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전시의 제목 『Men on the Moon』은 미국의 얼터너티브 락 밴드 R.E.M 이 1984년에 사망한 유명 예능인 앤디 카우프만을 기리며 1992년 발표한 Man on the Moon 이라는 노래와 1999년에 상영된 동명의 영화로부터 내 최근의 평면 작업들 속 다양한 상상적 인물과 풍경의 모습들을 조명하는 키워드이다. 전시 작품들은 아트비트 전시 공간 1층에 구성된 평면회화 작업들과 2층을 아우른 160여 점의 소형 회화작업들로 나뉜다.
강상우_80's Korean Movie series-0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4.3×230cm_2022강상우_80's Korean Movie series-0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62cm_2022
1층은 전시 제목이 표방하는 주제와 내용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공간으로서 1980년대 TV 광고나 방화 및 헐리웃 영화의 배경이미지들을 차용한 작업들 (80년대 방화시리즈 1, 2, 외부초점 페인팅 1, 3, 4, 5), 그리고 추상 형태의 인물 초상들 (Men on the Moon 시리즈) 이 전시된다. 해당 작업들의 특징은 15년여 동안 진행되어 온 소형 페인팅들 (2층 작품들, 160/1600) 의 사이즈와 내용적 확장이 이뤄진 최근 1년여의 시도 속에서 내면의 다양한 상상 이미지들이 형식적으로 소형 작업들과 비교해 뚜렷이 구분되어 발현되고 무엇보다 그 다양함의 편차가 생각보다 크게 관찰된다는 점이다.
유년기에 소비했던 광고나 특선방화 등 미디어 이미지에 대한 사회 관념적 해석, 캡쳐된 영화 배경 공간에서 등한시되는 이미지들을 감상의 중앙으로 재조명 시키기 위한 연출, 구상과 추상을 넘나드는 초상화 인물들이 향하는 얼굴방향, 왜곡의 정도와 그것들이 반영하는 나 자신의 정서 상태에 대한 탐구 등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1, 2층의 공간을 이동하며 그 시간적 궤적을 역으로 따라가듯 감상할 수 있도록 설치되었다.
강상우_Men on the moon 04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6.3×91cm_2022강상우_Men on the moon 0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3×60.5cm_2022
코미디언, 엘비스, 부 캐릭터 토니 클립튼, 레슬러 등 다양한 인격과 외형으로 변신하며 사후에도 관객들을 기이한 체험과 의문, 논란으로 유도했던 미국의 괴짜 예술인 앤디 카우프만의 분방함에 대해 감명 받은 한 미술인이 그러한 동경을 머금으며 평면 회화 속의 자유로운 유영을 위한 여러 상상적 이미지와 형식들을 시도한 결과물로서 본 전시를 감상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강상우
자기 고백의 시대● 자화상은 개인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시각예술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에 따르면 모든 화가는 화면에 자신을 드러낸다고 한다. 즉 어떤 그림이든 일종의 자화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 1511~1574)에서 에른스트 곰브리치(Ernst Gombrich, 1909~2001)로 이어지는 회화에 대한 믿음에 따르면, 자화상은 작가의 영혼을 확인할 수 있는 특별한 사물이다. 우리는 화가들의 작품들을 통해, 그 중에서도 자화상을 통해 타인의 내면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송도영'이라는 중년남성의 자기고백 앞에 서 있다.
송도영_The cav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117cm_2022
에너지의 응축● 송도영의 청년 시절은 파란만장했다. 군복무를 마친 1995년에 사이판의 한 공장에 입사해 3년 정도 일을 한다. 사이판에서의 반복되는 삶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불신만 커져가는 상황이었기에 송도영은 1998년 미국으로 무작정 떠난다. 지인을 만나는 여행을 핑계로 미국까지 왔지만 불행은 시작에 불과했다.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나지 못했고, 돈은 금새 떨어져 생존에 위협을 느끼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불법체류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다행히 숙식을 기댈 수 있는 모텔청소를 시작으로, 인도식당에서 허드렛일로 생계를 이어간다. 그런데 당시의 상황을 악용한 인도인은 월급조차 주지 않았고, 건강마저 최악으로 악화되어 간다. 이후 캐나다 토론토로 이동하여 사이판에서 일했던 기간의 퇴직금으로 새 출발을 시도한다. 그래서 당시 만난 아름다운 여자와의 불같은 첫사랑을 하게 되었지만 금방 실연으로 이어진다.
송도영_양지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2×145cm_2021
이때부터 송도영은 세상에 무엇인가 남기고자하는 열망에 사로잡혔다. 이후 식당보조로 일하면서 우연히 본 사진책을 보게 된다. 그 사진책은 송도영에게는 확신이었다. 그리고 그 확신은 다음 삶의 방향을 만들어주었다. 송도영은 한인 사진관으로 찾아가 사진관 보조로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고, 그렇게 일을 하며 어깨너머로 사진을 공부했다. 그곳에는 뉴욕의 예술학교에서 공부한 사진 선생님이 과외 수업을 하고 있었다. 사진에 빠지며 스스로의 삶에 애착과 욕심이 생겨 2002년에는 온타리오 컬리지 아트앤 디자인에 입학한다.
송도영_Cheer up! 아버지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97cm_2021
그러나 아직 송도영의 불안한 삶은 끝나지 않았다. 34살인 2004년에 피치 못할 사정으로 등록금을 날려 버리게 되었고, 그길로 포르투갈 리스본을 시작으로 육로를 8개월 동안 이동해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후 36세에 결혼을 하고 아버지의 가게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송도영은 이후 10년동안 일이 끝나면 매일같이 술을 마셨고, 47세가 되던 날 술에 취해 얼굴을 크게 다치게 된다. 그리고 이때 영적인 목소리에 귀를 열었고, 이제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송도영_남자의 이데아_나무패널에 아크릴채색_112×145cm_2021
에너지의 변환● 얼굴이 아물고, 거동이 가능해지자 송도영은 걷기 시작했다. 48세가 되며 육체와 정신이 회복되자 송도영은 10년 넘게 잊고 살았던 카메라를 다시 들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드로잉을 시작한다. 1년 정도가 지나고 이번에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찍었던 사진들을 모아 단독으로 사진전을 열었고, 드로잉을 함께한 사람들과 누드 크로키 전시를 열게 된다. 내면에 담아두었던 것들을 드디어 꺼내기 시작했다. 송도영은 처음으로 정면으로 스스로를 바라보게 되었고, 삶에 대해 진지하게 돌아보게 된 것이다. 송도영이 그림을 그리면서 선택한 소재는 자기 자신이다. 거울을 이용해 자기 자신을 직접 바라보기를 시도한다. 이후 송도영은 제도권의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되었고, 3년이 지나 대학원에 진학한다. 그리고 같은 해에 자화상을 모아 첫 번째 회화 전시를 단독으로 열게 되었다.
송도영_비상을 위한 날개짓_캔버스에 유채_100×170cm_2021
에너지 해석● 송도영의 회화들은 매우 강렬하다. 마치 스스로를 세상의 중심이라 선언하듯, 송도영은 스스로를 화면에 중앙에 배치한다. 그것이 끝이 아니다. 송도영은 보색의 배치를 주저하지 않는다. 또한 감추고 싶을 만한 육체의 상처와 내면을 드러내는데 주저함이 없다. 송도영의 회화들은 자기불만에서 응축되기 시작한 에너지들을 자신과 지속적으로 대화하면서 정제하고 농축시킨 결과물이다. 도덕을 허구라고 말하는 프리드리히 니체(F. W. Nietzsche, 1844~1900)적으로 해석 한다면 '그의 붓질은 승화된 형태의 자위행위(自慰行爲, masturbation)'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송도영_In the beginning_캔버스에 유채_116×91cm_2020
정신분석학에서 강박적 자위는 거세 불안, 즉 자신의 성기가 온전하다는 것을 계속해서 확인하고자 하는 시도를 포함한다. 그리고 정신적 자위는 신체에 특별한 자극 없이 흥분을 완전히 방출할 만큼의 아주 강렬한 환상을 내포한다. 즉 송도영의 작품 활동은 자기 존재의 온전함을 확인하는 동시에 강력한 성취감을 만들어내는 장치가 될 수 있다. 물론 다빈치의 견해를 다시 소환한다면 모든 예술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송도영은 이것을 숨기지 않고 전면에 드러낸다. 즉 송도영 회화의 특징은 자기 존재의 확인과 성취가 자신감 넘치고 꾸밈없는 터치들로 발현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리틀 보이의 등장● '리틀 보이'는 160cm 남짓한 송도영이 미국과 캐나다에서 무시당했던 시절을 보여준다고 해석할 수 있다. 동시에 '리틀 보이'는 2차대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1945년 히로시마에 투하되었던 핵무기의 코드네임인 동시에, 이름과 반대로 엄청난 에너지를 함축한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2차대전이 끝난 세상은 냉전으로 이어져 '리틀 보이'의 후계자들을 양산하는 경쟁에 돌입했고, 세상은 긴장감과 견제를 바탕으로 한시적 평화가 찾아온다. 핵의 가공할 에너지는 그것을 사용하는 방식에 따라 재앙과 풍요, 모두로 연결될 수 있다. 송도영은 자신이 가진 엄청난 에너지의 활용법을 몰라 스승을 찾는 긴 여행을 떠났었다. 스스로 밝히길 첫 번째 스승은 가난이었고, 두 번째 스승은 실연이었으며, 세 번째 스승은 우울증이라는 마음의 병이었다. 세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 동안 긴 시간이 필요했고, 결국 지천명(知天命)에 이르러서야 깨달았다.
송도영_La Goumandis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130cm_2022
되는대로 '그냥' 살았던 시기에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혜안이 없었다. 결국 송도영은 그냥 사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자신의 삶을 가감 없이 세상에 드러내며 '아재'와 '꼰대'가 되어버린 동년배들의 삶도 아름다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 미학은 복합적이고 독특하다. 원초적인 동시에 진지하지만 항상 유머가 따라온다. 50대 아재의 그림에는 어린 소년의 순수함과 중2병스러움이 공존한다. 그러나 생각은 자유가 아닌가? 예술을 통한 송도영의 세상 정복은 죄가 아니다. 그가 새롭게 선택한 삶의 방식이다.
송도영_Lemon tiger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2×145_2021
사족● 개인적으로 미디어와 함께 자라온 MZ세대의 특징을 '완벽주의'라 생각한다. 그들은 아주 극단적인 행동패턴을 보여준다. 어떤 이들은 세상과 상관없이 자신만의 노력으로 세계적인 성과를 거두지만, 어떤 이들은 세상과 상관없는 삶을 살기위해 소통의 문을 굳게 닫는다. 그들은 엄청난 자기애와 엄청난 자기혐오로 각각 나아간다. 개인의 삶은 스스로 선택 할 수 있고, 각자는 자신의 선택에 책임지는 삶을 살면 그만이다. 그 책임을 진작에 느낀 것일까? 그리고 자신이 '리틀 보이'라는 것을 이제야 인정하게 된 것일까? 지천명에 이른 송도영의 작품들에서 MZ세대의 고민이 느껴지는 것은 왜 일까? 몇 번의 전시가 계속 이어진다면, 그의 관심사가 '자신'에서 '인간'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구영웅
회화의 해부학● 전자기파가 투과된 육체의 살갗은 녹아 없어진 듯하다. 뼈 가지들과 장기들이 하얗고 앙상한 모습으로 검은색 배경지 위로 디졸브된다. 살가죽과 피와 조직들이 해제된 채 오직 육체의 핵심만 남아 있는 X-ray 사진은 사각 틀 안에서의 신체의 유한성과 무한성을 동시에 나타낸다. 캔버스로 치환시켜 볼 수 있는 이 사각의 틀은 회화가 단순히 대상의 모방이나 재현에서 그치지 않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회화는 단지 표현의 수단이나 방법으로만 활용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물감을 여러 차례 덧칠할 수 있고 건조가 느린 유화의 경우 덧칠된 겉면의 안쪽에 화가가 처음으로 의도했던 바가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작품의 해제와 해체를 통해 성립되는 이 유한적이고도 무한적인 행위들은 회화에 회화 그 자체로서의 목적성을 부여한다.
김은진_The Descent from the Cross_캔버스에 유채_91×72cm_2021김은진_대화_캔버스에 유채_91×72cm_2021
한 화면이 사라지면서 다른 화면으로 서서히 전환되는 기법인 디졸브는 이전 화면의 밀도가 낮아짐에 따라 겹쳐지는 다른 화면의 밀도가 높아짐으로써 가능하다. 이 기법은 화면을 해제함으로써 구성하고 조립하는 것과 같다. 화면의 연속성을 위해서 서로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는 장면을 연결 짓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간이나 장소의 변화를 의미하거나 우연적이고 특수적인 효과로도 사용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디졸브를 통해 전환되는 화면은 동시성을 기반으로 시공간의 단순 구축이 아닌 융해와 혼합을 창출해낸다. 그 어디에도 위계와 한계는 없으며 새로운 연속과 연상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형이야말로 하나의 화면 내에서 벌어지는 유한하고도 무한한 동시성의 표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계와 위계가 없는 동시성은 김은진이 창작활동을 함에 있어서 주목하는 부분이다. 김은진의 회화 작품은 디졸브와도 같은 오버랩을 표방하고 X선 사진과도 같은 사각의 틀인 캔버스를 신체와 결부시켜 보기도 한다. 작가는 현실에서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일련의 감정들을 캔버스로 옮겨내 시각화함으로써 마주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새로운 감각을 얻어 점화된 이미지들은 다시 작가를 통해 밀려나고 편평해짐으로써 소화된다. 캔버스 내부에서 일어나는 이 치열하고도 무던한 과정은 마치 이미지가 죽음과 탄생을 맞이하는 것과도 같다. 더 명확히 말하자면 각 개별적인 속성을 지닌 죽음과 탄생이라기보다는 연속적 속성을 내포하는 죽음을 통한 새로운 형태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은진_Overlay 2_캔버스에 유채_193.9×130.3cm_2021
일차적으로 대상이 캔버스에 재현되는 것은 맞으나 김은진은 이 실재를 겨냥하여 층을 숨기거나 노출시키는 등의 변형을 가하면서 그리는 것과 동시에 지워나가는 행위를 충실히 반복한다. 따라서 캔버스 화면의 겉면에 살가죽처럼 흡착되어 있고 거스러미처럼 일어나 있던 감정의 단순 모방이나 재현은 사라지게 되고, 들키고 싶거나 드러날 수밖에 없는 감정 그 이상의 정서와 근본적인 메시지들이 디졸브되어 마치 육체의 핵심처럼 또렷하게 존재하게 된다. 즉 작가가 새로운 붓 터치로 쌓아올리는 화법 이전의 색채들을 덮어 버리는 것이 아닌 새로운 색채와의 혼합을 통해 우연적이면서도 밀접하게 관련짓는 창조와도 같으며, 나이프로 화면의 표면을 긁어내는 화법은 상처의 감촉저럼 피부로 느껴질 수 있는 선형적인 미감을 조성함과 결을 같이한다.
그러나 김은진의 작품에 치밀한 계산은 없다. 단지 캔버스를 배경으로 하는 회화라는 매체에 덧칠함으로써 밀어내고 긁어냄으로써 생성하는 화법을 구사하여, 새롭게 발생하는 화면의 우연성과 유기성을 통해 드러내지 않았으나 존재하는 것들로 화면을 전환하는 것이다. 이 계산되지 않아서 불온전하지만 디졸브됨으로써 연속성을 부여받는 화면상의 각 에피소드들은 인간의 경험들과 그것을 통해 이어지는 삶과 연결된다. 이처럼 작가가 회화를 해제하고 해체하며 변형시키는, 회화에 대한 해부와도 같은 이 과정들은 회화를 새로이 재생하게 만든다. 회화가 온전히 회화로서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을 갖게 되는 셈이다. 김은진의 작품을 마주한 순간 어느 한 회화의 연대기가 당신 앞에 오버랩될 것이다. ■김혜린
존재로서, 생명으로서 외부세계를 직면한다는 것에 대하여 백다임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하드앳지(hard-edge)적인 요소와 표현적인 요소가 동시에 드러나 있는 미묘한 느낌의 추상회화를 선보이게 된다. 작가는 그의 작업노트에서 자신의 작업이 작가와 작가 자신을 둘러싼 세계 사이의 대립 및 부조화 등으로 인한 불안감이나 고립감과 같은 인간 내면의 정서와 관련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으며 현재 진행되고 있 는 작업은 여기서 벗어나 자기 내면의 자발적 생명력에 집중하는 과정이 되고 있으며, 그것은 또한 작가 자신이 세계 와 관계하는 방법이 되고 있다는 점을 밝힌 바 있다.
그의 작업을 살펴보면 도형의 일부를 그려낸 것처럼 선명한 형태 로 표현된 부분이 있는가 하면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색이 번져 있거나 상호 침투하며 경계가 허물어진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 섞여서 한 화면에 동시에 드러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그가 언급한 것처럼 자신의 내면 세계와 외부 세계가 상호작용하는 것에 대해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가운데 그가 직관하게 된 것들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아마도 자신의 작업이 그가 세계와 관계하는 과정과 유사한 현장이 되도록 하고 이를 통해 불명확하고 알 수 없는 외부 세계를 마주하는 것에 대해 작업을 해나가는 가운데 알아가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이처럼 그의 작업 과정에서 특별히 내면 세계와 외부 세계라는 두 방향의 인식적 토대를 지속적으로 대비시켜 이로부터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작가는 이 두 방향이 서로 분리된 것이라기 보다 는 상호 작용하는 관계로 보고 있기에 작업에서는 부분적으로 형상이 명료해지는 부분을 그려내기도 하고 다른 부분 에서는 형상적 요소가 와해되거나 소멸되는 가운데 불확실하고 불명료한 흔적들만 남게 된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표현들은 작가가 바라보는 인간의 존재적 위치 혹은 존재적 상황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읽혀지고 있는데 작가 는 그의 작업에서 경계가 있는 분명한 것과 경계가 허물어져 있는 부분이 혼성적으로 겹쳐져 있도록 함으로써 때로는 분명한 의식으로 명확히 바라볼 수 있지만 때로는 불분명해 보이기도 하고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매몰되는 느낌을 받 게 되는 자신의 정서적 상황을 이처럼 대비되기도 하고 모호해지기도 하는 이미지들과 그에 따른 표현 방식을 통해 좀 더 감각적으로 드러낼 수 있을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이와 함께 작가는 이 두 가지 미묘한 다른 층위가 교차 되는 표현을 하는 가운데 두 개의 이질적인 평면이 마주치게 하고 그것들이 겹쳐져 만들어낸 예기치 않은 형상 및 색 채를 그대로 작업 속에 담아냄으로써 작업의 진행 과정에서 물질적 흔적으로 남겨진 시각적 상황들을 통해 작가는 자 신이 경험하게 되었던 것들을 작업 속에서 작가 스스로 직관하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작가의 작업 방식과 태도를 보면 작가가 전시 주제로 제시한'직면'이라는 명제는 인간이 자신의 내면세 계를 향했던 시선을 외부세계로 돌리게 되었을 때 마주하게 되는 시각적 상황에 대한 것일 뿐만 아니라 세계 속에 던 져져 있는 것과 같은 존재론적 상황에 대해 중의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인간이 마주하게 된 외부 세 계의 상황은 명확히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기에 이를 직면한다는 것은 불안 속에 머물러 있게 만들거나 깊은 고독 감에 빠져들도록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는 인간이 마주하게 된 세계에 대해 그리고 그 가운데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추상적 이미지들을 생산하는 것과 그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여러 프로세스를 수행해 나가는 가운데 작가 스스로 경험하게 된 것들을 전시장에서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그의 작업을 감상하는 이들에게도 작가가 경험하게 되었던 영역 에 대해 감각적 차원에서 접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결과 이제 백다임 작가 는 외부세계로부터의 침투되는 것보다는 자신의 내부로부터 솟아나는 것들에 주목하는 지점에까지 이르게 된 것 같다. 작가는 이 내부에서 솟아나는 것들을 생명력이라고 지칭하고 있는데 존재로서, 그리고 생명으로서 외부세계와 상호작 용한다는 것은 결국 몸으로부터 살아있다는 것의 힘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보고 이것이 세계 변화의 근거이자 토대가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 작가는 그의 작업을 통해 하나의 시사점을 제공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이승훈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이 떠밀려 가는 불안함 가득한 일상의 연속이다. 나는 매순간 많은 정보와 선정적인 자극, 이미지들에 둘러 쌓여 끊임없는 선택과 판단을 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우왕좌왕 하고 있다. 잠시 외부로부터 위로나 기쁨을 얻으리라는 기대를 버리고 타인의 시선과 관심, 판단에서 벗어나 내 안의 소리에 집중하여 소소하고 단순한 기쁨과 재미를 찾아 어슬렁거려 보고 싶다. 간절히. 아스팔트 길바닥에 빗물이 흔적을 남겼다. 건조하고 무표정하던 길바닥이 빗물을 만나 생기로 반짝인다. 바닥에 잠시 고 인 빗물은 유연한 무늬를 만들어 내어 나의 눈길을 잡는다. 산들바람에 작은 물결까지 인다. 물끄러미 바라본다. 작은 물웅덩이는 알 수 없는 이야기와 이미지들을 잠시 머금고 있다가 곧 사라져 버릴 것이다. 나의 작업은 내 안의 생명력, 자발적 활동성을 평면 위에 이식하여 자리 잡게 하는 일이다. 화면을 구획하여 견고한 색 평면을 구축하고 그 평면 위에 자발적이며 즉흥적 움직임의 결과물인 물감 층을 올 려 놓는다. 바탕이 되는 색면은 무심하게 있다. 마치 시간의 흔적을 저장한 수많은 이야기가 스쳐간 도로나 길바 닥처럼 많은 자취를 품은 채 무심하게 있다. 그 바닥 위에 율동 하던 물감 층을 채취해 펼쳐 놓는다. 그리고 나 는 관찰자가 되어 색면과 물감층의 마주치는 과정을 지켜본다. 이것은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와의 대립과 부조화 로 생기는 불안감과 고립감에서 벗어나 내 안의 자발적 생명력에 집중하는 과정이며 세계와 관계하는 방법이다.
내 주변세계와 타인을 온전히 속 깊이 들여다보고 이해하는 일이 가능한 것일까. 거의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알려 할수록, 그래서 내 언어로 해석해 이해하려 할수록 낭패다. 그러나 내 자신이라면, 천천히 들여다보면 분명히 무언가 드러나 보이고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내 자신의 마음과 직면하고 타협하려 애써 볼만한 일이다. 깊숙이 응시하고 경험한다면 우선 나와의 소통을 가능하리라. '나'를 직면하고 부딪쳐 보는 것은 나와 마주한 세계와의 소통을 위한 '시작'이 될 것이다. ■백다임
'지상의 낙원'을 그리다●1.포 킴(Po Kim, 1917-2014). 본명은 보현(寶鉉). 1955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에서 살았던 제1세대 한인 화가다. 일본에서 그림을 배운 그는 해방 이후 조선대 교수로 후진을 양성하는가 하면, 광주를 중심으로 선구적인 작품 활동을 펼쳤다. 시간은 해방공간과 6. 25전쟁의 소용돌이로 내달리고 있었다. 이 격동기에 김보현의 삶도 크게 출렁이었다. 좌익 혐의로 고문을 당하는가 하면, 친미 반동분자로 몰려 죽음의 문턱에 섰다. ● 김보현은 미국으로 훌쩍 떠났다. 일리노이대학의 연구원 자격이었다. 1년이 지난 뒤 아예 뉴욕에 눌러앉았다. 이념의 족쇄를 스스로 풀어 제치고 자유의 세계로 '탈출'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으리라. 미국으로의 이주는 화가 포 킴의 생애 궤도를 극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것은 벅찬 자유로의 여행이자 외로운 디아스포라(diaspora, 이산)의 출발이었다. 그 이후 김보현의 이름은 한국미술에서 완전히 사라졌다.1) 대신 포 킴의 삶이 활짝 열렸다. 포 킴은 60여 년 동안 뉴욕에서 살다 그곳에서 눈을 감았다. ● 포 킴의 예술세계를 재조명하는 전시가 열린다. 이미 국립현대미술관 등에서 굵직한 전시가 열려 그 예술적 성가(聲價)가 알려진 바 있다. 그의 예술 유산의 일부는 오래전부터 '어머니의 땅'에서 숨 쉬고 있다.2) 그러나 포 킴은 여전히 한국 미술계에 낯선 인물이다. 그래서 디아스포라 예술가 포 킴의 영혼은 아직도 목마르리라. 멀고 먼 뉴욕에서도, 생을 마감하고서도 이어질 수밖에 없는 고향으로의 회귀 본능. 그의 전시는 회향(懷鄕)의 의미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예술혼의 귀향이다. 이국에서 이룩한 포 킴 예술의 길고 긴 여정을 되짚고, 그 고난과 환희, 위안과 영광을 함께 나누는 자리다.3)
포 킴_따스한 섬 Warm Island_ 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13.36×182.88cm_1998
2.포 킴은 미국으로 건너가기 이전까지 재현적 사실주의, 자연주의적 구상 작품에 몰입하고 있었다. 그 당시 한국작가들의 일반적인 조형 어법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그의 작품은 새로운 길을 걷는다. 세계미술의 심장, 그 힘찬 박동은 포 킴의 예술세계를 뒤흔들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동시대성'과 어깨동무하는 일이었다. 포 킴의 예술 여정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1950년대부터 60년대까지 이어진 추상표현주의 시기, (2)1970년대에 정물을 소재로 한 극사실주의 시기, (3)구상과 추상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양식적 완성 시기. 이번 전시는 세 번째 시기의 작품을 소개한다. ● 포 킴이 미국에 정착하던 시기, 뉴욕 화단은 추상표현주의의 열풍이 거세게 불었다. 추상표현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국미술, 이른바 '뉴욕파의 승리'를 상징하는 빛나는 '깃발'이었다. 포 킴은 추상표현주의의 자율적인 형상에 신선한 자극을 받았다. 즉흥적인 붓질, 강렬한 색채, 유려한 필치, 신체의 떨림을 실어내는 격렬한 제스처…. 포 킴 작품의 붓의 흔적에는 속도와 촉각과 중량이 실려 있었다. 화면은 터질 듯 에너지로 충만해 있다. (포 킴의 격렬한 화면은 저 과거의 사슬에서 벗어나고픈 가열한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추상 충동은 지워버리고 싶은 한국에서의 상처, 가위눌림과도 같은 내면과 무관하지 않았다.) 포 킴의 추상표현주의는 서양의 그것과는 또 다른 특색을 보여주었다.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전성기에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동양 전통미술의 기법과 사상을 작품에 끌어들였다. 추상표현주의의 조형적 특징을 드러내면서도 전통미술의 방법을 구사하는, 이른바 동양과 서양 미학을 융합했다. 특히 기(氣), 서체적 충동, 색채, 여백 등에서 서양의 회화와는 차이를 보였다.4)
포 킴_무제 Untitle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82.88×152.4cm_1999
포 킴은 1970년대 초부터 정물 드로잉에 집중한다. 추상표현주의의 격렬한 파고가 한풀 꺾이고 다시 구상으로 돌아갔다. 딸기, 복숭아, 배, 사과, 망고, 호두알 같은 과일, 그리고 양배추, 홍당무, 파, 브로콜리 같은 싱싱한 채소를 소재로 삼아 색연필로 정밀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포 킴은 이 작업을 약 7년간 지속했다. 얼핏 보기에는 부드러운 수채화 같기도 하고, 정밀한 다색판화 같은 완벽한 묘사가 신비감을 자아낸다. 흰 종이에 배경을 완전히 배제하고 대상의 실존만을 색연필로 묘파했다. 구도와 구성을 단순 명쾌하게 설정한 그림이다. 화면에는 과일과 채소 이외에는 테이블도 배경의 벽면도 아무것도 없다. 차가운 정신적 고립감마저 느껴진다. 마치 참선하듯 묵시적 수행에 가까운 극사실의 드로잉 작업이었다. ● 1980년대 후반부터 포 킴의 작품은 대형 캔버스 작업으로 되돌아간다. 꽉 짜인 엄격한 사실주의가 돌연 해방을 맞는다. 객관적 표현 대상으로부터의 해방이요, 색채와 형태로부터의 해방이었다. 형식에서 내용으로의 전환이다. 그는 자신의 감정이나 이야기를 거침없이 토해내고, 화면 크기를 끝없이 확장해 나갔다. 얼핏 보면 1980년대 세계 화단을 지배했던 신표현주의 회화, 특히 미국의 뉴페인팅이나 이탈리아의 트랜스아방가르드의 화면을 떠올린다. 포 킴의 작품 변화는 동시대 미술의 '공기'와 무관하지 않다.
포 킴_야자수 Palm Tree_리넨에 아크릴채색_76.2×91.44cm_2001
바야흐로 '포 킴 양식'은 절정으로 내달린다. 그것은 역동적 필치의 추상과 극사실 묘사의 구상, 양자를 모두 끌어안는 '제3의 양식'이라 할 수 있다. 화면은 마치 시간과 공간의 진공상태와도 같다. 마치 종교화에서 자주 활용하는 이시동도(異時同圖,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의 사건을 한 그림에 구성하는)의 수법을 대하는 느낌이다. 이야기의 통일성이 없이 여러 배우가 각자의 개별적 몸짓으로 연기하는 연극 무대가 연상되기도 한다. 다양한 동작의 벌거벗은 인물 군상이 줄지어 있는가 하면, 느닷없이 잘린 신체 부위가 꽃과 물고기와 새와 동물 등 온갖 생명체와 한데 어우러진다. 화면의 물상(物象)은 때로는 고통으로 아우성치듯, 때로는 평온한 안식을 취하듯 대지와 물과 하늘을 떠돌고 있다. ● 포 킴은 자신의 오랜 삶 속에 녹아 흐르는 잠재의식을 즉흥적인 붓놀림으로 그려냈다. 사전에 어떤 주제나 내용 전개의 구상도 없이, 붓을 움직이는 순간순간에 자유롭게 형상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노련한 연주가의 즉흥곡에 비유하면 어떨까. 포 킴의 작품은 논리나 합리화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의식 세계로의 무의식의 침투, 물리적 세계로의 형이상학적 침투, 혹은 양자의 통합으로 치닫는 것이다.5) 혼돈 속의 질서로 이룩한 거대한 화면. 인간과 동물, 식물 등 모든 생명체가 한데 어우러져 어둠도 슬픔마저도 화평으로 요해한 세계가 아닌가. 그것은 파라다이스 혹은 아르카디아(arcadia)의 세계다.
포 킴_발리의 기억 Memory of Bali_ 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52.4×182.88cm_2003
3.포 킴은 뉴욕의 다국적 예술의 세계에서 한때는 아방가르드의 비옥한 토양에 젖어 들었으며, 또 한때는 불교의 좌선(坐禪) 수행처럼 무아정적(無我靜寂)의 세밀한 묘사에 몰입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포 킴의 예술은 원숙한 노년에 이르러 서양과 동양을 뛰어넘는 자기화의 길, 무한의 자유 세계로 한껏 날갯짓했다. 화면의 파노라마에는 젊은 시절을 억압했던 구속의 삶과 상처 입은 영혼을 이겨내고, 디아스포라의 땅에서 고립과 망향마저 씻어 내려간 포 킴의 삶의 승리가 투영되어 있다. ● 포 킴 예술은 한마디로 '아르카디아의 염원'. '낙원의 동경'이라 풀이할 수 있다. 영원한 희원(禧園) 아르카디아는 인간이 쫓는 행복의 땅이다. 그것은 미래의 희망으로 가득 찬 신화 같은 세계지만, 또한 좋았던 과거에 대한 동경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아르카디아란 손에 잡을 수 있는 희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제는 결코 되돌아갈 수 없는 잃어버린 시간을 향한 애절한 향수이기도 하다. 포 킴의 작품에는 한국과 일본, 한국과 미국으로 이어지는 디아스포라의 삶, 그 희망과 향수의 수레바퀴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포 킴의 작품에는 때로는 죽음처럼 어두운 과거가, 때로는 유토피아 같은 밝은 미래가 교차한다. 포 킴은 '지상의 낙원'6)을 그렸다. ■김복기
* 각주1) 나는 해방공간의 연표에 등장했던 김보현의 존재가 사려져 버린 이유가 궁금했다. 세상을 떠났거나 다른 나라(일본)로 이주했으리라는 막연한 추측만 가지고 있었다. 망각의 화가로 남아 있던 김보현이 포 킴의 이름으로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은 1992년이다. 당시 미국에 일시 체류하던 장석원 전남대 교수가 『월간미술』 기자로 일했던 나에게 포 킴의 베일을 벗기는 발굴 기사를 보내왔다(장석원, 「김보현, 37년 만에 귀국전 갖는 재미화가」, 『월간미술』, 1992년 10월호, pp. 100-104). 40년 동안 국내 화단은 물론이고 뉴욕 한인 사회와도 철저히 단절되었던 화가 포 킴의 생애와 예술세계가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고국과의 끈을 되찾은 포 킴은 1995년 가을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대규모 작품전을 열었다.2) 포 킴은 2000년 340여 점의 작품을, 2002년 부인 실비아 올드(Sylvia Wald)의 작품 78점을 조선대학교에 기증했다.3) 포 킴의 생애와 예술세계는 나의 글 두 편을 참고할 수 있다. 여러 차례 뉴욕 취재로 쓴 글이다. 김복기, 「뉴욕의 한인화가 포 킴, '지상의 낙원'을 그리다」. 『아트인컬처』, 2006년 7월호, pp. 85-100: 김복기, 엘리너 하트니(Eleanor Heartney), 달리아 브라호플러스(Thalia Vrachopoulos) 지음, 「디아스포라 반세기의 삶과 예술」. 『Po Kim, 아르카디아로의 염원』. 에이엠아트, 2009, pp. 11-43.4) 1997년 뉴저지 짐멀리미술관에서는 《아시아계 미국 예술가들과 추상(Asian American Artists and Abstraction) 1945~70》이라는 전시가 열렸다. 한국, 중국, 일본 작가 57명의 작품 150점을 한자리에 모은 전시였다. 한국 작가는 포 킴과 함께 장발 김환기 안동국 김병기 전성우 이수재 한농 존배 등 9명이었다. 이 전시의 근본 취지는 아시아계 미국 작가들이 미국미술에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를 조명하는 것이었다. 이 전시를 기획한 제프리 웩슬러(Jeffrey Wechsler)는 포 킴의 작품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서예를 연상시키는 김포의 추상작품은 무수정, 일필(一筆)의 동양 그림 방법을 적용해 유려한 선의 움직임과 여백에 특별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회화와 서예를 구별하지 않고 무구한 흰 종이를 회화의 한 요소로 응용하는 동양적인 사고는 '비어 있는 공간'이라는 서양의 관념을 뛰어넘는다. (…) 도교에서는 존재와 비존재가 등가(等價)여서 동양에는 회화적인 무(無)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무 그 자체가 하나의 형이상학적인 존재인 것이다. 비백(飛白)이라 불리는 동양의 운필 기법은 이러한 사고가 담겨 있다. 붓끝이 깨져 먹 사이에 남긴 가늘고 긴 백지 부분, 거기에 나타나는 기(氣)가 '난다(飛)'는 활발한 행동을 가져다주는 것이다."5) 바바라 런던(Barbara London), 「Earthly Paradise」, 『원로작가 초대전: 김보현』,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995, p. 51.6) 생전에 포 킴의 자연 예찬은 참으로 남달랐다. 그는 뉴욕 소호의 생활공간이자 스튜디오에서 수많은 새, 천 수백 종의 양란, 열대식물과 함께 살았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한 생명의 표정을 일상에서 마음 깊이 즐기곤 했다. 그곳은 마천루 속에 둥지를 틀고 있는 '지상의 낙원'이었다. 또 포 킴은 맨해튼 북쪽의 2만여 평 숲속의 별장에 작업실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림 같은 호수에는 물고기 떼가 헤엄치고, 한국의 석물과 화초, 우거진 수목이 신비의 풍경을 만들어냈다. 야생 노루가 식구처럼 뛰노는 땅, 새와 바람과 물이 합창하는 땅, 그리고 흙과 태양과 하늘이 서로를 환하게 비추며 웃는 땅. 인종도 국경도 이념의 경계도 없는 이 땅이야말로 바로 '지상의 낙원'이었다.
포 킴_날아가는 생각 Flying Thought_ 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82.88×152.4cm_2006포 킴_물 밑의 빨강 Red under Water_ 캔버스에 콜라주, 아크릴채색_182.88×152.4cm_2009
Envisioning Arcadia●1.Po Kim (1917-2014), whose Korean name was Kim Pohyun, went to the U.S. in 1955—among the first generation of Korean artists to do so—and took up permanent residency in New York City. He studied painting in Japan, later becoming a professor at Chosun University (Gwangju) soon after the liberation of Korea. It was in Gwangju that he began his journey as an artistic pioneer. However, the entire nation was mired in the ideological upheaval between the political left and right after national liberation in 1945 and during the Korean War (1950-53). His life was also greatly impacted by this turbulent period: he was tortured by the rightists on charges of being a leftist, while the leftists nearly killed him on accusations of being a pro-U.S. reactionary. ● Eventually, Kim left for the U.S. as an exchange visitor on a fellowship at the 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 After one year, he settled in New York, which can be likened to freeing himself from ideological shackles and escaping to a world of freedom. This move to the U.S. dramatically changed the trajectory of his life. While it was an excursion into overwhelming freedom, it was also the beginning of a lonely existence as part of the Korean diaspora. The name "Kim Pohyun" disappeared completely from the South Korean art scene.1) Instead, "Po Kim" began a vigorous decades-long career. He lived in New York for the remaining 60 years of his life, until his death in 2014. ● The exhibition reflecting upon his oeuvre is to be held in Seoul. Major art institutions like the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have already dealt seriously with his works, bringing greater light to his artistic achievements. As such, some of his artistic legacies have already returned to his motherland.2) Still, Po Kim remains a stranger in Korean art circles. I cannot help but wonder whether the soul of the lonely artist feels a craving—a homing instinct that continues even after his death in faraway New York. In this sense, this exhibition cannot be free from his longing for home—indeed, signifying a return of his artistic soul. It is a place to reflect upon the long-running, ever-evolving career Kim made in a strange land and share his hardships and delights, his comforts and glories.3)
2.Before his move to the U.S., Po Kim was engrossed in representational realism and naturalistic depictions, which were the mainstream among Korean artists of the time. Upon his arrival in the U.S., he took on an entirely different approach. Living in the heart of the international art community shook his entire artistic worldview. In other words, he was directly facing the 'contemporary world.' The artistic path of his career in the U.S. can be largely divided into three phases: (1) Abstract Expressionism in the 1950s and into the 1960s, (2) hyper-realist still-life drawings in the 1970s, and (3) a style he developed that freely crosses figuration and abstraction. This exhibition showcases works from this third and final phase. ● When he was settling in the U.S., the New York art world was at the height of the Abstract Expressionist movement, a glorious "flag" symbolizing the victory of American art, or more particularly, that of the New York School after the Second World War. Po Kim received fresh inspiration from Abstract Expressionism in terms of freedom, spontaneous brushstrokes, intense color, fluidity, and gestures of fierceness that echo the movement of the body. The traces left by his brush convey speed, tactility, and weight, filling each canvas with explosive energy. (Their intensity may have been part of his struggle to break free from the chains of the past. His abstract impulses were not unrelated to the nightmares from his earlier life in Korea and the traumas there that he wished to expunge.) His form of Abstract Expressionism differs from that of his Western colleagues. During the heyday of American Abstract Expressionism, Asian Americans introduced the techniques and ideas of traditional Eastern art into their works, fusing Eastern and Western aesthetics to reveal the formal characteristics of Abstract Expressionism through the use of traditional methods. In particular, the differences from Western painting can be seen in the expression of ch'i (氣, "vital energy"), calligraphic impulse, color, and intentional blank space.4) ● From the early 1970s, Po Kim came to focus on still-life drawings. The forceful wave of Abstract Expressionism subsided and he returned to representational depiction. The subjects of his works from this seven-year period include strawberries, peaches, pears, apples, mangos, walnuts, cabbage, carrots, green onions, and broccoli, all minutely depicted with colored pencils. At first glance, they look like soft watercolors, and the impeccable rendering, like that seen in elaborate multicolored prints, evokes a sense of mystery. Each subject simply exists in color within a bare white world, devoid of background. In these straightforward compositions, there is nothing else besides the fruit, nut or vegetable, not even a table or a background wall. There is, however, a cold sense of mental isolation in these hyper-realist drawings, produced out of an almost Zen-like concentration. ● From the latter half of the 1980s, he went back to work on large-scale canvases, indicating a sudden liberation from the strict rigidity of realism. This was a liberation from the object and from color and form—a transition from form to content. He poured his emotions and stories without hesitation and expanded his canvas. At first glance, they are reminiscent of the Neo-Expressionist paintings that dominated the international art scene in the 1980s, especially the American "new painting" or the Italian Transavantgarde. There is indeed a sense of the contemporary currents in Kim's transition. ● At this time, the "Po Kim style" was rushing to its peak. This can be regarded as a "third style" that embraced both the dynamic brushwork of abstraction and extremely realistic depiction. The canvas serves as a vacuum where time and space do not exist. It is reminiscent of continuous narrative in religious paintings that juxtapose multiple events from different times and spaces onto a single canvas. This style is also evocative of a theater stage with actors performing individual acts without a coherent storyline─As nude figures line up in various poses, cut-off body parts suddenly blend with all kinds of living creatures, such as flowers, fish, birds, etc. Images on the canvas float on the ground, in the water, and up in the sky, sometimes as if screaming in agony, and sometimes resting peacefully. ● Po Kim painted the subconscious, melting together and flowing into his long life, with spontaneous brushstrokes─freely creating images with each movement of his brush, without planning ahead. One might compare it to an impromptu performance by a seasoned musician. His work shows little concern for logic or rationalization: it is intended instead to infiltrate into the conscious domain through the subconscious, into the physical world through the metaphysical, seeking a merger of the two.5) On large canvases, where order is created out of chaos, where man, fauna, flora, and all living things are in harmony, and where darkness and even sadness are reconciled in the soul through peaceful acceptance, this is Arcadia, an earthly paradise.
3.In New York's multinational art world, Po Kim was once immersed in the fertile soil of the avant-garde, and at other times immersed in detailed depiction, as if engaged in Buddhist meditation. And finally, in his masterful old age, his art found its own path, transcending the distinction between East and West and soaring to infinite freedom. The panorama on the canvas projects his victory in life, as he overcame the cruel scars left on his young soul and prevailed against isolation and longing for home in the land of the diaspora. ● His art can be summarized as a longing for Arcadia and aspirations of paradise. Arcadia, the eternal paradise, is the land of happiness pursued by humans. It is a mythical world full of hope for the future, but also a longing for the good of the past. In other words, Arcadia is a hope that can be grasped, and it is simultaneously a sorrowful nostalgia for a time forever lost. In Po Kim's works, his life as part of the Korean diaspora in Japan, and again in the United States, repeatedly appears on the wheel of hope and nostalgia. His work presents a past as dark as death intersecting with a future as bright as utopia. As such, Po Kim envisioned Arcadia.6) ■Kim Boggi
* footnote1) I was curious about Kim Pohyun's disappearance from Korea, as he had made a remarkable appearance during the years after national liberation. I had only a vague assumption that he had passed away or moved to another country, possibly Japan. It was in 1992 when, after seemingly disappearing into oblivion, he reappeared as Po Kim. Chang Sukwon, a Chonnam National University professor who was temporarily living in the U.S. at the time, sent an article to me (I was then working as a journalist for Monthly Art magazine) that revealed who Po Kim was. [Chang Sukwon, "Kim Pohyun, a Korean-American Artist Having His First Show back Home in 37 Years," Monthly Art (October, 1992), pp.100-104]. It first introduced the life and art of Po Kim, who had been completely excluded not only from Korean art circles but also from the ethnic Korean community in New York for almost 40 years. Having restored his ties with home, Kim had a major exhibition at the Hangaram Art Museum in Seoul Arts Center in the autumn of 1995.2) Po Kim donated some 340 of his works in 2000 and 78 works by his wife, Sylvia Wald, in 2002 to Chosun University.3) For more information about the life and art of Po Kim, readers can refer to two of my writings based on extensive research and several visits to New York to cover him. Kim Boggi, "Korean Artist Po Kim in New York Portrays Arcadia on Earth," Art in Culture (July, 2006), pp.85-100; Kim Boggi, Eleanor Heartney, and Thalia Vrachopoulos, "The Life and Art of a Half Century in the Diaspora," Po Kim, a Longing for Arcadia (Seoul: I Am Art, 2009), pp.11-43.4) In 1997, the Zimmerli Art Museum in New Jersey held an exhibition entitled, Asian American Artists and Abstraction, 1945-1970, which featured 150 works by 57 Korean, Chinese, and Japanese artists. The nine participating Korean artists were Don Ahn, Chang Louispal, Chun Sungwoo, Kim Byungki, Kim Whanki, Po Kim, Lee Soojai, Nong (Han Kisuk), and John Pai. The exhibition was meant to shed light on the influences that Asian American artists had on American art and vice versa. Jeffrey Wechsler, who curated the exhibition, evaluated Kim's work in the following way: "Po Kim's calligraphic abstractions reflect the uncorrected, single-go Eastern method, its elegantly developed linear gestures and, more importantly, its concern for open space. Whether in painting or calligraphy, the Eastern use of untouched white paper as a pictorial element went beyond the Western notion of "negative space,' a term that itself implied the superiority of the mark over the void. As "being" and "non-being" are equal in the Tao, there is really no such thing as a pictorial "nothing" in the East. "Nothingness" itself is a metaphysical entity. This concept lies behind the Eastern technique of brush gesture known as "flying white," named not for the visual effect of the ink but instead for where the ink is not. The streamers of untouched white paper left between the ink deposited by divided bristles of a brush are the visual focus, and the presence of ch'i invests these voids with the vitalized physical activity of "flying."5) Barbara London, "Earthly Paradise," Invitational Veteran Artist Retrospective: Po Kim (Seoul: Hangaram Art Museum, Seoul Arts Center, 1995), p.51.6) His whole life, Po Kim was a great admirer of nature. At his artist's loft in SoHo, New York, he had numerous birds and well over a thousand Western orchids and tropical plants. He deeply appreciated the beauty of nature and the mysterious expressions of life on hand for him in his home, which was an "Earthly Paradise," nestled among skyscrapers in the large city. He had another studio at a second home in a forest of approximately 66,000 m2, north of Manhattan. There, a picturesque lake teemed with fish, and, together with plants and stone implements brought all the way from Korea, they created a mystical scene in the midst of tall trees and shrubs. Wild roe deer romped around as if part of the family; birds, wind, and water sang in chorus; the soil, sun, and sky shone and smiled on each other. This place, with no restrictions of race, border, or ideology, was the Arcadia he himself found on Earth.
말만 들어도 코끝이 찡해지는 어머니를 형상화한 이명복의 ‘어멍’전이 어버이날에 맞춘 지난 5월4일부터 17일까지 열렸다. 몇 달 전 정영신의 ‘어머니의 땅’ 사진전이 열렸던 ‘나무화랑’에서 다시 그 감회에 빠져든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사연 없는 이가 어디 있겠냐마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잊을 수 없는 가슴 떨리는 일부터 생각난다.
이명복_휴식_한지에 아크릴채색_45.5×33.4cm_2022
낙동강 전투의 최후 보루인 내 고향은 피비린내 나는 전장의 한복판이었다. 내 나이 세 살 때였으나겁에 질려 울지도 못했다. 포화가 잠잠할 즈음,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살던 집을 찾아 나섰다. 유엔군이 진을 친 남산 아래 미나리꽝 뚝 길로 지나칠 무렵, 피 흘리며 쓰러진 군인이 ‘물, 물, 물”이라 외치며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움켜잡았고, 옆에 선 군인은 그냥 가라며 총부리로 위협했다. 겁에 질린 어머니가간신히 군인의 손을 뿌리치기는 했으나 뒤에서 총을 쏠까 염려되어 등에 업힌 나를 가슴에 끌어안고 뛰셨는데, 어머니의 온몸은 땀으로 흥건히 젖어 흘렀다. 그때 느꼈던 어머니의 거친 숨결 속의 전율감은 숱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생생하다. 이것이 가장 잊을 수 없는 어머니에 대한 오랜 기억이다.
이명복_밭일_한지에 아크릴채색_45.5×33.4cm_2022
이명복은 역사와 현실에 초점을 맞추어 우리의 시대상을 그려내는 민중화가다.제주로 간지 12년이 넘었는데,제주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 참혹한 과거가 묻힌 곳이 아니던가? 그곳에서 질곡의 현장을 답사하며, 민중의 한맺힌 응어리를 형상화해 왔다. 그래서 그가 그린 그림은 붓으로 새긴 역사화에 다름아니다. 비록 한 사람의 인물을 그렸지만, 그 인물 속에 한 생애가 고스란히 들어있을뿐더러, 우리 민중의 한이 서려 있는 것이다.
이명복_감자_한지에 아크릴채색_45.5×27.3cm_2021
이명복 작품 중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는 작품은 2년 전 '삶'전에 내놓은 ‘해녀 ’옥순삼춘’이었다. 마치 흑백사진 같은 리얼한 표정의 슬픈 모습인데, 웃음을 머금었지만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 같은 애잔한 표정이었다. 마치 민족의 한이 한 여인의 얼굴에 응축된 것 같았다. 그리고 5월9일까지 '인사아트센터' 열리는 4.3기획전 ‘바라·봄'에 출품된’ 광란의 기억‘도 대단한 역작이었다.
이명복의 작품은 풍경마저 보는이를 슬프게 만든다. 상처받은 역사에 암울한 현실이 더해져 또 다른 감회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이명복_해녀-춘자삼촌_92×62cm_2021
이번에 보여준 ’어멍‘전에는 어머니의 초상과 삶터에서 일하는 모습으로 압축되었다. 역사의식에 바탕 둔 현실 수용으로, 어머니의 깊게 파인 주름과 눈빛에서 지난한 세월의 아픔을 읽을 수 있다. 잠시도 쉬지 않는 근면함과 강인한 생활력을 다시 한번 인식시키며, 숭고한 생명의 꽃을 피운 것이다.
이명복_봄바다_한지에 아크릴채색_45.5×27.3cm_2021
“회화는 그 형식적 물리적 속성으로 인해 한 작품에 작가가 원하는 모든 내용을 담을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바로 이 한계를, 이명복은 풍경화-인물화-역사화라는 분절된 장르를 리드미컬하게 상호 연관시킴으로 종국에는 그가 원하는 내용과 주제를 형상성으로 드러내고 극복하게 된다. 이번 나무아트의 '어멍(어머니)'전은 거대한 역사화로 이르는 이명복 회화의 출발점이자 통로라 하겠다”고 김진하미술평론가는 적었다.
이명복의 그림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어진다. 제주의 역사적 현장을 그린 풍경화로부터, 제주의 이웃을 그린 인물화, 그리고 풍경과 인물을 아우르면서 거대 서사를 아우르는 역사화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는 각각 독자적이되 상호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풍경화와 인물화라는 독립된 장르의 속성을 최대한 부각하면서도, 결국 이 둘은 역사화에서 다시 조우하며 좀 더 넓고도 심층적인 주제를 견인해내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풍경화와 인물화는 종국에 역사화를 위한 단초의 역할인 습작이자, 독립된 장르로서의 완성된 작품의 기능 모두를 갖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는 매우 효과적인 작업(기획)방식이다. 회화는 그 형식적 물리적 속성으로 인해 한 작품에 작가가 원하는 모든 내용을 담을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바로 이 한계를, 이명복은 풍경화-인물화-역사화라는 분절된 장르를 리드미컬하게 상호 연관시킴으로 종국에는 그가 원하는 내용과 주제를 형상성으로 드러내고 극복하게 된다. 최근 인사아트센터 '바라·봄'전에 출품된 「광란의 기억-2」는 이런 이명복의 공력이 고스란히 드러난 작품이다. 이번 나무아트의 '어멍(어머니)'전은 거대한 역사화로 이르는 이명복 회화의 출발점이자 통로라 하겠다. ■나무화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