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남저수지를 간결하게 표현한 조성제씨의 일곱 번째 사진전 ‘대칭(SYMMETRY)’이

지난 4일, 마산 ‘BNK경남은행’ 본점 1층 갤러리에서 개막되었다.






이 날 전시 개막식에는 축하객들로 붐볐다.

한경호 경남도지사 권한대행에서부터 교육감 등 지역의 명사들과 기업인들로 가득했는데,

내가 아는 분이라고는 조성제, 박명숙씨 내외와  사진가 김관수씨 뿐이었는데,

뒤늦게 김일창선생을 만났다. 아들을 경성대학 사진과에 보낼 무렵 보고 처음이니,

아마 십 수 년은 된 것 같았는데, 엄청 반가웠다.






전시 개막식을 끝낸 후, 숙소에서 만난 조성제씨의 하소연을 들었는데,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는 오랫동안 제대로 된 사진미술관을 주남저수지 인근에 만드는 꿈을 키워왔다.

그래서 인근에 있는 식당건물과 부지를 20억에 매입해, 사진미술관을 건립하기 위해 설계까지 마쳤으나,

창원시에서 철새 서식환경에 미칠 영향과 주변 난개발 우려 등을 이유로 건축허가를 내주지 않았다고 한다.






조성제씨는 개발 가능한 1종 일반주거지역인데도 창원시가 불허한 것은 용도지역을 지정하고 관리하는 취지에 배치된다고

주장하며 조류학자의 철새에 미칠 영향이 전혀 없다는 환경평가까지 첨부하여 건축불허가처분을 취소하라는 소송을 제기했으나

그만 기각되고 말았다고 한다.

지저분한 주변 환경 정비와 지역문화에 기여하는 현실성보다 추상적인 철새보호라는 명분에만 집착한

일방적 행정의 편협성을 다시 볼 수 있는 사안이었다. 사실은 환경단체 눈치 보느라, 그런 결론이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불허가 사유의 하나로 이층에 계획된 커피숍을 들기도 했으나, 그 또한 핑계일 뿐이다.

식당은 허가해 주고, 커피숍은 안 된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게 사진을 관람하거나 철새를 조망하는 관람객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지 영업을 위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입장료도 없는 미술관에 좋은 사진전을 유치하기 위해 년 간4-5억의 유지비를 써가며 지역문화에 기여하겠다는

조성제씨의 순수한 마음을 이익창출을 위한 건축으로 매도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창원시가 2009년에 1건, 2014년에 2건의 건축허가를 내준 것은 무엇이냐?

미술관이 공익적인데도 건축을 불허한 것은 형평성에도 맞지 않다.

그렇다면 창원시가 람사르문화관 옆에 판매점과 휴게시설을 짓는 것은 괜찮은가?

반대를 위한 반대란 인상이 너무 짙다.

모처럼 우리나라에 작품수장고까지 겸비된 괜찮은 사진미술관이 들어선다는 기대에 부풀었는데,

꽉 막힌 복지부동의 관료들에 의해 무산되어 버렸네.
너무 아깝다. 좋은 방안이 없을까?




조성제씨는 봉암갯벌, 주남저수지, 우포늪 등의 습지만 꾸준하게 담아온 사진가다.

그동안‘습(濕)’, ‘하얀 여백’, ‘천년의 전설’ 등의 사진집을 꾸준히 펴내며 전시를 열었는데,

이번 전시와 함께 ‘대칭 symmetry’사진집도 펴냈다.

그가 사진에 담은 주남저수지는 겨울철에도 물이 얼지 않아 하루에 2만여 마리의 철새가 찾아온다고 한다.

넓은 늪지대의 습한 땅에 물 억새가 자생하고 있어 텃새의 서직지로 좋은 조건을 갖춘 곳이다.





조성제씨는 기록적인 요소로 주남저수지를 바라 본 것이 아니라 풍경에서 느껴지는 미적 요소를 주관적으로 표현해 왔다.

바로 간결한 절제미가 주는 서정성이 조성제씨 사진의 매력이다.

이른 아침마다 기도하듯 대상을 지켜보며 그만의 명상적 이미지를 만들었는데,

안개에 가려진 은은한 분위기의 대칭적 풍경들은 마치 한 폭의 수묵화처럼 조용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이주형 계명대 교수는 “믿을만한 객관성과 진실성으로 사진은 쉽게 현실의 대체물로 제시된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현실은 자연스러운 것도 실제적인 것도 아니다.

사진에 나타나는 현실은 해석된 실재로서 이것이 현실이라고 정의됨으로써 비로소 떠오른 표상 일뿐이다.

게다가 시 감각을 자극하는 균형과 질서, 형식요소의 어우러짐이 강조될수록 실재는 이미지 뒤로 사라진다”고 서문에 적었다.

이 전시는 22일까지 ‘경남은행 갤러리’[문의 055-290-8000]에서 열린다.

사진 글 / 조문호












































생명의 존엄성을 일깨우는 사진전, 청운동 류가헌에서 오는 12월3일까지 열려

생명의 존엄성을 일깨우는 사진가 문선희씨의 ‘묻다’ 사진전이 청운동 ‘류가헌’에서 열리고 있다.

이 전시는 산 채로 매장된 동물들로 인간성마저 묻어버린 현실을 비판하는 한 사진가의 '땅에 대한 기록'이다. 질문과 매몰을 동시에 의미하는 제목 ‘묻다’처럼 사람들은 무자비하게 동물들을 땅에 묻었고, 이 현실을 어떻게 할 것이냐며 전시장의 사진들이 묻고 있다.



    

▲ 11800-02_50x50_c-print_2014 (사진제공 : 류가헌)



환경이 오염되어가는 현장과 인간의 잔혹성을 함께 돌아보게 한, 사진가의 문제의식이 돋보이는 전시였다. 조류 인플루엔자로 살 처분된 가축의 메몰지를 찍은 문선희의 사진들은 섞어가는 땅의 디테일이 마치 한 폭의 추상화처럼 아름답기도, 섬뜩하기도 했다.






지난 2011년 이후 구제역과 조류인플루엔자는 2년에 한 번꼴로 발생하고 있다. 아무 것도 모르는 가축들은 산채로 묻혀 갔다. 곳곳에 사체 썩는 악취가 피어오르고, 대지의 자정능력을 잃어가기 시작한지도 오래됐다. 자연환경만 잃어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까지 잃어 간 것이다.




▲ 84879-04_90x90_c-print_2015 (사진제공 : 류가헌)



본 기자는 장터촬영을 위해 전국을 다니면서, 마치 외계인처럼 온 몸을 가린 검역원들이 마을 입구에서 소독약을 뿌리는 모습을 흔하게 봤었다. 때맞추어 언론에 소개된 가축 매몰 현장을 지켜보며 문제의 심각성에 발을 동동 굴렸으나, 흐르는 세월과 함께 언제 그런 일이 있느냐는 듯 쉽게 잊혀졌다. 문제가 생기면 바르르 끓고, 시간만 지나면 금방 식어버리는 냄비근성이다.





사진가 문선희는 구제역과 AI로 동물을 생매장한 3년 뒤 모습을 찾아다녔다. 천만마리 이상의 생명을 삼킨 사천 팔백여 곳의 땅에서 백 여 곳을 택해 법정 발굴 금지기간이 지난 후 찍었다고 했다. 여린 그녀가 질퍽질퍽 불편하기만 한 그 자리를 찾아다닌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그 사실을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것이다.





그 흔적을 기록하여 이 사회를 향해 ‘이래도 되느냐?’는 듯 질문을 내 던지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동물이 산 채로 매장된 매몰지의 표피적인 형상에 불과하겠으나, 그 형상 하나 하나에는 땅에 대한 환경문제보다 인간성 상실에 대한 물음의 메시지가 더 강하다.




▲ 2312-01_100x100_c-print_2014 (사진제공 : 류가헌)



대부분의 메몰지는 비닐로 은폐된 채로 버려졌지만, 곳곳에 곰팡이가 피어나고 땅은 다양한 색깔로 썩어갔다. 기이하게 죽어가는 풀의 형태가 만든 참혹한 현장이 사진의 리얼리티에 의해 형태와 질감, 색깔까지 생생하게 기록되었다.

카메라의 기계적 특성을 이용해 더 자세히 확대하는 방식을 택했지만, 흙이나 뼈, 풀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사진의 대상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사진 옆에는 매장량인 것 같은 작가만이 알 수 있는 숫자들이 쓰여 있는데, 그게 바로 작가의 질문 방식이다. 정부가 분명한 규칙을 만듦으로써 모호한 땅이 생겨났듯이, 사진가 문선희는 분명한 사진을 찍음으로써 모호한 이미지를 만들어 낸 것이다.




 ▲ 299_50x50_c-print_2015 (사진제공 : 류가헌)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은 사진가 문선희의 사진을 너무 예쁘게 찍었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아름답게 보이는 미시적 리얼리티는 가시적인 것에 길든 사람들에게 보내는 또 다른 항변일 수도 있다. 아름다운 것이 예술이라는 것과 사실적인 것이 사진이라는 그 자체도 뒤집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찍던 작가의 색깔이고 말하는 방식이니, 탓할 바는 아니다.






스스로에게도 책임을 물어 동물들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작업을 했다는 사진가 문선희씨의 말을 들어보자. “정부는 규칙을 만들었고, 그 규칙에 따라 예외 없이 파묻었다. 그곳에 죽음은 없었다. 다만 상품들이 폐기되고 있을 뿐이었다.

판단은 거세되고 효율만이 작동하는 동안 동물들은 면역력을 놓쳤고, 대지는 자정능력을 잃었다. 졸속으로 만들어진 4,800여 곳의 매몰지에서 피로 물든 지하수가 논과 하천으로 흘러나왔고, 썩지 못한 사체들이 땅을 뚫고 솟아올랐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성을 상실했다.“




 ▲ 1765_90x90_c-print_2015 (사진제공 : 류가헌)


이 전시는 청운동 ‘류가헌’(전화 02-720-2010)에서 12월 3일까지 열린다.


[서울문화투데이 / 정영신]




10여년간 지구의 자연변화를 기록해 온 다큐멘터리 사진가 강제욱의 “THE PLANET" 사진전 개막식이

지난 2일 오후 6시 강남 ‘스페이스22’에서 열렸다.

전시와 함께 그 장정의 기록을 집대성한 “THE PLANET" 강제욱 사진집도 ‘눈빛출판사’에서 나왔다.





개막식에는 강제욱 사진가 내외를 비롯하여 눈빛출판사 이규상, 안미숙 부부, 이광수, 김문호, 엄상빈,

박종우, 김남진, 양재문, 성남훈, 김봉규, 정영신, 이규철, 남 준, 곽명우, 이은숙, 곽대원씨,

그리고 수원국제사진축제에 참여한 외국의 사진가 등 많은 분들이 전시를 축하하며 밤늦은 시간까지 축배를 들었다.






강제욱씨는 그동안 보르네오섬의 열대우림, 내몽골의 고비사막, 필리핀의 맹그로브숲을 비롯하여

인간과 자연의 치열한 대결이 이뤄진 쓰촨성 대지진, 아이티 대지진, 태국의 대홍수 등

세계 곳곳을 쫒아 다니며, 그 현장을 담담하게 기록해 온 배태랑 다큐 사진가다.






일단은 전시장에 걸린 사진을 돌아보며 받은 느낌이란, 온몸에 힘이 빠지듯 나른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햇볕이 강한 날씨나 화려한 색을 피한 흐린 날씨에 의한 회색 톤이 주는 나른함 일수도 있겠고,

사람이라고는 코때기도 보이지 않는 황량한 풍경이라 그랬을지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그 말하는 방식에 앞서 물질문명이 가져 올 미래 풍경을 예견하고 진단했다는 점이다.

아마, 인간이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날의 미래 풍경을 내다보는 것 같은 참담함이 그런 나른한 느낌을 주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말하는 것은 자연예찬도 환경 비판도 아니고, 무엇을 강제하거나 계몽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지역과 년도 외는 아무런 구체적 정보도 없이 마치 독백처럼 구시렁대는 나른함이 이 사진이 주는 매력인 것이다.

때로는 인적 없는 원시림 풍경이 펼쳐지기도 하고, 유령도시 같은 건축물과 황량하기 그지없는 재난의 현장들도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다.

폐자재들이 뒤엉킨 파괴현장 사이로 슬며시 모습을 드러내는 자연은 또 무엇을 말하는가?

끝없는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 낸 문명의 잔재들이 한 줌의 모래처럼 흩어진다는 것이다.





사진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자연과 문명에 대한 성찰로, 다 부질없는 것이란 말이다.
원시적 숲에서 비롯된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며,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진 도시도 언젠가는 허물어져 밀려나고,

결국은 인간이 쌓아올린 문명이란 게 바람과 함께 사라진다는 뜻이다.

모든 것은 흩어졌다 다시 생성되는 자연이치, 즉 윤회를 뜻하는 철학적 사유가 깔린 것이다.





이번 전시에는 우주 변화의 대서사를 기록한 대표작 21점 외에도

옆 라운지에서는 작가 데뷔 초기부터 The Planet 이전에 발표한 작품들도 함께 전시된다.


이 전시는 강남역 1번 출구에 있는 ‘스페이스22’(전화 02-3469-0822)에서 오는 21일까지 열린다.

사진, 글 / 조문호


























































하늘과 바람과 별과 나 Sky Wind Stars and Me


김대수展 / KIMDAESOO / 金大洙 / photography

2017_0309 ▶ 2017_0401 / 월요일 휴관


김대수_sms2004135_젤라틴 실버 프린트_41×54.8cm_2004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20518b | 김대수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7_0309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비케이Gallery BK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42길 56(한남동 683-38번지)

Tel. +82.(0)10.6790.7079

gallerybk.co.kr



땅과 하늘 사이에서 ● 『하늘』이라는 제하의 작품들은 『Colors of the Bamboo』, 『Trees from the People』, 그리고 『The New Wave』에 이은 김대수 작가의 네 번째 작품집이다. 나는 이 작품들을 내가 의도한 특정적인 관점으로, 즉 서양철학자의 시각에서 조명해 보고자 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김대수의 작품에 대한 내재적 해석이기보다는 그의 문화가 아닌 다른 문화에서 그의 작품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봄으로써 그 작품 세계의 풍부함과 보편성을 파악하고자 함이다. ● 비록 작가가 직접적으로 그 길을 제안하지 않더라도, 김대수의 작품은 한국과 중국 문화의 심층적 전통 안에 새겨져 있다. 그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땅으로부터 인간을 거쳐 하늘로 나아간다. 이러한 운동의 기반에는 무언가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어떤 것, 그렇지만 스스로를 간파하게 해 주는 것, 보이지 않으면서도 스스로를 보이게 하는 것, 무의식이면서도 우리로 하여금 의식적으로 자각하게 해주는 그 어떤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중국철학의 근본적인 장소들 중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중국 철학의 사유는 서양적 사유와 달리 존재하는 것 이거나,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서양적 사유가 태동한 그리스 철학에서는 만물의 근본은 불변부동의 존재이다. 성경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동양에서는 만물이 거기서부터 유래하는 모태(matrix)와 같은 것이 있다. 그러므로 태초에 존재가 아니라 운동(movement)이 있다. 운동은 비존재(non-being)에서 존재(being)로, 그리고 존재에서 비존재로 끝없이 나아간다. 그러므로 존재는 비존재 옆에 있다. 존재는 비존재로, 비존재는 존재로 환원되지 않는다. 하늘은 땅 옆에 있다. 공(空)은 색 옆에 있다. 만질 수 없는 것이 만져지고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의 구조 그 자체이다.


김대수_sky2004114_젤라틴 실버 프린트_41×54.8cm_2004


김대수_sms2011166_젤라틴 실버 프린트_120×120cm_2011


김대수_sms2008159_젤라틴 실버 프린트_41×54.8cm_2008



하지만 이것은 열림을 내포하는 작업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먼저 다가오는 것은 작품이 뿌리박은 문화보다는 그것이 내포하는 열림이다. 이러한 근원적인 열림을 통해서우리는 서양적 프리즘에서 빠져 나오게 된다. 그렇지만 우리가 완전히 동양적 세계 속에 있는 것 역시 아니다. 서양은 그 근대성의 차원에서 인간을 아주 높은 곳에 위치시켰다. 아마도 너무 높은 곳에 놓은 것 같다. 서양 세계에서는 인간의 오만함이 있다. 이것이 인간의 힘인 동시에 그 약점이 되기도 한다. 로마의 시스티나 성당을 장식하는 미켈란젤로의 유명한 그림들이 보여주듯이 인간은 신의 이미지를 따라 만들어졌다고 한다. 김대수의 작품에서 자연은 인간에 예속되지 않는다. 그의 작품들에서 인간은 주인이자 소유자로 나타나지 않는다. 나는 차라리 그곳에서 인간이 자연화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이러한 자연화는 『Colors of the Bamboo』로 부터『Trees from the People』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모티프가 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자연화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실제로 자연(nature) 안에 나의 본성(my nature)이 있고 나의 본성 안에도 자연이 있다. ● 이 운동은 단지 이미지들 속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닌, 각 작품의 이미지와 제목 사이의 관계를 지배하는 상징 속에서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은 단지 가지들이 얽혀 있는 나무가 「crazy woman」으로 둔갑했거나 작은 나무숲이 인간군상의 상징이 되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관점을 역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나무는 더 이상 나무만이 아니다. 차라리 우리가 여기서 보는 것이 이 「white man」이며 이것이 또한 나무이기도 한 것이다. 사람이 곧 자신 만큼이나 자연스러운 나무의 이미지를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사람이 자연의 일부인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제 더 이상 나무보다 더 높이 있거나 그것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다. 포르투갈의 시인 페르난도 페소아(Fernando Pessoa) 가 내 마음이 호수이고, 내 허파는 숲이 아닌지 자문한 것처럼 김대수에 의하면 우리 영혼 자체가 「white paradise」가 된 것이다. 이 백색은 또한 모든 색의 모태이자 예술가의 고향을 지시한다. 반대로 나무들과 풍경들, 동물들은 인간에 접속되어 있다. 우리가 그것들을 바라보듯이 그것들도 우리를 바라본다. 우리가 자연적인 것만큼이나 그것들은 인간적이다. 우리는 여기서 페소아의 주요 작품인 『비평안의 서(非平安의 書, The Book of Intranquillity)』를 기꺼이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높이 솟은 풀들 위로 /놀란 눈들이 그런 것처럼 /외로운 해바라기들은 /입을 크게 벌린 채로 우리를 응시하였다.' 그러므로 바로 이러한 상호접속, 이러한 소통가능성은 동양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서양에서 나오는 것도 아닌, 동서양을 넘나들며 여행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자연을 인간 속에 그리고 인간을 자연 속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김대수_sky2004132_젤라틴 실버 프린트_120×220cm_2004


김대수_sky2004131_젤라틴 실버 프린트_41×54.8cm_2004


이제 삼부작의 마지막 작품을 열어보자. 이것은 노자의 『도덕경』에서처럼 우리를 땅에서 하늘로 여행 시킨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단순한 질문을 하려고 한다. 이 여행은 순환적인가? 우리가 땅 속에서 하늘을 발견한 것처럼 하늘 속에서 땅을 재발견해야 할까? 그렇다면 어느 정도까지? 그리고 여기서도 역시 접속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인간인가? 그렇다면 어느 정도까지? 우리는 하늘로부터 인간을 거쳐 되돌아올 수 있을까? 마치 우리가 인간 덕분에 땅을 떠날 수 있었던 것처럼? ● 우선 이 여행은 의도적으로 모든 것을 지우고자 한다. 문제는 하늘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의심할 여지 없는 김대수만의 독창성이 있다. 그는 자신의 예술적 모든 국면을 이용한다. 우리는 영화에서처럼 사진이, 말하자면, 작품의 세 번째 눈을 드러내 준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기술의 눈이다. 하나의 그림은 화가에 의해 그려진다. 그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체험을 표현한다. 그러나 사진은 기술적 도구의 사용에 의해 비인격화되고 객관화 된다. 끌리셰(cliché)는 이와 같이 도구로부터 유래한다.



김대수_sms1998101_젤라틴 실버 프린트_120×55cm_1998


김대수_sms1999109_젤라틴 실버 프린트_120×80cm_1999


그러나 끌리셰 안에 지각적이고 주관적인 유희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유희, 이 소실선들 (vantage points)을 통해 우리는 관찰자와 관찰된 것을 잇는 표상의 관계를 파악한다. 작가의 두 번째 작품집에서 「lady kyo」라는 제목의 사진이 바로 그러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이러한 표상 관계는 상당히 드물다. 예를 들면 「countless grain」에 등장하는 나무와 열매들은 풍경 속의 대상인지 아니면 풍경 자체인지 알기 어렵다. 따라서 나무는 대상인 동시에 그것이 나타난 틀이나 공간이기도 하다. 나무는 단지 하늘이라는 배경 위에 있는 형태가 아니다. 그리고 이를 인간화 할 경우에는 더욱 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를 들면 「back to her」에서 나무들이 절단되는 공간은 동시에 한 여자의 육체를 그리고 있다. 이 점에서 김대수의 작품을 『루체른 근처 공원(Park bei Luzern)』이나 『신밧드의 항해(Sindbad der Seefahrer)』같은 파울 클레(Paul Klee)의 몇 몇 작품들에 비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무언가가 배경과 형상 사이에, 또는 표면과 깊이 사이에 존재하는 전통적 대립들을 이미 넘어서서 작동하고 있다. 이로써 그의 작품은 더 이상'가시적인 것을 재현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게 된다. ● 그러나 「하늘」 연작에서는 이보다 더 특별하게'가시화하는'방식이 드러나 있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대상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대상들은 구름들이다. 그들은 흰 것일 수도, 회색빛 일수도, 색깔을 띤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구름은 다른 것들과 똑 같은 대상은 아니다. 그것은 우선 요소들로 분해할 수 없고 뉴튼 역학의 법칙들을 전혀 따르지 않는 복잡하고 유연하며 다양한 형상을 가진 대상이다. 노르베르트 비너(Norbert Wiener) 가 자신의 유명한 저서 『사이버네틱스』의 서두에 묘사한 구름에 대한 과학적 서술은 이 관점을 이해하는데 유의미한 도움을 준다. 그에 따르면 어떤 의미에서 구름은 하늘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는 하늘 자체가 흐리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다음에 하늘이 더 깨끗해질수록 우리는 이 대상들을 덜 보게 된다. 그때 우리는 푸른 하늘과 햇빛 사이에서 색깔, 색의 대조만을 보게 된다. 그러나 구름이 있건 없건 간에, 번개불의 불연속적 형상들이 있건 없건 간에, 구름 위에 새들이 있건 없건 간에, 이 이미지들에는 어떠한 소실선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사진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며 작품에서 완전히 사라진 관찰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사진은 더 이상 세계의 표상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이다. 순수한 색깔로 향해 감에 따라 점점 더 정화되는 세계이다.



김대수_trs2011103_젤라틴 실버 프린트_41×54.8cm_2011


김대수_trw2005646_젤라틴 실버 프린트_60×120cm_2005


이와 동시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하자면 색깔은 결코 완전히 순수한 것이 못 된다. 공이 거기에 언제나 거주한다. 하늘의 푸른 색과 오렌지색의 태양빛 사이에도 최소한의 대조가 있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 최소한이다. 번개의 얼룩무늬들은 우리에게 그다지 낯설지 않은 무한으로부터 그리고 우리가 거기 살고 있는 바로 그 무한으로부터 하늘을 분노하게 하고 우리를 바라본다. 앙드레 브르똥(André Breton)은 『나지아(Nadja)』에서 나는 누구인가? 라고 묻는다. 이 질문은 내가 누구에게 사로잡혀 있는지를 아는 문제로 되돌아온다고 그는 대답한다. 김대수의 멋진 하늘들은 점차로 인간에 의해 사로잡히는 듯하다. 그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아마도 무감동(impassible)을 향해 더 멀리 나아가게 해주는 것 같다. 즉 불교적이고 도가적인 무위(inactivity)를 향해서 말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인간의 척도로 본 신들이다. 인간이 이러한 신들에게 더 이상 낯선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말이다. 그것들은 동양적인 것 속에 거주하는 서양적 특징과 같다. 이러한 서양적 특징에 언제나 약간의 동양적인 것이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말이다. ● 이 마지막 요소에 대해 덧붙이자면 그것은 소용돌이(vortex)이다. 어떤 끌리셰(cliché)들에서 하늘의 불은 소용돌이로 변한다. 김대수에게 고유한 이미지배치(cadrage)에서 이 과도한 소용돌이는 이따금 사진의 영역을 넘쳐난다. 그리고 여기서 갑자기 나무들이 솟아난다. 우리는 사진작가의 눈이 없이도 거기에 있다. 마치 기술적 도구라는 세 번째 눈으로부터 유래하는 우주 생성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이 비인격적 이야기는 물론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방향에서 이 이야기는 점차 인간적 기술의 산물을 관통한다. 그것은 인공이 재구성한 자연이다. 게다가 이 기술은 아마도 위협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기술적 인간성 속에서 어떤 비인간성을 발견하기 위해 너무 멀리 갈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서울 구도시의 궁전들을 신도시 남쪽 지역의 과도한 탑들과 공존하게 하는 바로 그 비인간성이다. 우리가 환기하는 소용돌이는 단지 놀라운 것이 아니라 걱정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를 사물들의 극성(polarity)으로 되돌려 보낸다. 이 극성은 매 순간 역전될 수 있다. 선은 악으로, 인간적인 것은 비인간적인 것으로 역전될 수 있다. 그러므로 노자시대와는 반대로 오늘날 책임의 주체는 바로 인간인 것이다. ■ 폴 앙투안 미켈(번역_황수영)



Vol.20170309a | 김대수展 / KIMDAESOO / 金大洙 / photography





지난 2월3일 강남사거리의 미진프라자 22층에 자리한 ‘스페이스22’(02-3469-0822)를 찾았다.

좀 늦어 열림식은 끝난 후였고, 삼삼오오 모여 음식을 먹거나 사진들을 보고 있었다.

주인공 안성용씨를 비롯하여 정진호, 이규상, 엄상빈, 김문호, 성남훈, 이갑철, 고정남, 조성기, 이 민,

곽윤섭, 신현림, 이주영, 안미숙, 정영신, 이은숙, 오윤택, 차재훈, 손진국씨 등 많은 분을 만날 수 있었다.


난 안성용씨를 잘 모른다. 단지 그 말 많던 최민식사진상 때문에 이름 석자를 알게 된 것이다,

사진도 인터넷에 뜬 두 사진가의 출품사진만 보았을 뿐이다.

수상자 최광호씨의 사진과 밀려난 안성용의 사진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흥분 했던 것은

최민식선생의 인간을 향한 철학이 상의 기준에 배제되었다는 점과 고질적인 갑질에 대한 분노였다,

여지 것 끼리끼리 나누어 먹어 온 사진판의 상이란 게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니지만,

아직까지 사진계의 더러운 풍토가 변하지 않고, 젊은 사진가들의 앞길을 막는 걸, 그냥 볼 수 없었다.






나에게 카메라를 들게 했던 최민식선생을 우습게 보는 모멸감도 작용했겠지만,

사진판의 더러운 갑 질을 이번 기회에 뿌리 뽑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상이 주는 명예보다, 삼천만원이나 되는 상금에 다들 관심이 많았을 것이다.

다큐사진가들의 삶이란 하나같이 빈궁하기 그지없으니, 누군들 거금을 탐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돈을 걸고 작품 가치를 판단한다는 것도 캐캐 묵은 일이지만,

얄팍한 논리를 앞 세워 칼을 휘두르는 꼴 자체가 웃기는 짜장면이었다.

사진의 우열에서 게임이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은, 한 작가가 그 곳에 집착해 온 세월의 두께였다.

더구나 공모한 사진이 다큐멘터리사진이 아니던가. 잘 찍고 못 찍은 문제는 그 다음의 문제였다.

행사장에 몇 번 들려 찍은 사진과 4반세기를 지켜 본 사진과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는가?






안성용씨는 특정지역을 찍었지만, 그 곳에 사람이 없었다면 긴 세월동안 찍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다큐멘터리사진은 사람이 우선이 아니던가?

단지 따뜻한 정감이 감도는 인간애는 배제되었지만, 사진에 드러난 사람을 통해 뒤틀린 삶의 반성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안성용씨는 산업사회에 대한 문명비판이라거나 철학적 성찰,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라는 점을 작업노트에 밝혔지만,

그 보다는 그 지역에 대한 각별한 연정을 품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한 지역에 그토록 집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 찍어놓은 포항 송도 사진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 많은 사진 속에 선택된 사진들을 보면

하나같이 을씨년스러운 바다풍경이거나 아이러니하게 긴장감이 감도는 사진만 골라냈다.

마치 사실과 허구, 사진과 예술의 경계점을 보는 듯하다.






그의 사진에는 변해가는 포항 송도에 대한 깊은 연민의 정이 베어있었다.

아마 인간성 상실을 비판하는 것 같다.

이 전시는 24일까지 열리고, 10일 오후4시에는 작가와의 만남도 있다.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하는 눈빛사진가선 안성용의 '포항 송도'시진집도 출판되었다.
가격은 12,000원이다.




사진, 글 / 조문호















































[브레인 미디어 / 스크랩]

 

브레송 기획전 : 사진인을 찿아서 12 / 조문호


사진작가 조문호는 사진보다 사람을 더 좋아한다. 그래서 그 자신이 사진가로서 자격이 있는지도 의심스럽다고 말한다. 게다가 그는 주로 아는 사람을 찍어왔다. 이런 작업이 사회 전체를 조망하기보다 개인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겠다고 그는 생각한다.

 

 

 

▲ 조문호, 인사동사람들(천상병),1983.

 

하지만 그에게는 그 사람을 모르면 제대로 찍을 수 없다는 오래된 고정관념이 뿌리박혀 있다. 그는 찍고자 하는 대상과 함께 눌러 붙어 살며 찍어왔다. 그들을 알려면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서울 인사동 예술가들을 찍을 때 조문호 작가는 인사동의 허름한 건물 옥탑방을 얻어 살았다. 

 

▲ 조문호, 청량리588, 1985.

 

 

성노동자들을 찍을 때는 윤락가로 들어갔으며, 두메산골 사람들을 찍으려 정선 귤암리로 이주하기도 했다. 이렇게 얻은 조문호의 사진은 어떤 것일까? 사진비평가 이광수 부산외대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조문호 사진이 다른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의 사진과 가장 다른 점은 무엇일까? 아마 이구동성으로, ‘따뜻하다라고 하지 않을까? 청량리 588은 그 따뜻함이 가장 잘 드러난, 사진가 조문호의 첫 작품이자 최고의 작품이다. 청량리 588은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인 1983년부터 1988년까지 그곳에서 아예 눌러 붙어 살면서 작업한 서울시 전농동 홍등가에 대한 기록이다. 몸 파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인데도, 사진을 찬찬히 보고 있노라면 느낌이 아련해진다. 언젠가 만난 적 있었던 듯 한, 그 아련한 우리들의 과거 그 시절에 내 친구였고 내 누이였던 그 사람들이 떠오른다. 이내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 청량리 588 안에서 사진가 조문호는 그 여인들의 몸 파는 행위를 보지 않았고 그 시공간 속에 살던 사람을 보았기 때문이다. 사진가가 따뜻해서가 아니고 그에게 사진을 찍히는 그 대상들이 따뜻한 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따뜻해진 것은 사진가가 그들을 사람으로 대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따뜻한 사진은 사람과 사람 사이가 얼마나 메워지느냐에 달려 있다. 그것은 돈으로도 힘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의 마음을 사는 것, 그것밖에 없다. 그래서 사진가 조문호의 사진에는 겉모습이 찍히는 것이 아니고, 속마음이 찍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독자들은 그 마음을 보고서 감동을 받는 것이다.” 


 

▲ 조문호, 두메산골사람들, 2000.

 

 

조문호 작가는 올 추석 무렵 홈리스들이 사는 서울 동자동 쪽방촌으로 들어갔다. 그가 찍는 사람들은 모두가 권력과 재력에 밀려 난 서민들뿐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일부러 사회적 약자들만 찾은 것은 아니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더 순수하고 인정이 많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돈이 사람을 망치는 것을 일찍부터 보아왔기 때문이다.”

 

이런 생활을 그는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스스로 택한 작업을 한 번도 힘들다거나 후회한 적은 없다. 평소 일로 생각하지 않고 놀이로 여겼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힘들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일하기 싫어지기 때문이다.”

 

▲ 조문호, 동자동 사람들, 2016.

 

하지만 그 또한 가장이기에 가족에게는 미안함이 남는다.

 

그들의 삶을 체험하지 않고는 제대로 찍을 수 없다는 오랜 고집을 따랐지만, 한 가정을 지켜가기엔 어려움이 많았다.”

 

그는 자신의 사진이 고고한 예술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사회의 한 기록으로 충실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족하고 즐기면 그만이다. 단지 그 가치 판단은 먼 후대에 맡길 뿐이다. 이 약자들의 작은 기록이 보석처럼 빛나는 세월이 분명 올 것이라는 한 가닥 기대가 카메라를 놓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조문호 작가의 사진 세계를 보여주는 전시회가 열린다.

 

 20161월부터 12월까지 열 두 차례에 걸쳐 전시된 사진인 찾아서브레송 기획전 마지막 작가로 선정된 조문호의 '人本' 사진이 “‘사람이다조문호 이라는 제목으로 10()부터 20()까지 서울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린다 이 사진전은 조문호 작가의 전 작품을 골고루 보여주어 그의 사진 세계를 조명한다.

 

이 기획전은 장르도 초월하고, 경계도 허물고, 패거리도 없고 갑과 을의 관계도 없는 대동의 사진 세계에서 이 땅의 숨겨진 고수를 찾는 놀이이다.”

 

■ 전시개요

브레송 기획전 : 사진인을 찿아서 12 / 조문호

전시제목 : “사람이다조문호

전시일시 : 20161210()- 1220()

전시장소 : 갤러리 브레송 (충무로) 02-2269-2613

개막일시 : 20161210() 오후5


 

[브레인 미디어] 글. 정유철 기자 npns@naver.com   사진. 조문호

 

 

 

 

 


‘On the Road’


사진가 김문호씨의 ‘성시점경(盛市點景)’전이 지난 21일 오후6시 30분 ‘갤러리 브레송’에서 개막되었다.

개막식에는 사진가 김문호씨를 비롯하여 비평가 이광수교수, 김남진 관장, 눈빛출판사 이규상대표, 사진가 엄상빈,

강제욱, 이한구, 남 준, 곽명우, 윤길중, 정영신, 김 원, 한금선, 박병문, 이석필, 이주영, 아리미, 김자손씨 등 많은

사진가들이 모여 들었고, 미술평론가 곽대원씨와 행위예술가 타이거백의 모습도 보였다.

우리나라에 사진가들이 많지만, 김문호씨 처럼 깊이 생각하며 작업하는 다큐 사진가는 그리 흔치않다.

이십여 년 전에 ‘사진집단 사실’ 동인으로 함께 할 때부터 그의 사진 작업에 대한 진지함은 알고 있었지만,

작년에 열었던 ‘wasteland’전에서 결정적인 감명을 받은 것이다,

그의 사진들을 보면 문명비판에 대한 시각이 압도적이다,
그가 발표했던 ‘On the Road’의 사유는 대상에 대한 그의 고민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의 변혁에 눈 돌릴 때, 그는 자신의 일상을 성찰한 것이다.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현대문명의 비정함을 텅 빈 도로와 자동차 그리고 지하철을 기다리는 직장인들의 모습으로,

현대 문명에 물들어가는 도시인들의 일상을 들추어 낸 것이었다.

한 때 찍었던 초상 사진들이 인간에 대한 애정의 눈길이었다면 ‘온더 로드’는 인간이 만든 문명에 대한 사유로 넓혀졌고,

그 다음에 보여 준 ‘Shadow’에서 제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는 다큐멘터리 사진의 객관적 사실을 주관적 사실로 바꾼 대표적인 사진가다.

지금까지 이어져 온 사진가 김문호씨의 관심적 대상은 무엇을 찍느냐가 아니고, 사실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로 점철된다.

그가 다큐멘터리 사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이미지를 만드는 결정적 순간이나 미학적 형상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기는 정신이다.

사회와 역사에 대한 고민이나 사유가 그만큼 깊은 사진가를 여지 것 별로 보지 못했다,

그런 우리나라 대표적 사진가가 변방으로 밀려다니다, 이제 사 조명 받는 우리나라 사진판의 현실이 너무 한심스럽다.

어쩌면 더러운 사진판에 휩쓸리지 않았기에 그가 온전히 살아남은 게 아닌가 생각된다,

나의 부족한 식견으로는 아무리 나발 불어도 사족에 불과해,

정확하게 김문호씨의 사진을 읽어 낸 사진비평가 이광수교수의 평으로 못 다한 이야기를 대체한다,

“인간이 소외된 도시 풍경, 인간이 사라져버린 현대 문명, 그 위에서 사진은 더 이상 객관성을 담보하는 다큐멘터리로 존재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진가 김문호의 인간과 문명에 대한 사진 담론이다. 2015년 전시한 <wasteland> 또한 마찬가지다. 인간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는 이미지로 말하는 인간에 대한 담론. 인간을 정면으로 응시하지도, 그것을 이미지로도 담을 수도 없게 되어버린 세상. 그런 문명사적 맥락에서 사진가 김문호는 사진이 사실에 대한 사유 재현을 위한 매체로서 매우 적확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진가 김문호는 이번에는 도시의 기호화 된 상징에 주목한다. 미완성작 <인더시티>는 특별한 내러티브로 구성되지 않을 것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그렇지만 또 다시 사실과 사유의 고민을 이끌어낼 수 있는 표상의 이미지를 담아내는 중이다. 사각형, 오각형, 육각형의 건물들이 서서 만들어내는 풍경, 그것은 사실이 아니지만 이미 우리에게는 사실로 기호화 되어 존재한다. 아파트는 거대한 산 앞에 자리하여 너무나 떳떳하게 자연의 풍경을 바꾸어버리면서 그것이 자연의 위치에 서버렸다. 광고판에 그려진 이미지는 비실재지만, 그것보다 더 실재인 것은 없다. 모든 것이 다 획일화 되어 버린 판타지의 세계, 사진가 김문호는 이 시대 다큐멘터리 사진가가 천착해야 할 과제를 여기에 두는 중이다."


30일까지 이어지는, 이 전시는 사진인이라면 꼭 한 번 보아야 할 전시다.

장애인 가족사진 2005


'wasteland' 팽목항2015


'wasteland' 매향리2015


'shadow'2013-2015

'인더시티'2013-2016


그런데, 김문호씨 전시에 들려 큰 낭패를 당했다.


김남진 관장과의 오래 전 약속을 이행하지 못한 죄로 ‘브레송’ 가기를 꺼려했지만,

김문호씨는 워낙 좋아하는 사진가라 들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날 발목 잡힌 것이다.

‘사진가를 찿아서’란 브레송 기획전 마지막 주자로 정했다며 여러 사람 앞에서 공표해 버린 것이다.


여지 것 사양해 온 것은 쟁쟁한 젊은 사진가들도 많은데, 늙은이가 끼어 더는 것도 그렇지만, 마음 편히 사진전을 열 형편이 아니었다.

더구나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보름정도 남겨두고 결정한 것은 무리였다. 

전시비용도 비용이지만, 전 작품을 보여 주는 게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있는 사진으로 전시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옛날 필름을 스캔 받아 수정할 일이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죄 없는 정영신씨가 모든 어려움을 뒤집어쓰게 되었는데,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동자동에 할 일도 많은데,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낭패를 당하는지 모르겠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 날 구멍이 있다’ 듯이, 한 번 최선을 다해 보는 수밖에 없다.
오는 12월 10일이 마지막 매 맞는 날이니, 부디 오셔서 힘껏 두들겨 주십시요,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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