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로 부터● 인생에서 가장 많은 집중력을 발휘했을 때가 언제였을까.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고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 가녀린 생명을 보살피고 양육하던 그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때 나의 새봄이 시작되었다. 따스한 햇살과 보드라운 봄바람으로 미소 짓기도 하고, 때로는 변덕스러운 찬바람으로 옷깃을 여미게도 했던 봄날들. 봄이 언제나 짧은 것처럼 나의 새봄도 그러했다.
이제는 누구의 돌봄이 필요치 않은 인격체로 성장했고, 자기 자신만의 방향키로 각자 다른 모습으로 인생 여정을 시작하는 아이들은 자신들의 새봄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뒤를 돌아보는 것조차 잊은 채 앞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부모 이전에 자식이었던 나 또한 그 시절 뒤돌아 부모님을 보기보다는 내 앞에 펼쳐진 세상만을 향해 나아갔다. 그렇게 부모님에게서 멀어져 가듯이 나의 아이들도 멀어져 간다. 내 인생의 새봄을 떠나보내며 가을 햇살 가득한 넓은 마당처럼 그 자리에 있어야겠다. ■정영희
Into the Picture● 카메라 속 프레임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다른 세계에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가끔은 그들의 공간과 시간을 나의 프레임으로 끌어들이기도 하며, 사진 속 프레임은 그들이 만들어 놓은 공간, 그들의 삶 속으로 한 발짝 발을 내딛기도 한다.
최경덕_사진 속 사진 #001_캔버스에 피그먼트 프린트, 바느질_56.6×85cm_2021최경덕_마음읽기_캔버스에 피그먼트 프린트, 바느질_66.6×100cm_2021최경덕_뮤직뱅크_캔버스에 피그먼트 프린트, 바느질_56.6×85cm_2021최경덕_하모니_캔버스에 피그먼트 프린트, 바느질_56.6×85cm_2021
나의 카메라는 종종 미술관에서 프레임으로부터 해방된다. 시간은 아주 천천히 흘러간다. 사람들은 작은 소리로 뭔가를 속삭이듯 재잘거린다. 딸아이가 그림 속 어딘가에서 서성인다. 순간 카메라 셔터음과 동시에 그곳의 그림과 딸과 나는 같은 공간 속, 같은 시간에 존재하고 있음을 의식하게 된다. 그러한 프레임 안과 밖을 오가며 딸과 함께하는 사진을 찍고, 종이 위로 잉크가 스며들어 사진이 출력되고, 그 위로 딸아이의 사진을 바느질할 때 비로소 나의 딸과 함께한 시간은 완성 되어진다. 예단할 수 없는 결과가 나의 손을 거쳐 가고 사진 속 사진이 완성되어 갈 즈음... 그것은 마치 종교의 의식처럼 위로로 다가온다. ■최경덕
땅마다 어머니가 다르다 - 정영신의 '어머니의 땅'을 위하여 ● "인간의 영혼이란 희생과 용기와 인내가 가능한 정신이다." (윌리엄 포크너) 정영신의 사진은 포크너의 이 아포리즘을 이렇게 번안한다. - 땅의 영혼이란 어머니의 희생과 용기와 인내가 낳은 정신이다. 이어 그의 사진은 내게 말한다. 땅마다 어머니가 다르다. 어머니마다 땅이 다르다. 땅마다 어머니 희생과 용기와 인내의 서사가 다르다. 어머니마다 땅의 노래가 다르다 그리하여 정영신은 땅마다/어머니마다 다른 사랑을 시대의 운명으로 보여준다.
정영신_대지에서 일하는 어머니(영암)_1987정영신_대지에서 일하는 어머니(진안)_1988
1980년대 후반부터 시골 오일장에서 운명의 표정을 읽어왔던 작가는 이제 장터 풍경의 내적 본질인 '어머니의 땅'으로 카메라시선을 옮겨 놓았다. 어머니들의 희생과 용기와 인내가 우리땅 영혼의 꽃으로 피어나는 곳이 장터이던 시대가 있었다. 이 땅의 땅마다 다른 영혼을 어머니마다 다른 꽃으로 피우던 시골 오일장, 그 장터가 시대의 운명을 다하도록 30여년 줄기차게 사진 작업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그는 시대 운명에게 선택받았다 하겠다. ● 오일장이 시대적 활기와 탄력을 그런대로 유지했던 1980년대, 우리 어머니들은 닷새마다 다가오는 장날이 있어 그 궁핍의 시대에도 살맛났다. 그가 온 나라 600여 곳의 오일장 운명의 표정을 포착하는 사이, 시골 오일장은 도시산업화의 물결에 밀려 하나둘씩 사라져갔다. 몇해 전 그가 연 사진전 「장날」에 나는 시 한수 올렸었지. ● 노인 한 사람이 사라지면/ 도서관 하나 사라진다는 말이 있다/ 눈은 나리는데/ 여기 얼마나 많은 도서관들이 장보따리 들고 줄지어 섰는가/ 도서관들의 눈빛이 도다리처럼 한쪽으로 쏠렸다/ 도서관들은 뭘 보고 있을까/ 뭘 기다리고 있을까/ 세상 구할 메시아? 다음 생애? 버스에 앉을 자리?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먼 섬으로 가는 통통배? 안방 아랫목? 두고 온 손주들? 떠나온 북쪽 고향?/ 눈이 나아리네♪ 깐소네 리듬타고/ 눈은 내리며 날리는데/ 춤추며 내리는데/ 희망버스는 아무래도 이 늙은 장터 버스정류장으로는 오지 않을 것 같다/ 마냥 눈은 내리는데/ 장터 하나 사라지면/ 수십 수백 도서관이 사라지고 마는데
정영신_어머니의 안뜰(강진)_1988
모든 사진은 모든 운명이 그러하듯 시대의 산물이다. 작가가 진정으로 아쉬워한 것은 하루가 다르게 퇴색하는 오일장 자체가 아니라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가는 농촌공동체의 운명이다. 농업은 기업화되더라도 지속되겠지만, 농촌공동체는 이미 소멸했다. 작가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을 강을 건넌 농촌공동체의 본명이 '고향'이다. 소설가이기도 한 작가는 장이 있는 유년의 풍경을 고향으로 향한 원초적 그리움으로 선명하게 글로 묘사하고 있다. ● ...... 집에 있는 소를 들로 끌고 나온 어머니, 내가 어렸을 적에는 소꼴을 먹이기 위해 소를 끌고 들로 나왔다. 소가 풀을 뜯어 먹는 시간에 구름과 이야기하고, 뒷산에 있는 아버지 무덤과 대화를 하다보면 어느새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갔다. 마을 앞 개울가 옆으로 가면 온갖 풀이 무성해 소 끈을 멀리 잡고, 소가 풀을 먹는 동안 땅위에 아버지 얼굴을 그리고, 한복을 곱게 입고 장에 간 엄마를 기다리다보면 어느새 해가 땅에 떨어졌다. 그때 소가 음메! 하며 아는 척하면 소를 끌고가 외양간에 넣었다 .......나락을 베고 난 논에 이삭 하나라도 떨어져 있는지 달이 환하게 뜨는 날은 온 식구가 논에 가서 벼 이삭을 주웠다. 난 검정고무신을 신고 도레미파솔라시도를 부르며 살포시 밟아가며 달빛에 비치는 논바닥을 훑으면 손 안에는 제법 나락이 쥐어져 있었다. 망태기에 가득 담겨진 이삭을 보며 온 식구의 웃음소리에 놀란 달빛은 우리동네 끝집 당골네 집을 건너 우리집 싸리문 앞에 데려다주고 홀연히 사라지곤 했다. ● 한폭의 수채화 같은 고향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기에 작가는 고향을 잃어버린 현대의 실향민에게 고향을 되찾게 해줄 방도를 끊임없이 열망했을 것이다. 불가능을 향한 열망만큼 작가혼을 불태우는 것은 다시없기에. 이 지점에서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장터사진을 스스로 재발견한다. 그간 발표한 사진은 장터풍물/풍경이 주류였는데, 이런 장터 사진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근원적 사진미학의 겉모습의 현상이었다는 걸 깨달았던 걸까. 장터를 찍으면서 부차적으로 찍었다고 생각했던 장꾼들이 장으로 나오기까지 이 땅과 한몸 되어 어울려 사는 일상의 풍경들이 근원적 사진미학의 눈을 작가의 내면 안쪽으로 열어젖힌 것이다. 그 안쪽 깊은 곳에서 '어머니의 땅'이라는 오래된 미래가 눈을 새롭게 뜨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어머니의 땅'을 기록한 사진들은 작가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본질의 문을 열어젖혔다.
정영신_어머니의 안뜰(진도)_1988
오일장은 우리 땅 고유의 고향사람들이 주연으로 출연하는 삶의 연극무대다. 그 연극을 영상화한 작가의 작품에서 남녀 출연자들은 세상살이 그대로 적절히 조화를 이뤄 맡은 역을 소화하고 있다. 하지만 고향 일상의 연극무대에 오른 출연자는 거의 여성 그러니까 어머니들이나 그의 사진에서 남자는 겉모습의 '현상'이었고, 여자는 내면에 감추어진 '본질'이었다. 이 '어머니의 땅' 사진작업 시기는 1987년에서 1990년까지다. 그때 이미 근력 있는 남정네들은 대처의 노동시장으로 빠져나간 것이다. 오일장에 등장하는 젊은 남자는 땅 파먹고 사는 그 땅의 농꾼들이 아니라 거의 직업적인 장꾼인 타지 사람이다. 작가가 장꾼들의 일상에 눈을 뜬 1980년 후반만해도 우리의 고향들은 젊었건 늙었건 어머니들이 지아비와 다 큰 자식들은 '돈 벌러' 대처로 떠나보내고 남은 어린 자식을 먹이던 '어머니의 땅'이었다. 그리운 김광석노래 그대로 작가의 나이 서른즈음인데, 거기서 자신의 성장기와 일체화 되었던 고향 전남 함평의 젊은 어머니를 자신의 자화상으로 재회하는 순간, 누구보다 작가 자신이 과거로 되돌아간 평형세계의 마법에 전율하지 않았을까..... 그 타임머신 체험은 '어머니의 땅'을 이 땅의 모든 실향민들에게 되돌아갈 수 있는 영원한 마음의 고향으로 '어머니의 땅'을 제시하자는 작가적 열망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나 또한 디지털시대의 실향민. 작가의 그 그리운 아날로그 시대의 정서에 바로 빙의되고 만다. ●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여, 여기로 오라! '어머니의 땅'으로 오라! 당신들의 고향을 되찾아 드리리다. ● 이 사진들은 제아무리 AI가 주도하는 디지털세상이 온다 해도, 어머니들이 있는 한 인간은 인간의 길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준다. 이 사진들이 소환하는 추억은 인간의 미래를 예언하고 있으므로. ● 나는 순간을 영원으로 붙잡아 놓는 예술/기술이 사진이라는 정의에 동의하지 않는다. 고정불변한다고 믿는 사진도 사실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사진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진은 보는 시선이 흐르는 시간을 따라 변하기에 변하는 시선을 따라 사진도 변 할 수밖에 없게 된다. 멀리 갈것 없이 당신의 옛 기념사진을 보라. 당신 나이 먹은 만큼 사진속의 당신은 세월을 거슬러 한해 한해 한 살씩 더 어려지고 있지 않던가. 사진미학의 진정한 가치는 불변이 아니라 이처럼 우리의 시선을 시간까지 거슬러 올라 '변화'시키는 그 흐르는 시간에 따라 사진도 변화한다는 나의 사진 상대성이론에서 찾아야 한다. ● 그의 카메라 시선은 꾸밈이 없다. 어머니의 땅만큼이나 자연스럽다. 작품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없다. 브레송이 강조하는 소위 '결정적 순간'을 기다리지도 찾지도 않는다. 그런 자연스러운 자세/태도가 피사체의 자연스러움을 이끌어내 가장 자연스런 사진이 그의 카메라 시선에서 나오게 한다. 그 '무기교의 기교'가 제대로 발휘된 정영신의 사진을 먼저 본 뒤, 애송하는 김종삼 시인의 「묵화」을 다시 소환한다. 물 먹는 소 목덜미에 /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 이 하루도 / 함께 지났다고 / 서로 발잔등 부었다고 / 서로 적막하다고 「묵화」의 풍경은 버릇이 된 내 오랜 질문도 소환한다. ● 오늘 하루를 함께 지낸 소 잔등이 더 부었을까? 할머니가 된 어머니의 하루가 더 적막했을까? 또 묻는다. 발잔등 부은 소의 적막은 어머니가 위로해 주는데, 발잔등 부은 어머니의 적막은 누가 위로해주는가? 그때 나는 듣는다. 그 오랜 질문에 정영신 사진의 답을.
정영신_어머니의 안뜰(해남군 옥천면)_1988
어머니의 땅! ● 그의 사진은 어머니와 땅과 사랑이 동의어라고 알려준다. 모든 목숨이 사랑으로 한몸된 어머니와 땅에서 나왔다고 증언한다. 어머니 사랑을 기억하듯 땅의 사랑을 기억하라 되새긴다. 그의 사진은 다른 게 아니다. 땅과 한몸된 어머니의 영혼을 감촉하게 만든다. 그 어머니 영혼의 육신인 땅을 맨발로 밟아보게 한다. 이보다 더 소중한 일이 어디 있으랴. 우리는 누구든 어머니의 자식이니, 이 사진들은 '어머니의 땅'에 그려진 우리들의 근원적인 자화상일 수 밖에. ● 1980년대 후반 해남 강진 영암 등지에서 찍었지만 1950년대 후반 경북 청도의 내 고향 마을을 보여주는 그의 사진을 보고 있으면, 남들은 곤히 잠든 한밤중에 이름 없는 어느 혹성에 패인 행성 충돌구덩이를 세고 있는 어떤 천문학자의 무용한 열정이 떠오른다. 도대체 그는 그 충돌구덩이 숫자를 세서 뭘 하겠다는걸까?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 그런 천문학자가 있듯, 사라져가는 장터와 그 장터 어머니들의 귀가길을 따라가 그 어머니의 땅을 줄곧 찍어온 사진가가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아직 구원의 희망이 남아 있다는 믿음까지 안긴다. ● 암묵지暗黙知라는 말이 있다. 경험으로 체화되었다지만 겉으로는 결코 드러나지 않는 지식 또는 지혜를 뜻한다. 이 땅 어머니들이 그 암묵지의 표상이라고 정영신의 사진은 알려준다. 결코 드러나지 않는 이 땅 어머니의 암묵지를 시간의 흐름에 덧씌워 보여주므로. 이 시점에서 정영신 사진은 꽃으로 피어난다. 아름답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꽃을 피우지 않은 어머니가 어디 있으랴 어디엔들 꽃이 피지 않으랴 어느 땅인들 자식을 꽃 피우지 않은 어머니가 있으랴 세상은 땅과 어머니와 자식 꽃이 있어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으로 돌아가며 꽃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정영신_어머니의 외출(구례)_1988
아니마Anima(칼융이 정립한 개념으로 자식 마음속에 남긴 어머니의 지대한 영향)으로서의 그의 사진이 내제 들려준 내밀한 고백이다. ● 어머니와 땅이 한 몸으로 어울려 아니마의 꽃을 피우던 그 아름다운 시간도 흘러갔다. 지금도 흘러간다. 앞으로도 흘러갈 것이다. 그렇게 흐른다 해도 시간에는 목적지가 없다. 시간은 목적지 없는 보이지 않는 공간이다. 흘러가야만 하는 이유도 없다. 시간은 도대체 어디로 왜 흐르는 걸까. 정영신의 사진은 이유 없이 목적 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사유다. 그가 파악한 '어머니의 땅'의 시간은 의미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반反 역사로서 자연 그 자체이므로. 소멸운명으로 오히려 아름다와지는 우연이 아니라 (이해나 인식을 초월한) 필연이므로. '어머니의 땅'의 시간은 발견의 대상이 아니라 사진의 기억으로 전환시킬 창조의 대상이 되므로. 그리하여 그는 유년시절 고향에서 체험한 '어머니의 땅'의 시간을 그로부터 20여년의 시간이 흐른 1980년대 후반에 이 남녘땅에서 다시 체험하며 그 시간을 누구나 되돌아갈 수 있는 고향의 갈망으로 길러낼 수 있었다. 사람이 자연과 하나 되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필연인 '어머니의 땅'의 시간! 거기가 언제 어디든 유년의 시간으로 되돌아 갈 수 없다는 필연 또한 소멸운명에 아름다움을 더해간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시간을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다면, 그 흘러가버린 시간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 불멸이 될 수 있다. 이 지점에 모든 사진가들이 품은 예술의 열망과 마찬가지로 사진가 정영신의 소명의식이 닻을 내린다. '어머니의 땅'도 모든 존재의 소멸운명을 피할 수 없지만, 정영신의 사진이 있어 그 추억의 시간은 시간이 흐를수록 시간이 흐른 만큼 오히려 더 가까이 가까이 '어머니의 땅'을 잊지 않는 가슴속으로 다가가게 되므로. ● 잘 알려진대로 이상향의 라틴어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다는 뜻이다. 유토피아가 존재할 수 없는 까닭은 이상향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차원의 언어인 때문이다. 돌아갈 수 있는 공간과는 달리 돌아갈 수 없는 시간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이상향이다. 정영신의 사진은 동심으로 뿌리내렸던 그 '어머니의 땅'의 시간이 사실은 유토피아의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그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 없기에, 그 '어머니의 땅'의 시간은 시간이 흐를수록 이상향의 절대에 가까워지며 꿈에라도 돌아가고 싶은 유토피아로 자라난다고 말해준다. 더불어 그의 사진은 놀랍게도 그 유토피아의 시간으로 되돌아갈 도리까지 알려준다. ●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 이전에 '어머니의 땅'을 기억하라고. 죽음까지 그 '어머니의 땅'에서 나왔다고. 거기가 어디든 '어머니의 땅' 유년의 기억을 놓지 않는한 당신만의 유토피아를 당신만은 놓치지 않을 수 있다고. 그 유토피아의 시간으로 되돌아갈 기억장치/메모리 칩이 바로 이 '어머니의 땅'이라고. ■ 박인식
서진아트스페이스에서 참신하고 역량 있는 작가를 발굴하고 작품활동을 지원하는 '신작작가 창작지원 공모'에 당선되어 이번 전시를 열게 되었다. 최미향 작가는 현재 홍익대학원 사진디자인학과에 재학중이다.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50대의 여성이면 누구나 한번쯤 겪고 지나가는 갱년기를 자신만의 언어로 은유적이며절제되고 압축된 상징어법으로 표현했다. 작가는 지나간 일에 대한 추체험도 아니고 미래에 대한 막연함도 아닌 자신이 직면한 현실에 대한 내용을 풀어냈다."사람들은 누구나 신체적, 심리적 변화를 크게 느끼게 되는 시기가 있다. 호르몬에 의한 신체의 급격한 변화는 심리적 괴리감을 느끼게 한다. 이 시기엔 몸과 마음의 불일치로 내적 갈등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런 변화는 누구나 한 번쯤 겪고 지나가는 과정일 것이다. 사춘기가 제2의 성을 찾아가는 시기라 한다면 갱년기는 그런 성을 상실하는 시기이다 그래서 사춘기를 조금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사실이다. 허나, 사춘기와는 반대로 제2의 성을 잃은 시기로 받아들이기에 부정적인 시선이 존재한다. 사회적인 역할과 맞물려 더욱 그러해 진다. 갱년기가 병은 아니지만 육체적인 변화로 인해 심리적으로 겪게 되는 우울, 의욕상실, 불안, 강박, 분노, 소외, 허무 등 추상적인 감정들을 사진이란 매체를 통해 담담하게 표현해 보려 한다." (최미향)■서진아트스페이스
어느 날 다가온 육체의 감옥을 직시하며● 가장 이상적인 예술은 삶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예술이 내적인, 외적인 삶의 기록이라면 사는 것과 기록하는 것이 자명하게 일치되지는 않는다. 사진 한 장 없이 수 천 년을 지내온 그동안의 인류 문명이 무색하게 기록하는 하는 삶이 일상화된 SNS시대다. 최미향의 사진 작품들은 그러한 두 갈래 길에서의 긴장을 표현한다. 자신의 삶이 담긴 작품들은 지나간 일에 대한 추체험도 아니고 미래에 대한 막연함도 아닌 자신이 직면한 현실에 대한 내용을 담는다. 그렇다고 하염없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 스타일은 아니다. 절제되고 압축된 상징어법을 구사하며 작업의 중심에 자신을 위치시킨다. 역사 인류학자 리하르트 반 뒬멘은 『개인의 발견』에서 개인의 어원에 내재된 통일성을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개인은 어원상 'in-dividuum', 즉 더 이상 나뉠 수 없는 개체를 뜻한다. 그러한 개인은 '집단에서 분리되어 나오는 개체'를 말한다. 대부분의 여성은 가족과 동일시되었기에 개인으로서의 여성은 새삼스러운 것이다. 작품 속 여성들이 사회가 바라보는 여성과 자신이 생각하는 여성 사이의 간극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극화되는 이유이다.
최미향_#오늘은 또 어떤 일이_새틴 바라타 용지에 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70×50cm_2020최미향_#변해가네_새틴 바라타 용지에 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70×50cm_2020
여성에게 50세 전후는 인생 2막이 펼쳐지는 생애주기의 시작임과 동시에 심리 생리학적으로는 갱년기와 겹친다. 육체적이자 정신적인 고통인 이유는 호르몬상의 문제 뿐 아니라 여성에 대한 사회적 시각에도 존재한다. 이번 전시는 전체적으로 진중한 분위기다. '힘든 것도 슬픈 것도 아름답게 표현'하고자 하는 작가의 작품에는 비장미가 흐른다. 군더더기 없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에 집중하는 절제된 선택들로 채워져 있다. 회색이나 검정 같은 무채색은 어둡고 묵직하며 초록이나 보라 같은 유채색 또한 수동적이며 우울한 느낌을 준다. 색감에서의 전체적인 세련됨은 느낌의 이면에 불과하다. 몸의 대표적인 부분인 얼굴 없이 무엇인가 설득력 있게 말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작가는 2대 3 비율의 프레임을 택함으로써 초상화의 기본 틀을 활용했다. 관객이 마주하는 화면에는 그 무엇이 있더라도 초상의 느낌을 주는 암묵적인 시각의 관습이 있다. 그것은 얼굴 없는 초상화도 가능함을 알려준다.
작품 속 동년배의 여자들은 작가와 다를 바 없는 동병상련을 겪고있는 이들이다. 그녀들은 특정 세대와 성별이 각인된 전형성을 가진다. 대부분 얼굴은 익명적으로 처리되었고 한사람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보편적 코드를 잡아내고자 했다. 작품들은 관객에게 차분하게 말을 걸고 있지만, 작가의 치열한 자기 응시의 장이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사는 일상 공간을 심리극의 무대로 삼는다. 작품은 독백보다는 대화적 상상력의 결과다. 각각 독립된 장면이라도 전시 전체가 같은 주제를 반향 하고 있기에 상호적으로 참조되어 읽혀진다. 사진이라는 무언극에서 사물의 역할은 크다. 얼굴 자리에 빈 거울을 놓은 충격적인 작품은 실재가 아닌 상상을 투사하는 거울을 비워 놓는다. 보여 지는 여자가 아니라 보는 여자로의 변신이 일어나기 위해 이데올로기로 점철된 상상의 무대는 치워져야 했다. 작품 속의 거울이라는 장치는 거울의 메타적 차원을 예시한다. 사빈 멜쉬오르 보네는 『거울의 역사』에서 거울은 '너 자신을 알라'의 보조자라고 말한다. 이는 모방의 수동적 거울이 아니라 변형의 능동적 거울을 강조하는 것이다. 거울은 인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이상적으로 그렇게 되어야 할 모습을 동시에 보여준다. 즉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는 언제나 거짓말쟁이이며 동시에 훌륭한 조언자인 이 반사상의 이중성을 마주해야만'(사빈 멜쉬오르 보네) 한다. 새로운 단계를 위해 벗겨져야 할 상상의 단계로서의 거울은 내면 성찰의 자리가 된다. 최미향의 작품은 사진이라는 거울로 인간-여성-자신을 상징적 해부대에 올려놓는다. 이 육체적 심리적 해부대는 잔잔하면서도 파장이 큰 서사가 짜여지는 무대가 된다. ■이선영
최미향_#나를 찾아줘_새틴 바라타 용지에 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70×50cm_2020최미향_#거울 속 나는 누구일까_새틴 바라타 용지에 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70×50cm_2021
사람들은 누구나 신체적, 심리적 변화를 크게 느끼게 되는 시기가 있다. 호르몬에 의한 신체의 급격한 변화는 심리적 괴리감을 느끼게 한다. 이 시기엔 몸과 마음의 불일치로 내적 갈등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런 변화는 누구나 한 번쯤 겪고 지나가는 과정일 것이다. 사춘기가 제2의 성을 찾아가는 시기라 한다면 갱년기는 그런 성을 상실하는 시기이다 그래서 사춘기를 조금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사실이다. 허나, 사춘기와는 반대로 제2의 성을 잃은 시기로 받아들이기에 부정적인 시선이 존재한다. 사회적인 역할과 맞물려 더욱 그러 해진다. 갱년기가 병은 아니지만 육체적인 변화로 인해 심리적으로 겪게 되는 우울, 의욕상실, 불안, 강박, 분노, 소외, 허무 등 추상적인 감정을 사진이란 매체를 통해 담담하게 표현해 보려 했다.
최미향_#왕관을 쓴 여인_새틴 바라타 용지에 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70×50cm_2021
60년대 생인 나는 졸업과 동시에 결혼하였다. 이 시대 대부분의 여성들은 일찍 결혼함으로써 한 가정의 아내, 엄마, 며느리로 저마다 사회적 역할 안에서 살아간다. 나 또한 나보다는 상대방을 위해 살아가는 인생을 택했다. 최선을 다한 삶 속에 보람도 있었지만 때론, 그 누구의 연결된 존재가 아닌 본래의 독립된 주체로서의 나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다. 신체적 변화와 함께 역할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남에 따라 복합적인 감정들이 생기게 된다. 늘 그렇듯 어제와 같은 변함없는 일상, 뭔가 조여 오는 불안감, 어느 순간 불룩 나온 배, 자식들의 빈자리를 반려견이 대신하고, 손 하나 까딱하기 싫은 무기력함을 느끼곤 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마음과 더불어 여성성 상실로 인한 왜소해진 자아를 표현하고자 했다. 많은 생각들 속에서 뚜렷이 부각되는 바람이 있다면 역할 속에서 규정되기 이전의 하나의 주체로서의 나를 찾고 싶은 것이다. 존재감을 찾고자 하는 맘은 특수한 상황에 처한 사람만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변화의 시기에 있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밟는 절차로 받아들이는 게 옳을 것이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급격한 변화의 시기에 있는 50대의 나와 나의 친구들의 이야기이다. 가장 익숙한 공간에서 자신의 몸을 낯선 사람처럼 드러내 보임으로써 스스로를 객관화시켰고, 주체이지만 마치 다른 사람인양 낯설게 함으로 거리두기를 시도한다. 부정적인 감정들이 솟아오를 수밖에 없는 시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봄으로 감정들에 함몰되지 않고 본연의 모습을 잘 바라보게 하고 싶었다. 갱년기는 커다란 변화의 시기임이 분명하다. 이 시기를 잘 극복하므로써 나 자신이 소중한 존재란 것을 인식하고 스스로를 잘 가꾸는 시간이 되어야겠다. 아울러 인생 경험을 통한 통찰력과 노년의 여유가 젊을 때의 아름다움보다 가치가 있음을 인식했으면 한다. ■최미향
진뫼의 시간● 한금선 작가의 사진 앞에서 한참 동안 서성였던 적이 있다. 이국에서 찍은 명절의 식탁 풍경이라고 했다. 식탁 위에 종횡으로 도열한 접시들은 간극을 허용하지 않은 채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식탁을 내려다보는 카메라의 시선을 따라 나도 함께 식탁을 내려다보았다. 응시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토록 촘촘한, 무뚝뚝하고 꾸밈없는, 그러나 보기만 해도 배부른 밥상이 내 허기를 채워 주는 것만 같았다. ● X선을 인체에 투과하면 우리 몸의 내부 구조를 볼 수 있다. 그때 나는 조금도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X선처럼 내 마음을 관통한 그의 사진은 드러나지 않은 내 굶주림을 포착했다. 함께 나누어 먹기 위해 마련된 거대한 식탁 사진 속에서 당시 나는 내 삶의 결핍과 만났다. 한금선의 사진은 내게 누구도 알지 못한, 어쩌면 나 자신도 알지 못한 병증을 조용하게 선고했다. 그날부터였을까. 집으로 돌아와 한금선의 사진을 찾아본 것이. 그 후로 나는 한금선의 팬이 되었다. 보면 볼수록 그의 작업이 인간 몸속을 들여다보기 위해 투과되는 X선 촬영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그의 X선은 한 사람의 몸이 아니라 한 사회의 몸을 투과하고 있었다. 드러나지 않은 숱한 질병들이 그의 사진을 통해 발견된다. 사진가는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하기 위해 보이는 것을 찍는다.
농촌이라는 명사가 우리에게 환기하는 이미지는 다양하지 않다. 동시대의 이면이거나 과거를 향한 향수. 다큐멘터리 사진가 한금선이라면, 그러니까 인간 사회의 X선을 자처하는 한금선이라면, 이면으로서의 농촌을 담았을 것이라는 예측은 사뭇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한금선의 이번 사진들은 '익숙한 농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자애롭고 목가적인 전원으로서의 농촌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왜 진뫼로 갔을까. 그가 진뫼에서 찍은 것은 무엇일까. 답을 얻기 위해 우리는 먼저 진뫼와 가까워질 필요가 있다.
한금선_산그늘 진뫼_018_젤라틴 실버 프린트_2021
전라북도 임실군 장암리에 위치한 산골 마을. 진뫼는 말에는 '긴 산'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전라도에서는 '길다'를 '질다'고 말한다. 산이 굽이쳐 흐른다는 뜻에서 진뫼라 부른다는 이야기도 있다. 굽이쳐 흐르는 강만큼 긴 산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싶다. 그런가 하면 뒷산이 길어 장산 마을이라 부른다는 얘기도 전해지는데, 역시 산이 길다는 내용에 공통점이 있다. 편하게는 질메나 진메라는 이름으로도 부르기도 한다. '뫼'를 친화적으로 부른 것일 테다. 진뫼든 장산이든, 질메든 진메든, 조금씩 다른 이름들은 하나같이 섬진강 줄기 따라 펼쳐진 소담한 이 마을이 산마을이라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그가 찍은 것은 진뫼라는 어느 '산마을'이다.
한금선_산그늘 진뫼_006_젤라틴 실버 프린트_2021
섬마을이 익숙한 데에 비해 산마을이라는 표현은 익숙하지 않다. 좀처럼 입에 잘 붙지 않는다. 틀린 표현은 아니지만 누구도 일상적으로 쓸 것 같지 않은 말이기도 하다. 산마을보다는 산골짜기가 자연스럽다. 그러고 보니 나도 진뫼를 설명하면서 가장 먼저 산골 마을이라는 표현을 썼다. 산에 있는 마을이라면 으레 산'골'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 무의식의 작용이었을 것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이라면 그저 산이 아니라 산'골'이라 해야 주변과 차단되어 있어 있는 고립된 농촌의 이미지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산마을을 산골짜기로 부르는 마음은 바깥의 시선이다. 바깥에서 바라보면 산으로 둘러서야 있다는 것은 산으로 가로막혀 있다는 뜻이니까.
한금선_산그늘 진뫼_022_젤라틴 실버 프린트_2021
그러나 한금선은 안에서 본다. 그의 사진은 안에서 찍은 사진이다. 그러므로 한금선의 진뫼 작업은 안에서 바라본 산마을 풍경이다. 잠깐. 풍경이란 말이 그의 사진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단어일까. 그가 찍은 건 풍경이 아니다. 특정한 지역의 모습을 찍은 건 사실이지만 그의 사진에 담긴 이미지는 섬진강변에 자리한 어느 마을이 아니라 그 마을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상상된 역사다. 보이지 않는 시간을 찍는다는 것은 보이는 사물이나 환경 속에서 지나온 역사를 읽는다는 것이다. 사진들은 모두 3개의 장(章)으로 구성되어 있다. 산허리 화전밭과 생산의 초상, 그리고 정월 대보름 제사다. 각각의 시간과 그 시간이 품고 있는 역사를 상상하는 지점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한금선의 사진과 만나게 된다.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것은 그의 이미지에서 비롯된, 내가 상상한 진뫼의 시간과 역사다.
한금선_산그늘 진뫼_026_젤라틴 실버 프린트_2021
'산허리 화전밭'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자연의 시간이다. 울창하다는 말로는 다 끌어안을 수 없는 광경을 바라보다 나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침묵에 그만 질리고 말았다. 한때 화전으로 일군 밭이었을 공간은 언제부터인가 인간의 발길도 손길도 닿지 않는 먼 산이 되어 큰 짐승의 포효처럼 홀로 압도적인 존재가 되었다. 불을 질러 나무를 태우고 그 자리에 밭을 일구었던 시절이 그치자 산속을 흐르는 건 오직 자연의 시간뿐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무서울 정도로 증식해 나가는 무자비한 변화를 품은 산. 화전의 기억을 안고 있는 산은 백 년 동안 살아온 인간처럼 조용히, 그러나 모든 변화를 품은 오래된 인간의 고독한 등을 닮았다. 굽은 등이 말해 주는 꼭 그만큼의 침묵을 산에게서 듣는다.
한금선_산그늘 진뫼_041_젤라틴 실버 프린트_2021
생산의 초상'은 자연의 시간과 발맞추는 인간의 시간을 기록한다. 진뫼 사람의 손에는 어김없이 수확한 작물들이 들려 있다. 가까이에서 찍은 손과 발은 그들이 들고 있는 것들과 다르지만 그들이 들고 있는 것과 구분되지 않는다. 분명 다르지만, 결코 다르지 않다. 흙을 밟고 있는 발이 아니라 흙과 닿은 발이다. 토란을 들고 있는 손이 아니라 토란과 닿은 손이다. 짚을 메고 있는 등이 아니라 짚과 하나가 된 등이다. 인간의 육체와 자연의 육체가 만나는 순간은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조우하는 가없는 노동의 시간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는 어떤 미화도 장식도 없다. 그저 담담히 흙으로 돌아갈 발과 곡식을 길러줄 흙이 조우하는 순간을 포착할 뿐이다. 자연으로서의 인간과 인간으로서의 자연이 교차하며 두 개의 시간이 뒤섞인다. 뒤섞이며 하나가 된다.
한금선_산그늘 진뫼_010_젤라틴 실버 프린트_2021
'정월대보름 제사'는 영혼의 시간이다. 인간과 자연이 서로를 내포함으로써 서로를 넘어서는 것이 바로 영혼의 시간일 것이다. 정월대보름 제사를 보름고사라 하는데, 설날이 모두의 명절이라면 보름고사는 농사짓는 사람들의 명절이다. 이날 사람들은 풍년을 상징하는 대보름달처럼 한 해가 풍요롭길 바라는 마음으로 음식을 마련해 차례를 지낸 뒤 이웃과 그것을 나눈다. 그런데 사진 속 제사상에는 상을 받는 사람이 없다. 말하자면 이 제사는 무명(無名)의 제사다. 이제는 거의 사라져 버린 이 수신 불명의 제사는 추모받을 수 없는 죽음을 기리는 종교적 의식이자 과거와 현재를 잇는 초월의 시간이다. 사제의 마음으로 '우리'의 안녕을 비는 이 시간을 찍은 장면은 그 자리에서 함께 기도하지 않은, 지금 여기 있는 우리에게까지 안녕의 능력을 나눠 주는 것 같다. 이국의 잔칫상이 산 자들을 위한 만찬이었다면 진뫼의 제사상은 죽은 자들을 위한 만찬이다. 그러나 잔칫상이든 제사상이든, 두 개의 식탁은 모두 '내어 주는' 시간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내어 주는 마음은 안에서만 볼 수 있다. ● 침묵하는 산, 부지런한 땅, 기도하는 손. 한금선이 진뫼에서 찍은 것은 바깥에서는 결코 알 수 없는 산마을의 시간이다. 산그늘이 질 때 마을 사람들의 내면에 어떤 그림자가 드리우는지, 돌림노래처럼 반복되는 매일의 일상에 어떤 영원한 것들이 깃들어 있는지, 안에서 찍는 사람만 간신히 발견할 수 있는 예외적 순간이 이번에도 내 허기를 채워 준다. 가난한 세상의 허기를 채워 준다. ■박혜진
한금선_산그늘 진뫼_030_젤라틴 실버 프린트_2021
"짚자리에서 6섯을 낳았다. 그 위에 홑치마 하나 입고 앉았으면 맘이 편해 졌다. 그러고 있으면 신랑이 지 엄니에게 조르륵 가지. 우리 아가 명은 동방생명으로 해주고, 산에서는 산신님네, 하늘에서는 일곱 칠성님네, 물에서는 용왕님네, 집에서는 성주님이여! 이렇게 불러대며 아가를 빌어준다. 7일마다 기도해주고, 7번을 해야 금줄을 거둔다. 젖도 많이 태워주고, 복도 많이 태워주고, 대롱에 물새듯이…. 그리군, 사흘만에 다시 논 밭으로 나가지. 나무 없으면 장작패고, 멍청할수록 꽤가 많아야 허고, 비탈진 언덕 밤나무 딱 묶어서 딩굴리면, 신작로로 딱 떨어진다니까!" 진뫼엄니 박덕성 ■한금선
Korea Photographers Gallery(이하 K.P 갤러리)는 한금선 사진가의 『산그늘 품은 마을 진뫼』 전시를 2021년 5월 20일부터 6월 11까지 K.P Gallery에서 개최한다. 진뫼 마을은 전북 임실 섬진강의 한 자락에 자리한 작은 마을이다. 작가는 2007년부터 2012년까지 6년에 걸쳐 때로는 그곳에 장기간 체류하면서 때로는 마을을 오가며 기록하였고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이미지 중 50여 작품을 이번 전시를 통해 소개한다. 『산그늘 품은 마을 진뫼』 전시는 작가를 닮아 문학적이고 시적이다. 작가는 전시를 통해 진뫼 사람들의 웃음과 그 사람을 기다리는 나무, 함께 호흡하는 마을과 섬진강을 이야기한다. ■KP 갤러리
다시, 집으로● 집은 우리의 삶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긴 하루를 보내고 돌아갈 수 있는 개인의 안식처이자 그 시작과 끝이 하나로 이어져 안심하며 머물 수 있는 곳, 삶의 흔적들이 몸을 이룬 그 곳은 한 사람의 고유한 존재방식입니다.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의 산과 들, 이웃과 함께 오가던 길, 집을 둘러싼 안과 밖이 서로 관계맺으며 세월을 따라 한 점에서 그 점을 둘러싼 우주로 점차 넓고 조화롭게 퍼져나갑니다. ● 우리들 대부분은 이 땅에 이어져 온 삶의 방식을 알기도 전에 현대 서구문명의 효율적이고 편리한 가치를 따라 살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들이 넘쳐나고 매일 바쁘게 쫒기는 우리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걸까요. 물질적 가치로 환산되는 집이 아닌, 우리의 본향은 어디일까요. "아침과 저녁에 수고하여 다같이 일하는 온식구가 한 상에 둘러서 먹고 마셔 여기가 우리의 낙원이라…" 오래된 찬송가의 그 시절보다 우리는 과연 안녕히 더 잘 살고 있는 걸까요. ● 전시를 준비하며 찾아간 안동의 작업실에서, 오래전 한 지면에 실린 작가의 글을 읽었습니다. 선생님께서 50대에 쓰신 『무엇을, 누구를 위해』라는 제목의 글에는, '나의 사진들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사진가로서 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하는 그의 공적인 소명의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변하지 않은 근원적인 질문,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오랜 질문이 그의 사진 속 말없는 풍경을 통해 다시 우리에게 되돌아옵니다.
선생님께서 긴 겨울을 지나 대동강 물이 녹는다는 우수 경칩에 안동 작업실의 물을 열고 사진 몇 점을 더 프린트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에게 암실은 사진가로서 가장 편안한 집입니다. 이번 전시에는 80년대 작가가 직접 인화한 초기 사진들과 바로 몇 주전 암실에서 새로 만든 프린트가 함께 있습니다. 전시를 위해 고른 사진들을 보며 언제 어디서 찍은 것인지 소소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십니다. 우리는 사진을 보지만, 이 사진들은 선생님의 발자욱이고 삶의 기억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 2021년 닻미술관의 첫 전시로 우리 땅에 닿은 빛의 기록자, 한국 현대사진의 아버지 주명덕 선생님의 『집』을 준비했습니다. 좋은 사진은 기억을 불러내고 그것을 기록한 이가 바라본 시선의 온도를 전합니다. 사진 속 집을 둘러싼 빛과 바람, 보이지 않는 공기에는 작가가 오래도록 지켜 온 이 땅과 사람에 대한 따뜻한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비록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마음만은 풍족했던 옛 삶의 모습이 담긴 그의 사진 속 『집』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주상연
작가 소개● 주명덕 (朱明德, 1940~)은 1940년 황해도에서 태어나 1947년 3·8선을 넘어 서울에 정착하였다. 경희대학교 사학과 재학 시절 아마추어 사진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작가는 1966년 개최한 개인전 '포토에세이 홀트씨 고아원'이 큰 반향을 일으키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이후 1968년 월간중앙에 입사하여 본격적으로 활동한 그는 '한국의 이방', '한국의 가족', '명시의 고향' 등 다수 연작을 선보이며 기록 사진 세계를 구축한다. 이후 한국의 자연으로 주제를 점차 확장해나가며 기록성을 넘어 한국적 이미지에 대한 그만의 시선을 작품에 담아낸다. 한국 기록 사진의 전통을 통합하는 동시에 대상을 창조적으로 해석하며 현대적 의미를 확장한 그는 한국의 독보적인 1세대 사진작가로 평가받는다.
□전시연계 프로그램강연: "주명덕의 집 - 가족 사진의 힘" 강미현 예술학 박사일시: 2021년 5월 8일 오후 2시신청 방법 및 상세 내용은 닻미술관 홈페이지를 통해 별도 공지 예정입니다.