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에 물들다

 

최인호展 / CHOIINHO / 崔仁浩 / painting 

2022_0315 ▶ 2022_0327

 

최인호_달빛에 물들다_패널에 아크릴채색, 재_71×52cm_2020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일요일_12:00pm~05:00pm27

일_12:00pm~02:00pm

 

 

갤러리 담

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 72(안국동 7-1번지)

Tel. +82.(0)2.738.2745

www.gallerydam.com

 

 

최인호의 회화  삶은 혹, 꿈을 꾸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에 골방이 있다. 쪽창으로 흘러드는 빛과 반쯤 지워진 모서리가 이곳이 실내임을 말해주는 방이다. 쪽창이 환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낮일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빈방에 다만 둥근 테로 장식한 거울이 하나 걸려 있다. 방 안은 아마도 창으로 흘러들어왔을 부드러운 빛의 질감으로 은근한 것 같기도 하고, 연문지 해문지 알 수 없는 공기로 희뿌연 것도 같다. 그리고 벽과 바닥이 접한 모서리 부분에 한쪽 팔을 머리에 괴고 한 남자가 모로 누워있다. 뒤척이는 것도 같고 선잠을 설치는 것도 같은 남자는, 잠을 자는가. 꿈을 꾸는가. 잠결에 꿈을 꾸는 것인가. 꿈속에서 잠든 것인가. ● 은근한, 희뿌연 공기가 잠과 꿈의 경계를 지우는 것도 같고, 현실과 비현실의 지경을 넘나드는 것도 같다. 여기에 이곳이 다름 아닌 방임을 말해주는 반쯤 지워진 모서리는 경계를 견고하게 하기보다는 해체를 위해 있는 것도 같다. 그는 무슨 꿈을 꾸는가. 혹 삶이라는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거울 속에 얼핏 한 사람이 서 있는 것도 같다. 흐릿한, 애매한, 마치 흔적과도 같고 그림자와도 같은 그는 누구인가. 이방인? 유령? 분신? 보르헤스는 거울 속에 타자들이 산다고 했다. 자기_타자다. 그렇게 거울 속 희뿌연 사람이 방에 모로 누워 잠든, 혹 삶이라는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를, 다른 한 사람을 보지 않으면서 보고 있다. 그렇게 삶은 혹, 꿈을 꾸는 것일지도 모른다. 기억일지도 모르고, 추억일지도 모르고, 존재의 희미한 그림자를 더듬는 것인지도 모른다.

 

최인호_활절 달걀_패널에 아크릴채색, 재_45×53cm_2018
최인호_달빛에 물들다_패널에 아크릴채색, 재_104×85cm_2022

그리고 사람들이 있다. 얼굴 없는 사람들이 있고, 얼굴이 뭉개진 사람들이 있고, 얼굴이 어둠에 파묻힌 사람들이 있고, 무표정한 사람들이 있고, 흙 같고 질감 덩어리 같은 사람들이 있고, 마치 흔적과도 같은 사람들이 있다. 물 속이나 물 위에 부유하는 사람들이 있고, 바람 속에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고, 흙 위에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고, 유령처럼 길 위에 서성이는 사람들이 있다. ● 개와 함께 산책하는 사람이 있고, 아마도 웃음 속에 울음을 감춘 사람이 있고, 얼굴을 가면처럼 쓰고 있는 사람이 있고, 곰팡이와 함께 해체되는 사람이 있고, 비처럼 흘러내리는 사람이 있고, 벽이나 땅속으로 스며드는 사람이 있고, 종잇장 같은 사람이 있다. 등을 보여주는 사람이 있고, 긴 그림자를 밟으며 걸어가는 사람이 있고, 뱃전에 선 사람이 있고, 샤워를 하면서 우는지 웃는지 모를 사람이 있다. 목도리를 한 남자가 있고, 꽃을 든 남자가 있고, 멍하게 창밖을 보는 남자가 있고, 머리에 관을 쓰고 있는 남자(어린 왕자)가 있고, 낮술에 취한 남자가 있고, 불안처럼 빨간 기우뚱한 벽에 기대선 남자가 있다. ● 이 사람들은 다 누구인가. 아마도 기억과 회상으로 불러낸, 그렇게 작가의 일부가 되고 자기를 분유하는, 작가의 분신들일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는 심지어 현실을 그릴 때조차 과거처럼 보이고, 흔적처럼 보인다. 상처가 아문 자리처럼 보이고, 정서로 승화된 외상처럼 보인다. 연민의 집인 사진 앨범 속 빛바랜, 색 바랜, 낡은 사진처럼 보인다. 그렇게 작가는 혹 그때의 그리고 지금의 자기를 호출하는 한편, 자기 분신 그러므로 자기를 분유하고 있는 타자들(자기_타자)과 대면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최인호_아침식사_종이에 아크릴채색, 재_60×72cm_2017
최인호_새벽길_종이에 아크릴채색, 재_62×91cm_2020

그림을 보면, 왠지 자기와 닮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그림을 그린 사람을 알 것도 같은 그림이 있고, 그렇지 않은 그림이 있다. 그 사람을 보는 것 같은 그림이 있고, 그렇지 않은 그림이 있다. 그림과 사람이 일치하는 그림이 있고, 그림과 사람이 동떨어진 그림이 있다. 회화의 자율성과 예술의 형식논리에 천착한 모더니즘 패러다임에 견인된 추상미술이 아니라면, 대개 어떤 식으로든 약간씩은 그림과 사람이 닮기 마련인데, 그중에서도 유독, 많이 그런 사람이 있다. ● 최인호가 그렇고, 그가 그림 그림이 그렇다. 쓸쓸한 것 같기도 하고, 우울한 것 같기도 하고, 세상에 저 홀로 내던져진 것 같기도 하고, 칠흑 같은 우주를 저 홀로 떠도는 미아 같기도 하고, 꿈을 꾸는 것 같기도 하고, 대기 속으로 사라지고 말 희박한 존재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존재의 흔적 그러므로 존재가 잠시 머물다 간 빈자리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눈을 돌려 다시 보면 사라지고 말 신기루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현실에서조차 과거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득하고 아련하고 아린 기억을 더듬는 것 같기도 하고,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어둠 속을 헤집는 것 같기도 하고, 밑도 끝도 없는 심연의 나락으로 추락하는 것 같기도 하고, 도돌이표처럼 매번 자기에게로 되돌아오는 것도 같다. ● 그림 속 자기가 그렇고, 타인이 그렇고, 개가 그렇고, 고양이가 그렇다. 골방이 그렇고, 쪽창이 그렇고, 때 묻은 거울이 그렇고, 아마도 반어적으로 머리에 쓰고 있을 관이 그렇다. 구름이 그렇고, 노을이 그렇고, 총총한 별이 그렇고, 교회 첨탑이 그렇고, 풍경이 그렇다. 세상천지가 자기를 증언하는 무대가 되고, 그렇게 사물마저 자기를 발설하기 위해 소환되고 육화된 풍경(사물 인격체?)이라고 해야 할까. 세상 자체가 자기를 분유 그러므로 나누어 가지는 자신의 분신이고 화신이라고 해야 할까. ● 아마도 그림 밖 작가도 유독, 많이 그럴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 해도, 최소한 작가가 자신에 오롯이 집중하는 순간 그러므로 그림을 그릴 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친숙한, 낯익은, 낯 설은, 생경한, 이율배반적인, 편안한, 불안한, 마치 유령과도 같은 존재의 방문을 받는, 그러므로 자기_타자를 맞아들이는 치열한 순간이 있을 것이고, 그 치열한 순간을 그림으로 옮겨 그렸을 것이다.

 

최인호_기다리는 사람_패널에 아크릴채색, 재_45×53cm_2015
최인호_달빛에 물들다_패널에 아크릴채색, 재_107×90cm_2022

그렇게 옮겨 그린 작가의 그림이 어눌하고 어설프다. 그래서 오히려 더 정겹고 살갑다. 그림 속 사람들은 묘사가 무색할 만큼 대충 그린 것 같고 그리다 만 것 같다. 되는대로 조물조물 빗어 만든 흙덩어리를 보는 것도 같다. 그런데도 희한하게 정겹고 살갑게 다가온다. 정겹다는 것은 마음으로 와닿는다는 것이고, 살갑다는 것은 몸으로 와닿는다는 말이다. 마음으로 그린 그림이고 몸으로 그린 그림이다. 그래서 작가의 그림은 그림을 읽기 위해 애써 노력할 필요가 없다. 저절로 와 닿아서 불현듯 공감을 일으키고 부지불식간에 정감을 파고들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있을, 혹 그새 전설처럼 아득해졌을지도 모를 저마다의 자기_타자를 추억처럼 되불러오고 있기 때문이다. ● 그렇게 그림으로 불러낸 사람들이 조금은 슬퍼 보이고 외로워 보이고 쓸쓸해 보인다. 저만의 방, 저만의 바다, 저만의 배, 저만의 창, 저만의 거울, 저만의 햇볕, 저만의 풍경 속에서 그가 세상 밖을 조심스레 내다본다. 그가 보는 세상은 예각으로 기우뚱한 벽에 기대고 선 사람처럼 불안정하고, 일엽편주에 몸을 실은 사람처럼 정처 없고, 몸 안쪽을 감싼 채 웅크리고 있는 사람처럼 막막하다. 적어도 외관상 보기에, 그는 표정이 없다. 붓질이 표정이고 색감이 표정이다. 몸짓이 표정이고 질감이 표정이다. 작가는 이처럼 몇 안 되는 색깔과 어눌한 묘사만으로 희한하게 온몸으로 표정을 밀어 올리는 그림을 그려놓고 있었다. ●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가 여럿 있지만, 그중 결정적인 경우가 연민이라고 생각한다. 존재에 대한 공감이다. 이런 공감이며 연민이 없으면 예술도 없다. 작가의 그림이 이런 존재론적 연민으로 물씬하고 뭉클하다. 덜 그린 듯 어눌한 듯 보는 이의 심금을 파고드는 그림이 감정적 유격(작게 흔들리다가 점차 크게 흔들어놓는)으로 인해 오히려 완전하다고 해야 할까.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를 작가적 텍스트와 독자적 텍스트로 구분한다. 그저 수동적 읽기를 수행하는 텍스트가 독자적 텍스트라고 한다면, 읽으면서 동시에 자꾸 쓰게 만드는, 독자이면서 동시에 작가를 요구해오는, 능동적 읽기를 요구해오는 텍스트 그러므로 열린 텍스트를 작가적 텍스트로 규정한다. 작가의 그림이 그렇다. 어눌한 붓질과 몇 안 되는 색감으로 이루어진 작가의 그림은 그러나 오히려 함축적이고 암시적이다. 자기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미 결정된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하이데거의 세계 내 존재)의 자의식으로, 세상이 낯설고 자신마저 낯선 실존적 징후와 증상(자기소외와 부조리의식)으로, 그럼에도 자기를, 자기_타자를, 타자를, 세계를 감싸 안는 존재론적 연민으로 공감을 얻고 보편성을 얻는다. ■ 고충환

 

최인호_해질녘_패널에 아크릴채색, 재_Φ 80cm_2022

어떤 날은 맑았고 어떤 날은 흐렸다. 내 마음대로 예외없이 그랬다. ● 대부분 흐린 날이 좋았다. 그런 날은 내가 살아있는 것 같고 '전기에 감전된 듯' 일상을 뛰어 넘을 수 있었다. ● 이번 전시는 이런 날에 만들어진 작업들이며 제목을 『달빛에 물들다』로 정한다. (2022. 2. 12 가평, 제령리 작업장에서) ■ 최인호

 

 

Vol.20220310d | 최인호展 / CHOIINHO / 崔仁浩 / painting

 

'선과 도형으로 다다른 회화의 자의식'

 

권성원展 / KWONSUNGWON / 權聖元 / painting 

2022_0309 ▶ 2022_0328

 

권성원_Formation_Top view 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0×190cm_2021

 

초대일시 / 2022_0312_토요일_03: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요일_12:00pm~06:30pm

 

 

갤러리 그림손

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인사동10길 22(경운동 64-17번지)

Tel. +82.(0)2.733.1045

www.grimson.co.kr

 

선과 도형으로 다다른 회화의 자의식 ● 광활한 곡물 평야 위에 찍힌 동그라미 삼각형 따위의 기본 도형이 중첩된 문양을 창공에서 촬영한 신비한 광경. 세간에서는 이를 미스터리 서클이라 부른다. 이 불가사의한 광경이 권성원의 작업실에서 찍은 작품 사진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중 떠올랐다. 캔버스 가장자리에서 중앙을 사선으로 바라보면 일정한 간격으로 줄지어 이어진 물감의 선들이 흡사 곡물 평야의 질서 잡힌 배열과 닮았고, 그 위에 동그라미 삼각형 원뿔 네모 등 기본 도형들이 중첩된 패턴은 미스터리 서클을 떠올릴 만 했으며 그림의 첫 인상이 주는 미적 효과가 미스터리 서클과도 닮아서 그랬던 것 같다. 1960년대부터 서구의 곡물 밭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었던 미스터리 서클은 사람이 감당하기엔 너무 방대한 규모도 그랬지만, 눈을 피해서 그토록 정교하게 곡물 밭 위에 기하학적 패턴을 새기는 게 불가능하리라는 판단 때문에, 발견 초기부터 줄곧 외계에서 온 UFO 착륙 흔적설이 가장 널리 믿어져온 가설이었다. 이 외에도 조류설, 회오리 바람설 등, 이 신비한 현상을 풀이하려고 뛰어든 가설은 더 많다. 그럼에도 과학적인 근거나 정황 증거 등을 종합할 때, 눈을 피할 수 있는 야밤에 농지에 잠입한 일군의 사람들이 패턴을 제작하고 잠적했다는 게 현재 가장 유력한 진실이다. 그렇지만 명칭에서 보듯 불가사의와 신비로움을 간직한 곡물 평야에 새겨진 이 대지예술은 불가사의한 영역인양 보호되는 측면이 있다.

 

권성원_Formation_Top view 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0×190cm_2021_부분

2017년 이래 권성원의 화폭 위로 일관되게 고수되는 공식은 미술의 원형에서 출발해서 원형으로 끝맺으려는 미적 태도 같다. 거의 모든 화면에 출연하는 주인공은 세모 원 네모처럼 말 없는 기본 도형들이고, 형체를 지닌 대상조차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에서 높은 봉우리 부분만 발췌하거나, 미국 국회의사당처럼 돔형식의 신고전주의 양식 건물 상단부를 따오는 식으로, 동서고금에서 권위를 인정받은 도상이 선택되거나 다이아몬드, 와인 잔, 세단, 소파처럼 중산층 이상의 삶을 표상하는 사물들을 안정감 있는 좌우대칭에 맞춰 수평수직을 일치시킨 도상들이다. 「Flatland」(2021)에 초고층 아파트를 짓는 타워크레인과 장난감 경비행기 같은 오브제가 작은 크기로 그림의 좌우 말단에 출현하긴 하지만 그것이 화면의 전체 균형을 흔들지는 않는다. 기본 도형들이 만드는 안정된 구도는 채색에도 반복된다. 색 배합은 3원색을 기본으로 색을 섞지 않고 망막에서 착시를 일으키는 병치 혼합을 택했다. 그 결과 혼합된 색이 만드는 탁한 느낌이 사라지고, 원색과 착시 현상으로 지각된 절제된 혼색이 오롯이 공존하는 화면이 만들어진다.

 

권성원_Flatland 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5×70cm_2021
권성원_Flatland 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2×162cm_2021
권성원_Flatland 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2×162cm_2021

미스터리 서클을 지구인이 인위적으로 제작했으리라 사람들이 감히 염두에 둘 수 없었던 데에는 광활한 곡물 평지에 새긴 기계처럼 찍은 정교한 문양의 스케일 때문이었다. 권성원의 그림을 도판으로 확인하면 얼핏 캔버스 천이나 종이 위에 색실로 꿰맨 직물 공예로 오해하기 쉽다. 실물을 가까이서 확인하면 비로소 컨베이어 벨트 위에 그림을 얹고 기계로 형형색색을 순차적으로 찍어낸 듯 한 절제미가 그림에서 느껴지는데, 정작 이 작업은 작가가 콤프레샤와 튜브로 제작한 수공품이다. 콤프레샤와 연결된 에어건을 쥔 왼손과 물감 튜브를 쥔 오른손이 호흡을 맞춰 동기화된 결과물이란 얘기다. 캔버스 위에 일직선으로 균일하게 그어진 물감의 줄은 가까이서 보면 물감 튜브를 쥔 오른손의 미세한 힘 조절로 균일하게 꿈틀꿈틀 이어지면서 물감의 재질감을 살리고 있다. 균일한 물감 굵기와 길이를 한 줄 한 줄 쌓아 완성에 이르는 이 노동집약적인 제작법에서 흡사 중세시대 모자이크 제작 공법을 떠올리게도 된다.

 

권성원_Formation_brushwork_Seeing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2×162cm_2022
권성원_Formation_Top view 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80×100cm_2021
권성원_Formation_Top view 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80×100cm_2021

권성원의 2017년 이후의 작품 연보를 통틀어 칭하면 '이미지 뭉치/덩어리' 쯤 될 것 같다. 스토리가 사라지고 기본 도형과 고전 도상이 뒤엉킨 하나의 뭉치/덩어리를 무작위인 듯 계획적으로 화면에 던진 모양새라고나 할까. 작가는 기본 도형들로 구성한 연작 회화 「형성 Formation」의 밑그림을 위해, 무작위로 쌓아놓은 실제 입체 도형들을 위에서 촬영한 사진을 참고자료로 썼다고 한다. 여기에 사용된 도형 가운데 원구 원추 원뿔이, 화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기본 단위로 세잔이 예시했던 회화론의 영향 탓도 크겠지만, 권성원의 「형성 Formation」은 회화에 대한 자의식과 맞닿아 있다. 양손을 동시에 사용해서 회화를 제작하는 독창적이고 기계적인 화법이나, 그림에서 스토리를 밀어내고 표면의 실험에 집중한 점이나, 시각적인 재현보다 물감의 촉각적인 질감으로 무게 중심을 이동시킨 점 등, 2010년대 전후 미술판에서 대세로 떠오른 새로운 회화 또는 메타 회화의 한 유형으로 묶일 만하다.

 

권성원_Unstable balance 21- car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0×60.5cm_2021
권성원_균형쌓기 Building Balance 21-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80cm_2021
권성원_균형쌓기 Building Balance 21-5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80cm_2021

미술품은 실물로 보는 것과 찍은 도판으로 보는 것 사이에 설명되기 힘든 질감의 격차가 있다. 그렇지만 이미 십 수 년 전부터 도판만으로 작품을 평가하는 것이 익숙한 심사 문화로 자리 잡았고, 대형 입체 설치물보다 평면 회화작업 그 중에서도 그림 표면의 세부에 비중을 둔 회화는 심사 무대에서 불리한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그림이 담은 이야기의 밀도보다 그림 표면의 감각적인 실험에 집중하는 회화는 그림을 보는 관습도 바꿔놓았다. 그림은 정면에서 바라보고 평가하게 마련이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근접 거리에서 발견되기 힘든 그림 표면의 차별성을 밀접 거리로 다가가 발견해야 하는 작업의 수가 점점 늘어났다. 밀접 거리에서 더 나아가 권성원의 그림으로부터 불가사의한 미스터리 서클의 신비감을 연상하려면, 정면 바라보기, 근접 바라보기, 혹은 밀접 바라보기처럼 그림의 표면을 살펴보는 것만으론 충족되지 않는다. 캔버스의 측면에서 사선 구도로 바라볼 때 미스터리 서클이 돌연 떠오른다. 정면 관람 + 근접 관람 + 밀접 관람에 더해 측면/사선 각도의 총합으로 회화의 면모가 구성되는 회화 작업. 회화는 지금 변하고 있다. ■ 반이정

 

Vol.20220309a | 권성원展 / KWONSUNGWON / 權聖元 / painting

 

야간비행

 

손기환展 / SONKIHWAN / 孫基煥 / painting 

2022_0304 ▶ 2022_0327 / 월요일 휴관

 

손기환_잠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022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30am~06:30pm / 월요일 휴관

 

 

인디프레스_서울

INDIPRESS서울

종로구 효자로 31(통의동 7-25번지)Tel. 070.7686.1125
@indipress_gallerywww.facebook.com/INDIPRESS

 

이번 전시의 주요 테마와 주제는 역사적 이미지와 현실 풍경에 대한 작가의 시각적 해석으로 볼 수 있다. ● 작업은 근, 현대사에서 등장하는 아주 주목할 만한 사건의 기록과 그림을 그리는 작가가 바라보는 현재 풍경 그리고 조형적 구성으로 되어 있다. 특히, 작업에 등장하는 사진 이미지들은 보도나 르포 사진으로 대부분 역사적 사건 사진이나 당시의 사진을 참고로 제작된 삽화들을 활용한다. 시각적 이미지 기록의 오랜 역사에서 창작자의 감성과 해석이 대부분 배제된 사진은 정확한 현실과 사실로 인정되기도 한다. 이러한 과거 역사를 기록한 사진이미지가 갖는 정확함 또는 확실한 존재와 과거로서 여기에, 그림을 그리는 작가의 현재 시점이 더해지며 이를 해석하는 사고와 시각적(그림)의 요소가 한 화면에서 결합되어 역사와 현실 또는 현재를 미술로 해석하려는 작업으로 볼 수 있다.

 

손기환_보색대비-DMZ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7×194cm_2021
손기환_보색대비-DMZ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7×194cm_2021
손기환_잠실풍경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6.7×91cm_2020
손기환_만화사랑 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7×194cm_2020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면, 작가와 현 역사에서 중요한 기점이나 원인이 되었던 사건들-근대 개화와 수구 세력에서 시작된 분단의 씨앗과 이어진 한국전쟁 그리고, 고착된 남북분단, 60-70년대의 「분단의 히스테리」로 불리는 남북 갈등 시대, 이후, 80년 봄, 광주민주화 운동 등 실향민의 아들로 태어나 늘 잠재되어 있던 심리적 불안감에 DMZ현장에서 근무하며 보고 경험했던 특별했던 추억, 그리고, 작가로서 80년대를 온 몸으로 느꼈던 역사적 체험이 현재 이 순간 어떤 의미로 되살아나고 기억과 트라우마로 작품에서 보여 질 수 있으며, 더 해서 주변의 풍경-광화문, 잠실, 작업실 주변 등-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과 해석이 작품을 만들어 내는 내용과 뼈대가 될 수 있다. 이 내용과 뼈대에 조형이라는 살을 붙여 나가며 대중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전체적인 형식을 구축해 낸다고 볼 수 있다.

 

손기환_꿈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0×50cm_2020
손기환_꿈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90cm_2020
손기환_연평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0×200cm_2020
손기환_연평도정물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3×72.7cm_2019

 

결론적으로, 역사의 중요한 사건과 상황이 기록된 사진과 현재 작가가 경험하는 현재 시점의 실, 내외 풍경, 그리고 역사적, 사회적 평가와 문제의식에 대한 작가만의 생각이 그려지며, 이러한 두 개의 이미지를 한 작품 내에서 묶어 주는 역할은 색의 조화와 선, 형의 구성 등 조형적 요소로 언어적 발언으로서가 아니라 시각 구조로 대중들에게 전달하려는 의도이다. 이러한 이미지의 해석은 물리적 이미지 창작이라는 미술이 갖는 사회적 역할과 창작 태도에서 기인하며 일반적으로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창작의 재미를 추구해 본다. (2022. 2) ■ 손기환

 

Vol.20220304g | 손기환展 / SONKIHWAN / 孫基煥 / painting

 

배달된 Delivered

 

이종희(들로화)展 / LEECHONGHOE / 李鍾熙 / sculpture 

2022_0223 ▶ 2022_0307

 

이종희_배달된 마을 1_스티로폼, 신주못, 종이박스_40×60×40cm_2022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갤러리 아리수

GALLERY ARISOO

서울 종로구 인사동11길 13 1층 제1전시실

Tel. +82.(0)2.723.1661

galleryarisoo.com

 

 

유목(되어진)과 정착(달동네) ● 이종희 작업의 주요 화두는 "정착할 수 없는 삶에 대한 근원은?"이고, 현재까지 그 연속선상위에 있다고 본다. 이리 저리 수없이 이사를 다녔던 유년과 청년시절 그리고 작가로 살아가는 현재까지의 삶은 '비정주의 궤도'속에 있다. 작업을 처음 시작하던 시절의 그는 "왜 나는 계속 이주를 하는가?" 였다. 즉 정착하고 사는 삶에 대한 애원이 그의 작품속에 반영되어진 것이다.

 

이종희_배달된 마을 2_소나무에 스테인, 알루미늄_170×77×40cm_2022

대한민국이 산업화사회로 진입하면서 '이촌향도'의 시절이 되었고, 사람들은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동'이라는 것을 가능하게 한 '자동차'에 주목하였다. 자동차의 종류에 따라 서로 다른 '이야기'는 풍부한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특히 이삿짐을 잔뜩 꾸려서 트럭에 싣고 다니는 풍경은 대한민국의 유일한 풍경이 아닌가 싶다. 마치 피난민처럼. 산업화된 사회는 소달구지가 아닌 트럭을 제공하고. 그러던 중에 자동차의 최종 목적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주한 그들의 종착역은 '달동네'였다. 다닥다닥 붙어사는 달동네의 삶은 우리시대의 욕망이다. 달동네의 풍경 또한 지구상에 있는 독특한 풍경이 되었다. 그러나 달동네도 재개발이라는 미명아래 해체된다. 사람들이 가진 자본의 크기만큼 뿔뿔히 흩어진다. 지상에서 '유토피아'를 꿈꿀수있는가? 그는 트럭에 달동네를 싣고 유토피아로 향하는 꿈을 꾼다. 우리는 정녕 정착할 수 없는가?

 

이종희_배달된 꽃섬_소나무에 스테인_48×305×11cm_2022

배달(되어진)과 복제(삶, 분단, 생각, 코로나, 통일)의 일상 ● 2019년 '코로나19'가 시작 되었을 때는 그냥 지나치는 한때의 독감처럼 생각했었다. 그러나 해를 거듭하며 우리옆에 존재하고 있다. 예술가로 살아가는 삶 자체도 별반 '만남'을 필요로 하지 않는데, 이제 '만남'은 필요충분조건이 되어야만 가능한 시절로 접어들었다. 친구, 친척, 가족들의 만남이 사라지면서, 그의 작업실 문앞에는 택배가 잦아들기 시작하였다. 마음을 전하는 형태의 코드가 '만남'에서 '택배'로 바뀌고 있다.

 

이종희_배달된 마을 3_스티로폼, 신주못_150×48×33.5cm_2022

그래도 곧 '코로나19'이전으로 돌아가겠지 하는 마음이 남아있지만, 현재의 우울은 우리 모두에게 깊은 상처로 남을 것이다. '택배'라는 이름으로 찾아온 '마음의 표현'은 복제된 종이박스나 스티로폼 박스의 외관을 형성한다. 박스안에는 먹을것과 생필품들이 주요한 구성원이다. 배달되어진 택배가 늘어나면서, 우리의 일상은 '배달'이 화두를 점령하고있다.

 

이종희_배달된 꽃달_은행나무, 시멘트에 스테인_156×70×34cm_2022

분만실(delivery room)은 천사들에 의해 배달되어지는 아기들의 방이다. 그는 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 세상으로 배달되어졌다. 그는 그가 배달되어진 세상에서 그를 찾기 위한 '유목(nomad)'의 마침표를 작업실에서의 '정착(stayment)'으로 찍는다. 사실 그가 이세상의 중심이 되어 주체적으로 살고 있었다는 자부심은 한낱 착각이었다. '일상의 모든 것은 배달되어진 것이다' 라는 생각이 그의 작품의 출발이다.

 

이종희_배달된 보름달_청동에 유채_41×26×1.4cm×10_2022

어머니로부터 배달된 그, 칼 막스가 배달한 이데올르기, 강대국이 배달한 분단, 국경너머에서 배달된 코로나19, 자본의 크기로 배달된 마을. 배달(倍達)의 민족에게 배달(配達)되어진 것들에 대한 사유의 시각적 표현이 이번 전시의 주된 관심사이다. ■ 들로화

 

 

Vol.20220223e | 이종희(들로화)展 / LEECHONGHOE / 李鍾熙 / sculpture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