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금은채로, 그곳에

 

허주혜展 / HEOJUHYE / 許朱惠 / painting 

2021_1208 ▶ 2021_1212 / 월요일 휴관

 

허주혜_anywhere3_한지에 수묵_53×45cm_2021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충청북도_충북문화재단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학고재 아트센터

Hakgojae Art Center

서울 종로구 삼청로 48-4 1층

Tel. +82.(0)2.720.1524

artcenter.hakgojae.com

 

 

바라봄과 나타남  "5월 30일. 그 무엇에 비할 바 없이, 예사롭지 않게 파리의 하늘이 파랗다. 전나무를 올려다보며, 나는 전나무의 솔잎 뭉치들 사이로 보이는 조각난 자그마한 하늘의 파편들이 나무에 핀 파란 꽃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참제비고깔의 꽃만큼이나 파란 빛깔의 꽃으로 환한 전나무들!" (존 버거, 장경렬 옮김, 『백내장 CATARACT』, 열화당, 2012, p. 28.) ● 본다는 것의 의미를 찾던 한 사람은 "백내장 제거 수술 이후의 몇몇 단상들"이라는 부제를 단 책에서 바라보기에 대한 또 다른 사유를 이어갔다. ● "경이롭게도, 존재하는 것들의 너무도 당연한 다양성이 나에게 되돌아왔다. 드리워진 내리닫이 창살이 제거된 다음 두 눈은 되풀이하여 계속 놀라움에 전율한다." (존 버거, 『백내장』, p. 62.) ● 바라보기의 행위가 지닌 진실한 의미는, 행위의 주체가 겪는 시각적인 것이 자명하나 세계 안의 존재에 대하여 "현상적 형태"를 드러나게 하는 것으로, 다르게 말하자면 임의의 존재가 "앞으로 돌출하는" 사태를 그러한 시각적 행위가 동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시각적 주체의) 바라봄은 (시각적 대상의) 나타남과 서로 동일시 하는/되는 것으로, 이는 변하지 않는 형태의 진리를 맹목적이고 오만하게 전제하지 않는다. 되레 모호하고 부정확한 "외양의 영역"인 "현상적 세계"를 이해하여 그 세계 안에 돌출하여 드러나는 존재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갖는다. (카자 실버만, 전영백과 현대미술연구회 옮김, 『월드 스펙테이터』, 예경, 2010, pp. 8-11 참고.) ● 존 버거가 직접 경험한 "본다는 것의 의미"도 마찬가지로, 세계를 관찰하는 시각의 주체가 "존재하는 것들의 다양한 다양성"이 자신의 두 눈에 되돌아오는(돌출하는/나타나는) 경이로운 현상적 체험을 간증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는 백내장으로 시야가 가려진 이후에 수술로 시력을 되찾게 되면서, 예사롭지 않은 어느 한 날의 파란 하늘을 생생하게 "바라봄"과 전나무 솔잎 뭉치들 사이로 하늘의 파편들이 파란 꽃처럼 "나타남"을 세계 안에서 존재와의 경이로운 만남으로 서술했다.

 

허주혜_coexistence1_한지에 수묵_162×130cm_2021

바라보기에 대한 일련의 단상과 사유를 일부러 다시 찾아서 떠올려 본 까닭은, 세계 안의 풍경들을 지속적으로 그려온 허주혜의 회화에 대해 뭔가를 말하기 위해서다. 게다가, 무언가를 "머금은 채"의 순간과 "그곳"이라는 공간을 설정해 놓은 전시의 제목에서, "풍경"을 다루는 그의 사유에 대하여 그와 나 사이에 어떤 대화가 만들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의 네번째 개인전 ⟪머금은 채로, 그곳에⟫는 임의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정황을 제목에서 흐릿하게 함의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늘 회화에서 다뤄온 "풍경"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그것의 지속을 의심없이 보여준다. ● 한지에 수묵으로 그린 「coexistence1,2,3,4」(2021)는 도시의 스펙터클한 풍경을 화면에 빼곡하게 중첩시킨 그림으로, 그가 최근에 집중해 온 시공간에 대한 특유의 "이접" 효과를 가감없이 드러낸다. 마치 서로 다른 것들을 거리낌 없이 병치하여 결합해 놓은 콜라주 화면처럼, 허주혜는 크기와 시점과 시간과 장소 등 각각 상이한 기원을 가지고 있는 형태들을 이어 붙여 그럴듯하게 꽉 찬 풍경화를 완성해 놓은 것이다. 이 빼곡한 도시 풍경은 그야말로 현실의 리얼리티처럼 비현실적인 것들의 스스럼 없는 "공존"을 보여주는데, 거기서 더 나아가 거대한 도시 풍경의 장막 뒤에 가려져 있는 존재에 대한 (낯선) "보기"를 유도한다.

 

허주혜_coexistence2_한지에 수묵_162×130cm_2021

스케일을 한껏 부각시키려는 듯 나란히 놓인 「coexistence1,2,3,4」의 경우, 세로로 긴 화폭에 담아 있는 도시 풍경에서 보는 이의 시선은 끊임없는 분절을 겪게 된다. 그것은 저 큰 풍경 속에서 예기치 않은 존재들이 스스로 "드러내기"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바라봄"과는 독립적인 방식으로 존재의 "나타냄"은 상이한 시공간의 풍경들이 이접된 경로에서 수수께끼 같은 시각의 긴장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여기서 카자 실버만(Kaja Silverman)이 "동굴 우화"를 가지고 "바라보기"의 능력에 대해 독립적으로 발생하는 (존재의) "드러내기"를 설명한 부분을 참고해 볼만 한데, "드러내기"는 (주체의) "시각적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 자체의 근본적 특성"이라 말한 부분이다. 실버만에 따르면, 그것은 바라봄을 무효화 할 역량을 가지고 있다. (카자 실버만, 『월드 스펙테이터』, p. 15.)

 

허주혜_coexistence3_한지에 수묵_162×130cm_2021

허주혜는 시각적 바라보기와 존재 자체의 근본적 특성에 대한 드러내기를 동시에 환기시키듯 "현상적 형태"로서의 낯선 긴장감을 회화의 화면에서 보여준다. 그는 어느 시점부터 대도시의 스펙터클한 풍경을 바라보면서 미묘한 시차(視差)들을 경험했고, 그것은 마치 숲과 나무 사이의 역설적인 관계처럼 도시의 풍경과 개별적인 건축 혹은 기념비적 형태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상이한 현상적 경험을 각인시켜 주었던 모양이다. 그런 까닭에 그의 회화는 화면의 모서리를 의도적으로 크게 인식하여 하나의 풍경으로서 접근해 보면, 도시의 스펙터클 이미지를 구축하는 수직‧수평의 직선들과 평평하고 매끈한 표면과 수직의 높이와 시선의 공백이 보이지 않는 효율적 공간 배치를 시각 이미지의 전제 조건 안에서 큰 무리 없이 찾아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그의 회화가 체감시키는 감각과 지각의 또 다른 긴장은, 시공간의 착오를 일깨우는 개별적인 형태들에서 회화적 기법과 매체의 물성이 이접된 형상들을 뚫고 낱낱이 돌출되는 순간에 발생한다.

 

허주혜_coexistence4_한지에 수묵_162×130cm_2021

그가 도시의 스펙터클한 풍경을 경험하면서 현상적으로 지각했던 것들은 건축의 파사드나 아래에서 올려다 볼 때 그 끝이 허공으로 사라질 것 같은 과장된 수직성 같은 것이었다. 또한 멀리서 조망하는 도시의 과밀한 조감 풍경과 이따금 유령처럼 출몰하는 과거의 기념비 같은 것들도 익숙한 시각적 감수성을 자극하여 그것의 (식상한) 시각적 기원을 가늠해 보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때, 허주혜는 그것을 화면에 옮겨 그리면서 그러한 풍경의 시지각적 클리셰를 개별적인 존재의 "돌출"과 맞닥뜨리게 했다. 그것은 몇 가지로 단순하게 규명하기도 어렵고 또 어떤 특정한 조건 안에 가두어 놓기도 어려운 것으로, 거대한 세계의 매우 개별적인 사태 안에서 "마주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것은 또한 (동아시아) 회화에 있어서 현상적 경험의 가능성을 재차 강조한다.

 

허주혜_금요일이 지나고_한지에 수묵담채_53×45cm_2021
허주혜_모퉁이를 돌면1_한지에 수묵담채_53×45cm_2021

바라봄의 행위는 필연적으로 나타남을 동반하여, 세계를 관찰하는 허주혜의 바라봄은 몇 번의 현상적 경험의 절차를 갱신함으로써 회화 안에서 형상의 돌출이라는 나타남과 동일시 될 수 있다. 그는 특히 먹과 붓을 한지에 운용하는 숙련된 기술과 매체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현실의 이접된 "풍경"이 제 존재를 드러낼 회화적 조건들을 개입시킨 셈이다. 이를테면, 먹의 스밈과 농담, 붓의 크기와 무게, 종이의 두께와 질감 등을 기술적으로 조율하여 바라봄의 형태가 나타남의 형상으로 변환되는 지점을 탐구한 흔적이 역력하다. 수많은 형상들이 교차하며 이접된 회화의 공간 안에서 도시 풍경의 스펙터클이라는 장막을 지나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뜻밖에도 개별적인 형태들을 구축하고 있는 회화적 행위와 재료의 물성과 그것을 운용한 작가의 행위인 것이며, 그것이 다시 거대한 세계 속 존재의 나타남과 공명한다고 할 수 있겠다.

 

허주혜_불필요해진 것들_한지에 수묵담채_53×45cm_2021

허주혜는 자신이 본 도시 풍경을 회화의 공간 안에 담아내는 그러한 변환에 대해, 일련의 모필 드로잉의 결과물로서 거대한 건축물의 파사드를 먹의 농담을 머금은 추상적인 "시간의 흔적"이나 "밀림"과 같은 임의의 장소성을 연상시키면서 그 속에서 "바글거리는 작은 생명의 울부짖음"을 상상하기도 했다. (2020년 작업노트) 비슷한 시기 오래된 도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주공아파트나 구식 아파트 옥상의 부분에 주목해 수묵으로 그렸던 그림 「repeat1」(2020), 「repeat2」(2020), 「unknown1」(2019), 「unknown2」(2019) 등을 보면, 도시 풍경이라는 일련의 외부 세계를 관찰하던 그의 시선이 풍경의 대상이 현존하는 감각으로 제 형태를 나타내는 경험과 교차시켜 그것을 회화적 수법으로 시각화 했던 것을 더 진솔하게 가늠해 볼 수 있다.

 

허주혜_화단이었지만_한지에 수묵담채_53×45cm_2021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15117117」(2017)과 「1617247」(2017) 같은 매우 추상적인 결과물의 회화에서도 꾸준히 세계를 관찰하던 그의 현상적 경험을 엿볼 수 있는데, 이때 그는 "농묵과 담묵의 대비를 이루고 있는 이 두 작품은 나무가 빼곡하게 펼쳐진 밀림처럼 보인다. 밀림 군데군데 보이는 여백은 하늘의 뭉게구름인지, 숲 속 사이사이 자리 잡고 있는 호수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이것은 도시가 자연으로, 자연이 도시로 융화되어 보이는 나의 작품 세계관에 기인한다"고 말했다. (2017년 작업노트) 작가의 이러한 속내는 앞서 존 버거의 경험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전나무의 솔잎 뭉치들 사이로 보이는 조각난 자그마한 하늘의 파편들이 나무에 핀 파란 꽃"으로 나타나는 그 순간의 현상적 형태에 대한 경이로운 경험에 대해서 말이다. 그것은 그의 말대로 "존재하는 것들의 너무도 당영한 다양성"이며, 나의 "바라봄"의 응시로 되돌아 오는 존재의 "나타남"을 수수께끼처럼 풀어낸다.

 

허주혜_흔적만1_한지에 수묵담채_53×45cm_2021

한편, 검은색 수묵화의 무게와 침묵을 뚫고 빛과 같이 다양한 색을 머금은 풍경의 형태들이 보인다. 빛은 우리의 두 눈을 "볼 수 있음"과 "볼 수 없음" 사이에서 끊임 없이 동요하게 한다. 마치 동굴의 어둠을 빠져 나온 이가 빛으로 인해 세계가 다시 비가시성의 "은폐"에 사로잡히게 된 것을 몸으로 경험했던 것처럼, 빛은 여전히 "바라봄"에 대한 끝없는 회의를 유도한다. 하지만 세계 안의 존재에게 비춰지는 빛은 제 형태의 "나타남"을 가시화 하며 은폐된 것을 현존하도록 하는 동력을 제공한다. 허주혜는 그동안 외부 세계를 관찰하던 자신의 응시에 "색"을 넣어 개별적인 풍경에 대한 인간의 "바라봄"과 독립적으로 발생하는 "존재의 근본적 특성"을 사유하게 하는 사건과 마주하게 했다. ■ 안소연

 

Vol.20211208e | 허주혜展 / HEOJUHYE / 許朱惠 /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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