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하게 끌어 온 제2회 최민식사진상 부정심사 의혹 문제를 매듭지으려는 자리가 ‘온빛사진가회’의 주선으로 지난 22일 오후4시부터 충무로에 있는 ‘영상미디어센터’에서 열렸다.

다큐멘터리사진가 석재현씨의 사회아래, 이 문제의 핵심이었던 이상일 당시 운영위원장과 정주하 심사위원장, 그리고 이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온몸을 던졌던 이광수 사진비평가와 ‘눈빛출판사’이규상대표가 패널로 자리했다,

그런데 안성용씨 작품을 지지한 송수정씨는 물론 다른 심사위원들은 왜 부르지 않았을까? 그들은 이 문제에서 아무런 관계가 없단 말인가? 특히 심사위원 이갑철씨는 1회 수상자로서 최광호씨와의 관계가 예사롭지 않다. 그 심사에 관련되었던 전원을 불러내 의혹을 푸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다 알고 있는 내용의 질의나 변명으로 일관된 토론보다 방청석에 앉은 사진인들의 질의 듣는 시간을 더 많이 할애했어야 했다

인본주의와 사회정의를 추구한 최민식선생의 사진철학을 지향한다는 1회 때의 공모 목적도 슬그머니 사라졌고, 미 발표작으로 한정된 공모요강이 한마디 언급도 없이 기 발표작도 가능하다는 등, 엿쟁이 마음대로 방향을 바꾸었다. 최광호씨의 출품작이 발표작인데다, 최민식선생의 사진철학과는 전혀 동 떨어진 작품이었으니, 어찌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 하지 않겠는가?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볼 수 없는 최광호씨의 ‘천제’라는 출품작에 대한 평가는 이미 박진호씨가 세세하게 밝힌 내용처럼, 일고의 가치 없는 사진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천제’라는 출품작 제목의 한자까지 틀려 ‘천제’에 대한 정확한 뜻도 모른다는 의혹까지 샀다. 그 외에도 의혹을 살만한 일이 한 둘이 아닌데, 이처럼 문제투성이 작품을 밀어 붙인 것이 부정심사가 아니고 도대체 무어라 말인가?

사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처럼 이왕이면 가까운 사람에게 상을 주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라 그 문제에서는 대부분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공모전이나 각종 시상의 운영시스템 자체를 뜯어 고쳐야 한다는 생각은 오래 전부터 해왔다. 훌륭한 원로나 중진에겐 돈보다 명예를, 열심히 현장에 매달리는 가난한 사진가에게는 조그만 지원금이라도 나누어 주는 실질적인 사진상이 필요한 것이다. 제도적 개선이 더 시급했던 사진상 문제였기에, 이 문제의 핵심인 이상일씨의 사과 한마디로 사진계의 화합을 이끌 것으로 기대했으나, 예상은 한참 빗나갔다.

“최민식사진상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는 유명 사진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가난한 친구인 최광호씨를 지지했다”는 이상일씨 발언 자체가 부정심사임을 스스로 밝힌 꼴이다. 그리고 이상일씨의 발언들을 종합해 보면, 자신이 이 상의 주체로서 마음대로 주물렀다는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났으나 반성이나 사죄의 기색은커녕, 야유 썩힌 웃음만 흘리고 있었다.

토론의 장을 지켜보던 온빛사진가회 조대연회장과 ‘스페이스22’의 정진호 대표께서 사과를 유도하는 발언을 하였으나, 그는 변명과 자기자랑에만 치중하다 끝까지 사과 한 마디 하지 않고 끝냈다. 이 건 우리나라 전체 사진인 들을 능멸한 처사다. 오죽하면 토론자로 나선 이광수교수가 사진인들에게 대신 사과했을까?

“아! 이 사람 정말 구제할 수 없는 사람이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아마추어 단체인 ‘사협’에서 일어 난 문제라면 신경 쓸 일고의 가치조차 없다. 배울 만큼 배웠고, 옳고 그럼을 훤히 아는 자가 저지른 일이라 더 화가 난 것이다. 안타깝지만, 더 이상 토론할 대상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법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매장시켜, 그 뿌리 자체를 뽑아야한다는 판단을 했다.


먼저, 우리나라 사진판에 끼리끼리 나누어 먹는 관행은 원로사진가들이 먼저 만들었다. 지금 문제가 되는 비리들도 선생들께서 만들어 놓은 구태를 직계 제자들이 이어받아, 돌려 먹은 것이다. 이런 일이 터졌으면 진작에 제자들을 불러 타이르거나 이런 공론의 자리라도 나오시어 발전적으로 이끌 수 있는 충언을 아끼지 않아야 하는데, 아무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셨다. 하기야, 무슨 면목으로 나서겠냐마는, 그래도 나서야 했다. 노학자로서 사진계 발전에 앞서, 사회정의를 위해...


공론의 장에 참석한 사진가로는 엄상빈, 박진호, 정진호, 김문호, 김남진, 성남훈, 신동필, 강제욱, 이상엽, 조대연, 이기명, 천수림, 박이찬, 이규철, 박영규, 김주혁, 서준영, 윤정원, 황서진, 남 준, 곽명우, 이은숙, 이혜숙, 강홍구, 이세연씨 등 60여명이 좁은 토론장을 가득 메웠다.


공론의 자리가 파한 뒤에는 모두들 술집에 모여앉아 독주로 분노를 다독여야 했다. 그 파편이 튀어 우리 마누라의 가슴에 박혔다.

이제 내 갈 곳은 없다.


사진, 글 / 조문호























































 

몇 일 동안 컴퓨터와 씨름했더니, 온 몸에 좀이 쑤셨다.
하던 일을 잠깐 멈추고, 산책삼아 인사동으로 나갔다.

 

무작정 걷고 싶었으나, 수요일 오후라 전시장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썩 발길 잡는 전시는 없었다.
사진전도 두 군데나 있었으나, 동명이인이거나 아마추어 전시였다.

'인덱스'에서는 최건수씨를, '가나스페이스'에서는 김가중, 곽명우씨 등

아는 분도 여럿 보였으나, 마음이 바빠 그냥 지나쳤다.
인사동 거리에서는 사진가 이갑철, 이상일씨도 만났다.

 

두 시간 동안 전시장과 인사동거리를 쏘다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전시장마다 아는 분도 있고, 술과 음식이 즐비했지만 마다했다.
인사동나와 이 날처럼 술 한 잔 없이 돌아간 적은 없었다.

 

가고싶은 술집도 술 벗도 없으니, 차라리 우리집 주막이 더 나은 듯 했다.

인사동의 낭만도 전설이 되어가는 요즘, 왜 인사동을 못 잊고 떠돌까?
늘 고향 같았고, 고향 동무 같은 벗 들이 있었으니까...

 

 

사진,글 / 조문호


 

 

 

 

 

 

 

 

 

 



 

자연생태환경을 기록하는 환경사진가 조성제씨의 ‘천년의 전설 우포늪’사진전과
사진집 출판기념회가 지난 12월1일 창원 송원갤러리에서 성황리에 개막되었다.

이 날 개막식에는 많은 지역경제인들을 비롯하여 윤복희 경남도립미술관장, 조민규 합포문화동인회 이사장,

금융인 강동수씨, 김녕만 사진예술 발행인, 윤세영 사진예술 편집장, 사진가 임영균, 이상일, 김관수, 정영신씨 등

각계 인사 200여명이 참가하여 전시를 축하했다.

사진가 조성제씨는 현재 경남장애인재활협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지난 2010년부터 전시 수익금 전액을 장애인문화예술기금에 기탁하고 있다.

이번 사진집과 작품 판매 수익금도 모두 기금으로 적립해 장애인들의 문예창작 활동을 지원하게 된다.

이 전시는 오는 31일까지 이어진다.

 

사진: 조문호, 정영신 / 글 : 조문호

 

 

 

 

 

 

 

 

 

 

 

 

 

 

 

 

 

 

 

 

 

 

 

 

 

 

 

 

 

 

 

 

 

 

 

 

 

 

 

 

 

 

 

 

 

 

 

 

 

 



강홍구작

 


"사진작가 이상일((李尙一, 47). 1980년 5월 27일 그는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 군사독재정권이 규정한 '폭도'의 최종 진압작전 현장에. 그는 작전 수행중이었다. 총 대신 카메라를 들고. 작전 기록물을 남기는 게 그가 맡은 임무였다. 정보사령부 소속이었던 군인 이상일. 그는 이날 광주 곳곳을 누비면서 현장을 카메라에 담은 몇 안되는 사람이다.

이상일은 그로부터 4년 뒤인 1984년 제대했다. 사회에 나와 사진을 본격적으로 공부할 요량으로 대학에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광주를 찾는다. 아, 망월동. 그의 손에는 카메라가 쥐어져 있었고, 자연스럽게 한 사물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그야말로 아무런 생각 없이. 4년 전과 마찬가지로 긴장의 순간이었다. 그 긴장의 순간은 18년간이나 계속되었다.

해마다, 날마다, 정권이 바뀐 뒤에도 그는 망월동을 찾았다. '2002년 망월동'을 끝으로 '광주'를 주제로 한 작업을 마무리했다. 2000년 광주비엔날레 때 '이상일의 망월동'을 선보였고, 올해 광주비엔날레에도 9점을 출품했다. 그는 더 이상 '광주'를 주제로 한 작품을 하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이상일 씨는 80년 광주 현장을 기록으로 남겼다. 전문용어로 '아카이브(achive) 사진'이라 한다. 일종의 공공단체에서 역사적 검증으로 만들어 놓는 사진을 말한다. 정보사령부 소속이었던 그는 1980년 5월 27일 광주 현장에 투입, 시내 곳곳을 누비면서 사진을 촬영했다.

당시 그는 엄청난 분량의 사진을 찍었다. 다른 기관에서 사진을 촬영했는지는 모르지만, 정보사령부 소속으로는 유일하게 그가 담당했다. 그 사진들은 한동안 정보사령부에 보관되어 있었고, 지금은 파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상일 씨는 개인적으로 그 사진을 갖고 있다. 당시 정보사령부에서 공식적으로 제출한 사진 이외에 개인적으로 필름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그가 갖고 있는 사진의 분량에 대해서는 그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다. 한 마디로 말해 '엄청나다'라고 말했다.

'주로 어떤 종류의 사진이냐'는 물음에 광주항쟁의 처참한 현장 그대로가 담겨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까지 그 날 찍은 필름을 열어 보지 않고 있다. 아직까지 공개하지 않은 사진들이다. 당시 사진기자들이 접근할 수 없는 곳에서 촬영한 사진들도 여럿 있다. 군인 신분으로 찍은 사진이기에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사진들의 공개를 꺼린다.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개인적인 차원과 공적인 차원에서 그렇다, 개인적으로, 후회할 수 있지만 일종의 결백증 같은 거다. 지금 상태에서 그 상황을 수용하기 어렵다. 공적으로는 당시 작업이 개인의 자율에 의하지 않고 어떤 기관에 의해 이루어진 행위이기에 그렇다. 아직까지 그 처참한 현상을 다시 보고 싶지 않다."


이상일씨가 당시 최종진압작전을 정보사소속으로서 상세하게 촬영했다면, 현장의 즉결처형장면, 항복한 시민군에게도 총을 난사한 계엄군의 만행이 적나라하게 담긴 사진들도 여럿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이것이 공개될 경우, 여지껏 증언으로만 존재했던 진압당시의 끔찍하고도 불법적인 학살이 실질적으로 입증되는 성과를 가져오는 것은 물론, 아직까지 지역구도에 갇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심지어, 일부에서 폭동으로까지 매도되고 있는 현실을 어느정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또한 계엄사에서 5월27일부터 30일사이에 행한 암매장이나 시체소각행위, 또는 행방불명자의 암매장지나 그 신원에 관계된 상황도 일부나마 규명되지 않을까 싶다.

이상일씨의 개인적 고뇌야 이해하면서도, 정말로 그가 역사적 책무, 22년전의 원죄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이제라도 그 사진들을 공개해 이제는 눈물마저 말라버린, 가슴이 다타버린, 지울수 없는 한을 품고 하나둘씩 사라져가는 희생자, 행방불명자 유족들을 위해서 그당시의 사진들을 모든 국민에게 알려서 진실을 밝히는데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5.18 민주화운동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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