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모 'Meditation' 초대전이 '인사아트프라자'에서 지난 31일 개막되었다.

 

전시된 히말라야 설산은 아름다움을 넘어 신비로운 생명의 숨결로 가득하다.

설산에서 영적 에너지가 솟는 것은 작가의 간절한 기도에 의한 것이다.

 

작가는 20여 년 전, 히말라야 설산을 보고 큰 깨달음을 얻어 작품 세계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예전에는 인사동 풍류객으로 살았으나, 그 이후부터 그의 기행은 전설이 되어버렸다.

스님처럼 술과 고기도 멀리하며 간절한 기도를 화폭에 옮긴다.

 

명상과 기도에 의한 설산은 차가운 한기가 아니라 따뜻한 온기가 번져

보는 이로 하여금 따뜻한 사랑의 빛에 휩싸이게 만든다.

 

이 전시는 612일까지 열린다.

 

또 다른 작품도 선보였다.

 

좀 늦게 간 개막식에서 강찬모화백을 비롯하여 장경호, 이두엽, 조준영, 최유진,

방기식, 정영신, 노광래, 덕원스님, 황경애씨 등의 반가운 분을 만났다.

 

 '인사아트프라자' 5층 레스트랑에 마련한 만찬장에서 함께 식사를 했다.

 

그 날 2차는 언론인 이두엽씨가 '흐린세상 건너기'에서 샀다.

조준영, 장경호, 정영신, 최유진씨가 함께 한 자리에서 인사동 추억몰이가 시작됐다.

"술 귀신 강찬모 오기 전에 도망가자"는 전설에서 부터,

인사동을 들락거리며 이야기거리를 만들었던 풍류객의 만행을 낱낱히 폭로했다.

이두엽씨가 인사동에 관한 추억몰이 프로젝트를 추진한다니, 다들 기대하시라~

 

 

 

아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인사동이 인사동 같지가 않다.

인사동이 삭막하게 변한 것이 어제 오늘만의 일도 아니지만,

정든 사람마저 볼 수 없으니,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인사동 풍류객들은 세상을 등졌거나 대부분 떠나버렸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거리도, 여느 거리와 다를 바 없다.

서울역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지만, 특별한 일이 없으면 가기도 싫어졌다.

 

지난17일 오후무렵,  유목민전활철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홍천 사는 양서욱씨가 인사동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를 본지도 오래되었지만, 술 생각이 간절한 터라 하던 일을 덮어버렸다.

 

유목민에 갔더니, 전활철, 양서욱, 고은우씨가 있었다.

가게 안쪽 전등이 꺼진데다 주변이 어수선해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더니, 그 날이 정기휴일이란다.

 

홍천에서 집 짓는 일에 매달리고 있다는 서욱씨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뒤늦게 도언탁, 장은하씨가 등장하며 술자리도 무르익어 갔다.

 

그러나 날씨가 추워 그런지, 벽치기길 입구의 담배포가 문을 닫아버렸다.

술 마시며 담배를 참아야 하는 인내에 한계를 느꼈다.

또 한 곳인 '예당은 술집이라 사러가기가 민망하지만. 어쩌겠는가?

 

하는 수 없이 예당에 담배 사러 갔더니, 도처에 아는 사람들이 콩알처럼 박혀 있었다.

 

최유진, 이만주, 이두엽, 김태서씨 등 반가운 분들이 많았으나, 사진만 찍고 나와 버렸다.

 

돌아오다 새로 생긴 술집에도 잠시 들려 보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장경호, 박원규, 노현덕씨가 앉아 있었다.

느닷없이 등장한 쌍다구에 그들이 더 놀란 것 같았다.

 

반가운 인사동 사람들이 여기 저기 앉아 있으니, 모처럼 인사동 같은 느낌을 받았다.

예전 인사동이 정겹듯이, 사람도 오래된 사이가 정겹다. 농익은 술이나 곰삭은 된장처럼...

 

새로 개업한 집에서부터 예당유목민을 오가며 첨벙거리던 중에

흐린 세상으로 건너오라는 이두엽씨의 전화를 받았다.

 

이미 술에 절었지만, 그 쪽 사정이 궁금해 안 갈수가 없었다.

골목을 돌고 돌아 흐린 세상 건너기로 갔더니,

이두엽, 최유진, 이만주씨와 잘 모르는 여시인도 한 분 계셨다.

 

한 때 방송피디로 일하다 신문사사장까지 두루 거친 이두엽씨는

세상을 떠난 여운화백과 더불어 인사동 밤안개로 불렸다.

밤안개처럼, 밤 새도록 인사동을 휩쓸며 새긴 사연이 얼마나 많겠나?

 

그런데, ‘뿌리 깊은 미래라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추진한다는 따끈한 소식을 주었다.

그 첫 번째 대상이 인사동이라며, 인사동의 뿌리를 찾아 나서겠다는 말에 가슴이 부풀었다.

 

인사동의 매력은 정이라는 말에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정하면 인사동의 인정이니, 결국은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아닌가?

 

"사람아 사람아~ 인사동 사람아~"

 

사진, / 조문호

 

 

전통문화의 거리로 알려진 인사동도 많이 변했다.

 

화랑을 주축으로 골동품점, 표구점, 필방 등이 모여 있었고,

인사동 골목 골목에 똬리 튼 술집에는 예술가들의 낭만과 풍류가 넘치던 곳이었다.

 

며칠 전 인사동 거리에서 한참 방황했다.

인사동에 숨겨둔 애인도 없는데, 왜 틈만 나면 인사동을 기웃거리는지 모르겠다.

 

그날은 인사동 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단 한 곳이라도 남았는지 찾아보려 작심한 것이다.

 

기존 가게들이 비싼 임대료에 밀려나며 잡화상이나 옷가게들이 대신했는데,

이제 내세울 만한 예스러움이나 인사동만의 풍류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기특한 것은 아직 많은 화랑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세월 따라 모든 것은 변할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는 궁중 화가들의 작업실인 도화서가 인사동에 있었다고 한다,

연암 박지원과 율곡선생도 인사동에 살았고,

400년 된 회화나무와 명성황후의 조카 민익두 대감의 옛 저택인 민가다헌’,

박영효 대감댁이었던 경인미술관한옥도 인사동 유적으로 남았지만,

인사동의 추억으로 꼽을 대상은 아니었다.

 

1924통인가게가 생기면서 고미술 관련 상가들이 들어서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후에는 고가구나 고미술품 등 골동이 인사동으로 쏟아지며,

1960년대까지 고서점, 고미술상, 필방, 표구점 거리가 되었다.

'구하산방'과 수도약국도 그때 생겨난 것이란다.

 

지금은 민가다헌’, ‘경인미술관’, ‘통문관’, ‘통인가게’, 수도약국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바뀌었다.

 

8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인사동과의 인연은

실비대학으로 불린 실비집이나 '시인통신', 고갈비 양푼집 등 이름도 없는 대폿집이 주 무대였고,

찻집으로는 천상병 선생이 계시던 귀천이나 수희제’, ‘초당등이었다.

 

그리고 옛 순라꾼 터에 있던 초창기 예총회관건물이나

건국빌딩에 둥지 튼 민예총사무실에 대한 추억도 많다.

 

'민예총'창립총회에 갔다가 우연히 고향의 은사 조성국선생님을 만난 것이다.

'민예총' 공동의장으로 추대되어 자리하심에 깜짝 놀란 것이다.

 

그 외에도 그림마당 민이나 꽃나라흑백현상소', ‘민사협사무실 등

들락거린 곳이 많았으나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골목골목 숨어있던 술집들도 대부분 사라지거나 간판을 바꾸어 달았다.

아직 살아남은 식당은 부산식당이나 사동집이 고작이다.

 

그런 특정한 장소의 현장 보존성을 찾는다면

한때 카메라워크’ 작업실로 활용했던 옥탑방 철계단이 유일했다.

 

문 닫은 지 오래된 술집 문에 쌓인 우편물이나

옛 잔재물들이 희미한 추억을 떠올리게 할 뿐

인사동다운 것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아마 경인미술관에서 우연히 만났던 이두엽씨가 가장 인사동답지 않았나 생각된다.

인사동과의 첫 만남도 사람으로 이루어졌지만,

인사동을 못 잊어 하는 '인사동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인사동이 그리운 것이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이상, 인사동은 유효하다.

 

사진, / 조문호

 

 




도시는 진화(進化)한다.
정책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좋은 방향으로 도시가 진화할 수 있도록, 전략을 바르게 세우고 정책의 물꼬를 잘 터주어야 한다.
인사동도 자연스럽게 진화해야 한다.
상업주의에 물든 난개발은 절대적으로 막아야 하겠지만, 그렇다고해서 언제까지나 현상 유지만 고집할 수는 없다.
이제 진지하게 방향을 생각할 때가 왔다.

인사동이 좋은 방향으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전략이 필요할 것인가.
해법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람들은, 무엇이 ‘그리워’, 인사동에 그리도 많이 모여드는가.

나는, 사람들이, ‘이야기’가 그리워, 인사동에 온다고 생각한다.
인사동의 작은 골목길에는 세월이 퇴적되어 있다.
그리고, 세월의 풍화작용 속에 이끼처럼 덮혀있는 ‘이야기’들이 있다.
그 ‘이야기’들은 나지막하고, 정겹고, 따스하다.
마치 시골 누이와도 같다.

인터넷 세상도 결국은 사람사는 세상이기 때문에, 사람사는 세상의 작은 ‘이야기’가 그리워, 사람들은 인사동을 찾아온다.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본다면, 해법은 스스로 분명해진다.

인사동 거리는 점차 잊혀가고 있는 소중한 ‘이야기’들을 정겹게 들려주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진화의 방향이다.
점차 잊혀져가는 소중한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곳? 바로, 박물관이 그런 곳이다.
나는 인사동에 작은 박물관들이 많이 생겨야 한다고 믿는다.

방법은 있다.
서울시가 매년 시예산으로 백여평의 땅을 사고, 기업에서 작고 이쁜 박물관을 지어주면 된다.
일단 땅이 있고, 건물이 작은 규모이기 때문에 기업에서도 흔연히 동참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의 한 복판인 인사동에 작고 이쁜 박물관이 지어지면, 기쁜 마음으로 평생모은 소중품을 내어놓을 소장자들은 많다.
그 분들은 평생을 다해서 한 분야의 물건들을 모아왔지만, 교통이 좋은 곳에 박물관을 지을 돈들은 대부분 가지고 있지 못하고,
그 사실을 항상 안타까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10년이 지나면 열 개의 박물관들이 만들어지고, 그곳에서 맑고 ‘울림이 있는’ 이야기들이 들려올 것이다.
서울시는 예산을 생산적으로 쓰는 셈이 된다.
그 땅이 서울시의 소유이기 때문에 시유지를 사두는 셈이 되고, 건물과 소장품도 덤으로 생기니 손해볼 것이 없다.
우리 옛 지도 박물관, 한지 박물관, 국악 박물관…

외국 관광객들이 오면 인사동에서 우리 문화의 빛깔과 아름다움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게 된다.

난초가 멀리까지 그 향(香)을 전하듯이,열 개의 박물관은 인사동 전체의 품격(品格)을 만들어 가는 추진축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천년의 화두는, 어쩌면 ‘작은 것이 아름답다’ 일 것이다.
1조 5천억불의 자본이 투기 자본화하여 빛의 속도로 지구를 휘감고 도는 이 미친 ‘돈 황제’의 세상에,

인사동에 작고 이쁜 박물관 열 개를 만드는 것.
이것이 나는 국가와 서울시 정부가 추진해야 할 ‘문화전략’이라고 믿는다.


글 / 이두엽(문화전략연구소장·주식회사 문화전략21 부사장)




요즘 나를 아는 분들이 모이면 하는 이야기가 있다.
‘사람 좋던 조문호가 왜 저리 변했냐고?’
예전에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웃고 넘어가던 사람이
왜 저렇게 까칠해 졌냐는 것인데, 그건 뒤늦게 반성한 바가 크기 때문이다.






언젠가 바뀌겠지 생각했지만, 죽을 때가 되도록 바뀌지 않았다.
착한 사람이 못 살고 나쁜 놈들이 잘 사는 구조도 그렇지만,
잘 못된 관행이나 위선, 부조리 등 못된 짓이 모두 그대로였다.
듣기 싫은 참 말은 안 하고 입에 발린 좋은 말만 하는 사람 탓이었다.
가까운 사람의 잘못은 눈감아 주는 습관이 이 지경을 만든 것이다.





내가 바뀐 결정적인 계기는 13년 전 정영신씨를 만나 인터넷에 접하며 부터다.
몰랐던 정보도 많이 접했지만, 인터넷에 글을 올리기 시작하며 작심한 것이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 개입된 일이라도 잘못된 것은 기어히 바로 잡아야겠다고...






그러니 주변에 있는 가까운 분들이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친한 사람일수록 사정을 많이 알 수밖에 없으니, 어쩌랴!
잘 못된 일에 내편과 남의 편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니 처음엔 정영신씨가 욕을 많이 먹었다.
심지어 뒤에서 조종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요즘 또 다시 벌집 쑤셔놓은 듯 인사동에 말들이 많다.
바로 ‘지난 11월에 열린 ’쓴 맛이 사는 맛‘전 문제점을 나발 불어 그렇다.
그 전시는 인사동 터줏대감이신 채현국 선생께서 총대 맨 일이고,
3-40년 동안 잘 알고 지내 온 동생 같은 사람이 추진한 일이다.






자선의 간판을 달고 장사하는 것도 용납할 수 없으나,
이 건 70명의 참여 작가를 비롯한 많은 인사동 사람들 이름을 내건 전시다.
그 결산을 투명하게 밝히라는 것이 뭐가 잘 못되었는가?
정작, 인사동을 떠도는 수많은 뒷말을 당사자만 모르는 것 같았다.






지난 9일 오후6시, 채현국선생께서 마련한 만찬이 ‘시가연’에서 있었다.
노광래씨의 연락으로 갔는데, 채현국, 임재경, 이재하, 서정춘, 구중관, 이두엽,
공윤희, 하홍만, 정고암, 이인섭, 서길헌, 이만주, 이회종, 노광래, 편근희 씨등
열여덟 명이 나왔다. '


전시에 대한 결산을 하고, 마무리하는 자리로 알고 갔으나,
술 마시며 노는 자리였다.






채현국선생께서 노광래씨를 술 심부름 시켜놓고, 화를내며 고함을 질렀다.
‘왜 광래를 힘들게 하냐?’며 욕설을 퍼 붓기에
‘선생님께서 그렇게 만들지 않았냐?’고 대들었다.
지인들 앞에서 망신주려 작심한 것 같았는데,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바른 말하는 놈은 욕하고, 잘못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는...






이거 짜고 치는 고스톱인가?

심기를 불편하게 한 인간적인 도리에서 큰 절 올리며 사죄했지만,
결코, 잘 못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술이 취해 말씀 드렸다.
“옛날의 선생님이 그립다,”고...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0일, '아라아트'에서 열리는 강찬모화백의 “무엇이 우리를 사랑하게하는가”

전시 뒤풀이가 인사동 ‘백련’에서 시작되어 ‘유목민’까지 이어졌다.

제목을 보고 누군가는 돈이 사랑하게 한다 말하지만, 난 자연이 사랑하게 한다고 믿는다.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 좋은 그림들을 보았으니, 얼마나 좋던지 열심히 마셨다.


그 날, 뒤풀이에서 술의 힘을 빌어, 쪽팔리지만 강찬모 화백에게 한 마디 했다.
올 해부터 호구지책으로 시작한 ‘문화알림방’의 다섯 번째 고객이니 돈을 내라고 한 것이다.

열심히 사진 찍어 포스팅하는 대가로 십 만원을 보시해야 된다며 손을 내밀었다.

사실, 사진 찍는 일도 일이지만, 돌아와 일기 쓰며 사진들을 정리하다보면 온 종일 걸리는데,

대개가 모르는 척, 돈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후배 강찬모에겐 그냥 해 줄 수도 있지만, 공짜라는 선례를 더 이상 만들지 않기 위해서다.

보름 전에는 친구 정기범씨 부인 이정숙여사의 퇴임기념 전람회도 찍었지만,

포스팅을 못하는 게, 바로 그 때문이라 했다.

그 자리에는 민영선생을 비롯하여 조해인, 조준영, 정영신, 박인식, 공윤희, 이종승, 김곤선, 신승준, 이명희,

김명성, 신현수, 한귀남, 홍성식, 신용철, 고 헌씨 등 많은 사람들이 보증인으로 나서겠다기에 잔득 고무되었다.


































'백련'에서 너무 많이 퍼 마셔, 인사동을 한 바퀴 돌아야 했다.

마침 낙원동 점집에 주인이 없어 잠시 앉았는데, 한 늙은이가 들어와 점을 봐 달라는 것이었다.

점쟁이가 술이 취했다고 말했으나, 괜찮다는 것이다.

그러면 복채 만원부터 먼저 내 놓으랬더니, 순순히 내 놓았다.

정색을 하며, 그를 유심히 쳐다봤다.
뭔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지레짐작으로 한 마디 던졌다. “자식들이 속 많이 썪이겠군요”랬더니 그의 눈이 동그라진 것이다.
정월 대보름만 지나면, 액운이 다 풀린다며 구라를 풀었더니, 고맙다는 것이다.

그때서야 이실직고했다. 사실 나는 점쟁이도 아니고, 후배 점집을 잠깐 지키는 중이라며
만원을 돌려주었더니, 아니라는 것이다.

그 액운을 복채에 던졌으니, 그 걸 가져가면 말짱 도루묵이 된다기에 뜻밖의 횡재를 한 것이다.

사실 신용불량자 된지 오래라 지갑에 천원짜리 지폐 한 장 없었는데, 얼마나 고맙던지...















신 바람나, 두 번째 뒤풀이집 ‘유목민’으로 휘파람 불며, 달려갔다.
그 곳에는 애편네 정영신을 비롯해, 인사동 밤안개 이두엽씨와 시 쓰는 조준영, 공병대장 공윤희씨

뫼비우스 관장 김곤선씨 등 여러 사람들이 술에 취해 횡설수설 했는데,

KBS PD출신인 이두엽씨가 열심히 구라를 풀고 있었다.

어느 후배PD가 인사동에 대한 다큐를 만든다기에, 인사동 터줏대감 민병산선생에 주목하라며 자문했다는 것이다.


그러다 갑자기 정치 이야기가 나오니, 옆자리에 있던 ‘민주주의 국민행동 대변인인 최병현씨가 나타났다.
나도 아들따라 ‘정의당’ 당원이 되었지만, 정치 이야기 나오니 속 뒤집히더라.

오늘은 복채까지 받았으니 택시타고 가려는데, 애편네 등살에 지하철에 실려야 했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평소에는 한참 기다려야 했던 병원이나 식당들이 모두 비어 있었다.

피서 떠난 4일의 서울은 평양 거리인양 낮 설었다.

 

장경호씨와의 약속으로 ‘한국현대형상전’이 열리는 ‘팔레드 서울’로 갔다.

그 곳에도 관객은 있을 리 없었다. 단 한 사람 박 건씨를 만났을 뿐이다.

장경호씨는 전시 마무리가 가까워와서야 도록을 만들겠다며 작품촬영을 부탁했다.

전시 못 본 분들을 위한 배려인 듯싶었다.

 

촬영을 끝내고 인사동 ‘무다헌’으로 넘어왔다.

주인만 앉은 가게에서 메뉴에도 없는 막걸리와 소주를 시켜놓고, 꼬이는 일들을 한탄했다.

술을 마시다 장경호씨가 말을 꺼냈다.

여지 것 공부하고 체득해 온 자신만의 미술론을 하나 둘 발표해야겠단다.

 

그리고 22일에는 신학철, 최석태, 강고운씨와 함께 고 김진석 화백의 생가에 들리기로 약속했다.

강고운시인의 남편이며 신학철화백 친구였던 김진석씨의 유작전을 위한 준비다.

그 핑게로 마음 맞는 사람들 끼리 어울려 여행할 생각하니 기분이 들떴다.

뒤늦게야 이두엽씨를 비롯한 여러 명의 손님들이 들어닥쳤다.

 

장경호씨의 한계 주량 막걸리 두 병을 넘기자 강고운씨가 바짝 긴장한다.

행여 다른 손님들에게 실수할까 걱정하기에 그만 퇴청하자며 꼬드겼다.

괜찮다고 퍼져 앉은 그를 두고 나오기가 편치 않았지만 나와야 했다.

재미없이 혼자 있어야 그도 일어나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가 발표하려는 미술론이 미술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면 좋겠다.

 

사진,글 / 조문호

 


방송프로듀서에서 신문사 사장까지 지낸 문화게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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