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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이에나처럼 걸었다’,한남동 ‘갤러리 서화’ 5월4일까지


▲최울가 ‘나는 하이에나처럼 걸었다’책 표지



파리를 중심으로 세계를 유목민처럼 떠돌며, 암벽화 같은 그림을 그려 온 최울가가 모처럼 서울에 모습을 드러냈다.


현대미술에 대한 철학적 성찰과 그의 작업행로를 담은 ‘나는 하이에나처럼 걸었다’란 책을 출판하며, 한남동 ‘갤러리 서화’에서 출판기념 특별전을 마련한 것이다. 전시는 지난 4월21일 개막돼 5월4일까지 이어진다.


원시성을 띤 그의 그림들은 너무 순수하고 자유롭다. 도상에 화려한 색을 입힌 그림들은 마치 동화 속의 한 장면같이 느껴졌다. 다양한 도형을 바탕으로 한 그의 작품세계는 드로잉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드로잉 자체가 구석기시대부터 시작된 원초적인 표현방법 아니던가. 작가의 고향이었던 울산 반구대 암각화가 연상되기도 했다. 사람이 등장하기도 하고, 동물이나 나무 같은 사물들이 무질서하게 그려 진 그림들은 원시적인 인간 본연의 삶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무시하는 그의 아나키적 화법에서 자유로움도 만끽할 수 있었다.




▲최울가, New Storage Series, Oil on Canvas, 130x162cm, 2015


한 때 상승세를 타기도 했던 “Black and White” 연작에서는 기하학적인 모형들이 어느 정도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암각화 같은 조형들이 마치 바위 위에 정으로 새긴 듯 빽빽하게 그려져, 보는 이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 상형문자 같은 기호들은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의식에 다름없었다. 원시성의 훼손에 대한 물질문명의 비판을 그만이 즐기는 놀이 법으로 풍자한 것이다. 아마 문학적인 그의 그림언어로 현대인들의 숨통을 트이게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최울가,Infinity Series, Oil on Canvas, 100x100cm, 2015


이번 ‘갤러리 세화’에 발표된 작품은 또 다른 변화를 보여 주었다. 원시주의에 천착한 골격은 유지하고 있었지만, 선들이 굵어졌고 여백의 미도 생겨났다. 일단 보는 이로 하여금 안락한 느낌을 주었는데, 이번에 펴낸 ‘나는 하이에나처럼 걸었다’란 책을 읽고 그 원인을 짐작하게 됐다.



▲최울가,Infinity Series, Oil on Canvas, 162x130cm, 2015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언어’ 그 자체가 자신을 가로막는 장애란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는 것이다. 결국 끝없이 추구하는 자유로움이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 낸 것이다. 캔버스 위에 생겨난 여백들은 바로 작가 자신의 마음의 여백으로 여겨진다. 곰곰이 그의 작업행로를 돌이켜 보면, 꾸준히 변해 온 작업여건이나 주변 환경도 작품에 반영되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최울가,Black Play Series, Oil on Canvas, 130x162cm, 2015


이번 전시와 함께 ‘인문아트’에서 발간한 ‘나는 하이에나처럼 걸었다’에는 최울가의 예술철학과 삶의 행로가 일기처럼 상세하게 기록돼 있었다. 초창기 작품에서부터 신작에 이르기까지 130여점이나 실려 있는데다, 문학적 감수성이 배어있는 그의 글들은 최울가의 작품세계에 푹 빠져들게 한다.


문의:한남동 ‘갤러리 서화’(02-546-2103)


[서울문화투데이] 조문호기자



이담 서숙희_차가 잘 다니지 않는 곳에 구멍가게를 내다_리넨에 아크릴채색_52×52cm_2015



춘천에서 활동하는 이담 서숙희씨의 ‘집과 밤’ 네 번째 개인전이

오는 19일부터 24일까지 종로구 통의동에 있는 ‘류가헌’에서 열린다.

낮과 밤을 나눈 그의 그림들은 일련의 그림 솜씨나 말 솜씨로,

보는 사람의 아늑한 감성을 건드리며, 말 걸어 오고 있었다.

보일락 말락  산길을 지나는 자동차의 자취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 올리게 했고,

안개에 가린 듯한 희뿌연 그림들은 마음속에 가라앉은 사무친 그리움을 들춰냈다.

조근 조근 속삭이는 말들은 마치 한 편의 시를 보듯, 긴 여운을 남긴다.

소설가 하창수씨가 “위안이 일방적인 획득이 아니라 주고받음이

예술의 소중한 덕목이라는 것을 그녀의 그림이 조용히 읊조려준다."했듯이

“내 그림이 다른 사람 마음에도 가 닿을 수 있기를 바란다.”는 작가의 뜻을 충분히 충족시켰다

.  
그 아늑하고 그리운 환몽(幻夢)의 세계로 여러분을 모신다.
개막식은 오는 19일 오후5시, ‘류가헌’(02-720-2010)이다.

글 / 조문호




이담 서숙희_숲속의 집-낮_리넨에 아크릴채색_91×61cm_2015

이담 서숙희_숲속의 집-밤_리넨에 아크릴채색_91×61cm_2015

이담 서숙희_집과밤_리넨에 아크릴채색_73×53cm_2016



환몽(幻夢)처럼, 아늑하고 아득하고 그리운... 


 '차가 잘 다니지 않는 곳에 구멍가게를 내다' 그림의 제목이다. 제목이 아니었으면, 저 옛날 매화초옥도에 그려진 초가집처럼 은자연한 풍경이라고 여겼을 법하다. '구멍가게'이니 의당 손님이 나들어야 할 텐데 '차가 잘 다니지 않는다'니 사람의 왕래가 적고 가게의 목적인 장사가 잘 될 턱이 없다. 그런데도 구멍가게 혹은 집을 둘러싼 초목은 푸르고, 나무는 점점이 흰 꽃을 피우고 의자들은 비어있으나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다. '내다'에서 느껴지는 자의성처럼, 마치 일부러 그렇게 인적 드문 곳에 가게를 낸 것처럼도 여겨진다. 가게라는 세상과의 소통창구를 열어둔 채로, 자연 속에 홀로 의연하다. 마치 그림이 안개 같은 입자로 "그래도 괜찮아."라고, 귓가에 속삭이는 것만 같다.

 

'산을 지나가는 자동차' 또 다른 그림의 제목이다. 역시 제목이 아니었으면, 비구상 추상화라고 여겼을 법한 그림이다. 그런데 어둔 밤중에 홀로 서서 막연한 기다림으로 저 멀리 '산을 지나가는 자동차'를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별빛 같은 점으로 나타난 자동차가 헤드라이트 불빛을 비추며 어떻게 선으로 사라져가는 지를. 그 불빛에 어떻게 산이 능선을 내보이며 제 형체를 잠깐 드러냈다 다시 컴컴한 어둠 속에 묻히는 지를. 한 순간 설렘으로 환해진 마음이 어떻게 가뭇없이 그리움으로 어둑해지는 지를... 산도, 자동차도 보이지 않지만, 그 설렘과 그리움 사이의 어느 지점을 자동차는 지나고 있는 중이다. 그림을 보는 동안 "나의 어둠을 당신도 아는구나."라고 속엣 말로 되뇌게 된다.

 

낮과 밤으로 나뉘어 그려진 '숲 속의 집'을 비롯해 '물과 풀' '여량철교' 등의 제목을 한 다른 그림들도, 같은 화법(畫法) 또는 화법(話法)으로 말을 걸어온다. 말을 걸어옴으로써, 그림 앞에 오래 서 있게 한다. 이 그림들을 그린 화가 서숙희는 작가노트에 이렇게 썼다. "내가 그리는 그림이 나를 위로하기 위한 노력이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의 마음에도 가 닿을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또 이 그림들에 대해 소설가 하창수는 이렇게 썼다. "위안이 일방적인 획득이 아니라 주고받음이라는 것을, 이것이 예술의 소중한 덕목이라는 것을 그녀의 그림들은 조용히 읊조려준다." 그리고 덧붙인다. "짙고 깊게 화폭을 파고들어간 안개는 강의 흐름을 감추고, 자잘하게 절개한 상처와도 같은 무수한 세필자국을 감추고, 아득한 환몽(幻夢)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아늑하고, 아득하고, 그립다." 글의 결미처럼, 화가 서숙희의 네 번째 개인전인 집과 밤의 그림들은, 아늑하고 아득하고 그리고 그립다. 류가헌

  


이담 서숙희_여량철교_리넨에 아크릴채색_73×53cm_2016

이담 서숙희_벚꽃놀이_리넨에 아크릴채색_73×53cm_2016

이담 서숙희_망초꽃핀운동장_리넨에 아크릴채색_73×60cm_2016

이담 서숙희_산을 지나가는 자동차_리넨에 아크릴채색_117×73cm_2016

이담 서숙희_산을 지나가는 자동차_순지에 아크릴채색_120×83cm_2015




그림이라는 이름의 자아, 혹은 위안과 꿈 - 이담 서숙희의 2016년 전시회에 부쳐


잭슨 폴락의 전시회를 둘러보던 한 미술담당 기자가 야릇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곁에 있던 친구가 이유를 물었다. 기자는 시니컬하지만 매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폴락이 말하길, 그림은 자아를 발견하는 일이라고 했지. 그래서 훌륭한 화가는 그 자신을 그린다고. 그런데……" 기자의 말을 가로챈 친구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러니까 자넨 폴락의 그림에서 그의 자아를 발견하지 못했군. 하기야 이런 추상화에서 화가의 자아를 발견한다는 게 웃기는 일이지."하고 아는 소리를 했다. 하지만 이어진 기자의 대답은 전혀 달랐다. "아니, 폴락의 자아가 이렇게나 깊다는 것에 놀라고 있는 중이야."

 

서숙희의 2016년 전시회 그림들 앞에서 이 일화를 떠올린 건 형체를 색채 깊숙한 곳에 묻어버리거나 두터운 색채의 안개에 숨긴 채 보일락 말락 드러내는 그녀의 그림이 폴락의 추상화들과 겹쳐진 때문이 아니라, 우주의 청회색 가스층에서 발견한 화가의 자아에 나 또한 "이렇게나 깊었나?"하고 놀랐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본 것이 그녀의 자아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화가의 손을 떠난 그림은 작가의 손을 떠난 글이 그렇듯, 온전히 감상자에 의한, 감상자를 위한, 감상자의 것이다. 그러니 내가 그녀의 그림들에서 본 게 그녀의 자아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런데, 그림에서 발견되는 자아란 무엇이며, 그림에서 자아를 발견하는 일은 어떤 가치를 가지며, 훌륭한 화가가 그 자신을 그린다는 건 무엇이며, 그 자신을 그리는 일은 또 어떤 가치를 가지는 것일까? 이 질문에 내놓을 수 있는 답은 무수히 많겠지만, 그림에 대한 안목이 짧고 얕은 나는 한 가지 답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 답은 "오직 자신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이라는 말로 수렴된다. 오직 그만이 그릴 수 있으므로 '자아'라는 말을 붙일 수 있고, 그래서 그 그림이 가치 있는 그림인 것이다. 요컨대, 서숙희의 그림은 오직 그녀만이 그리며, 그녀만이 그릴 수 있다. 어디에서도 나는 그녀의 그림과 같은 그림을 본 적이 없다. '개성'이라는 단어에 모두 담을 수 없는 그녀의 독특과 유별은 무너뜨릴 수 없는 가치를 만들어낸다

 

서숙희의 지난 전시회들을 찾아왔던 사람들이 들려준 감상의 변들 가운데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은 '위안'이었다. 그녀의 그림들에서 받게 되는 위안은 어쩌면 그녀로 하여금 붓을 놓지 않도록 만드는 가장 큰 이유일는지도 모른다. 독특과 유별이 화가 서숙희가 가질 만한 자부심이라면, 감상자들이 거의 공통적으로 받아가는 위안은 인간 서숙희에게 가져다주는 소중한 선물이란 생각이 든다. 사실 이 선물은 10년 전인 2006년의 전시회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에서 듬뿍 받은 것이기도 하다. 나는 그때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어떤 이는 이담의 그림에서 몇 줄의 시를 읽고, 어떤 이는 조곤조곤 긴 사설을 듣는다. 어떤 이는 그녀의 그림 앞에서 쓸쓸히 가슴을 쓸어내리고, 어떤 이는 가만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는다. 이 상반된 반응이야말로 서숙희라는 화가의 매력이거니와, 그녀를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뭐 하나 똑 부러지는 게 없는 그녀 특유의 '머뭇거림'이 그 이유다. 그런 그녀야말로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바로 그 사람이지 않을까."

 

위안은 대상과 감상자의 눈이 같은 높이에 있을 때 얻게 된다. 그래서 우러러 보아야 하는 존경과 다르다. 위치를 달리하면 위압이 되는 존경은 그래서 위안을 주지 못한다. 태생부터 '높은 곳'과는 거리가 먼 서숙희에게 위안은 당연한 것이리라. 그녀의 머뭇거리는 발길은 그녀의 손을 잡게 하고, 대상에 대한 그녀의 연민은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하며, 내면을 향한 그녀의 침잠은 우리를 서두르지 않게 만든다. 위안이 일방적인 획득이 아니라 주고받음이라는 것을, 이것이 예술의 소중한 덕목이라는 것을 그녀의 그림들은 조용히 읊조려준다.

 

서숙희의 그림들은 머물지 않고 흐르는 강과도 같다. 2006년과 2011, 두 번의 전시회에서 그녀의 그림들이 보여준 '변화'는 보기에 참 좋았다. 정통 문인화가 한 굽이를 흐르며 담묵과 순정한 선묘의 '사라지는 것들'로 바뀌고, 선묘가 옅은 안개에 가려지며 침잠의 여울로 건너간 것이 다섯 해 전까지의 일이다. 이제 2016년으로 건너온 그녀의 강은 또 한 번의 '다름'을 보여준다. 짙고 깊게 화폭을 파고들어간 안개는 강의 흐름을 감추고, 자잘하게 절개한 상처와도 같은 무수한 세필자국을 감추고, 아득한 환몽(幻夢)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아늑하고, 아득하고, 그립다. 그녀가 오래, 그녀만의 그림으로, 늘 변화를 꿈꾸며 우리 곁에 있기를 빈다.


소설가 / 하창수



▲ 작품 옆에 선 최상철 작가. 사진 = 김금영 기자 

(CNB저널 = 김금영 기자)


“마음을 비우는 순간 삶이 행복해진다” 등 경쟁사회에서 욕심을 버리라는, 마음공부를 권하는 글귀들이 많다. 말이야 쉽다. 실천이 어려워 문제지. 그런데 최상철 작가는 마음을 비우는 작업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작품을 통해서다. 그가 갤러리 그림손에서 3월 8일까지 여는 개인전의 주제는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욕심을 버린 상태로’, 즉 무물(無物)을 지향하는 작품 시리즈를 보여준다.

검은 점들, 때로는 선들이 화면을 가득 채운 것 같지만, 전반적으로 고요함이 느껴진다.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평온한 경지에 다다른 듯한 작가의 마음이 언뜻 보이는 듯하다. 작가는 욕심을 버리는 첫 단계로, 자신의 의지를 최대한 배제한다. “어떤 의지가 조금이라도 들어가는 순간, 의도치 않게 바로 욕심의 첫 밑거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작가는 “자본주의 사회 속 작품은 상품화 되는 경향이 크다. 그러다 보니 그림 속에 진실한 나를 담기보다 남들에게 멋지게, 근사하게 보이고 잘 팔리는 그림을 그리려는 의지가 들어가는 경우가 흔하다”며 “그림에서 욕심이 빠지려면 내 의지가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적용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멋지게, 잘 보이려는 의지 말이다. 그러다보니 작업에 우연성이 많이 적용됐다”고 말했다.



▲ 최상철, ‘무물(無物) 14-12’. 캔버스에 아크릴릭, 145.5 x 97cm. 2014. 사진 = 갤러리 그림손



작가의 말처럼 무물(無物) 시리즈는 많은 우연이 모여 만든 결과물이다. 그의 작업엔 돌멩이와 물감이 꼭 필요하다. 일단 캔버스 양 가장자리에 울타리를 만들어 세운다. 그리고 이 캔버스를 바닥에 눕힌다. 돌멩이엔 고무바퀴를 달고, 이것을 물감을 풀어놓은 통에 담갔다가 뺀다. 그리고는 캔버스 위로 훌쩍 던진다.


위로 높이 도약했던 돌멩이는 캔버스 안에 떨어진다. 때로는 한 자리에 멈추기도 하고, 역동적으로 굴러다니기도 한다. 돌멩이의 흔적은 오롯이 캔버스에 남는다. 울타리에 부딪혀 방향을 바꾸며 선을 그리기도 하고, 물감이 주변에 번지기도 한다. 모두 돌멩이가 만들어내는 우연성의 결과물이다. 돌멩이에 뭍은 물감이 캔버스에 모두 스며들어 더 이상 흔적을 남기지 않게 되면 다음 돌멩이를 집어 든다. 한 작품에 평균 1000번 정도 돌멩이 던지기를 반복한다. 

돌멩이가 캔버스 위에 만들어내는 1000번의 우연

크기가 작은 작업보다는 주로 큰 작업 위주로 이뤄진다. 틀이 작으면 돌멩이가 보여주는 우연성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일반화된 패턴을 보일 수 있기 때문. 따라서 더 자유롭게 돌멩이가 마구 돌아다닐 수 있도록 큰 틀에서 작업한다. 체력적 한계도 있지만 완성된 작업은 작가에게 평온함과 자유로움을 준다고.


▲ 최상철, ‘무물(無物) 13-8’. 캔버스에 아크릴릭, 145.5 x 97cm. 2013. 사진 = 갤러리 그림손


연필 선이 무수히 그려진 작품도 눈길을 끈다. 이것 또한 우연성을 기본으로 의지를 최대한 배제한 작품이다. 앞뒤로 합판을 붙인 큰 패널을 수직으로 세우고, 의자에 앉아 이 화면 쪽으로 연필을 든 손을 뻗는다. 그리고 조용히 심호흡을 한 뒤 눈을 감은 상태에서 종이에 연필이 닿으면 종이를 조금씩 잡아당기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팔에 느껴지는 중력이나 심호흡 할 때의 가슴 흔들림이 연필에 전달된다. 그리고 조금씩 흔들리는 선이 화면에 그려진다. 한 개의 선을 긋는 데 평균 3분 정도가 걸린다.

작가는 “노자 사상 중 중요하게 거론되는 것 중 하나가 ‘하지 않고 한다’다. 정치하는 사람에게는 ‘다스리지 않고 다스리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는 이 이야기들을 내 작업에 ‘그리지 않고 그려지도록 하라’로 적용했다. 그리기는 의지를 넣는 것이지만, 그려지는 것은 모든 흘러가는 섭리와 우연에 맡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작가로 활동하면서 몇 십 년 넘게, 남들 못지않게 기술 훈련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욕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고 필요없는 것인지를 조금씩 깨닫게 됐다. 손끝으로 그리고자 하는 의지를 버렸다”며 “작업을 할 때 항상 먼저 마음을 가라앉히는 명상을 한다. 마음을 비우는 과정 중 하나다. 온전하게 내 작품 속에 내 이야기를 담으려면 욕심을 버려야 한다. 앞으로도 이 작업은 꾸준히 이어질 것”이라고 전했다. 


 

박 건 (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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