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서울문화투데이’에서 호출령이 떨어졌다.
조사할게 있으니 인사동으로 나오라는 데, 그것도 공범인 아내 정영신과 함께 오라는 것이다.

70년대 취조 당할 땐, 잡힌 현장 부근의 고려호텔에 끌고 가 물고문하였는데,

지금은 적당한 장소를 스스로 선택하라니, 엄청 민주적이란 생각도 들었다.

 

 

 

 

 

 


인사동 거리는 뜨거웠다.
관광버스에서는 중국인들이 쏟아져 나오고, 사람들은 햇볕에 시달리는 가시적인 것보다,

인사동의 정체성이 사라진 현실이 더 덥게 만들었다.

관청이나 인사동보존회의 사려 깊지 못한 관리에다, 돈만 쫓는 상인들 욕심으로

인사동 본래의 문화와 낭만적 정서가 사라진지 오래기 때문이다.

잡화점에 밀려 난 화랑들은 파리만 날리고 있었다.

 

 

 

 

 

 

 



 

취조 당하기 전에, 그 날 끝나는 ‘아라아트’에서 열리는 황세준선생의 개인전부터 들렸다.

에리베이터에서 내리니, 그 넓은 전시장을 작가 황세준선생 한 분이 지키고 있었다.

작품을 둘러본 후 “좀 팔렸냐?”고 여쭈었더니, 물어보는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다.

스무 차례나 개인전을 연 베테랑작가의 현실이 비참했다.

 

 

 

 

 

 


조영남 대작사건과 이우환 위작사건이 연이어 터진 요즘은 미술거래가 뚝 끊겼다고 한다.
이러다가는 굶어 죽기 십상이라, 모든 예술가들은 국고지원이 따르는 농사나 지어야 할 것 같다.

목구멍에 풀칠하는 게 먼저고 예술은 그 다음이니, 전 국민이 미개인으로 살아야 할 게다.

정치권에서는 이러한 심각한 현실은 아는지 모르는지, 오로지 정쟁에만 눈이 뒤집혀 있다.

 

 

 

 

 


취조시간이 되어 ‘허리우드’로 내려갔다.
경찰서장급인 이은영 기자가 임동현 기자를 대동하고 나왔다.
말주변이 없는 나는 왠 만 한건 모르쇠로 일관했지만, 아내는 조근 조근 말을 잘했다.

묻지도 않는 말까지 실토했다.

난 최민식사진상 문제를 폭로하고, 춘천기획전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거짓 진술은 하지 않았으니, 좋은 판결이 날 것으로 기대한다.

 

 

 

 

 

 

 

 

 

 

술집 “유목민”에서 빨리 오라는 호출이 빗발쳤다.
부리나케 달려갔더니, 노동자시인 김신용씨가 모처럼 인사동 나들이를 했더라.

일찍부터 ‘아라아트’ 김명성씨와 대작해 술이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인디프레스’에서 열리는 삼인전 보러 나왔다며 주인공 장경호화백도 불러냈다.

그런데, 생각 외로 김명성 시인의 얼굴이 밝아보였다.

모두들 인사동 마지막 등불이 꺼졌다고 한탄했으나, 모든 걸 내려놓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한 듯 보였다.

그 와중에도 돌아 갈 차비로 신사임당 한 장씩을 나누어 주었다.

 

 

 

 

 



 

반가운 벗들과 맘 편하게 마시니 술이 땡겼다. 모두 주량 초과다.
나는 소주를 두병이나 마셨고, 장경호는 막걸리를 두병 초과했고,

김신용씨와 김명성씨가 마신 맥주는 병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지나치던 퓨전피아니스트 윤강욱씨가 신세진 게 많았던지,

장경호씨를 대접하지 못해 안달이었지만, 더 마실 상황은 아니었다.

 

 

 

 

 

 

 

 

'다우문화' 김각환 대표도 김명성씨로부터 불려 나왔다.

인사 나눈 김신용씨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장경호씨에게 돈 봉투를 돌려주었다.

지난 번 소래포구에서 장경호씨가 찔러 준 돈 봉투를 그대로 가지고 나왔단다.

아무리 어려워도 벼랑에 선 장경호씨의 돈은 쓸 수 없었던가보다. 정말 가슴 아픈 장면이다.

 

 

 

 

 

 

 



그런데, 술판을 마무리 하는 퍼포먼스가 좀 썰렁하지만 재밋다.
김명성씨가 뒤늦게 나온 김각환씨를 장경호씨에게 소개하자, 김각환씨는 장화백을 잘 안다고 말했다.

그러자 장경호의 시비성 답이 김각환씨 염장을 질런 것이다.
“당신이 날 어떻게 아는 데요?” 그 뒤부터 날 선 말이 몇 마디 오가다 모두들 뿔뿔이 헤어졌다.

그냥 헤어지면 재미 없잖아...



사진, 글 / 조문호

 

 

 

 

 

 

 

 

 

 

 

 

 

 

 

 

기존 한국화에서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색감으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만든 화가 왕열의 개인전인 '왕열展-스르르'가 7월 13일부터 서울 종로구 인사동 선아트센터에서 열린다.

한국화의 전통 수묵을 벗어나 빨강과 파랑을 그림의 주요색으로 하면서 자연합일의 모습을 아름답게 선보였던 왕열은 이번 전시회에서 '유토피아'를 바탕으로 그만의 색감으로 표현한 다양한 무릉도원의 세계를 보여주게 된다.



▲ 왕열_Utopia-A Meditation_72×60cm_Ink-Stick and Acrylic on Canvas_2016


왕열은 작가노트를 통해 "마음을 담으려면 그리는 대상의 형상보다 화가의 의지가 더 중요하다. 이는 자기수련과 상통하며 베토벤이 귀가 먼 일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손에 익을 대로 익은 기교를 빌어 내면 깊숙한 곳의 음악을 펼쳐내어 이를 예술적인 경지로 승화시킨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의 작품은 전통적인 수묵의 기법으로 운무와 계곡, 폭포를 만들고 원근을 조성하고 여기에 모티브인 나무나 새, 말 등을 그리며 이를 '유토피아'라는 큰 제목으로 명명한다. 빨간색과 파란색이 각각 보여주는 느낌이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는 것 같으면서도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한 느낌까지 가지게 만든다.


▲ 왕열_Utopia-A Companion_72×60cm_Ink-Stick and Acrylic on Canvas_2016


지난해 10월에도 개인전을 연 바 있는 왕열은 이번 전시회에서 올해 그린 신작들을 선보이게 되면서 그의 변화를 기다리는 미술 애호가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한국화의 바탕과 밝은 색감으로 새로운 '유토피아'의 모습을 보여주게 될 왕열展은 오는 19일까지 전시된다. 자세한 문의는 02)734-0458. 


[서울문화투데이 / 임동현기자]


대전아트센터 쿠, 오는 9월 2일까지


▲정복수 作


‘골프존문화재단’에서 후원하는 “정복수의 80년대 특별전‘ 개막식이 지난 7일 오후7시 대전 ‘아트센터 쿠’에서 열렸다.

개막식에는 작가 내외를 비롯하여 김영찬 골프존문화재단이사장, 화가 박건 씨 등 100여 명의 축하객이 참석한 가운데, 작가의 아들 정상이 군이 이끄는 4인조밴드 ‘안녕의 온도’가 나와 멋진 축하 연주도 해 주었다.





▲정복수 作


이 전시는 작가 정복수의 1980년대 작품들을 보여주는 전시다. ‘몸의 지도’라는 부제 아래 억눌린 인간의 본성 표출이나 인간 실존에 대한 작가 메시지를 담고 있다.


작가는 탐욕의 인간사를 가장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육체'라는 믿음으로, 1979년 전시부터 여지껏 인간의 절단된 몸만 다루어 오고 있다.



▲정복수 作


언젠가 안성의 어느 산 아래 자리 잡은 그의 외딴 작업실에 들린 적이 있는데, 마치 음습한 정형외과를 연상시켰다. 홀로 외롭게 틀어 박혀, 세상 사람들을 주시하며 인간상을 탐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작업실 곳곳에 가죽이 벗기고 사지가 잘린 육신들이 프레임 속에서 너덜거리고 있었는데,  탐욕에 가득 찬 인간들의 위선을 조롱하는 것 같았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에 의한, 인간성 상실에 대한 비판은 그의 평생 화두였다.



▲정복수 作


그는 경남 의령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중 고등학교를 다녔다. 고등학생 시절의 스케치북에도 사람의 형상들이 그려져 있을 정도로 일찍부터 인간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 이후 홍익대에 진학하며 잠재적 문제의식이 고개들었는데,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중반의 사회문화적 허위의식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되었다.



▲정복수 作


충격적인 그로테스크로 화단에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30년이 넘도록 줄기차게 자기만의 세계를 고집해 온 결과, 한국현대형상 회화에 큰 획을 긋게 된 것이다.

정복수는 신체에 대한 직접적이고 즉물적인 표현을 통해 인간내면에 잠재된 본능을 끄집어낸다. 신체 절단의 부정성이나 원초적인 동물성보다 오히려 유기체로 이해되는 신체 너머의 해방과 자유를 말하기도 한다.



▲정복수 作


그리고 분절된 팔이나 목에서 내뿜어지는 힘찬 줄기는,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절단과 훼손에 따른 핏줄기가 아니라 해방의 내파가 진행 중임을 알리는 에너지 줄기라는 것이다.


전시장을 돌아보니 잘린 신체의 목들이 여기 저기 걸려있었다, 양면성으로 위장된 인간의 모습은 사라지고, 본질적인 욕망만 나뒹굴고 있었다. 마치 영혼들이 허공을 떠도는 것 같았다. 때로는 그림 속에서 신음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림에서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시공간을 넘는 것으로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정복수 作


그리고 80년대 이후부터 화면이 보다 구체적이고 폭이 넓혀져 관찰자로서의 치밀함과 부드러움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또 캔버스 오브제 입체 색연필 드로잉을 이용한 대형 설치작품 등 기법과 형식에서도 다양성을 띤다. 외형상 절단되고 왜곡되고 기형화되어 있어도 매우 아름답고 부드럽다. 그의 육체는 ‘보여주는 육체가 아니라 말하는 육체'라고도 말했다.



▲정복수 作


작가는 "내가 그리는 ‘몸’은 잃어버린 생각들을 찾고 몰랐던 것을 알기 위해 떠나는 무전여행과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작업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다양한 장르로 작업을 확장할 것이라고도 했다.

 

▲정복수 作


미술평론가 유근오씨는 정복수 그림을 이렇게 말했다. “정복수의 작품 속에서 정신 너머에 존재하는 것들이 진정한 실존의 조건이 되어 관객을 향해 날아온다. 그리고는 이내 관객의 폐부를 찌른다. 애달프다. 그렇게라도 살고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우리의 고귀한 신체 이면에 존재하는 그 무엇들이 서글플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찌르는' 정복수의 그림이 안겨주는 소중한 덕목이 바로 이 것이다.”



▲작품 앞에서 작가 정복수 씨.


이 전시는 9월2일까지 이어진다.


조문호 기자/사진가

충무로 갤러리브레송 오는 20일까지




후덥지근한 장마철에 눈이 번쩍 뜨이는 사진전이 열렸다.

오는 20일까지 충무로 ‘갤러리브레송’에서 열리는 양승우의 ‘청춘길일’이다.


일본을 비롯한 외국에서는 숱한 전시를 하였건만, 고국에서는 처음 있는 전시다.


몇 일전, 인터넷에 올라 온 사진들을 보아 기대는 했으나, 사진들을 보고 깜짝 놀란 것이다.

전시장 가득 돈 냄새와 여자냄새, 마약 같은 찐득한 냄새들이 진동했는데, 인간의 존재 의미를 되묻는 듯,

내면에 숨어있는 원초적 욕망을 꿈틀거리게 했다.


전시를 보고 말한 미술학자 이태호 교수의 말이 적확했다.

“고급스런 하위문화가 넘쳐나는 세상에 저질스런 고급문화를 본다.

양승우의 사진을 보면 그동안 우리 다큐가 세상의 한쪽 구석에서 참으로 소심하고

착하게만 놀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반성하게 된다.“고 말했다.


전시장에서 본 작가의 첫인상은 폭력배처럼 우락부락한 것이 아니라, 내성적이고 온순한 사람이었다.

또 겸손했다. 단지 그의 눈빛에서 강한 의지력을 읽었을 뿐이다.






조직 폭력배로 삶을 살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친구가 사진 찍는 동기부여를 했다고 한다.

대개의 다큐멘터리사진가들이 내세우는 사회에 감춰진 이면을 기록하려는 사명감에 앞서,

사진가로서 죽은 친구 사진이 한 장도 없음을 후회하며 살아남은 친구들을 찍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얼마나 솔직한 말인가? 사실, 잘 모르는 사람보다 가까운 사람을 찍는 게 스스로에게 더 필요하지만,

대부분의 사진가들은 명분 있는 사회적 약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양승우 사진에 등장하는 조직폭력배들도 돈 없는 죄와 못 배운 죄를 짊어 진

사회적 약자에 다름 아니며, 똑 같은 인간일 뿐이다.

사진에 드러난 찐득한 모습 뒤에 인간적인 애잔함도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양승우의 사진이 껄끄럽거나, 그 사진 속의 사람들을 손가락질 할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밖으로 들어내지 않아 그렇지, 어느 정도의 양면성은 다 있다.

돈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고, 섹스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전시장에 오는 도중 충무로 역 앞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다, 차가 밀려 내려가 앞 차를 받았다.

경미한 충격이라 내려 보니 차에 아무 이상도 없었다. 그러나 당연한 듯 인사사고를 접수하라는 것이다.

영업용기사야 힘들게 일하는 것 보다 병원에서 지내며 일당을 받을 욕심인지 모르지만,

뒷자리에 앉은 보험회사원까지 병원에 가겠다는 것이다.

더 황당한 것은 예전에는 목이라도 움켜지며 아픈 척이라도 했지만, 지금은 아주 당연하다는 식이다.





이런 지저분한 세상에, 의리 하나로 뭉쳐 사는 그들을 누가 욕할 수 있겠는가?


양승우는 2006년 도쿄공예대학 미디어아트 박사전기과정을 수료하기까지 10여 년 동안

청소를 비롯하여 온갖 잡일에 전전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했다.

그 사이 가부키초의 야쿠자를 시작으로 고토부키초의 일용직 노동자, 노숙자 곤타씨 등 서너 개의 테마를 동시에 찍었다.




20여 년 동안 열 번 이상의 사진전과 네 권의 사진집을 냈고, 열 번 이상의 사진상도 받았다,

그리고 지금은 일본 도쿄의 ‘젠 포토 갤러리’와 프랑스 파리의 ‘인 비트윈 아트 갤러리’ 소속작가지만,

여전히 일용직 노무자로 일하고 있다. 이것이 다큐멘터리사진의 비참한 현실이다.





언급한 이력이나 유명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진들이 주변을 오가며 찍은 것이 아니라

그 조직폭력배의 일원으로 찍었다는 것이다.

함께 즐기며 찍지 않고는 이렇게 강력한 소구력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칫하면 교도소는 물론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 각오로 온 몸을 바쳐 즐기는 사진가가 이 세상에 몇 명이나 있겠는가?





전시된 사진들은 옛 친구들과 놀던 2003년부터 2006년 까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찍은

우리나라 조폭집단의 실상이지만, 일본의 야꾸사들을 찍은 사진집도 펴낸 적이 있었다.

한국에선 조직폭력배 친구들이 많아 쉽게 접근할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일본은 달랐다.

찍으려는 작가의 진정성을 알아보았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의 사진들은 피사체와 작가의 경계가 없다. 그리고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마저 허문 독창성이 있다.

주변의 누군가에 카메라를 쥐어 주고는 자신이 사진화면 속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혹자는 “그게 어떻게 양승우의 사진이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누가 셔터를 눌렀나 보다 함께 교감하는 작가의 의도가 더 중요한 것이다.





사진가가 찍어 온 야쿠샤, 노숙자, 동성애자 사진들은 자기 이야기를 하듯 친밀하게 다가 온다.

어디가 진실이고 허구인지가 궁금할 정도로 기록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자신이 당하는 현실 속의 분노와 욕망의 찌꺼기까지 과감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밑바닥 인생의 솔직하고 과감한 접근들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강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우리사회의 숨겨진 일면을 담아낸 이 자전적 기록들은 누가 뭐래도 역사로 길이 남을 것이다.





이토록 훌륭한 사진가이건만, 살아가는 현실은 비참하다. 한국에 들어 와 살고 싶지만,

한국에는 일거리 얻기가 힘들어, 그나마 아르바이트 일거리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일본에서 산단다.

그 것도 몇 년 동안 길거리에 노숙하며 살았는데, 사진과 재학 때 후배였던 지금의 아내가 결혼을 서둘렀다고 한다.


  
▲사진가 양승우

전시 개막식에서 했다는 그의 말에서 고집스런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오늘 여기 오신 여성분들이 볼 때는 제 사진이 좀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사진이냐? 라고 하시는 분이 계시면 싸울 수 밖 에 없습니다. 예술이란 답도 없고 자기가 하고 싶은 거 해나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앞으로 계속 해 나갈 것입니다.“

전시와 함께 눈빛출판사의 ‘눈빛사진가선 27집’ 양승우사진집 “청춘길일”이 나왔다,

가격은 12,000원이다.








▲조문호 사진가



한 가닥 희망을 걸었던 20대 국회에 문화예술 전문가가 아무도 없다.
비례대표로 뽑힌 국회의원도 없지만, 비례대표에서 지역구를 갈아탄 문화계 출신 후보들까지 모조리 낙마해 버렸다. 지금 정부가 ‘문화융성’을 국정 기조로 삼아 정권의 성패를 걸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었단 말인가. 이런 참담한 현실에서 문화예술을 대한 새로운 정책이 나올 수 도 없겠지만, 나온다 해도 헛다리짚을 게 뻔하다.


지역구 의원 중에는 자칭 ‘문화 전문가’라는 분들이 더러 있다. 제발 좀 웃기지 마라. 문화 예술에 대한 철학이나 전문지식도 없이 보좌관 도움으로 관련법 몇 개 발의하고, 어설픈 글로 책 한 권 냈다고 문화 전문가가 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튼, 문화예술 전문가가 없는 국회로 문화융성은 공염불이 되고 말았지만, 앞으로 가난한 예술가들 살 길이 막막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요즘 예술인들이 사면초가에 몰려있다.
유명 연예인의 그림이 경매에서 고가에 팔린다는 소식으로, 평생 그림에만 매달렸던 전업작가들이 심한 박탈감을 느껴 왔는데, 이젠 조영남의 대작논란으로 사기꾼 취급까지 받게 됐다.

조영남 씨는 평소 “예술은 사기다”라는 말을 즐겨 인용했다. 그 말 자체는 재미있게 풀어가려는 말이었지, 예술은 사기가 아니다. 자기가 사기를 쳤으니 사기로 보였는지 모르겠다. ‘예술을 사기’라고 주장하며 기존의 상식을 깨는 시도를 했던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이나 미국 팝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 같은 이들이 진정 깨 부시고자 했던 것은 기존의 예술가들이 갖고 있던 권위이자 기존 방식만 옳다고 주장하던 선입견이지 창작 행위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기득권에 도전하던 예술가들의 창조 정신이 왜 기득권의 교묘한 방어술로 악용되는지 모르겠다. 조영남씨 경우는 대작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인간적 도리나 양심에서 구제받을 수 없다.

그리고 지난달 미술의 공공적 가치를 고민하게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관광 명소인 서울 이화동 벽화마을의 통로계단 그림들이 주민들에 의해 말끔히 지워 진 것이다. 관광객 유치를 위한 관료들의 생각과 주민들의 생활상에 많은 괴리가 있다는 게 확연하게 드러났다. 공공예산이 들어간 계단그림을 일방적으로 지운 것도 문제이지만, 충분한 교감 없이 시행한 주관 처는 물론, 사업에 참여한 미술인들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현재 국내에 벽화나 조형물이 들어선 마을 프로젝트는 전국적으로 200여 곳에 이른다. 10년 전부터 지자체별로 여러 가지 공공미술 사업들이 추진되어 왔지만, 주민의 삶과 어우러지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다. 작가들이 공무원들과 타협해 관광 위주의 볼거리나 환경미화에 머무르는 작업들을 내놓는 관행이 만연해 있다. 사업이 끝나면 작가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가 흉물이 된 사례도 곳곳에 늘려있다. 작가에게 대가를 지불하는 대신 책임지고 이끌게 하는 방법을 검토해야 한다. 마을 프로젝트에 참여 작가의 이름을 전면에 내 세운다면, 이처럼 소홀이 다루겠는가? 작가는 진정성을 가지고 주민들과 소통하고, 자신의 예술적 아우라를 마음 것 쏟아 부을 수 있는 여건 조성이 절실하다. 머리보다 마음을 앞세워 마을 프로젝트에 임해야 한다.

지금 우리사회의 문화예술은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다. 강남의 디올 빽 사진이 여성비하라며 강제로 내려지는 등 표현의 자유가 침해당하는가 하면, 예술을 우습게 보는 사회적 풍조가 만연하고 있다. 하기야 정치인들이 예술을 하찮게 여기니, 국민들만 나무랄 처지도 아닌 것 같다.

엊그제 가난한 다큐사진가 권철이 충무로에서 사진전을 열었다. 일본에서 모든 지위 다 버리고 귀국한지가 몇 년째지만, 그 결정이 후회스럽다는 것이다. 풀빵장사를 하며 작업은 이어가지만, 한국에서 당하는 굴욕에 대한 그의 절규가 영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더 이상 악밖에 남지 않은 예술가들을 벼랑으로 내 몰지마라.

예술가들이 쓰러지면 문화예술이 쓰러지고, 문화예술이 무너지면 정신도 경제도 나라도 모두 무너진다.


-서울문화투데이-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 20일~30일까지

'사진인을 찾아서' 여섯 번 째 사진가 ‘권철 론’이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리고 있다.

지난 20일 오후6시30분에 개막된 사진전에서 이광수교수의 작가론과 사진가 권철의 결연한 작업 이야기를 들으니, 가라앉은 분노가 또 다시 치밀어 올랐다. 한 동안 정치와 사회적으로 만연한 부조리와 사진판 비리에 목소리를 높여 왔던 것도 권철 같은 고통 받는 다큐멘터리사진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권철,뎃짱1



최민식 사진상이 끼리끼리 해 처먹는 것도 모르고, 작년에 권철씨가 들러리를 선적도 있었다. 사진을 모르는 어린애가 보아도 수상작보다는 권철의 사진이 뛰어나다는 것은 다 안다. 그리고 사진도 사진이지만, 권철은 어렵게 작업을 이어가는 의지의 사진가가 아니던가?

'브레송'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사진인을 찾아서’란 이 기획전은, 사진은 좋지만, 속칭 진골 성골에 가려있는 진정한 사진가를 찾아 내어 작가의 전 작품을 보여주는 전시라, 한 가지 주제로  보여주는 일반 전시와는 기본적으로  다르다. 그리고 보아왔던 회고전 형식의 원로전과도 다른 것은 이건 종료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이다. 생각이나 형식들이 변해가는, 작가들의 주제와 접근방식, 그리고 진전하는 과정들을  한 눈에서 본다는 것은 한 작가를 이해하는데 안성마춤인 것이다.


이번에 초대된 다큐사진가 권철은 못 말리는 '독고다이'다. 이십대 중반에 사진 공부하러 일본 들어가 환락가 신주쿠 가부기초를 촬영했다. 보통 깡다구가 아닌 것이다. 자칫하면 야쿠자 한테 맞아 죽는다. 18년 동안 기록한 그 사진으로 고단샤 출판문화상 사진상도 수상했다. 그렇다고 주먹들의 세계만 보여주는 소재주의에 빠진 사람도 아니다.



▲권철,가부키초2


그는 모두가 외면하는 한센병회복자의 삶은 담은 ‘텟짱’으로 데뷔한 인간미 넘치는 사진가다. '텟짱' 이야기도 마찬가지지만 대부분의 작업들이 진실을 찾아내서 밝히고 그것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이었다.


‘텟짱’은 소외에 대한 이야기다. 일본에서 소외당하고 멸시당하는 '조선인'의 모습을 일본 한센병회복자 요양원에서 찾았는데, 주인공은 요양소에 살았던 시인이자 한센병 회복자인 텟짱이었다. 권철은 텟짱이 사망하기 까지, 14년 동안 그의 삶을 사진으로 담아 온 것이다.


중요한 것은 권철이 다큐멘터리 사진가로서, 헌신적인 정신으로 무장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결정적인 사진 한 두 장만 찍으면 사는 데 지장 없는, 안정된 기자 자리를 사진을 위해 박차고 나온 사람이다.



▲권철,야스쿠니, 국국주의의 망령1


2008년 중국 쓰촨성 대지진을 취재하다 무너진 건물에 끼여 양 다리를 절단하는 소녀의 모습을 보고 한계를 느낀 것이다. 사람에게 닥친 고난이 자신의 밥벌이라는데, 어찌 회의감이 들지 않았겠는가?


저널리즘의 사진기자는 뉴스를 찾아가지만 다큐멘터리 사진가는 스스로 뉴스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래서 권철은 조직이나 배경보다 세상과 독대하며 찍어 왔다. 그러면서도 외양이나 현상에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사회, 그리고 구조와 본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동안 한국과 일본의 근대사가 만들어내는 풍경을 자신의 주제로 삼았는데, 가부키초, 야스쿠니, 오오쿠보 코리안타운, 우토로 등 모두가 일제 식민 경험과 연결된 사건들이다.




권철-야스쿠니,군국주의의 망령3


그 이후, 그의 자식이 태어난 지 100일째 되는 날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터졌다, 가족을 위해 안정된 생활권을 모두 버리고, 무작정 한국으로 귀국하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한국 사진계의 현실을 주위에서 알려주었으나, 그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지금은 제주 거리에서 풀빵 장사를 하며 어려운 작업을 어어 가고 있는 것이다.



▲권철, 야스쿠니,군국주의의망령4



제주에 정착하며 시작한 ‘이호테우’작업은 중국 자본 침탈의 역사를, 한 해녀를 통해 풀어 간 것이다, 바다를 배경으로 한 평생을 살아 온 해녀 할망의 집념과 쓸쓸함이 사진에 묻어있다.


그리고 신자유경제 물결로 인해 서서히 중국인들이 점령해가는 제주의 모습을, 바다 멀리 중국인 관광객들을 가득 실은 어마어마한 크루즈선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권철은 작년 여름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기도 했다.일본 군국주의의 망령을 사진으로 고발하기 위해 제주시 제주목관아 안에서 사진전을 열겠다고 요청하자 제주시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허가 해줬다.



▲권철,야스쿠니,군국주의의 망령2


그런데 광복회 회원 몇 명이 나타나 일장기가 드러난 사진을 '감히' 광복 70주년에 걸려 하느냐고 제주시에 항의하자, 제주시는 그 항의를 받아들여 사진전을 일방적으로 취소해버린 것이다. 일장기가 있으면 친일이라는 그 단순 무지한 문맹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어찌해야 좋은가?,


그래서 야스쿠니 사진들을 이호테우 해변 길거리에서 전시 한 후, 모두 불태워버렸다. 일본의 군국주의에 대한 항거였지만, 잘못된 사회구조에 대한 항거의 뜻도 담겨있다. 그는 있는 사건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있는 사건을 이미지화 한 후, 그 것을 퍼포먼스를 통해 새로운 사건으로 만들어가는 사진가다.




▲권철,이호테우1



그는 야스쿠니 사진을 불 태웠던 이호테우 매립장에서부터 시작하여 제주 전 지역을 순회 전시한다. 다큐멘터리 사진가에서 행동하는 사진가로 발걸음을 옮긴 것이다. 권철이 세상을 독대한다는 것은 곧 세상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망각해버린 역사에 대해서만도 아니다.


자기들끼리 나눠 먹고, 예술이라 이름 붙여 노닥거리는 한국 사진판에 대해서도 저항하고 있다. 

권철은 일본에서 한국으로 귀국한 걸 뒤늦게 후회하고 있다.

 



▲권철, 이호테우2



그 가장 큰 이유는 사진판 자체가, 일그러진 한국 사회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그가 20년간 살아온 일본은 많은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나쁘고, 무식한 나라가 아니다. 일부 정치인들이 제국주의적 근성을 버리지 못해 판을 깨고 욕을 먹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에 대해 배려할 줄 알고, 돈이 없거나 힘없는 사람들을 그렇게 무시하지 않는다. 실력이 있으면 그만큼의 대접을 해 준다.


그렇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았다. 약육강식의 정글이고, 철면피의 세계다. 비단 정치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진판은 더욱 심하다. 권력 있는 기득권자는 자기 패 끼리 판을 짜고, 어중간한 사진가는 그 주변을 서성거리며 온갖 추파를 보낸다.



  

▲사진가 권철


[서울문화투데이] 조문호 기자/사진가



권철이 좌절한 이유가 바로 이러한 한국 사진계의 연줄과 인맥이었다. 실력은 뒷전이고, 줄서기를 잘 해야 하는 이 썩어 문드러진 사진판에 어찌 구역질이 나지 않았겠는가?


그렇지만 그의 작업은 중단되지 않는다. 2011년 일본 동일본대지진 피해지와 후쿠시마 원전을 취재한 후 국내 노후 핵발전소를 찍는 중이다. 두 나라의 핵발전소 문제를 끄집어내는 것만으로 메시지 전달은 분명하다. 그의 다음 작업은 '관광'이라는 이름으로 제주에서 땅을 침탈하는 중국인들이라고 한다.


비평가 이광수교수는 권철이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면서  문학적으로 약간의 표현 방식을 바꾸었다고 말했다. 개 두 마리가 서성거리는 이미지에서 세상이 망해 인류가 사라진 후의 지구를 암시하고, 새끼줄에 묶인 죽은 굴비의 쭈그러진 모습에서 인간이 비참하게 죽어가는 미래를 말한다는 것이다. 


‘갤러리 브레송’ (02-2269-2613)에서 열리는 이 전시는 6월30일까지 이어진다.





[서울문화투데이]


▲조문호 사진가


“강렬하게, 리얼하게” -민족 시원에서 강원까지- 전시를 위한 바이칼 순례 길



백두산이 민족의 성지라면, 바이칼은 한민족의 시원이다. 풍족한 호수라는 뜻인 바이칼의 영성적인 기운을 찾아 동시베리아 남부도시 이르쿠츠크로 떠났다.


‘춘천문화재단’에서 주최하고 미술평론가 최형순씨가 기획한 “강렬하게, 리얼하게” -민족 시원에서 강원까지- 전시를 위한 바이칼 순례 길은 지난 13일부터 17일까지 이어졌다.


오는 7월13일부터 26일까지 ‘춘천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릴 이 기획전에는 권용택, 김대영, 김용철, 길종갑, 서숙희, 신대엽, 이재삼, 조문호, 황재형, 황효창씨 등 강원도 작가 열 명이 참여할 예정이다.


우리민족 DNA속에 내재된 신화 속 선조들의 뿌리를 찾는 일로, 바이칼 호수를 통해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찾아 작업에 반영시키는 프로젝트다.


우리 민족 DNA의 원류를 찾아...바이칼호수는 세계서 가장 오랜 역사와 가장 깊은 내륙호



▲아직 눈이 녹지않은 설산과 호수에 깔린 기운이 심상찮다.(사진=조문호)


이르쿠츠크에서 출발한 버스는 자작나무숲과 완만한 구릉의 초원을 한 편의 영화처럼 펼쳐 보이며, 네 시간 넘게 달려서야 알혼 섬으로 들어가는 샤후르따 선착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선착장 주변은 여름철 성수기를 대비한 진입로공사와 부대 시설물 신축으로 부산했다. 원형을 잃어가는 모습이 안타깝기 그지없으나 몰려드는 관광객 수용을 위한 최소한의 일로 보였다.


▲바이칼호에서 연결된 이르쿠츠크의 앙가라강.(사진=조문호)


만약 우리나라에 이런 곳이 있었다면, 몰려드는 투자자들로 본래의 모습은 깡그리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바이칼호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가장 깊은 내륙호로 최고수심이 1,620m이며 길이 636㎞, 평균너비 48㎞, 면적 3만 1,500㎢나 되는 제주도 절반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다. 호수에 있는 물이 다 빠져 나가는데 걸리는 시간이 약330년이고, 담수량은 미국 5대호를 다 합친 것 보다 많다는 등 모든 면에서 세계 최고를 자랑한다.



▲알혼섬을 감싼 호수 왼쪽에 악어바위가 보인다.(사진=조문호)


 5억년이나 된 변성암, 퇴적암, 화성암으로 구성되며 호수 바닥의 퇴적층 두께는 무려 6,000m에 이른다. 호반 가까이에는 사화산들의 지각변동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 가끔 심한 지진이 발생한다고 한다.


바이칼 호의 기후는 주변지역보다 훨씬 온화해 1~2월의 기온은 평균 -19℃이고 8월평균기온은 11℃가량이다. 호수 면은 1월에 얼고 5월에 녹는다. 8월의 수면온도는 약 13℃이고 해안에서 가까운 얕은 곳에서는 수면온도가 20℃에 이른다.



▲알혼섬에서 가장 기가 세다는 부르한 바위.(사진=조문호)


파고는 4.5m 이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 호수는 광물을 거의 함유하지 않아 수심 40m 까지 들여다보이며 염도도 낮다. 특히 이곳에 서식하는 민물세우가 물을 정화하는데 크게 기여한다고 한다.


바이칼 호의 동식물 생태 또한 풍부하고 다양하다. 수심에 따라 1,200종이 넘는 동물이 서식하고 600종에 가까운 식물이 수면 위나 수면 가까이에 분포한다. 이 가운데 약 3/4은 바이칼 호의 고유종이다.


▲하보이언덕을 향하는 협곡.(사진=조문호)


어류의 경우 52종 중 27종이 ‘오물’같은 고유종으로 특히 연어류가 많이 잡힌다. 가장 큰 종류는 철갑상어로서 길이 1.8m, 무게 120㎏에 이르며, 코메포리다이과에 속하는 골로먄카라는 수명이 짧은 물고기도 서식한다. 그 중 유일한 포유동물은 바이칼 물범이며, 주변지역에는 326종의 조류와 곰이나 사슴도 서식한다.


동식물 생태 또한 풍부하고 다양, 그 중심에 신비한 영기가 서린 알혼섬 


바이칼호수에 있는 26개의 크고 작은 섬 중에서 알혼 섬이 가장 큰 섬으로 인구는 3,000여명에 불과하다. 바이칼호수가 시베리아의 푸른 심장이라면 알혼 섬은 바이칼호수의 심장이라 했다.



▲샤먼의 근거지답게 열세개의 세르게가 줄지어 서있다.(사진=조문호)


바지선에 실려 알혼 섬으로 들어갔더니, 사륜구동 우아직이란 별나게 생긴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나누어 타고 숙소가 있는 후지르 마을로 향했는데, 원주민 기사의 운전솜씨가 만만찮았다. 두 대중 한 대는 번호판도 없는 무적차량인데, 사고 나면 끝장이겠다는 생각에 모두들 가슴 조려야 했다. 비포장 길을 얼마나 달리는지 마치 미쳐 질주하는 마차를 탄 기분이었다.


알혼섬은 그리 높지 않은 언덕과 구릉지가 끊임없이 펼쳐져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포근하고 차분한 느낌을 안겨주었다. 수많은 기암괴석들, 넓은 해변, 호수와 산, 하늘과 맞닿은 풍경들은 신비롭다 못해 신성하게 다가왔다.



▲땅끝 지점의 하보이 언덕에 선 신목.(사진=조문호)


통나무로 지어진 숙소에 여장을 풀고, 해변이나 다름없는 호숫가로 몰려 나가니 석양을 받은 호수는 금빛처럼 빛났고, 그 옆에 버틴 오방색 천에 감긴 신목에서 영험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저절로 큰 절을 올리며, 입에서 주문이 흘러나왔다. 제발! 저의 악업을 거두어 달라는...


그 자리에서 필자가 20여 년간 끌어 온 작업, ‘생명’전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산과 바다나 늪지 등 전국의 성스러운 자연과 함께 담아 온 남성 알몸 찍기에 화가 길종갑씨가 마지막 모델로 나서 주어 가능했다.



▲고풍스러운 모습을 간직한 이르쿠츠크의 통나무집들.(사진=조문호)



바이칼서 25년간 미완의 남성 알몸 찍기 ‘생명’전 마무리, 화가 길종갑씨 마지막 모델로


그 찬 호수 물에 정갈히 몸을 적셔, 기를 모아 주는 열성까지 보여주었는데, 얼마나 물이 차가웠으면 거시기가 자라목처럼 쏙 들어가 버렸다. 아무튼 바이칼호수에 발만 담가도 몇 년을 더 살 수 있다는데, 온 몸을 담가 영생하게 되었으니, 그것으로 미안한 마음은 좀 덜었던 것 같다.




▲하보이언덕 나뭇가지를 휘감은 오방색 천.(사진=조문호)


92년도부터 시작된 이 프로젝트에 30명의 작가가 참여하였으나, 그 중 두 분이 저승으로 떠나버렸다. 촬영에 응해준 분들은 전시 후에 사진을 드린다는 약속이 전제되어 있었는데, 그게 지켜지지 않아 늘 마음의 짐이 되어왔다. 항상 집에 걸어두고 죽은 후에는 영정사진으로 쓴다는 약속이 무산된 것이다.


사실 ‘생명’전 작업을 여지껏 마무리 하지 못한 원인은 팔리지 않는 전시인데다, 제작비가 많이 소요되어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었다. 자연속의 육신을 실제 크기로 프린트해 세우려면, 그 비용이 만만찮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 이번 기획전의 내용과 맞아 떨어져 밀어붙여 버렸다.



▲이르쿠츠크에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김치식당, 김치찌게가 일품이었다.(사진=조문호)


알몸에 대한 잘못된 관념에서 해방되려 본인 사진부터 방에 걸어 두었는데, 이내 가족들이 익숙해지는 것을 보았다. 내가 죽고 나면 영정사진으로 쓰라고 아내에게 당부도 해 두었다. 억지로 슬픈 표정을 짓는 것보다, 모두들 웃으며 저승길로 보내달라는 취지다.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는데, 울고 불며 야단법석 떨면, 떠나는 망자의 마음이 편하겠나? 재수 없어 될 일도 풀리지 않을 것이다.


숙소로 돌아와 러시아 전통사우나인 반야라는 독특한 체험도 했다. 이는 장작불에 달궈진 조약돌에 물을 끼얹어 거기서 나오는 증기와 열기로 체온을 덥히는 일종의 증기욕인데, 자작나무 잎으로 몸을 두들기니 은은한 자작나무향이 온몸을 감싸 올랐다.




▲바이칼 호수변에서 인물스케치를 하는 화가.(사진=조문호)


자작나무 사우나 '반야'와 지금도 생각나는 바이칼 생선 '오물'


자작나무로 몸을 두들기는 건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밖에 없어, 내가 황효창선생을 두들겨 드리려 했더니, 쏜살같이 나가버렸다. “설마, 시원하게 두들기지, 아프게야 할까?”


체류기간동안 사람 입이 너무 간사하다는 것도 재차 실감했다. 몇 일간 보드카 좀 마셨다고, 그 좋아하던 소주가 싱거워 못 마시겠더라.


이튿날은 우아직에 실려 바이칼 북쪽 끝으로 내달렸다. 탁 트인 언덕위에 올라서니 어디가 호수고 어디가 하늘인지 분간하기 힘들더라. 시야는 온통 푸른색으로 물들어 버렸고 가슴은 벅차올랐다. 마치 가슴에 맺혔던 한이 깊은 호수로 스르르 가라앉는 것 같았다. 호수에 깔린 성스러운 공기, 성스러운 빛과 기운들이 내 몸속으로 베어드는 신성함에 빠질 수 있었다.



▲바이칼만의 생선 '오물'을 말리고 있다.(사진=조문호)


그런데, 도시락으로 싸왔던 '오물'이란 생선을 영 잊을 수가 없다. 생선을 쪄서 가져왔는데, 젓가락 없이 손으로 먹어야 했던 것이다. 더러운 손으로 발라 먹었으니, 영락없는 원시인이었다. 옛날에는 대부분 그렇게 살았겠지만, 옛말처럼 ‘모르는 게 약’이란 말이 정답이었다.


알혼섬에서 가장 영기가 센 바위로 불리는 부르한바위(일명: 샤먼바위)에는 대제국을 호령한 징키스칸이 묻혔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빼시안카에는 돌덩이 부두와 건물잔해만 남았지만, 구 소련시절 정치범들을 가둔 수용소 터도 있었다. 그 곳을 지나 최북단에 이르니 연인처럼 어깨를 마주한 ‘사랑바위’가 보였다.



▲연인처럼 어깨를 마주한 사랑바위.(사진=조문호)


자식을 바라는 염원의 자리로 왼쪽 봉우리에 서면 아들, 오른쪽 봉우리에 서면 딸을 얻을 수 있다고 전해진다. 유독 붉은 기운을 내뿜는 ‘삼형제바위’를 비롯하여, 사자머리와 악어형상을 한 바위 등 많은 이야기가 담긴 풍광을 조망할 수 있었다.


샤먼의 고향 바이칼, 매년 샤먼축제, 샤먼은 삼(三)과 안(하늘天, 신神)의 글자 합, 삼신할머니 유래


샤먼의 고향인 바이칼에서는 매년 세계 샤먼축제가 열린다. 샤먼이란 말은 삼(三)이란 글자와 안(하늘天, 신神)이란 글자가 합쳐진 말이다. 우리가 쓰는 표현을 빌리면 삼신할머니란 삼신이란 단어에서 유래된 말이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사문도 샤먼에서 나온 단어이다.


삼안이란 단어는 아주 먼 옛날부터 북부 초원지대와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 쓰여 왔다. 이것을 서양학자들이 듣고 자신들의 발음으로 옮긴 단어가 샤먼이다. 이 샤먼을 통해 이루어지는 모든 종교적 행위, 관습 등 관련문화를 샤머니즘이라 말한다.



▲칼호이저 야시장에 옷가지를 팔러 나온 할머니.(사진=조문호)


칭기즈칸이 통치하던 시절, 라마교의 탄압으로 바이칼이 샤먼들의 유일한 은신처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곳은 부랴트족의 조상이라 불리는 호리도이의 신화가 숨 쉬는 장소이기도 하다.


전설에 따르면 바이칼호수의 여러 신들이 이곳에 모여 살았는데, 그 중 흰 독수리 형상의 옷을 입고 지내던 '한후테-바바이’의 아들인 ‘한쑤부-노이온’이 최초로 탱그리(하늘신)로부터 최고의 능력을 인정받았다는데, 그 탱그리 신화는 단군신화와 유사점도 있었다.


인류 최초의 사람 나반과 아만이 7월7석에 건넜다는 바이칼에서 아만에서 아빠, 엄마 나와


기록에 의하면 인류 최초의 사람 나반과 아만이 7월7석에 건넜다는 곳이 바이칼이다. 나반과 아만에서 아빠, 엄마, 아버지, 어머니라는 용어가 나왔다. 그래서 영어의 마마와 파파처럼 전세계 언어권에는 비슷하게 발음하고 뜻이 같은 단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인류가 탄생한 호수여서인지 호수 성분도 어머니의 양수와 비슷하다고 한다.



▲ 칼호이저 야시장에서 옷사이즈를 재보는한 남성.(사진=조문호)



그리고 몽골족의 하나였던 부리야트 족의 기원으로도 알려져 있다. 러시아의 소수민족중의 하나인 브리야트족은 한국인과 외형적으로 가장 닮았다. 발길 닿는 곳곳에 솟대와 신목, 그리고 소원을 비는 돌무더기와 오색 댕기들이 펄럭였다. 알혼섬 곳곳에 남은 샤머니즘의 흔적들이 우리민족의 발원과 유력한 관계를 말해 주고 있었다.


원주민들 눈빛과 표정 친밀감, 강강수월래나 씨름을 닮은 전통놀이부터, ‘나무꾼과 선녀’, ‘심청전’ 같은 전설들도 우리와 비슷


여행 중 두 차례에 걸친 세미나에서도 우리민족과의 동질성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왔다. 황효창선생은 도처에 남아있는 샤먼의 흔적에서 확신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하셨고, 바이칼을 시베리아의 거대한 자궁이라 말해 온 황재형씨는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고향을 찾은 듯 너무 편안하다고...



▲코발트의 물빛 층이 신비롭다.(사진=조문호)


야시장에서나 숙소에서 만난 원주민들의 눈빛과 표정들도 한국 사람처럼 친밀감이 느껴졌다. 곳곳에 피어있는 할미꽃도 그렇지만, 솟대와 장승, 신목 등 우리의 문화와 동일한 것이 너무 많았다. 강강수월래나 씨름을 닮은 전통놀이에서부터, ‘나무꾼과 선녀’나 ‘심청전’ 같은 전설들도 우리와 비슷했다.


이미 우리민족의 이동 경로나 DNA까지 조사한 역사학자들의 고증들이 있으니,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조문호 사진가


어버이날이 부끄럽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장모님께서는 이런 저런 병으로 십 여 년을 병상에 계신다.

올해로 아흔 다섯인 장모님은 폐암 말기에다 양쪽 골반이 무너져 내려 오랜 세월 고생스럽게 연명하고 있다.

두 번씩이나 산소공급기를 차단하자는 병원 측 제안에도 지극정성으로 살려 낸 아내의 효심이야 갸륵하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나로서는 안쓰럽기 짝이 없었다.

장기간 환자를 돌보다보면 정신적, 육체적 나아가 경제적으로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가난한 살림살이에 병원비를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쩔쩔매며 병원으로 일터로 쫓아다니는 아내의 모습을 보면 가끔은 장모님이 원망스럽기도 해,

그냥 편안하게 세상을 떠났으면 하는 불효를 저지르지만, 사람 목숨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

긴 세월 병원비를 내다보니 환자가족들에게 가장 큰 부담으로 닥아 오는 게 간병비였다.

직접 간병하면 되겠으나, 한 푼이라도 벌기위해 일터로 나서야하니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문제는 그 간병비를 악덕 병원 업자들이 착복한 다는 것이다.

몇 년 전 처음 알았을 때는 너무 분통이 터져 병원 측에 항의도 했다.

그래도 시정되지 않아 언론사의 지인에게 하소연했더니 오래 된 관행이라 했다.

“노인복지 노인복지” 노래를 부르는 이 대명천지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문둥이 코 구멍에 마늘을 빼 먹지, 벼랑에서 허덕이는 가난한 노인들의 등을 치다니...

그렇게 더럽게 축재해, 돈 되는 노인 병원 확장에 혈안 되어있다.

문제는 보건 복지부에서 이러한 부정을 방치하며 등짐 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건 공무원들의 직무유기다.

장모님이 입원하신 서울 녹번동의 노인병원에는 한 병실에 다섯 명의 환자들이

오늘 내일 하직할 날만 기다리며 연명하고 계시다.

병원비만 보내며 거들떠보지 않는 자식들에 대한 원망마저 지쳐버려, 다들 말을 잊고 사신다.

이 분들의 간병비 부담은 하루 37,000원이다. 다섯 분이니 185,000원이 된다.

다섯 환자를 한 사람의 간병인이 돌보는데, 하루 60,000원을 받는단다.

나머지 125,000원은 어디로 갔는가? 수많은 병실이 있으니 그 착복하는 돈은 엄청나다.

환자들의 피해도 커지만, 간병인들의 대우도 엉망이다.

간병비를 적게 주려고, 약점 있는 조선족 여인네를 고용하는가 하면, 칠순이 된 할머니까지 간병인으로 쓴다.

대부분이 중증 환자인데, 그분들의 대소변을 혼자서 제대로 받아내겠는가?

그들이 병원에서 지내는 현실은 비참하기 짝이 없다. 교대할 사람이 없어 밥도 간신히 짬을 내어, 서서 먹는다.

그리고 탈의실이 없어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는가 하면, 잠은 쪽잠을 잔다.

병원 측에서는 간병업체(소개소)에서 소개비뿐만 아니라 월 회비 등 각종 명목으로 돈을 뜯어가기 때문이라지만,

그 건 말도 안 된다. 그런 것을 정부에서 보조하고 관리하여, 모든 운영시스템을 투명하고 효율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가장 기본적인 욕망인 애정과 더불어 안전 및 사회적 공감의 욕구를 가진다.

이중 애정에 대한 욕구는 식욕, 수면욕과 같은 인간의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다.

그런데 고령사회가 급속도로 진행 중인 우리의 현실은 노인들의 상위욕구는 고사하고 기본적인 욕구마저 보장돼 있지 않다.

가정과 돈에서 소외된 노인들의 급증은 인간적 도리마저 짓밟는 비정한 사회로 만든다.

노인 문제라는 시한폭탄을 해결하지 않으면 사회는 물론 국가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외로움으로 치닫는 한국 노인들의 이 암울한 현실을 어찌해야 할까?

환자는 간병비 부담 덜어 편하게 간병 받고, 간병사도 병원에 직접 고용되어 환자들이 더 좋은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만 있다면, 환자는 물론 간병인에게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겠는가?

법적 제도적 장치를 하루속히 마련해 가난한 서민들의 시름을 덜어주기 바란다.


- 서울문화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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