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윤리학: 몸, 에로스, 그리고 타자

The Ethics of Love: Body, Eros, & Other

 

김상표展 / KIMSANGPYO / 金相杓 / painting 

2022_0822 ▶ 2022_0901

 

김상표_Eros-Two Dancers1-4_캔버스에 유채_193.9×130.3cm_2022

 

초대일시 / 2022_0827_토요일_11:00am

관람시간 / 10:00am~06:00pm

 

주관 / 월전미술문화재단주최 / 사단법인민족통일이천시협의회

 

 

한벽원미술관

HANBYEOKWON ART MUSEUM

서울 종로구 삼청로 83(팔판동 35-1번지)

Tel. +82.(0)2.732.3777

www.iwoljeon.org

 

사랑은 "최소한의 코뮤니즘"이다. ●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 나는 남이 되어야 한다. 내게서 떠나와 남들 사이에서 나를 찾아야 한다. 남들이란 결국 내가 존재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 그 남들이 나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없다. 항상 우리다. 삶은 항상 다른 것, 항상 거기 있는 것, 멀리 있는 것. 우리의 삶을 앗아가고 우리를 타인으로 남겨 놓은 삶 우리에게 얼굴을 만들어 주고 그 얼굴을 마모시키는 삶."(옥타비아 빠스, 태양의 돌, 류시화 재인용)

 

김상표_사랑예찬-우리_캔버스에 유채_162.2×390.9cm_2021

우리의 생명은 새로움을 무한히 생성할 수 있는 잠재적 힘을 내장하고 있다. 이 잠재적 힘이 억압되지 않고 새로운 삶의 차이를 생성하는 흐름을 형성해갈 때 우리는 기쁨과 행복을 느낀다(피어슨, 싹트는 생명, 2005).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자본주의적 교환관계 체계 속에서 계산가능성과 예측가능성을 목표로 하는 합리성이 우리의 몸과 마음 모두를 전면적으로 도구화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모든 것을 대상화하고자 욕망하는 동일자의 시선이 우리 시대의 풍속화를 구성한지 오래다. 인간의 생명에너지가 가장 자연스럽게 분출되어야 할 에로스적 사랑의 공간마저도 이러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시대적 현상에 대해 예술은 어떠한 질문을 던져야 할까? 그것은 나와 타자 그 사이, 즉 관계의 문제로 귀착된다. 이 시대의 철학도 예술도 심지어는 경영도 '타자와 관계'의 문제를 피해갈 수 없다. ● 공동체를 형성하는 인간이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결국 '관계' 속에서 구원되는 길 이외에 다른 구도의 길은 없다. 그렇다면 타자를 도구화하면서 나의 비대칭적 우위 속에 동일성의 폭력을 휘두르는 세태에서 우리는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이성 자체가 동일화를 보편적 원리로 삼아 작동하는 것이라면 이제까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론적 가정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그 길은 봉쇄되어 있다. 나와 너의 관계 속에서 구원의 길은 정녕 불가능하다는 것인가? 레비나스는 역발상으로 타자를 나보다 우위에 놓는 비대칭적 관계 설정이라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그런데 우리가 탐색해 들어가는 에로스적 사랑의 경우에도 이러한 관계 설정이 유효할까? 이것이 가능하려면 나에게서 출발하는 지향적 구조를 갖고 있는 타자에 대한 능동성으로서 주체성에 대한 인식이 그와는 정반대로 타자에 대한 수동성으로서 주체성에 대한 인식으로 전화되어야 한다. 에로스의 현상학에 대한 레비나스의 주장을 직접 들어보자. "사랑함이 사랑받는 이가 내게 품은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사랑함은 또한 사랑 속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여 자기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사랑은 양의성 없이 초월하지 않는다. 사랑은 함께 하는 만족이다. 사랑은 쾌락이고 둘의 에고이즘이다. 그러나 이 만족 속에서 사랑은 꼭 그만큼 자기에게서 멀어진다. 사랑은 어떤 의미작용도 명확히 밝히지 못하는 타자성의 심오함 – 노출되고 세속화된 심오함 – 위에서 현기증을 겪는다(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 404쪽)." 레비나스의 이 언급에서 보듯이, 사랑이 양의적이고 둘의 에고이즘이라는 특성을 갖고 있더라도 에로스적 주체를 근본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사랑받고 있다'는 수동적 상황이며, 주체(사랑하는 이)의 사랑은 타자(사랑받는 이)의 사랑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향유된다. 이때 사랑의 주체는 자기동일성을 사랑받고 있다는 수동성으로부터 이끌어내고 있는 것이다(우치다 타츠루,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278쪽). 주체의 수동성을 초래하는 타자의 속성에 대해 좀더 알아보자. 어떤 의미작용도 명확히 밝히지 못한다는 점에서 나라는 동일자로는 결코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 타자성의 심오함, 그것이 사랑받는 이가 갖고 있는 절대적 타자성이다. 그저 있음의 익명적 웅웅거림 한편의 에로틱함 속에서 세속화된 채 아토포스로서 사랑받는 이가 등장한다. 아토포스적 연인의 타자성이 나의 확실성을 흔들며 주체를 현기증나는 불확실성 속으로 몰아간다. 무한을 담은 외재성으로의 타자, 그 아토포스적 타자의 사랑에 수동적으로 감염되어 사랑의 주체가 탄생하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타자의 주체에 대한 비대칭적 우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에로스적 사랑의 구조를 더욱 분명하게 해명하기 위해서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에로스적 사랑에서 주체와 타자의 사랑은 불가사이한 순환구조 안으로 휘감겨 있기 때문이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 각자가 사랑하고자 하는 것은 '상대방(연인)의 나에 대한 사랑'인데 그 '상대방(연인)의 나에 대한 사랑'을 활성화하는 것은 '상대방(연인)에 대한 나의 사랑'이다(우치다 타츠루,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278쪽). 요컨대 나와 상대방(연인)의 사랑은 타자의 사랑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서로 되먹임되는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박준상은 이러한 사랑의 구조를 낭시의 공동-내-존재에 대한 논의와 접속시켜, 공동-내-존재를 다음과 같이 새롭게 정의한다. 공동-내-존재는 '우리'의 실존('우리'의 있음 자체)의 분유의 전-근원적(전-의식적) 양태로서 가시적인 것의 공유가 아니라 타인이 '나'를 향해 다가옴, '내'가 그 다가옴에 응답함, 즉 '내'가 타인을 향해 건너감, 타인을 향한 외존, 관계 내에 존재함, 어떠한 경우라도 비가시적동〮사적 움직임들의 부딪힘, 접촉이다(박준상, 떨림과 울림, 179-180쪽). 그의 입장은 레비나스에 대한 다음과 같은 헌사로 이어진다. "레비나스의 글쓰기는 타자로 향해가는 영혼의 움직임, 타자와 함께 하는 영혼의 숨결을 담은 시로서 그 시는 도래할 시간에 우리의 행동을 기다리고 있다(박준상, 떨림과 울림, 170쪽)." 궁극의 윤리적 가치에 대한 레비나스의 주장이 앞으로 탄생할 사랑의 주체들의 영혼에 떨림과 울림을 선물할 것을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김상표_우리는어디서와서어디로가는가 일부_캔버스에 유채_193.9×130.3cm_2020

아토포스적 타자에 대한 에로스적 매혹에서 사랑은 시작된다. 바르트의 지적처럼 타자의 실존에 관한 근원적 경험으로서 사랑은 나의 지배영역에 포섭되지 않은 아토포스적 타자를 향한다. 진정한 사랑은 어떠한 동일성으로도 포섭되지 않는 차이에서 시작된 새로운 사랑의 공간을 구축하는 것이다. '하나'의 관점이 아닌 '둘'의 관점에서 형성되는 하나의 삶(무대)이, 사랑의 주체들에게 펼쳐진다(바디우, 사랑예찬, 51쪽). 차이의 창조적 놀이를 통해 반복적으로 세계를 재발명해 나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그런데 사랑의 주체들은 각자 다른 배경을 바탕으로 한 고유의 정체성을 가진 욕망의 주체들이라는 점에서 서로의 차이를 마주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충돌과 뒤섞임이라는 두 힘이 사랑의 전과정에 배태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충돌할 때는 고통스럽고 뒤섞일 때는 황홀하다. 둘 사이의 불협화음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환희와 고통, 이것이 사랑의 모순적 본성이다. 그 사이에서 사랑의 주체들은 둘의 새로운 무대를 구축하기 위해 유영한다. 주체와 타자 사이에서 새롭게 생겨난 사랑의 공간 만큼 계속적인 자기 파괴가 수반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랑은 자아의 죽음과 함께 찾아오는 환희다. 자기 동일화의 경향성을 거스른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루틴을 새롭게 재정립해야 하는 고통을 사랑의 주체들에게 요구한다. 환희 속에서 이 고통을 단번에 뛰어넘는 사랑의 도약을 해내는 연인들을, 동서고금의 문학 작품들에서 발견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죽음 속에서까지 삶을 긍정하는 것이 에로티즘이라는 바타유의 주장을 이런 맥락에서 바라보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에로스적 사랑은 일회적인 사건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우연은 결국 고정된다."는 말라르메의 말은 사랑에도 적용된다. 공간과 세계와 시간이 사랑에 부과하는 위험들을 무릅쓰고 그 모험과 놀이를 지속하겠다는 선언과 충실성 없이 진정한 사랑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사랑의 공간 만큼 타자를 내 안에 자기 차이로 간직한 채 사랑을 위협하거나 방해하는 모든 사회적 제약을 과감하게 뛰어넘으려는 모험적 시도가 윤리적 주체들에게 요구된다. 자아의 정체성과 동일성을 파괴하면서 동시에 사회의 정체성과 동일성을 해체하는 양 측면에서의 모험을 계속할 수 있는 힘을 갖지 않으면 사랑의 윤리적 주체들의 탄생은 불가능하다. 사랑은 위대하지만 힘겨운 모험이다. 랭보의 말처럼 사랑을 재발명하려면 바로 삶의 재발명을 끊임없이 재발명하려는 사랑의 추체들의 지속적인 노력과 역량을 요구한다(바디우, 사랑예찬, 44쪽). 이렇게 둘 간의 차이를 하나의 삶의 무대로 재창조해내려는 사랑은 화이트헤디안적 의미에서 말 그대로 미적 조화를 추구하는 과정이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한 현실적 계기의 합생에 있어서 객체적 내용의 통합에 내재하는 대비(contrasts)와 리듬(rhythms)에 대한 정서적 평가"가 아름다움을 가져온다(김영진김〮상표, 화이트헤드와 들뢰즈의 경영철학, 92-93쪽). (잠정적으로 패턴화되는) 대비와 리듬은 다양한 이질적 요소들을 그 사이에서 결합시키는 방식인데, 사랑의 주체들도 이와 같은 방식을 활용하여 삶의 기쁨, 생명의 충만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사랑에 대한 수행적 움직임을 계속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사랑의 공간이 바로 사랑의 윤리적 주체들이 발명한 연인들 고유의 아름다움의 공동체인 것이다.

 

김상표_우리는어디서와서어디로가는가 일부_캔버스에 유채_193.9×130.3cm_2020

두 연인들만의 공동체에 대한 사유는 둘 이외의 다수의 공동체에 대한 사유로 확장될 수 있다. 만약 사랑의 재발명이 둘만의 무대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세계로의 열림이 시작되는 지점이라면 에로스적 사랑은 혁명적인 것이 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바디우의 생각에서 우리는 그 단초를 읽어낸다. "사랑 안에는 우선 유아론의 하나(일자)가 있다. 이는 말의 무한한 반복 속에서 코기토와 존재의 회색 어둠이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만남이라는 사건 속에서 그리고 그것을 명명하는 계산 불가능한 시 속에서 도래하는 둘이 있다. 그리고 마침내, 둘이 가로지르고 펼쳐내는 감각적인 것의 무한이 있다. 여기서 둘 자체의 진리를 조금씩 해독한다. 하나, 둘, 무한이라는 수적 성격은 사랑의 절차에 고유한 것이다(바디우, 베케트에 대하여, 68쪽)." 사랑의 주체들이 연인공동체 속에서 사랑을 재발명하면서 세계의 무한을 감각할 수 있는 능력을 길렀을 때 극단적인 모든 차이들을 공동체로 통합해낼 가능성도 생겨난다. 사랑의 주체가 아토포스적 타자인 연인에게서 존재의 무한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순간들 없이는 둘의 차이가 공존하는 하나의 새로운 무대의 연속적인 창출은 어렵다. 연인에게서 느끼는 존재의 무한은 다수의 타자들, 즉 우리 밖의 무한한 세계로 사랑의 주체를 열리게 한다. 그동안 감각되지 않았던 것들, 심지어는 생멸하는 모든 것들이 아름다운 꽃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악으로 규정하고 미웠던 것들 마저도 녹아내리며 사랑으로 뒤덮인다. 신비의 몸, 무한을 담은 사유체로서의 몸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환희 속에서 흐르는 눈물이 세계의 지속을 온전히 자기 안으로 받아들이며 타자를 무조건적으로 환대하는 결정적 순간을 선물한다. 이와 같은 진정한 사랑의 사건이 발생하는 순간 사랑의 주체들에게 세계의 모든 차이들은 차이들을 간직한 채 차이들을 넘어서는 것으로 다가온다. 바디우는 사랑이 동반하는 이러한 신비에 매혹된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병철이 쓴 『에로스의 종말』에 대한 서평(12쪽)에서 "어쩌면"이라는 단어에서 머뭇거리면서도 둘에서 출발한 에로스적 사랑이 모두를 위한 세계 기획의 전망을 열어갈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피력했을 것이다. 진정한 사랑 속에서 깨어나는 다수를 향한 열림의 감각의 획득과 함께 사랑의 모험 그 자체에서 생겨나는 탈중심적 감각의 획득 또한 에로티즘과 공동체주의 사이에서 미래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얘기할 수 있게 한다. 사회적 공간에서 자유와 해방을 위한 실천적 삶과 사랑의 주체들이 나누는 에로티즘 속에는 공통적으로 기존의 낡은 것(동일성과 정체성)을 중단시키고 해체하려는 창조적 에너지의 불꽃이 내장되어 있다. 사랑하는 그 만큼 자아의 동일성을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아가 동일자의 세계를 중단시키는 우발적 사건으로서 진정한 사랑이 둘의 경계를 넘어 사회의 재생산 구조와 만나게 될 때 사회적 동일자의 시선 또한 극복해야만 한다. 개인과 사회 두 공간에서의 동일성을 전복하는 모험을 거치면서 탄생한 사랑의 윤리적 주체들은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고 구멍을 내는 방식으로 다수의 차이를 수용하는, 심지어는 극단적 차이마저 수용하는 새로운 삶의 양태를 갖게 된다. 이제 사랑의 윤리적 주체들은 새로운 공동체를 실험하는데 두려워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설 용기를 획득한다. 사랑의 모험을 가능케 하는 에로티즘이 다수의 차이가 공존하는 무대 창출을 위한 창조적 에너지로 전화할 가능성을 바디우와 한병철은 믿고 있는 것 같다. 불가능한 혁명의 불꺼진 씨앗이 정말로 에로스적 사랑의 불꽃으로 지피어질 수 있을까? 21세기는 우리에게 공동체주의(communism)와 에로티즘(erotism), 이 둘을 함께 사유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김상표_전쟁과사랑_캔버스에 유채_193.9×651.5cm_2022

이러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차이의 공동체를 구축해 나가려면 존재 사이의 깊은 어둠의 심연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낭시에게 그 어둠은 사랑의 주체들 사이에 놓여 있는 존재론적 공백이다. 연인들의 공동체, 나아가 다수의 공동체는 아토포스적 타자를 향한 사랑의 유토피아이다. 그 유토피아는 어쩌면 불가능하다. 주체와 타자 사이에 제거될 수 없는 존재론적 공백이 공동체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면서 동시에 해체시킬 수도 있는 힘으로 작용하면서 사랑의 주체들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이 역설적인 상황은 피할 수 없는 압력으로 반복적으로 다가온다. 낭시의 얘기에 귀기울여 보자. "공동이 함께 하는 것이라면, '함께라는 것'은 절대전능의 힘과 전적인 현전이 배제된 공간을 가리킨다. '함께'하면서, 상호 간의 유희로 인해 서로 마주하고 있는 힘들만이, 서로 간격을 두고 있는 현전만이 있을 뿐이다. 서로 간격을 두고 있는 현전들, 왜냐하면 그 현전들은 단일하고 순수한 현전들(주어진 대상들, 스스로에 대한 확실성 가운데 강화된 주체들, 무기력과 엔트로피의 상승에 지배되고 있는 세계)과는 언제나 다른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서로 마주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정면으로 생각해보고, 우리의 벌어진 틈을 어떻게 정면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 그것도 우리가 벌어진 틈에 빠져 함몰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기에서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직시하면서 우리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힘을 어떤 일이 있어도 길어내기 위해서, 그게 아니라면 마주한다는 것은 혼잡하고 맹목적인 혼란만을 가져올 뿐이다(낭시, 밝힐 수 없는 공동체마〮주한 공동체, 108-109쪽)." 마주함의 가능성이 공동-내-존재의 가능성 또는 함께-있음의 가능성까지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 이것을 틈 속에서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를 사랑의 주체들이 갖게 되어야 만, 도래할 사랑의 공동체에 대한 꿈을 꿀 수 있다. 사랑의 공동체 또한 공동-내-존재의 이와 같은 위험을 공유하지 않을 수 없다면, 거기에 어떠한 실체적 규정을 부과해서는 안 된다. 사랑의 공동체는 잠재적인 사건들로 가득찬 미규정적이고 불확정적인 결합체(nexus)일 뿐이다. 사랑의 공동체에 대한 일시적 성공이 다음 순간 곧바로 실패로 이어질 수 있으나 사랑의 주체들이 그 실패를 딛고 일어나 준안정적인 사랑의 공동체를 또다시 재창조해 나가려는 움직임, 그 자체를 '되기로서의 사랑의 공동체'라고 명명해야 하지 않을까? 이상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명제를 설정할 수 있다. 사랑의 유토피아는 '사랑의 공동체-되기'를 향한 무한한 수행적 움직임으로서 일종의 '과정공동체(process community)'이다(김영진김〮상표, 화이트헤드와 들뢰즈의 경영철학, 2020). 우리는 함께 다시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불가능성의 가능성으로서 사랑과 공동체. "불모의 땅, 그러나 완전히 그렇지는 않은(바디우, 베케트에 대하여, 73쪽)." 이쯤에서 우리는 블랑쇼의 비인칭의 에고이즘, 에고 없는 에고이즘을 불러내야 하지 않을까? 사랑은 경이에서 시작되는 신비이다. 사랑의 윤리학에 대한 어떠한 설명 이후에도 경이는 남아 있게 된다. 정말로 사랑과 공동체를 얘기하기에 나의 사유는 너무 옅고 나의 감성은 너무 메말라 있다. 사랑의 윤리학에 대해 잠정적인 결론조차 내릴 수 없다. 단지 어디서 중단할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조차 무수한 타협을 필요로 한다. 베르그송의 다음과 같은 신비주의에 대한 게송으로 이 글을 마친다. "존재들은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도록 운명지어진 존재로 불리어졌으며, 창조적인 힘은 사랑에 의해 정의되어야 한다(베르그송,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276쪽)."

 

김상표_We Exist 일부_캔버스에 유채_193.9×130.3cm_2022
김상표_We Exist 일부_캔버스에 유채_193.9×130.3cm_2022
김상표_We Exist 일부_캔버스에 유채_193.9×130.3cm_2022

이제 이번 전시의 의미를 물어야 할 때가 되었다. 랭보의 말처럼 사랑을 재발명하는 것은 차이가 가능한 새로운 삶의 무대로서 세계를 재창조하는 것이다. 바디우와 한병철의 바람대로 에로스적 사랑은 연인들의 공동체에 머무르지 않고 다수의 차이가 인정되는 열린 공동체에 대한 욕망으로 확장될 수 있다. 결국 사랑의 재발명을 위해서는 예술적 몸짓, 실존적 몸짓, 정치적 몸짓 이 셋 모두를 포함하는 모험을 떠나야 한다(바디우, 사랑예찬, 88쪽). 이번 '사랑의 윤리학' 전시도 이런 맥락 위에서 이루어졌다. 먼저 사랑의 주체로서 나는 지금까지 사랑의 윤리를 붙잡고 어떠한 실존적 몸짓을 해왔는지를 물었다. 사랑예찬-나와 너, 사랑예찬-우리, Eros, Eros-Two dancers 등 100호 이상 20여점의 작품들에 에로스적 사랑에 대한 나의 그동안의 경험과 실존적 고민들을 담아냈다. 사랑의 주체인 나는 격정과 고독, 환희와 눈물로 뒤범벅된 채 불가능한 무언가를 향해 몸부림쳐 왔던 것은 아닐까? 낭시와 블랑쇼를 떠올려 본다. 근원적으로 타자를 향해서 열려 있는 나와 너의 몸이 히스테리적으로 서로 충돌하고 뒤섞일 때 둘 사이(접촉 공간)에서 우리라는 새로운 무대가 창조될 수 있으며 그 우리의 가능성이 소통가능성으로 남아 있기를 절규하는 몸짓들. 박준상(2005)에 의하면, "이 소통은 유한성과 죽음을 드러내지만 또한 그 가운에 빛나는 불꽃 같은 생명을 드러내는 숨결, 그 숨결의 나눔을 지향한다(블랑쇼, 밝힐 수 없는 공동체마〮주한 공동체, 95쪽)." 이러한 나의 몸짓들이 에로스적 사랑에 대한 20점의 작품들에서 느껴질까? 인간의 궁극적 지향성이 구원이라고 할 때, 에로스적 사랑이 그 구원의 출발점이라는 생각에 나는 동의한다. 에로스적 사랑은 주로 춤을 소재로 선택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내려고 시도했다

 

김상표_Eros-Two Dancers1-1_캔버스에 유채_193.9×130.3cm_2022

다음으로 둘의 무대를 넘어 다수를 향한 세계로의 열림 속에서 사랑의 주체들인 나와 너, 우리는 어떠한 정치적 몸짓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를 물었다. 장애인의 문제를 'we exist'라는 제목으로 5점의 연작으로 다루었다. 신체적 장애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공통의 리듬을 창출하며 차이를 생성하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가야 한다. 그러한 가능성에 대해 나는 김영진교수와 함께 쓴 『화이트헤드와 들뢰즈의 경영철학』에서 아름다움의 공동체인 사회복지법인 무소의 사례를 들어 입증한 바 있다. 우리 모두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상호 존재(inter-being)라는 점을 받아들인다면,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의 차별적 구분은 동일성의 폭력 속에서만 가능한, 상상적인, 심지어는 이데올로기적인 것에 불과할 뿐일지도 모른다. 통일과 전쟁을 다룬 작품도 100호 이상 8점이 출품된다. 남북은 물론이고 전세계를 언제든 파국으로 몰고갈 국지전이 발발할 위험이 상존하는 현실에서 '생명, 사랑, 평화'의 가치를 묻는 것으로 에로스적 사랑에 대한 문제의식이 확장되었다. 남북 지도자들의 평화전도사 같은 몸짓에는 각 국가의 이해관계를 둘러싼 갈등과 타협의 속성이 담겨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남북의 진정한 평화는 그 구성원들 각자인 우리가 서로를 보듬어 껴안을 수 있는 사랑의 주체들이 되었을 때만 가능하다. 화이트헤드의 말처럼 평화는 보편적 사랑에 의해서만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다. 화이트헤드에게 평화는 자아가 상실되고 흥미가 인격성보다 넓은 조정으로 전이되었다는 의미에 있어서 자기 제어를 말하는데, 이것은 평화가 인류의 사랑 그 자체라는 것을 뜻한다(김영진김〮상표, 화이트헤드와 들뢰즈의 경영철학, 437쪽). 다음으로 아나키즘을 표현한 작품들도 출품되었다. 저항과 불복종의 아나키즘 정신이야말로 사랑의 재발명을 위한 실존적 몸짓과 정치적 몸짓의 바탕이라고 믿기에 이를 100호 3점의 작품에 담아냈다. 연인들의 공동체도, 다수로 구성된 공동체도 사랑의 주체들의 자유와 해방을 향한 저항의 몸짓들 없이는 불가능하다. 저항을 담은 기쁨의 몸짓, 그것을 춤이라는 소재로 풀어냈다.

 

김상표_통일은 비즈니스다_캔버스에 유채_162.2×390.9cm_2020

마지막으로 이러한 실존적 몸짓과 정치적 몸짓을 담을 수 있는 예술적 몸짓을 어떻게 해나가고 있는지도 작품들에서 드러내려고 노력했다. 둘 사이의 차이에서 시작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는 에로스적 사랑에서 출발하여 차이를 인정하는 다수의 세계를 향한 꿈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전시회를 기획하고 이를 작품으로 구현해 가는 전 과정은 예술적 몸짓에 다름아니다. '주제' 측면에서 사랑의 재발명을 위한 예술적 몸짓을 바로 실존적 몸짓과 정치적 몸짓의 그림들에서 드러낸 셈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회화의 새로운 '스타일'을 창안했다. 나의 예술적 모험은 코드화된 체계에 사로잡힌 회화를 해방시키고 촘촘히 짜여진 권력의 그물망에 포섭된 나의 몸을 자유롭게 하는 것을 지향한다(김상표, 아나키즘: 회화의 해방, 몸의 자유, 2021). 이를 위해 퍼포먼스 회화를 통해 그림과 그림아닌 것의 경계에서의 그리기를 시도했다. 이와 같은 '수행성으로서 화가-되기'의 결과물인 40점의 그림들은 관람객들에게 원초적 몸에 배태된 아나키즘적 리비도의 떨림이라는 경험을 선물함으로써 그들에게 삶과 사랑을 재발명하고 싶은 의욕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주제'와 '스타일' 양 측면에서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위한 예술적 몸짓들. 이것이 이번 전시를 통해 보여주는 예술의 아나키즘을 향한 나의 모험이다. I AM ANARCHISM. ■ 김상표

 

Vol.20220822a | 김상표展 / KIMSANGPYO / 金相杓 /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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