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식 3주기 추모전
이두식展 / LEEDOOSHIK / 李斗植 / painting
2016_0223 ▶ 2016_0322



이두식_무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62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0114c | 이두식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6_0223_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갤러리 H

GALLERY H

서울 종로구 인사동9길 10

Tel. +82.2.735.3367

blog.naver.com/gallh



충동적인 작화의 내면-이두식의 작품세계 ● 표현주의 추상미술이 등장한 이후 제작의 태도에 있어 두 가지 흥미로운 유형을 발견할 수 있다. 화면에 마주해서 머릿속에 진척된 구상을 조심스럽게 실현해나가는 숙고형이 있는가 하면, 화면에 다가가자마자 돌진하듯이 붓을 휘둘러는 충동형이 있다. 결과는 쉽게 유추된다. 전자가 무언가 예기된 것을 차근차근 풀어 보이는 모습을 보이는 반면, 후자는 예기치 않는 상황의 변화 속에 자신을 추구하는 모습이다. 이 같은 분류에 적용한다면 이두식은 후자에 속하는 타입이다. 그래서 그의 화면은 충동적이고 상황적이다. 충동적이기 때문에 언제나 시작과 끝이 정확히 예견되지 않으며 상황적이기 때문에 화면은 언제나 현재진행중이다. 언젠가 작가가 한 다음의 언급은 그의 제작의 내면을 극명하게 표명해주고 있다. ● " ...언제부터인가 점점 힘이 붙는다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나 감각이 스피드해졌어요. 또 탄력이 붙은 탓인지 작품 속의 이미지도 다양하게 분출되는 느낌이에요."


이두식_대상무형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116cm_2011


감각이 스피드해졌다는 것과 탄력이 붙었다는 것은 충동에 의한 화면 경영을 실감시킨다. 그러고 보면 그의 창작의 역정에서 후반기로 올수록 탄력적인 요소가 강하게 반영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데뷔기의 작품은 대단히 정제된 구성에 기반한 것이었고 밖으로 보다는 안으로 집중되는 경향이었다. 그것이 80년대 후반에 이르면서 점차 밖으로 분출하는 경향을 띠기 시작하였다. 표현의 열기가 화면을 압도하는 형국이었다. 붓이 생각을 앞질러나갔다. 그린다는 행위가 압도함으로써 일어나는 즉흥성, 봇물 터지듯 흘러넘치는 에너지의 자적, 화면에서 일어나는 상황은 한편의 드라마를 연상시켰다. 작가는 이 생생한 현장에서 "시각적 쾌감"을 즐긴 것이다. 시각적 쾌감을 창작의 진행 가운데서 맛본다는 것이 얼마나 감동적인가.


이두식_심상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62cm_2011


이두식_심상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62cm_2011


그의 창작행위를 두고 드로잉적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의 작품 가운데는 타블로에 못지않게 드로잉이 많은 편이다. 그러니까 전체 작품을 두고 드로잉적인 요소가 많다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는 초기에서부터 많은 드로잉을 시도하였다. 연필선이 기조가 되면서 담채가 곁들여진 것이었다. 드로잉이 타블로를 위한 예비적 단계가 아니라 그 자체 완성작이었다. 드로잉만으로 개인전을 가질 정도로 숫자에서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역 속에서 그만큼 애착을 지닌 것이었다. 드로잉 가운데는 구체적인 인물의 초상이나 누드가 있는가 하면 나무, 열매 등 식물적 이미지와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형상들이 채워졌다. 극명한 사실적 표현에서 환상적인 반구체적 상형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진폭을 지닌 것이었다.


이두식_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116cm_2011


이두식_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2×162cm_2009


이두식_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00×250cm_2009


그의 추상적인 타블로작품 역시 드로잉적인 요소가 풍부하게 잠재된다. 순수한 자동기술로서의 풍요로운 색채의 난무는 그의 주제 가운데 하나인 축제에 가장 상응되는 것이기도 하다. 전반적으로 금욕적인 기운이 팽배한 한국의 현대미술 속에서 이 풍요로운 색채는 그의 존재를 돋보이게 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어쩌면 그는 데뷔기에서부터 현대미술의 주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계를 가꾸어온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보편적 미의식에 함몰되지 않고 자기 세계를 밀고 갔다는 것은 여간한 뚝심이 아니곤 불가능하다. 이런 뚝심이 창작 외 미술사회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두식_무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00×500cm_2009


2011년 중국 북경의 중국미술관에서 가진 개인전의 주제가 심상, 풍경, 축제였다. 이 주제는 그가 초기에서부터 지속적으로 추구해온 것으로 이를 다시 집약시켰다는 것은 이 개인전이 회고적인 성격임을 암시해주고 있다. 어쩌면 작가는 이 전시가 자신의 마지막 전시임을 예감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전시에 출품된 작품을 일별하면서 발견한 것은 지금까지의 풍요로운 색채의 사용이 수묵 톤의 단조로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많은 거장들의 만년에 이르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경향과도 비견된다. 완숙에 이를수록 색채는 더욱 절제되고 더없이 가라앉는 깊이의 구성으로 나아가는 경향 말이다. 흰 캔버스에 그려진 작품이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느낌을 주는 것은 놀라운 변화를 예감시키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것이 좀더 진척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 오광수



Vol.20160223a | 이두식展 / LEEDOOSHIK / 李斗植 / painting








80년도, 인사동에서 처음  만난 친구들도 이제 몇 남지 않았다.
그림 그리는 이청운씨는 2년 넘게 병원에 감금되어 있고,
시 쓰는 김신용씨는  젊어 지게를 많이 져, 관절이 아파 못나오고,
소설 쓰는 배평모씨는 풍기에 유배되었으니, 잘 만날 수가 없다.


그렇게 하나 둘 떠나가고, 흘러가는 게 이치라면 따를 수밖에...

지난 일요일 이청운씨가 입원한 ‘연세노블병원’에 잠시 들렸다.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으나, 잘 가지지 않았는데,
모처럼 찾았더니 엄청 반가워했다.


이 친구는 가래가 많아 목에 구멍을 뚫어 빼 내고 있었다.
처음 구멍을 뚫어 호스를 박으려니 강력하게 거부했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박기는 박았으나, 폼에 살고 폼에 죽는 그로서는 스타일 구긴 것이다.
“야! 청운아~ 이제 그게 너만의 패션이야.”했더니 빙긋이 웃었다.

“꽃피는 춘 삼월되면 대포 한 잔 해야지!”라고 말했더니,
무표정하게 천정만 쳐다보았다.
좋아했던 지난번에 비해 마음에 변화가 생긴 듯 했다.
그 좋아하는 술이 마시고 싶지만, 어떻게 웬수 같은 걸 또 마실 수 있으랴.
마음에 새겨놓은 그림 그릴게 늘렸는데, 그 깐 술에 죽을 수 없다는 것 같았다.

24시간을 붙어 있는 이화백 부인의 행색도 환자나 다를 바 없었다.
이년 넘도록 간병하며 지냈으니, 남들 처럼 화장 한 번 해본지도 옛날이야기다.


에레베이터까지 따라 나온 부인에게 말했다.

“어쩌면 남편과 함께 한 시간은, 병원에서 함께한 시간이 더 많을듯합니다?”
고개를 끄떡였다. 늘 집과 작업실에서 떨어져 생활했기 때문이다.
그 전에는 작업에 파 묻혀 술과 담배를 달고 살았으니, 내외간의 정은 덜 했을 수도 있다.
이제 모든 일 다 떨치고 두 내외가 함께 부대끼고 있으니,
어쩌면 행복한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그래 친구야! 대포는 못하더라도, 봄되면 꽃놀이라도 가자.”

사진,글 / 조문호




 

-2016년 개인전ㆍ그룹전 잇달아 갖는 민중미술가 신학철 화백 단독 인터뷰


[헤럴드경제=김아미 기자]


2016년 민중미술이 화두다. 서울 메이저 갤러리와 경매회사들이 앞다퉈 2016년 미술계 키워드로 민중미술을 잡았다.

민중미술은 1980년대 진보 성향 미술인들을 중심으로 펼쳐진 미술운동이다. 심미주의적 모더니즘에 대한 반성이었고, 민주화운동과 맥을 함께 해 왔다. 1970~1980년대 미술계 주류였던 모노크롬(단색화)과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 



신학철 화백. [사진=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단색화를 대표하는 이우환 화백의 과거 발언을 빌자면, 단색화가 1970~1980년대 군사정권에 대한 ‘침묵의 저항’이었다면, 민중미술은 ‘온 몸의 저항’이었다.

지난해 말 경매회사 서울옥션이 오윤, 신학철, 권순철, 황재형, 강요배, 임옥상, 이종구 등 민중미술가 작품들을 시장에 띄우며 ‘아트포라이프(Art For Lifeㆍ삶을 위한 예술)’라는 타이틀을 걸었듯, 민중미술은 ‘아트포아트(Art For Artㆍ예술을 위한 예술)’와는 대척점에 있는 장르였다.

아이러니다. 2년여 지속돼 온 단색화 열풍이 오래도록 침체돼 왔던 국내 미술시장에 활기를 불어 넣으며, 그 대척점에 있던 민중미술까지 함께 주목받고 있으니 말이다.

미술계에서는 ‘포스트 단색화’로 민중미술을 꼽는 이들이 많다. 게다가 갤러리와 경매사를 통해 그림을 사는 컬렉터들, 자본을 가진 기득권층이다.

독재, 군사정권, 서구 자본주의 등 사회 기득권층에 저항했던 민중미술가들의 그림이 다시금 그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는 건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다.

▶민중미술가, 신학철을 만나다=민중미술가 신학철(72)은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로 언급된다. 1960년대 미술그룹 AG(아방가르드협회)에서 활동했고, 1985년 김정헌, 임옥상, 오윤과 함께 한국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를 구축했으며, 1987년 ‘모내기’ 그림 사건으로 한국미술사에서 표현의 자유와 검열 문제 논란을 불어일으킨 장본인이다.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과거 전시 서문에서 “한국 근ㆍ현대사의 트라우마와 끈질기게 대결해 온 작가”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지난 10여년간 미술가에서 신 화백을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2007년 평창동 가나아트갤러리에서 열렸던 대규모 민중미술 그룹전 ‘청관재 민중미술컬렉션전’ 이후 간간히 미술관 기획전에 그의 그림이 걸리긴 했지만 말이다.

올해 국내 메이저 갤러리들이 여는 민중미술 전시에 신학철이라는 이름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가나아트센터 기획 그룹전이 2월 초 예정돼 있고, 학고재갤러리는 9월 신학철 개인전을 준비 중이다.

지난 8일, 신 화백을 서울 동대문구 장안동 자택에서 만났다.

신 화백은 10여년간 아픈 아내 병수발을 해 왔다. 붓을 들 새가 없었던 이유다. 그리고 지난해 봄, 아내를 저 세상에 떠나 보냈다. 하루 담배 한 갑을 태운다는 그는 3시간이 넘는 인터뷰 내내 반 갑 가까운 담배를 태웠다.

인터뷰에 잘 응하지 않기로, 까칠(?)하기로 소문난 신 화백은 소문과는 달리 따뜻하고 다정한 어른이었다. “대중언어를 잘 못 쓰고 말투가 거칠어서 걱정”이라고 했지만, 느린 말투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가는 내내 ‘허허’, ‘껄껄’하며 웃는 그에게서 투사의 이미지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오래된 화구들과 커다란 캔버스. 서울 동대문구 장안동 자택 거실 햇볕 잘 드는 한 켠이 바로 신 화백의 작업실이다. 십년 넘게 투병생활을 하던 부인을 지난해 봄 떠나 보낸 후 혼자 지내게 되면서부터 집안 곳곳은 사진 자료와 콜라주 등 작품 활동을 위한 것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사진=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민중미술도 결국 상업화= ”글쎄요. 상업화 돼 가는 거죠. 가격으로 판단하는 거니까요. 민중미술은 사회운동이었어요. 그런데 지금 현상은 그거랑은 전혀 관계가 없어요. 비싸게 사 주면 좋긴 한데. 장삿꾼들은 돈 되는 걸 정확히 알잖아요.”

국내 미술계가 화두로 내 건 민중미술의 대표 작가 신학철은 의외로 무덤덤했다. 돈 되니까, 팔리니까 시장에 나오는 것 아니겠냐는 반응이다.

“제가 잘 쓰는 표현인데, 나는 니들 욕하면서도 내 그림 팔아 먹는다 그래요. 안 팔아야 하는데 차라리…. 아유 참, 또 묵고(먹고) 살라고 하니. 허허”

사실 신학철의 그림은 편히 감상할 수 있는 그림은 아니다. 김영준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사의 표현을 빌자면 ‘달달한 추상도 만만한 눈요기도 아닌, 딱딱하기 그지없는 피부를 강제로 만지게 해서 촉각적 한기를 느끼도록 강요하는’ 이미지들이다.

1980년대 콜라주나 유화 작품들은 피부와 살점, 근육과 힘줄이 캔버스 밖으로 터져 나올 듯 세고 강렬하다. 그러한 직접적인 이미지 언어로 한국 근ㆍ현대사를 기록해왔다. “사변적인 것보다 내가 직접 보고 느낀 것들을 믿는다”는 화백은 현대미술의 주류였던 ‘무(無)이미지’를 당당히 거부해 왔다.
신 화백 작품의 주요 컬렉터로는 2007년 작고한 민중미술 컬렉터이자 영창피아노 대표였던 청관재 조재진 씨와 가나아트 이호재 회장 등이 꼽힌다. 이후 일부가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 등 국ㆍ공립 미술관에 기증 형태로 들어가게 됐다.

정작 신 화백이 갖고 있는 그림은 한 점도 없다. 다 팔았기 때문이다. 때론 ‘공짜’로 팔기도 했다. 그러니까 시장에서 그의 과거 작품들이 높은 가격에 거래돼도 화백에게 돌아오는 건 없다는 뜻이다.

그림과 함께, 그의 이름 석자도 내 줬다. 각종 정치, 사회단체에서 그를 필요로 하며 찾아올 때마다 신학철이라는 이름을 선뜻 내 줬다.

“1980년대에 다 줘버렸죠 뭐. 사회단체에서 기금전 하고 그럴 때 다 내줬어요. 100호짜리도 주고 그랬으니까. 민미협 화가들이 그랬어요. 자기 돈 들이고 몸으로 때우며 문화운동을 했죠. 내 그림은 흩어진 건 별로 없어요. 몇몇 컬렉터들이 가져 갔으니까요.”

▶표현의 자유, 10년의 저항=신학철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그림이 ‘모내기’ 그림이다. 한국 미술계 표현의 자유와 검열 논란의 상징적인 그림이다. 신 화백은 이 그림 한장으로 석달 간 구치소 생활을 해야 했다.

모내기 그림은 1987년 민미협 통일전 때 신 화백이 출품했던 작품인데, 1989년 한 청년단체에서 부채를 제작하며 이 그림을 사용했고, 당시 부채 제작을 맡았던 학생이 ‘이적 표현물 제작 및 운반’ 혐의로 기소됐다.

이후 신 화백 역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돼 1, 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2000년 대법원이 원심 파기환송하며 징역 10월형의 선고 유예와 그림 몰수 판결을 확정했다. 그러나 2004년 유엔인권위원회는 표현의 자유 침해 사실을 인정하고 유죄판결 취소 등을 결의하기도 했다.

신 화백은 모내기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동안 이어갔다.

“그림을 위 아래 반으로 나눠 놓고는 위는 북한, 아래는 남한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나는 통일의 이미지로 이걸 그린거예요. 통일된 세상의 무릉도원으로. 쓰레질 하는 모습은 통일에 걸림돌이 되는 것들을 쓸어내는 거고요.”

‘그들’이 백두산이니, 만경대니 이적 표현물이라고 주장했던 그림의 배경은 사실 신 화백의 고향 김천의 모습이다.

“가만 그려보면 고향이 꿈 같아요. 봄에는 보리밭이 파랗고, (볏짚, 밀짚으로) 이어놓은 지붕은 노오랗죠. 그리고 그 위로 분홍 살구꽃이 화악 피는 거예요. 그 이미지가 너무나 생생해요. 무릉도원이죠. 그런 걸 자꾸 이 놈들이 만경대라고 하니. 허허.”

‘문제작’이 된 모내기 그림은 총 3점이 있다. 재판 때 압수된 원본, 호남지역 인사로부터 요청받아 신 화백이 똑같이 다시 그린 것 하나, 그리고 마지막 또 하나.

“내가 급해서 또 화랑에 팔아 버렸네. 껄껄. 조만간 전시 때 나올지도 모르겠네요.”


신학철 화백. [사진=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아내 떠난 자리에서, 다시 붓을 들다= “헌신적이었죠. 모내기 그림 때 고생을 좀 했을 거예요. 이틀에 한번 꼴로 의왕구치소까지 면회오고 그랬으니까. 석달간 구치소 살다 나와 만나니 (살이 빠져서) 젖가슴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아휴….”

이 화백의 아내는 2002년부터 파킨슨 병을 앓았다. 그런 아내를 13년 동안 보살폈다. 거실 천정 한 곳에 철사 옷걸이로 만들어 놓은 뱃줄(음식물을 공급하기 위해 위에 관을 연결시켜 놓은 것) 걸개가 떠난 아내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나는 내 생각, 그림 생각만 했지 다른 건 못해요. 은행도 동사무소도 아무 것도 모르니까. 가슴이 먹먹해오더라고요. 그런데 10년 정도 수업을 많이 했죠. 이제는 김치 담그는 거, 고추장, 된장 담그는 것도 다 내가 해요.”

다행히 대한민국 의료시스템이 잘 돼 있어 병원비로 고생하진 않았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TV 뉴스를 보는 일이 불편하다.

“세상이 좀 바로 됐으면 싶어요. 민중미술이 뜨면 그 안에 있는 의미까지 같이 조명돼야 하는데 정작 그러질 못 하네요. 어찌보면 지난 10년 동안 대한민국에 문화 역동성이 많이 줄어든 것 같기도 하고요.”

“그려 놓을 것만 그려놓고 고향에 내려가고 싶다”는 그에게 그림은 ‘의무’같은 것이다.

앞으로 한국 현대사를 가로 20m길이의 캔버스에 압축시켜 놓은 대작 ‘갑순이와 갑돌이(1998-2002)’의 앞 뒤 이야기를 조금 더 연결시킬 생각이다. 또한 4ㆍ19, 5ㆍ18 등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들 역시 그의 힘찬 붓 끝에서 생생하게 기록될 예정이다.

▶에필로그=인터뷰 내내 들었던 생각. 민중미술이 단순히 값비싼 사치품으로 사고 팔리는 것에 그치지 않기를, 민중미술가의 삶과 그 그림 안에 진정성이 함께 조명되기를, 신학철이라는 한국 현대미술의 중요 인물이 섣부른 진영 논리에 희생당하지 않기를….

amigo@heraldcorp.com












지난 23일 열린 박권수씨 추모전 뒤풀이가 인사동 산수갑산에서 열렸다.

 

이 전시는 박권수를 사랑하는 모임’(박그사)이 마련했는데, 소설가 박인식, 방송인 전유성,

영화배우 최민식이 공동대표를 맡고 탤런트 이효정, 시인 송 현, 연극배우 이호성, 행위예술가 심철종,

화가 강찬모, 106명의 문화예술인들이 참여하고 있다.

그런데 그 날, 100여 만 원이나 되나 뒤풀이 술값을 아라아트김명성씨가 낸 것이다.

전시장도 그냥 빌려주었는데, 뒤풀이까지 내겠다는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여지 것 인사동 지인들의 전시 때마다 숱한 도움을 준 그였지만, 지금은 자기 코가 석자다.

당장 빈손으로 물러나야 할 처지를 훤히 아는데...

돈이 없어, 후배 이지하씨에게 200만원 상당의 판화를 줄 테니 대신 내라는 것이다.

 

전생에 가난한 예술가를 위해 태어난 팔자인지는 모르지만, 코끝이 찡했다.

끝 날 무렵 불어 준, 김정남씨의 피리소리가 구슬프게 했다.

 

이날 뒤풀이에 함께한 분은 미망인 황예숙씨와 그의 아들 박상하씨를 비롯하여 박인식, 전유성, 김명성,

이효정, 이성용, 이호성, 이상철, 이두엽, 강찬모, 김대웅, 송일봉, 주홍수, 정영신, 김행수, 김정남, 조해인,

장경호, 최인선, 김진석, 이정아, 박관식, 김희갑, 권경희, 서길원, 서혜운, 노광래, 이영기, 백남이, 이지하,

임경일씨 등 50여명이 참석했다.

 

 사진,글 / 조문호















 

 


 

 

 

 

 

 

 

 

 

 

 

 

 

 

 

 

 

 

 

 

 

 

 

 

 

 

 

 

 

 

 

 

 

 

 

 





모처럼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을 가졌다.
정선 집도 들리고, 영월 주촌장도 가고, 춘천에도 들렸다.
춘천은 사진 찾으러 갔지만, 화천 길종갑씨 작업실을 방문하기 위해서다.
농꾼의 화실, 뭔가 다를 것 같은 기대감이 컸기 때문이다.

화가의 손은 거칠었다. 생김새도 거칠지만, 그 야생성이 오히려 인간다웠다.
그는 화천에서 태어났다. 공부하고 군대 간 시절 말고는 줄 곳 고향을 지킨 토박이다.

다들 편하게만 살려고 고향을 떠나지만, 그는 어머니까지 모시고 산다.
농사지으며 그림 그린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치열하게 사는 사람이었다.


이번에는 도마도 농사를 지었지만, 헛농사였다고 한다.
시세가 없어 모두 망쳤다는데, 자기야 그림이라도 있으니 괜찮다며 이웃들을 걱정했다
실속 없이 고생만 하는 농민들의 현실은 비록 여기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임대 창고를 빌려 쓰는 그의 화실은 엄청 넓어 전시장 같았다.
농번기가 되면 붓 잡을 겨를도 없을 텐데, 그의 작업량은 방대했다.
제대로 미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사는 주변 환경을 그려 “화천인문기행”이란 화첩도 만들었다.

내가 주목한 것은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그의 작업 태도였다.
대개의 작가들이 아름다운 풍경을 과장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 친구는 주민들이 살아가는 모습 하나 하나까지, 화폭에 담았다.
심지어는 땅 파는 포크레인까지, 사실 그대로를 재현한 것이다.
마치 다큐멘터리 사진처럼...

세월이 흐르면 자연은 그대로이겠지만, 사람 사는 모습은 바뀔 수밖에 없다.
먼 후손들이 대할 때, 어떤 그림에 더 관심 가지겠는가?
돈 맛에 길든 수준 높은 기술자들이 득실대는 예술 판에 신경 쓰지 않고,
초지일관 밀어붙이는 그의 작업 스타일도 마음에 들었다.

강원도에는 그처럼 작업하는 작가가 많다.
태백의 황재형씨가 그렇고, 영월의 백중기씨가 그렇고, 춘천의 신대엽씨가 그렇다.
바로 이들이 강원도의 힘이고, 강원도의 희망인 것이다.

사진,글 / 조문호



-음력7월20일 "장삿날"-



-용화제-



-그림의 한 부분-


-그림의 한 부분-


-그림의 한 부분-


-어머니와 함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