에 수동적으로 감염되어 사랑의 주체가 탄생하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타자의 주체에 대한 비대칭적 우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에로스적 사랑의 구조를 더욱 분명하게 해명하기 위해서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에로스적 사랑에서 주체와 타자의 사랑은 불가사이한 순환구조 안으로 휘감겨 있기 때문이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 각자가 사랑하고자 하는 것은 '상대방(연인)의 나에 대한 사랑'인데 그 '상대방(연인)의 나에 대한 사랑'을 활성화하는 것은 '상대방(연인)에 대한 나의 사랑'이다(우치다 타츠루,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278쪽). 요컨대 나와 상대방(연인)의 사랑은 타자의 사랑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서로 되먹임되는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박준상은 이러한 사랑의 구조를 낭시의 공동-내-존재에 대한 논의와 접속시켜, 공동-내-존재를 다음과 같이 새롭게 정의한다. 공동-내-존재는 '우리'의 실존('우리'의 있음 자체)의 분유의 전-근원적(전-의식적) 양태로서 가시적인 것의 공유가 아니라 타인이 '나'를 향해 다가옴, '내'가 그 다가옴에 응답함, 즉 '내'가 타인을 향해 건너감, 타인을 향한 외존, 관계 내에 존재함, 어떠한 경우라도 비가시적동〮사적 움직임들의 부딪힘, 접촉이다(박준상, 떨림과 울림, 179-180쪽). 그의 입장은 레비나스에 대한 다음과 같은 헌사로 이어진다. "레비나스의 글쓰기는 타자로 향해가는 영혼의 움직임, 타자와 함께 하는 영혼의 숨결을 담은 시로서 그 시는 도래할 시간에 우리의 행동을 기다리고 있다(박준상, 떨림과 울림, 170쪽)." 궁극의 윤리적 가치에 대한 레비나스의 주장이 앞으로 탄생할 사랑의 주체들의 영혼에 떨림과 울림을 선물할 것을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김상표_우리는어디서와서어디로가는가 일부_캔버스에 유채_193.9×130.3cm_2020

아토포스적 타자에 대한 에로스적 매혹에서 사랑은 시작된다. 바르트의 지적처럼 타자의 실존에 관한 근원적 경험으로서 사랑은 나의 지배영역에 포섭되지 않은 아토포스적 타자를 향한다. 진정한 사랑은 어떠한 동일성으로도 포섭되지 않는 차이에서 시작된 새로운 사랑의 공간을 구축하는 것이다. '하나'의 관점이 아닌 '둘'의 관점에서 형성되는 하나의 삶(무대)이, 사랑의 주체들에게 펼쳐진다(바디우, 사랑예찬, 51쪽). 차이의 창조적 놀이를 통해 반복적으로 세계를 재발명해 나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그런데 사랑의 주체들은 각자 다른 배경을 바탕으로 한 고유의 정체성을 가진 욕망의 주체들이라는 점에서 서로의 차이를 마주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충돌과 뒤섞임이라는 두 힘이 사랑의 전과정에 배태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충돌할 때는 고통스럽고 뒤섞일 때는 황홀하다. 둘 사이의 불협화음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환희와 고통, 이것이 사랑의 모순적 본성이다. 그 사이에서 사랑의 주체들은 둘의 새로운 무대를 구축하기 위해 유영한다. 주체와 타자 사이에서 새롭게 생겨난 사랑의 공간 만큼 계속적인 자기 파괴가 수반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랑은 자아의 죽음과 함께 찾아오는 환희다. 자기 동일화의 경향성을 거스른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루틴을 새롭게 재정립해야 하는 고통을 사랑의 주체들에게 요구한다. 환희 속에서 이 고통을 단번에 뛰어넘는 사랑의 도약을 해내는 연인들을, 동서고금의 문학 작품들에서 발견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죽음 속에서까지 삶을 긍정하는 것이 에로티즘이라는 바타유의 주장을 이런 맥락에서 바라보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에로스적 사랑은 일회적인 사건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우연은 결국 고정된다."는 말라르메의 말은 사랑에도 적용된다. 공간과 세계와 시간이 사랑에 부과하는 위험들을 무릅쓰고 그 모험과 놀이를 지속하겠다는 선언과 충실성 없이 진정한 사랑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사랑의 공간 만큼 타자를 내 안에 자기 차이로 간직한 채 사랑을 위협하거나 방해하는 모든 사회적 제약을 과감하게 뛰어넘으려는 모험적 시도가 윤리적 주체들에게 요구된다. 자아의 정체성과 동일성을 파괴하면서 동시에 사회의 정체성과 동일성을 해체하는 양 측면에서의 모험을 계속할 수 있는 힘을 갖지 않으면 사랑의 윤리적 주체들의 탄생은 불가능하다. 사랑은 위대하지만 힘겨운 모험이다. 랭보의 말처럼 사랑을 재발명하려면 바로 삶의 재발명을 끊임없이 재발명하려는 사랑의 추체들의 지속적인 노력과 역량을 요구한다(바디우, 사랑예찬, 44쪽). 이렇게 둘 간의 차이를 하나의 삶의 무대로 재창조해내려는 사랑은 화이트헤디안적 의미에서 말 그대로 미적 조화를 추구하는 과정이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한 현실적 계기의 합생에 있어서 객체적 내용의 통합에 내재하는 대비(contrasts)와 리듬(rhythms)에 대한 정서적 평가"가 아름다움을 가져온다(김영진김〮상표, 화이트헤드와 들뢰즈의 경영철학, 92-93쪽). (잠정적으로 패턴화되는) 대비와 리듬은 다양한 이질적 요소들을 그 사이에서 결합시키는 방식인데, 사랑의 주체들도 이와 같은 방식을 활용하여 삶의 기쁨, 생명의 충만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사랑에 대한 수행적 움직임을 계속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사랑의 공간이 바로 사랑의 윤리적 주체들이 발명한 연인들 고유의 아름다움의 공동체인 것이다.

 

김상표_우리는어디서와서어디로가는가 일부_캔버스에 유채_193.9×130.3cm_2020

두 연인들만의 공동체에 대한 사유는 둘 이외의 다수의 공동체에 대한 사유로 확장될 수 있다. 만약 사랑의 재발명이 둘만의 무대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세계로의 열림이 시작되는 지점이라면 에로스적 사랑은 혁명적인 것이 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바디우의 생각에서 우리는 그 단초를 읽어낸다. "사랑 안에는 우선 유아론의 하나(일자)가 있다. 이는 말의 무한한 반복 속에서 코기토와 존재의 회색 어둠이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만남이라는 사건 속에서 그리고 그것을 명명하는 계산 불가능한 시 속에서 도래하는 둘이 있다. 그리고 마침내, 둘이 가로지르고 펼쳐내는 감각적인 것의 무한이 있다. 여기서 둘 자체의 진리를 조금씩 해독한다. 하나, 둘, 무한이라는 수적 성격은 사랑의 절차에 고유한 것이다(바디우, 베케트에 대하여, 68쪽)." 사랑의 주체들이 연인공동체 속에서 사랑을 재발명하면서 세계의 무한을 감각할 수 있는 능력을 길렀을 때 극단적인 모든 차이들을 공동체로 통합해낼 가능성도 생겨난다. 사랑의 주체가 아토포스적 타자인 연인에게서 존재의 무한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순간들 없이는 둘의 차이가 공존하는 하나의 새로운 무대의 연속적인 창출은 어렵다. 연인에게서 느끼는 존재의 무한은 다수의 타자들, 즉 우리 밖의 무한한 세계로 사랑의 주체를 열리게 한다. 그동안 감각되지 않았던 것들, 심지어는 생멸하는 모든 것들이 아름다운 꽃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악으로 규정하고 미웠던 것들 마저도 녹아내리며 사랑으로 뒤덮인다. 신비의 몸, 무한을 담은 사유체로서의 몸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환희 속에서 흐르는 눈물이 세계의 지속을 온전히 자기 안으로 받아들이며 타자를 무조건적으로 환대하는 결정적 순간을 선물한다. 이와 같은 진정한 사랑의 사건이 발생하는 순간 사랑의 주체들에게 세계의 모든 차이들은 차이들을 간직한 채 차이들을 넘어서는 것으로 다가온다. 바디우는 사랑이 동반하는 이러한 신비에 매혹된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병철이 쓴 『에로스의 종말』에 대한 서평(12쪽)에서 "어쩌면"이라는 단어에서 머뭇거리면서도 둘에서 출발한 에로스적 사랑이 모두를 위한 세계 기획의 전망을 열어갈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피력했을 것이다. 진정한 사랑 속에서 깨어나는 다수를 향한 열림의 감각의 획득과 함께 사랑의 모험 그 자체에서 생겨나는 탈중심적 감각의 획득 또한 에로티즘과 공동체주의 사이에서 미래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얘기할 수 있게 한다. 사회적 공간에서 자유와 해방을 위한 실천적 삶과 사랑의 주체들이 나누는 에로티즘 속에는 공통적으로 기존의 낡은 것(동일성과 정체성)을 중단시키고 해체하려는 창조적 에너지의 불꽃이 내장되어 있다. 사랑하는 그 만큼 자아의 동일성을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아가 동일자의 세계를 중단시키는 우발적 사건으로서 진정한 사랑이 둘의 경계를 넘어 사회의 재생산 구조와 만나게 될 때 사회적 동일자의 시선 또한 극복해야만 한다. 개인과 사회 두 공간에서의 동일성을 전복하는 모험을 거치면서 탄생한 사랑의 윤리적 주체들은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고 구멍을 내는 방식으로 다수의 차이를 수용하는, 심지어는 극단적 차이마저 수용하는 새로운 삶의 양태를 갖게 된다. 이제 사랑의 윤리적 주체들은 새로운 공동체를 실험하는데 두려워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설 용기를 획득한다. 사랑의 모험을 가능케 하는 에로티즘이 다수의 차이가 공존하는 무대 창출을 위한 창조적 에너지로 전화할 가능성을 바디우와 한병철은 믿고 있는 것 같다. 불가능한 혁명의 불꺼진 씨앗이 정말로 에로스적 사랑의 불꽃으로 지피어질 수 있을까? 21세기는 우리에게 공동체주의(communism)와 에로티즘(erotism), 이 둘을 함께 사유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김상표_전쟁과사랑_캔버스에 유채_193.9×651.5cm_2022

이러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차이의 공동체를 구축해 나가려면 존재 사이의 깊은 어둠의 심연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낭시에게 그 어둠은 사랑의 주체들 사이에 놓여 있는 존재론적 공백이다. 연인들의 공동체, 나아가 다수의 공동체는 아토포스적 타자를 향한 사랑의 유토피아이다. 그 유토피아는 어쩌면 불가능하다. 주체와 타자 사이에 제거될 수 없는 존재론적 공백이 공동체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면서 동시에 해체시킬 수도 있는 힘으로 작용하면서 사랑의 주체들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이 역설적인 상황은 피할 수 없는 압력으로 반복적으로 다가온다. 낭시의 얘기에 귀기울여 보자. "공동이 함께 하는 것이라면, '함께라는 것'은 절대전능의 힘과 전적인 현전이 배제된 공간을 가리킨다. '함께'하면서, 상호 간의 유희로 인해 서로 마주하고 있는 힘들만이, 서로 간격을 두고 있는 현전만이 있을 뿐이다. 서로 간격을 두고 있는 현전들, 왜냐하면 그 현전들은 단일하고 순수한 현전들(주어진 대상들, 스스로에 대한 확실성 가운데 강화된 주체들, 무기력과 엔트로피의 상승에 지배되고 있는 세계)과는 언제나 다른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서로 마주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정면으로 생각해보고, 우리의 벌어진 틈을 어떻게 정면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 그것도 우리가 벌어진 틈에 빠져 함몰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기에서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직시하면서 우리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힘을 어떤 일이 있어도 길어내기 위해서, 그게 아니라면 마주한다는 것은 혼잡하고 맹목적인 혼란만을 가져올 뿐이다(낭시, 밝힐 수 없는 공동체마〮주한 공동체, 108-109쪽)." 마주함의 가능성이 공동-내-존재의 가능성 또는 함께-있음의 가능성까지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 이것을 틈 속에서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를 사랑의 주체들이 갖게 되어야 만, 도래할 사랑의 공동체에 대한 꿈을 꿀 수 있다. 사랑의 공동체 또한 공동-내-존재의 이와 같은 위험을 공유하지 않을 수 없다면, 거기에 어떠한 실체적 규정을 부과해서는 안 된다. 사랑의 공동체는 잠재적인 사건들로 가득찬 미규정적이고 불확정적인 결합체(nexus)일 뿐이다. 사랑의 공동체에 대한 일시적 성공이 다음 순간 곧바로 실패로 이어질 수 있으나 사랑의 주체들이 그 실패를 딛고 일어나 준안정적인 사랑의 공동체를 또다시 재창조해 나가려는 움직임, 그 자체를 '되기로서의 사랑의 공동체'라고 명명해야 하지 않을까? 이상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명제를 설정할 수 있다. 사랑의 유토피아는 '사랑의 공동체-되기'를 향한 무한한 수행적 움직임으로서 일종의 '과정공동체(process community)'이다(김영진김〮상표, 화이트헤드와 들뢰즈의 경영철학, 2020). 우리는 함께 다시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불가능성의 가능성으로서 사랑과 공동체. "불모의 땅, 그러나 완전히 그렇지는 않은(바디우, 베케트에 대하여, 73쪽)." 이쯤에서 우리는 블랑쇼의 비인칭의 에고이즘, 에고 없는 에고이즘을 불러내야 하지 않을까? 사랑은 경이에서 시작되는 신비이다. 사랑의 윤리학에 대한 어떠한 설명 이후에도 경이는 남아 있게 된다. 정말로 사랑과 공동체를 얘기하기에 나의 사유는 너무 옅고 나의 감성은 너무 메말라 있다. 사랑의 윤리학에 대해 잠정적인 결론조차 내릴 수 없다. 단지 어디서 중단할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조차 무수한 타협을 필요로 한다. 베르그송의 다음과 같은 신비주의에 대한 게송으로 이 글을 마친다. "존재들은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도록 운명지어진 존재로 불리어졌으며, 창조적인 힘은 사랑에 의해 정의되어야 한다(베르그송,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276쪽)."

 

김상표_We Exist 일부_캔버스에 유채_193.9×130.3cm_2022
김상표_We Exist 일부_캔버스에 유채_193.9×130.3cm_2022
김상표_We Exist 일부_캔버스에 유채_193.9×130.3cm_2022

이제 이번 전시의 의미를 물어야 할 때가 되었다. 랭보의 말처럼 사랑을 재발명하는 것은 차이가 가능한 새로운 삶의 무대로서 세계를 재창조하는 것이다. 바디우와 한병철의 바람대로 에로스적 사랑은 연인들의 공동체에 머무르지 않고 다수의 차이가 인정되는 열린 공동체에 대한 욕망으로 확장될 수 있다. 결국 사랑의 재발명을 위해서는 예술적 몸짓, 실존적 몸짓, 정치적 몸짓 이 셋 모두를 포함하는 모험을 떠나야 한다(바디우, 사랑예찬, 88쪽). 이번 '사랑의 윤리학' 전시도 이런 맥락 위에서 이루어졌다. 먼저 사랑의 주체로서 나는 지금까지 사랑의 윤리를 붙잡고 어떠한 실존적 몸짓을 해왔는지를 물었다. 사랑예찬-나와 너, 사랑예찬-우리, Eros, Eros-Two dancers 등 100호 이상 20여점의 작품들에 에로스적 사랑에 대한 나의 그동안의 경험과 실존적 고민들을 담아냈다. 사랑의 주체인 나는 격정과 고독, 환희와 눈물로 뒤범벅된 채 불가능한 무언가를 향해 몸부림쳐 왔던 것은 아닐까? 낭시와 블랑쇼를 떠올려 본다. 근원적으로 타자를 향해서 열려 있는 나와 너의 몸이 히스테리적으로 서로 충돌하고 뒤섞일 때 둘 사이(접촉 공간)에서 우리라는 새로운 무대가 창조될 수 있으며 그 우리의 가능성이 소통가능성으로 남아 있기를 절규하는 몸짓들. 박준상(2005)에 의하면, "이 소통은 유한성과 죽음을 드러내지만 또한 그 가운에 빛나는 불꽃 같은 생명을 드러내는 숨결, 그 숨결의 나눔을 지향한다(블랑쇼, 밝힐 수 없는 공동체마〮주한 공동체, 95쪽)." 이러한 나의 몸짓들이 에로스적 사랑에 대한 20점의 작품들에서 느껴질까? 인간의 궁극적 지향성이 구원이라고 할 때, 에로스적 사랑이 그 구원의 출발점이라는 생각에 나는 동의한다. 에로스적 사랑은 주로 춤을 소재로 선택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내려고 시도했다

 

김상표_Eros-Two Dancers1-1_캔버스에 유채_193.9×130.3cm_2022

다음으로 둘의 무대를 넘어 다수를 향한 세계로의 열림 속에서 사랑의 주체들인 나와 너, 우리는 어떠한 정치적 몸짓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를 물었다. 장애인의 문제를 'we exist'라는 제목으로 5점의 연작으로 다루었다. 신체적 장애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공통의 리듬을 창출하며 차이를 생성하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가야 한다. 그러한 가능성에 대해 나는 김영진교수와 함께 쓴 『화이트헤드와 들뢰즈의 경영철학』에서 아름다움의 공동체인 사회복지법인 무소의 사례를 들어 입증한 바 있다. 우리 모두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상호 존재(inter-being)라는 점을 받아들인다면,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의 차별적 구분은 동일성의 폭력 속에서만 가능한, 상상적인, 심지어는 이데올로기적인 것에 불과할 뿐일지도 모른다. 통일과 전쟁을 다룬 작품도 100호 이상 8점이 출품된다. 남북은 물론이고 전세계를 언제든 파국으로 몰고갈 국지전이 발발할 위험이 상존하는 현실에서 '생명, 사랑, 평화'의 가치를 묻는 것으로 에로스적 사랑에 대한 문제의식이 확장되었다. 남북 지도자들의 평화전도사 같은 몸짓에는 각 국가의 이해관계를 둘러싼 갈등과 타협의 속성이 담겨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남북의 진정한 평화는 그 구성원들 각자인 우리가 서로를 보듬어 껴안을 수 있는 사랑의 주체들이 되었을 때만 가능하다. 화이트헤드의 말처럼 평화는 보편적 사랑에 의해서만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다. 화이트헤드에게 평화는 자아가 상실되고 흥미가 인격성보다 넓은 조정으로 전이되었다는 의미에 있어서 자기 제어를 말하는데, 이것은 평화가 인류의 사랑 그 자체라는 것을 뜻한다(김영진김〮상표, 화이트헤드와 들뢰즈의 경영철학, 437쪽). 다음으로 아나키즘을 표현한 작품들도 출품되었다. 저항과 불복종의 아나키즘 정신이야말로 사랑의 재발명을 위한 실존적 몸짓과 정치적 몸짓의 바탕이라고 믿기에 이를 100호 3점의 작품에 담아냈다. 연인들의 공동체도, 다수로 구성된 공동체도 사랑의 주체들의 자유와 해방을 향한 저항의 몸짓들 없이는 불가능하다. 저항을 담은 기쁨의 몸짓, 그것을 춤이라는 소재로 풀어냈다.

 

김상표_통일은 비즈니스다_캔버스에 유채_162.2×390.9cm_2020

마지막으로 이러한 실존적 몸짓과 정치적 몸짓을 담을 수 있는 예술적 몸짓을 어떻게 해나가고 있는지도 작품들에서 드러내려고 노력했다. 둘 사이의 차이에서 시작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는 에로스적 사랑에서 출발하여 차이를 인정하는 다수의 세계를 향한 꿈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전시회를 기획하고 이를 작품으로 구현해 가는 전 과정은 예술적 몸짓에 다름아니다. '주제' 측면에서 사랑의 재발명을 위한 예술적 몸짓을 바로 실존적 몸짓과 정치적 몸짓의 그림들에서 드러낸 셈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회화의 새로운 '스타일'을 창안했다. 나의 예술적 모험은 코드화된 체계에 사로잡힌 회화를 해방시키고 촘촘히 짜여진 권력의 그물망에 포섭된 나의 몸을 자유롭게 하는 것을 지향한다(김상표, 아나키즘: 회화의 해방, 몸의 자유, 2021). 이를 위해 퍼포먼스 회화를 통해 그림과 그림아닌 것의 경계에서의 그리기를 시도했다. 이와 같은 '수행성으로서 화가-되기'의 결과물인 40점의 그림들은 관람객들에게 원초적 몸에 배태된 아나키즘적 리비도의 떨림이라는 경험을 선물함으로써 그들에게 삶과 사랑을 재발명하고 싶은 의욕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주제'와 '스타일' 양 측면에서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위한 예술적 몸짓들. 이것이 이번 전시를 통해 보여주는 예술의 아나키즘을 향한 나의 모험이다. I AM ANARCHISM. ■ 김상표

 

Vol.20220822a | 김상표展 / KIMSANGPYO / 金相杓 / painting

PAYVIEW

정이×지은展 / JUNG_E_JIEUN / painting 

 

2022_0817 ▶ 2022_0822

 

정이×지은_PAYVIEW(예약석)_한지에 채색_102.2×72cm_2022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11:00pm

 

호가 정이, 이름은 지은 _ 성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경인미술관

Kyung-In Museum of Fine Art

서울 종로구 인사동10길 11-4

Tel. +82.(0)2.733.4448

www.kyunginart.co.kr

 

어디서 본 듯한 창밖의 풍경들. ● SNS를 통해 보여지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풍경들을 내 것으로 간직하기 위해 렌즈에 담는 행위까지에는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이 든다. 한시적으로만 개인의 소유가 가능한 전망. 흐르는 물도 하늘도 개인의 소유인 이 풍경들을 나는 'PAYVIEW' 라고 부르기로 한다.

 

정이×지은_예약석_한지에 채색_71.5×60cm_2022
정이×지은_Filter_낮_한지에 채색_59.3×42.2cm_2022
정이×지은_PAYVIEW(Albo)_한지에 채색_102×72cm_2022

후기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어 자연을 찾아 떠난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 욕망을 충족해주기 위해 계속해서 생산되고 또 소비되는 수많은 'PAYVIEW'들을 물질성을 띤 회화 자체로 남겼다.

 

정이×지은_PAYVIEW_한지에 채색_60.7×72.3cm_2021
정이×지은_고즈넉_한지에 채색_71.5×60cm_2022
정이×지은_사유재산_한지에 채색_70×70cm_2022 정이×지은_공공해변_한지에 채색_70×70cm_2022

 

타인을 배제하고 싶은 욕망을 토대로 세워진 '프라이빗' 한 장소는 '아무나' 출입할 수 없다는 만족감을 선사하지만 사실 우리는 언제든 어디서든 '아무나'일 뿐임을 간과한다. 「예약석」, 「사유재산」 등의 작품들을 통해 내 것이 아닌 풍경을 담아내며 「Filter」 시리즈로 현장과 다른 색감으로 덧씌우는 과시적 풍경을 표현한다.

 

작업실에 틀어박힌 내내 바다가 보고 싶었던 나에게 'PAYVIEW'는 떠나고 싶은 욕망의 산물이었다. ● 누군가에게는 자유하고 싶은 풍경으로 누군가에게는 그리웠던 어떤 시간 또는 쉼으로 다가가길 바란다. ■ 정이×지은

 

Vol.20220817d | 정이×지은展 / JUNG_E_JIEUN / painting

'무릉도원_그 찬란하게 아름다운'

 

이진이 개인전

 

2022.8.17-8.22

갤러리인사아트(1F/B1)

 

그림이란 결국 눈, 코, 입의 외관이 아닌 자신의 고유한 내면 속 본질을 그리는 자화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스물아홉 자화상은 무릉도원이라는 이상향의 공간을 통해서 표현됩니다.

맘껏 상상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 찬란하게 아름다울 수 있는 연약하고 거대한 내가 온전하게

나를 축복할 수 있는 이곳의 모든 모습들은 저의 일부이면서 분신으로써 존재합니다.

본 전시가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기보다는 나의 '자화상'을 알리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만의 내면 속 공간, 나만의 '무릉도원'을 마주 보게 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Artist. 이 진 이(@della_artstudio)

 

무릉도원_그 찬란하게 아름다운_Mixed media on canvas_162.2x112.1cm_2022

 

나는 항상 이상향을 꿈꾼다.

현실에서마저 또 하나의 공간을 염두에 둔다.

사색의 시간, 내가 생각하는 공간의 색을 찾아 표현한다. 그 공간의 배경부터 시작하여

산, 나무, 들, 꽃, 해, 달, 폭포, 샘 등의 모든 것을 개척한다.

나는 이 공간에서 조물주 내지는 건축가 주민 혹은 방랑자의 역할을 한다.

 

- 작가노트 -

 

바람이 지나가는 길_Mixed media on canvas_53x45.5cm_2022
별나무 행진곡_Mixed media on canvas_116.8x91.0cm_2022
Star Tree_Mixed media on canvas_72.7x53.0cm_2022
낙원_Mixed media on canvas_162.2x97.0cm_2022
도원 속 그들_Mixed media on canvas_90.9X65.1cm_2022
아기 호랑이 초상화_Mixed media on canvas_53x45.5cm_2022
무릉도원 속 황금열매_Mixed media on canvas_162.2x112.1cm_2022
For Persephone_in paradise_Mixed media on canvas_90.9x72.7cm_2022
별꽃 심포니_Mixed media on canvas_72.7x60.6cm_2022
아기 호랑이 산수화_Mixed media on canvas_72.7x60.6cm_2022
낙원에서 노니는 중_낙원유람Mixed media on canvas_41x53.0cm_2022
하트나무_Mixed media on canvas_72.7x60.6cm_2022
나의 바다에 황금비가 나리네1_Mixed media on canvas_72.7x50.0cm_2022

 

붉은 공간, 파랗게 가라앉은 나의 바다 _ 그곳에 황금비가 내리네

 

이곳은 나의 바다, 나의 축복이 내리는 곳,

나에 관한 축복이 황금빛 줄기가 되어 내린다.

 

노랗게 흐트러지는 아름답게 자리한 나의 별 나무들이 조용히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이곳에 비를 내려줘, 내가 자라날 수 있게

 

 

이 진 이 (@della_artstudio)

 

The memory of stars_별들의 기억_Mixed media on canvas_53x45.5cm_2022
Another world_영원한 봄_Mixed media on canvas_53x45.5cm_2022 ​

 

풍경으로부터 From the landscape

정승호展 / JUNGSEUNGHO / 鄭丞鎬 / painting 

 

2022_0812 ▶ 2022_0828 / 월요일 휴관

 

정승호_인왕산_캔버스에 유채_162.1×227cm_2022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주말_11:00am~05:00pm / 월요일 휴관

 

 

이목화랑

YEEMOCK GALLERY

서울 종로구 북촌로 94(가회동 1-71번지)

Tel. +82.(0)2.514.8888

www.yeemockgallery.co.kr@yeemockgallery

 

회화와 자연이 하나가 되는 길  1. 정승호 작가에게 자연은 마음과 정신, 생각과 통찰이 펼쳐지는 생동하는 현실이다. 자연과 순수하게 만나 교감하고 몰입하는 경험을 통해 작가는 성장하고 또 성장한다. 섬세해지고 또 섬세해지며, 현명해지고 또 현명해진다. 사시사철 나무와 풀과 꽃이 작가를 반긴다. ● 청소년기 조울증을 앓은 이후 작가에게 예술이란 치유활동이고 영혼과 관련된 주제가 되었다. 예술이 치유와 동일한 것은 아니나, 분명 예술에 몸과 마음, 영혼을 어루만지고 평온을 부르는 치유의 기능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불자(佛子)인 작가에게 예술은 영성(靈性)과 연결된다. 꽃들과 나무와 가지들이 작가에게 말을 걸어 어루만지고 격려한다. 정승호 작가에게는 치유하는 예술이 특별히 중요한 미덕이다.

 

정승호_백매화-서운암 가는길_캔버스에 유채_53×65.1cm_2022
정승호_광양에서-홍매_캔버스에 유채_53×65.1cm_2022
정승호_복숭아꽃 Peach blossm_캔버스에 유채_33.4×45.5cm_2022

자연은 어떻게 우리를 위로하는가?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파장과 우리 몸과 마음의 파장이 같은 주파수를 맞추는 순간 평형과 조화를 이룬다. 우주적 차원에서는 티끌이 응집하고 다시 흩어지는 운동 또는 변화일 뿐이다. 우리는 잠시 현재의 몸에 의탁해 현상(現像)했을 뿐이다. 우리는 마치 특별한 존재라는 자의식으로 가득찬 채 지상을 활보하지만 결국은 먼지가 되어 사라진다. 아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가 된다. ● 자연을 회화에 담아 온 시간은 인류 문명의 시원과 만난다. 회화의 탄생 시기와도 닿아 있다. 자연과 자연의 모든 산물은 인간 생존과 관련되고 다른 무엇보다 우선된다. 원시 인류나 현대인이나 모두 자연에 뿌리를 두고 성장하고 존재한다. 자연은 회화의 가장 오래되고 앞으로도 쉼없이 다뤄질 주제이다. ● 작가는 오랫동안 전국을 돌며 다양한 자연과 생태환경을 경험했다. 방문하였던 곳을 반복해서 찾아간다. 매번 다른 얼굴로 맞아주는 자연은 작가에게는 평화로운 순간을 경험시켜준다. 그것은 너무도 강렬한 희열이고 감탄이다. 정승호작가는 자연을 떠나서는 회화를 이야기할 수 없다. 자연을 만나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 정승호 작가의 일상이며 시간의 대부분을 채우는 활동이다. 작가는 자연에 중독된다.

 

정승호_들풀_캔버스에 유채_45.5×53cm_2021
정승호_뒷길 A back road_캔버스에 유채_2022

2. 남의 길을 따라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의 길을 가는 가는 것이 자연스럽다. 의도하든 그렇지않든 내 길을 가는 것이다. 모든 화가는 그렇게 자기 길을 간다. 남과 비교하는 것은 시간낭비다. 내게 주어진 시간에 조밀하고 충실하게 융합해 하나의 길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 그 길을 너무나 리얼하고 구체적이어서 선명하게 감각된다. 다른 길은 보이지 않는다. 오직 그 하나의 길이 눈 앞에 그리고 내 뒤에 뚜렷한 선을 그린다. 화가는 그렇게 하나의 선을 만들며 그 선을 따라 간다. 정승호 작가가 만들어가는 그 선, 그 길은 자연과 만나고 교감하는 가운데 그려진다. ● 어쩌면 작가가 만나는 자연은 한편의 꿈이거나 환타지일지도 모른다. 요정과 정령들이 살아 숨쉬는 대자연을 느끼며 세상을 살아가는 순수한 인간은 더 이상 지상에서 멸종했을지도 모른다. 최후의 원주민들이 동남아의 작은 섬이나 남아메리카 아마존의 밀림에서 가끔 출현한다지만, 현대 인류가 더 이상 자연을 있는 그대로 만나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한 비극적 사실이다.

 

정승호_홍백매도 紅白梅圖 red and white plum blossom_캔버스에 유채_45.5×53cm_2022
정승호_할미꽃 Pasque flower_캔버스에 유채_45.5×53cm_2022

정승호 작가의 회화가 재현하는 화려하지 않고 멋을 부리지 않은 표현들은 어쩌면 이러한 비극적 현실에 대한 한 화가가 어찌할 수 없는 가장 소박한 대응일지도 모른다. 이미지와 환영을 다루는 화가는 불가피하게 있는 그대로의 현실로부터 이탈해 해석하고 번역하고 변형해야 하는 임무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 정승호작가는 자연의 본래의 모습을 발견하고 회화를 통해 자연을 되살리려 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박하지만 담담하고 동시에 확고하며 단호한 신념을 통해 공감하고 표현하는 자연은 어떤 자연일까? 개인의 사적 평화와 행복을 약속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인륜성의 문제에 어떤 희망을 던지는 그런 자연은 아닐까? 예술의 본질은 당장 눈 앞의 이득이나 효과를 또는 일시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 아니다. 세속적인 목적을 위한 예술은 결코 진정한 의미에서 자연의 본질과 만날 수 없다.

 

정승호_달그림자 Moon shadow_캔버스에 유채_45.5×53cm_2022
정승호_뜰보리수 Cherry elaeagus_캔버스에 유채, 오일파스텔_24.2×33.4cm_2022

3. 이번 전시의 대표작인 인왕산 풍경은 인왕산에서 작가를 위해 제를 올리고 기도하는 비구니와의 인연이 숨어 있다. 오랜 인연으로 작가가 오랜 시간 고민해온 문제를 함께 공감하며 기도해온 비구니의 존재는 작가에게는 인연의 숭고함으로 다가온다. 자연풍광을 담은 풍경이 아니라 영혼의 울림이 있다. ● 법정스님은 살아 있는 것은 모두 행복해야한다고 말했다. 모든 존재는 행복하기 위해 존재한다.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더 나은 상태, 행복을 지향한다. 우리가 본래의 자연을 지향하는 것은 행복하기 위한 타고난 우리의 본성일지 모른다. 자연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인류는 언제나 본래의 대자연으로 회귀하려 한다. 그러나 세상살이는 뜻대로 되기 어렵다. 인류문명은 그 길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인류는 자연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나와서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헛된 희망일지도 모를 지경이 되었다. 오존층은 남극 대륙 보다도 더 크게 구멍이 뚫리고 태평양 한가운데에는 왠만한 나라보다 거대한 쓰레기 섬이 떠다니고 있다. 아스팔트가 녹아 내리고 비가 오지 않아 뜨겁게 말라가는 지역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지역은 태풍과 집중호우로 침수를 반복한다. 기후와 생태 균형이 깨져버린 지구에서 인류는 더 이상 따듯하게 인류를 어루만지는 자연이 아니라 난폭한 자연을 마주하고 있다.

 

정승호_청매화 Green plum blossom_캔버스에 유채_45.5×53cm_2022
정승호_찔레 열매_캔버스에 유채_53×33.4cm_2021

다른 한편 세상이 첨단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하나의 생활권이 되었다고들 말하지만 세계 곳곳에서는 크고 작은 전쟁과 테러가 쉬지 않고 벌어지고 있으며 현대인이 그도록 신뢰하고 자랑해 온 첨단 네트워크는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세계 지도자를 자임하는 대국의 지도자들도 허둥지둥 우왕좌왕하며 범인과 다르지 않은 미숙한 대처를 반복한다. 불안과 공포가 퍼지고 세계는 합리적이며 지혜로운 관리와 통제를 벗어나기 일쑤다. 예측불허의 우발적 사건이 쉼 없이 벌어지는 것이 오늘날 글로벌한 일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본래 인간이 타고난 본성(자연)을 회복할 수 있을까? ● 세계 곳곳에서 정승호 작가와 같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공감하고 연대하며 자연을 만나고 표현하는 화가들이 무수히 많다. 스스로 드러내려 애쓰지 않는 화가들은 어쩌면 세계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조용히 기도하듯 자연을 대하고 그림을 그린다. 그들은 창작에 헌신하는 사도들이 아닐까? 미래, 자신들이 결코 그 과실을 확인할 수 없을 만큼 아주 먼 미래를 위해 씨를 뿌리고 물을 주듯 그림을 그린다. 그들에게 자연과 함께 생동하는 회화는 예술이자 동시에 원형적인 기도(祈禱)일지도 모른다. ■ 김노암

 

정승호_만추 Late Atumn_캔버스에 유채_53×40.9cm_2021
정승호_홍매 향기 Red plum blossoms scent_캔버스에 유채_24.2×40.9cm_2022
정승호_인왕산 둘레길에서_캔버스에 유채_130.3×193.9cm_2022

Path of Juncture for Painting and Nature  1. For artist Seungho Jung, nature is a living reality where the mind and spirit, thoughts and insights unfold. Through exploring the subject of "nature," one can easily see the growth in both his professional capacity and personal development. With emphasis in detail and sharpness, he grows wiser by the day. Changing of the four seasons with the trees and leaves welcome our artists to another beginning. ● Following battles with bouts of bipolar disorder in his adolescent years, creative arts became intertwined with both the subject of therapy and soul searching. While arts cannot be prescribed as sole pathway for therapy, it is clear art has elements to aid in healing of one's souls and evoking peace in our minds. For an artist with Buddhist background, art is connected with spirituality. Flowers, trees, and branches speak to the artist, caressing him and encouraging him. For artist Seungho Jung, the art of healing is a particularly important virtue. ● How does nature comfort us? Because humans are part of nature. Equilibrium and harmony is reached when wavelengths of nature and wavelengths of our body match the same frequency.On the cosmic level, it is nothing more than a movement or change in which the dust condenses and disperses again. We only rely on our present body for our consciousness to develop. We lead our lives full of self-consciousness and pre-conceived notion as special beings, but in the end, we disappear as nothing more than a speck of dust. No, we do not disappear, rather we become a part of nature. ● Portrayal of nature in the arts is synonymous with inception of human civilizations. This period of time is also synonymous with birth of "painting" as we know it. Above all, Nature and all its products are concerned with human survival and take precedence over all others. Both primitive and modern humans are rooted in nature, growing and existing. Nature is the oldest and will continue to be a timeless subject of painting and the arts.

2. Jung has travelled throughout the country over the last several years to experience various forms of nature. Plethora of new emotions evoked by each visit is an overwhelming experience that can't be easily described. For Jung, creative arts cannot be discussed without Nature and vice versa. Depiction of nature through painting is Jung's routine and makes up majority of his time. Nature is an inseparable element for Jung. ● Its impossible to follow the path of others in fine arts. Its natural to forge one's own path. Conscious or not, Jung follows his own path as other artists do. To compare against others would be a waste of time. Its best to maximize the time one has been allotted to dedicate to one's path and craft that path to the best of one's ability. ● For Jung, this path is definitive and delicate. No other path is available. He leaves a firm line behind him and continues to forge his own path ahead. Artists are responsible creating such a path and following the 'line' he/she has created. For Jung's forged path, it meets at the intersection of nature and our senses. ● Incidentally, for Jung, nature may really just be a vivid dream or 'fantasy' as others call it. Innocent beings who can readily experience nature in its full form with spirits and fairies may no longer be present in today's world. Only in the far untouched corners of the world, such as islands and realms of Amazon, small indigenous tribes continue to meet 'nature' in its true form. However, it is a tragedy that this experience is out of reach for most of us. ● Jung's interpretation of nature without grandiose style may reflect this tragedy at its smallest form by a lone artist. This is because a painter who deals with images and illusions is inevitably tasked with interpreting, translating, and transforming away from reality as it is. ● Jung seems to have discovered Nature in its original form and is attempting to revive it through his work. How should one assess nature represented with small but resolute beliefs represented through painting? Would it be nature that doesn't stop at guarantees of personal freedom but rather questions topics of humanity and hope? The essence of art is not an effective means to achieve immediate benefits or effects or temporary ends. Art for secular purposes can never really meet the essence of nature.

3. Highlight of this exhibit, "Inwangsan landscape", portrays a small basket that has personal significance for Jung. This basket was used for religious ceremonies and prayers of personal significance. Inclusions of this personal memorabilia in the work reflects the depth of reflection and length of pondering committed by Jung. This work is not a simple portrayal of landscape, but a reverberation of the soul. ● Monk Beop-jung noted that all living things should be happy. All beings exist to be happy. Regardless of weather it is living or non-living, all things exist to aim for a better state and happiness. It may be our innate nature to be happy that causes our longing for nature. All humans try and chase their innate desire to be happy, to return to 'nature'. But life is arduous and doesn't not allow for an easy path to happiness. Humanity has strayed so far from nature that it may be a futile hope to return to nature again. The ozone layer has a hole larger than that of Antarctica, and in the middle of the Pacific Ocean there is an island of garbage, which is bigger than any other country. In some areas, the asphalt melts with the absence of rain while other areas have seen repeated flooding due to typhoons and torrential rains. On the earth where the climate and ecological balance have been disrupted, mankind is no longer facing nature that warmly caresses mankind, but a wild, ruthless nature. ● We often boast of a global community forged by high tech networks and instant messaging, however, across the world, countless episodes of terror and war are continuing to be waged and this "global community" forged by modern technology has been helpless and futile and stopping these events. Leaders of our societies key powers have been late and aloof in their response and actions that are no different from said perpetrators of war and crimes. In a world where fear and irrationality spreads, life of unpredictable and contingent terror events have become the norm. ● In such environment, can we return to 'nature' and can humanity be restored? There are countless artists from all over the world who quietly but clearly empathize with, connect with, and meet and express nature like Seung-ho Jung. Artists who do not try to reveal themselves may treat nature and paint as if they were silently praying for world peace and well-being. One can argue they are apostles devoted to creation. They paint as if they were planting seeds and watering them for the future, a future that is so far away that they will never be able to confirm its fruits. For them, painting that comes alive with nature may be both an art and an archetypal prayer in its most basic form. ■ Kim no-am

 

Vol.20220812a | 정승호展 / JUNGSEUNGHO / 鄭丞鎬 / painting

정물 느와르 Still-life Noir

맹일선展 / MAENGILSUN / 孟一瑄 / drawing 

 

2022_0803 ▶ 2022_0828 / 월,화요일 휴관

 

맹일선_정물 느와르_종이에 목탄_54.5×78.8cm_2022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기획 / 페이지룸8

관람시간 / 01:00pm~06:30pm / 월,화요일 휴관

 

 

페이지룸8

PAGEROOM8

서울 종로구 북촌로11길 73-10 1층

Tel. +82.(0)2.732.3088

www.pageroom8.com

 

무색무취(無色無趣) 정물화 ● "정물 느와르(Still-life Noir)"는 맹일선 작가만의 목탄 드로잉 시리즈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를 돕는 전시다. 무엇보다 이번 신작에서 이전 작업과의 대비와 연결점을 목도할 수 있으며 '정물화'를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작가만의 형상에 대한 당위성을 찾을 수 있다.

 

맹일선_정물 느와르_종이에 목탄_54.5×78.8cm_2022

맹일선 작가는 그림을 그리는데 가장 기초적인 그리기 도구인 종이와 막대 모양의 숯, 즉 목탄을 이용하여 기본에 충실한 그리기 행위에 집중한다. 이 과정에서 규정되지 않은 채 나타나는 오브제들은 정물화에 대한 관념을 비껴가는 동시에, 맹일선 작가가 시각적으로 달성해야만 하는 '대칭'에 대한 목표 또한 상징적으로 품고 있다. 『정물 느와르』에서 선보이는 오브제들의 변주는 『빙그르르르르』(2021, 페이지룸8), 『회전하는 오브제들』(2020, 킵인터치)에서 발표한 작품에서 느낄 수 없었던 규칙성과 긴장감이 감돈다. 장식적인 디테일이 늘어나고 날선 진열대 위에 올라가 있지만 금방이라도 변형되고 화면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을 것처럼 보인다.

 

맹일선_정물 느와르_종이에 목탄_54.5×78.8cm_2022

재의 드로잉 ● 맹일선 작가는 2014년부터 본격적으로 목탄 드로잉을 시작했는데, 2009년부터 2014년까지 집중적으로 작업한 '초 그을음 드로잉'과 비교했을 때 '재(ash)'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개인전 『너의 밤』(2019, 오뉴월 이주헌)에서 선보인 초 그을음 드로잉은 영국 유학 시절, 뒤뜰에 터를 잡은 여우와 새끼들이 일정 기간 밤에 출몰한 모습과 수많은 비둘기가 모여 날갯짓하고 움직이는 에너지를 포착한 것이다. 초 그을음 드로잉은 연기를 채집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가시화하는 작업이었다. 그 과정은 캔버스를 기울여 설치하고 일체 화면에는 손대지 않고 불붙은 초에서 시커멓게 기화되는 그을음을 흰 캔버스에 순식간에 받아내며 완성한다. 이후 사진 촬영을 한 후 흰 배경은 까맣게 그을음 흔적은 하얗게 반전시킨 이미지를 전시한 것이다.

 

맹일선_정물 느와르_종이에 목탄_54.5×78.8cm_2022

이번 전시 『정물 느와르』에서는 100호 크기의 초 그을음 캔버스 작업 원본을 선보인다. 2014년부터 현재까지 사용한 목탄과 비교해 볼 때, 마치 연소되고 남은 재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맹일선 작가의 「The Pigeons Series_04」는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중요 단서가 되는 작품 1점으로서 페이지룸8 기획 '이 작품 시리즈 ' * 의 주요 작품에 해당한다. 그을음과 목탄은 맹일선 작가가 추구하는 원시적인 '검정(black)'을 표현하기에 적합했을 것이다. 초기 목탄 드로잉에서도 거울을 가운데 놓고 좌우대칭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는 이름 없는 오브제들이 자유로운 선으로 등장했다.

 

맹일선_정물 느와르_종이에 목탄_54.5×78.8cm_2022

정물 아닌 정물화 ● 정물화는 사물을 주제로 한 회화를 일컫는다. 특히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유행했으며 세잔의 사과가 등장하는 정물화처럼 사물들의 조합에 따라 구도와 구성 원리를 찾아내는 작가의 사고방식과 당대 일상적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 반면, 맹일선 작가의 정물화는 그 용도와 취향(趣向)을 알 수 없다. 이번 전시 "정물 느와르(Still-life Noir)"는 사실상 정물화에 대한 전시라기보다, 프랑스어 '느와르(noir)'가 지닌 중의적인 의미와 '정물화'를 빌어 작가가 천착하는 검은 목탄 드로잉을 소개하고 형상의 반(半)을 단서로 완성하는 대칭에 대한 결핍의 서사를 위트 있는 블랙 코미디로 치환시키고자 한 것이다.

 

맹일선_The Pigeons Series_04_캔버스에 초 그을음_101.6×152.4cm_2012

맹일선 작가의 정물은 시각이 못한 반을 촉각이 실현한다. 이 완벽해 보이는 장면은 불현듯 언젠가 해체될 것을 예고하는 복선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빙그르르르르" 회전하던 오브제들은 어느새 도는 것을 멈춘 채 질박한 표면과 무게감을 일으켜 굳건히 자리를 잡고 묘한 아우라를 뽐내고 있다. ■ 박정원

 

* '이 작품 시리즈'는 기획자의 관점에서 현재 중요한 기점이 되는 작품 한 점을 선정하여 작가의 작품 세계를 되짚어 보는 프로젝트이다. 2021년부터 개인전 형식으로 진행하고 있으며, 정직성, 정고요나, 김건일, 이승현 작가가 참여한 바 있다.

 

Vol.20220803a | 맹일선展 / MAENGILSUN / 孟一瑄 / drawing

허실의 경계

정효웅展 / ZHENG XIAOXIONG / 鄭暁雄 / mixed media 

 

2022_0803 ▶ 2022_0809

 

정효웅_허실상생_알루미늄 합금, 감광성 수지 도금, 디지털 매체_220×370×80cm_2022

 

초대일시 / 2022_0803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갤러리 코사

Gallery KOSA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40(관훈동 37번지) B1

Tel. +82(0).2.720.9101

www.kosa08.com

 

허실의 경계 ● '허실(虛實)'은 노자의 도가사상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허실의 결합을 우주 만물의 근원이라 여긴 노자의 사상은 중국 고전 미학의 심미적 · 정신적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17세기 말, 독일의 철학가이자 수학자인 라이프니츠는 현대 컴퓨터의 원리인 2진법 체계를 정립하였다. 이후 컴퓨터와 정보통신기술이 인류의 삶에 침투해가며, 인간은 이른바 '비물질 시대'에 진입한다. 원자와 비트의 이원적 대립은 '실재'와 '가상', 즉 '물질세계'와 '가상세계'가 점점 더 분열되어 가고 있음을 일깨워준다. 특히 제4차 산업혁명 시대가 도래하며 등장한 인공지능(AI) · 사물 인터넷(INTERNET OF THINGS)· 빅데이터와 같은 기술이 보급되며 '실재'와 '가상'의 분열은 가속화 되었고, 이로 인한 인간성 상실 · 인간 소외 등의 사회적 문제들이 파생되었다.

 

정효웅_허와 실의 경계_알루미늄 합금, 감광성 수지 전기 도금, LED 화면, 디지털 매체_200×500×30cm_2022
정효웅_가상세계의 원점_알루미늄 합금, 감광성 수지 도금,디지털 매체_100×100×100cm_2022
정효웅_만물이 서로 연결되다_알루미늄 합금, 감광성 수지 도금, 디지털 매체_120×140×30cm_2022
정효웅_허실의 분리_감광성 수지_150×40×40cm_2022

이번 전시에서는 인공지능 시대, 디지털 기술과 예술의 관계를 탐색한 결과물을 선보인다. 노자의 '허실'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작품들로, '허'와 '실' 이란 개념을 시각화하여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매체와 기법을 활용하여, 현실과 가상이 혼재하는 현대사회에서 야기될 수 있는 인간성 상실에 대한 사고와 성찰을 이끈다. 또한, 도가의 천지인 사상을 근거로, '뇌-기계 인터페이스와 인공지능' · '빅데이터와 디지털 전환' · '블록체인' 등 현실 의제에 대한 토론을 이끌어 실재와 가상의 경계에 대해 고찰하였다. 동시에, '빅 데이터' · '알고리즘' 을 활용하여, 기존의 '작가의 손을 통한' 전통적인 창작 방법과 구별되는, 소위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조형 언어 생성 방법론을 시도하며, '예술가의 사유'와 '머신러닝' 사이의 협업 가능성을 실험하였다.

 

정효웅_허와 실의 경계 @ 갤러리 코사_2022
정효웅_허와 실의 경계 @ 갤러리 코사_2022
정효웅_허와 실의 경계 @ 갤러리 코사_2022

동시대 미술은 현재의 관점에서 시대적 요구와 특징을 담아내야 한다. '허'와'실'의 관계 속에는, 기술화 · 인터렉티브화 · 기호화와 같은 산업시대의 속성들이 내재되어 있다. '미디어는 인간 몸의 확장이다' 라는 맥루한의 주장을 통해, 가상과 현실 그 어디에서도 인간이 주체적 위치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실재와 가상의 경계에서 어떻게 자아를 인식할 것인가?', '점점 정보화 · 기술화 되어가는 시대환경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하면 감수성과 상상력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 에 대한 해답을 동양철학의 '천인합일(天人合一)' · '허실상생(实實相生)' 사상에서 찾을 수 있었다. ■ 정효웅

 

정효웅_허와 실의 경계 @ 갤러리 코사_2022
정효웅_허와 실의 경계 @ 갤러리 코사_2022

展览题目:『虚实的边界』 ● "虚实"的内涵起源于道家老子的宇宙观。在老子看来,虚实的统一是宇宙万物运行的根本,对此,"虚实"的哲学思想对后世产生了深远的影响,并奠定了中国古典美学的审美趣味和精神气质。 17世纪末,德国哲学家、数学家莱布尼茨发明二进制代码,其代码如今广泛应用于现代"数字"计算机中。自从计算机和信息与通信技术广泛渗透进人类生活后,我们能明确地感知到"人类"已经进入了一个非物质的时代,原子和比特的二元对立似乎不断地提醒着我们"真实"与"虚拟"——物质世界与虚拟世界正不断地割裂开来,尤其人工智能技术、物联网技术和大数据在第四次工业革命中所表现出来的作用加快了这二者割裂的进程,由此也产生出了大量的社会问题和人性问题。 ● 而本次展览则是在"人工智能语境下"利用数字技术进行的一次艺术探索,从展示的作品中可以看到,作者从老子的"虚实"理论中得到启发,通过"虚"与"实"的艺术手法和艺术媒介,给观众传递出"真实"与"虚拟"的"人性"的思考,同时包括 "脑机接口与人工智能"、"大数据与数字化生存"、 "区块链"等的现实议题的讨论,并在道家有关"天"、"地"、"人"思想的基础上,重新审视"真实与虚拟"的边界问题。与此同时,作品中大量使用"数据"、"算法"驱动造型的生成,摆脱传统人工"手作"创作的模式,实现艺术家思维与机器工具的进一步链接。● 现代艺术有着鲜明的时代特色和时代需求,"虚""实"关系的处理更多呈现出科技化、互动化、符号化的工业时代特征,从马歇尔·麦克卢汉提出的"媒介是人的延伸"的论述中认识到,无论是"物质世界"或是"虚拟世界",强调的还是人的主体位置。而如何在真实和虚拟的边界中认清自我,并保持住人间的诗意和艺术的遐想,东方哲学的"天人合一"和"虚实相生"或许能够为找到答案。 ■ 鄭暁雄

 

Vol.20220803e | 정효웅展 / ZHENG XIAOXIONG / 鄭暁雄 / mixed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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