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길의 다섯 번째 시간지우기 편린사진전이 인사동 무우수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이와 함께 조해인이 쓰고 김수길이 찍은 에세이 신화가 된 청소부출판기념회도 유목민에서 열렸다.

 

지난 주말 정동지와 김수길씨 사진전 보러 인사동에 갔더니,

전시작가와 조준영시인이 안국역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김수길의 편린사진전이 열리는 무우수갤러리로 가는 길에 봉화에서 올라 온 신동여 화백을 만나기도 했다.

 

올 일월에 개관한 무우수갤러리는 처음 갔는데,

인사동길 19-2에 신축한 와담빌딩 3-4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김수길의 편린전은 여러 장 필름이 겹쳐진 이미지로, 마치 세월의 흔적처럼 희미한 기억을 불러냈다.

 

10년이 넘도록 한가지 작업에 몰입해 온 김수길의 '시간 지우기'전은

사실적 기록성보다 내면적이고 미학적 관점에 주안점을 두었다.

 

김수길은 사진 이전에 음악, 영화,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진 작가였다.

미학적 관점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잃어버린 기억을 찾기 위해 같은 장소를 시기별로 찾아다니며, 변해가는 공간의 잔상을 기록해 왔다.

 

그의 작업은 변해가는 도시의 단면이 켜켜이 쌓여, 암울한 시대적 잔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기존의 사진 형식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접근으로 사진 표현의 무한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이번 전시에는 천에다 출력하여 깃발처럼 걸거나, 손수건으로 만들기도 했는데,

기존 천에 새겨진 무늬가, 프린트된 이미지와 어울리는 또 다른 시도를 감행했다.

장식성이나 실용성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다.

 

기억하기 위해 시간을 지운다는 김수길의 편린전은 113일부터 14일까지 '무우수갤러리'에서 열린다.

 

전시장에서 나와 신화가 된 청소부술판기념회가 열리는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겼다.

술집은 이른 시간부터 지인들이 모여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조준영 시인이 사 온 축하 떡에 촛불을 밝히기도 하고

연극배우 이명희씨의 에세이 낭독이 이어지는 등 출판기념회 면모도 갖추었다.

 

행복 에세이란 부제를 단 신화가 된 청소부장애를 안고 태어난 소녀 이야기였다.

청소라는 일상적이고도 사소한 일을 하면서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신화를 일구어내는 내용이었다.

 

작가는 사소한 일을 할 때도, 자신이 가진 100%를 아낌없이 밀어 넣으면,

그 하잖은 일은, 스스로 축복하는 에너지로 변환된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사막과 같이 메마른 우리의 내면 한가운데로

시냇물을 졸졸거리며 흘러가게 하는 동력이 된다.“며 글을 마무리했다.

 

버리커뮤니케이션에서 출판한 이 책은 136면에 1.5000원이다.

 

이날 술판기념회에 참석한 분으로는 주인공인 조해인 시인과 김수길 사진가를 비롯하여

조준영, 신동여, 이명희, 전강호, 김명성, 장경호, 송일봉, 정복수, 최석태, 김신용, 최유진

이만주, 김발렌티노, 노현덕, 안원규, 송상욱, 노광래, 이인섭씨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에서 김신용시인은 일 년만의 외출이었다.

두문불출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요즘은 사진찍어 시를 쓰는 디카 시에 집중한다고 했다.

사진 제판에 의한 제작비 부담으로 출판사에서 반기지 않는다는 고충도 털어놓았다.

비염이 있다며, 술 한잔 마시지 않고 외곽으로 떠도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작품과 명예나 돈도 좋지만, 건강이 최고다.

모든 것이 죽고 나면 아무런 쓸모없는 게 아니던가?

어떻게 하면 재미있고 즐겁게 살까?를 고민할 나이다.

작업도 일처럼 하지 말고 놀이로 즐기자.

다들 건강이나 잘 지키시길 바랍니다.

 

사진, / 조문호

 

 

 

! 이게 얼마 만이더냐?

그놈의 코로나에 발목 잡혀 못 만난 지가 2년을 훌쩍 넘었다.

조준영 시인의 사발통문으로 모처럼 인사동 골통들이 다 모인 것이다.

 

인사동 풍류를 사랑하는 예술가 패거리가 생겨난 지도 오랜 세월이 흘렀다.

7-80년대 목순옥여사가 운영하는 귀천을 아지트 삼아,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선생을 비롯하여

천상병, 박이엽, 강 민, 신경림, 황명걸, 구중서, 민영 시인 등 많은 문인들이 인사동 풍류를 이끌었다.

 

그러나 세월 따라 한  분 두 분 세상을 떠나자 후배들이 그 뒤를 이어받았다.

지금은 소식 끊긴 구중관, 배평모를 비롯하여 김종구, 강용대, 최정자, 이청운,

강찬모, 조해인, 최울가, 박광호, 전강호, 김신용, 석파, 적음, 김용문씨 등 많은 풍류객이

만들어 낸 사연들이 소설 한 권은 족히 될것이다.

그중에는 김명성씨가 있었다.

 

지금은 잘 나가는 화가도 더러 있으나, 예전엔 다들 개털이라 술값 낼 물주가 필요했다.

김명성씨가 창예헌이란 모임을 만들어 인사동은 물론,

지방까지 예술축제를 개최하여 지역 예술가들을 규합했다.

그러나 김명성씨가 인사동에 세운 아라아트건물이 빚더미에 올라

중국 자본에 넘어가자 창예헌도 힘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는 조준영 시인이 주선하여 유목민에서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져왔는데,

인원은 십여 명 밖애 모이지 않았지만, 터줏대감들의 유지는 이어 온 셈이다.

그것도 형식상으로 일 인당 만 원을 거두지만,

주태백이 술값으로는 턱없이 부족하여 항상 제 주머니를 털어 온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오랜만에 모임을 규합하기 위해 봉화 사는 신동여화백을 불러 온 것이다.

신화백은 인사동에서 전시했던 4년 전에 보고 처음이니, 다들 얼마나 반갑겠나?

, 신동여씨만 생각하면 돌아가신 전우익선생이 생각난다.

 

신경림시인의 간고등어시에도 소개되었지만,

봉화에서 인사동으로 올라오시면 항상 안동 간고등어를 들고 오셨다.

신화백도 같은 봉화 살지만, 삶의 철학이 비슷하다.

신화백 역시 예전에는 간고등어 대신 약초를 갖다주었다.

 

전우익선생 말씀대로 재미있게 사는게 최고다.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그럴려면 저어기 무인도에나 가서 살어.

별로 재미없는 세상 재미나게 살아가야제. 안 그려?

비잉신처럼 굴지말고 학실히 살다 가. 알았냐?”

 

인사동 모임은 지난 금요일 오후 여섯 시로  잡혔는데,

전시 리뷰 하나 전송하고 나가려다 시간이 지체되어 버렸다.

인사동에 도착하니 삼십 분쯤 늦었는데, 이미 유목민벽치기 골목은 대목장이었다.

 

봉화에서 올라온 신동여씨를 비롯하여 조준영, 임태종, 조해인, 이명희, 김상현,

장경호, 전강호, 정복수, 노광래, 유근오, 김수길, 김 구, 임경일, 정영신, 노박사,

이인섭, 최유진, 김민경, 전활철씨 등 이 십여 명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는데,

양산에 있는 공윤희씨도 와 있었다.

 

반갑다는 인사대신 카메라부터 들이댔는데, 찍고 빠느라 정신없었다.

여기서 한 잔 저기서 한 잔 걸치다 보니, 가랑비에 옷 젖듯 슬슬 취했다.

술맛 좀 날 만 하자, 일찍 마신 술꾼들은 도망갈 준비부터 했다.

 

한 사람 두 사람 사라지니, 바톤 받듯이 임헌갑, 서인형, 류연복, 최석태, 안원규,

발렌티노 김이 뒤를 이었는데, 한때 인사동 밤안개로 불린 이두엽까지 나타났다.

아직 인사동 밤안개가 나올 시간은 아닌데...

 

기분이 좋으니, 시간은 더 빨리 갔다.

요새 한꺼번에 반가운 사람들 만나는 날이 자주 생긴다.

그제는 김문호씨의 '풍리진경' 사진전이 인사동에서 열려,

부산에서 이광수교수까지 올라 와 코가 비틀어지도록 마신 것이다.

 

갈 시간이 되었다는 정동지 눈치에 먼저 선수를 쳤다.

나 오늘 신 화백하고 빨다 잘 테니, 먼저 들어가

술 취하면 간이 배 밖에 나온다는 말이 딱 맞다.

모셔드려야 할 밤늦은 시간에, 어찌 동지의 서약을 헌신짝처럼 내버릴 수 있단 말인가?

 

늦게 온 술꾼들마저 사라지는 걸 보니, 이미 파장이었다.

평소 문 닫을 때 까지 마신다는 장경호씨도 보이지 않았다.

신화백까지 사라져 활철씨에게 물어보니, 너무 취해 여관에 갔단다.

활철씨 안내로 '한흥장'을 찾아가니, 이미 신화백은 뻗어 있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신화백이 먼저 일어나 있었다.

인사동 거리는 사람 청소를 했는지, 사람이라고는 한 사람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나저나, 속이 쓰려 죽을 지경이나 인사동에 해장할 곳이 마땅찮다.

아침 식사되는 곳은 이문설렁탕뿐이라 그곳을 찾아간 것이다.

반주도 없이 급하게 설렁탕을 퍼 넣는데, 전활철씨가 해장국 끓어 놓았다는 기별을 했다.

 

술이 깨기도 전에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시원한 국물이라 소주가 술술 넘어가 단숨에 한라산 세 병을 까고서야 일어섰다.

활철씨는 영천시장에 장 보러 가는 동안 녹번동 정동지 집으로 쳐들어간 것이다.

전화를 받지 않는 게 마음에 걸렸으나, 간 크게 택시를 잡아탔다.

 

모처럼 시골 영감이 상경했는데, '대마불사주' 맛이라도 좀 봐야 하지 않겠나?

이미 해장술에  제정신이 아니라, 활철씨가 찔러 준 신사임당 두 장을 꺼내 놓았다.

외상이 아니라는 투로 주모에게 대마불사주와 안주를 주문한 것이다.

 

대마 나물과 대마불사주가 나왔는데, 시골 영감이 너무 빨리 마시는 것 같았다.

불광동 사는 장춘씨까지 불러냈으나, 이미 정신이 풀려버렸다.

많지도 않은 대마불사주 씨를 말리고서야 일어섰다.

 

술이 취해 몸을 못 가누는 신화백을 부축하여 어렵사리 택시를 잡았는데,

장춘씨가 술 취한 신화백에게 얼마나 잔소리를 해대는지, 듣는 내가 짜증 났다.

처녀로 늙었기에 망정이지, 시집이라도 갔더라면 서방 잡을 것 같았다.

인사동 벽치기 골목 입구에서 내려 유목민으로 돌아오니,

활철씨도 장을 보아 영업준비를 마무리했더라.

 

장춘씨의 잔소리를 안주로 다시 막걸리를 마시기 시작했는데,

옆에 있던 노박사가 안주하라며 시원한 팥빙수 한 그릇을 갖다주네.

입가심으로 마신 막걸리 두 병에 신화백은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활철씨가 여관방을 잡아두었다기에, 그를 부축하느라 술이 깰 지경이었다.

몸에 힘이 풀려버리니, 산송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렵사리 2층 방까지 데려다주고 나오니, 장춘씨도 가버렸다.

그만 막 내리라는 신호였다.

그나저나, 인사동에 방 잡아 놓고 술 마신 지가 얼마 만이더냐?

마지막일지도 모를 오래된 일이라, 소중한 추억으로 접어 넣었다.

신화백이 자리에 눕자, 긴장이 풀어져 다시 취기가 올랐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뻗어버렸다.

한 밤중에 깨어나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고야 정신을 차렸는데, 마음에 걸리는 일이 하나 생각났다.

뉴스 아트에 보내준 전시리뷰를 페북에 걸어놓고 나갔는데, 시간이 없어 교정을 못 본 것이다.

 

컴퓨터를 열어 찾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필요 없는 글이 있었다.

마치 취중에 올린 글 같은 상스러운 표현인데, 이미 볼 사람은 다 봐 버렸다.

 댓글까지 달린 전시리뷰를 내리고, 수정한 인사동 사람들블로그 글을 다시 페북에 링크한 것이다.

 

카메라에 든 이미지를 꺼내 정리하며, 불 꺼진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있으니

'유목민'의 전활철씨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닭죽을 끓여 놓았는데, 신화백이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신화백은 일찍 봉화로 내려 간 것 같았다.

만나면 다시 술을 마시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니, 단단히 마음먹은 것 같다.

 

그래! 잘 내려가시게나.

당신이 또 하나의 인사동 추억을 남겨주었구려!

 

선배들에게 물려받은 인사동 풍류, 불 꺼진 창을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다 사라지고 변해버린 삭막한 인사동,

뒷골목 정마저 사라진다면 전우익 선생 말처럼 무슨 재민겨?”

다들 조준영 시인이 부여잡은 인사동 끈을 모두 놓지 맙시다.

 

이상으로 ‘신동여 선생 상경기를 마무리합니다.

 

사진, / 조문호

 

 




정선에선 바삐 일만 해야 하는 건가?
모처럼 한적한 시간을 보내니, 상념에 잠 못 이룬다.
눈을 떠보니 아직 새벽 세시.
어두워 일도 못하는 시간에 뭘 할까?
갑자기 적음의 시 ‘새벽녘’이 생각난다.
책꽂이에서 시집을 찾아보았다.






“잠 안 와 뒤척이는
새벽녘 그만
불을 켜고 일어나 가만히
앉아 있다
책을 읽을까(아니),
차나 한 잔 (아니),

木石처럼 앉아 있는
두 빰에
웬 일인가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





갑자기 저승 간 적음이 보고 싶다.
외로움을 낄낄거림으로 위장한 땡초가 보고 싶다.
아직 ‘월간 빠’는 유효한 건가?

발문은 표성흠씨가, 그림은 신동여씨가, 사진은 내가 찍었다.










아들의 결혼을 앞두고 이런 저런 관습에 따른 저항에 부딪힌다.

가난한 형편에 엄청난 돈을 예식비용에 쏟아 붙는 것도 그렇지만,

무슨 놈의 쓸데없는 격식은 그리도 많은지...



 


결혼식을 하루 앞둔 지난 24일 동네 목욕탕을 찾았다.

더러워진 몸의 때보다 마음의 때를 벗겨내기 위해서다.

탕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 이런 저런 불편한 마음을 닦아내며, 아들의 행복을 축원했다.

그 불편한 마음들은 모두 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좋은 말도 잘 못 전달되면 욕이 될 수 있고, 별 것 아닌 말도 오해하면 독이될 수 있는 것이다.

더러는 선입견이나 가치관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로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나는 말보다 인터넷에 올린 글이 불편함을 유발시킬 때가 더 많다.

잘못된 일을 알게 되면 아무리 가까워도 지적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가 잘못한 일도 감추지 않아 가족으로 부터 원망을 들을 때도 있다.



 


그리고 종교는 잡종이다. 기독교에서 천주교, 불교를 두루 다녔기 때문이다.

지금은 토속적인 무속을 좋아하나, 사실은 무신론자에 가깝다.

불쑥 종교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바깥사돈 남선우씨와 친구 배평모씨,

그리고 내가 천주교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사돈이 된 남선우씨는 16년 전에 우연히 한 번 만난 적 있는 분인데,

상견례 자리에서 혹시 배평모씨를 모르냐?“고 물어 온 것이다.

자신이 배평모씨의 천주교 대부라는 것이다.

배평모씨는 나의 친구이기도 하지만, 한 때 내 대부 역할을 한 적이 있어, 

그 별난 인연에 놀랐다.



 


배평모씨에게 전화해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연락처를 몰라 끊어진 사돈과의 관계가 다시 복원된 것 같았다.

오지랖 넓은 친구라 걱정은 되었으나,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나에게 전화해 블로그에 올린 글을 나무라기 시작했다.

자식 놈이 속도위반해 손자 가졌다는 이야기가 어떻게 자랑이지 욕일 수 있나?

싸가지 없는 말버릇에 더 울화가 치밀어 니 걱정이나 하라”는 말이 튀어 나왔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결혼식에 참석한 다음 날,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안부 전화로 알고 잘 내려갔냐?‘며 인사부터 했는데다시 신경 건드리는 이야기를 꺼냈다.

너의 사돈과 통화를 했는데..“라는 말에 갑자기 불쾌했던 그 날이 생각났다.

데없이 사돈에게 전화질 해 말 물어 나르지 말라며 끊어 버렸다.



 


또 다른 일은 정영신씨에게 일어 난 이야기다.

그동안 햇님이를 친자식처럼 여겨 물심양면으로 애를 많이 써왔다.

결혼식에도 나가서 인사동 축하객을 맞기로 약속했는데,

당일엔 전화를 꺼 놓아 연락이 닿지 않았다. 많은 지인들이 찾았지만 감감소식이었.



 


결국 결혼식이 끝난 밤 늦게서야 만났는데, 그 사연을 들으니 귀가 찼다.

어느 지인의 전화질에 마음이 상해 하루 종일 돌아 다니며 방황했다는 것이다.

“네무슨 자격으로 예식장에 가냐?”며 가서는 안 될 자리라고 충동질했다는 것이다.

당사자인 햇님이 친모도 니 색시는 안 왔냐?”며 걱정했는데 말이다.

사람 관계란 만들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데, 다들 그렇게도 할 일이 없나?

왜 쓸데없이 남의 일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참견해 불편하게 하는지 모르겠다.



 


그 뿐 아니다. 혼주가 넥타이를 매지 않으면 안 되고, 사진도 찍으면 안 된단다.

별의 별 관습이 나를 다 불편하게 했다. 우리가 언제부터 양복을 입기 시작했으며,

사진찍는 것은 반가운 사람 만났을 때 하는 나의 인사법이다.

사람 찍는 사진쟁이가 반가운 사람들을 만났는데, 어떻게 그냥 둘 수 있겠는가?

길들어 온 민족성 때문인지, 관습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난리 나는 줄 안다.

자기에게 조그만 덕이 되면 불법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



 


지난 24일 밤은 결혼식 전야제를 하자는데, 술 마실 핑계도 다양했다.


울산에서 오세필씨가 올라오기도 했지만, 김명성, 최백호, 이상훈씨도 인사동에 나와 있었다.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부터 찾았으나, 태풍소식 때문인지 가는 곳마다 문이 닫혀 있었다.

여자만부산식당을 거쳐 결국 '툇마루'에 자리 잡은 것이다.



 


김명성, 최백호씨는 결혼식 날 선약이 있어 축의금만 보냈단다.

걱정하지 말라며 안심시키려 했던 말이지만, 예의가 아닌 말을 뱉고 말았다.

한 사람 식대가 오 만원씩 들어가니, 안 오면 더 좋아





'유담' 커피집으로 자리를 옮겼더니, ‘유목민에 장경호, 김상현, 이한성씨도 있었다.

지나가던 이정황감독까지 합세하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화제작에 관심 많은 최백호씨가 은근히 걱정되더라.



 


결혼식을 끝낸 그 이튿날은 유목민에서 착복식을 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불편한 양복을 입어 착복식이라 이름 붙였지만,

지방에서 올라 온 벗들과 헤어지기 아쉬워 만든 핑계거리였다.

옛날 시골에서 결혼하면 이웃이나 친구들이 어울려 하루 종일 놀았는데,

요즘의 결혼 풍속도는 너무 야박해 싫었던 것도 사실이다.





먼저 집부터 들려 편치 않은 양복부터 벗어버렸다. 그리고 불편한 틀니도 뽑아버렸다.

결혼식 때문에 틀니를 끼웠더니, 음식 맛도 모르겠고 발음까지 정확하지 않았다.

마치 광대처럼 차려입은 불편한 것들을 모조리 해체하니 속이 후련했다.



 


유목민에는 신동여씨를 비롯하여 조준영, 김용문, 박상희, 전강호, 임태종,

유진오, 이명희, 전활철, 이정환, 성유나씨가 있었고,

툇마루에는 장경호, 헨리윤, 김진두, 배성일, 신상문씨가 자리 잡고 있었다.

유목민으로 합류한 뒤에는 이인섭, 신명덕, 한상진, 공윤희씨도 나타났다.



 


그런데 착복식 한다며 큰소리치고 나갔는데, 지갑에 돈이 십만 원 밖에 없었다.

정영신씨를 만나지 못해 생긴 일로, 돈도 없으면서 혼자 큰 소리 친 셈이다.

처음엔 임태종씨가 계산하고, 나중에는 조준영씨가 부족분을 메웠으나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어쨌든 자식 핑계로 즐겁게 놀긴 놀았는데, 너무 취해 버스 종점까지 가버렸다.


어차피 내 인생은 좌충우돌 연착이다.

 

사진, / 조문호

































 





한 이십년이나 되었을까?
봉화 수식에서 있었던 일이다.
영주에서 신동여씨 전시를 끝내고,
봉화 수식으로 가다 차가 개울에 처박혔다.

막걸리와 전 부쳐 먹을 밀가루도 
차에 실은 것으로 기억된다.
차에는 저 세상으로 떠난 적음스님을 비롯하여,
도호스님, 신동여, 장 춘씨가 탔다.

그런데, 바탈진 시골길을 달리다,
그만 차가 개울에 전복해 버린 것이다.
죽었구나 싶었으나 정신을 차려보니,
안전밸트에 묶여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차에서 뿔뿔 기어나가 차안을 밝혀보니 가관이었다.
밀가루를 뒤집어 쓴 적음스님은 눈을 깜빡이며
“아이고! 중 살려~“라며 농담하고 있었고,
도호스님은 머리가 이상하다며 헛소리 해댔다.

사람은 별 탈 없는 사고인 것 같았으나,
갤로퍼는 완전 개 박살난 것이다.
그것도 새 차 뽑은 지 몇 달도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차에서 내려 짐만 챙겨들고 작업실로 갔다. 

패잔병 꼴로 막걸리만 퍼 마셨는데,
도호스님은 계속 헛소리를 해댔고,

적음스님은 빠도 못하게 됐다며 너스레를 떨어댔다.

웃을려는 농담인줄 알았으나,
이튿날에서야 적음스님 팔 부러진 것을 알게 되었다.

아침 녘에 보험회사에 연락하고
차가 뒤집어진 현장을 확인하러 가는 중에,
사진 속의, 등교하는 두 소녀를 만난 것이다.
옷이나 머리가 엉망진창인 낯선 사내가 이상했던지,
연신 돌아보며 웃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메고 있던 카메라로 한 컷 찍었는데,
그 사진이 뒤늦게 책갈피에서 나온 것이다.
언젠가 전해 주려 프린트해 둔 모양인데,
그만 숱한 세월이 지나고 말았다.

지금은 어른이 되어 시집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녀에게는 좋은 추억이 될것 같아,
신동여 화백께 한 번 물어봐야겠다.
아마 가까운 동네에 살았으니, 아는지도 모르겠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일요일은 영주 사는 신동여 화백을 만나기로 했다.

80년대 중반 인사동을 주름잡던 실비대학 멤버가 아니던가.
그림, 시, 도예를 아우르는 인사동 풍류객이었다.






그 뒤 고향인 봉화로 내려가서도 틈틈이 올라왔고,
지방에서 열리는 ‘창예헌’ 모임에도 왔으니, 얼굴 잊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친하게 지내던 적음선사와 풍류객 이종문씨가 세상을 떠나며부터
두문불출하여 더 이상 만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페북에 올라오는 얼굴사진이나 간간히 보았을 뿐, 그의 근황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정선에서 토끼와 대마초의 전쟁을 치룰 무렵, 인사동에 나타난 것이다.
전시 한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냈으나,
정선에서는 인터넷도 안 되고, 전화마저 지니지 않아 연락이 되지 않았다.
메시지를 확인한 지난 토요일에서야 그와 통화 할 수 있었는데,
내일 오후에 영주로 내려가야 한다는 거다.

그래서 일요일 아침, 해방촌에 있는 ‘고기 방앗간’에서 만난 김상현씨와

전활철씨에게 알려, 시인 조준영씨와 김명성씨까지 연락 된 것이다.






인사동에 나가보니,‘나날이 마켓’이란 프리마켓에 참여하고 있었다.


인사동에 사흘이 멀다 하고 들락거리지만,
이 큰 전시장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귀가 막혔다.
남쪽보다 북쪽에서 놀다보니, 눈 뜬 장님이나 마찬가지였다.






‘인사1길 컬쳐스페이스’에서 열리는 ‘나날이 마켓’은 감성이 꿈틀거리는 프리마켓이었다.
천연염색, 붓, 명차, 한복, 막사발, 옻그릇, 가방과 모자에 이르기까지
수공예, 요리, 전통공예, 리빙, 패션, 소품 등 생산자가 직접 참여하는 아티스트 장터였다. 
서랍 속의 예술이 대중의 손에 쥐어지는 의미 있는 기획전이었다.






전시장 입구에서 만난 신동여씨의 모습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더라.
수염에 가렸을까? 선한 미소에 가렸을가? 세상 살아 온 나이테는 다 어디 갔을까?


그는 돈을 못 벌어 그렇지,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천하호인이다.






전활철, 김상현씨와 먼저 어울렸는데, 너무 반가워 대낮부터 술잔을 들었다.
전시장에서 시작된 술자리는 ‘탑골공원’ 전주집으로 이어졌다.
김명성씨와 조준영씨 까지 나타나 인사동 골통 한 패거리가 뭉친 것이다.






김명성시인은 신화백이 옛날에 했던 말은 재방송했다.
“난 손가락하나 까딱하지 않고 살고 싶다”
이게 생불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차로 들린 ‘유목민’에서는 문학평론가 구중서선생을 만나 뵙기도 했다.
그러나 숨이 가빠오기 시작해 더 이상 술을 마실 수가 없었다.


3차는 신사동 ‘뮤아트’로 간다지만, 난 쪽방으로 돌아와야 했다.
신동여화백은 결국 그 날 가지 못하고, ‘뮤아트’에 퍼졌다고 한다.






이제 조문호 인생도 끝났다.

예전의 그 객기는 다 어디 가고, 요 모양 요 꼴이 되었을까?
십팔 번도 ‘봄날은 간다’가 아니라 “봄날은 갔다”로 바꿔야겠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일요일엔 영주의 신동여 화백이 인사동에 나타났다.
‘인사1길’이란 대형 전시공간에서 열리는 ‘나날이 마켓’이란 프리마켓에 참여하고 있었다.

인사동에 사흘이 멀다 하고 들락거리지만, 그 큰 전시장을 모르고 있었다는 게 귀가 막혔다.

남인사보다 주로 북인사 방면에서 놀다보니, 눈 뜬 장님이나 마찬가지였다.






‘인사1길’전시장 안쪽에는 ‘행복이 가득한집’에서 기획하고 운영하는 밥집 ‘행복한 상’도 있고,

오래전 ‘고갈비’로 인사동 주객들의 사랑을 받았던 주막이 ‘이갈비’로 이름만 바뀐 채 영업하고 있다.






그 날은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대법륜사 불자들의 인사동 퍼레이드도 있었고,

‘남인사마당’에서는 전통 춤과 소리를 들려주는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내일 셋째수요일은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나는 날이 아니던가.
시간 나시는 분은 인사동에 들리어 대포나 한 잔 합시다.

인사동에서 열리는 볼만한 전시로는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이 선보이는 ‘나날이마켓’전과

신동여 화백이 내놓은 소요산방 도자전을 비롯하여, ‘선화랑’의 정우범전,

‘인사아트센터’ 임근우전, ‘통인옥션’의 권여현전이 볼만하다.





그리고 하루 전에 끝나버린 ‘인사아트프라자’의 김주대 문인화전과

‘M화랑’에서 열린 임경숙씨의 시집출판기념전을 놓쳐 아쉬웠다.

공교로운 것은 두 전시를 모르고 있었다는 것과, 둘다 시인이며 화가라는 점이다.

뭐에 씌여 있었는지 모르지만, 요즘 제정신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사진,글 / 조문호





임경숙씨의 아홉 번째 전시와 함께 출판한 

"그리움의 수혈 거부합니다"란 시화집에 실린 시 한편을 소개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가의 노래"


임경숙


나는 예술가 예술가 지망생이네

램프 아래 상념은 살랑거리는 수선화 무리들이고

불꽃과 함께 이 생각들 얼마나 많이 재 되어 사위었던고


나는 예술가, 예술가를 꿈꾸는 말썽꾸러기이네

물감만 보면 뿌리고 싶어

미끈한 등허리 이건 ,흰 외이셔츠건, 철도길 이건 간에


나는 예술가, 예술, 개술, 공술 하다가 병들었다네

해질 녘이면 황혼을 따라 산등성이를 떠돌다 길을 잃고

어둔 밤이면 주막에서 취하는 것이 좋아 술로써 만신창이가 되네


나는 에술가, 쥐뿔도 없는 가난뱅이네

주머니를 털어 마셔도 마셔도 줄지 않는 꿈의 호수를 샀는데

꿈은 별 따라 호수를 떠나고 호수는 텅빈 구렁텅이네


나는 에술가, 예술가의 기질로 예민하게 산다네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에도 온몸에 솜털이 나고

붉게 물든 단풍 한닢 떨어지기만 해도 왼 종일 외로워한다네……































 

 

 

나에게 다섯 번째 애마 코란도 밴을 기어이 떠나보내고 말았다.
3년 전 350만원에 사들인 애첩인데, 그동안 병원비만 몸값의 배가 들었다.
고속도로에서 애 먹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건만, 그래도 떠나보내고 나니 서운하다.

지난 6일 정영신씨의 장터사진전 준비하러 떠나는 춘천으로 따라 나섰다.
변속이 되지 않아 혼난 경험이 있는 정영신씨가 불안해했으나,
그 문제는 스스로 해결 방법을 찾았다며 안심시켰다.
크러치가 밟혀 올라오지 않으면 발등으로 끌어 올리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춘천 가는 국도의 가평 무렵에 이르러 차에서 타는 냄새가 났다.
그러더니 얼마 가지 못해 시동이 꺼져 버렸다.
다시 시동을 걸어 출발하기를 몇 차례 하였으나, 결국 퍼져 버렸다.
약속시간이 늦어버린 정영신씨는 남의 차 구걸해 먼저 보내고,
멈춰선 차를 견인시켜 갔더니, 엔진헤드를 바꾼다며 수리비 80만원을 내란다,

장례 날만 기다리는 차에 80만원이나 쳐 바를 수 없었다.
디젤 노후차 폐차에 지급하는 환경지원금도 움직이는 차에 한해서란다,
뒤늦게 돌아 온 물주 정영신씨와 의논해 울며 겨자 먹기로
고물 값 40만원 받고 춘천폐차장에 넘겨 버렸다.
차에 실린 짐 꾸러미를 챙겨 돌아오는 마음은 찹찹했다.
그동안 속을 많이 섞였지만, 전국 장터를 돌아다니며 정들었던 차다.
같이 끝내자고 했으나 결국 먼저 가버렸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애마에 얽힌 추억이 너무 많다.
제일 처음 애마를 만난 건 1982년도 였다.
지금은 세상을 떠나버린 사우 윤재성씨의 '포니2'를 100만원에 산 것이 시작이다.
그 때는 드라이브에 재미를 느낀 초짜라 아무나 차를 태워주던 시기였다,

어느 날 인사동에서 모령의 여인을 만나 차 한 잔 하는 자리에서 
갑자기 그 녀가 겨울바다가 보고 싶다고 했다.
‘얼씨구나’ 하며 차에 태워 변산 바닷가로 출발했다.
막상 겨울바다에 도착하여 바닷가를 거닐었으나, 추워 오래 견딜 수가 없었다.
차 때문에 술도 마실 수 없어 그냥 돌아와야 했다.

밤늦은 무렵의 한가한 고속도로라 신나게 달렸는데, 앞에서 화물차가 걸리 적 거렸다.
추월하느라 폐달을 힘껏 밟았는데, 추월하고 보니 내리막길이었다.
“아차! 죽었다” 싶었다. 차가 공중에 붕 떠 핸들을 꽉 움켜잡았는데,
순간적으로 판단한 것이 가드레일에 의지해 미끄러지는 방법 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절묘하게 가드레일을 들이 받아 100미터 넘게 끌려가서야 차가 멈춰 섰다.

분명 기적이었다.


치명상을 입기 쉬운 옆자리 여인도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았다,
차에서 내려 보니 오른쪽 바퀴는 둘 다 날아 가버렸고, 휠만 쭈그러져 있었다.
견인차를 기다리는데, 고속도로 순찰차가 닥아 왔다.
망가진 차를 보더니, 가드레일 망가진 곳을 찾기 위해 두 번이나 돌아다녔으나 멀쩡했다,

하늘이 보살폈다“며 순찰하는 이가 구시렁거렸다.

대전 변두리 어느 정비공장에 차를 맡기고 가까운 여관에 들어 갔는데,
뜻밖의 뜨거운 밤을 보내는 행운을 얻을 수 있었다.
살이 끼여 이런 꼴을 당하니 살을 풀어야 한다는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 뒤로 연락 끊긴 하루 밤 풋사랑이지만, 잊을 수 없는 인연이었다.

그 당시는 종합보험만 가입했기 때문에 바퀴와 휠만 교체하고 끌고 가야했다.
그 뒤 전주에 갈 일이 있었다. 바디가 찌그러지고 심지어 오른쪽 문이 잠기지 않아
끈으로 칭칭 묶은 차에다 전시할 사진을 잔뜩 실고 갔더니
화가 류휴열씨와 도예가 한봉림씨가 기가 막혔는지,
어떻게 이런 차로 전주까지 올 수 있냐고 놀려댔다.

그런 수모를 당한 포니가 어느 날 화염에 휩싸여 장렬하게 전사했다.
어느 날 ‘환경관리공단’에서 실시한 환경사진공모전 심사를 위해 집을 나섰는데,
출근 시간에 걸려 차가 꼼짝을 않았다.
시간은 촉박한데, 고물차는 열 받아 엔진에서 연기까지 나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어 변두리에 세워두고 지하철로 내려갔다.

그런데, 일 마치고 돌아왔더니 그 자리에 차는 없고 그을린 흔적만 있었다.
주변 사람에게 물어 보니 내가 빠져나가는 순간 차에 불이 붙었고,
그 뒤 소방차가 출동하여 불을 껐는데, 불탄 차는 견인해 갔다고 했다.
환경사진 심사장에서 자연생태사진만 지겹도록 보고 왔는데,
이게 환경고발감이다 싶었다. 어떻게 이런 아이러니가 있을 수 있나?

그 뒤로 티코를 구입해 한 2년 동안 타고 다녔는데, 사고 한 번 없는 괜찮은 차였다.
덩치가 작아 잘 빠져 다니는데다 주차하기도 편했다.
그런데 휴지조각처럼 접힌 사고차량을 본 후로 생각이 바뀌었다.

그래서 큰 맘 먹고 갤로퍼 숏 바디 신형을 사기로 했다.
92년산 차 값이 1,900만원이었는데, 36개월 활부로 구입한 것이다.
그 무렵은 ‘이미지 라이프’라는 사진취재대행업을 할 땐데,
두 세군데 사보에 일해 주는 것으로 간신히 끌어가야 했다.
주 고객층인 잡지사들이 워낙 영세하다보니, 일을 맡길 사정이 아니었다.

그런데, 차 뽑은지 두 달도 되지 않아 대형 사고를 내고 말았다.
부여에서 사진행사가 있어 고속도로를 탔는데,
휴게소에서 아주 섹시한 여인을 보게 된 것이 원인이었다.
다시 운전대를 잡았지만 그 여인이 아른거려 견딜 수 가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그 여인을 생각하며 딸딸이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속도감에 더해 쾌감도 무르익어 갔다.

 

흔들어도 적당히 끝내야 하는데, 그게 되지 않았다.
갑자기 사정되어, “어~어~”하다 나도 모르게 브레이크를 밟아버린 것이다.
‘찌이익~“ 차가 미끄러져 급정거하자, 갑자기 ’쾅‘하며 뒤통수를 쳤다.
뒤 따라 오던 2,5톤 화물차가 들이 받은 것이다.
급히 풀 묻은 거시기를 집어넣고 내려갔는데, 터럭기사가 발발 뛰었다.
왜 세웠냐고 캐묻는데, 어떻게 그 이야기를 할 수 있겠나?


좀 있으니 경찰이 달려와 안전거리 미확보라며 피해자를 나무랐다.

교통법규도 웃기는 짜장면이다.
내차는 뒷문이 박살났고 뒷 차는 앤진 룸에서 연기가 났지만, 둘 다 운행에는 지장이 없었다. ` 

서로 각자 수리하기로 합의했으나, 떠나가며 그 기사가 다시 물었다. 
”전방에 아무 것도 없었는데, 왜 세웠어요?“라기에
”미안합니더마는 그거는 죽어도 말 못합니더~“

그래도 2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찰을 기록하는데도 크게 기여한 차다. 

‘한국불교미술대전’이란 일곱 권짜리 화집은 나왔으나, 출판사인 ‘한국색채문화사’가 부도나 원고료도 받지 못했다.

 재수없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이 딱 맞다. 거금 삼천만원이나 되었는데...

그 때 기록한 불교에 관한 슬라이드 필름이라도 남아있으니, 다행이다 싶다.

그 뒤 또 한 번 사고를 쳤다.
도예가 신동여씨가 영주에서 전시를 열 때다.
전시가 끝나고 봉화 수식으로 모두들 자리를 옮겼는데,
얼어붙은 내리막 시골길에 미끄러져 논바닥에 전복되는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그 차에는 신동여씨를 비롯하여 지금은 열반한 적음스님과 산중에서 수행중인 도호스님,
불화가 장춘씨가 탔는데, 난 대롱대롱 안전벨트에 거꾸로 메 달려 있었다.

간신히 내려 손전등으로 뒷좌석을 비추어보니 정말 가관이었다.
집에서 먹기 위해 사온 막걸리와 술안주 만들려던 밀가루 봉지가 흩어져
적음스님 얼굴을 뽀얗게 뒤덮고 있었다.
그 와중에서도 ‘중 살려~“라며 농담을 지껄이고 있었다.
도호스님은 머리에 이상이 생겼다며 헛소리를 해대고,
적음스님은 팔이 부러졌다며 낑낑거렸으나 모두 술이 약이었다.
차를 버려둔 채 집으로 몰려가 술만 졸라 축냈다.  

그런데, 이튿날 적음스님 팔에 진짜 문제가 생겼다.
골절로 팔에 깁스를 하였고, 입원하지 않는 조건으로 보험금도 좀 탔다.
보험금 받는 날 적음스님 더러 술 한 잔 사랬더니, 그 대답이 걸작이다.
“문디 코구중에 마늘을 빼먹지...”

그 차는 15년 동안 25만킬로를 같이 뛰었는데,
어느 날 일산 길가에 멈추어 서서 더 이상 같이 못 살겠다고 버텼다. 어찌하랴?

 

헤어지고 새로 만난 애마는 그보다 덩치가 큰 갤로퍼였는데, 일단 조가 잘 맞았다.
사진전에 필요한 자재를 실고 산골마을을 돌아다닌 순회전도 열심히 도와주었고,
아파트에 버려진 장롱까지 차 지붕에 실어 정선으로 옮겨 날랐던 것이다.
정영신씨와 전국 장터를 돌아다니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그도 눈 내린 평창 시골길에서 미끄러져 개울에 전복되어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나에겐 상처하나 입히지 않은 열녀다.

그 고마운 년도 몇 년전 천상병선생 기일 날 의정부 산소 가는 길가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가 떠나며 내게 붙여 준 년이 엊그제 폐차시킨 코란도였다.
착한 마누라가 있으면 악처도 있듯이, 코란도는 나에게 악처나 마찬가지다.
얼마나 속을 많이 섞였던지 꼴도 보기 싫지만 어쩌겠는가?
그래도 내가 데리고 놀며 정들었는데...

더 이상 악연을 만들지 않아야 하는데,
살아있는 동안은 그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이제 세상을 함께 떠날 진짜 애마를 만나고 싶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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