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은 우리나라 전통문화예술의 상징이다.서울 문화예술의 심장이다.
인사동은 이제 5대양 6대주에서 찾는 세계문화의 교차로이다.
우리는 인사동을 찾아 비로소 서울의 생동감을 느낀다.
그 인사동에 전통과 현재가 공존하며 우리의 미래가 살아숨쉬고 있다.
조선시대 북촌과 종로사이에 위치하여 주로 중인들이 살았던 주거지역이다.
조선초기 이래로 조선 미술활동의 중심지로 형성, 현재의 인사동 명칭은
일제 통치시기인 1914년부터 불리워진다.
인사동을 관통하는 길을 중심으로 '인사동 사람'들의 이야기가 역동하며
인사동의 역사를 힘차게 살려내고 있다.
지금의 인사동 거리는 종로 2가에서 인사동을 지나 관훈동 북쪽의 안국동 사거리까지를 말한다.
그 인사동길은 삼청동에서 시작한 개천으로 인해 관훈동, 인사동, 광통교로 흐르는
개울을 따라 생긴 길이다.법정동인 인사동은 행정동인 종로1·2·3·4가동 관할하에 있다.
인사동의 명칭은 조선시대 한성부의 관인방(寬仁坊)과 대사동(大寺洞)에서
가운데 글자인(仁)과 사(寺)를 따서 부른 것이라 한다.
거기에는 댓절골, 향우물골, 이문동, 원골 등의 자연마을이 있었다.
댓절골은 큰 사찰인 원각사(圓覺寺)가, 향우물골은 우물 옆에 향나무가,
이문동은 순화궁의 이문(里門)이 있었다는 데 명칭이 연유한다.
149번지는 중종반정 때의 정국공신 구수영(具壽永)이 살던 곳으로
조선 후기에 김흥근(金興根)의 소유였다가 헌종의 후궁 경빈이씨의 순화궁(順化宮)이 되었다.
예전의 인사동길은 종로에서 인사동 네거리 즉 태화관길과 만나는 곳까지였다.
북쪽으로는 관훈동(寬勳洞), 동쪽으로는 낙원동(樂園洞), 남쪽으로는 종로2가, 적선동(積善洞),
서쪽으로는 공평동(公平洞)과 접해 있다.
조선 초기에 한성부 중부 관인방(寬仁坊)과 견평방(堅平坊)에 속하였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당시 행정구역 개편 때는 원동(園洞), 승동(承洞), 대사동(大寺洞),
이문동(李門洞), 향정동(香井洞), 수전동(水典洞) 등이 인사동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대사동, 이문동, 향정동, 수전동, 승동, 원동 등의 각 일부가 통합되어
인사동이 되었다.같은 해 9월 출장소 제도 신설로 경성부 북부출장소 인사동이 되었다가
1915년 6월 경성부 인사동이 되었다. 1936년 4월 동명이 일본식 지명으로 변경됨에 따라
인사정이 되었다. 1943년 4월 구제(區制) 실시로 종로구 인사정이 되었다.
1946년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정(町)이 동(洞)으로 바뀔 때 인사동이 되었다.
법정동인 인사동은 행정동인 종로1·2·3·4가동 관할하에 있다.
3·1운동 당시 33인이 모인 태화관(泰和館)이 있었으나
재개발사업으로 헐리고 12층의 태화빌딩이 건립되었다.
일제강점기 말부터 골동품상가가 밀집되어 있으며,
축제로는 관훈동과 함께 1988년부터 해마다 '관훈·인사동 전통문화의 마을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종교기관으로는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승동교회가 있다.
1930년대인사동길 주변에 서적 및 고미술 관련 상가가 들어서기 시작해 골동품 거리로 자리잡게 된다.
1950년대6.25 전쟁이후 지금의 낙원상가 아파트 자리에 낙원시장이 형성되고,
평양떡집이 들어선 이후 현재와 같은 떡집골목이 형성되었다.
1970년대최초의 근대적 상업화랑인 현대화랑이 들어서면서 상설 전시판매장 형식의 화랑들이
모여들어 미술문화의 거리가 형셩되었다.
1980년대 이후골동품, 고미술, 화랑, 고가구점, 화방, 민속공예품 판매점포들이 속속 들어서면서
서울의 명실 상부한 전통문화예술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1988년 전통문화의 거리로 지정되었다.
1997년 4월 13일부터는 일요일마다 '차 없는 거리'로 지정되어 거리축제가 열린다.
고미술품•골동품•골동서화뿐 아니라 선인들의 생활도구•장신구 등
시중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갖가지 전통공예품 등이 집결되어 있어 옛 정취가 그윽하다.
이곳에 골동품 상가가 형성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였다.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 초까지 성시를 이루었다.
가짜 고서화사건, 금당살인사건 등으로 1970년대 말 장안동(長安洞)으로 이전하였다.
골동품 상가가 문을 닫자, 토속음식점•전통찻집 등 유흥음식점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1999년 7월부터 역사문화탐방로를 조성하기 위한 공사가 시작되어 2000년 10월 14일 완공되었다.
보행자를 위해 차도의 너비가 줄고 인도는 넓어졌다.
바닥에는 옛날식 기와와 재질이 같은 벽돌을 깔아 고풍스런 분위기가 난다.
인사동은 종로중심지에 위치하면서 고려 흥복사터에 세조때 원각사를 중건했던 탑골공원이 있고
조선조때 도화원(圖畵院)등을 비롯해서 3.1 독립운동의 발상지로
100년의 민족사적(民族史的) 의의를 지닌 한국 문화1번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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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정현석씨와의 점심약속으로 인사동에 나왔다.

아직 더위가 가시진 않았지만 가끔 시원한 바람이 불어 막바지 여름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외환은행 인사동지점 기업금융팀장인 정현석씨가 이젠 개인금융팀장으로 업무를 바꾸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라아트'의 김명성씨도 경제사정이 점차 좋아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기분이 좋았다.

정팀장은 스님으로 선방에 들어가야 할 사람인데, 은행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것이다.

가끔 그의 말 속에 번득이는 예지력을 읽어 놀란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김명성씨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마치 모든 상황을  읽고 있는듯 나타나 엄청난 금액을 좋은 조건으로 대출 해 주지 않았던가? 

이젠 개인금융 업무를 맡아 인사동의 가난한 예술가들에게도 혜택을 주고 싶어한다. 

 

'발우공방'에서 함께 점심공양을 한 후 '아몬디에'로 옮겨 차 한잔 하고 있는데

화가 전인경씨가 약속이라도 한듯 나타났다. 오랫만에 만나서인지, 헤어스타일이 바뀌어서 인지 낯선 사람 같았다.

 

인사동에 나온 걸음에 전시장들을 좀 돌아다녔는데, 길거리에 인사전통공예 페스티벌이 열렸으나 행사를 치루기 위한 행사처럼 보였고,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2층에서 전시하는 오승아展 '동상이몽'이나

'아라아트'2,3층에서 전시하는 전항섭조각전 "나무속의 방"이 볼만한 전시였다.  

 

글.사진 / 조문호

 

 

 

 

 

 

 

 

 

 

 

 

 

 

 

 

 

 

 

 

 

 

 

 

 

 

 

 

 

 

무안장

 

정선장

 

 

포항 송라장

 

포항 죽장장

 

 

장흥 대덕장

 

 

 

 

하동 진교장

 

 

 

 

 

 

단양장

 

단양장

 

 

 

영암 독천장

 

 

영암 독천장

 

 

 

 

 

천안 병천아우네장

 

나주 세지장

 

 

평택 안중장

 

논산 양촌장

 

논산 양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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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학자 남천 심우성선생의 팔순연이 지난 6월28일 오후 6시30분부터 낙원동에 소재한 ‘하누소’에서 열렸다.

평소 가까이 지내는 벗들과 후배, 그리고 가족 30여명이 참석해 심우성선생의 팔순을 축하하며 축배를 들었다.
축배를 제창한 극작가 신봉승선생은 심우성선생께서 뒤늦게 민속학에 뛰어 들었지만, 전국의 무속인과 관련인들을

찾아다니는 노력에 의한 성과로 우리나라 무속의 학문적 틀을 마련하게 됐다며 그의 공적을 높이 기렸다

 

팔순잔치에 참석한 분으로는 심우성선생 내외를 비롯하여 강 민, 신봉승, 김승환, 심우방, 조문호, 신성대, 이명선 내외,
가족으로는 아들 심하용씨와 며느리 도영미씨, 딸 심가용씨와 사위 이선기씨 그리고 손자 심영상과 이한빈군이 함께 했다.
기념으로 참석한 분들에게 ‘동문선’에서 출판한 심우성선생의 ‘전통문화를 찾아서’ 책을  한 권씩 나누어 주기도 했다.


 

 

 

 

 

 

 

 

 

 

 

 

 

 

 

 

 

 

 

 

 

 

 

 

 

 

 

 

 

 

 

 

 

 

 

 

 

 

 

 

 

 

 

 


제주의 오래된 민가나 성읍민속마을 변두리, 또는 골목 풀숲에서 만난 작은 풍경들이다.
뜰 한 구석에 핀 들꽃이나 세월의 더께가 쌓인 오래된 사물들에서 고향같은 진한 향수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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