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일동 명창, 판소리 강의도 고수
우리 것이 밀려나는 요즘 인사동에 '통인 판소리 한마당'이 불씨 같은 역할을 해 준다. 인사동 ‘통인가게’에서 정기적으로 마련하는 판소리 감상회는 봄 가을 두 차례 열린다.
지난 봄에 이어 세 번째 소리판을 연 배일동 명창은 이 시대가 낳은 걸출한 소리꾼이다. 그의 판소리는 들을수록 심금을 울리는데, 소리꾼의 나이가 믿기지 않는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득음의 경지야 말할 것도 없고, 청중의 감정을 끌어내는 흡인력에 혀를 두를 지경이다. 이 메마른 세상에 어디서 이처럼 울고 웃을 수 있겠는가? 단가 “이산 저산”을 비롯하여 춘향가 중의 ‘사랑가’, 쑥대머리, ‘어사와 춘향모친 상봉대목’, ’심청가 중의 ‘심봉사 눈뜨는 대목’을 차례대로 불렀는데, 춘향의 ‘사랑가’는 애간장을 다 녹였다. “사랑사랑 내 사랑아 어허둥둥 내 사랑아~
저리가거라 가는 태를 보자. 이만큼 오느라 오는 태를 보자. 아장아장 걸어라 걷는 태를 보자.” 얼마나 좋았으면 저리 간 들어지게 놀았겠는가? 사또 수청 들기를 거부하고 옥중에서 신세 한탄하는 ‘쑥대머리’에서는 눈물이 절로 났다. 솔직히 고백하건데, 여태껏 판소리를 듣고 웃은 적은 많지만, 눈물 흘린 적은 처음이었다. 그게 바로 소리 속으로 끌어당겨 일심동체가 되도록 만드는 배일동 명창의 매력이다. 입으로 부르는 소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부르는 소리라 이심전심이 되는 것이다.
어사와 춘향모친 상봉대목’에서는 춘향 모친의 해학이 절정이다. 거지행색을 보고 모른다고 푸대접하던 장모가 사위 다그침에 급변하여 ‘하늘에서 뚝 떨어졌나 땅에서 불끈 솟았나. 하운이 다기봉터니 구름 속에 쌓여왔나, 풍설이 쇄란터니 바람결에 날려왔나. 이 사람아 뉘 집이라고 아니 들어오고 문밖에서 주저 하는가" 또 한 가지 귀가 번쩍 뜨이는 대목은 ‘심봉사 눈뜨는 대목’이다. 바로 기쁨의 눈물을 맛보게 한 것이다. “죽고 없는 내 딸 심청이가 어디라고 살아오다니, 이게 웬말이냐? 내 딸이면 어디보자. 어디 내 딸 좀 보자. 아이고 답답하여라 이놈의 눈이 있어야 내 딸을 보지, 심봉사 감은 눈을 끔적끔적 하더니 두 눈을 번쩍 떴구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장님이 딸을 한번도 보지 못했으니, 딸을 알아볼까 걱정되었다. “이렇듯 천지조화로 심봉사가 눈을 뜨고 나니, 만좌 맹인이 모다 개평으로 눈을 뜨는디” 심봉사의 절절한 회한에 눈물 흘리게 하더니, 두 눈을 번쩍 뜨는 대목에서 기쁨으로 몰아치다 마지막 대목에서 그만 웃음이 터지게 만든 것이다. 바로 이것이 판소리 맛이다. 구절구절마다 온갖 내용이 다 들어있지만, 소리꾼이 그 감정에 흠뻑 빠지지 못한다면 어찌 청중에게 전해지겠는가?
이 날 고수로는 배일동 명창의 삼십년 친구인 김동원 교수가 북채를 잡았는데, 너무 조가 잘 맞았다, 옛날부터 ‘1고수, 2명창, 3청중’이란 말이 있듯이, 고수가 소리꾼의 온갖 감정을 다 끌어내는 지휘자고 바람잡이가 아니던가? 그리고 배일동 명창이 들려 준 판소리의 이해에 다들 귀가 솔깃했다. 한 박자나 두박자로 되는 일본이나 중국과는 달리 삼박자로 진행되는 우리소리의 독창성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소리로 이해도를 높였다. 뭐든지 알아야 귀에 들리고 눈에 보인다. 우리가 배일동 명창의 소리에 빠져 웃고 울었던 비결로, 소리뿐 아니라 교수법도 탁월했다.
여태껏 선호도에서 국악이 서양음악에 밀리는 것은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판소리의 독창성이나 음악성을 높이 사지만, 아직 대중성은 한 참 멀었다. 그래서 대중을 상대로 판소리의 제 맛을 깨우치게 해 주는 배일동씨 같은 분이 필요한 것이다. 악보가 필요 없는 판소리가 외국의 오페라 보다 한 수 위지만, 교육이 따르지 못해 밀린 것이다. 나 역시 어릴 때, 잔칫날 소리꾼 불러 벌이는 소리판에 별 흥미 없었다. 판소리 가사야 조금 알았지만, 시조는 뭐가 뭔지도 몰랐다. '영감들 무슨 귀신 싸나락 까먹는 소리 할까?' 생각했다. 가사를 모른다면 잘 모르는 외국노래 듣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러다 뒤늦게 음악을 좋아하며 LP판을 사 모아 음악실을 차린 것이 판소리 가치를 알아 본 계기다. 락이던 재즈든 가리지 않을 때였으나, 점차 우리 음악의 매력에 빠져든 것이다. 결국 부산 남포동에 ‘한마당’이란 국악전문 주막까지 차렸는데, 생각 외로 손님이 밀려들었다. 동아대 학생들이 손님이었지만, 자글거리는 레코드에서 나오는 임방울선생 ‘쑥대머리’ 맛을 제대로 아는 손님이 얼마나 되었겠는가. 단지 우리 소리고 우리의 정서라는 매력이 손님에 손님을 끌어 들인 것일 게다. 그런데, 뽕짝 가수를 모시는 밤무대는 지천에 늘렸는데, 명창들 모시는 밤무대는 왜 없을까? 다 우리 것을 우습 게 보고 외국 문명에 놀아난 결과다.
통인 판소리 한마당이 끝난 후, 통인 관우 김완규 선생이 계신 ‘상광루’에서 막걸리 파티가 열렸다. 그 많은 술이 바닥나 낙원동 아구찜 식당에서 포장마차로 전전했는데, 그 날 관우선생께서 술이 취해 ‘이산 저산’을 쉼 없이 불렀다. 그 단가에 나오는 내용이 마음에 박혔을까?
봄은 찾아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허드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늘 백발 한심허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 헌들 쓸데가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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