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의 소설가 구중관 형이 소설제목처럼 영원히 실종되어 버렸다.

팔순이 넘도록 홀로 적적하게 지내더니 산천이 들썩이는 이 화창한 봄날, 하늘나라로 떠났다.

천상의 선녀 만나러 떠난 것일까?

 

중관형이 여주로 이사한 뒤로 늘 궁금하던 차에, 난데없는 부고가 날아들었다.

뇌경색을 일으켜 조카의  간병을 받았으나, 며칠 지나지 못한채 운명하셨다고 한다

 

중관 형의  빈소를 인사동 '사가연'에 마련한 사람은 '시네갤러리' 노광래 관장이었다.

지난 달 유목민에서 치른 신성준 선생 장례처럼, 여기 저기 알려 인사동 사람들을 불러 모은 것이다.

비싼 장례식장보다 잘 다니던 술집을 빈소로 정하여 고인의 삶과 연결시켰다.

 

요즘은 일로 인한 스트레스인지, 갈 때가 되었는지 몸이 예전 같지 않다.

힘들어 온 종일  누워있지만, 중관형이 떠나는 마지막 길은 마다할 수 없었다.

더구나 마지막 볼지도 모를 배평모씨가 삼천포에서 온다는데 어찌 누워 있겠는가?

 

빨리 갔다 와서 쉬는 게 나을 것 같아 일찍부터 나섰는데, 길에서 잘 아는 노숙거사를 만났다.

"어딜 그리 황급히 가는가? 술 한 잔 하고 가시게.."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노숙거사는 행색은 거지지만 표정은 부처 같았다.

마신 술이 약인지, 두들겨 많은 것처럼 쑤시던 몸이 가뿐해 졌다. 

알콜 중독증세일까? 아니면 노숙거사의 신 끼가 작동한 걸까?

준비한 조의금에서 파랑새 한 장 빼내 적선했다.

 

찾아 간 인사동 시가연‘에는 상주인 조카 구정현씨와 잘 모르는 분만 있었다.

마이크 잡고 노래한 적이 어저께 같은데, 그 자리를 영정사진이 대신하고 있었다.

절을 올리며 중관형의 명복을 빌었으나 마음은 찹찹했.

살고 죽는 것이 이리 간단한 것이던가?

 

중관형과 양평장에서 만난 일들을 떠 올리며 혼자 홀짝거리고 있으니, 반가운 분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노광래씨를 비롯하여 이준기, 김형구, 배평모, 김철환, 임해리, 임계재, 박상희, 이만주씨 등 많은 분이 모여들었다.

 

소설이 안 팔려 작가폐업술집 냈던 배평모씨는 만난지가 너무 오래되었다.

쩌렁 쩌렁한 목소리 들으니 기가 철철 넘쳐 백수는 무난할 것 같았다. 

평소 귀가 어두워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기차 불통을 삶아 먹었는지 잘들리다 못해 귀가 멍멍했다.

앞 사람과 조가 맞아 쉼없는 구라를 풀어대는데, 그 시끄러운 와중에도 졸리기 시작했다.

 

이승과 저승을 오가며 들은 이야기로는, 요즘 죽는 사람이 유독 많은 것은 윤석열이 때문에 홧병이 나 죽는단다.

결정적으로 잠을 깨운 이야기는 비아그라 이야기였다.

 

 비아그라를 많이 먹은 한 인간이 심장마비로 죽었는데, 시신의 거시기가 튀어 올라 관 뚜껑이 닫히지 않았다고 한다.

그 때 죽은 자의 친구가 나타나 ! 너그 마누라 왔다고 하니, 관 뚜껑이 쑥 내려갔다"는 설렁한 개그였다.

 

영정사진을 거두어 여주로 내려갈 준비하는 것을 보고서야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즘 들어 부쩍 주변 분들이 많이 돌아가신다.

인사동과 관련된 분만 해도 신성준선생을 비롯하여 박구경시인 등 줄줄이 돌아가셨는데,

아직 사망신고 잉크도 마르지 않았는데, 또 돌아가신 것이다.

 

살아남은 자는 가슴 아프지만, 그 길은 천국 가는 영생의 길이 아니던가?

이젠 장례문화도 초상집이 아니라 잔칫집으로 바뀌어야 한다.  

비싼 장례식장보다 사정에 맞게 치루고, 춤추며 노래부르는 신나는 굿판을 만들자. 

 

중관형!  봄바람에 실려 꽃길따라 훨훨 날아가, 좋은 세상만나길 축원드립니다

 

사진, / 조문호

 

 

 

 

소설가 구중관(80세)씨가 지난 13일 뇌경색으로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빈소를 지킬 가족이 없어 인사동 ‘시가연’에 임시 분향소를 마련하였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분향시간 : 15일 정오부터 오후 10시까지

분향장소 : ‘시가연’ 인사동길 52 (전화02-720-6244)

상주(조카) 구정현 010-4754-2817

 

아래는 고인의 생전 모습입니다.

 

 

 

지난 10일 토요일 오후 무렵의 인사동 거리 풍경이다.

 

연휴라 그런지 평소보다 사람이 많았는데, 주로 가족 나들이였다.

 

이젠 마스크 쓰지 않은 사람이 아무도 없는 복면의 시대가 되어버렸다.

복면의 인파가 휩쓰는 거리는 마치 유령의 도시 같다.

 

서로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칠 때도 많을 것이다.

사람 만나기를 기피하고 얼굴까지 가리고 살아야 하니, 사는 게 말이 아니다.

 

사진을 찍고 있으니, 누군가 다가 와 살갑게 인사했다.

알아보지 못해 머뭇거렸더니, '시가연’이란다.

‘시가연’ 주인이라면 김영희씨인데, 아무리 보아도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마스크를 벗겨 확인할 수야 없지 않은가?

 

이 날은 인사동에서 전시를 열고 있는 지인만도 여섯 분이나 되었다.

전시 작품들이 보고 싶었지만, 들릴 수가 없었다.

스스로 약속한 일이라 어딘 가고 어딘 안 갈수 없어서다.

코로나가 사라지기 전엔 사람 모이는 곳을 피할 수밖에 없다.

 

마스크 쓰면 숨이 가빠 일이십 분도 견디지 못하는 호흡기환자가

목숨 걸고, 민폐 끼쳐가며 찾아다닐 필요야 없지 않겠는가.

 

이젠 전시하는 분들이 온라인 전시도 병행했으면 좋겠다.

코로나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으니, 한 번 고려해 볼 문제다.

 

어차피, 시대흐름에 따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러다 사랑도 온라인으로 하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 두렵다.

 

살다 살다 별일을 다 겪는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날의 인사동을 그리워하지만, 모든 건 바뀔 수밖에 없다.
세월 따라 옷을 갈아입을 수밖에 없고, 바뀐 손님 취향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 장사 속성 아니겠는가?

싸구려 기념품점과 장신구점, 옷가게나 화장품 가게들이 줄줄이 들어서지만, 아무도 탓할 수 없는 일이다.



연세가 듬직한 분들이야 아쉽겠지만. 젊은이들은 오늘의 인사동이 즐거운 걸 어쩌랴?

그립다고 옛날로 돌아갈 수 없거니와 변화를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긴 세월동안 쉼 없이 변모 한 것처럼, 앞으로도 인사동은 계속 진화할 것이다.


 

그러나 인사동 곳곳에는 역사의 격변을 겪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을 주도한 박영효의 집터에는 경인미술관이 들어섰고,

명성황후의 조카 민익두의 집은 민가다헌이란 식당으로 탈바꿈했다.

동학의 후예를 자처하는 천도교의 중앙교당도 아직 우뚝 서 있다.

이곳은 우리나라 어린이 운동의 발상지가 아니던가.


 

인사동 초입의 승동교회지하실에서 3·1 독립선언문 일부가 인쇄됐고,

태화빌딩 자리는 태화관에서 명월관으로 바뀐 역사적 자리다.

그곳은 민족대표들이 모여 기미독립선언서를 읽었던 자리가 아닌가.


 

인사1길 골목 깊이 숨은 100년 넘은 오동나무와 오래된 한옥 서까래들이 그 시절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니 인사동을 한 번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우리 근대사의 자취를 밟아볼 수 있는 일이다.


 

인사동이 구한말부터 문화의 거리로 불려왔지만,

우리시대의 인사동은 1960대부터 70년대에 형성된 인사동 문화를 추억하고 있다.



그 무렵 골동품가게가 하나 둘 들어서는 가운데, 표구점, 고서점, 화랑들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한 때는 인사동 대로변에 표구점들이 30여 곳이나 몰린 적도 있었다.

표구하던 그림을 길가에서 말려 인사동 거리자체가 미술관 같았다.


 

인사동에 돈이 몰린 시절도 있었다.

골동품과 그림의 거래가 활발하며 화상들이 돈을 쓸어 담았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어느 종갓집에서 고서 궤짝이라도 들어왔다는 소문이 돌면 골동상들이 몰렸단다.

가끔은 추사를 비롯한 유명 작가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 발견되기도 했다는데,

눈 밝은 자들이 보석을 찾아내는 금광 같은 곳이었다.


 

화단을 좌지우지하는 큰 손들이 인사동에서 그림을 사 모으기도 했다.

재벌가 마나님들이 화랑을 만드는 등 인사동에 돈이 몰리며 인사동의 판도가 서서히 바뀐 것이다.

부자들에 이어 중산층도 그림을 사들였는데, 화랑을 드나드는 것이 교양을 과시하는 양 치부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분위기도 끝났다.



인사동에서 더 이상 비싼 그림이 거래되지 않고, 골동품이나 귀한 물건은 인사동까지 오지도 않는다

골동품상은 대부분 장안동으로 자리를 옮겼고, 표구사도 대부분 떠났다.

대신 중국에서 들여온 석물이나 골동이 그 자리를 메웠다.

'통인가게', 통문관’ 등 몇몇 업소가 옛 명성을 지키고 있으나, 신기하게도 필방은 대부분 남아있다.



지금은 고미술품이나 골동품은 대부분 옥션에서 경매를 통해 거래되는 것이 대세다.

은밀하게 보여주며 거래하던 시절은 끝난 셈이다.

미술품 경매업체 여러 곳이 인사동에 사무실을 열어 .정확한 감정과 경매를 통해 거래된다.


 

인사동 큰길가 상점에서 팔리는 그림도 싸게는 만원부터 5만원까지의 저렴한 작품들이다.

그런 그림이 대량 생산되는 곳은 대부분 삼각지라는데,

미대생들이나 아르바이트생을 통해 만들어져 인사동에 들어온다고 한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인사동 큰 길가의 매장들이 하루가 다르게 바뀐다는 것이다.

화장품 가게나 액세서리가게, 옷가게가 대세인 것은 오래되었지만, 최근에는 보석상과 악기점까지 줄줄이 생겨나고 있다.

이젠 집세가 두 배 이상 올랐으니 영세업자들은 버텨나지 못한다,

관광객들이 몰리는 부작용으로 인사동의 고유한 문화적 색깔은 서서히 퇴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사동에 화방과 필방, 지물포, 갤러리들이 남아있어 화가나 서예가 등 작가들은 드나들 수밖에 없다.

관광객들의 난장 속에서도 문화의 뿌리 한 가닥은 자리를 지키는 셈이다.


 

무엇보다 인사동을 정겹게 만든 것은 골목골목마다 박혀있는 술집들이다.

큰길에서 한 걸음만 들어가면 한옥으로 된 음식점들이 곳곳에 똬리 틀고 있다.

이리 저리 연결된 골목에는 술집과 한식당을 비롯하여 독특한 맛을 자랑하는

다양한 맛 집들이 몰려있어 그나마 옛 분위기를 일깨워준다.


 

인사동 화랑에서 전시가 개막되는 수요일 밤이 되면 인사동 골목은 북적이기 시작한다.

전시 작가는 물론 동료들과 지인들이 어울려 걸쭉한 술판을 벌이는데,

예전 같았으면 담배연기 자욱한 주청에서 노래 가락도 간간히 흘러나왔다.

술자리에서 예술과 철학을 논하다 된소리도 났으나, 요즘은 술 마시는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그래도, 주청에서 예술가들이 뿜어내는 풍류가 인사동을 인사동답게 만드는 것이다.

오래된 술집으로 아직까지 명맥을 잇는 곳이라면 부산식당사동집정도다,

실비집’, ‘하가’, ‘누님칼국수’, ‘실내악’, ’춘원‘ ‘시인통신등은 사라진지 오래고,

그 뒤에 생겨났던 평화만들기뜨락마저 사라졌다.

사라진 가게를 대신해 유목민’, ‘낭만’, ‘시가연등이 옛날 풍류와 멋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사동의 트레이드마크처럼 큰길가에 자리했던 천상병 시인의 찻집 귀천은 뒷길로 밀려나고

초당또한 어렵사리 지탱하지만, 많은 풍류객이 드나들던 수희재인사동 사람들은 문을 닫고 말았다.



가는 세월 잡지 못하듯, 변하는 인사동을 어쩌겠는가?

변한 인사동보다 더 서러운 것은 정들었던 벗들도 가고, 훈훈한 인심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사진, / 조문호















지난 29일엔 연극배우 이명희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인사동 ‘시가연’으로 오라는데, 일이 있어 차를 끌고 나와 버렸다.
지난 밤 과음해 술은 마시지 않을 작정으로 찾아간 것이다.






비가 추적추적 나리는 인사동 밤 거리가 술을 불렀으나, 이를 어쩌랴!
‘시가연’에는 이명희씨를 비롯하여 정영신, 강경석, 박경룡씨가 나왔다.
‘시가연’의 김영희씨로 부터 수요일과 토요일은 오후 여덟시부터 김선범씨 무대가 열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김선범씨는 울산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고 올라 온 분인데,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 홍수진과 가까워 나도 잘 아는 분이라 했다.
그러나 만나보니,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 했다.
엊그제 만난 분도 잊는 일이 비일비재하니, 필름을 돌릴 수가 없었다.
울산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음악동아리를 30년 동안 지도했다고 한다.






좌우지간 김선범씨의 노래가 시작되었는데, 첫 곡이 그 날 분위기를 잡아주었다.
“님이 오시나보다 밤비 내리는 소리”로 시작되는 이장희의 ‘비의 나그네’였다.
‘쟈니기타’를 비롯하여 80년대 시절 노래들이 지난 추억을 새록새록 불러들였다.
이명희씨는 김현승시인의 ‘가을의 기도’를 구성지게 낭송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기도와 사랑과 고독이 삼위일체가 되어 자연에 동화하는 아름다운 시였다.






‘시가연’을 찾은 손님들도 틈틈이 불려나가 노래 한곡씩 불렀는데, 다들 가수 빰 치는 솜씨였다.
난, 술 마시지 않으면 노래는 커녕 말도 한마디 못하는 숙맥이 아니던가.
오후 일곱 시부터 자정까지 장장 다섯 시간을 눈앞에 술을 두고도 못 먹는 고문을 당하니, 미칠 것만 같았다.

“주여! 다시는 이런 시험에 들지 않게 하소서!”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1일은 낮술에 취했다.
컴퓨터를 열어보니, 잘 아는 사진가가 다큐사진으로 살기 힘든 현실을 적어 놓았다.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가슴이 먹먹했다.
그러니, 살아남기 위해 줄서고 눈치보는 사진인이 많아진 것이다.
술 김에 카메라 렌즈가 총구였으면 좋겠다는 악담을 늘어놓았다.






또 다른 댓글은 열 받게 만들었다.
다 아는 사실을, 자기는 뒷 짐 지고 나서지 않으면서 말로만 잘난 척하는 꼴이 거슬렸다. 
그 전에는 그림 그리는 친구가 아주 저질스런 어투의 야유를 페북에 올려놓았다
둘 다 2-30년이나 된 오랜 지기지만, 사정없이 페친에서 잘라버렸다.
무슨 특권가진 대법관 방망이 휘두르듯...






술 취해 늘어져 자는데, 정영신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북촌에서 냉면이나 먹자는데, 배고픈 줄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다.
하루 종일 밥은 안 먹고 술만 마셨더니 속이 쓰려 죽을 지경이었다.






집 나서기가 무섭게 장경호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인사동 ‘유목민’으로 술 한 잔 하러 오라는 것이다.
냉면은 못 먹어도 콩국수라도 먹자며 정영신씨를 꼬셨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술 취해 저지른 만행이 마음에 걸렸다.
왜 이리 아무것도 아닌 일에 마음이 각박해 졌을까하는 자책이었다.
몇 년 전, 페북에 들어오며 더 그런 것 같았다.
정영신씨 말처럼, 중독되었다고 생각하니 남새 서럽다






이제 마약 같은 페북을 끊는 일만 남았다.
끊는 일이야 간단하겠지만, ‘티브이도 신문도 보지 않으니
세상과 소통은 어떻게 해야 할까?‘ 변명 같은 고민도 한다.






‘유목민’에 도착하니 장경호씨와 전활철씨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이 목구멍에 들어가기 시작하니 깬 술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버렸다.
난, 술 취하면 농담을 자주 하는 편이지만, 장경호씨는 질색을 한다.
술 마시는 코드가 잘 맞지 않는데도 자주 어울리는 것 보면 신기하다.
술자리에서 시시껄렁한 소리나 하며 웃어야지,
거룩한 표정 짖고 앉았으면 뭐하냐? 는 게 내 생각이다.






술에 녹초되지 않으려고 부지런을 떨어댔다.
그 날 인사동 '리갤러리'에서 김용문, 윤진섭 도판화 2인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용문씨가 있다는 술집 ‘시가연’에도 들리고,
인사동 거리에서 노는 외국인 노래 장단에 맞추어 엉덩이도 흔들어댔다.
소울이 있는 친구들이었다.
가게에서 손님 받는 전활철씨까지 데려가 함께 흔들었다.






“노세노세 늙어 노세, 죽고 나면 못 노나니...”

사진, 글 / 조문호
































서정춘시인의 시가 죽이듯이, 주벽 또한 죽인다.
그러나 한 동안 술을 끊어, 더 이상의 술 꼬장은 볼 수 없었다.
술자리에서 잘 만날 수도 없지만, 만나도 재미가 없다.

예전엔 술만 취하면 물귀신처럼 물고 늘어져 슬슬 피해 다녔는데,
한 번은 꼬장부리다 기국서씨의 헤딩 한 방에 나가떨어진 적도 있다.
서정춘씨가 말로 하는 꼬장이라면, 기국서씨는 행동으로 하는 꼬장이다.

그러나 막상 술을 끊고 보니, 인사동 낭만 한 자락 잃은 듯 섭섭했다.
가끔은 그의 주벽이 그리웠다.






그런데, 다시 인사동 주당으로 돌아 온 것이다.
지난 2일, 인사동 ‘시가연’의 채현국선생 만찬장에 나타났다.
난, 초장부터 열 받아 퍼 마셨지만, 서정춘씨도 많이 마신 것 같았다.
마이크 잡고 노래도 뽑았으나, 난 나와 버렸다.

참새들의 방앗간 ‘유목민’에 들렸더니, 공윤희씨가 있었다,
좀 있으니 장경호씨가 나타났고, 잇따라 하홍만씨가 서정춘시인을 부축해 왔다.
얼마나 시달렸던지, ‘유목민’에 데려다 놓고 가버렸다.






그 뒤는 너무 취해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밤 세시 무렵, 장경호씨와 택시를 같이 타고 온 기억이 전부다.
그런데, 이튿날 ‘유목민’ 전활철씨의 뒷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다.
전활철씨는 술을 마시지 않은 상태라 술주정을 고스란히 지켜봤단다.

후배 장경호씨에게 존댓말을 꼬박꼬박 써가며 비위를 슬슬 건드렸다고 한다.

술 취하면 장경호씨 꼬장도 보통은 아닌데, 한 판 떠보자는 거 아닌가?
결국은 실구한 ‘호로자슥’이란 한마디에 장경호씨 성질이 폭발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어쩌랴! 죽일 수도 살릴 수도...
그래서 날 데리고 나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 뒤부터 전활철씨가 붙들려, 새벽 여섯시까지 시달렸다고 한다.
나중엔 억지로 택시 태워 사당동까지 보냈다지만,
그 과정에서 넘어져 두 사람이 머리를 찧기도 했다는 것이다.
‘아우야! 머리 아프다’고 했다는데, 아무쪼록 별 탈 없기를 바란다.

인사동 주당으로 컴백한 서정춘 시인의 화려한 입성식이다.
반갑기도, 징그럽기도, 표정관리 안 된다.





서정춘 ‘봄, 파르티쟌’


“꽃 그려 새 올려 놓고
지리산 골짜기로 떠났다는
소식“



사진, 글 / 조문호
















요즘 나를 아는 분들이 모이면 하는 이야기가 있다.
‘사람 좋던 조문호가 왜 저리 변했냐고?’
예전에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웃고 넘어가던 사람이
왜 저렇게 까칠해 졌냐는 것인데, 그건 뒤늦게 반성한 바가 크기 때문이다.






언젠가 바뀌겠지 생각했지만, 죽을 때가 되도록 바뀌지 않았다.
착한 사람이 못 살고 나쁜 놈들이 잘 사는 구조도 그렇지만,
잘 못된 관행이나 위선, 부조리 등 못된 짓이 모두 그대로였다.
듣기 싫은 참 말은 안 하고 입에 발린 좋은 말만 하는 사람 탓이었다.
가까운 사람의 잘못은 눈감아 주는 습관이 이 지경을 만든 것이다.





내가 바뀐 결정적인 계기는 13년 전 정영신씨를 만나 인터넷에 접하며 부터다.
몰랐던 정보도 많이 접했지만, 인터넷에 글을 올리기 시작하며 작심한 것이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 개입된 일이라도 잘못된 것은 기어히 바로 잡아야겠다고...






그러니 주변에 있는 가까운 분들이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친한 사람일수록 사정을 많이 알 수밖에 없으니, 어쩌랴!
잘 못된 일에 내편과 남의 편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니 처음엔 정영신씨가 욕을 많이 먹었다.
심지어 뒤에서 조종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요즘 또 다시 벌집 쑤셔놓은 듯 인사동에 말들이 많다.
바로 ‘지난 11월에 열린 ’쓴 맛이 사는 맛‘전 문제점을 나발 불어 그렇다.
그 전시는 인사동 터줏대감이신 채현국 선생께서 총대 맨 일이고,
3-40년 동안 잘 알고 지내 온 동생 같은 사람이 추진한 일이다.






자선의 간판을 달고 장사하는 것도 용납할 수 없으나,
이 건 70명의 참여 작가를 비롯한 많은 인사동 사람들 이름을 내건 전시다.
그 결산을 투명하게 밝히라는 것이 뭐가 잘 못되었는가?
정작, 인사동을 떠도는 수많은 뒷말을 당사자만 모르는 것 같았다.






지난 9일 오후6시, 채현국선생께서 마련한 만찬이 ‘시가연’에서 있었다.
노광래씨의 연락으로 갔는데, 채현국, 임재경, 이재하, 서정춘, 구중관, 이두엽,
공윤희, 하홍만, 정고암, 이인섭, 서길헌, 이만주, 이회종, 노광래, 편근희 씨등
열여덟 명이 나왔다. '


전시에 대한 결산을 하고, 마무리하는 자리로 알고 갔으나,
술 마시며 노는 자리였다.






채현국선생께서 노광래씨를 술 심부름 시켜놓고, 화를내며 고함을 질렀다.
‘왜 광래를 힘들게 하냐?’며 욕설을 퍼 붓기에
‘선생님께서 그렇게 만들지 않았냐?’고 대들었다.
지인들 앞에서 망신주려 작심한 것 같았는데,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바른 말하는 놈은 욕하고, 잘못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는...






이거 짜고 치는 고스톱인가?

심기를 불편하게 한 인간적인 도리에서 큰 절 올리며 사죄했지만,
결코, 잘 못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술이 취해 말씀 드렸다.
“옛날의 선생님이 그립다,”고...

사진, 글 / 조문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