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에 볼만한 전시-

 

​이건희컬렉션 한국미술명작전 / 2021년7월21일-3월13일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어느 도시학자가 꿈 꾼 서울전 / 2021,10,29-2022,3,6 / 서울역사박물관

김상진,방정아,오민,최찬숙‘올해의작가상’/2021.10.20.-3.20 / 국립현대미술관

최은경조각전 / 2021,11,1-2022,1.31 / 갤러리헬렌.A

박수근전 / 2021.11.11.- 2022. 3.1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김태호전 / 2021,11,11- 2022,1.22 / 갤러리시몬

정영신전 '장날' / 2021.11.16-2022,1.23 / 돈화문박물관마을, 작가갤러리1-2관

강미선전 ‘수묵, 쓰고 그리다’ / 2021.11.19.-2022.2.6 / 금호미술관

파올로 살바도르전 / 2021,11,24-2022,1,29 / 일우스페이스

고궁연화(경복궁 발굴. 복원 30주년 기념전)/ 2021,12,1-2022,2,27 / 국립고궁박물관

권영우전 / 2021,12,9-2022,1,30 / 국제갤러리

​송상희전 / 2021,12,16-2022,2,27 /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분관

전이린전 / 2021,12,21-2022,2,4 / 갤러리 소공헌

러시아 아방가르드:혁명의 예술전 / 2021.12.31.- 2022.4.17. /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정남선 한국화전 / 2022,1,5-2022,2,5 / 장은선갤러리​

전형주전 / 2022,1,5-2022,1,30 / 통인화랑5층

완상의 벽전 / 2022,1,13-2022,2,26 / oci미술관

가나아트컬렉션전 / 2022,1,14- 2022,2.13 / 인사아트센터 본전시관

 

[스크랩 : 서울아트가이드 2022년 1월호]

 

김종원씨의 '화성을 훔친 남자'전이

지난 8일부터 인사동 토포하우스 2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다.

 

 

신화-통영신명 / 211x148cm, 종이에 먹과 주사, 2021

김종원씨는 현대회화의 원형을 글씨에서 찾는 작가다.

글의 의미를 문자 본래의 주술성에 버무려 필획언어로 재해석해내고 있다.

 

 

획으로부터-곡신불사[춘야청우몽상전도] 부분

작가는 “글자의 기원이 되는 갑골문자는 천지신명과 소통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만들어졌기에

작품은 조형에 주술과 치유의 힘이 깃들여져 있다"며

"먹으로 표현된 검정색 지구 위에 경면주사의 붉은색으로 형상화했다.”고 말한다.

 

 

글자가 그림이 되었고, 그림은 신화로 승화되었다.

전시는 14일까지 이어진다.

 

글 / 조문호

 

노신시2수 / 136x76cm, 종이에 주사, 2021
용-통령신명 택풍산뢰/ 210x149cm, 종이에 먹과 주사, 2021
용-통령신명 천지수화/ 210x149cm, 종이에 먹과 주사, 2021
곡신불사, 136x76cm, 종이에 주사, 2021
곡신불사, 136x76cm, 종이에 주사, 2021
풍신영가, 136x76cm, 종이에 먹, 2021
풍신영가, 136x76cm, 종이에 주사, 2021
획으로부터-곡신불사[춘야청우몽상전도] 175x430cm, 종이에 먹, 2011 
작가 김종원

약력

경남도립미술관 관장(2019~현재)
(사)한국문자문명연구회장(2009~현재) 
국립창원대ㆍ국립경상대 한문학과/미술학과 강사역임

국내외 개인전
2018 아트링크초대전(서울)
2014 중국심천자공예술제(중국 심천)
2009 영국런던한국문화원 G20런던정상회담기념 HANGUL = SPIRIT전
2009 벨기에EU의회 한국문화의날기념 한글퍼포먼스전
2008 창원컨밴션센타(제1회 창원친환경건축제 초대전;文字建築空間)
2007 서울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서예문화사 초대전)
2007 AKZENTA GRAZ (오스트리아)
2006 ART SALZBURG (오스트리아) 
2006 무외전無畏展(창원성산아트홀) 등 국내외개인전 다수.

머금은채로, 그곳에

 

허주혜展 / HEOJUHYE / 許朱惠 / painting 

2021_1208 ▶ 2021_1212 / 월요일 휴관

 

허주혜_anywhere3_한지에 수묵_53×45cm_2021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충청북도_충북문화재단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학고재 아트센터

Hakgojae Art Center

서울 종로구 삼청로 48-4 1층

Tel. +82.(0)2.720.1524

artcenter.hakgojae.com

 

 

바라봄과 나타남  "5월 30일. 그 무엇에 비할 바 없이, 예사롭지 않게 파리의 하늘이 파랗다. 전나무를 올려다보며, 나는 전나무의 솔잎 뭉치들 사이로 보이는 조각난 자그마한 하늘의 파편들이 나무에 핀 파란 꽃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참제비고깔의 꽃만큼이나 파란 빛깔의 꽃으로 환한 전나무들!" (존 버거, 장경렬 옮김, 『백내장 CATARACT』, 열화당, 2012, p. 28.) ● 본다는 것의 의미를 찾던 한 사람은 "백내장 제거 수술 이후의 몇몇 단상들"이라는 부제를 단 책에서 바라보기에 대한 또 다른 사유를 이어갔다. ● "경이롭게도, 존재하는 것들의 너무도 당연한 다양성이 나에게 되돌아왔다. 드리워진 내리닫이 창살이 제거된 다음 두 눈은 되풀이하여 계속 놀라움에 전율한다." (존 버거, 『백내장』, p. 62.) ● 바라보기의 행위가 지닌 진실한 의미는, 행위의 주체가 겪는 시각적인 것이 자명하나 세계 안의 존재에 대하여 "현상적 형태"를 드러나게 하는 것으로, 다르게 말하자면 임의의 존재가 "앞으로 돌출하는" 사태를 그러한 시각적 행위가 동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시각적 주체의) 바라봄은 (시각적 대상의) 나타남과 서로 동일시 하는/되는 것으로, 이는 변하지 않는 형태의 진리를 맹목적이고 오만하게 전제하지 않는다. 되레 모호하고 부정확한 "외양의 영역"인 "현상적 세계"를 이해하여 그 세계 안에 돌출하여 드러나는 존재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갖는다. (카자 실버만, 전영백과 현대미술연구회 옮김, 『월드 스펙테이터』, 예경, 2010, pp. 8-11 참고.) ● 존 버거가 직접 경험한 "본다는 것의 의미"도 마찬가지로, 세계를 관찰하는 시각의 주체가 "존재하는 것들의 다양한 다양성"이 자신의 두 눈에 되돌아오는(돌출하는/나타나는) 경이로운 현상적 체험을 간증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는 백내장으로 시야가 가려진 이후에 수술로 시력을 되찾게 되면서, 예사롭지 않은 어느 한 날의 파란 하늘을 생생하게 "바라봄"과 전나무 솔잎 뭉치들 사이로 하늘의 파편들이 파란 꽃처럼 "나타남"을 세계 안에서 존재와의 경이로운 만남으로 서술했다.

 

허주혜_coexistence1_한지에 수묵_162×130cm_2021

바라보기에 대한 일련의 단상과 사유를 일부러 다시 찾아서 떠올려 본 까닭은, 세계 안의 풍경들을 지속적으로 그려온 허주혜의 회화에 대해 뭔가를 말하기 위해서다. 게다가, 무언가를 "머금은 채"의 순간과 "그곳"이라는 공간을 설정해 놓은 전시의 제목에서, "풍경"을 다루는 그의 사유에 대하여 그와 나 사이에 어떤 대화가 만들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의 네번째 개인전 ⟪머금은 채로, 그곳에⟫는 임의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정황을 제목에서 흐릿하게 함의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늘 회화에서 다뤄온 "풍경"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그것의 지속을 의심없이 보여준다. ● 한지에 수묵으로 그린 「coexistence1,2,3,4」(2021)는 도시의 스펙터클한 풍경을 화면에 빼곡하게 중첩시킨 그림으로, 그가 최근에 집중해 온 시공간에 대한 특유의 "이접" 효과를 가감없이 드러낸다. 마치 서로 다른 것들을 거리낌 없이 병치하여 결합해 놓은 콜라주 화면처럼, 허주혜는 크기와 시점과 시간과 장소 등 각각 상이한 기원을 가지고 있는 형태들을 이어 붙여 그럴듯하게 꽉 찬 풍경화를 완성해 놓은 것이다. 이 빼곡한 도시 풍경은 그야말로 현실의 리얼리티처럼 비현실적인 것들의 스스럼 없는 "공존"을 보여주는데, 거기서 더 나아가 거대한 도시 풍경의 장막 뒤에 가려져 있는 존재에 대한 (낯선) "보기"를 유도한다.

 

허주혜_coexistence2_한지에 수묵_162×130cm_2021

스케일을 한껏 부각시키려는 듯 나란히 놓인 「coexistence1,2,3,4」의 경우, 세로로 긴 화폭에 담아 있는 도시 풍경에서 보는 이의 시선은 끊임없는 분절을 겪게 된다. 그것은 저 큰 풍경 속에서 예기치 않은 존재들이 스스로 "드러내기"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바라봄"과는 독립적인 방식으로 존재의 "나타냄"은 상이한 시공간의 풍경들이 이접된 경로에서 수수께끼 같은 시각의 긴장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여기서 카자 실버만(Kaja Silverman)이 "동굴 우화"를 가지고 "바라보기"의 능력에 대해 독립적으로 발생하는 (존재의) "드러내기"를 설명한 부분을 참고해 볼만 한데, "드러내기"는 (주체의) "시각적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 자체의 근본적 특성"이라 말한 부분이다. 실버만에 따르면, 그것은 바라봄을 무효화 할 역량을 가지고 있다. (카자 실버만, 『월드 스펙테이터』, p. 15.)

 

허주혜_coexistence3_한지에 수묵_162×130cm_2021

허주혜는 시각적 바라보기와 존재 자체의 근본적 특성에 대한 드러내기를 동시에 환기시키듯 "현상적 형태"로서의 낯선 긴장감을 회화의 화면에서 보여준다. 그는 어느 시점부터 대도시의 스펙터클한 풍경을 바라보면서 미묘한 시차(視差)들을 경험했고, 그것은 마치 숲과 나무 사이의 역설적인 관계처럼 도시의 풍경과 개별적인 건축 혹은 기념비적 형태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상이한 현상적 경험을 각인시켜 주었던 모양이다. 그런 까닭에 그의 회화는 화면의 모서리를 의도적으로 크게 인식하여 하나의 풍경으로서 접근해 보면, 도시의 스펙터클 이미지를 구축하는 수직‧수평의 직선들과 평평하고 매끈한 표면과 수직의 높이와 시선의 공백이 보이지 않는 효율적 공간 배치를 시각 이미지의 전제 조건 안에서 큰 무리 없이 찾아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그의 회화가 체감시키는 감각과 지각의 또 다른 긴장은, 시공간의 착오를 일깨우는 개별적인 형태들에서 회화적 기법과 매체의 물성이 이접된 형상들을 뚫고 낱낱이 돌출되는 순간에 발생한다.

 

허주혜_coexistence4_한지에 수묵_162×130cm_2021

그가 도시의 스펙터클한 풍경을 경험하면서 현상적으로 지각했던 것들은 건축의 파사드나 아래에서 올려다 볼 때 그 끝이 허공으로 사라질 것 같은 과장된 수직성 같은 것이었다. 또한 멀리서 조망하는 도시의 과밀한 조감 풍경과 이따금 유령처럼 출몰하는 과거의 기념비 같은 것들도 익숙한 시각적 감수성을 자극하여 그것의 (식상한) 시각적 기원을 가늠해 보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때, 허주혜는 그것을 화면에 옮겨 그리면서 그러한 풍경의 시지각적 클리셰를 개별적인 존재의 "돌출"과 맞닥뜨리게 했다. 그것은 몇 가지로 단순하게 규명하기도 어렵고 또 어떤 특정한 조건 안에 가두어 놓기도 어려운 것으로, 거대한 세계의 매우 개별적인 사태 안에서 "마주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것은 또한 (동아시아) 회화에 있어서 현상적 경험의 가능성을 재차 강조한다.

 

허주혜_금요일이 지나고_한지에 수묵담채_53×45cm_2021
허주혜_모퉁이를 돌면1_한지에 수묵담채_53×45cm_2021

바라봄의 행위는 필연적으로 나타남을 동반하여, 세계를 관찰하는 허주혜의 바라봄은 몇 번의 현상적 경험의 절차를 갱신함으로써 회화 안에서 형상의 돌출이라는 나타남과 동일시 될 수 있다. 그는 특히 먹과 붓을 한지에 운용하는 숙련된 기술과 매체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현실의 이접된 "풍경"이 제 존재를 드러낼 회화적 조건들을 개입시킨 셈이다. 이를테면, 먹의 스밈과 농담, 붓의 크기와 무게, 종이의 두께와 질감 등을 기술적으로 조율하여 바라봄의 형태가 나타남의 형상으로 변환되는 지점을 탐구한 흔적이 역력하다. 수많은 형상들이 교차하며 이접된 회화의 공간 안에서 도시 풍경의 스펙터클이라는 장막을 지나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뜻밖에도 개별적인 형태들을 구축하고 있는 회화적 행위와 재료의 물성과 그것을 운용한 작가의 행위인 것이며, 그것이 다시 거대한 세계 속 존재의 나타남과 공명한다고 할 수 있겠다.

 

허주혜_불필요해진 것들_한지에 수묵담채_53×45cm_2021

허주혜는 자신이 본 도시 풍경을 회화의 공간 안에 담아내는 그러한 변환에 대해, 일련의 모필 드로잉의 결과물로서 거대한 건축물의 파사드를 먹의 농담을 머금은 추상적인 "시간의 흔적"이나 "밀림"과 같은 임의의 장소성을 연상시키면서 그 속에서 "바글거리는 작은 생명의 울부짖음"을 상상하기도 했다. (2020년 작업노트) 비슷한 시기 오래된 도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주공아파트나 구식 아파트 옥상의 부분에 주목해 수묵으로 그렸던 그림 「repeat1」(2020), 「repeat2」(2020), 「unknown1」(2019), 「unknown2」(2019) 등을 보면, 도시 풍경이라는 일련의 외부 세계를 관찰하던 그의 시선이 풍경의 대상이 현존하는 감각으로 제 형태를 나타내는 경험과 교차시켜 그것을 회화적 수법으로 시각화 했던 것을 더 진솔하게 가늠해 볼 수 있다.

 

허주혜_화단이었지만_한지에 수묵담채_53×45cm_2021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15117117」(2017)과 「1617247」(2017) 같은 매우 추상적인 결과물의 회화에서도 꾸준히 세계를 관찰하던 그의 현상적 경험을 엿볼 수 있는데, 이때 그는 "농묵과 담묵의 대비를 이루고 있는 이 두 작품은 나무가 빼곡하게 펼쳐진 밀림처럼 보인다. 밀림 군데군데 보이는 여백은 하늘의 뭉게구름인지, 숲 속 사이사이 자리 잡고 있는 호수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이것은 도시가 자연으로, 자연이 도시로 융화되어 보이는 나의 작품 세계관에 기인한다"고 말했다. (2017년 작업노트) 작가의 이러한 속내는 앞서 존 버거의 경험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전나무의 솔잎 뭉치들 사이로 보이는 조각난 자그마한 하늘의 파편들이 나무에 핀 파란 꽃"으로 나타나는 그 순간의 현상적 형태에 대한 경이로운 경험에 대해서 말이다. 그것은 그의 말대로 "존재하는 것들의 너무도 당영한 다양성"이며, 나의 "바라봄"의 응시로 되돌아 오는 존재의 "나타남"을 수수께끼처럼 풀어낸다.

 

허주혜_흔적만1_한지에 수묵담채_53×45cm_2021

한편, 검은색 수묵화의 무게와 침묵을 뚫고 빛과 같이 다양한 색을 머금은 풍경의 형태들이 보인다. 빛은 우리의 두 눈을 "볼 수 있음"과 "볼 수 없음" 사이에서 끊임 없이 동요하게 한다. 마치 동굴의 어둠을 빠져 나온 이가 빛으로 인해 세계가 다시 비가시성의 "은폐"에 사로잡히게 된 것을 몸으로 경험했던 것처럼, 빛은 여전히 "바라봄"에 대한 끝없는 회의를 유도한다. 하지만 세계 안의 존재에게 비춰지는 빛은 제 형태의 "나타남"을 가시화 하며 은폐된 것을 현존하도록 하는 동력을 제공한다. 허주혜는 그동안 외부 세계를 관찰하던 자신의 응시에 "색"을 넣어 개별적인 풍경에 대한 인간의 "바라봄"과 독립적으로 발생하는 "존재의 근본적 특성"을 사유하게 하는 사건과 마주하게 했다. ■ 안소연

 

Vol.20211208e | 허주혜展 / HEOJUHYE / 許朱惠 / painting

봄, 여름, 가을, 그림 그리고 겨울

 

김태민展 / KIMTAEMIN / 金兌珉 / painting 

2021_1130 ▶ 2021_1207

 

김태민_소풍 간 거위가족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6×72.7cm_2021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5:30pm

 

 

후원 / 문화체육관광부_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갤러리 아리수

GALLERY ARISOO

서울 종로구 인사동11길 13

Tel. +82.(0)2.2212.5653 / 070.8848.5653

galleryarisoo.com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돌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인데 우리 삶은 가끔 한걸음 내딛기도 버겁다. 그럴 땐 이불 속에서 웅크린 채 그저 과거를 곱씹는다. 마음이 자꾸 지난날에 머물며 몸집을 불릴 때도 지구는 무겁다 나무라지 않고 지친 맘들을 업어준다. 좀 웃으라며 회전목마를 태워준다.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다며 우리를 업고 태양을 돈다. ● 그러다 정신이 들면 우리는 봇짐을 찾는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시간만 갔다며 허탈해한다. 그럴 땐 여름이 오면 바다에 가야지, 가을이 오면 단풍놀이를 가야지, 겨울이 오면 겨울 산도 참 운치 있지 하면 된다. 기대하는 순간부터 회전목마는 재밌다. ● 삶에서 의미 있는 순간들은 온도와 함께 저장된다. 가을날 가족들과 걸었던 그 날의 공원은 덥지도 춥지도 않았다. 나만큼 철없던 친구들과 같이 놀던 겨울 바다는 추웠고, 누군가를 마음에 묻어야 했던 그때의 겨울은 춥다 못해 시렸다. 우리가 항상 슬플 수도 항상 즐거울 수도 없는 삶을 살아내는 동안 지구도 언제나 같이 삶을 살아내고 있다. 봄이 오면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여름에는 잎이 무럭무럭 자라 푸르러진다. 그 푸르름은 가을이 오면 보색대비를 일으키며 붉게 물들고 겨울에는 누가 누가 잘 비워내기를 하나 대결하듯 모든 걸 앞다투어 내려놓는다.

 

김태민_연보라색 기억(5월의 라벤더 꽃밭)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91cm_2021
김태민_눈 덮힌 알프스 산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60.6cm_2021
김태민_민들레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3×45.5cm_2021
김태민_여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3×45.5cm_2021
김태민_가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3×45.5cm_2021
김태민_무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60.6cm_2021
김태민_산의 비밀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72cm_2021
김태민_앵무새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3×45.5cm_2021
김태민_라벤더 꽃길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60.6cm_2020
김태민_가을 숲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60.6cm_2020
김태민_파란 꽃-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3×45.5cm_2021
김태민_파란 눈 표범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3×45.5cm_2021
김태민_러시아 겨울 풍경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60.6cm_2021
김태민_맥문동 꽃이 핀 풍경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91cm_2020
김태민_빨간 꽃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5.5×38cm_2020
김태민_수경식물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6×72.7cm_2020
김태민_스위스풍경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6×72.7cm_2021
김태민_해바라기_캔버스에 유채_53×41cm_2021
김태민_라벤더 꽃밭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6×72.7cm_2021

 

온도는 사람이 그리는 그림에도 저장된다. 그림에는 작가가 재구성한 세계가 담기고 그 그림은 고유한 시상이 생긴다. 그 시상은 우리의 삶에 스며들어 하나의 계절이 된다. ● 올해도 지구는 태양을 한 바퀴 완주해 간다. 때로는 지구가 태우는 회전목마에 몸을 맡기고 의지하기도 했었겠지만 또 내일이 너무 기다려져 설레는 순간도 하루쯤은 있었던 한해였기를 바란다. 그렇게 흘러간 시간 들은 태민 작가의 그림 속에 담겨 또 하나의 새로운 계절감으로 보는 이들을 안아준다. 태민 작가의 작품은 겨울나무를 닮았다. 군더더기 없는 그저 사람 가장 밑바닥에 있던 본심 같은 그림들이다. 굳이 무얼 더 더할 필요도 뺄 것도 없어 보이는 그의 그림들이 위치할 곳은 가을과 겨울 사이다. ■ 김현이

 

Vol.20211130e | 김태민展 / KIMTAEMIN / 金兌珉 / painting

막의 막 Facade In Facade

 

황원해展 / HWANGWONHAE / 黃原海 / painting 

2021_0722 ▶ 2021_0814 / 일,월요일 휴관

 

황원해_Cross Processing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5×110cm_2021

 

작가와의 대화 / 2021_0731_토요일_03: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45-14(수송동 46-15번지)

Tel. +82.(0)2.734.0440

www.ocimuseum.org

 

 

열심히 올라가고 있는 건축현장을 떠올려본다. 건물의 골조, 겉면을 덮어가는 여러 자재들, 천막 사이로 간간이 비치는 어릿한 형상 등 별개로 확립된 소재들이 새로운 창조를 위해 밀접히 연관된다. 각각의 역량을 올바르게 적용한, 융합의 물리적 모습이다. ● 황원해는 도심 속 건축물에서 관찰한 장면을 캔버스로 옮긴다. 거대한 조합체 안에서 각각의 요소를 발견해 중첩하고, 비틀어 보고, 녹여내고, 파편화 시키는 과정을 거친다. 수많은 이미지들을 횡단하며 가려진 부피를 가늠해보고, 얕은 단면 속에서 분명한 입체감을 포착한다. ● 평면과 입체의 경계에서 발견한 '막'은 그물망같이 얽히고설키며 조우하는 통섭의 기능을 가진다. 단면의 패턴이 모여 덩어리를 이루는 스크린톤으로 나타나 유영하고, 파사드를 닮은 캔버스 안에서 낯선 세계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렇게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허물며 회화로서의 새로운 융합을 시도한다. ■ 이영지

 

황원해_Cross Processing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5×110cm_2021

지구(인공) 물질의 그림 ; 황원해. 막의 막(Facade In Facade) ● 매끈한 유리 파사드의 반사와 투과, 이와 대비되는 불완전한 건축적 구조 그리고 그 위에 스민 조각난 스크린 톤(screen tone) 1) 은 최근 황원해의 그림에 중요한 재료들이다. 이것은 캔버스 위에서 분해, 재조합되며 새로운 물질적 풍경을 제시한다. 이런 반복적 결과물은 푸르게 일렁이는 화면의 복잡성을 만든다. 하지만 실제 작가가 취하는 장면적 실험은 꽤 명료하다. 화면 안에서 재료 간의 조합을 발견하고 이를 그려나가는 것 그리고 다시 그 상징과 물리적 연결성을 해체하는 것이 현재 그가 회화라는 형식 안에서 몰두하며 일궈 나가는 일이다. 작가는 이 방법을 일종의 크로스 프로세싱(Cross Processing) 2) 에 비유하기도 한다. 3차원의 실제 환경이 지닌 굴곡을 무시한 채 건물의 표피에서 얻은 패턴과 스크린 톤을 결합해 만든 이미지들은 본래의 역할과는 전혀 다른 풍경의 구조를 덧입고 있다. ● 작품의 초기 구성은 이렇듯 추적 가능한 투명성을 지니지만, 이에 비해 그 최종적 상태를 결정 짓는 기준과 절차들은 결코 단순하지 못하다. 그것은 기존에 작가가 주목해온 풍경들이 어떤 변화를 겪어 냈는지를 살펴볼 때 여실히 드러난다. 역사적 층위에서의 시공간을 포착한 「Phantasmagoria(판타스마고리아)」(통의동 보안여관, 2018)는 작품 제목에 등장하는 'Crack-ing / Reconstruction / Flake' 등의 단어처럼 줄곧 작가의 시선을 빼앗아온 건축적 구조물의 생성과 소멸의 언어가 이미지를 결정짓는 주요한 기준점이 되었다. 작가가 여기서 주목한 것은 물리적인 공간과 더불어 서울이라는 도시가 지닌 흔적, 기억, 축적, 상충 등에 관한 시각적 기록물이다. 이렇게 발견된 이미지들은 프레임을 비껴가며 중첩되거나 심지어는 부스러지는 벽 틈 사이를 파고들지만 여전히 평평한 세계 위의 회화적 수사법을 놓지 않는다. 캔버스라는 프레임을 통해 현실과 가상적 공간에서의 경계를 흐리고자 하는 시도는 「제 4의 벽(The Forth Wall)」(공간 형, 2020)에서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황원해_Emulsio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5×190cm_2021
황원해_Emulsio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5×190cm_2021

이전 작품들이 건축물이 지닌 역사적 특성과 독특한 시각적 요소를 함께 보여줬다면 최근에는 그 표면을 이루는 물리적 작용 그 자체에 더 집중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번 작품을 'Suspension / Slurry / Emulsion' 이라는 물질의 상태적 특성으로 지칭하고자한 작가의 태도에서 엿볼 수 있다. 이런 표현의 변화는 이미지 수집과 선별의 기준점이 화자의 의도를 지닌 동사형에서 사물 간의 수동적 작용을 그대로 포착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자연을 포함한 인공적 사물에 대한 자의적 해석을 덧붙이기보다는 그것의 작용과 반작용을 지켜보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작은 유리 플라스크 안의 물질들이 서로 화학작용을 일으키는 순간, 혹은 도심 속 거대한 파사드와 광고용 전광판이 모니터 위로 반사되며 뒤엉키는 광경을 바라보는 일 따위를 연상시킨다. 현재 황원해의 시선 역시 이런 관찰과 관망의 사이를 맴돌고 있는 듯하다. 인간 바깥의 세계를 바라보고 재현하는 일은 사실 회화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습관과 같다. 지극히 사소하고 자연스러운, 그러므로 절대 거대한 사건과 결말을 예언해 줄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다.

 

황원해_Sheet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0×30cm_2021
황원해_Slurry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0×30cm_2021

풍경이라는 통속적인 명칭  "지금 이 시점부터 우리에게 풍경이라는 통속적인 명칭은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이 단어는 어쩐지 손 기술에 불과한 것을 의미하는 듯해서 나의 온몸이 거부감을 느낀다. ...이제 나는 다음과 같은 단어를 제안한다. 지구생명, 지구생명의 그림." 3) ● 과거 풍경화는 성인이나 영웅이 등장하는 역사화에 비해 단순히 시각적 유희를 만족시키는 낮은 수준의 그림으로 여겨졌다. 그나마 종교나 신화의 인물과 사건의 등장을 암시하는 풍경화 정도가 겨우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렇게 미술 아카데미즘의 변방으로 밀려난 이 장르는 한편으론 기존의 규칙과 관념으로부터의 자유를 보장 받게된다. 이는 고전 미술 이후 모더니즘의 출발점이 풍경이란 대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이유가 되기도 할 것이다. 도심의 환영은 이제 생물의 자연보다 더 가까이 접하는 또 다른 자연의 개념이 된 상황에서, 황원해의 그림은 다시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풍경이라는 통속적인 명칭'이 아닌 지구생명이라는 유기체적 관점으로 일상을 바라본 고전 예술가 4) 의 시도는 어쩌면 오늘날 테크놀로지의 발달과 새로운 세대로 뭉뚱그려 설명되는 일련의 이미지들에 각자의 열린 결말을 제공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예술가가 포착한 일상의 장면을 묘사하는 일에 역사적 사건을 투과하지 않는 것, 그리고 지구 환경의 새로운 유기적 성질을 관찰하며 개인의 미적 실험을 지속해나가는 것은 과거 주류적인 역사화를 넘어 풍경화를 기반으로 취했던 예술가들의 독립적 태도와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황원해_Suspensio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60cm_2021

콜라주와 매시업, 간과되는 테크닉 ● 회화의 장르적 분류라는 넓은 개념으로 작품을 살펴보았다면 화면을 이루고 있는 구체적 표현 기술은 어떤 양식을 띄고 있을까?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입체적인 건축물과 가상적 음영 효과인 스크린 톤 사이의 2차원적 결합일 것이다. 이 결합은 실제와 디지털을 오가는 콜라주 형식으로 구현된다. 최초의 콜라주가 재현의 반대인 부재를 겨냥했다면 이것을 이제 하나의 스킬처럼 회화의 구상과 제작, 배치의 과정 전반에 녹아 있다. 이는 현대미술의 이미지 생산에 큰 축을 담당하는 매시업(mash-up) 5) 과 같은 범주에 속해 있으면서 서로 혼용되어 이미지 생산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이런 기술의 흔적은(특히 회화에서) 다시 '손기술'을 통해 삭제되기도 한다. 공공연히 하대 받던 '손기술'은 재현의 도구로 간과되는 테크닉이라기보다 디지털 기술이 만들어낸 이미지에 의도적인 '모호성'을 확보해 주는 요소가 된다. 황원해의 작품 역시 기술과 개념의 적절한 연결 고리를 찾는 이런 디지털 융합의 논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가상의 환경에서 계획된 이미지들 사이에 작가가 만들어낸 붓질과 여백은 화면에 적절한 추상성을 부여해주는 동시에 작품이 표현하고자 한 물리적 상호작용과 표현성을 강조 시킨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절충적인 시선과 프레임의 모호한 경계를 가로지르며 캔버스라는 인공적 사물을 직면하는 관람자의 지각을 통해 회화의 평면성을 자신의 방식으로 온전히 확보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작가는 오늘도 우리가 지나쳐온 풍경의 실체적 질료를 파헤치며 또 다른 성질의 새로운 공간을 찾아 나가고 있다. ■ 송고은

 

* 각주1) 영상 만화 제작 등에서 회색조 명암이나 무늬, 패턴을 그리는 데 사용하는 도구. 여기서는 과거 종이 원고용으로 사용된 톤을 의미한다. 최근에는 같은 목적을 가진 컴퓨터 원고용 톤이 있다. 국립국어원 참조.2) 사진 현상에 사용되는 필름의 제조사와 유형, 빛의 양, 화학 물질 등과 같이 여러 요인을 통해 이미 결정된 표준값 외에 사용자가 의도적으로 그 표준값을 조작하여 결과물에 영향을 미치는 일을 뜻한다.3) 카를 구스타프 카루스,『풍경화에 대한 아홉 개의 편지 Neun Briefe über Landschaftsmalerei』(1831) 참조. 이화진, 2018, 미술사학연구회, C. G. 카루스의 『풍경화에 대한 아홉 개의 편지』와 지질학적 풍경.4) 앞의 자료. 카루스는 지구생명의 그림(Erdlebenbildkunst)이라는 신조어를 통해 풍경화의 전통과 자연에 대한 근대적 시각을 비판하고, 셸링 철학을 바탕으로 자연과 인간 정신의 동일성을 주장했다.5) 데이비드 건켈,『Of Remixology: Ethics and Aesthetics after remix)』, MIT PRESS, 2016.

 

Vol.20210722b | 황원해展 / HWANGWONHAE / 黃原海 /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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