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두 리듬 Two rhythm towards the reality

사토 히도시_김영길 2인展

2014_0723 ▶ 2014_0729

 

 

초대일시 / 2014_0724_목요일_05:00pm

후원 / 디자인더블유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나우GALLERY NOW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39(관훈동 192-13번지) 성지빌딩 3층

Tel. +82.2.725.2930

www.gallery-now.com

 

『고요한 두 리듬』전은 자신의 문제, 사회의 문제, 시대의 문제를 작업자의 시각 언어로 표현하려는 사토히도시와 김영길 두 작가의 전시입니다. 우리 삶에는 자연 언어로는 표현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글로, 음악으로, 그리고 이미지로 대체되기도 합니다. 현대에 이르러 이미지는 일종의 잠재적인 언어로써 장면의 정확한 재현보다는 그것으로부터 발산되는 정서에 집중된다고 보여 지며, 그런 의미에서 이미지는 매우 복합적인 명상과도 같다고 생각됩니다. 이번 작가들에게 사진이란 존재의 본질을 확인하고 인식하는 과정입니다. 그들은 사물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과 사유를 통해 현재와 나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입니다.

 

김영길_DOL#02_피그먼트 프린트_60×90cm_2014

김영길_DOL#03_피그먼트 프린트_60×90cm_2014

Hitoshi SATOH_Season Natsui 16_C 프린트_60×90cm_2012

Hitoshi SATOH_Season Natsui 14_C 프린트_60×90cm_2012
 

사토 히도시는 "나츠이의 사계절"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고향에서 느껴지는 변화의 모습은 작가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표현된 이미지는 풍경의 변화를 넘어 스스로 변화된 작가 자신의 이미지입니다. 또한 김영길의 "돌"은 자신이 바라보는 사회와 시대의 문제를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차원에서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보이고 보여 지는 작은 이미지의 변화의 메시지, 변형된 불확정성을 통한 현재의 모습, 작가 자신은 시대를 투영하는 이미지의 변화된 모습을 이번 작업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 현실을 향한 『고요한 두 리듬』전, 이번 두 작가의 이미지에서 함축과 은유, 비움의 여백, 여운과 울림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통하여 현대사진 고유의 정신적 미감을 감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대상의 자연에 대한 관찰, 일상의 현대를 바라보는 애정의 시선, 전통적 표현에서 나타나는 통찰력 있는 풍부한 감성을 읽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현실을 향한 두 작가의 고요한 리듬의 전시는 이러한 점에서 이미지를 통한 집합 점을 보여주는 전시가 될 것입니다. ■ 김영길

 

 

Vol.20140723f | 고요한 두 리듬 Two rhythm towards the reality-사토 히도시_김영길 2인展

 


 

박병문씨와 그의 아버지.


‘아버지는 광부’ 사진전 연 박병문씨
태백 광부 부친 일상 다큐사진으로
탄광기록 15년… 작년 최민식상 수상
‘나눔의 집’ 위안부 할머니와 작업도
“그분들 순수한 삶 현장을 담고싶어”


박병문의 사진전 <아버지는 광부였다>가 23일부터 서울 인사동 경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개막에 맞춰 같은 제목의 사진집도 냈다. 개막식에서 박병문(55·사진 왼쪽)씨를 만났다. 그는 광부 연작으로 지난해 ‘최민식 사진상’ 특별부문 대상을 받았는데, 이번 사진전에는 당시에 공개되지 않았던 사진이 대거 포함되어 완성도가 한결 높아졌다. 사진전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박 작가의 부친 박원식(85)씨는 1960년대부터 태백 장성광업소에서 일한 광부였고, 이날 곱게 한복을 입고 아들의 전시 개막을 지켜봤다. 박 작가는 개막식 인사에서 “다큐멘터리사진가로서 무거운 첫발을 가볍게 내디딘다. 저로서는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란 탄광의 일상이었지만 탄광을 촬영하여 오늘 이곳에서 전시를 하게 되는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며 “이번 사진들 덕분에 탄가루에 묻어 늘 까맣던 아빠의 힘든 얼굴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밝혀 장내를 숙연하게 했다. 또 그는 “이 사진전은 오늘도 탄광에서 열심히 땀을 흘리는 광부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과 사랑하는 저의 아버지에게 바치는 것”이라고 인사를 마무리했다. 박원식씨는 아들의 전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자 “작년에는 광부들의 현장 사진으로 상을 받았다고 해서 기특하다고 생각했고 동네에 자랑도 하고 다녔다. 사진들을 보니 옛날이 기억나서 흐뭇하기 짝이 없고 ‘아드님’이 잘해줘서 내가 오히려 영광으로 생각한다. 이 사진들은 탄광에서 고생했던 사람, 지금도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의 노동에 대한 예의”라고 말했다. 탄광 작업을 하게 된 계기를 물었더니 박 작가는 “아버지가 광부였다. 어릴 때 기억으로는 아버지는 늘 대단해 보였다. 그래서 언젠가는 꼭 표출하고 싶은 이미지였다. 아버지는 광부들이 캐낸 탄을 실어 나르는 작업을 하고 그러셨는데 사고 난 이야기도 듣고 그랬다. 지금의 젊은층은 탄광을 아예 모른다. 그래서 알리고 싶었다. 예전에 은행 근무를 했는데 첫 발령지가 태백이었다. 탄광을 기록한 지는 15년쯤 되었고 낙동강 사진을 찍다가 만난 이석필 선생에게 지금도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작업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는지 물었다.


“석탄공사 관계자 및 광부들의 협조 문제가 난관이었다. 여러 번 설득해서 윗분들의 허락을 받았지만 막상 탄광에 들어가선 현지에서 일하는 분들과 친해지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래 (광부들이) 회식할 땐 같이 추렴도 하고 해서 어울렸다. 광부 얼굴의 클로즈업 사진의 경우 리얼리즘적으로 찍었다. 당사자가 ‘내 모습이 나가는 것은 상관없는데 자식들이 보면 싫어할지도 모르겠다’고 했는데 대화를 많이 나눠서 풀었고 이번 전시에도 포함시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탄광 외에 다른 작업도 한다. 그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에 대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고 있다.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나눔의 집을 지난해 7월부터 찾아가고 있다. 얘기도 하고 동영상도 직접 찍는다. 역시 할머니들과 친해지는 게 급선무였다. 처음 계기는 나눔의 집 카페에서 봉사활동을 하다가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이야길 들었다. 한참 이슈가 될 때였고 매스컴에서 거론될 무렵이었다. 그때 할머니 한 분이 돌아가셨다고 하기에 현장을 찾아갔더니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과 달랐다. 장례식장에 모인 사람들의 70%는 기자들인 것 같고 나머지는 유가족들, 정치권 쪽 인사들이더라. 마을 사람이나 시 관계자들은 안 보였다. 한마디로 말하면 정치성을 많이 띤 것 같아서 싫었다. 5년 지나고 나면 몇 분이나 살아 계실까 싶기도 하고 해서 순수하게 개인적으로 접근하기로 했다. 삶의 현장을 휴먼다큐로 담아두고 싶다”고 말했다.

한겨레 /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파리 퐁피두 센터에서 파파라치 사진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유명인들을 몰래 찍은 파파라치의 사진들 가운데는 예술성을 인정받는 사진들도 있다.
영국 다이애나 비의 수영복 사진, 미국 퍼스트 레이디였던 재클린 케네디의 사진,
모두 유명한 사진으로 파파라치가 찍은 사진이다.

파파라치는 유명인사나 연예인들을 따라다니며 그들의 사생활을 몰래 찍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인데.
이렇게 찍은 사진들 가운데는 작품성을 인정받은 유명한 작품들도 있다.
이런 사진 400점을 모아 퐁피두 센터에서 전시회를 열고 있다고 한다.

브리지트 바르도, 엘리자베스 테일러, 그리고 조지 클루니, 롤링 스톤스의 믹 제거 등 스타라면 파파라치의

카메라를 피할 수 없었다.

전시중인 한 파파라치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우리가 찍은 사진들은 신문, 잡지에는 크게 실렸지만, 전혀 우리를 아티스트로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파파라치들은 사생활 노출로 곤욕을 치른 스타들로부터 때때로 공격을 당하기도 한다.
이들 사진은 나름의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냈고, 패션계에 남긴 걸작들도 많은 것이다.

국내 사진 전시 붐… 왜? "그림보다 쉽고 부담없어 환영"

  [조선일보 / 곽아람기자]

 1883년 여름 서울 중구에 화원(畵員) 출신 김용원이 사진관을 열었다. 한반도 최초

사진관이었다. 그로부터 딱 130년. 서울 곳곳에서 사진전이 한창이다.

다음 달 1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 본관에서는 서울시가 주최하는 '시대의 초상, 초상의 시대'전이 열린다. 서울사진축제의 일환인 이 전시 키워드는 '사람'. 1920~1930년대의 초상 사진들, 유관순·한용운 등 독립투사들의 수형(受刑) 기록표 사진으로 보는 일제강점기 초상 등이 나왔다. 통의동 대림미술관은 내년 2월 23일까지 미국 사진가 라이언 맥긴리(36)의 '청춘, 그 찬란한 기록'을 연다. 25세 때 미국 휘트니미술관, 뉴욕 MoMA PS1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며 주목받은 작가다. 벌거벗은 채 달리고, 헤엄치며 마음껏 젊음을 분출하는 사진 속 인물들이 아찔하다.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선 패션 사진가 마리오 테스티노 전시가 30일까지 열리고, 서소문동 일우스페이스에서는 다음 달 24일까지 제4회 일우사진상 수상자 김태동(35) 개인전이 열린다.

라이언 맥긴리의 2004년 작 '다코타(머리카락)'. 달리는 트럭 뒤에 탄 반라(半裸) 여성 다코타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커피를 마시는 장면을 포착했다.

라이언 맥긴리의 2004년 작 '다코타(머리카락)'. 달리는 트럭 뒤에 탄 반라(半裸) 여성 다코타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커피를 마시는 장면을 포착했다. /대림미술관 제공
화랑가도 사진전이 풍성하다. 강남구 신사동 예화랑은 내달 20일까지 오상택(43) 개인전 'CLOSETS'를 연다. 옷장에 걸린 옷을 꾸준히 찍어온 작가는 얌전하면서 관능적인 순백의 드레스, 비밀이 숨겨진 듯 단정한 검정 재킷 등 '옷 사진' 34점을 선보인다. 사진 전문 화랑인 삼청동 공근혜갤러리는 그림·사진·영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을 내놓았다. 미국 사진가 그레고리 스콧(56) 개인전 'Outside the Frame'. 사진과 모니터를 결합, 미술관 의자에 앉아 그림을 감상하던 사진 속 인물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는 장면 등을 보여준다.

국내 사진전 붐의 이유는 우선 보편성과 친숙성. 서울사진축제 담당자인 정현영 서울시 주무관은 "대중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소재라고 생각해 지난 2010년부터 사진축제를 열고 있다"고 설명했다.

상업 화랑 입장에선 사진전이 불황 타개책의 일환이다. 점당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그림에 비해 사진은 유명 작가 작품도 점당 수백만원 선에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공근혜 공근혜갤러리 대표는 "가격 부담이 작기 때문에 사진 컬렉터는 20대부터 있다"고 했다. 컬렉터층 다변화를 위해 지난 6월 처음으로 사진 경매를 연 서울옥션 최윤석 이사는 "앞으로 꾸준히 사진 경매를 개최할 것"이라고 밝혔다.


Hello, I See You.

황규태展 / HWANGGYUTAE / 黃圭泰 / photography

2013_0911 ▶ 2013_1120 / 일,공휴일 휴관

 

 


황규태_길_Ed. 1/5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1960년대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40317c | 황규태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 토요일_11:00am~04:00pm / 일,공휴일 휴관


아트스페이스 J ART SPACE J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 159-3번지Tel. +82.31.712.7528

www.artspacej.com


필연성과 자의성의 경계를 넘은 황규태의 자유로움 ● 황규태 사진의 자유로움을 설명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앞뒤가 안 맞는 일이다. 말이고 설명이고를 떠난 자유로움인데 무엇을 말 하겠는가. 필자가 황규태의 자유로움을 처음 만난 것은 1998년 금호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원풍경-다큐멘트』에서였다. '사진계'라는 말 자체, 그곳을 주름 잡는 아무개, 아무개 선생이라는 말 자체에 신물이 나 있던 필자에게 절대로 양복을 안 입으며, 엄청난 일을 저질러 놓고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감이 없이 마냥 천진하기만 한 어린애 같은 황규태는 유일하게 마주 대하고 얘기를 할 수 있는 사진가로 보였다. 그 전시에서 황규태는 수면에 비치는 빛을 깊은 노출부족으로 찍어서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만든 것을 아주 큰 대형 프린트로 걸었는데, 그 모든 것을 다루는 솜씨의 근간에는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 혹은 모든 것이 다 중요하다'는 자유로움이 깔려 있었다. 한국에서 사진을 좀 한다고 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은 황규태가 유일하다. 다들 "이것은 지켜야 한다"는 식의 신주단지 모시는 태도로 사진을 하고 있는데, 그래서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필자의 25년간의 평론생활을 걸고 장담할 수 있다. ● 그런데 평론가로서 황규태가 왜 자유로운가를 설명할 수는 없다. 평론가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어떤 식으로 자유로운가만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평론가는 근원을 다루는 사람이 아니라 표면을 다루는 사람이므로. 더 정확히 말하면 지금 눈 앞에 보고 있는 표면의 매트릭스가 의미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조금만 더 정확히 말하면 설명하려 할 뿐이다. 다른 사람들의 매트릭스에 질서, 규율, 위계 따위들이 들어차 있다면 황규태의 매트릭스에는 자유로움만이 있을 뿐이다. 그 자유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다른 평론가 같으면 그의 성장과정이나 인물 됨됨이를 논하겠지만 필자는 자유는 그런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개념의 문제이다. 그 자유의 개념에 대해 하나하나 따져들어가 보자.

 

 


황규태_동무_Ed. 2/5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1960년대

우리가 가진 가장 나쁜 문화적 습관은 어떤 것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또 지금의 상태대로 꼭 그렇게 있어야 한다고 물신적으로 믿는 태도이다. 우리는 문화적 표상들을 필연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 만일 한글 자모의 조합을 뒤섞어 놓거나 수학공식에 쓰이는 기호들을 뒤섞어 놓으면 그것을 읽는 이들은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 즉 우리는 여기서 필연성(neccesity)과 자의성(contingency) 사이의 대립을 본다. 결론부터 말 하면 우리가 애지중지 모시고 있는 문화적 표상들은 전부 자의적이다. 즉 이렇게 되도 좋고 저렇게 되도 좋은데 수많은 사람들이 달려들어 열심히 노력하여 필연성의 탑을 쌓은 것이다. 그것이 서예든 사진이든 기본적으로는 다 자의적이다. 지금의 상황은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릴리푸트 사람들이 계란을 위부터 깨먹을 것이냐 아래부터 깨서 먹을 것이냐를 놓고 싸운 상황과 매우 비슷한 것이다. 문화에 대한 담론들은 겉으로는 저 작품이 더 나은가 이 작품이 더 나은가의 싸움으로 보이지만 실은 필연성과 자의성의 싸움이다. 어차피 자의적으로 정한 것인데 그것을 자의적이라고 부르는 것이 후기구조주의에서 말 하는 해체(deconstruction)이다. 해체란 뜯어서 없애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표상의 속에 어떤 뼈대가 숨어 있는지 드러내 보여준다는 말이다. 겉으로 튼튼해 보이던 표상이 사실은 겉은 허술하고 속에 뼈대를 안 보이게 숨겨 놓고 있음이 드러나면 그 표상의 정당성은 사라지고 만다. 어떤 배우가 눈물 흘리는 연기를 하도 잘 해서 모든 사람들이 깜빡 속아 넘어갔는데 알고 보니 그의 눈물은 안약 몇 방울 넣은 거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 해체의 순간이다. 표상이라는 것을 세상에 던져 놓으면 그 다음부터는 만든 사람의 손을 떠나 세상의 풍파의 처분에 놓이게 된다. 바닷가에 모래성을 쌓아놓으면 그 다음부터는 파도의 처분에 놓이듯이 말이다. 해체란 그냥 보여주기일 뿐이다. 보여주고 나면 이 세상이 알아서 폐기처분하건 다시 살려내건 할 것이다. 필연성을 해체하여 자의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 해체주의적 전략이다. 사실은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건 꼭 이래야 한다고 하던 필연성의 사슬을 풀고 실은 자의적인 것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황규태_소원_Ed. 2/5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1960년대

그런데 예술을 하는 작가란 기본적으로 해체주의자들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자신에게 부과하는 어떤 필연성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술가에게는 중력의 법칙을 포함하여, 이 세상 어떤 법도 통하지 않는다. 진정한 작가라면 표상의 필연성을 믿지 말고 자의성에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즉 자기가 만든 것이든 남이 만든 것이든 꼭 그렇게 돼야만 한다고 고집하지 말고 어떤 다른 식으로도 변 할 수 있는 유동성에 몸을 내맡겨야 할 터이다. 그러나 이 세상의 유동하는 모습에 가장 적극적으로 열려 있어야 할 예술의 형태인 사진은 가장 경직된 형태를 띠고 있다. 우리가 사진으로 찍은 모든 것들은 사진으로 찍히지 않아도 존재했을 것이며, 그것이 사라졌다고 아까워 할 것도 아닌 것이다. ● 자유로운 자의성, 그게 황규태의 사진이 즐거운 이유다. 그는 사람들이 사진에서 꼭 지켜야 한다고 믿는 것들을 다 벗어던져 버렸다. 우선 그는 프레임을 버렸다. 프레임은 사진의 포도청이다. 그 안으로 들어오면 구제 받고, 못 들어오면 망각의 바다에 빠져 영영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존 버거는 사진의 눈이 신의 눈을 닮았다고 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절대로 자신의 사진의 프레임을 자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신화화하여, 사진의 프레임에는 함부로 손대면 안 된다는 것이 한국의 사진가들이 믿는 최상의 신화이다. 사진의 프레임이 중요한 이유는 딱 하나 뿐이다. 가로 세로의 비율이 적절해서 아름답게 보일 때 뿐이다. 즉 가로와 세로의 비율이 잘 맞아서 아름다운데 프레임을 함부로 잘라서 그것을 파괴하면 안 되기 때문에 프레임을 자르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진의 아름다움이 프레임의 아름다움 밖에 없는가? 그렇지 않다. 사진에는 여러 차원의 아름다움이 있다. ● 그런데 필름 혹은 촬상소자의 비율은 카메라 회사 마다 다 달라서 36×24, 6×6, 6×7, 4×5, 8×10 등 실로 다양하다. 즉 사진의 프레임은 카메라 회사 혹은 필름 회사가 자기들 나름의 원칙에 따라 자의적으로 정한 것인데 사진가는 절대로 자르면 안 된다는 것은 우스운 얘기 아닌가? 누구든 사진의 프레임을 자를 수 있다. 그리고 사진이 처음 나왔을 때 특히 그림 그리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것은 사진의 프레임이 이 세상의 시각장을 마구 자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 사진의 프레임은 자르면 안 된다고? 서양이나 일본의 카메라 회사들이 마구 자른 프레임을 한국의 사진가는 절대로 자르면 안 된다는 것은 중국에서 공자 제사를 더 이상 안 지내는데 한국에서는 계속 지내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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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태_Pixel Tvee_Ed. 1/3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145×110cm_2011

이 세상 어떤 것에도 걸리적 거리지 않는 바람 같은 사람 황규태가 사진의 프레임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 자유로움으로부터 그는 초현실적인 이미지를 창출해냈다. 그가 1960년대에 찍은 못 살던 한국의 모습들은 전통적인 흑백사진의 구도로 돼 있었다. 거기서는 춘향이가 살던 시절의 목가적인 정취가 고전적인 구도로 살아 있었다. 이제 그 프레임을 부숴 버리자 목가적인 구도는 21세기 다운 초현실적인 이미지의 파편이 돼버렸다. 여인의 고무신은 원근감이 압축되고 톤은 날아가 버려서 더 이상 목가적이지 않다. 그 고무신의 주인에게 그 사진을 보여줘도 못 알아볼 것이다. 그것은 고무신이 아니라 픽셀일 뿐이기 때문이다. 만일 황규태가 프레임을 자르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그 고무신을 붙잡고 울고 넘는 박달재를 읊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 사진을 보고 화소수를 얘기하고 RGB를 얘기하고 USB를 얘기한다. 미래에는 그 사진을 보고 □□□□를 얘기할 것이다. 아니면 아무 말도 안 할 지도 모른다. 사실 1960년대의 고무신은 이미 화소수와 RGB와 USB를 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고무신이 꼭 고무신이어야 하는 낡고 보수적인 의식이 고무신의 해방을 막았을 뿐이다. 황규태가 프레임을 잘라서 한 일이라곤 고무신이 다른 것으로 보일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일 뿐이다. 그런데 이 쉬운 일을 하는데 50년이 걸렸다. 자유를 얻는데 걸리는 시간이 그만큼 길었던 것이다. ● 머리에 짐이 잔뜩 들은 광주리를 이고 걸어오는 모녀의 모습은 모든 디테일이 사라지고 검은 실루엣으로만 남았다. 그래서 마치 우연히 사진으로 찍혔다가 경찰에 증거로 수집되어 확대된 흉악범의 실루엣처럼 보인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사진에서는 흉악범과 천진한 모녀가 동격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착한 사람 사진은 착하고 나쁜 사람 사진은 나쁘다고 잘못 믿어왔다. 우리는 사진에 너무 많은 성격을 부여해 왔고 너무 많은 동일시를 해왔다. 사진에는 입자만, 오늘날에는 픽셀만 있는데 말이다. 그런 단순하고 분명한 사실을 깨닫는데 또 50년이 걸렸다. 도대체 우리는 왜 단순한 것을 배우는데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걸까? 오로지 황규태의 자유로움 만이 그런 사실을 깨닫는 문을 열어줄 뿐이다.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1960년대의 감각에서 21세기의 감각을 이끌어내는데 시간이 걸렸다고 할 수 있다. 이 검은 실루엣은 일면 불길해 보인다. 하지만 이 모습은 불길한 것도 길한 것도 아니다. 검으면 뭔가 불길하다고 생각하는 지나친 동일시가 우리의 눈을 흐렸기 때문에 검은 실루엣이 불길해 보이는 것이다. ● 우리가 황규태 만큼의 자유로움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는 눈 앞에 뭐가 보이면 그것이 반드시 어떤 것이라고 고착시키는 생각 때문이다. 즉 사과가 보이면 사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것은 正일 때 이미 그에 대한 反을 품고 있다. 사람들이 헤겔의 변증법을 잘못 이해하여 正이 反을 만나서 새로운 合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正은 反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正속에 反이 들어 있다가 시간이 흘러서 나타나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의 모든 표상은 그것에 반대 되는 것, 그것과 이질적인 것을 품고 있는 풍부하고 다양한 꼴을 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거기서 하나만을 본다. 어떤 것이 나비로 보이면 오로지 나비라고만 믿는 것이다. 사진이 문명사에 끼친 최대의 해악은 어떤 사물의 모습을 기록하면서 오로지 한 가지 양태로만 존재한다고 못 박아 버린 것이다. 즉 하나의 사과는 사과일 뿐이지 절대로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고 표상적으로 못 박아 버리는 것이 사진의 못된 행태인데 우리는 그것에 너무 얽매여 버렸다.

 

 


황규태_한강 Collection-그 겨울_Ed. 1/3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120×210cm_2011

이 세상 모든 것은 변한다. 그리고 영원한 것은 없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애초부터 미래에 나타날 변화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우리가 못 볼 뿐이다. 자유로운 눈으로 보면 그 변화가 보이는데 우리들 눈이 굳어 있기 때문에 못 보는 것일 뿐이다. 동일자의 철학은 어떤 사물은 오로지 동일성 즉 아이덴티티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사람이건 사물이건 국가건 그 동일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질적인 것을 배제해 버리는 것이 자기인식에 도달하는 과정이라고 가르쳤다. 요즘 시대는 그런 동일자의 철학을 믿지 않는다. 동일자 속에 타자가 숨어 있다고 믿는 시대인 것이다. 사진은 철저히 동일자의 철학에 기반한 표상방식이다. 어떤 사물이 오로지 한 가지 상태로만 존재할 수 있다고 강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진은 동일자의 타자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렌즈 앞에는 사진과는 완전히 다른 3차원의 현실과 사물이 존재해야 하며 렌즈 뒤에는 사진을 발명했지만 그것과 완전히 다른 존재인 인간이 있다. 그런 타자들과의 적대적인 만남을 잘 해소해서 생겨나는 것이 사진이다. 그 과정에서 사물의 천변만화하는 모습은 사라지고 껍질만 남은 것이 오늘날 우리가 걸작사진이라고 부르는 얄팍한 표상들이다. 사진이 예술이 되는데 결정적인 한계는 바로 그런 사물의 천변만화하는 모습은 배제해 버리고 지금 이 순간 몇백분의 일초만 보여준다는 점이다. ● 그런데 황규태의 카메라눈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는 과거 속에서 이미 미래를 봤으며 작은 것 속에서 큰 것을 보았다. 남들은 텔레비전을 보면서 드라마 주인공이 죽는다고 희노애락 하는데 그는 거기서 작디작은 현미경적 픽셀을 봤다. 그의 시선은 경계를 모르고 무한대로 뻗어나간다. 그의 눈은 강물의 출렁임에서 컴퓨터 화면상의 패턴을 읽는다. 남들은 오로지 카메라로 찍어야 사진이라고 하는데 그는 스캐너나 복사기도 카메라라고 하며 사진을 만들어낸다. 이런 자유로움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어떤 사람이 성격이나 성향이 자유로와서 어디에 묶이지 않고 멋지게 생활한다는 그런 뜻이 아니다. 자유로운 프레임이란 프레임을 멋지게 써서 남들이 찍지 않는 각도로 사진을 찍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프레임의 구속력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르게 사고하고 다루는 태도이다. 1960년대의 고무신에서 21세기의 픽셀을 보는 것, 프레임의 균형과 비례를 무시하고 완전히 새로운 이미지를 보는 것, 그리하여 자신이 찍은 사진의 정체성을 스스로 허물어뜨리는 것이 황규태의 자유로움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사진의 겉과 속을 뒤집어 입는 자유로움이다. 우리는 셔츠 하나라도 뒤집어 입으면 겉으로 레이블과 솔기가 나와서 창피하게 생각한다. 뭐든지 안과 밖의 경계는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규태에게는 그런 구분이 없다. 그의 사진에서는 앞과 뒤, 겉과 속, 큰 것과 작은 것의 경계가 없다. 문화의 필연성과 자의성을 가르는 엄격한 경계는 그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황규태_한강 Collection-Blue_Ed. 1/3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120×210cm_2011

그가 얼마나 자유로운가 하는 정도를 말 해주는 좋은 사례가 있다. 이름이 알려진 한국의 중견 이상 사진가들은 다 아류들을 거느리고 있어서 젊은 사진가의 포트폴리오를 보면 대번에 아무개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그런데 황규태를 따르는 아류는 아무도 없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의 자유로움을 흉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단순히 스타일 상의 자유로움이라면 얼마든지 흉내 낼 수 있다. 머리 스타일을 흉내 내면 되고 이름을 비슷하게 지으면 된다. 그러나 황규태의 자유로움은 근본적으로 프레임의 질서를 벗어나 있는 것이고 사진에서 정체성의 문제를 완전히 다르게 보고 있는 래디컬한 것이기 때문에 감히 아무도 흉내 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자유로움을 흉내 낼 수 없는 이유는 다른데 있다. 그의 자유로움은 겉으로 보이는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이다. 태도나 사상이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그가 이 세상에 놓여 있는 매트릭스가 자유로운 것인데 그것은 쉽게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의 자유로움이다. 호랑이가 근본적으로 지렁이와 다르게 태어났듯이, 황규태는 사진이라는 지평 위에서 근본적으로 남들과 다르게 보는 존재이다. 거기 그는 홀로 서서 본다. 즉 남들에게 오염돼지 않은 눈으로 홀로 서서 보면서 자유를 획득했다. 우리는 그 자유가 두렵다. 그러나 두려운 일에 발을 디딜 때 진정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 아닐까? ■ 이영준

Vol.20130911b | 황규태展 / HWANGGYUTAE / 黃圭泰 / photography


WOZU

클라우스 루카스展 / Claus Lucas / photography

2013_0903 ▶ 2013_0916

 

 


클라우스 루카스_wozu series 01_Edition of 3_피그먼트 프린트_190.89×150cm_2011

초대일시 / 2013_0903_화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노암갤러리NOAM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 133번지Tel. +82.2.720.2235~6

www.noamgallery.com


혼돈의 바다-부유하는 덩어리들 ● 물 속의 이미지들, 자유로움과 고요함 뒤에 또 다른 나레이션을 담고 있다. 화면을 채운 덩어리들은 덕지덕지 달라 붙어 있거나, 마치 유령처럼 특별한 활동이나 기능이 없이 물 속을 부유한다. 때로는 반인 반수와도 같이 보이는 형체들은 뒤엉키고, 분리되어 변형된 왜곡을 보인다. 이것은 비대하거나 왜소하게 마른 두 가지의 몸으로 시각적 상이함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매끈하게 정제되어 있지 않은 날 것처럼 투박하게 닮아있는 덩어리로 표현 된 형체에서 인간의 몸이라는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의식과 무의식의 혼합을 통한 새로운 대상의 출현은 낯선 가능성과 함께 혼성 된 가상성의 공간으로 다양한 상상을 유추하게 하고 새로운 긴장감을 안겨준다.

 


클라우스 루카스_wozu series 02_Edition of 3_피그먼트 프린트_150×189cm_2012

배경이 되는 물은 신화나 종교적인 관점에서 우주가 시작되기 전에 거대한 힘의 근원으로써 인식되어 '혼돈의 시대'라고 정의된다. 소극적인 부드러움과 동시에, 막강한 변형의 힘과 순수한 잠재적 가능성을 통한 무한 확장이 가능하고,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다. 과거 리바이어던(Leviathan)과 같은 거대한 바다 생물체로 표현 되기도 할 만큼, 평온함과 파괴력을 동시에 지녀 다분히 이중적이고 다중성이 있다. 이것은 마치 인간의 모습과 닮아, 물과 인체가 혼성이 될 수 있는 충분한 타당성과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클라우스 루카스_wozu series 03_Edition of 3_피그먼트 프린트_190.89×150cm_2013



작가는 그간 다소 소극적으로 특정 물체나 대상에 인간의 모습을 대리시켜, 은유적인 표현방식으로 인간의 본질에 대한 물음을 던져왔다. 그러나 신작「WOZU-why」는 실존하는 인물을 모델로 하고, 자신 또한 발가벗은 채 「WOZU-why」라는 세계에 과감히 몸을 던진다. 그가 만든 가상의 세계에서의 형상(몸)과 배경(물)의 결합에서는 구분과 차이, 대립도 없는, 도플갱어가 함께 존재하여 닮은 듯 하지만 각기 다양성을 드러낸다.

 


클라우스 루카스_wozu series 05_Edition of 3_피그먼트 프린트_190.89×150cm_2012

사진으로 자신만의 몽환적인 세계를 표현하는데 있어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결합 방식은 적합하다. 작업은 물과 신체를 주제로 원초적이며 단순 명료한 표현이다. 그러나 새로운 시각적 방법으로 유출된 그의 혼성의 세계는 아름답지 만은 않다. 독일어로 '무엇 때문에' 라는 의미로 해석되는 'WOZU'는 나약하고 불완전하여 발생되는 다양한 인간의 정신을 대변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기에 끊어낼 수 없는 운명에 대한 존재론적 고찰이기도 하다. 인간은 혼돈에서 시작 한다.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물음 또한 멈출 수 없다. 이처럼 끊임없는 질문들이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존재의 이유이자 의미가 될지도 모른다. 지금도 우리는 불완전함으로 혼돈의 세상을 부유하며 살아간다. ■ 배은혜

 


클라우스 루카스_wozu series 06_Edition of 3_피그먼트 프린트_97.295×239.49cm_2013

물 속에 내 모습을 비춰보았다. 거기에는 낯선 사람이 자리하고 있었다. 내일은 그가 사라지기를 바란다. ■ 클라우스 루카스

 


클라우스 루카스_wozu series 07_Edition of 3_피그먼트 프린트_150×203.28cm_2013

Sea of confusion – floating lumps ● Images under water, they contain another narration behind unconventionality and tranquilness. Lumps filling the screen clung to each other here and there or floating in water just like ghost without any specific activity and function. Sometimes, objects looking like half-human and half-beast show deformed distortion as they got entangled and separated. This makes audience feel visual difference with 2 bodies: one is obesity and the other is small and skinny. However, the shape expressed by rough lump roughly resembling raw material which is not purified makes it possible to predict it's a human body. Advent of a new subject through mixing with consciousness and unconsciousness makes audience infer various imaginations as a space of virtualities along with unfamiliar possibility and gives new tension to people. ● Water in the background is a source of huge power before universe was started in a viewpoint of myth and religion and it is defined as 'Era of confusion' It has passive smoothness and also infinitely extendable through huge power of change and pure potential possibility giving tremendous destructive power. This has pretty much multiple aspects since it has tranquilness and destructive power enough to be expressed as a sea creature just like Leviathan in the past. These multiple aspects, as they look like an appearance of human being, have enough feasibility and persuasive power which are mingled with water and human body. ● The author has ever been more or less passively casting questions about essence of human beings by metaphorical expression which replaced specific objects and subjects with appearance of human being. However, in his new art work 「wozu-why」, actually existing model appears, and the model becomes naked and throws its body bravely onto a world of 「wozu-why」 ● Combination with shapes (body) and background (water) in his virtual world exposes diversity although they are resembled together without distinction, difference and conflict just as doppelganger co-exists. ● But it is very primitive, simple and clarified only by simple combination with water and body through combination of digital and analogue. Sufficient visual satisfaction shows fantastic and dreamlike world. But his mixed world is not always beautiful. 'Wozu' which is interpreted as "What for" by German language means continuous ontological contemplation for human being who is under agony, weak and imperfect. ● Human beings are started from confusion. And they are destined not to stop ontological question until they reach death. Maybe, those continuous questions might be meaning of our existence in daily life. Therefore, we are still imperfect and living together floating in a world of confusion. ■ BAEEUNHYE

I reflected myself in water and there was astranger. I wish he disappeared tomorrow ■ claus lucas

Vol.20130903f | 클라우스 루카스展 / Claus Lucas / photography

                                                     -동아일보 1985.3.14일자-(동아미술제 대상 발표 및 인터뷰기사)

 

 

 

 

 

                               -조선일보 1990.2.6일자- ("전농동"사진전에 대한 인터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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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1989.6.8]

 

사진가모임 '사진집단 사실'창립

 

시대진실의 기록 고발인으로 의기투합

 

사실주의 사진만을 추구하는 사진가집단 사실 (대표 최민식)이 최근 창립모임을 갖고 정식 출범했다.

 

기존의 우리 사진계가 개인적이고 소극적인 형태로 현실을 외면한 창작행위에 머물고 있음을 비판하면서 출발한 이들은 사진은 사회현실의 진실된 기록이며 고발이어야 한다고 선언. 이 시대의 성실한 기록인이며 고발인으로서의 사진작가활동에 뜻을 같이 한 최민식 등 프리렌스 9명으로 구성되었다.

조문호, 이석필, 김문호, 안해룡, 추연공, 이용남, 김인우, 이재혁 등 3-40대 작가들이 주요맴버.

 

최민식은 인간을 주제로 26년간 작품활동을 펴 왔으며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널리 알려진 작가, 호주 '인생과 그의 감정전'에서 특별상을 수상했으며 미, 불, 일 초청 사진전 등 해외에서의 활동이 많은 사진작가다. 또 조문호는 '전농동588'라는 사창가를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이고, 추연공은 로이터통신의 프리랜서로, 이재혁은 농촌문제만 찍는 사진작가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일반적인 사회시각과 달리 소외계층의 생활상과 사회비판 고발적인 경향의 작품들을 발표하게 된다.

분기별 정기모임을 통해 회원간의 창작물을 발표, 평가하는 한편 매년 회원들의 공동작품집도 발간할 계획.

또 외국리얼리즘 사진작가 그룹과의 국제교류전도 추진할 예정이다.

 

회원들의 첫 작품발표회는 오는 10월경 가질 예정이다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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