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시간에 정영신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청진동 술집으로 나오라며 화가 손연칠씨를 바꾸어 주었다.
반갑기야 하지만, 술에 골병들어 술자리는 피하는 처지라 난감했다.
그렇지만, 정영신씨 명을 어찌 거역할 수 있으랴!




술집 위치를 몰라 가서 전화했더니, 손연칠씨가 데리러 나왔다.
날더러 ‘서울문화투데이’와 무슨 일이 있었냐며 캐물었다.
아무 일 없다고 해도 믿지 않았는데,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들었을까?
‘미운 돌맹이’란 카페에 들어가니, ‘서울문화투데이’ 이대표와
화가 전인경, 정영신씨등 여러 명이 왁자지껄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과메기 안주에 고급 위스키까지 나온 푸짐한 술상이었다.




그 날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시상식이 있었다는 것이다.
한 해 중 가장 큰 일을 치루고 난 뒤풀이였다.
문화에 한정된 신문이라 광고 얻기도 어려운데,
십일 년 동안 ‘문화대상 시상’을 끌어 온 것이다. 


 

처음엔 술을 사양했지만, 연이은 권주에 못 이긴 척 술잔을 받았다
사나이 맹세 개 맹세되는 건 순식간이지만, 어쩌겠는가?
딱 석 잔만 마시겠다는 스스로의 약속으로 아껴 마시기는 했지만,
제대로 지켜졌는지는 모르겠다.




손연칠씨가 고 노무현대통령 초상화를 완성했다는 소식도 들었고,
‘서울문화투데이’ 이 대표는 왜 나를 싫어하냐며 따져 물었다.
술집에 들어오기 전 손연칠씨의 말과 겹쳐 오해가 있다면 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신문에 글을 쓰지 않는데 따른 오해 같았다.


화가 손연칠씨가 완성한 고 노무현대통령 초상화

처음엔 문화로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발행인의 열정에 감화하여 동참한 일이지만,
대가없는 봉사라 언젠가는 그만 두어야 할 일이었다.
종이신문을 고집하는 자체가 운영을 더 어렵게 하는데, 그 걸 지켜보기도 편치 않았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조문호의 빼딱한 세상, 바로보기’라고 정한 칼럼 제목도 발목 잡았다.
원고 마감을 앞두고 잘못된 것을 찾아야 하는 절박감도 따랐지만,
스스로의 생각이 빼딱해 지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2년간의 칼럼 투고를 끝으로 전시리뷰만 쓰겠다며 슬며시 빠져 나온 것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작가를 잘 아는 처지라 전시리뷰 쓰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누군 쓰고 누군 안 쓸 수도 없는데다, 아는 사람일수록 잘못을 지적하기 힘들었다.
안 좋은 작품을 좋다고 말하는 것보다 쪽팔리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국 쏟고 뭐 데인다는 속담처럼, 힘들게 글 써주고 욕 얻어먹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일 년쯤 하다 전시리뷰도 손을 놓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야 처음부터 원고료 없이 봉사할 마음으로 나섰지만, 뒤늦게 끌어들인 정영신씨는 달랐다.
수고비도 없는 취재는 물론이고, 사진 찍는 일로 수시로 부려먹지 않았는가?
공과 사를 분명히 하지 않는 일 처리는 오해의 소지를 만들 수도 있다.




나로서는 ‘서울문화투데이’에 대한 관심은 변함없고, 개인적인 감정도 없다며 오해는 풀었지만,
정영신씨가 하고 있는 전시리뷰도 하루속히 그만두어야 해 걱정되었다.
이 날도 시상식을 촬영해 달라는 부탁을 받아 불려나간 모양인데,
아무리 좋은 일도 민폐 끼쳐서는 안 된다.




아무튼 ‘서울문화투데이’가 좋은 매체로 자리 잡기를 바란다.

사진, 글 / 조문호


















감기로 이렇게 오래 누워 있기는 생전 처음이다.

한 달 가까이 누워 있으니 온몸에 좀이 쑤씨지만, 정영신씨가 챙겨주는 밥 얻어먹으니 좋긴 좋다.



한동안 밖에 나가지 않아 사람을 만나지 않으니, 할 일이 없다.

이렇게 한가하게 시간 보낸 적이 어디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모처럼 쓸데없는 일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위한 시간을 보냈다.



보고 싶은 책도 많지만, 눈이 나빠 조금만 들여다보아도 눈에 아지랑이가 낀다.

그만 눈 감으라는 이야기인가? 빨리 눈에 맞는 안경부터 구해봐야겠다.



지난 2일은 자리에서 일어난 첫 일거리로 순천에 갔다.

‘낙안포럼’에서 마련한 ‘낙안읍성의 유네스코 등재와 민속축제의 효과적 활용’이라는 심포지엄을 기록하는 일이었다.



동영상은 정영신씨가 스틸사진은 내가 맡기로 했는데, 촬영비는 50만원이란다.

그동안 간병한 수고비로 보탤 수 있을 것 같으나, 심포지엄이 열리는 순천까지 갈 일이 아득했다.



나야 기초생활수급자라 일하지 않아도 사는 데 지장 없으나,

벌이도 없이 학비까지 마련해야 하는 정영신씨가 늘 걱정이다.




기초생활수급비를 올려 달라는 많은 쪽방 빈민들의 요구와는 달리,

기존 수급비를 올리는 것 보다 혜택을 받지 못하는 차 상위 빈민들의

수급자를 늘려야 한다는 평소의 내 주장을 반증하는 사례다.



촬영 떠나는 그날따라 태풍이 들이닥쳐, 이른 시간부터 비가 쏟아졌다.

장대처럼 퍼 붇는 빗물이 눈앞을 가렸으나, 늦지 않으려고 냅다 밟았다.



그나저나, 오가는 경비 제하고 나면 30만원 정도 남는데, 15만원 벌기위해 목숨 건 질주를 해야 하는 현실이 서글펐다.

사는 것이 결코 녹녹치 않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절감한 것이다.



다행히 심포지엄 시작 전에 행사장에 도착했는데, ‘순천만생태문화교육원’이란 건물은 엄청 넓었다.

700억이나 들여 지었다는 이런 어마어마한 시설이 과연 지역현실에 적절한지 의심되었다.

그런데도 2층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트는 고장 나 멈춰 있었다.



이런 엄청난 건축물을 짓는 토목공사는 비단 순천만의 일이 아니다.

어디를 가나 찾는 사람도 별로 없는 곳에 대규모 건물을 지어 관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곳이 부지기수다.



치적으로 생색내려는 정치인과 건설업자가 짜고 치는 고스톱이나 마찬가지다.

국민들의 세금이 줄줄 새는 꼴을 언제까지 지켜보아야 할까?



‘낙안읍성보존회’와 ‘낙안포럼’에서 공동 주최한 이날의 심포지엄은 궂은 날씨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낙안포럼’ 사무국장을 맡은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대표의 열성과 애살이 돋보였다.

심포지엄이 열리기 전 국악 공연으로 딱딱한 분위기부터 풀었다.



먼저 한창효 낙안포럼 공동대표의 인사말에 이어 찬조연사로 참여한 김동연 전 부총리의 기조연설이 있었다.



발제자로 나선 이왕기 이코모스한국위원회장의 ‘낙안읍성의 유네스코 등재를 위한 개선점과 미래전망’,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낙안읍성 민속축제의 유네스코 등재를 위한 활용방안’,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의 ‘유네스코 등재를 위한 낙안읍성 주민들의 현실과 과제’,

장만채 전 전남교육감의 ‘낙안읍성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당위성과 효과’란 발제문이 차례대로 발표되었다.



이왕기씨의 발표처럼 문화유산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찾아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황평우씨는 정책집행의 전문성, 개방성, 공공성, 투명성, 신중성이 요구된다며

천박한 상업관광이 판치는 낙안읍성의 현실을 탓하기도 했다.

성기숙씨는 고창읍성과 해미읍성 등 다른 지역과 공조를 이루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토론자로 나선 김정학 대구교육박물관장은 ‘낙안읍성의 유네스코 등재를 위한 개선점과 미래전망’,

이광수 전 곡성부군수의 ‘유네스코 등재를 위한 낙안읍성 주민들의 현실과 과제’,

나진억 성동문화재단 교육문화팀장의 ‘낙안읍성 세계문화유산 등재 당위성과 효과’라는 토론문도 발표되었다.



낙안읍성의 현실을 비판한 황평우씨의 발제에 이광수씨가 반론을 재기하며 구체적인 사례를 요구하기도 했다.

정해진 시간으로 발제자나 토론자에게 10여분밖에 발표시간을 주지 못해 제대로 된 토론도 못했는데,

지역 국회의원이란 자가 등장해 입에 발린 공치사로 시간을 끌었다. 어디를 가나 똥파리는 붙었다.




행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서울로 돌아왔다. 어두워지면 빗길 운전이 더 힘들 것 같아서다.

폭우 속에 네 시간 넘게 달렸는데, 얼마나 신경을 곤두세웠으면 돌아오자마자 퍼져버렸다.



내일은 인사동과 광화문광장을 들린 후, 한 달 만에 동자동 둥지로 복귀하는 날이다.

서서히 겨울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다들 감기 예방접종으로 건강한 겨울을 보내기 바랍니다.


사진, 글 / 조문호



















































3.1 백주년기념 민족예술큰잔치에 초대된 '영산줄다리기'





2019년 03월 03일 (일) 16:03:27

정영신 장터사진가 


매년 삼일절을 맞아 경상남도 영산에서 열렸던 줄다리기가 삼일절 백주년을 맞아 ‘민족평화신명천지축전’ 부대행사로 서울광장에서 열렸다. 지난26일 청계광장에서 줄 비나리를 시작으로 새끼줄을 꼬고 엮어 말아 거대한 두 갈래의 몸줄을 만들었다.



▲ 비녀목으로 암줄과 수줄이 한몸이 되었다. Ⓒ정영신


중요무형문화재(26호) ‘영산줄다리기’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우리민족의 대동놀이다. ‘영산줄다리기’는 마을의 화합을 위하여 500여 년 동안 그 명맥을 유지해온 문화유산으로 우리민족의 혼을 당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 지난달 26일 줄비나리 축원을 하고 있는 변우균씨 Ⓒ정영신


또한 용신앙에 바탕을 둔 마을의 풍년과 안녕을 기원하는 대동 굿으로 1969년 무형문화재 26호로 지정되어, 대한민국 문화유산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영산줄다리기는 용을 상징하는 250센티미터의 폭에 40메타의 긴 줄로 암줄과 수줄을 고정시키는 비녀목을 꽂아 연결한 후, 수많은 젓줄에 매달려 승부를 겨룬다.


▲ 영산줄다리기 보존회사람들이 새끼줄에 물을 묻히고 있다. Ⓒ정영신


줄을 만들기 위해서는 가을부터 짚을 준비해 두었다가 정월대보름을 맞아 새끼줄을 꼬고, 여기에 풍물패가 어울려 신명을 일으키며 줄을 만드는데 200명이상이 모여 준비한다. 여기에 줄을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소금과 물을 뿌리고, 줄이 터지지 않도록 밟아주는 과정을 거친다.



▲ 줄을 단단하게 하기위해 소금을 뿌리고 있는 모습 Ⓒ정영신


이번 한겨레 큰 줄 당기기 집행위원장이자 ‘영산줄다리기 보존회’를 이끌어가는 신수식씨는 “우리고향사람들은 줄다리기를 하지 않으면 한해농사를 시작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만큼 줄에 대한 열정이 크다.


▲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줄을 단단하게 여미고 있다.Ⓒ정영신


영산은 독립만세를 서울에 이어 두 번째로 외친 성지로서 우리조상들의 정신이 이 줄 속에 담겨있다. 오죽했으면 일본인들이 우리의 협동심과 단결력을 와해시키기 위해 줄다리기 인원을 제한했겠느냐, 영산줄다리기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 그저 모든 마을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져 줄다리기를 준비하면서 한해 농사가 잘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암줄과 수줄이 만나기 위한 과정 Ⓒ정영신


이번 영산 큰 줄다리기를 준비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이 무엇이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줄을 만드는데 쓰이는 볏짚을 구하지 못해 전라도에서 공수해온 점과, 사람 손으로 해야 할 일을 장소가 협소한 관계로 기계가 동원되어 안타까웠다. 전통 줄다리기는 온 몸으로 줄을 당기기 때문에 상대를 앞질러 가지 않고, 뒷걸음을 많이 쳐서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 줄다리기다. 3.8선에서 줄다리기를 해 우리가 뒷걸음으로 북한을 껴안으면 그게 바로 평화통일이 아니겠느냐? 우리 영산에서는 암줄과 수줄의 성패로 한해 농사를 점친다”고 말했다.



▲ ‘영산줄다리기 보존회’를 이끌어가는 신수식 Ⓒ정영신


특히 이번 3.1 백주년기념 ‘영산 큰 줄다리기’는 “서울시민들과 자원봉사자의 노력으로 잘 마무리되었다며,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인사말을 꼭 전하고 싶다”고 했다.



▲ 말뚝이와 함께 세종대로로 진입하는 모습 Ⓒ정영신


동부줄과 서부줄로 나눠 청계광장에서 출발한 두 줄이 풍물을 지피며 세종대로에 진입하자 서낭대 싸움과, 말뚝이춤으로 기 싸움을 벌였다. 암줄과 수줄을 연결하는 비녀목에 꽃은 후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 말뚝이와 시민들이 줄을 진행시키고 있다. Ⓒ정영신


많은 시민들의 함성아래 치러 진 줄다리기는 신명난 풍물소리와 출렁이는 깃발이 힘겨루기의 박진감을 더해 주었다. 동부 줄과 서부 줄은 남성과 여성을 상징해 서부 줄이 이기면 그해 농사가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고 한다.



▲ 동부줄과 서부줄이 풍물과 함께 기 싸움을 하고 있다 Ⓒ정영신


영산줄다리기는 우리나라 줄다리기의 시초로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를 지나면서 잠시 단절되었지만, 1963년 3.1문화제에 재현된 후, 3.1민속문화제 때마다 매년 열리고 있다. 이번 ‘영산 큰 줄다리기’로 우리농촌이 삶의 근본이 되고, 암줄과 수줄은 ‘민족통일 줄’과 ‘생명평화 줄’이 되어 시민들 마음에 우리민족의 공동체를 인식시켰다.



▲ 말뚝이 춤을 구경하는 시민들 Ⓒ정영신


특히 광장에 나온 시민들이 줄다리기가 끝나자 집으로 가져가기 위해 새끼줄과 꽁지줄을 잘라갔다. 영산에서도 줄다리기가 끝나면 이긴 편의 짚을 한웅큼씩 잘라 자기 집 지붕위에 올려놓으면 한해 집안이 평안하고, 좋은 일이 생긴다고 믿고, 소에게 먹이면 소가 튼튼하게 잘 크고, 이 짚을 거름으로 쓰면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고 한다.


▲ 승리한 쪽의 줄을 집으로 가져가기 위해 자르는 모습 Ⓒ정영신


또한 시민들의 참여로 펼쳐진 영산 큰 줄다리기는 두 동강이 난, 우리의 역사를 이어주는 거대한 판 놀이였다. 100년 동안 우리 땅에서 벌어진 틈을 거대한 비녀목으로 연결해 암줄과 수줄의 교합처럼 남과 북이 하나 되는 세상을 꿈꾸어 본다.


▲ '3.1 백주년기념 민족예술큰잔치' 예술감독 최희완 민족미학연구소 소장 Ⓒ정영신



12월 2일까지 인사동 ‘통인옥션갤러리’


2018년 11월 24일 (토) 09:48:50조문호 기자/사진가 press@sctoday.co.kr


임춘희_눈물, oil on canvas, 45.5x45.5cm, 2018



임춘희작가의 ‘나무그림자’전이 인사동 ‘통인옥션갤러리’에서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
그는 성신여자대학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독일 슈투트가르트 국립 조형 예술대학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한 전업 작가로

96년부터 열다섯 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임춘희_고집과 외면, gouache on paper, 23.7x34.6cm, 2014,2018



임춘희의 작품에서 앙상한 겨울나무가 연상되고, 아련한 향수가 밀려오는 것은 비단 나만의 감상일가?

그는 스스로의 감상을 화판에 옮겨내는 능력이 탁월한 작가로 주로 자신의 내면 상을 그림으로 표출하고 있다,

두서없이 흐르는 감정을 마치 자서전처럼 화폭에 옮겨놓았는데,

때로는 혼란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황량한 작가의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2003 ‘심리적 자화상들’, 2009 ‘풍경 속으로’, 2013 ‘흐르는 생각’, 2014 ‘고백’,전 등

일련의 전시 제목만 보아도 그가 추구하는 작품세계가 어떠한지를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아득한 추억으로 끌어들이는 묘한 매력도 있다.

꾸밈없던 어린 시절을 회억하며 그리움을 일구어내는 그만의 화법에서 작가의 순박한 감성도 엿볼 수 있다.

슬프거나, 포근하거나 황량한 감정을 유발시키는 그런 것들은 타고 난 자질이 아니라 절실한 진정성이 만들어내는 것 같다.



임춘희_산책, gouache on paper, 38x52.5cm, 2014,2018


작가는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불투명한 순간을 옮기는 일 일뿐'이라고 말한다.


“길을 잃어 엉클어진 마음처럼 혼돈 속으로 빠져들며 무엇이 옳은 건지도 모를 만큼의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마음속에 차오를 때, 마치 캄캄한 동굴 속에서 희미한 불빛을 잃지 않으려는 것처럼 안간힘을 쓴다”고 했다.

그냥 어둠 속 희미한 빛을 따라 가며 끊임없이 갈구한다는데, 풍경이나 숲은 어김없이 자기감정과 동일시되었다.

바로 그림 속에서 자신을 찾았다. 확신할 수 없는 미혹의 세계에 흔들리며, 때로는 고독하다고도 고백했다.

작품이 작가의 자화상이라지만, 어쩌면 분열적이고 파편적인 현대인들의 자화상인지도 모른다.



임춘희_위로,oil on korean paper, 65.1x53cm, 2018


“유독 자기반성적인 경향이 강한 작가들이 있다. 그런 작가들이 자화상을 주로 그린다.

세계에 자기를 이입하고 사물대상에 자기를 투사하는 능력이 특출한 작가들이다.

이때 반드시 자화상일 필요는 없는데, 뭘 그려도 자화상이 된다. 어떻게 그런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그에게 세계는 온통 징후가 되고 증상이 된다.

징후와 증상으로서의 세계가 되고, 스펀지처럼 나를 빨아들이고 내가 흡수되는 세계가 된다.

그래서 뭘 그려도 자기가 된다. 세계가 온통 그리고 이미 자기이므로. 작가에게 숲은, 밤은, 어둠은, 물은 경계와도 같다.

숲을 지나면 평지가 나오고, 밤이 지나면 낮이 오고, 어둠이 걷히면 밝음이 오고,

물을 지나면 육지가 나타나리라는 생각은 다만 세상에 떠도는 풍문, 의심스런 소문에 지나지 않는다.

그 경계 뒤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경계는 움직이는 경계고 미증유의 경계며 양가적인 경계다. 경계를 지우는 경계다.

그 경계 앞에서 파스칼은 두려움을 느꼈다.”고 미술평론가 고충환씨가 서문에 썼다.


임춘희_무관하지 않은, gouache on paper, 29.7x20.8cm, 2018


이 전시는 ‘통인옥션갤러리’(02-733-4867)에서 12월2일까지 열린다.















 

“상은 묵묵히 작업하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줘야하는 것, 동자동은 을이 보여주는 일상”


[서울문화투데이] 2018년 02월 12일 (월) 10:55:23 임동현 기자, 정상원 인턴기자 press@sctoday.co.kr  

▲ 조문호 사진가 (사진=정영신 사진가)



“왜 나에게 상을 주나 짜증을 냈다. 상이라는 것이 양면성이 있다. 상을 받으면 자만에 빠질 수 있고, ‘상 받으려고 쪽방촌 간 거냐’라는 말이 나올 수 있고, 상을 놓고 여러 문제들이 있었던 것을 알기에 그렇다”.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과 표정을 찍어온 조문호 사진가. 최근에는 동자동에서 생활하며 동자동 쪽방촌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내고 있는 조문호 사진가에게 본지는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을 수여했다. 하지만 그에게 상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자신의 작품을 망칠 수 있는 ‘독’으로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초심을 잃지 않고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자신의 작품 세계를 표현하고 싶어하는 작가의 의지가 있기에 가능한 생각이었다. 그는 본지와의 만남 역시 조심스러워했다. 신문에 실리는 순간 ‘결국 유명해지려고 작업한 것’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였다.


‘사람이 담긴, 사람 냄새나는 사진’을 찍기 위해, 그리고 그 사진을 통해 ‘사람’을 전하기 위해 지금도 동자동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조문호 사진가의 이야기다.


문화대상 수상소감이 인상적이었다. ‘상의 양면성’을 이야기한 것이 기억나는데 수상소감 대신 선생이 생각하는 ‘상의 의미’를 듣고 싶다.

상을 받으면 심리적으로 우쭐하고 자만하게 된다. 주변에서 그런 경우를 많이 봤다. 자신에 대한 인식도, 예술에 대한 진정성도 없이 ‘재주꾼’이라고 각인되는 것 같다.

특히 지금 내가 동자동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데 상을 받았다고 하면 ‘상 받으려고 동자동에 갔다’는 말이 분명 나오게 된다. 그 말이 정말 듣기 싫다. 동자동에 있으면서 인터뷰 요청이 계속 들어왔는데 다 거절했다. ‘유명해지려고 한거다’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오늘 이 인터뷰도 서울문화투데이가 식구라는 생각이 있으니까 하는 거지만 여기에 대해서도 분명 안 좋은 소리가 나올 수 있다. 그래서 정말 조심스럽다.

또 상이라는 것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묵묵히 열심히 작업하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사기를 북돋는 차원에서 주어져야하는데 나같이 늙은 사람이 받는 것이 과연 괜찮을까라는 생각도 했다. 그래서 소감을 그렇게 말한 거다.

그래도 기왕 상을 받았으니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이 좋은 작가를 발굴하고, 작가들에게 채찍이 되어주는 좋은 상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겠다.


▲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을 수상한 조문호 사진가



동자동을 가게 된 배경은?

오래전부터 정선과 인사동을 오가며 새로운 작업을 찾고 있었는데, 최근모 시나리오 작가가 보여 준 동자동의 실상을 찍은 비디오에 결심했다. 거기서 자극받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고 재 작년 9월에 동자동으로 들어갔다.

동자동에 더 애착이 간 이유는 갑의 입장이 아닌 을의 입장에서 보여주는 일상이기 때문이다. 악한 사람이 잘 살고 선한 사람이 못사는 구조적인 문제 속에서 없는 사람이 사는 일상을 기록하며 그들의 생활 환경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도록 돕고 싶었다.


동자동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대개의 사람들이 기초생활수급자로 살기 때문에 돈을 잘 쓰지 않는다. 그렇다고 은행에 저축을 할 수도 없다. 일정 이상 돈을 가지고 있으면 기초생활수급자 기준에서 탈락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살아남으려면 계속 수급자로 머물러야한다. 그러니 일을 하여 자립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어떤 사람은 집에 돈을 계속 모아두고 숨겨놨는데 그 사람이 사망한 이후 이불 밑에서 돈다발이 발견됐다. 어렵게 수소문하여 가족이 찾아왔는데, 시신은 그냥두고 돈만 가져가는 매정한 세상이다. 또 한 번은 가족이 연결되지 않아 돈의 행방을 두고 많은 의혹이 쏟아지기도 했다.


동자동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데 올 겨울 날씨가 유난히 춥다. 지내기는 어떤지

일단 방이 무척 좁다. 정말 누우면 관 속에 있는 느낌이 들 정도다(웃음).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겨울에 무척 추울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정반대다. 여름이 더 힘들다.

겨울은 전기장판을 틀어놓으면 그래도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데 여름에는 정말 더위를 피할 수 없다. 10분만 가만히 앉아있어도 땀이 비오듯 나온다. 더위를 피할 방법이 없다. 한파가 왔다고 하는데 따뜻하게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말라(웃음).



지난해 어버이날과 추석 무렵에 동자동 공원에서 ‘빨랫줄 사진전’을 열었다. 동자동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보인 것으로 안다

사람을 찍으면 본인들이 사진을 달라고 부탁한다. 찍을 때마다 주려면 작업에 지장이 생기기도 해서 어버이날과 추석날 잔치 자리에 걸어놓고 찾아가게 하는데, 다들 좋아한다. 아직까지도 사진 찍히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진을 받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면 사진으로 마음의 문을 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친해진 사람들 중에 노숙자가 있는데 연초에 내 카메라가 마음에 든다고 가져갔다가 단속나온 경찰과 몸싸움을 하던 과정에서 그 카메라를 잃어버렸다. 아직 찾지도 못했다. 소중한 카메라였는데 배신감을 느꼈다(웃음).'



지금 우리가 동자동 사람들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동자동 사람들은 노숙자들에 비하면 그래도 생활이 나은 편이다.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되면 생활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무 욕심이 없다.

요즘 사람들은 자기 자신만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물론 동자동 쪽방촌만 어려운 곳은 아니지만, 이런 이웃들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동자동이 곧 개발이 된다고 들었다

현재 조합이 구성되고 있다. 아직 구체적인 개발안은 나오지 않아 몇 년은 걸릴 것 같다. 조금 있으면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올 것으로 알고 있다.

문제는 동자동 사람들을 위한 이주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 방세내고 하루하루를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 생각보다 돈벌이에 급급하다.  최대한 동자동 사람들의 힘을 모아 싸워야 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진가가 작품 활동보다 빈민운동에 관심이 더 많다는 소리도 듣지만, 사회기록에 전념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라면 갑보다 을의 입장에 서야하며, 사진보다 그들의 환경개선에 기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난 처음부터 사람만 찍어왔는데, 어찌 그들의 삶보다 사진이 먼저일 수 있겠는가?



▲ 동자동사람들


인물 사진을 찍으려면 ‘친해지는 과정’이 있어야한다.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담아낸 과정이 궁금하다

사진을 찍으려면 그 삶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밖에서 보는 시선과 대상과 동질성을 느낀 사람의 시선은 엄연히 다르다.

그리고 사진도 결정적인 사진 한 장이 중요하다기보다 사진 여러 장이 이루어내는 전체적인 기록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사진은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사소한 풍경 하나도 시간이 지나면 하나의 기록으로, 역사로 남게 된다. 그것이 가능한 것이 사진이다.


‘가장 좋은 사진’은 어떤 것일까?

사람 냄새나는, 사람을 느낄 수 있는 사진이 좋은 사진이라 생각한다. 일본에서 사진 작업하는 양승우 작가가 있다. 이 작가는 주로 가부키쵸에서 활동하는 야쿠자 사진을 찍는데, 사진을 보면 혐오감이나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고 편안하다. 찍는 사람, 대상과 공감대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보는 사람이 가까운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람을 느낄 수 있는 사진을 좋아한다.


다른 사람의 사진을 볼 때 어떤 관점으로 보는지

사진은 다양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 기록사진의 가치를 높이 산다. 작가들의 다양한 표현방법을 평가절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난 인간애가 드러 난 사람사진을 최고로 치며, 사람 찍힌 사진을 좋아한다.


사진에서 ‘리얼리티’란 무엇일까?

사진에서 제일 경계하는 점은 포즈를 취하거나 사물을 움직이는 등 인위적인 요소를 가미하는 것이다. 그런 요소를 최대한 배제하기 위해 있는 그대로 찍는 순간포착을 즐긴다.  연출되지 않고 가장 자연적인 상태로 찍은 사진이 왜곡되지 않은 사진이고, 그것이 리얼리티라고 생각한다.


최근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전시도 하며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

주변의 지인 중에서도 아름다운 풍경만 고집하는 아마추어 사진가가 있다. 꼭 기록해두어야 할 대상을 추천해 준 적이 있는데, 결국은 본인이 좋아하는 소재만 찍더라. 일로서 보다 취미생활로 즐기려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나? 그래도 사진으로 즐겁게 사는 모습이 보기 좋다.

다만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늘어나다보니 다양한 사진공모전들이 생겼는데 여기에도 비리가 많았다. 상이 남발되고, 돈이 개입되거나 자기가 친한 사람에게 상을 준다. 최근 예술계의 상은 순기능보다는 상으로 장사한다는 느낌이 든다. 너무 남발돼서 그런 것 같다. 다 돈과 관련됐기 때문이다.


본지에 ‘조문호의 빼딱한 세상 바로보기’라는 칼럼을 연재하셨다. 예술계를 향해 직격탄을 날리셨는데(웃음) 지금의 예술계가 과연 문제를 고칠 수 있는지 걱정된다

현재 예술계에서는 ‘예술'이라는 간판을 내건 장사가 자행되고 있다. 최근에 열렸던 한 전시가 그 예다. 저명하신 분의 이름을 걸고 그분을 아는 수십명의 작가들의 작품을 모아 전시와 판매를 하고 수익금은 가난한 화가를 돕겠다고 홍보를 했다. 취지는 정말 좋았다.

그런데 막상 판매를 하면 결국 유명한 작가의 작품만 팔리고 가난한 작가의 작품은 팔리지도 않는다. 거기다 수익이 생겼다고 해도 그것이 정말로 가난한 작가에게 돌아갔다는 말이 없다. 유명 작가만 돈 버는 거다. 결국은 예술을 간판으로 내걸고 장사하고 그 돈을 자기들 멋대로 쓴 셈이다. 여기에 크게 분개한 적이 있었다. 이런 구조니 자연히 병폐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이건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겉으로는 자선을 내세우면서 속으로는 잇속을 챙기는 전시회가 많다. 그렇지만 전부 예술계에서 서로 아는 관계이기 때문에 쉬쉬하고 있는데, 정말 이건 아니다.


조문호 사진가라면 아무래도 ‘청량리 588’ 사진이 연상된다

당시 동아일보에서 '동아미술제'라는 공모전이 2년에 한 번씩 열렸는데 공모주제가 ‘직장인’이었다. 평소 내가 관심가진 창녀촌에 다가 갔는데, 젊은 그 때도 가난하였기에 상금이 탐났다(웃음) 오며 가며 '청량리 588'을 찍어서 냈는데, 운 좋게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그 이후 제대로 작업해야겠다는 자책이 들어 그들 속으로 들어가 작업한 것이다. 받은 상금으로 588에 셋방을 마련하고 같이 먹고 자고 아이스크림도 사주면서(웃음) 그들의 일상을 찍었다. 그 때는 힘들었으나, 세월이 지나니 잘 했다는 생각이 던다. 유일한 윤락녀들의 기록이니까...


그리고 또 하나 연상되는 것이 ‘인사동 사람들’(조문호 사진가의 블로그)이다. 인사동의 일상을 사진과 글로 남기셨는데 인사동의 변화를 몸으로 느낄 것 같다

서울에 올라왔을 때부터 인사동에서 계속 놀았으니까(웃음). 인사동에서 한창 놀던 때는 다들 직장이 없었는데 유일하게 번듯한 직장이 있던 친구가 있었다. 그래서 다들 그 친구가 퇴근하는 시간을 기다리다가 만나서 술을 마시러 갔던 기억이 있다(웃음).

세월이 지나면 결국은 바뀔 수밖에 없다. 그건 아쉬움이지. 자꾸 사라지는 것들이 보이고. 옛 친구들이 죽어서 사라지는 것이 아쉽지만, 또 만나면 반갑다. 그런 모습들을 사진으로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전 인터뷰에서 종로에서 몸을 파는 새터민 여성에 관심이 있다고 했는데

욕심은 많지만,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솔직히 당면한 동자동 빈민에 정신이 뺏겨 다른 곳에 마음 둘 여유가 없다. 그러나 동자동 빈민들의 이주대책이 마련되고 삶의 여건이 개선된다면 한 번 해보고 싶다(웃음).


컴팩트카메라를 사용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예전에는 성능이 떨어진다는 평을 들었지만 요즘에는 잘 나온다. 일반 카메라는 들고 다니기가 무거운데 컴팩트 카메라는 갖고 다니기 편하다는 장점이 있다. 무엇보다 상대방에게 큰 카메라를 들이밀면 카메라를 의식하기 때문에 좋은 사진이 안 나오는데, 이 카메라는 자연스런 모습을 담아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자주 애용한다.

내 손에 카메라가 없으면 술이 빨리 취한다(웃음). 카메라가 있으면 항상 찍어야한다는 생각에 긴장을 하게 되는데 카메라가 없으면 긴장이 없어진다. 그래서 빨리 취하는 것 같다.

카메라가 없다면 난 아무것도 아니다. 글쓰는 사람이 수첩이 없으면 답답한 것처럼 나는 카메라가 없으면 답답하다. 기록을 못하는 것이 아닌가. 정말 카메라 없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앞으로의 각오가 있다면

건강이 허락되는 날까지 사진을 찍을 것이고, 여태 찍어왔던 사진들이 활용될 수 있도록 제대로 정리하고 싶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난 찍은 사진을 정리할 시간도 없는 바쁜 사람이다. 아무튼 열심히 찍으며 기록하려한다.







 

서울문화투데이신문 이름이 예술문화신문으로 바뀌고, 격 주간에서 주간으로 바뀐다.

그리고 동국대 석좌교수로 있는 윤범모 미술평론가가 전적으로 참여하게 된다는 소식이다.



 


지난 19,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시상식에서 이은영 발행인께서 전격적으로 발표한 내용이다.


시상식이 끝난 후, 프레스센터 지하에서 열린 뒤풀이에는 이은영씨를 비롯하여 문화대상 선정위원이신 안숙선, 이애주선생,

수상자 김병기화백, 유수정 명창, 문병남, 최광일씨, 그리고 윤범모교수, 화가 손연칠씨 등 여러 명이 함께했다.


  

  



그 날은 특별대상을 수상한 김병기 화백 옆에서 소곡주를 마실 수 있는 횡재도 했다.

처음엔 상 준다고 투덜댔지만, 상이 아니었다면 어디 감히 이런 자리에 앉을 수 있었겠는가?

102세이신 우리나라 최고령의 현역작가 김병기선생 말씀 들으며, 선생의 따뜻한 손을 잡아 기까지 충전시켰다.

2-3분 정도 잡았는데도, 2-3년은 더 버틸 것 같은 감이 들었다.

그동안 윤범모교수의 인터뷰 기사로 한겨레신문에 일 년 동안 연재한 한 세기를 그리다를 통해

100년간의 한국 문화사를 증언한 김 화백께서 특별대상을 수상한 것이다.



 


맞은 편에는 평소 좋아하는 안숙선명창께서 앉았는데, 예년에 비해 매우 수척해 보였다.

어디 몸이 불편한지 걱정스러웠으나, 얼쑤~라고 추임세 넣는걸 보니 아직 기가 펄펄 살아있었다.



 


춤꾼 이애주선생은 87년도 민주항쟁 때부터 여러 차례 사진도 찍었고 각종 행사장에서도 자주 만났으나,

그날은 모처럼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콧수염 김영수씨와 전국 각지를 찾아다니며 사진 찍은 이야기를 했는데.

그 사진집 제작에 사진모델이 된 이애주선생께서 삼천만원을 냈다는 뜻밖의 이야기도 들었다.

새삼 김영수씨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살아생전 성질머리도 지랄 같았지만, 마무리까지 잘 못한 것이다.

평생 작업을 아무것도 모르는 자식들에게 안겨 사장되고 있으니, 어찌 마음이 편할 수 있겠는가?

 


 

 


이은영씨를 비롯하여 윤범모교수 등 몇 분이 이차를 가자지만, 지레 겁먹고 삼십육계 줄행랑쳤다.

끝장을 보는 두 분의 주량에 두 손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신문에 대한 의견들을 많이 나누어, 한국예술문화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는 정론지로 거듭나길 바란다

 

사진, / 조문호












2017년 12월 19일 (화) 11:36:07조문호 기자/사진가 prees@sctoday.co.kr


▲ 황재형, '새벽에 홀로 깨어' 캔버스에 머리카락 1622x1303cm 2017



“정말 대단한 작가다.”

'가나아트‘에서 열린 황재형의 ‘십 만개의 머리카락’전을 돌아보며 뱉은 말이다.

그의 작가적 역량이야 이미 잘 알려져 있으나, 뻔적이는 창의력이나 끈질긴 도전력은 아무도 따를 자가 없다.

전시장을 메운 작품들은 멀리서 볼 땐 깔끔한 수묵화 같았지만, 가까이 다가가니 머리카락의 거친 입체감으로 인물이 살아 꿈틀거리는 듯했다. 거기에 고된 삶과 노동의 현장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표현재료를 확장시킨 그의 창의력에 앞서, 작가의 그침 없는 인간 애정에 더 감복한 것이다.




▲ '드러난 얼굴' 작품 앞에서 선 작가 황재형 (사진, 조문호)


황재형씨가 탄광촌에 들어가 광부들과 함께하며 그 가족의 고단한 삶의 여정을 담아 온지가 어언 30년이 되었다.

작가가 작업에 꽂혀 한 곳에 눌러 살수야 있지만, 그의 작업이 남달랐던 것은 늘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우선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세계는 언제나 현실과 하나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그가 작업에 사용하는 재료 또한 물감에 그치지 않고 흙과 석탄을 비롯하여 머리카락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채용되었는데,

자연적 재질보다 더 실제적이고 현실적일 수 있겠는가?



▲황재형 '원이엄마 편지' 캔버스에 머리카락, 짚신 1622x97cm 2016


5년 전부터 구상하였다는 이 기상천외한 머리카락 작업은 기존의 상식을 벗어나고 있었다.

격렬한 명암대비에서부터 고도의 감정 표현까지 섬세했다.

붓으로 그릴 땐 의도대로 선이 그어지지만 머리카락은 자체의 독자적인 곡선이 있다,

머리카락이 지닌 힘을 인위적으로 변형시키지 않고 자연스럽게 담으려면 몇 배의 인내가 필요했다.

얼마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 집중했으면 눈에 실핏줄이 터졌을까?



▲황재형, '둔덕고개' 캔버스에 머리카락, 128x259cm 2017


그 집념어린 투지에 의해 머리카락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이웃의 숨결로 다시 태어 난 것이다.

붓과 물감을 이용한 작업보다 더 강한 표현력을 드러내며,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존재감을 제시한 것이다.

작가 황재형을 처음 보면 마치 그림에서나 본 듯한 임꺽정처럼 체구도 크고 얼굴은 수염으로 뒤 덥혀 있다.

얼핏 무시무시하게 느껴지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여리고 따뜻한 심성을 가진 인간적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작가일지라도 마음이 따뜻하지 않고 사람을 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황재형 '기다리는 사람들' 캔버스에 머리카락 97x1622cm 2016

그리고 작업에 임하는 열정 또한 아무도 따를 수 없다.

작년 오월, '민족 시원에서 강원까지'란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함께 바이칼 호수를 다녀 온 적이 있었다.

현장에 다녀와서 두 달 후에 전시가 열렸는데, 그가 내놓은 작품의 규모나 작품 수에 깜짝 놀란 것이다.

바이칼을 소재로 한 작품이래야 다들 한두 점에 불과 했는데, 그는 상상을 초월했다.

당면한 작업에 온 힘을 쏟아 붇는 그의 열정을 재확인한 것이다.



▲황재형'하모니카 나고야' 캔버스에 머리카락, 100x240cm 2017



이번에 출품된 ‘진여’는 바이칼호수의 침묵을 나타낸 것인데, 물감으로 해결할 수 없어 흑연을 사용했다고 한다.

침잠한 새벽물결을 이보다 더 멋지게 묘사할 수 있겠는가?


작가 황재형은 갱도매몰사고로 죽은 광부의 작업복을 극사실 기법으로 그린 ‘황지330’이란 작품으로

‘중앙미술대전’에 입상하며 1981년 두각을 드러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야학교사, 공장 등을 전전하다 돌연 태백에 들어갔다.

태백 탄광촌에서 석탄을 캐는 광부로 살았지만, 그는 화가였다. 삶의 현장에서 길어낸 작품들은 그를 '광부 화가'로 등극시켰다.



황재형▲'아직도 가야 할 땅이 남아 있는지' 캔버스에 머리카락 191.3x175.4cm 2016


시커먼 광부의 초상인 ‘한 숟가락의 의미’는 경외감을 전하며 새로운 '민중미술'의 길을 텄다.

초창기에는 ‘임술년(壬戌年)’ 창립동인으로 활동하며 모순된 사회현실에 저항한 ‘민중미술‘ 운동의 핵심작가였다.

초지일관 실천주의 예술가로 살아온 리얼리즘의 대표주자다



▲ 황재형 '변매화' 캔버스에 머리카락 60,6x50cm 2017



그가 탄광촌 사람을 대하는 작가의 인간적 면모를 들여다 볼 수 있는 대목을 뒤늦게 고백하였다.

탄광에 들어간 그가 선탄부 아낙들의 목욕장면을 훔쳐보려다 크게 깨우친 적이 있다고 했다.

비눗물에 검은 석탄가루가 섞여 흐르는 아낙들의 몸을 증거하고 싶었지만,

’이런 장면까지 팔아서 그림을 그려야 하는가?‘ 고민하다 울면서 포기하였다고 한다.

“타인의 불행으로 나의 행복을 구축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됐고 십 수년째 삭혀지지 않은 부끄러움이 남아있었다고 했다.

또한 그동안 작업을 해 오며 그들의 참된 삶을 온전히 담을 수 없어 미안한 감정도 있었다고 한다.

영혼이 담긴 머리카락 작업으로 미안한 감정도 덜었지만, 작가 자신에게도 큰 위안을 주었다고 한다.



▲ 황재형 眞如(진여) 캔버스에 흑연 162.1x227,3cm 2017


그는 머리카락에 깃든 '평등의 미학'을 말했다

“10만 개의 머리카락'이란 사람의 머리에 나는 모발의 평균 숫자입니다.

그 많은 머리칼이지만 한날한시에 태어나는 머리칼도 없고, 한꺼번에 다 빠지는 탈모도 없습니다.

그토록 평등을 이야기하면서도 불평등이 체화된 인간의 몸뚱이에서 어떻게 이처럼 평등한 머리카락이 태어났죠.

왜 인간은 자기가 소유한 머리카락처럼 살지 못하나요?

머리카락은 우리네 현실을 가장 강력하게 보여주는 징표이자 귀히 여길 수밖에 없는 선물입니다.”


이 전시는 내년 1월 28일까지 평창동 가나아트센터(02-720-1020)에서 열린다.

■작품 사진제공= 황재형 작가



동자동 사람들’ 빨래집게 사진 나눔전도 열려...


[서울문화투데이] 정영신기자



서울역과 건너편의 높은 빌딩들 사이에 외딴섬처럼 둥지를 튼 동자동 쪽방촌은 검은 커튼으로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바로 코앞에 두고도 ‘동자동 쪽방촌’을 물어야 할 만큼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 가려 있다.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잔치가 지난 5월8일 어버이날을 맞아 동자동 ‘새꿈 어린이공원’에서 열렸다.



▲ 다큐사진가 조문호씨의 '동자동사람들' 빨래줄 전시풍경


‘동자동 사랑방’(대표 김호태) 가족들의 힘으로 마련한 어버이날 잔치는 올해로 여덟 번째라고 한다.

가족들과 떨어져 외롭게 사는 쪽방촌 빈민들에게 이날만큼은 한 가족이 되어 카네이션을 달아 드리고, 약주를 곁들인 음식을 대접했다.



▲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달아주고 있다.


동자동 쪽방주민들 외에도 노숙자들까지 모여 모처럼 정담을 나누는 즐거운 자리였다. 평소엔 공원에서 술을 마시면 안 되지만,

이날은 행사장에서 준비한 주류에 한해 마실 수 있도록 배려 해 잔치 분위기를 돋구었다.



▲ 어버이날 잔치마당이 펼쳐진 '새꿈 어린이공원'


이날 잔치는 관이나 민간단체에서 후원을 전혀 받지 않고,

동자동사람들의 조그만 성금으로 만든 소박한 자리였지만 300여명이 모여드는 성황을 이루었다.

김호태 회장은 “이날의 잔치비용으로 250만원이 들었는데,

한 푼 두 푼 229명이 낸 모금액이 공교롭게도 지출과 맞먹는 2,513,230원이었다”며 "욕심 없는 사람들의 행복한 잔치마당"이라고 말했다.



▲ 잔치가 끝난후 '동자동 사람들'이 모여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또한 주민들이 정성들여 음식을 장만하고 다함께 협력해 잔치를 진행했는데,

쪽방 주민들보다 더 어려운 노숙인들을 대접하게 되어 보람이 있었다고 했다.


특히, 이날 어버이날 잔치의 색다른 이벤트로, 주민들의 모습을 담은 ‘동자동 사람들’ 빨래줄사진 나눔전이 함께 열렸다.

공원 주변 나무 사이로 쳐진 빨래 줄에는 A4 규격의 사진 135점이 만국기처럼 걸려 전시됐다.


쪽방사람들의 초상사진, 결혼사진, 시위나 단체사진, 살아가는 모습 등, 다양한 사진들이 전시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친근감을 느끼게 했다.



▲ '동자동사람들'을 기록하기 위해 이주한 다큐사진가 조문호씨와 7년째 동자동을 기록해온 사진가 김원씨



이 사진은 지난해 10월, 동자동으로 이주한, 다큐멘터리사진가 조문호씨가 찍은 사진으로 주민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마련한 전시라고 했다.

서로 보기 싶게 빨래 줄에 걸어 전시를 하고, 잔치가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본인 사진은 스스로 가져가도록 진행했는데,

쪽방주민들의 반응도 좋았다.



▲ 동자동사람들이 전시된 사진을 관람하고 있는 모습


37년째 동자동에서 살고 있다는 이재화(81)어르신은 사진을 품에 안으면서 “내 영정사진으로 간직하고 있겠다”며

연신 고맙다는 인사말을 전했다. 이에 조문호 사진가는 “경제적 여건으로 다 만들지 못해 아쉬웠다”며,

“빠진 분들은 오는 추석잔치에 다시 빨래줄 전시를 열어 나누어 주겠다”고 말했다.



▲ 이재화(81세)어르신이 자신의 사진을 보여주고 있는 모습


또한 ‘동자동사람들’을 7년째 기록하고 있는 사진가 김원(53)씨는 “이곳 사람들을 촬영하면서 오히려 내가 도움을 받는다.

일주일만 건너뛰면 기다리고 전화하는 이들 때문에 매주 오게 된다.

이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사회에서 나누어주는 물품이 아니라, 자기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의 따뜻한 온기”라고 말했다.



▲ 주민자치회 김만귀(48) 위원장이 자신의 합동결혼식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다,


이날 잔치에는 ‘동자동사랑방’ 김호태 회장과 사랑방마을 공제협동조합 우건일 이사장,

남영동 동장 마필승씨가 나와 주민들에게 인사를 드리며 어르신들의 건강을 기원했다.



▲ 어버이날 잔치마당을 열고 있는 동자동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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