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여 년간 장터 사진을 찍어 온 소설가

 

1958년 전남 함평 출생으로,

1987년부터 전국의 시골 장터를 기록해 온 사진가이며 소설가이다.

그동안 개인전 《정영신의 시골 장터》(2008, 정선아리랑제 설치전)

《정영신의 장터》(2012, 덕원갤러리) 및 다수의 단체전을 열었으며,

저서로는 『시골 장터 이야기』(2002, 진선출판사).

             『한국의 장터』(2012 눈빛) 가 있다.

 

                                                     jungys1102@hanmail.net

 

 

'인사동 정보 > 인사동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송희 (시인)  (0) 2013.12.16
신동명 (시인)  (0) 2013.09.23
문 숙 (서양화가)  (0) 2013.09.02
김하은 (서양화가)  (0) 2013.09.02
전항섭 (조각가)  (0) 2013.08.26

[뉴스엔 이나래 기자]

 'K소리 악동'이 서울 도심 게릴라 콘서트를 열었다.



더 잔인해지고, 강력해진 미션이 시작됐다. 9월 22일 방송되는 KBS 1TV‘K소리 악동’에서는 지난 1차 합숙의 ‘장터공연’에 이은 또 다른 미션이 펼쳐질 예정이다.

‘K소리 악동’ 2차 합숙 미션은 서울 거리 공연. 15명의 악동들이 세 팀으로 나누어져 각각 인사동, 이태원, 명동에서 거리 공연을 해야 한다. 이번 미션은 각 팀 간의 조화와 화합, 그리고 많은 관객들 앞에서 떨지 않고 공연을 당당하게 소화해낼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 음악 장비도 이동수단도 주어지지 않는 극한의 상황. 각 팀마다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치게 된다고.

 
 
 


◆ 대박 vs 쪽박

정해진 장소에서 차비만으로 공연을 해야 하는 아이들. 아무 것도 없는 무더운 날씨에 악동들은 예민해져만 가고, 팀으로 나누어져 소리를 내기에는 악기도 부족한 상황에 직면한다. 하지만 각 팀마다 특성을 살려 ‘K소리 악동’만의 개성 있는 공연으로 바쁜 서울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았다고.

또한 이번 미션이 악동 15인의 팀워크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고 한다. 세 팀으로 나뉘어 경쟁을 하면서 팀 구성에서부터 쌓인 갈등이 공연장에서 폭발한 것. 어느 날 갑자기 서울 한 복판에 버려진 15명의 악동들은 무사히 합숙 장소로 돌아올 수 있을까? 그 해답은 9월 22일 일요일 오후 1시 20분 KBS 1TV 'K소리 악동'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사진=KBS 제공)

이나래 nalea@

 

        이 시냇물은 영월ㆍ상동을 지나 정선 고을로 들어간다. 고을 앞 임계 서쪽에 있는 산기슭 남쪽이 정선 여량촌(餘糧村)이고,

우통수 물이 북쪽에서 여량촌을 둘러 남쪽으로 흘러간다. 양쪽 기슭이 제법 넓고 언덕 위에는 키 큰 소나무와 흰모래가

맑은 물결을 가리고 비추기 때문에 참으로 은자(隱者)가 살 만한 곳이다.

다만 전지(田地)가 없는 것이 한스러우나 마을 백성은 모두 자급자족하여 넉넉하다.

 

 

『택리지』에 기록된 내용이다. 정선은 산 깊은 골짜기인지라 사는 것이 쉽지 않은 고을이었던 모양이다.

이곳을 찾았던 허소유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땅이 궁벽하니 누구인들 쉽사리 갈 수 있으랴
온 종일 몰아 달려서 강성(江城)을 택했네
개 어금니처럼 울퉁불퉁하여 고르지 않은 험한 길에 당했으니 고단(高丹, 땅 이름)이 멀고
여자의 눈썹처럼 공중에 떴으니 태백산이 가로질렀네
냉담(冷淡)한 것으로 즐거움을 삼으니 세속의 취미 어긋나고
평안하고 한가로움으로 스스로 즐기는 것이 나의 장점이네
토지는 메마르고 무거워서 유리(流離)해 도망한 백성이 많으니
집집마다 석청(石淸, 돌 사이에 모은 벌꿀)을 뽑아 바치는 것을 차마 못 보겠네

 

 

임계천을 받아들인 골지천은 구미정(九美亭)을 지나 정선군 북면 여량리, 즉 아우라지1)에서 송천을 받아들인다.

아우라지는 정선군 북면 여량리 한강 상류에 있는 나루터로, 평창군 대관령면의 황병산과 구절리에서 흘러내린 송천,

동쪽에서 흘러온 임계천이 합류하는 곳이다.

 

아우라지 섶다리

 

이 아우라지의 뱃사공이 부르던 노래가 바로 「정선아리랑」이다. 「정선아리랑」, 즉 「정선아라리」가 처음 불리기 시작한 것은 조선 초기부터였다고 한다.

고려 왕조를 섬기고 벼슬에 올랐던 사람들 중 일곱 선비(전오륜, 고천우, 김충한, 변귀수, 김한, 이수생, 신안)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성을 다짐하면서

개성의 깊은 산골 두문동에 은신하다가 지금의 정선군 남면 낙동리 거칠현동으로 옮겨와 살면서 지난날 섬기던 임금을 사모하고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였다.

그들이 멀리 두고 온 고향의 가족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본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애달픈 모습을 보고 한시로 지어 읊은 것이

정선아리랑」의 시원이 되었다고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주게
싸리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백은 낙엽에나 쌓이지
사시사철 임 그리워 나는 못 살겠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옛날 여량리에 사는 처녀와 아우라지 건너편 유천리에 사는 총각이 연애를 하였다.

그들은 동백을 따러 간다는 구실로 유천리에 있는 싸리골에서 서로 만나곤 하였다.

그러나 어느 가을에 큰 홍수가 나서 아우라지에 나룻배가 다닐 수 없게 되자 그 처녀는 총각을 만나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정선아리랑」 가락에 실어 부르게 된 것이다.

 

 

눈이 오려나 비가 오려나 억수장마 지려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
명사십리가 아니라면은 해당화는 왜 피나
모춘삼월이 아니라면은 두견새는 왜 우나
(······)
정선읍내 일백오십 호 몽땅 잠들여놓고서
이호장네 맏며느리 데리고 성마령을 넘자

 

 

그러나 「정선아라리」는 사회적, 시대적 흐름에 따라 새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반달 같은 우리 오빠는 대동아전쟁 갔는데 샛별 같은 우리 올케는 독수공방 지키네”라거나, “사발그릇은 깨어지면은 세네 쪽이 나고 삼팔선이 깨어지면은 한 덩어리로 뭉치네”라고 분단 상황을 노래하기도 하였으며, “아우라지 건너갈 때는 아우라지더니 가물재 넘어갈 때는 가물감실하네”라고 날 가문 날을 노래하기도 하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동면같이 경치 좋은 곳에 놀러 한번 오세요. 용산소, 폭포수 물 밑에도 해당화만 핍니다. 산천이 고와서 뒤돌아다봤소. 정든 곳이라서 뒤돌아다봤지”라는 구절도 있고, “겉눈은 슬쩍 감구야. 속눈으로 보니, 대관령 서낭님두 돈 시구 가잔다. 연감은 할멈 치고, 할멈은 아 치고, 아는 개 치고, 개는 꼬리치고, 꼬리는 마당 치고, 마당 가역에 수양버들은 바람을 받아 치는데, 우리 집 그대는 낮잠만 자느냐”라고 노래하기도 하였다.

성마령(星摩嶺)은 정선군과 평창군 사이에 있는 고개로 지금은 잘 쓰이지 않지만 옛날에는 이 고을의 관문이었다. 어찌나 높은지 그 마루에 서면 별을 만질 수가 있을 듯하다는 뜻에서 성마령이라고 불렀다 한다.

정선군 북면 유천리 양짓말에서 갓거리로 넘어가는 가물재는 몹시 가팔라서 재 밑을 내려다보면 정신이 가물거린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고, 자족령이라고도 부르는 칠족령은 신동면 제장에서 평창군 미탄면 마사리 뇌룬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꽃베리는 강릉에서 정선읍으로 오려면 반드시 지나야 했던 베리, 곧 벼루(벼랑)였다. 조선시대에 어느 관리가 가마를 타고 지나면서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자 가마꾼에게 얼마나 더 가야 되느냐고 몇 차례를 물었는데, 그때마다 가마꾼들이 곧 베리가 끝난다고 했던 데서 ‘곧베리’가 되었다가 나중에 ‘꽃베리’로 바뀌었다고 한다.

마전치는 정선읍 광하리 마전에서 평창군 미탄면 백운리로 넘어가는 재로, 고개가 하도 높아서 마치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비행고개라고도 부른다.

 

 

 

 

 한편 조선시대에 이곳 여량리에는 여량역이 있었다. 큰 말 2마리, 짐 싣는 말 4마리,

역리 84명, 역조 77명, 역비 12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피곤에 지친 말은 실처럼 가는 길 뚫고 가기 주저하는데
삐죽삐죽 산봉우리는 깎아지른 듯 겹쳐진 성과 같네
바람은 바위틈에서 나오니 대포 실은 수레가 구르는 듯하고
물은 마을 터 안고 흐르니 한 필의 비단 가로놓인 듯
내 신세 백년을 살며 양쪽 귀밑머리만 희어지고
강산 천리 길로 벼슬살이하러 다니는 심정이여
난간에 기대 앉아 동쪽 산에 떠오르는 달 기다리는데
고요한 밤 시를 짓고 싶은 마음 오래될수록 더욱 맑아져

 

용재 성현의 시가 흐르는 듯한 아우라지를 지난 강물은 나진을 지나고 한반도 지형을 빼닮은 상장산 자락을 지나 정선에 이른다. 여기부터가 동강이다.

「정선아리랑」을 연구하는 진용선은 “옛 문헌을 보면 우리 선조들은 아우라지에서부터 동강이라는 말을 썼고, 표기도 지금의 ‘동녘 동(東)’이 아니라 ‘오동나무 동(桐)’을 썼다”라고 말한다. 영월읍을 중심으로 동쪽은 동강, 서쪽은 서강이라고 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였다는 것이다.

 

 

 

  

서강 강원도 영월군 서면에서 만난 평창강과 주천강이 영월읍 서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동강과 합류할 때까지의 강을 서강이라 한다.

 

 

동강에는 열두 곳의 아름다운 경치가 있다. 여울과 소, 절벽, 섶다리, 마을 풍경이 그것들이다. 1경은 가수리 느티나무와 마을 풍경이고,

2경은 신동읍 운치리의 수동 섶다리다. 3경은 나리소와 바리소(신동읍 고성리~운치리),

4경은 백운산(고성리~운치리)과 칠족령(덕천리 소골~제장마을), 5경은 고성리 산성(고성리 고방마을)과 주변 조망,

6경은 바새마을 앞 뼝대, 7경은 연포마을과 홍토 담배 건조막, 8경은 백룡동굴(평창군 미탄면 마하리), 9경은 황새여울과 바위들,

10경은 두꺼비바위와 어우러진 자갈, 모래톱과 뼝대(영월읍 문산리 그무마을), 11경은 어라연(거운리), 12경은 된꼬까리 여울과 만지나루(거운리) 등이다.

산은 높고 골은 깊은 정선군에서 흘러내린 물이 골지천, 오대천, 지랑천, 용탄천, 어천, 임계천 같은 여러 내를 이루며 흘러내리다가 조양강이 되고 다시 더 내려가 동강이 된다.

정선은 고구려 때 잉매현(仍買縣)이었다가 신라의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 때 군으로 승격되어 조선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고려 때 사람인 곽충룡은 이곳 정선을 두고 “풍속은 순박하고 백성들은 송사를 벌이지 않는다”라고 하였고, 역시 고려 때의 문장가인 이색은

 “일천 산엔 겹겹 푸름이 가로놓였으니 한 가닥 길은 푸른 공중으로 들어간다”라고 하였다. 곽충룡은 이어서 “일백 번 굽이져 흐르는 냇물은

멀리 바다로 향하고 천 층으로 층계 진 절벽은 하늘에 의지해 가로질렀네”라고 하였다. 이렇듯 산이 높고 물이 깊은 정선군을 일컬어

고려 때의 문인 한철충은 그의 시에서 “벼랑을 따라 보일 듯 말 듯 가느다란 길이 있구나. 옛 읍이 산을 의지하였는데 산은 성을 이루었네.

산중에 숨어 살고자 하나 참으로 방도가 없구나. 비록 벼슬을 그만두겠다고 말하나 진정(眞情)이 아닌 것만 같네”라고 하였다.

정추는 “하늘 모양은 작은 것이 우물 속에 비쳐서 보이는 것 같고, 산의 푸름은 멀리 구름 위에 가로놓였다. 다섯 동혈(洞穴)은 차고 서늘하여서 능히 뼛속까지 시리게 하고, 한 시냇물은 목메어 울어 순정(純情)을 호소하는 것 같다”라고 노래하였다. 그래서 이 근래에도 정선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장을 두고 “하늘이 세 뼘밖에 되지 않는다”라거나 “앞산과 뒷산을 이어서 빨랫줄을 맬 수 있는 곳” 또는 “닭이 울면 그 소리가 온 고을을 메울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한 안축은 그의 시에서 “산마을에 돼지의 배부름은 반드시 새벽에 물 먹인 것이 아니요, 이웃집 닭이 살져도 날마다 훔쳐가는 자가 없다”라고 하였다.
정선 관아의 북쪽에는 봉서루라는 이름의 정자가 있었다. 그 정자를 두고 안축은 다음의 시를 남겼다.

 

 

가파른 언덕을 빙빙 돌아 말을 급히 몰아가니
뽕나무와 삼[마(麻)]이 십 리를 이은 옛 성터
거친 땅엔 자갈만 삐죽삐죽 규전(圭田)도 적고
비좁은 산허리에 가로질러진 실낱같이 가는 길
빗소리 들으니 나그네 시름 더하고
구름 보니 어버이 그리는 마음 참기 어렵네
바람 바위 물구멍은 사람 세상 아니로세
티끌 흔적 씻어내니 뼛속까지 시원하네

 

 

한편 이곳 정선에서 거두어들인 전세(田稅)는 무명이 1동(同) 19필이었고 『여지도서』에 그 이동 경로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3월에 거두어들여 4월에 바친다. 처음에는 육로로 실어 날라 사흘이면 충주 목계강에 도착한다. 배에 싣고 출발해 자진포, 두무포를 거쳐 경강의 뚝섬에 도착한다. 순풍을 만나면 이틀 반이면 호조에 바칠 수 있다. 대동과 균세도 이와 같다.

 

두메산골이었던 정선이 새롭게 변모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정선 오일장의 부활이다. 5월에서 가을까지 2일과 7일에 서는 정선 오일장에는 서울에서 관광차 오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정선읍내의 오일장에는 정선군 일대에서 채취된 산나물이 다 쏟아져 나온다. 참취, 곰취, 며느리취, 나물취, 참나물, 누롯대, 참두릅, 개두릅, 더덕, 고비, 도라지, 곤드레 등 나물도 좋지만 무엇보다 정선 여행의 별미인 콧등치기와 올챙이국수를 맛볼 수 있어 더욱 좋다. 콧등치기는 일종의 메밀국수다. 메밀을 반죽하여 국수를 만든 것인데 올챙이국수에 비해 끈기가 있고 단단하여 국숫발이 물에 쉽게 풀어지지 않는다. 육수에 된장을 살짝 풀고 깨소금 양념을 하여 먹는데 맛이 좋아 급히 빨아들이다 보면 국숫발이 살아 있는 듯 콧등을 친다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

올챙이국수는 찰옥수수를 갈아서 묽게 반죽하여 나무로 만든 굵은 체에 내려 만든 것이다. 찰기가 적어서 국숫발이 부슬부슬 끊어지는데, 갖은 양념을 하여 묵처럼 말아서 숟갈로 떠먹는다. 하지만 옛 시절 정선의 명물이었던 꿩꼬치산적 같은 음식은 아쉽게도 찾아볼 수가 없다.

태백에서 시작된 남한강이 유장하게 흐르는 영서지방을 두고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영의 오른쪽은 영서(嶺西)라고 한다. 모든 물이 서쪽으로 흘러 한강과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가는데, 물이 적은 데는 거룻배가 다닐 수 있고, 물이 많은 데는 큰 배가 다닐 수 있다.

이익이 생존했던 18세기 중엽만 해도 남한강엔 수없이 많은 배들이 오르내렸지만 오늘날엔 큰 배는커녕 고깃배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정암사

 
 

이곳 정선군 고한읍에 자장율사가 세운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중의 하나인 정암사가 있다. 신라의 큰 스님이었던 자장율사가 태백산 서쪽 기슭에 정암사를 창건한 것은 선덕여왕 14년이었다. ‘숲과 골짜기는 해를 가리고 멀리 세속의 티끌이 끊어져 정결하기 짝이 없다’는 의미에서 정암사라는 이름을 지었다는 이 절은 오대산의 상원사, 양산의 통도사, 영월의 법흥사, 설악산의 봉정암과 더불어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다. 정암사의 창건 설화와 문수보살을 만난 자장율사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정암사 적멸보궁 태백산 서쪽 기슭에 자리한 정암사는 신라의 큰스님이었던 자장율사가 선덕여왕 14년에 창건한 절이다.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다.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불교의 융성에 힘쓰던 자장율사는 진덕왕 때 대국통의 자리에서 물러나 강릉에 수다사를 세우고 살았다. 어느 날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말했다. “내일 너를 대송정에서 보리라.” 놀라 깨어난 자장이 대송정에 이르자 문수보살이 나타나 “태백의 갈반지에서 만나자” 하고 말한 뒤 다시 사라져버렸다. 그 말을 따라 태백산에 들어가 갈반지를 찾아 헤매던 자장은 큰 구렁이들이 나무 아래 서로 얽혀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고, 그곳이 문수보살이 말한 갈반지라 여겨 ‘석남원(石南院, 곧 정암사)’이라는 절을 지었다.

자장율사가 석남원에 머물며 문수보살이 나타나기를 몹시 기다리던 어느 날 다 떨어진 가사를 걸친 초라한 늙은이가 죽은 개를 삼태기에 싸들고 와서 “자장을 보러 왔다”라고 하는 게 아닌가. 자장율사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이 언짢았던 자장의 시중이 “어디서 온 누구인가?” 하고 호통을 치자, 그 늙은이는 천연덕스럽게 “자장에게 전해라. 그래야 갈 것이다”라고만 대꾸하였다.

자장율사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 늙은이를 쫓아내게 하였다. 그러자 늙은이는 “아상이 있는 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으리오” 하고 탄식하면서 가지고 온 삼태기를 뒤집으니 죽은 강아지가 푸른 사자로 변하였다. 늙은이는 그 사자를 타고 빛을 뿌리며 하늘로 솟구쳐 올라갔다. 알고 보니 바로 그 노인이 문수보살이었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자장이 곧바로 뒤를 쫓아갔으나, 이미 문수보살은 떠나가버린 뒤였다. 자장은 몸을 남겨두고 떠나며 “석 달 뒤에 돌아오마. 몸뚱이를 태워버리지 말고 기다려라” 하고 당부하였다. 그러나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한 스님이 와서 오래도록 다비하지 않음을 크게 나무란 뒤 자장의 몸뚱이를 태워버렸다. 석 달 뒤 자장이 돌아왔으나 이미 몸이 없어진 뒤였다. 자장은 “의탁할 몸이 없으니 끝이로구나! 어찌하겠는가. 내 유골을 석혈(石穴)에 안치하라” 하는 부탁을 하고 사라져버렸다.

한편 자장은 사북리의 산꼭대기에 사리탑을 세우려 하였으나 세울 때마다 계속 쓰러졌다. 간절히 기도하였더니 하룻밤 사이에 칡 세 줄기가 눈 위로 뻗어 지금의 수마노탑, 적멸보궁, 사찰 터에서 멈추었으므로 그 자리에 탑과 법당과 본당을 짓고 그 절의 이름을 갈래사(葛來寺)라고 하였다. 그래서 고한읍에는 갈래라는 마을의 이름과 함께 갈래초등학교가 있고, 상갈래ㆍ하갈래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정암사는 숙종 39년(1713)에 중수되었으나 낙뢰로 부서져 6년 뒤 다시 중건되었고, 1771년과 1872년 그리고 지난 1972년에 다시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주게 

아라리, 남한강을 적셨다
뱃길 주막서 아라리로 어울려 떼꾼 입 통해 전국으로 전파
가사·가락에 해학 담겨
 

 

 

정선아리랑은 일하는 사람들의 노래다. 누가 지은지 알 수 없는 수많은 가사가 입과 입을 통해 전해졌다. 그럼에도 불과 35자 안팎에 담긴 가사는 투박하지만 질긴 생명력을 지녔다. 아라리(어러리)는 정선에서 머물지 않고 강원도, 그리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흘러가 아리랑이 되었다. 그들의 애절한 삶과 애환이 담긴 대표적인 아라리가 바로 떼꾼들의 노래다. 첩첩산중 정선의 노래가 1200리 남한강 물길을 타고 내려가 한양에 알려진 배경에도 구수한 떼꾼들의 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남한강 뗏목에서, 나루터에서, 주막에서 흥얼흥얼 불려진 떼꾼들의 아라리를 찾아가 보자.


 

 

 

 
▲ 정선 뗏목의 출발지였던 정선군 북평면 아우라지 전경


■ 나루와 주막

정선은 지리적으로 오지마을이었다. 외부와 소통할 수 있었던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던 철길을 예로보면 쉽게 알 수 있다. 1957년 3월 영월에서 정선 함백까지 석탄수송용 기차가 첫 운행됐다. 여기서 정선역까지 개통되기는 10년이 걸렸다. 그리고 조선시대부터 한양으로 나무를 실어나르던 뗏목의 출발지인 정선 아우라지에 기차가 개통된 시기가 1971년 5월이다. 이 때까지 뗏목은 정선사람들의 일반적인 교통수단이자 운송수단이었다.

정선 아우라지, 나전, 용탄, 가수리 등지에서 출발하는 뗏목은 동강을 타고 영월까지 내려간다. 이 구간을 ‘골안떼’라고 했는데 물살이 급해 기술 좋다는 떼꾼들도 영월 덕포까지는 사흘이 걸렸다.

이 때 물굽이가 휘도는 마을마다 나루와 주막이 성행했다. 점재나루, 진탄나루에 정선읍 덕천리 연포 객주와 영월읍 거운리 전산옥의 주막 등이 대표적인 떼꾼들의 쉼터였다. 이곳에서 떼꾼들과 주막의 여자들은 툇마루에 걸터앉아 아라리를 주고받았다.


술은야 안먹자고 맹세를 했더니

술잔보고 주모보니는 또 한 잔 먹네


놀다가세요 자다가세요

그믐 초성달이 뜨도록 놀다가 가세요


정선에서 영월 동강을 지나 남한강 물길을 타고 한양 광나루까지 도착하면 적어도 보름에서 한달가량 걸린다. 물길을 타고 오는 동안 색주가들과 어울린 떼꾼들의 신명나던 모습은 단양 꽃거리, 제천 청풍, 충주의 목계 달천, 여주의 이포, 양평의 양수리, 팔당 광나루 뚝섬 서빙고 노량진 마포 등지로 이어졌다. 밤만 되면 정선아리랑이 울려 퍼졌던 곳이다.


오늘 갈지 내일 갈지 뜬구름만 흘러도

팔당주막 들병장수야 술판 벌여 놓아라


떼꾼들은 술과 노름, 여자로 돈을 탕진하면 넋두리로 아리랑을 불렀다. 한마디로 신세타령이다..


술 잘 먹구 돈 잘 쓸때는 금수강산 일러니

술 안 먹구 돈 떨어지니 적막강산일세


오랜 세월 한강을 풍미했던 뗏목은 1960년대 본격 개통된 기찻길과 한강물길을 막아선 댐 건설 여파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뗏목은 사라졌지만 떼꾼들이 목청 높여 부르던 아라리는 한강 유역과 그 내륙에 이르기까지 ‘정선아리랑’으로 전파돼 오늘날 보편화된 소리로 자리잡았다. 요즘으로 말하면 ‘중독성’이 강한 노래라고 할 수 있다.



■ 마지막 떼꾼의 어러리

영월 동강이 래프팅 코스로 유명한 영월읍 거운리. 이곳에서 서울까지 뗏목을 끌고 다녔던 마지막 떼꾼, 홍원도(80)옹을 만날 수 있다. 그는 정선~영월을 오고가는 이른바 ‘골안떼’ 뗏목을 수십여차례 이끌었다. 서울까지는 두차례 다녀온 떼꾼이다.

열 아홉살에 떼꾼이 되어 스물여섯인 1959년까지 떼를 탔다. 현재 정선에서 서울 나루터까지 뗏목을 끌었던 유일한 떼꾼으로 알려졌다.

“아직까지도 그 때 떼를 탔던 기억이 생생하지. 적막한 분위기에서 뗏목을 타고 가다보면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해 자연스럽게 노래가 나와. 가사야 찍어 붙이면 되니 얼마든지 불러도 지루하지 않았어.”

옛 기억을 떠올린 그는 거침없이 한 곡 뽑아낸다.


세월아 봄철아 오가지 말아라

이세상 청춘 남녀가 세월따라 늙는다


홍 옹은 “서울까지 강변으로 주막이 수도 없이 늘어섰지. 때로는 객주여자들이 정선아리랑을 부르며 떼꾼들을 유혹하기도 했어. 주막에서 며칠 자면서 술도 먹고 얘기도 하면서 노래도 많이 불렀지. 그때는 생각나는대로 가사를 만들어 부르니까 말씀 어(語)를 붙여 어러리라고 했던 거지 뭐”라며 웃음지었다. 그는 이어 “누가 뭐래도 아리랑 가락의 원조는 정선이야. 아무리 불러도 참 좋아”라고 말했다.

 

  
▲ 마지막 떼꾼 홍원도(80)옹이 영월읍 거운리 동강변에서 옛 기억을 회상하며 뗏목코스를 가리키고 있다.


■ 단양 도담삼봉 아리랑

정선 아우라지를 출발한 뗏목은 조양강~동강을 지난 충청도 땅을 흐르는 남한강은 단양 도담삼봉(島潭三峰)에 이르면서 흐름을 늦춘다. 이곳 역시 떼꾼들이 강변에 떼를 묶어두고 한밤을 지샜던 곳이다. 현재는 하류지역에 충주호가 생기면서 옛 뗏목의 추억은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단양팔경의 하나인 도담삼봉은 정선에서 떠내려온 돌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전해질 정도로 문화적인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유적지로 꼽힌다.

정선아리랑연구소가 1995년 채록한 고 권이순(당시 74세)할머니의 가사와 가락은 강을 따라 흘러간 정선아라리의 해학을 그대로 담고 있다.


남우집 낭군은 사향내가 팔팔 나는데

우리집 멍테이 낭군은 땀내만 나네


단양지방에서 불린 ‘띠뱃노래’에서도 정선아라리의 정서가 묻어난다. 띠뱃노래는 한양에서 남한강을 거슬러 일용품을 싣고 도착한 뱃사람들의 노래다.


잘있거라 갈보들아 변치말고 잘있으면

명년삼월 돌아와서 다시한번 만나보세

이어가나 한양뱃길 비틀비틀 소금배야

서러워서 못가겠네


40여년째 단양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는 이의홍(75)씨는 “1960년대 중반까지 현재 도담삼봉 위치에서 뗏목을 맞이한 객주집들이 많았는데 여주인장이면 아리랑 노래는 기본이었지”라며 당시 상황을 뚜렷하게 기억했다.

진용선 정선아리랑연구소장은 “한강의 물길 위에 풀어놓은 정선아라리는 떼꾼의 입과 입을 통해 전국 각지로 흘러갔다”며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뗏목과 떼꾼, 주막은 오늘날 아리랑을 만들어낸 역사의 현장이자 주인공”이라고 말했다.  

 

강원도민일보 : 정선/박창현 

 

 



정선은 과거와 만나는 곳이다. 그 오랜 향수를 맛볼 수 있는 날이 2일과 7일에 서는 오일장이다.
두메산골에서 자란 산더덕,·곤드레를 비롯한 갖가지 산채도 구경하고 덤으로 구성진 정선아리랑도 들을 수 있다.
오일장이 서는 장날이면 흥겨운 잔치마당도 열려 관광객들의 신명을 끌어낸다.

정선 장에 가면 꼭 맛봐야 할 향토음식도 많다.
메밀전병과 수수부꾸미, 이름도 재미있는 콧등치기국수와 올챙이국수가 그것이다.
콧등치기국수는 메밀을 껍질째 갈아 거뭇머뭇한 가루를 물에 넣어 손으로 치대어 칼로 썰어 내놓는 메밀국수다.
굵기는 거짓말 좀 보태 손가락만 한데, 옛날에 뗏목을 타던 떼꾼들이 주막에 들려 장국에 말아먹었다고 한다.
굵은 면발을 후루룩 먹으면 면발이 콧등을 쳐서 콧등치기국수라고 불린다.
이에 비해 올챙이국수는 옥수수를 묵으로 쑤어서 구멍 뚫린 틀에 내리면 큰 물그릇에 떨어지는 국수가락이
올챙이가 헤엄치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콧등치기나 올챙이 국수를 처음 먹는 사람들은 그 진맛을 잘 모르지만 먹을수록 당기는 음식이다.

메밀전병에다 황기막걸리를 한 병마셨지만 곤드레밥을 먹지 않고 어찌 그냥 떠날 수 있겠는가.
이름만 들어도 입맛을 돋우는 곤드레 나물밥. 된장을 넣어서 비벼도 좋고, 양념장으로 비벼 먹어도 되지만
그 각 각의 맛이 다르니 골고루 먹을 수 밖에 없다. 그 맛에 끌려 곤드레 만드레가 될지라도...

정선아리랑시장에서는 토요일을 맞는 9월28일부터 네차례에 걸쳐 장아찌와 효소 담는 법도 가르쳐 준다고 한다.
모든 것이 공짜인데, 자기가 담근 장아찌까지 준다니 귀가 솔깃해진다. 잘 배워두웠다가 아내에게 점수 좀 따야지...
그리고 10월2일부터 나흘동안 '대한민국 아리랑대축제'가 정선에서 열리지 않는가.
님도 보고 뽕도 딸 겸, 올 가을엔 정선에서 지낼 작정을 했다.

떠나오는 발길 뒤로 들리는 밥집 아낙의 인사도 정겹더라.
"담에 또 오시드래요"

 사진,글 / 조문호









 

                                                                        문 숙 (서양화가)

'인사동 정보 > 인사동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동명 (시인)  (0) 2013.09.23
정영신 (사진가)  (0) 2013.09.18
김하은 (서양화가)  (0) 2013.09.02
전항섭 (조각가)  (0) 2013.08.26
지 걸 (방랑자)  (0) 2013.08.26

 

 

 

 김하은 (서양화가)

'인사동 정보 > 인사동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영신 (사진가)  (0) 2013.09.18
문 숙 (서양화가)  (0) 2013.09.02
전항섭 (조각가)  (0) 2013.08.26
지 걸 (방랑자)  (0) 2013.08.26
정현석 (금융인)  (0) 2013.08.16

-인사동 유목민들이 운영하는 사이트 안내-

2013.9.8일 자로 "인사동 유목민" 다음 (http://cafe.daum.net/insadonge) 카페가 폐쇄됨에 따라
각 회원들이 운영하는 개인 카페 또는 블로그를 아래와 같이 안내해 드리오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더 많은 분들의 사이트가 있겠지만 정보를 몰라 소개하지 못하니 댓글 또는
이메일로 성명과 사이트 주소를 알려 주시면 함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인사동 연가'카페의 창설에 따라 빈집이 되어버린 "창예헌" 카페를 다시 활성화시켰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램이오나 회원님들의 의견은 어떠한지 궁금합니다.


조문호 : 다음 - 인사동 사람들 (http://blog.daum.net/mun6144)
            다음- 인사동 연가 (http://cafe.daum.net/insadonge)

창예헌 : 다음 (http:// cafe.daum.net/insadongi)
강   민 : 다음 -동오제-(http://cafe.daum.net/Dongori123
김상현
: 네이버 -뮤아트-(http://cafe.naver.com/muart7)
노광래 : 다음 - 별이 된 화가 강용대(http://cafe.daum.net/u-ca)
서기원 : 다음 - 로스터 앰파이어-(http://cafe.daum.net/2009LostEmpire
전강호 : 다음 - 송추갤러리 (http://cafe.daum.net/songchooo)
정영신 : 네이버 -한국의 장터 (http://blog.naver.com/iarari?)
최백호 : 다음 - 최백호- 낭만에 대하여 (http://cafe.daum.net/choibackho/)
이명희 : 다음 - (http://cafe.daum.net/actress55)
문시종
: 다음 - 솟대-전통을 넘어 미래로-세계로! (http://blog.daum.net/male-stone-turtle/15334847
이귀선 : 다음 - 율려춤 이귀선(http://blog.daum.net/gwisun1004/2622545 )
리애지 : 다음 -(http://cafe.daum.net/Riaeji)
김용문
: 네이브- 막사발- (http://blog.never.com/macsabal21/163796229)
김경원
: 다음- 은행나무아래 커피향 (http://cafe.daum.net/costage)
   람 : 다음- 치악산 가람마을 (http://cafe.daum.net/garamstory)

(홈페이지)

조해인 : (http://www.명상울타리.com)
장사익 : (http://www.jangsaik.com)
조햇님 : (http://www.barbie-skin.co.kr)
유혜정
: (http://www.theb.co)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